FES-Information-Series Copyright 1998-2007 ¤ˇ by Friedrich-Ebert-Stiftung, Korea Coopera tion Office FES-Information-Series는 유럽의 통합 과정과 독일의 정치 체제 및 발전을 중심으로 독일과 유럽의 다양한 쟁 점들을 소개함으로써 해당 주제의 다양성과 상호 관련성을 부각시키고, 정책 대안에 대한 논의를 촉진할 목적 으로 발간한다. FES-Information-Series는 특정 정치 노선을 지지하지 않으며, 개별 주제들은 독일이나 유럽의 발전 추세를 관찰하고 평가할 능력을 갖춘 전문가가 집필한다. 여기에 수록된 내용은 필자들의 개인 의견이며, 프리드 리히 에베르트 재단의 공식 견해가 아님을 밝힌다. FES-Information-Series는 부정기 간행물로 프리드리히 에 베르트 재단 홈페이지(http://www.fes.or.kr)에서 전문을 내려 받을 수 있다. Copyright 1998-2007 Ⓒ by Friedrich-Ebert-Stiftung, Korea Cooperation Office 발 행 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 주한 협력 사무소 편 집 인: 베르너 캄페터, 박상희 편집위원: 김영희, 안두순, 안석교, 양민석, 이삼열, 정범구, 정현백, 최연혜(가나다 순) 주 소: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 98-5 삼환 빌딩 1101호 󰂕 110-742 Tel:(02) 745-2648/9, Fax:(02) 745-6684 e-mail: feskorea@fes.or.kr& fesrok@fes.or.kr http://www.fes.or.kr 머릿말 제가 한국에 부임해 온 지 벌써 일년이 되어 갑니다. 부임 초 제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FES-Information-Series가 발간된 지도 벌써 10여 년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리즈가 간략하고 분석적인 형태로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는 점입니다. FES-Information-Series는 독일과 유럽의 쟁점에 대한 진행 과정과 문제점을 다루며, 독일과 유럽의 경험을 한국 독자들에게 전달하려고 합니다. 지난날 몇몇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경제, 사회, 정치 전반에 걸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왕도는 없을 뿐더러 결국은 받아들여야만 하는 정책 결정에 대한 토론과 논쟁의 여지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런 과정은 다양한 이해 관계와 입장을 표현하고 결국에는 서로 절충해야만 하는 민주적인 사회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조금씩 변화하며, 특히 타협을 통한 해결안이 최상의 해결책인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이로 인해 우리는 항상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이 타협안들은 항상 새로운 토론과 의사 결정 과정의 출발점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1998년부터 2006년까지 발간된 총 83개 주제 중 이번 CD에 담긴 33개는 다양한 모자이크를 만들고 있습니다. 물론 이 내용들이 독일이나 유럽의 전반적인 상황을 알려 주지는 못하지만 독자들에게 독일과 유럽의 다양한 색채와 형태의 몇몇 모자이크 조각들을 보여 줍니다. 이 시리즈는 독일과 유럽의 정확한 모습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극제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독자들은 자신의 시각으로 각각의 조각에 색깔과 명암을 주고 그것으로 자신의 세계와 연결하는 다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FES-Information-Series가 오프라인과 인터넷에서 많은 독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는 것에 대해 무엇보다 먼저 편집 위원들과 저자들에게 저와 제 전임자들의 이름으로 감사 드립니다. 이분들 모두 독일과 유럽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뿐만 아니라 이들 국가의 현황을 잘 알고 계십니다. 이분들의 지식과 경험 없이는 이처럼 다양한 시리즈가 결코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편집 위원들에게는 이 시리즈 기획에 참여했던 것을 좋은 기억으로, 독자들에게는 여기 모아 놓은 다양한 글을 읽으면서 이 주제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2007년 6월 베르너 캄페터 Werner Kamppeter FES-Information-Series 목차 독일의 분단과 통일 1989/90년 격변기 동독 내 서독 정당의 전략과 정책 공산주의 국가를 위한 자금 통일 독일의 수도 이전 동독 이탈 주민에 대한 구서독 정부의 정책 분단기 동서독 간 교통 교류 실태와 서독의 대동독 교통 부문 지원 정책 70년대 사민/자민 연정의 신동방 ‧ 독일 정책과 정치 논쟁 독일 통일 후 동독 지역의 통신망 구축 통일 전 서독의 대동독 정책 경제와 사회보장 독일의 한부모 가족 취업모를 위한 사회 정책적 지원 독일 공적연금 제도의 개혁 추이와 기업연금 독일의“실제” 실업자수에 관한 논쟁과 실업 대책 독일 의료보험 개혁(2003)의 동향과 쟁점 독일의 장기요양보험 독일의 고령화 추세와 사회 경제적 문제 독일의 신교통 정책, 21세기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해법 정치 최근 독일 총선의 주요 논점인 단일세율(Flat rate) 개혁안 폴머 사건을 계기로 본 독일 연방의원의 부업 규정에 관한 논란 독일 내 국제 이주노동자 현황과 정책 독일의 개인정보보호 제도 독일 정치 교육의 의미 ‧ 과제 ‧ 실행 체계 독일 주둔 외국군 구성원의 법적 지위 독일의 과거 극복과 역사 교과서 통일 독일의 과거 청산 독일의 선거 제도 환경 독일의 환경 교육 독일의 재생 가능 에너지 교육 유럽연합의 대학교육 현대화 개혁 정책 독일의 학교 개혁 독일의 직업 교육 사회 난자 제공에 관한 독일의 입장 독일의 저출산과 지속 가능한 가족 정책 독일 동물보호법령을 중심으로 본 동물 보호 독일의 생명 윤리 논의 송태수 Dr. Gey 이상준 김영윤 최연혜 박형중 안두순/노영곤 김영윤 박명선 김상호 선한승 이준영 권순만 안두순 최연혜 김유찬 조현옥 강수돌 한재각 박병석 한스 위르겐 카악 김유경 정현백/송충기 박병석/정범구 이무춘 이필렬 김숙원 이병준 박덕규 신동일 김은영 김수진 신동일 2006-01 2005-07 2004-07 2003-07 2002-06 2001-01 2000-11 1998-04 2006-05 2005-04 2005-02 2004-03 2004-02 2003-08 2002-03 2005-10 2005-05 2005-01 2004-05 2004-04 2003-04 2002-04 2000-06 1998-03 2005-08 2003-02 2006-03 2001-06 1999-02 2006-02 2005-09 2005-06 2003-01 1989/1990 격변기 동독 내 서독 정당의 전략과 정책 송 태 수, 한국노동교육원 교수 2006년 1월 󰠲󰠲󰠲󰠲󰠲󰠲󰠲󰠲󰠲󰠲󰠲󰠲󰠲󰠲󰠲󰠲󰠲󰠲󰠲󰠲󰠲󰠲󰠲󰠲󰠲󰠲󰠲󰠲󰠲󰠲󰠲󰠲󰠲󰠲󰠲󰠲󰠲󰠲󰠲󰠲󰠲󰠲󰠲󰠲󰠲󰠲󰠲󰠲󰠲󰠲󰠲󰠲󰠲󰠲󰠲󰠲󰠲󰠲󰠲󰠲󰠲󰠲󰠲󰠲󰠲󰠲󰠲󰠲󰠲󰠲󰠲󰠲󰠲󰠲󰠲󰠲󰠲󰠲󰠲󰠲󰠲󰠲󰠲󰠲󰠲󰠲󰠲󰠲 1989/90년 격변기의 서독 정당은 구체적인 통일 정책 방안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동독 정당도 급변하는 상황에 대해 자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비판 세력도 마찬가지로 전혀 준비가 안 된 상 태에 있었다. 1989년 12월 말까지 서독 정당들은 동독 정당 발전 과정에 적극적인 영향을 주었다기보다는 상 대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1989년 12월 중순부터 1990년 1월 말 사이에 수많은 양자 또는 다자간 회담이 진행되면서 1월 말 2+4 회담 이 구상되어 통일 문제가 급속히 대두되고, 1990 년 3월 18일 인민의회 선거가 조기에 실시되는 등, 구동독의 상황이 숨 가쁘게 진행되면서 서독 정당들은 동독에서 형성되는 정당체계에 대한 영향력을 직접 강화하였다. 1990년 7월 1일 화폐 ․ 경제 ․ 사회 통합을 계기로 실질적인 통일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1990년 10월 3일 공식적인 통일과 1990년 12월 2일 통일 후 처음 실시되는 연방의회 일정을 앞둔 상태에 서 동서독의 두 정당 체계는 이미 단일 정당체계로 통합되어, 1990년 가을 각 정당은 통합을 위한 특별 전당대회를 연다. 이 과정은 동독 정당 체계가 서독 체계로 흡수되는 시기였다. 그 결과, 구 동독 주민의 특수한 이해관계를 대변할 정치 조직의 부재가 문제로 되어, 이후 양 지역 주민의 사 회적 통합에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였다. 구동독 주민의 2등 국민 이라는 집단의식의 형상화는 부분적으로 이에 근거를 두고 있다. 󰠲󰠲󰠲󰠲󰠲󰠲󰠲󰠲󰠲󰠲󰠲󰠲󰠲󰠲󰠲󰠲󰠲󰠲󰠲󰠲󰠲󰠲󰠲󰠲󰠲󰠲󰠲󰠲󰠲󰠲󰠲󰠲󰠲󰠲󰠲󰠲󰠲󰠲󰠲󰠲󰠲󰠲󰠲󰠲󰠲󰠲󰠲󰠲󰠲󰠲󰠲󰠲󰠲󰠲󰠲󰠲󰠲󰠲󰠲󰠲󰠲󰠲󰠲󰠲󰠲󰠲󰠲󰠲󰠲󰠲󰠲󰠲󰠲󰠲󰠲󰠲󰠲󰠲󰠲󰠲󰠲󰠲󰠲󰠲󰠲󰠲󰠲󰠲 1. 들어가는 말 FES-Information-Series 1989/90년 격변기의 서독 정당은 구체적 통일 정책 방안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동독 정당도 급변하는 상황 에 대해 자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비판 세력도 마찬가지로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에 있었다. 1989년 여름부 터 1년간의 상황은 그야말로 숨 가쁘게 진행되었다. 1990년 3월 중순의 인민의회 선거를 앞두고 서독 정당들은 동독 내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 동서독 정당 체계는 통합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동독 정당들은 통일 정책을 중심으로 다원화된 후, 서독 정당 체계와 균등화된다. 1990년 가을 동서독 정당들은 통합하여 12월 2일 첫 통일 연방의회 선거를 치렀 다. 아래에서는 1989년 말부터 1년간의 격변기 동안 서독 정당들이 동독에서 실행한 전략과 정책을 살펴본 다. 먼저 동독 내 정당 체계의 발전 과정을 검토한 후, 1990년 3월 18일 동독 인민의회 선거에서 서독 정당이 구체적으로 어떤 전략으로 대응하면서 정치적 영향력 확보와 강화의 계기를 만들었는지 살펴본다. 2. 1989/90년 격변기 동독 내 정당 체계의 발전 1989년 가을부터 1990년 통일에 이르기까지 짧은 기간에 동독 정당 체계는 비경쟁적 일당 지배 체계가 민주 적인 다원주의 체계로 전환하는 과정과 동시에 통일된 독일의 정당 체계로 단일화 하는 과정이라 하겠다. 이 과정은 양극화-다원화-균등화-통일 독일의 정당 체계 완성이라는 네 단계를 거친다. 제 1단계는 1989년 11월까지로 동독에서 사회주의통일당(SED)의 일당 지배 체제의 위기가 전면에 드러나고, 이에 대항하는 국민적 저항과 함께 제반 저항 운동이 조직되거나 새로운 정당이 등장하는 시기이다. 정치 조직 들은 민주주의적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제기된 제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전념하고 있었다. 1989 년 중반 SED가 지방 선거를 조작한 이후 미약하기만 하던 시민운동이 정치력을 확보하여 대중 동원이 가능해지 기 시작했다. 이들 저항적 시민운동과 정당들은 SED의 일당 지배를 극복한다는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무제한적 인 연합 전선을 시도, 1989년 12월 7일 원탁회의를 구성하였다. 5개 블록 정당과 반체제 단체 및 정부 대표가 참가하는 원탁회의의 소집은 사실상 2중 권력 구조의 형성을 의미했다. 제 2단계는 정당과 정치 조직이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새롭게 제기된 통일 문제에 입장 차이를 보이면서 다 원화되는 시기이다. 1989년 12월 초부터 동독 지역의 대중 시위에서는 우리는 한 민족 이라는 구호가 등장하고, 통일 과정에서 가장 해결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던 국제 관계의 매듭이 풀리고 있었다. 1989년 12월 중순부 터 90년 1월 말 사이에 승전 4국인 미 ․ 소 ․ 영 ․ 불과 동서독 간에는 수많은 양자 또는 다자간 회담이 이루어졌 으며, 이를 통해 서로 상이한 입장이 조율되었다. 마침내 1월 말 워싱턴에서 제안된 2+4 회담 구상은 독일의 FES-Information-Series 통일 행보에 결정적인 돌파구를 마련해 주었다. 외교 정책 상의 난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보임과 동시에 동독 국민들은 점점 통일을 원했고, 제도권 정치 권력의 불안정성이 가시화되었다. 조사에 따르면, 1989년 11월 하순 통일 찬성(48%) 반대(52%) 여론은 1990년 1월 하순 찬성(79%) 반대(21%)로 급변하였다. 1990년 1월 28일의 원 탁회의에서는 5월 6일로 예정되었던 인민의회 선거를 3월 18일로 앞당겨 치르기로 결의할 수밖에 없었고, 정당 정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제 3단계는 선거 일정이 3월 18일로 앞당겨짐과 동시에 서독의 정당이 동독에서 형성되는 정당 체계에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과 정책 실현을 위해 매우 적극적으로 의회선거에 직접 개입하면서부터이다. 동독의 민주화라는 과제가 통일 문제와 융합되면서 정당과 시민운동 조직들은 정치적 입장과 조직의 목적 및 활동 방식에서 점차 다원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다원화된 동독의 정당과 저항 운동 조직 들은 점차 정치력을 상실하고 서독 정당들의 영향 아래 재편 ․ 집중화되기 시작했다. 3월의 인민의회 선거에 서독의 정당들이 개입함으로써 동독의 내부 정치가 사실상 서독의 정당 정치로 변한 것이다. 동독의 인민의회 선거는 서독 정당들의 자금과 조직력, 캠페인 전략과 유명 정치인들의 명성에 의해 지배되었다. 서독 정당들이 동독의 상황 진전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 것은 동독 주민들의 통일에 대한 의지가 강해지기 시작한 것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동독 시민들의 통일에 대한 입장은 더욱 분명해져서 3월 18일 인민의회 선거는 내용 면에서 서독 마르크 를 동독으로 유입하는, 즉 화폐 통합 이 주요 이슈가 되었는데, 지지도에서 열세를 면하지 못하던 기민 ․ 기사련의 콜 수상은 선거 5주 전 화폐 통합의 필요성을 적극 주장하고, 선거 사흘 전 화폐 통합 시 동서독 마르크의 교환율 1:1을 발표하여 선거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2월 초 약 과반의 지지를 받던 사민당은 21.9%를 득표한 반면, 보수 연합 세력인 독일연합(Allianz f ü r Deutschland: AfD)은 48%의 지지를 얻어 이 후 기민 ․ 기사련은 통일 정책에서 주도권을 확보했다. 이 선거에서 민주사회당(PDS) 16.4%, 자유민주동맹 (BDF) 5.3%, 동맹 90 2.9%, 독일민주농민당 2.0%를 득표했다. 마지막 4단계는 1990년 통일 후 처음 맞는 연방의회 선거를 앞두고 구서독 정당 체계가 구동독의 정당 체 계를 흡수, 통합하여 단일한 통일 정당 체계가 만들어진 시기이다. 인민의회 선거 후 구성된 대연정 정부가 4월 12일의 연정 합의에서 서독기본법 23조에 따라 동독이 서독으로 편입되는 방식으로 통일하기로 합의하 고 5월 21일 화폐 ․ 경제 ․ 사회 통합 조약을 체결한 이후, 동서독 정당들의 통합을 위한 작업은 빠르게 진행 되었다. 1990년 8~10월 사이에 자민당, 사민당, 기민 ․ 기사련의 순서로 통합 당 대회가 열렸으며, 구동독의 당 조직 은 구서독 정당에 흡수되는 방식으로 통합되었다. 통일되기 전에 녹색당을 제외한 동서독 정당의 통일이 완결 되었다. 3. 동독 인민의회 선거- 정당별 선거 전술과 통일 정책 FES-Information-Series 3월 인민의회 선거에 서독 정당들이 적극 개입함으로써 통일 과정에서 동독의 내부 정치는 서독화 되었고 서독의 정당 정치 로 되었다. 서독의 기민 ․ 기사련, 사민당과 자민당 등 주요 정당들은 각각 동독 정당의 선거 캠페인에 참여하고 물적, 인적 자원을 적극 지원하였다. 서독 정당 출신의 유명 정치인들이 동독에 와서 대중에 게 지지를 호소하기도 하였다. 인민의회 선거는“동독 땅에서 치러진 서독의 선거”가 된 셈이다. 이러한 동독 의 서독 정당 정치화는 통일 이후 동독의 정당들이 서독의 정당들로 흡수, 통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서독의 정당들이 인민의회 선거에 직접 개입하게 된 배경으로 동독 내에 정치적 공백이 생긴 상태에서 구지배 세력과 체제 개혁 세력의 지도력 부재 문제나 동독 정당의 지원 요청을 들 수 있으나, 서독 정당들 자신의 이익과 정당 정치의 논리가 더 주요하게 작용하였다. 1) 사회민주주의당(SPD) 1989년 8월 26일 동독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창당하기 위한 계획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아래로부터 이전의 사회주의통일당(SED)과의 대화 정책에 대한 공개적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SED와의 대화정책을 고수하던 사민당 지도부는 기존의 통일 정책과 파트너에 변화를 줄 것을 요청받았다. 다른 한편, 9월 13일 시민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한 신포럼(Neues Forum)이 많은 동독 시민의 참여로 창설되자, 동독 사민당 (SDP)이 대중의 지지도 없이 세워지는 것 아니냐는 비관적 인식도 생겨났다. 이런 조건에서 10월 7일 동독 사민당의 창당 대회가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서독 사민당은 유보적 자세를 견지하면서 환영 인사를 파견하 지도 않았다가, 이틀 뒤에야 당대표 포겔(Vogel)이 동독 사회의 도덕적 발전에 기여하기를 바란다 는 연대 사를 발표하면서 조심스런 접근을 시작하였다. 서독의 당 지도부는 동독에서 여전히 음모적인 활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면서 유보적인 태도를 견지하였 다. 그렇지만 연방의회 차원에서는 주로 서독으로 망명한 저항 운동 단체 출신 인사들을 매개로, 그리고 주 의 회 차원에서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를 통해서 점진적인 관계 개선과 이질성 극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SED가 동 ․ 서독 사민당에 대해 공격적인 적대감을 보이자 서독 사민당은 오랫동안 지속해오던 교류의 우선권 을 동독 사민당으로 전환하였다. 이는 SED가 헤게모니 정당으로서의 지도적 위상을 상실함으로써 정치적 다원 화 추세가 대세로 되면서 정치권력 획득의 기회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동독 사민당은, 몇 달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나마 SED에 대한 저항과 평화 혁명 을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형 성된 시민 운동적 기반에서 나온 가치를 토대로, 자신의 독자성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에 근거해 동독 사민당 은 서독 사민당을 위계적 구조를 가진 구식 정당(old-party)이라 규정하는 반면, 자신들은 풀뿌리 민주주의 구 조와 가치를 지향하는 신식 정당(new-party)이라는 점과 구성원들이 1968년 혁명 정신과 좌파-녹색당적인 성 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들어 서독 사민당과 구분하려 하였다. 빌리 브란트와 헬무트 슈미트의 노력으로 동독 사민당이 동독 내에서 가장 안정된 정당 조직을 갖추게 되고, 1989년 12월 22일 동서독 국경의 상징이던 브란덴부르크 문이 열려 국가적 통일의 가능성이 한층 고조되자 FES-Information-Series 동서독 두 정당 간 공동 작업의 수준은 한층 높아졌고 전체 독일을 포괄하는 정책 수립을 위한 협의가 활발 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1990년 1월 동독 사민당이 당명을 서독과 동일하게 SPD로 개칭함으로써 동서독 사 민당의 관계는 새로운 단계 에 돌입하고, 서독 측 3인과 동독 측 1인으로 구성된 교류위원회를 서베를린에 설치하였다. 이 위원회에서 서독측은 동독 인민의회 선거에 직접 개입하는 방향으로 위원회를 강화해 나가 려했고, 동독 측은 독자성 유지를 위하여 서독의 원조를 자립을 위한 원조 로 규정하고 기술적 수단, 이데올 로기와 홍보 전략을 독자적으로 마련해 나갔다. 이러한 힘겨루기는 서독측의 자제로 갈등으로까지 발전하지 는 않았다. 2) 자유민주주의당(FDP) 인민의회 선거를 앞둔 자민당 지도부는 동독의 변화에서 두 가지 정책을 구사하였다. 하나는 동독 SED의 블 록 정당이던 자민당(LDPD)과의 접촉을 강화하는 것으로, 주로 호네커 정권 말기 비판적 성향이 강했던 당 하 부 조직과의 대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동독 자민당과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내부에 개혁 잠재력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동시에 SED 블록 정당이던 LDPD와의 연합으로 3월 18일 인민 의회 선거에서 자유민주주의 세력이 패배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새롭게 구성된 운동 단체가 정당으로 전환하는 것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1989년 11월에 동독 자 민당(LDPD)과 서독 자민당의 정당 대표 회담이 결렬되고 동독에서 경쟁정당으로 1990년 2월 4일 동독-자유민주 당(DDR-FDP)이 출현하자, 서독 자민당은 LDPD를 더욱 압박하기 위해서 신포럼(NF)에 참가한 일부 과학 자, 대학교수 및 학생을 중심으로 한 독일포럼당(Deutsche Forum Partei: DFP)의 창당을 주도하였다. 이로써 동독에서는 블록 정당의 결함은 LDPD의 지도부만 제거하면 세 정당을 연계해서 해결할 수 있으리 란 의식이 확산되었다. 서독의 자민당은 1990년 2월 10일 예정된 LDPD의 전당 대회를 겨냥하여 신생 정 당인 동독-자민당과 독일포럼당에 대한 막대한 지원 계획을 발표하며 LDPD 지도부를 압박하였다. 튀링엔 지역의 LDPD 산하 단체들이 동독-자민당으로 전환하자 LDPD 당수 게르라흐(Gerlach)는 당 개혁안을 발표하 고 전당 대회에서 당명을 자유민주당(LDP)으로 개칭하였다. 새로이 정비된 자유민주주의 세 정당들(DDR-FDP, LDP, DFP)은 1990년 2월 11일 새로운 정책 방향을 위한 모임을 갖고 전체 독일의 통합된 자유주의 정당 건설 을 목표로 자유민주동맹(Bund Freier Demokraten: BFD)이라는 선거 연합체를 결성하였다. 서독 자민당은 자유민주동맹의 창설과 함께 조화롭고 통일적인 선거 운동을 위해 공동 선거 전술을 확고히 하고 베를린에 핵심적 선거 전문가들을 배치하였다. 그러나 세 정당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었고, 특히 LDP는 독 자 운영을 강조하는 등 자주 일탈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좀 더 강력한 통일적 선거 운동을 위해 세 정당 대표들과 서독 자민당 지도급 인사들이 참여하는 공동조정위원회 를 결성하여 결속을 도모하였다. 서 독 자민당의 자유민주동맹에 대한 지원은 자립을 위한 원조 이상의 것이었는데, 특히 서독 자민당의 대표적 정 치인인 겐셔(Genscher) 서독 외무장관과 람스도르프(Lamsdorf) 당수의 선거 지원이 동독 유권자들에게 서독의 FES-Information-Series 지원에 대한 확신을 심어줌으로써 선거 연합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3) 기민 ․ 기사련(CDU/CSU) 서독 기민 ․ 기사련의 경우, 기존 통일 정책의 연장선에서 연방의회 수준으로 기존의 동독 정치 단체들과 접촉 을 시도하는 것은 용이하지 않았으나, 동독의 개혁 성향 단체들과 교류를 해왔던 헤센 주와 서베를린 당 차원 에서는 활발한 교류를 가질 수 있었다. 이들 주 ․ 시 차원의 서독 기민련(CDU)은 동독 내 다양한 지역 조직 과의 회동을 통해서 동독 자매 정당의 성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들에게 서독측의 지원을 받는다면 인민의회 선거에서 승리할 것이며, 자유 ․ 인권 ․ 개혁 운동에서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고 선 전해 나갔다. 점차 SED의 독점적 권력이 약화되고 통치 구조에 균열이 생기자 기존의 정보 파악과 순수한 도덕적 지원의 차원을 뛰어넘어 권력 구도 변화의 전망 속에서 동독 자매 정당을 정치적 영향력 강화의 파 트너로 받아들였다. 1989년 11월 동베를린의 기민련 대표가 된 드 메지에르(de Maiziere)는 서베를린 기민련과의 협력으로 당의 실질적인 개혁을 주도할 수 있었다. 동서베를린 중심의 기독민주주의자들은 통일 독일의 건설과 두 정당의 통 합에 대한 입장을 접근시키고, 상호 차별성을 줄일 수 있는 기제(Adapter)의 설립을 추구하였다. 본(Bonn)에 있는 서독 기민련 수뇌부도 동독 기민련이 40여 년간 SED 블록 정당으로서 연대 책임을 져야한다는 입장과 자매 정당과 협력하는 것이 선거에서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동독 기민련을 자매 정당으로 인정하게 된다. 여기에는 동독 내 새로 등장한 정치단체들이 서독 기민련의 보수적 정치 성향을 비판하고 나선 것과 동독 기민련이 당내 개혁을 추진한 것이 배경으로 작용했다. 또한, 서독 기민련은 연합 가능한 신흥 정당 ․ 단체를 물색하면서 다른 세력과 연대하기 위한 모든 조건을 열어 놓았는데, 당 지도부가 단 하나의 정당과의 접촉을 고집하는 것이 변화에 유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서독 기민련은 선거 연합체 구성을 위해 기사련의 동독 자매정당인 독일사회연합 (Deutsche Soziale Union: DSU)과 민주혁신(DA)을 상대로 적극적인 설득 작업을 병행하였다. 1990년 2월 5일 서독 기민련이 지원하는 동독 기민련과 민주혁신, 그리고 서독 기사련이 지원하는 동독 기사련은 콜 수상이 직 접 참여한 가운데 인민의회 선거를 위한 연합체 독일연합(AfD) 을 창설하였다. 결국 기민 ․ 기사련은 40년간 SED의 블록 정당이라는 역사로 인해 대중적 신뢰를 잃은 동독 기민련이 가져올 피해를 최소화하면서도 조직력과 정치적 경험을 짧은 시일 내에 흡수하여 선거 전략과 전술을 유리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선거 운동 기간은 짧지만 총력으로 라는 모토 아래 모든 선거구에 서독의 선거 전문가들을 파견해 동독 각 주의 선거 운동 본부의 핵심 지위를 차지하고 선거 운동을 진두 지휘하여 선거에서 압승하였다. 4) 녹색당(Die Gr ü nen) FES-Information-Series 서독 녹색당은 통일 정국의 제한적인 첨예한 정치 사안보다는 환경 ․ 인권 ․ 평화와 관련된 문제를 가지고 조 심스럽게 동독 시민 단체들과 대화를 전개했고, 이들의 견해를 존중하면서 조화를 모색하였기에 많은 단체들이 녹색당과 협력하려고 했다. 녹색당 내에서는 어떤 단체들을 지원할 것인가를 놓고 근본주의자(Fundis)와 현실론 자(Realos) 사이에 논쟁이 벌어져 당내 갈등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시민운동 단체 중 서독 녹색당에 긍정적인 입장을 취했던 신포럼(NF), 민주주의 지금(Demokratie Jetzt: DJ), 평화 ․ 인권 발의(Initiative Frieden und Menschenrechte: IFM)와 동독 녹색당은 정강(政綱) 논의의 강화와 새로운 정책 대안 마련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들 동독 정치 조직들은 서독에 자매 정당을 가지고 있는 정당 ․ 단체들에 비해 선거 준비가 미약함을 깨닫고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서독 녹색당으로 빠른 행보를 하였으나, 정 강 논의에서는 주춤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동독 정당 ․ 단체의 조속한 통일에 대한 기대와 달리, 서독 녹색당 은 기본 입장인 두 개의 독일 국가 를 일정 기간 유지하고, 대등한 권리를 가진 동서독 두 국가의 유럽 내 공동 발전을 목표로 하는 독일 정책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독 녹색당은 이들 동독 정당 ․ 단체들의 민주주 의적 요구에는 동의하였으나 무비판적 자본주의 도입에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서독 정당들이 동독 정당 ․ 단체들과 선거 연합체를 만들어 적극적으로 선거에 개입하자, 서독 녹색당 내에서 는 동독 인민의회 선거가 서독의 정치 기류에 직접적 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게다가 동독 환경 ․ 인권 ․ 평화 단체와의 단절로 서독 녹색당의 위상이 위협 받으면서 서둘러 동독 녹색당과 독립여성단체 <표> 정당별 통일 ․ 평화 정책 및 경제 체제에 대한 입장 구분 기민 ․ 기사련 자민당(FDP) 사민당(SPD) 녹색당(Gr ü ne) 정치적 입장 (동독의 우호 정당) 통일 문제 유럽 및 통일 독일의 안보 경제 체제 기독교적 휴머니즘의 가치 관; 정치적 보수주의 (독일연합: AfD) 서독기본법 23조에 따라 서독이 동독을 흡수하는 방법으로 조속한 통일 실 현 동독의 NATO 가입; 동독 지역 내 NATO군 배치 반 대(특수 지역화) 신속한 화폐 통합으로 서독 마르크 유통; 국영 기업 민 영화로 시장경제 기반 구축 경제적으로는 자유주의적 시장경제; 정치적 자유주 의(자유민주동맹: BFD) 통일에 원칙적 찬성; 기본 법 23조나 146조와 무관 양 독일의 비군사화; 유럽 의 신평화 질서 옹호 신속한 사유화와 자유주 의적 시장경제; 조기의 화 폐 ․ 경제 통합 반대 사회민주주의 및 유럽 사 회주의 운동의 전통 계승 (사회민주당) 서독기본법 146조에 따르 며, 흡수 통합 반대. 즉, 통일헌법 제정 국민투표 후 연방국가로 통일; 동독 사회 안정 유지 ․ 발전 유럽안보협력회의(OSCE) 를 축으로 새로운 안전보 장기구 창설; 전승 4국 군 주둔 최소화 사회보장제도 확립 후 서 독과의 화폐 ․ 경제 통합 등에 따른 경제 통합 실현 토대민주주의, 사회성 강 화, 생태주의 지향 (동맹 90; 녹색당; 독립 여성연합) 두 개의 독일 국가 일 정 기간 유지; 양독의 유럽 내 공동 발전 이후 유럽공동체에 통합 동독의 NATO 가입 반대; NATO와 바르샤바조약기 구 군사부문 동시해체; 유럽평화체제 구축 민주적, 사회적, 생태적 경제 체제 FES-Information-Series (Unabh ä ngiger Frauenverband: UFV)와 시민 단체를 모두 지원하기로 결정하였다. 서독 녹색당은 이들의 선거 운동 지원을 위해 동베를린에 대안 연대 지원 사무실을 설치하여 21만 마르크(약 1억 원)를 지원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서독 녹색당은 동독 정당 ․ 단체의 자주성에 근거한 선거를 원칙으로 하여 내용적 개입도 피한 채, 간 접 지원 방침 고수와 예산 배분에서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특히 예산 배분에 대해 동독측의 불만이 고조되 었다. 서베를린 녹색당이 이를 돌파하기 위해 재정 및 선거 기술적 지원을 서둘렀지만, 결국 신포럼, 민주주의 지금(DJ) 및 평화 ․ 인권 발의(IFM)는 녹색당과의 협력을 거부하고 동맹 90 을 통해 독자적인 선거 참여를 결정 하였다. 결국 녹색당은 동맹 90과 결별하고, 동독 녹색당 및 독립여성연합(UFV)에 대한 부분적 지원으로 선거 에 임하게 되었다. 4. 정당 통합과 통일 독일 정당 체계의 형성 1) 동서독 간 정당 통합 1990년 3월 18일 인민의회 선거를 치르면서 동독 정당 체계는 서독 정당 체계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 었고, 인민의회가 구성된 이후 동독 정당 체계는 서독 정당 체계의 주변부로 기능했다. 결국 서독 정당들 은 통일이라는 극히 예외적인 특수 상황에서 사회적 갈등의 핵심 내용인 통일전략 ․ 정책의 실질적 추동체 로 기능하였고, 동시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가진 정치 행위자로 등장하여 동독의 정당 체계를 통합하게 되 었다. 형식적, 법적으로 통일된 날은 1990년 10월 3일이지만, 실질적 통일은 이미 7월 1일의 화폐 ․ 경제 ․ 사회 통합(W ä hrungs-, Wirtschafts- und Sozialunion: WWSU)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12월 2일에는 통일 독일의 첫 총선이 예정되어 있었던 만큼, 이미 여름휴가가 끝난 8월 초부터 각 정당은 이 일정에 맞춰 정당별 통합 전당 대회를 시작으로 선거 운동에 돌입하였다. 자민당의 1990년 8월, 사민당의 9월말, 기민당 10월 초 통 합 전당 대회를 통해 동서독 정당들은 모두 통합되었다. 동서독 정당별 통합은 특별 전당 대회를 열고 당 대표 를 새로이 선출하였는데, 대개 당규 변경을 통하여 당 대표 수를 늘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사민당(SPD)의 경우, 동서독 간 정당 통합에 따라 전체 당원 수는 서독 지역 90만 명에 동독 지역의 3만 명이 추가되는 정도로 미미한 변화를 보였다. 1989년 말 약 10만 명에 이르던 당원이 당 통합 과정에서 매 우 적은 수만이 당원으로 유지된 것은 이후 당 지도부 구성에서 동독 출신의 대표성이 약화되는 결정적 요 인이 되었다. 기민당의 경우, 서독 지역의 당원 66만 명에 동독 지역의 12만 8천 명이 추가로 확보되었으며, 이에 따라 약 20%의 대표자와 당 지도부가 이들 동독 출신 정치인에게 배정되었다. FES-Information-Series 자민당은 사민당이나 기민당과는 다르게 당세를 크게 확장한 경우에 속한다. 기존의 서독 지역 당원 6만5 천 명은 통합을 통하여 17만 8천 명으로 약 세 배나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3명의 동독 출신 인사가 당 지도부에 소속되어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지분만 보장받았다. 서독 정당에 일방적으로 편입되었으나 미미한 당내 지분 확보라는 일반적 추세와 구분되는 조직 통합의 모 습을 보인 유일한 정당은 녹색당이다. 녹색당은 최대한 동독 지역 정당의 독자성을 인정해주는 방식으로 12월 2일 총선 이후에 통합하였으며, 4만 명의 구서독 당원에 구동독 지역 동맹 90 당원 3000명이 추가되 었음에도 불구하고 구동독 조직에게 통일 관련 문제에서 비토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여 구동독 조직의 자주성을 인정하였으며, 당명도 동맹 90/녹색당으로 정하였다. 2) 통일 독일 정당 체계의 이념적 경향 동독 정당과의 통합을 통해 독일의 정당 체계는 극히 제한적인 영향을 받았을 뿐이다. 단지 통일이라는 특수 상황으로 인해 몇 가지 특이점들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이후 정당의 이념적 ․ 정책적 부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1990년 인민의회 선거에서 정당들이 지나칠 정도로 빈번하게 정치 이념적인 수 사를 활용하여, 특히 자유 나 민주주의 의 가치들에 대해 많이 언급한 반면, 대외 정치적 주제들을 상당히 경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기민련은 과도하리만큼 자주 보수적 가치를 내세웠던 태도를 바꾸어 통일 연방의회 선거에서는 통일에 따라 발생하는 구동독 주민들의 실질적인 이해를 대변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사민당은 복지 국가의 필요성에 무게 중 심을 두고 선거강령 내용의 약 1/4을 사회 국가 건설에 할애하였다. 통일 과정에서 나타난 새로운 정치적, 경제 적 및 사회적 문제에 대한 대응으로 각 정당들은 사회 국가 건설이나 환경 문제에 대해 더욱 많은 관심을 보이는 쪽으로 변화하였다. 동독의 기민련, 사민당, 민사당(PDS) 및 녹색당 등이 새로이 드러난 경제 문제들에 대해 좀 더 강한 국가 개입 방식으로 대응하려 하였다면, 자민당(FDP)만이 연방 차원의 정치 정당으로 유일하게 분명한 시장주의 적 입장을 취하였다. 자유주의 정당들은 시장의 힘을 공공연히 강조하였다. 1990년 연방의회 선거에서 다른 정당들은 당 강령의 1% 정도만 시장경제 건설에 할애하고 있던 반면, 유독 자민당만이 12.5%나 이를 다루었 다. 다른 한편, 녹색당, 시민운동 및 민사당 등은 당 강령의 무게 중심을 환경보호, 복지 국가, 집단 정책 및 평화 ․ 군비 축소 등에 두고 있었다. 이 영역에서 각 정당들의 입장 차이는 근소한 반면,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에서 이들 정당은 서로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즉, 녹색당과 시민운동 단체들은 직접 참여의 의미를 강조하는 반면, 민사당은 민주주의 구축 외에 자유 와 경제 문제의 해결에서 국가의 개입 을 당 강령에 추가하고 있었다. 5. 나가는 말 FES-Information-Series 격변기 서독 정당의 지원은 민주주의와 다원주의의 경험이 없었던 동독 정당 체계의 안정적 전환(soft landing)에 기여하였다. 동독의 경우, 격변 상황에서 주도권을 잡고 사회의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던 세력은 없었다. 왜냐하면 블록 정당들은 사회주의통일당(SED)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데 급급했기 때문에 당내 개혁조차도 미미한 상태였고, 저항 단체들은 SED에 대한 비판에는 능했지만 대안 제시가 부족했으며 정치적 경험도 없었기 때문이 다. 이런 조건에서 동독 주민들의 요구는 제대로 수용되지 않았고 서로 괴리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때 서독 정당들은 자매 정당이나 저항 단체들에게 정치적 노하우를 전수하거나 물적 지원을 함으로써 동독 국정 운영의 체계화를 도와주었다. 그러나 서독 정당들의 안정자 로서의 역할은 동시에 그만큼의 비용 을 요구하는 것이어서, 동독 정당들의 자 주성 훼손을 의미했다. 동서독 정당 체계의 통합은 전반적으로 서독 정당 체계가 동독 정당 체계를 흡수한 것으 로 평가된다. 이는 동독의 필요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서독 정당들 자신의 이익과 정당 정치의 논리가 주요 하게 작용하였다. 흡수 통합의 결과는 이후 구동독 주민의 특수한 이해관계를 대변할 자주적 정치 조직 부재의 문제를 초래했다. 통일 이후 수년 동안 구동독 주민들 사이에 2등 국민 이라는 집단의식이 형성된 것은 부분적 으로 여기에도 그 원인이 있다. 공산주의 국가를 위한 자금 - 서독은 동독 재정에 왜 그리고 얼마나 지불했나? 페터 가이,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 한국사무소 소장 2005년 7월 󰠲󰠲󰠲󰠲󰠲󰠲󰠲󰠲󰠲󰠲󰠲󰠲󰠲󰠲󰠲󰠲󰠲󰠲󰠲󰠲󰠲󰠲󰠲󰠲󰠲󰠲󰠲󰠲󰠲󰠲󰠲󰠲󰠲󰠲󰠲󰠲󰠲󰠲󰠲󰠲󰠲󰠲󰠲󰠲󰠲󰠲󰠲󰠲󰠲󰠲󰠲󰠲󰠲󰠲󰠲󰠲󰠲󰠲󰠲󰠲󰠲󰠲󰠲󰠲󰠲󰠲󰠲󰠲󰠲󰠲󰠲󰠲󰠲󰠲󰠲󰠲󰠲󰠲󰠲 서독의 모든 주요 정당들은 1949년 두 독일 국가가 설립된 이후 구동독과의 경제 교류가 동 서독 간 교량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했다. 1961년 장벽이 세워진 후 에곤 바르는 자신의 구 상안인 접근을 통한 변화 를 개발했다. 빌리 브란트가 이끌던 사민당이 자민당과 연정으로 정 권을 잡으면서 바르는 70년대 초 이 안을 정책으로 추진했다. 이 정책의 목표는 상품과 서비스 뿐만 아니라 분단된 동서독의 사람들도 장벽을 통과하게 함으로써 장벽을 조금 더 여는 것이었 다. 매번 힘든 협상을 거친 후 수많은 협약과 합의가 이루어졌으며, 그 내용은 서독이 동독 정부 에 대한 재정 지불 규모와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특히 서신 교환, 전화 통화, 여행자의 교통 왕래 등 동독의 양보에 관한 것이었다. 이 글에서는 서독이 동독 재정에 현금을 직접 지불한 내용과 그것을 통해 얻은 장벽의 통과 에 관한 것을 수치로 알아보고자 한다. 끝으로, 에곤 바 르의 접근을 통한 변화 정책 때문에 동독 정권의 수명이 더 연장되었다는 비판에 대한 반박 과 동독 정부가 왜 장벽을 비교적 용이하게 통과할 수 있게 했는가에 대한 의문을 다루고자 한다. 󰠲󰠲󰠲󰠲󰠲󰠲󰠲󰠲󰠲󰠲󰠲󰠲󰠲󰠲󰠲󰠲󰠲󰠲󰠲󰠲󰠲󰠲󰠲󰠲󰠲󰠲󰠲󰠲󰠲󰠲󰠲󰠲󰠲󰠲󰠲󰠲󰠲󰠲󰠲󰠲󰠲󰠲󰠲󰠲󰠲󰠲󰠲󰠲󰠲󰠲󰠲󰠲󰠲󰠲󰠲󰠲󰠲󰠲󰠲󰠲󰠲󰠲󰠲󰠲󰠲󰠲󰠲󰠲󰠲󰠲󰠲󰠲󰠲󰠲󰠲󰠲󰠲󰠲󰠲 1. 들어가는 말 FES-Information-Series 독일연방공화국은 70년대 초부터 동독의 재정에 엄청난 금액을 지불했으며, 80년대에는 더 집중적으로 지불했다. 하지만 이것은 내독 교역의 무이자 대월 제도인 스윙 이나, 1983년 과 1984년 두 차례 동독에 주었던 10억 마르크의 차관과는 무관하다. 1950년대와 60년대 모 스크바가 임명한 동독의 국가 원수와 당 지도부들은 그 당시 위와 같은 경제적 이익을 상상 하지 못했다. 어떤 일이 일어났나? 1961년의 장벽 설치는 독일의 전후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60년대 초 가장 격 렬하게 적대시되었던 독일 정책을 개발했으며, 후에 빌리 브란트(Willy Brandt)와 함께 접근을 통한 변화 정책을 실행했던 사민주의자인 에곤 바르(Egon Bahr)는 2005년 4월 29일자 일간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자이퉁 인터뷰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고를 전환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는 이 장벽이었다. 1961년 당시 우리 모두는 만족하며, 누구도 현재의 상태가 바뀌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어느 누구도 우리가 장벽에 구 멍을 내거나 장벽을 통과하도록 돕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시작했다. 더구나 사람들이 독일의 본이나 미국, 모스크바 그 어느 곳에서도 통행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통행증 발급에 대해 전권을 갖고 있는 그들과 협상을 해야만 했다. 양국 간의 긴장 완화와 협력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독일연방공화국이 동독의 재정에 지불한 대가로 동독의 정치적 양보와 관련된 조약과 합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동서독 간 거래 중에 는 1963년부터 이루어진 정치범의 지불 석방과 같이 법적 토대 없이 이루어진 것도 있었다. 이 글에서는 독일 정부, 즉 1969년부터 1982년까지의 사민당(SPD)과 자민당(FDP)의 연정에 이어 자민련/기사련(CDU/CSU)과 자민당(FDP)의 연정이 얼마나 그리고 무엇을 위해 동독에 돈을 지불했는가를 볼 수 있다. 2. 접근을 통한 변화 모든 연방정부와 연방하원의 주요 정당들은 1940년대 말과 50년대의 동서독 경제 교류가 동 서독 간의 교량 역할을 한 것으로 보았다. 특히 내독 교역이 동독 경제가 사회주의 국가들의 FES-Information-Series 분업 시스템에 동화되는 것을 늦추는 데 기여했다고 여겼다. 또한, 내독 교역은 필요할 경우 동독에 대한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베를린 자유 왕래를 보장하는 효과 적인 수단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장벽이 세워짐으로써 동독과 서독의 경제 지역이 완전히 단절되었지만, 내독 교역은 60년대에 도 독일의 동질성의 상징이자 베를린의 특수한 지위를 보장해주는 수단으로 간주되어 계속 되었 다. 1969년 빌리 브란트가 이끌던 독일사회민주당이 자유민주당과의 연정으로 정권을 잡으면서 접근을 통한 변화 라는 정책안이 도입되었다. 에곤 바르가 고안한 이 정책안은 에곤 바르와 빌리 브란트가 1963년 7월 투칭(Tutzing) 기독아카데미 연설에서 처음 발표했다. 이것은 70년 대와 80년대 사민당 동방 정책의 주요 모티브가 되었다. 에곤 바르는 장벽 구축에 따른 당연 한 결과라며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장벽을 무력으로 제거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 의 유익을 위해서는 적어도 장벽을 통과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새로운 구상안인 접근을 통한 변화 정책은 베를린 통행증협정이 공시된 바로 그 해에 처음 으로 적용되었다. 크리스마스 시기에 동베를린의 친척을 방문하려는 서베를린 주민들을 위한 통행증 관련 첫 번째 협상이 1963년 12월에 이루어졌다. 베를린 시장이었던 빌리 브란트를 필 두로 한 베를린시 정부의 협상 목적은 베를린 주민들과 모든 독일 국민들의 상황을 개선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점들을 의미했다. - 서베를린 주민의 동베를린 및 동독 방문 기회 증가 - 정보 및 출판물 교류 - 철도 연결 개선 - 내독 교역 확장 방문 허가가 크리스마스 시기에만 국한된 까닭에 협상 결과가 다소 미흡하긴 했지만, 에곤 바르의 정책안이 처음으로 시행된 것임을 감안하면, 에곤 바르와 빌리 브란트 모두에게 성공적 인 결과였다. 그래도 1963년 크리스마스 연휴 동안 서독과 서베를린에서 120만 명의 시민들이 동베를린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장벽이 세워진 후 겨우 2년 반 만에 일어난 대사건 FES-Information-Series 이었다. 하지만 1972년 기본조약에 서명하기까지는 거의 10년이나 걸렸다. 또한, 빌리 브란트와 에곤 바르는, 사민당-자민당 연정에서 기민당-자민당 연정으로 정권이 교체된 1982년 이후에도 접근을 통한 변화 정책이 추가 협상이나 재협상 없이 존속될 수 있 도록 여건을 조성했다. 이는 동서독 접근 정책에 야당을 포함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에곤 바르는 2001년 9월 서울을 방문했을 때 이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야당과의 협력은 정부의 의무입니다. 우리는 동독에 관한 정보를 야당에게 넘겨주었으며, 의회에 여야 의원들로 구성된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정보를 교환하고, 야당의 의견에 귀를 기울 였습니다. 물론 야당이 우리의 동방 정책을 비판했지만, 그래도 이들한테는 자신의 의견을 말 할 수 있는 기구가 있었습니다. 기민/기사당이 정권을 인수한 후 헬무트 콜(Helmut Kohl) 총리는 사민당의 동방 정책을 계 속 이어갔을 뿐 아니라, 교류를 더 확장 시켰다. 연방정부는 동독에 두 차례 10억 마르크의 차 관을 제공해 주었는데, 이 기간은 바로 1983년, 1984년으로 콜 총리의 임기 중이었다. 3. 긴장 완화 정책의 계약적 토대 앞서 언급한 1963년에 있었던 베를린시 정부와 동독 내각평의회 간의 통행증협정, 잘레강을 잇는 고속도로 교각 건설협정, 만일의 경우를 대비한 통행증 교부소 재개 관련 합의 외에 사민 당과 자민당의 연정이 시작될 때까지 동서독 간에는 내독 교역 이외의 다른 협정이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브란트 총리는 이미 1969년 10월 28일의 정부 성명에서 동독 내각평의회에 정부 차원의 협 상을 제안했다. 이 협상을 통해서 독일 내에 존재하는 두 국가 간의 계약을 토대로 협력 관계 를 이루고자 한 것이다. 1년 후에야 이에 대해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1972년 12 월 21일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 관계의 기본 조약, 즉 기본 조약 에 서명하기까지 는 1년이 더 걸렸다. 기본 조약의 서문에는 특히 두 독일 국민들의 이익을 위해 협력 관계가 이루어지기를 바란 다는 내용이 강조되었다. 평등한 원칙 아래 정상적인 선린 국가로서의 관계 를 맺고자 한 것이 다. 또, 내용을 보충하는 서신 교환에는 동독이 가족의 재결합을 촉진하고 여행이나 방문 등 동서독 국민의 상호 교류를 개선하겠다는 의사를 명백히 밝혔다. FES-Information-Series 기본 조약에 관한 사전 대화와 협상에서 이미 베를린으로 가는 길과 동서 베를린 간의 교통 정상화에 초점을 맞춘 여러 가지 합의가 이루어졌다. 1971년 1월 31일에는 동서베를린 간의 전화 통신이 재개되었으며, 얼마 후에는 서베를린과 서독 간의 자유로운 인적, 물적 통행에 관 한 협정을 체결했다. 1971년 말에는 베를린시 정부와 동독 간에 서베를린을 오가는 여행과 방 문에 관해서도 합의를 이룰 수 있었다. 기본 조약 서명 후에는 특히 교통통신 부문의 개선을 촉구하는 여러 가지 협정과 합의가 잇 따랐다. 서독은 70년대 중반부터 베를린의 교통 부문 건설에 많은 재정을 지원해줌으로써 동독 의 교통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4. 서독이 동독에 지원한 현금과 물자 서독이 동독 재정에 지불한 내역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부문은 일괄 통행료, 서독과 베를린을 잇는 도로 건설을 위한 자금, 그리고 일괄적인 우편 및 통신료였다. 베를린을 오가는 통행의 안전 확보를 위해 서독은 1972년에 처음으로 2억 3490만 마르크를 동독에 지불했다. 1973년부터 1975년까지도 같은 금액을 지불했으며, 1976년부터 1979년까지는 일괄 통행료가 연간 4억 마르크에서 5억 2500만 마르크까지 늘어났다. 서독은 장벽이 붕괴될 때 까지 이 금액을 지불했으며, 장벽이 붕괴될 때까지 지불한 총액은 77억 마르크에 달했다. 동독이 일괄 통행료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금액이 높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청산 형 태로 지불되는 내독 교역이나 일괄 우편료와는 달리 일괄 통행료는 현금으로 지불되었기 때 문에 동독은 이 엄청난 금액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동독은 베를린으로 이어지는 도로 연결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1976년 서독은 처 음으로 동독의 베를린 도로 건설에 참여하여 4600만 마르크를 지불했다. 1979년에 5억 6600만 마르크로 가장 많은 투자를 했으며, 80년대에는 약 4억 마르크 선에서 투자가 이루어졌다. 우편과 통신료는 국제적으로 금액을 맞추게 되어 있다. 이를 빌미로 동독은 1966년 서독에 게 1948년부터 계산해서 18억 마르크를 지급해 달라고 요구했다. 오랜 협상 끝에 1969년에 연 FES-Information-Series 방정부는 1967년부터 계산해서 매년 3천만 마르크의 우편료를 지불하기로 했다. 1983년부터 장벽 붕괴 때까지는 매년 지불된 금액이 2억 마르크에 달했다. 서독에서 동독을 통과하거나 동독 내의 도로 사용에 지불해야 하는 비용은 이보다는 훨씬 저렴했다. 서독과 서베를린의 여행자들은 이전에는 동독에 들어갈 때 개인적으로 도로 사용료 를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1979년 연방정부가 일괄 지불하기로 합의했으며, 1989년까지 매년 5천만 마르크를 동독에 지불했다. 5. 장벽을 통과한 수치 50년대와 60년대에는 서베를린을 오가는 여행자들은 동독 관청으로부터 방해를 많이 받았 다. 1961년 장벽이 세워진 후 동독 국민들은 개별적으로 서독이나 서베를린으로 가는 것이 금 지되었으며, 동독 정부는 서독에서 동독으로의 여행 역시 최소한으로 제한했다. 그렇다면 서독이 동독에 매년 지불하는 일괄 통행료와 일괄 우편료 그리고 포괄적인 투자 참여가 동서독 국민들에게는 어떻게 작용했을까? 다시 말해서, 장벽을 얼마나 통과할 수 있었 을까? 몇몇 수치들을 살펴보면 이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이다. ▶ 통행협정이 발효된 첫 해에 이미 베를린을 오가는 여행자의 수가 1971년 760만 명에서 1973년 1370만 명으로 늘어났다. 1985년에는 2380만 명이 육로를 통해 베를린으로 오갔다. ▶ 1970년에 125만 명만이 서독에서 동독으로 여행했으나 1975년에는 그 수가 312만 명에 달했다. 80년대 중반까지 동독 방문자 수가 260만 명으로 서서히 줄어들다가 1986년에는 다 시 390만 명으로 늘어났다. ▶ 동독에서 서독으로 가는 여행자 수도 1970년 100만 명에서 1975년 140만 명, 그리고 1985 년에는 170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이 중 6만 6000명만이 연금 수급자가 아니었다. ▶ 서독에서 동독으로 건 전화 통화 회수는 1970년 70만 회에서 1975년 970만 회, 1983년 2320만 회로 증가했다. FES-Information-Series ▶ 1980년에는 약 7500만 통의 편지와 2700만 개의 소포를 서독에서 동독으로 보냈으며, 동 독에서는 약 7000만 통의 편지와 900만 개의 소포를 서독으로 보냈다. 장벽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약 310만 명의 사람들이 동독에서 서독으로 넘어왔다. 그러나 1961 년 8월 13일 이후에는 동독을 떠나려는 사람은 목숨을 걸어야 했으며, 실제로 약 1000명 이상 의 이주민들이 국경을 넘으려고 시도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서독 연방정부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동독을 떠날 수 있게 하려고 노력했으며, 실제 로 55만 5천 명이 동독 관청으로부터 서독으로 영주 이주 승인을 받았다. 합법적으로 서독으로 이주하는 것은 보통 연금을 받는 나이가 되어야만 허용되었다. 1975년 헬싱키에서 열린 유럽안보협력회의(OSCE)의 폐회 성명에 서명한 후에도 동독은 소위 가족 재 결합을 위해서 연금 나이가 안 된 사람들의 이주를 허락하는 데 8년이나 걸렸다. 그래도 이러 한 방식으로 1989년까지 25만 명이 동독을 떠날 수 있었다. 연방정부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동 독에 물자를 제공해 주었으며, 그 규모는 경우에 따라 달랐다. 연방정부는 1963년부터 정치적 이유로 동독에 수감된 사람들을 지불 석방하려고 시도했다. 이때에도 연방정부는 동독에 현물을 교부해야 했다. 처음에는 수감자 당 4만 마르크, 그리고 1977년부터는 약 9만 6천 마르크를 동독에 지불했으며, 이 자금은 서독의 연방내독관계부 재 정에서 충당되었다. 1963년부터 1989년까지 총 31,755명의 정치범들이 석방되었다. 6. 독일연방공화국의 재정 지원이 동독 정부의 존립을 연장 시켰나? 중동부 유럽에서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소련연방이 해체된 이후에 비평가들은 동방 정책 때 문에 동독 정부가 안정되었고, 그 결과 동독 정부의 수명이 불필요하게 연장되었다며 이 정책 의 고안자들을 비난했다. 또한, 그들은 동독에 대한 재정 지불이 없었다면, 동독 경제가 더 급 격하게 무너졌을 것이며, 공산주의의 정치적 위기가 더 빨리 왔을 것이라고 비난했다. 독일의 다른 부분인 공산주의 국가 와의 협력 사업에 관한 논쟁에서 에곤 바르는 다시 한 번 말했다. 1993년 9월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의 1982-1989 야당인 사민당의 동방 및 독일 정책 학술회의에서 에곤 바르는 유럽의 실질적 권력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FES-Information-Series 아데나우어, 브란트, 콜 그 누구도 소련의 20개 사단과 바르샤바 조약 보다 울브리히트나 호네커 정부를 더 안정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접근을 통한 변화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일으키고자 하는 정책 안이었습니다. 또 다른 지적은 동독 경제 규모에 대한 서독의 재정 지원 규모였다. 80년대에 일괄통행료, 투자 참여, 일괄 우편료와 도로 사용료 형태로 서독이 동독에 직접 지불한 금액은 연평균 11억 7500만 마르크에 달했다. 서독의 평가에 따르면, 이 금액은 80년대 초 동독의 국민 총생산액의 1%도 안됐다. 돌이켜보면, 구동독에 더 많은 자금을 지원했더라도 동독 경제의 몰락을 막지 못했을 것이 다. 이는 경영 실패의 결과를 메우기 위해 천문학적 규모의 자금 지원을 해야 할 만큼 사회주 의 계획 경제가 비경제적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소련 모델- 즉, 경제 활동을 계획하고 조정하 는 시스템- 을 도입한 동독과 여타 사회주의국가에서 이를 진지하게 개혁하려는 모든 시도가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7. 왜 동독 지도층은 내독 관계 개선을 허용했나? 동서독 양 방향의 여행 교류의 완화나 동서독 간의 높은 전화 통화 회수도, 더구나 여행 허 가의 증가도 동독 사람들의 여행 욕구를 누를 수 없었다. 반대로, 서독에서 들어오는 정보로 인해 동독 주민들은 동독 체제보다 서구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우수하다는 것을 명확히 알게 되었고, 그 결과 동독체제를 점점 거부하게 되었다. 그럼 왜 동독 지도층은 서독의 재정 지불 에 대한 대가로 동서독 간의 분단 상태가 느슨해지는 것을 허용했나? 여러 가지 이유 중 다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동독 지도부는 1953년 6월 17일 의 봉기 이후 동독 국민들의 불만에 대한 우려를 한 번도 떨쳐 버린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내독 관계의 개선은 우선 동독 주민들에 대한 일종의 양보였다. 둘째, 동독의 지도자들은(서 독의 지도자들과 별 차이 없이) 소련연방이 있는 한 유럽과 독일의 분단이 지속될 것이라고 믿 었다. 그리고 소련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함으로써 소련이 아직도 여전히 공산주의 국가 정권의 권력 상실을 막을 것이고,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동서독 교류를 시작하기 바로 전 에 명확히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한 가지는, 나중에 가서야 사람들은 좀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을 깨닫는다. 통일 독일의 수도 이전 이 상 준, 국토연구원 연구위원 2004년 12월 󰠲󰠲󰠲󰠲󰠲󰠲󰠲󰠲󰠲󰠲󰠲󰠲󰠲󰠲󰠲󰠲󰠲󰠲󰠲󰠲󰠲󰠲󰠲󰠲󰠲󰠲󰠲󰠲󰠲󰠲󰠲󰠲󰠲󰠲󰠲󰠲󰠲󰠲󰠲󰠲󰠲󰠲󰠲󰠲󰠲󰠲󰠲󰠲󰠲󰠲󰠲󰠲󰠲󰠲󰠲󰠲󰠲󰠲󰠲󰠲󰠲󰠲󰠲󰠲󰠲󰠲󰠲󰠲󰠲󰠲󰠲󰠲󰠲󰠲󰠲󰠲󰠲󰠲󰠲󰠲󰠲󰠲󰠲󰠲󰠲󰠲󰠲󰠲 신행정수도 건설 위헌 결정 이후 국토의 균형 발전을 위한 새로운 대안들이 활발하게 모색되 고 있다. 현재 유력한 대안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고 있는 행정부 기능 일부의 지방이전과 관련 해서 통일 독일의 행정 기능 분담 사례가 주목받고 있다. 통일 이후 베를린/본-법 (Berlin/Bonn-Gesetz)에 따라 10개의 연방 부처는 본에서 베를린으로 이전하고 본에는 6개 부 처가 남았다. 베를린으로 옮기는 연방 부처들은 1999년 8월말까지 이전을 완료하였다. 이들 연방 부처 외에 연방의회 상하원과 연방대통령실도 베를린으로 이전하였다. 독일의 경우 형식 적으로는 베를린과 본에 연방 부처들이 분산되어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베를린으로의 완벽한 수도 이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본에서 베를린으로 이전한 부처들은 제1 청사를 베를린에, 그 리고 제2 청사는 본에 설치하였다. 본에 남은 부처들은 베를린에 제2 청사를 두었다. 베를린 과 본의 업무 협조는 인터넷, 비디오 회의 등을 통해 처리되고 있으며, 본과 베를린 간 셔틀 항공편도 운행되고 있다. 그러나 직장을 따라 이주하지 못한 900명의 연방 정부 직원들이 주 말에 본과 베를린을 이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전체 연방 공무원 수에 비해 높은 비 율은 아니지만, 행정 기능 분산이 정부 차원의 비용 측면뿐만 아니라 직원들의 개인적인 가 정생활 측면에서도 적지 않은 비용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독일의 사례에서는 베를린으로 이전하는 부처들이 새로운 청사들을 건설하기 보다는 기존 시설들을 최대한 활용 함으로써 이전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는 점을 평가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독일 의 사례는 우리에게 정부 부처 기능의 분산과 관련된 비용 최소화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 1. 통일 독일 사례의 의미 FES-Information-Series 2004년 가을 행정수도 이전을 둘러싸고 극심한 국론 분열 양상을 보였던 우리의 모습은 15년 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이후 통일 수도의 입지 문제를 놓고 국론이 분열되었던 독일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독일의 경우 본(Bonn)과 베를린(Berlin)을 둘러싼 수도 이전 논쟁은 결국 연방의회 의 결정을 통해 종식되었다. 이러한 연방의회의 결정은 다행스럽게도 국민의 여론을 제대로 반영 한 것이었다. 우리도 결국 독일처럼 국민적 합의를 통해 신행정수도 건설 위헌 결정 이후의 문제 를 치유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국토의 균형 발전을 위한 새로운 대안들을 모색하 고 있는데, 청와대와 국회를 제외한 행정부 기능의 이전 또는 일부 부처의 이전과 같은 대안들이 논의되고 있다. 현재 유력한 대안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고 있는 행정부 기능의 지방 이전과 관 련한 외국의 사례로서 통일 독일의 사례가 자주 언급되고 있다. 알려진 바와 같이 독일은 통일 이후 수도를 본에서 베를린으로 이전하면서 행정 부처의 일부를 본에 잔류시켰다. 물론 독일의 사례는 사실상 행정 부처 가운데 주요 부처를 포함해서 상당 부분이 본에서 베를린으로 이전하였 고, 총리와 대통령의 관저가 베를린으로 이전하는 등 완전한 수도 이전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현 재 우리나라에서 논의되고 있는 행정 부처만의 이전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전 세 계적으로 수도를 이전하면서 독일의 경우처럼 수도의 일부 기능을 분산시킨 경우는 말레이시아를 들 수 있다. 말레이시아는 의회를 수도인 쿠알라룸푸르에 잔존시키는 대신 대부분의 부처와 연방 재판소를 행정수도인 푸트라자야로 이전시키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의 경우에 는 완전히 수도가 이전한 독일과는 달리 기존 수도가 수도로서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며 새로운 행정수도를 건설하는 것으로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특히 말레이시아의 경우에는 쿠알라룸푸르와 새로운 행정수도인 푸트라자야 간의 거리가 20km에 불과해 본과 베를린 간의 직선거리가 500km 에 가까운 독일과는 단순 비교하기 어려운 경우이다. 말레이시아의 사례는 세종로와 과천으로 분 산되어 있는 우리의 정부 부처 입지 사례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말레이시아의 사례는 독 일과 같이 행정 기능의 분산에 따른 업무 비효율 문제는 발생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독일의 사례는 일부 정부 부처가 본에 남으면서 통일 수도인 베를린과 과거 수도였던 본 간에 일부 연방 정부 기능을 분담했다는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끈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 이전에 신행정수도 건설과 관련한 논의과정에서 통일 수도 문제도 제기된 바 있다. 통일에 대비해서 신 행정수도 건설을 유보해야 한다는 주장에서부터 통일이 될 경우 신행정수도와 북한 지역 간의 수도 기능 분담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장들이 제기된 바 있다. 이러한 2 FES-Information-Series 측면에서 통일 독일의 사례는 통일 시대를 대비한다는 측면에서도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 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통일 독일의 수도 이전 사례에서 행정부의 본-베를린 분산 배치가 갖는 의미와 구 체적인 내용을 소개하였다. 2. 통일 독일의 수도 이전 결정과 추진 과정 1) 수도 이전 결정 과정 독일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동서독으로 분단되면서 두 개의 수도를 갖게 되는 운명을 맞았다. 서독은 1949년 의회에서 본을 임시 수도로 동독은 동베를린을 수도로 결정하였다. 본이 임시 수 도로 결정되었지만 당시 서독 국민들 간에는 향후 통일이 될 경우 베를린으로 환도(還都)한다는 합의가 있었다. 본은 서독 국민들에게는 어디까지나‘임시 수도’였던 것이다. 본이 서독의 수도 가 된지 40년이 되던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면서 통일 수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시작 되었다. 동독 주민들은 서독 정부와 맺게 되는 통일조약(Einigungsvertrag 1990)의 조건으로 연방 수도를 베를린으로 이전할 것을 요구한 반면, 서독 주민들 간에는 베를린으로 환도하자는 주장과 본을 통일 수도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섰다. 1990년 당시 설문 조사에서 독일 국민의 51%가 베 를린을, 23%가 본을 지지하였다. 베를린 지지 세력의 70%가 동독 국민이었고, 서독 국민 가운데 베를린 지지 세력은 46%였다(김인희 2003). 베를린으로의 환도를 주장하는 측은 베를린이 수도로 서의 정통성을 갖고 있다는 점과 중부 유럽의 중심지라는 지경학적 강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1949년 본을 임시 수도로 결정할 당시의 국민적 합의 등을 환도의 근거로 내세웠다. 반면, 본을 통일 수도로 하자는 측에서는 중앙 집권적이고도 독재적인 히틀러 정권의 부정적 이미지를 강조 하면서 베를린으로의 환도를 반대하였다. 이러한 본-베를린 수도 이전 논쟁은 1991년 6월 연방의 회 선거에서 337:320의 근소한 차이로 베를린이 통일 수도로서 결정되면서 종식되었다. 종전 이 후 동서베를린으로 분단되었던 시련에도 불구하고 독일 역사에서 베를린이 차지했던 위상과 정체 성 그리고 통일이라는 국가적 전환점이 이러한 결정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의회의 결정이 국민 여론과 배치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만 약 국민 여론 다수가 통일 수도로 베를린을 선호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들이 베를린 으로의 천도를 결정했다면, 그러한 결정이 실제로 집행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것은 국민적 합 의가 수도 이전 과정에서 필수적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3 FES-Information-Series 독일이 통일 이후 베를린으로 환도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수도라 는 것이 역사적, 민족적, 정치 경제적으로 복합적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기 때문이 다. 표 1. 통일 독일의 수도 이전 경위 시기 내용 1990.8.31 1991.6.20 1992.8.25 1994.5.6 1999.8.31 동서독 간 통일조약 체결 ‐ 통일 독일의 수도로서 베를린 명시 ‐ 정부 및 의회 소재지는 통일 이후 결정하기로 명시(본-베를린 수도 이전 논쟁 본격 화 계기) 연방 의회에서 베를린으로 수도 이전 결의 수도조약 체결 ‐ 연방 정부-베를린, 연방 정부-브란덴부르크 주의 협력 계약 베를린/본-법(Berlin/Bonn-Gesetz) 공포 연방의회 및 정부 베를린으로 이전 완료 자료: 한국토지공사. 2004. 해외의 수도 이전과 관련된 논쟁 및 시사점. 12쪽 2) 수도 이전 과정 수도를 베를린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한 후 연방 정부는 수도 이전 계획을 수립하였고, 1994년 4 월에 확정된 베를린/본-법(Berlin/Bonn-Gesetz)에는 2000년까지 실행할 정부 이전 계획이 명시되 었다. 1999년까지 최종적으로 총리실과 홍보처를 포함한 10개 연방 부처는 베를린으로 이전하고 본에는 6개의 연방 부처가 남게 되었다. 베를린/본-법에 따라 이전하거나 남는 부처들은 각각 본 과 베를린에 부속 사무소를 두도록 하였다. 즉 베를린으로 이전하는 부처는 본에 제2 청사를, 그 리고 본에 남는 부처들은 베를린에 제2 청사를 설치한 것이다. 이로써 사실상 모든 부처가 본과 베를린에서 일부 기능이나마 유지하게 되었다. 베를린으로 이전한 부처는 총리실, 홍보처 외에 내 무부, 법무부, 노동사회부, 재무부, 경제기술부, 건설교통부, 여성가족부, 외무부 등이며, 본에 남 는 부처는 국방부, 교육연구부, 식품및농림부, 보건부, 환경부, 경제협력부 등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베를린으로 이전하는 연방 부처들은 행정부 내에서도 핵심적인 부처들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 은 사실상 베를린을 중심으로 정부 기능이 작동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베를린으로 이전하는 부처들은 1992년부터 시작해서 1999년 8월말까지 이전을 완료하였다. 한편 이들 연방 행정 부처 외에 연방의회 상하원과 연방대통령실이 각각 베를린으로 이전하였다. 1999년 9월 1일부터 연방 4 하원과 연방 정부는 베를린에서 공식적인 업무를 시작하였다. FES-Information-Series 수도 이전 과정을 통해 총 8,300개의 연방 정부 일자리를 포함해 약 11,400개의 일자리가 본에 서 베를린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본의 급격한 경제 위축을 막기 위해 베를린과 라인-마인 지역 에서 연방 기능과 관련된 약 6,550개의 일자리가 본으로 이동하였다. 2002년 10월 기준으로 13,000명이 베를린의 연방 정부, 연방의회, 연방대통령실에서 근무하고 있고, 본에서는 8,500명이 근무하고 있다. 3) 본과 베를린 간의 이전 부처 업무 활동 여기에서는 베를린으로 이전하거나 본에 남은 16개 연방 부처 가운데 건설교통부, 환경부와 국방부의 사례를 통해 본과 베를린 간에 어떻게 업무 협조가 이루어지는지를 살펴보았다. 본 에서 베를린으로 이전한 부처 가운데 베를린 본 표 2. 연방 정부 기능의 본-베를린 분산 배치 총리실, 홍보처, 내무부, 법무부, 노동사회부, 재무부, 경제기술부, 건설교통부, 10개 가족여성부, 외무부 국방부, 교육연구부, 식품및농림부, 보건부, 환경부, 경제협력부 6개 주: 1) 베를린과 본에 있는 부처들은 각각 본과 베를린에 제2 사무소를 두도록 되어 있음 2) 부처의 명칭은 필자가 편의상 축약하였음 건설교통부는 제1 청사를 베를린에, 제2 청사는 본에 두었다. 베를린에 있는 제1 청사에는 장 관실, 총무국, 홍보 부서와 내각 및 의회 협의 관련 부서, 주택 및 건설국 등이, 본의 제2 청사 에는 도로철도국, 수운국, 항공국 등이 배치되었다. 베를린의 제1 청사에는 전체 일자리(1,650여 개)의 약 33%(약 550개)가, 본의 제2 청사에 67%가 배치되어 있는데, 이러한 직원 배분 비율 은 2002년 기준 자료로서 2004년 현재에는 다소 변동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당초 본의 건 설교통부 청사는 현재 건설교통부 산하 기관인 연방건설청(BBR)이 사용하고 있다. 의회 활동 과 관련해서 건설교통부 장관은 주로 베를린에 머물고 있으며, 베를린과 본의 업무 협조는 인 터넷, 비디오 회의 등을 통해 처리되고 있다. 본에 남은 환경부의 경우, 제1 청사에는 부처의 예산 담당, 인사, 기타 내부 행정 관리 등 일반 5 FES-Information-Series 행정 관련 부서와 WA(수질, 쓰레기, 토양), IG(보건, 공해방지, 시설 보호 및 교통, 화학 물질 안 전), N(자연보호), RS(원자력 시설의 안전, 방사선 보호, 핵 처리 관련) 등 4개 부서가, 베를린의 제2 청사에는 홍보 부서와 내각 및 의회 협의 관련 부서 등 환경부의 수뇌부와 관련된 핵심 기능 과 환경법 관련 부서, 환경 정책 관련 주요 부서(환경 정책의 경제적 문제 관련 등)와 국제협력 부서가 배치되어 있다. 베를린 제2 청사에는 전체 일자리(742개)의 25%가, 본 제1 청사에 75%가 배치되어 있는데, 이 역시 2002년 기준 자료로서 현재에는 다소 변동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환경부 장관은 주로 베를린에 머물고 있고, 보통 2주에 한번 정도 본으로 이동해서 1-2일 정도 집무한다고 한다. 연방건설교통부와 마찬가지로 베를린과 본의 업무는 기본적으로 인터넷과 비 디오 회의 등으로 처리하고 있다. 환경부와 마찬가지로 본에 제1 청사를 두고 있는 국방부의 경우 제1 청사에는 군사 전력국, 총 무국, 군사 행정국, 육 ․ 해 ․ 공군국 등이, 베를린 제2 청사에는 홍보 부서와 내각 및 의회 협의 관 련 부서, 국방 정책국, 무기국 등이 배치되어 있다. 본의 제1 청사에는 2002년 기준으로 전체 일자 리(3,300여 개)의 90%(약 3,000 개)가, 베를린 제2 청사에는 10%가 배치되어 있는데, 국방부장관은 주로 베를린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베를린과 본의 업무 협력은 타 부처들과 마찬가지로 인터넷(국 방부 인트라넷), 이메일, 비디오 회의 등을 통해 처리하고 있다. 현재 본과 베를린 간에는 정부 업 무와 관련한 정기 항공 노선도 운영되고 있는데, 2003년 10월부터는 Hapag-Lloyd-Express와 Deutsche BA가 이 노선을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다. 표 3. 본과 베를린 간 일자리 이동과 이주 구분 본에서 베를린으로 (연방 정부, 연방상원, 연방 하원, 연방대통령) 베를린에서 본으로 라인-마인 지역에서 본으로 이전한 일자리(개) 약 11,400 약 4,350 약 2,200 주: 이 외에 본에 약 3,900개, 베를린에 약 2,450개 그리고 라인-마인 지역에 약 1,000개의 남게 되었음. 자료: 독일 연방건설교통부 홈페이지 자료. 2003. http://www.bmvbw.de/cms-aussen-speziel/ 이주자수(명) 약 7,500 약 1,900 약 1,200 기존 일자리가 그대로 4) 수도 이전에 따른 베를린의 청사 건설과 본의 경제 기능 보강 6 FES-Information-Series 새로운 수도를 건설한 다른 나라들의 사례와는 달리 독일의 경우에는 기존 수도로 환도하는 형식 으로 수도 이전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수도 이전에 따른 건설비용이 많이 소요되지는 않았다. 연방 정부는 수도 이전에 따른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 가급적 새로운 청사를 건설하기 보다는 기존 건 물을 개보수하여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베를린/본-법(Berlin/Bonn-Gesetz)에서는 수도 이전 비용 의 상한선을 200억 마르크(약 12조 원, 1990년 기준)로 명시하였는데, 이전 비용에는 청사 건 표 4. 연방 기관의 건설비용 항목 연방의회 의사당 개보수 연방하원 관련 신축 연방 총리 관저 신축 연방 정부 청사 개보수 또는 신축 연방 상원 관련 개보수 또는 신축 비용(마르크) 6억 19억 2800만 4억 6500만 29억 1600만 2억 자료: 독일 연방건설교통부 홈페이지 자료. 2003. http://www.bmvbw.de/cms-aussen-speziel/ 설비, 토지 구입비, 주택 공급비, 본에 대한 보상비 등이 포함되었다. 법에 정한 이전 비용의 상 한선은 대체로 지켜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수도 이전과 관련하여 일반 건설 공사에 약 61억 마르크(표 4 참조),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 지역의 주택 건설에 16억 마르크, 수도 이전과 관련한 교통 인프라 건설에 10억 마르크가 각각 소요되었다. 이러한 투자 금액 외에도 추가적으로 90억 마르크가 기타 인프라 건설에 투자되었다. 본에서 이주하는 직원들을 위해 9,100호의 주택이 필 요하게 되었는데, 이는 베를린에 위치한 군사 시설 이전지의 기숙사 개조, 베를린과 근교 지역의 주택 신축 등을 통해 주택을 공급하였다. 베를린이 동서베를린으로 분단되었을 당시 서베를린 지 역에 주둔하였던 미군이 통일 이후 철수하면서 많은 군 숙소들이 남게 되었는데, 이러한 숙소들이 개보수를 통해 이주 직원들을 위한 주택으로서 제공되는 경우가 많았다. 수도가 베를린으로 이전함으로써 기존 수도였던 본의 도시 경제에 대한 경제침체가 우려되었다. 1993년 본에서 발간된 한 보고서에 따르면, 본 전체 일자리 가운데 약 1/3에 해당하는 45,000개가 수도 기능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중 절반에 해당하는 22,600개의 일자리가 수도 이전으로 인하여 줄어들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다(김인희 2003). 그러나 이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베를린/본법(Berlin/Bonn-Gesetz)에 따라 연방 정부 부처 가운데 6개가 본에 남은 것 외에도 다수의 연방 7 FES-Information-Series 기관 및 연방에 속한 각종 단체와 협회들이 전부 혹은 부분적으로 본으로 이전하였기 때문이다. “본 보상에 관한 협정”에 따라 연방 정부는‘행정 기관 및 국제기구의 본 유치’,‘본에 1995 년부터 2004년까지 연방 정부가 28억 마르크 지원’ 등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약 24개의 연방 기구와 행정 기관들이 베를린과 라인-마인 지역에서 본으로 이전을 하면서 약 6,550개의 일자리가 창출되었다. 또한 공기업과 민간 기업들도 다수 본에 입주하기 시작하였고, 1996년부터는 10개의 국제연합(UN) 관련 기관들도 본으로 이주하였다. 본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Nordrhein-Westfalen)의 대도시권과 도시 경제가 긴밀히 연계되어 있어서 수도 기능의 이전에 따 른 충격을 자체적으로 흡수해 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본은 이전의 연방 수도에서 이제 는 보다 경쟁력을 갖춘 국제도시로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3. 수도 이전의 성과 독일의 수도 이전은 통일이라는 국가적 전환기를 거쳐 오면서 당초 계획했던 시간과 비용의 범 위 안에서 비교적 순탄하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연방건설교통부 장관 만프레드 스톨페 (Manfred Stolpe)는 베를린/본-법(Berlin/Bonn-Gesetz) 10주년 기념일을 맞아 2004년 4월 25일 수 도 이전이 법에 따라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촌평을 한바 있다. 이것은 수도 이전이 국민 적 합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며,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재정적 부담도 크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990년부터 2000년까지의 통일 과정에서 연방 정부가 이 른바 통일 비용으로 공식적으로 구동독에 투입한 전체 비용이 약 1조 마르크에 이르는데, 이 가 운데 수도 이전 비용은 200억 마르크(2%)에 불과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독일의 수도 이전이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미 기본적인 인프라가 확보된 도시로 이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통일 수도가 된 베를린에서는 수도 이전에 따른 과도한 인구 집중과 같은 부작용이 발생하지 않았다. 1990년 통일 당시 베를린의 인구는 346만 명이었는데, 수도 이전이 종료된 지 5년이 지난 2004년 3월 현재 베를린의 인구는 339만 명으로 통일 당시보다도 오히려 감소하였다. 물론 이것은 도시의 광역화, 교외화에 따른 결과이 기도 하다. 4. 수도 이전에 따른 문제점 독일의 수도 이전이 성과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커다란 문제점은 행 8 FES-Information-Series 정 기능의 분산에 따른 정부와 의회 간 업무 협력의 비효율성이다. 50년 동안 수도였던 본에 대 한 배려 측면에서 6개 정부 부처가 본에 남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이것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 어렵게 되었다. 왜냐하면 잔류 기관에 따른 고용 유지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은 반면에 본과 베를 린을 오가야 하는 업무상의 시간적, 금전적 비용 지출이 컸기 때문이다. 본에는 독일 내 타 지역 에 있던 연방 기관들이 이전해온 것 외에도 도이체텔레콤(DT) 등 대기업들의 본사가 이전해옴으 로써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되었다. 결국 시장이 정부의 빈자리를 메우게 된 것이다. 반면에 잔류한 연방 부서들은 베를린과의 업무 협의를 위해 많은 비용을 지출하게 되었다. 인터넷 등 첨단 통신 매체가 발달해서 과거와 같이 거리의 문제가 커다란 장애 요인은 아니지만 의원내각제 국가에서 의회와 장거리에 위치한 곳에 일부나마 정부 부처가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업무의 비효율이라는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01년 5월 기준으로 900명의 연방 정부 직원들이 주말에 본 과 베를린을 이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것은 정부 기능의 분산이 정부 차원의 비용 지출 문 제뿐만 아니라 직원들의 개인적인 가정생활 측면에서도 많은 비용을 요구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독일의 행정 기능 분산은 우리에게 분산에 따른 비용의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있다. 이미 본은 잔류한 정부 부처보다는 민간 기업들의 진출과 기타 공공기관의 입 주를 통해 수도 이전의 충격을 흡수해내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연방 정부 부처들이 앞으로도 계속 본에 남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정부 부처의 분산 배치가 한시적으로는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되겠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정부 부처의 배치는 정부 업무의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정부 부처 보다는 공공기관의 이전이나 기업 유치와 같은 다른 수단을 통해서도 본의 경제 활력이 유지될 수 있었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9 동독 이탈 주민에 대한 구서독 정부의 정책 김 영 윤,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03년 7월 󰠲󰠲󰠲󰠲󰠲󰠲󰠲󰠲󰠲󰠲󰠲󰠲󰠲󰠲󰠲󰠲󰠲󰠲󰠲󰠲󰠲󰠲󰠲󰠲󰠲󰠲󰠲󰠲󰠲󰠲󰠲󰠲󰠲󰠲󰠲󰠲󰠲󰠲󰠲󰠲󰠲󰠲󰠲󰠲󰠲󰠲󰠲󰠲󰠲󰠲󰠲󰠲󰠲󰠲󰠲󰠲󰠲󰠲󰠲󰠲󰠲󰠲󰠲󰠲󰠲󰠲󰠲󰠲󰠲󰠲󰠲󰠲󰠲󰠲󰠲󰠲󰠲󰠲󰠲󰠲󰠲󰠲󰠲󰠲󰠲󰠲󰠲󰠲󰠲󰠲󰠲󰠲󰠲󰠲󰠲 구서독 정부는 독일 통일 이전의 동독 이탈 주민에 대한 정책을 인도적, 동포애적 차 원에서 추진하였다. 동독의 이탈 주민을 신분과 관계없이 독일 국민으로 간주하여 수용 하였으며, 서독 주민에 상응하는 대우를 했다. 이탈 주민의 자립 정착을 위해 구서독 정부는 재외국민연금법에 따라 연금 제공 및 의 료 보호, 실업 보호, 재해 보호, 공공부조 등 사회보장 제도를 이들에게 적용하였다. 주 거 지원, 정착금 지급, 교육 지원을 비롯하여, 동독에서 취득한 각종 자격이나 증명서도 인정해 줌으로써 이탈 주민들의 생활이 안정될 수 있도록 함은 물론, 이들이 서독 사회 에 자연스럽게 동화할 수 있도록 했다. 서독의 민간단체들도 이탈 주민의 사회 적응력을 높이기 위한 독자적인 프로그램을 마 련, 연방 및 주정부 정치교육센터 등을 통해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였고 이탈 주민들이 자주적 노력과 자기 책임 하에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탈 주민에 대한 구서독의 정책은 생존이 뒷받침된 상황에서 누구든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또한 이탈 주 민에 대한 법과 제도가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적용되고 사회보장 제도를 통해 그들을 보 호했다는 점에서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 1. 이탈 주민의 형태와 시기 구분 FES-Information-Series 통일 전 구서독 지역으로 이주한 주민들은 그 형태에 따라 ① 합법 이주민( Ü bersiedler) ② 탈출 이주민(Fl ü chtlinge) ③ 해외에서 온 귀향자(Aussiedler) 등으로 구분된다. 합법 이주민은 구동독 정부의 허가를 받고 서독으로 이주한 자들이다. 이들은 구서독에 가족이 있는 경우로 극히 제한된 허가를 받을 수 있었던 사람이거나 나이가 많은 동독인들 로 더 이상 구동독 경제에 이바지할 수 없다고 판단된 사람들이다. 그 외에도 정치범으로 동독에 구금되어 있다가 서독 정부가 일정액의 석방료를 지불하고 구서독으로 이주시킨 사 람들도 있다. 탈출 이주민은 구동독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구동독을 탈출한 사람들이다. 베를린 장벽 설치(1961.8.12) 이후 이들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으나, 통일 전까지 매년 평균 2만 명에 가 까운 동독 주민이 동독을 탈출했다. 이들 중에는 구서독 여행 허가를 받아 방문한 후, 구동독 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독에 머문 사람들의 수도 포함된다. 해외에서 온 귀향자는 구소련 지역을 포함해 동유럽 지역에 흩어져 살다가 독일로 귀 환한 독일 국적자들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독일 민족이라는 이유로 구금, 억류 또는 강제 납치되었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 5월 8일 이후 석방되었거나 독일 군인 출 신의 전쟁 포로로서 1946년 12월 31일 석방된 자 및 그들의 자녀들도 포함된다. 동독 지역 주민의 서독 지역 이주는 역사적 배경과 탈출 환경에 따라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독일 패망 이후 1961년 8월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기 전까지의 기간으 로 대규모 탈출이 발생한 시기다. 이 기간 초기에는 구소련 점령 지역에 살던 주민들이 소련 의 강압 통치를 견디지 못해 서방 지역으로 이주 또는 탈출한 사람들도 많았다. 두 번째 단 계는 베를린 장벽 설치 이후 1989년 8월 동독 주민의 대규모 탈출이 발생하기 이전까지의 기 간이다. 이 기간에는 동독 정부로부터 합법적으로 이주할 수 있는 요건이 완화됨으로써 이탈 주민의 수가 크게 늘어나기도 했다. 세 번째 단계는 1989년 동독의 국경 개방 조치가 이루어 지고 동서독 간 화폐 ․ 경제 ․ 사회통합 이 발효된 1990년 7월 1일 이전까지의 기간으로 동독 주민의 자유 의사에 따라 서독 지역에 대규모 이주가 발생한 시기를 말한다. 2. 동독 이탈 주민의 규모 FES-Information-Series 베를린 장벽 설치 이전(1961)까지 구동독 정부는 내독 간 국경 통행 제한 조치(1953) 및 국 경 차단 조치를 시행했으며 탈출자에게 발포했다. 당시 동독 주민들은 4대국 합의에 따라 왕 래가 비교적 자유로웠던 베를린을 이용하여 탈출했다. 탈출의 주요 동기는 기본권 제한과 정 치 활동 금지에 대한 저항과 동독 내 강제 집단화 및 국유화에 대한 반발 등의 요인이 대부분 이었다. 당시 동독을 탈출한 사람은 약 340만 명에 달했다. 베를린 장벽 설치 이후 구동독 정부는 내독 간 국경에 더 많은 월경 차단 장치인 전자 감 응 자동 발사기를 설치하고 지뢰를 매설함으로써 동독에서 탈출하는 것을 어렵게 했다. 1982 년에는 국경법을 제정, 탈출자에 대한 총기 사용을 법제화했다. 그렇지만 내독 국경 및 베를 린 장벽을 통해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하는 자들이 많았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될 때까지 동독을 탈출, 목숨을 잃은 동독 주민들은 957명에 달했다. 동독 주민들은 비교적 여행이 용이했던 동구권 국가 소재 서독 공관을 통해 탈출하기도 했으며, 서독의 공연에 초청을 받거나 국제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동독 당국에서 정식 여행 허가를 받은 예술가나 운동선수들이 공연이나 경기 후 동독으로 돌아가지 않은 사 람들도 많았다. 또한 당시 구동독 정부가 베를린 장벽 설치 등 내독 간 국경 차단에 대한 국 제적인 비난을 고려, 제한적이나마 합법 이주 정책을 취함에 따라 정식 허가를 받아 서독으 로 이주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에 따라 수십만 명의 동독 주민들이 이주 허가를 신청했으나 1984년의 경우 약 35,000명만 허가되었다. 허가를 받지 못한 사람들 중에는 제3국 및 동베를 린 주재 서독상주대표부를 점거, 농성하여 동독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합법적 이주가 허용 된 사람 중에는 연금을 수령(여: 60세, 남: 65세)하는 경제적 무능력자와 서독 정부와 비밀 거 래로 석방되는 정치범들이 주를 이루었다. 1964년부터 1989년까지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서독으로 이주한 동독 주민은 정치범 33,755명, 부모와 결합한 어린이 2,000명, 그 외 215,019건의 가족 결합 등 1988년 12월까지 총 약 38만 명에 달했다. 정치범 석방과 가족 결합 등을 위해 서독은 총 34억 3,600만 마르크 를 동독 측에 지불했다. 합법적 이주에는 주로 정치적인 억압이나 표현 자유의 억제, 여행 제 한, 생필품 부족,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한 대안 마련을 포함, 연고 관계에 따른 가족 결 합이 중요한 동기로 작용했다. FES-Information-Series 1989년 여름 이후 동서독 간 화폐 ․ 경제 ․ 사회통합조약 이 발효(1990.7.1)되기 이전까지 동 독 주민의 서독 이주는 유리한 국제 환경을 이용한 대규모 탈출과 피난이 주를 이루었다. 동 독 이탈 주민들은 1984년의 경우와 같이 당시 동유럽 국가인 체코 ․ 폴란드 ․ 헝가리 주재 서독 대사관을 점거하고 서독으로 이주시켜 줄 것을 요구하거나 동베를린 주재 서독상주대표부를 점거하여 서독으로의 이주를 요망하기도 했다. 이들은 주로 동독 지도부의 개혁 ․ 개방 거부에 대한 집단적 저항을 비롯하여 동서독 지역 간 신속한 생활 수준의 평준화에 대한 기대로 서 독 이주를 결행했다. 총 탈출 ․ 이주자는 1989년 1월부터 1990년 6월 30일까지 합법적 이주를 포함 총 58만 명에 달했다. 동서독이 통일된 지 13년이 된 현재에도 구동독 주민의 구서독 이주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국내 거주지 변경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종합하면, 종전 이후 1990년 6월 30일까지 대략 460만 명의 동독 주민이 서독으로 이주해 왔으며, 이는 연평균 10만 명의 수준에 달하는 것이었다. 이 기간에 동독 정부의 허가를 받지 기간 종전 이후~1961.8.12 1961.8.13~1988.12 1989.1~1990.6.30 계 구동독 지역 이탈 주민의 시기별 구분 이주 현황(명) 합법 이주 탈주민 계 381,376 101,947 483,323 3,419,042 234,684 480,291 4,134,017 3,419,042 616,060 582,238 4,617,340 연평균 규모 201,120 22,002 388,159 100,377 않은 무단 탈주민은 413만 명으로 전체 동독 지역 이주자의 약 90%를 기록했다. 한편, 동서 독 분단 기간에 동구권 지역을 포함해서 동독 지역에서 온 이주민은 약 1,500만 명으로 연평 균 33만 명에 달했다. 특히 구소련의 붕괴와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변화에 따라 매년 20만 명 이상의 실향민들이 독일로 이주하고 있어 독일 정부가 당면한 큰 문제 중의 하나로 부각 되어 있는 실정이다. 3 . 이탈 주민에 대한 서독 정부의 수용 조치 FES-Information-Series 동독 이탈 주민에 대한 서독의 정책은 기본적으로 동독 주민의 재사회화와 서독과의 통합 차원에서 추진되었다. 동독 주민들을 서독 사회로 받아들이는 문제는 서독 사회에서 한 번도 사회 전체의 문제로 부각되지 않았다. 이는 개인 차원의 문제로 인식하여, 정부 차원의 사회 이슈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독 주민을 서독 사회로 통합하는 것은 두 가지 차원, 즉 제도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에서 실행되었다. 제도적 차원은 비교적 단기간인 3~10일안에 해결되었던 반면, 사회적 통합은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사회적 통합은 개인의 생활과 관련, 새로운 사회의 틀에 적응하기 위한 학습 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아래에서는 부 문별로 동독 주민에 대한 서독 정부의 조치를 제시하고 있다. 1) 독일 국적 취득 1949년 동서독이 각각 헌법을 제정하고 정부를 구성한 이후에도 동독 주민의 탈출이 계속 되자, 서독 정부는 서독으로 피난 오는 자들의 수용 여부에 관한 국내법 제정이 필요하게 되 었다. 1950년 8월 22일 서독 정부는‘긴급수용법’ 및 그 시행령(1951년 1월 제정)을 마련 했다. 긴급수용법 제정의 배경은 첫째, 탈출 주민 문제가 양독 간 정치 쟁점임을 고려하여 동 독 지역에서 오는 지나친 피난민의 유입을 법적 장치를 통해 적절하게 통제하고, 둘째, 각 지 역 주정부의 경제적 여건을 고려하여 수용 피난민을 적절히 배분하고, 이들이 새로운 체제에 조속히 동화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었다. 당시 동독 지역을 포함하여 구독일 제국의 영토에 서 서독으로 쫓겨오거나 이주한 독일 난민의 수는 1,000만여 명으로 서독 정부에게는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했다. 따라서, 서독 정부는 본 법을 제정하여 피난민 문제를 법적으로 제도화하 고 이주민들의 정착을 지원하려 했다. 그러나 서독 정부의 이와 같은 의도는 실현되지 못했 다. 서독은 동독 주민을 자국민으로 간주, 이들이 서독의 영토에 들어오거나 제3국의 서독 대 사관과 영사관에 보호를 신청할 경우, 서독 시민과 동등한 기본권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즉, 서독 정부는 1949년 제정한 기본법에서 이탈 주민의 거주 이전의 자유(제 11조)와 함께 구동독 지역 주민도 독일 국적을 소지한다고 규정(제116조)했다. 그리고 서독 은 동독이‘동독국적법’을 제정(1967.2.20)한 이후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동서 독이 기본 조약을 체결(1972.12.21), 사실상 1국가 2체제를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동독 주민 의 국적법 적용 문제에는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다시 말해, 기본조약이 동독인의 국적 문제 FES-Information-Series 에 관여할 수 없도록 했다. 이는 서독이 기본조약에 첨부된 외교 문서를 통해 󰡒 동서독 간 체 결된 기본조약이 동독 주민의 국적권과 관련된 문제를 규제할 수 없다 󰡓 라고 명백하게 밝히 고 있는 데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이와 같은 국적법 적용은 동독 이탈 주민들의 서독 정착 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법적 기반으로 작용했다. 긴급 수용법이 제정될 당시 동독 이탈 주민들은 서독의 거주 허가를 받기 위해 그들의 이 주가 ① 직계 존 ․ 비속간의 이산 가족 상봉을 위한 피난, ② 서독에서 주택과 직장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확실한 증명을 제시할 수 있는 피난, ③ 특별한 정치적인 이유로 긴급한 상황에 처 했기 때문에 시도한 피난, ④ 수용되지 않을 경우 당해자가 심한 어려움을 겪게 되는 피난 등 에 해당됨을 서독 정부에 증명해야 했다. 이를 증명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거주 허가를 받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동독 지역으로 강제 송환하지는 않았다. 거주 허가를 받지 못한 사람들도 계속 체류하면서 피난민 담당관청이 아닌 사회보장청이나 종교 계통의 구호 기관에서 구호를 받을 수 있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서독 지역에 일단 이주한 이후부터는 기본법상 보장된 권리를 차별없 이 보장해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가 조성되어 있었다. 이로써, 서독 내 구동독 피난민들의 수용 절차는 해당 요건 충족 여하에 따라 허가를 내 렸던 선별 허가제에서 단순 등록으로 끝나는 등록 수용제로 바뀌었다. 특히, 구동독 공산 정 권이 점차 독자적인 국가임을 강조하며, 국경선을 봉쇄하고 베를린 장벽을 구축한 이후부터 는 피난민의 거주 허가 신청이 기각되는 사례가 없었다. 그 결과, 허가증 발급 자체가 무의 미했다. 수용 허가 신청을 하지 않아도 동독에서 온 모든 이탈 주민은 기본법이 정한 국민 의 권리를 당연히 누릴 수 있었다. 2) 동독 이탈 주민 수용 과정 이탈 주민에 대한 구서독 정부의 정책은 기본적으로 이탈 주민들이 단순히 난민 차원이 아 닌 동포로서 서독 생활에 적응할 수 있게 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탈 주민의 수용은 연방 내무부 산하 연방행정청이 맡았다. 연방행정청은 이주자 심사 및 허가서 발급, 이주민의 입국 절차 결정, 수용소(임시 숙소) 건립 및 관리를 비롯하여 이탈 주민의 지역별 분할 등을 관장 FES-Information-Series 했다. 임시 숙소는 기센, 프리드란트, 뉘른베르크, 우나-마센 등 국경 부근에 총 4개가 건립되 었다. 이곳에서 동독 이탈 주민들은 신원 확인(개인 신상서 작성, 휴대 서류 기록, 이주 사유, 국경 출입 일자와 장소, 직업, 최후 거주지 및 일자리 등)을 거친 뒤, 이탈 주민으로 등록을 했다. 이어 간이 건강검진과 함께 정착지로 향하는 일정 및 지역 조정, 실업 및 연금 자녀 양 육 등에 대한 사항의 자문을 받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보안 담당 전문가들은 이탈자들이 동독의 정보기관 요원이나 비밀 경찰, 군인, 경찰 등 동독기관의 요원 여부를 가리기도 했다. 서독의 연방정보기관 요원들이 동독 탈출자들에 대한 조사 작업을 수행했으며, 이들의 업무 는 대외적으로 공개되지 않았다. 일정 조정과 지역 할당은 해당 도시의 거주자 숫자와 규모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노동력 부족으로 특별히 이탈자 수용을 원하는 지역은 규모와 상관없이 수용할 수 있도록 했다. 지 역을 할당받을 때 이탈 주민은 자신의 의견을 진술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서독의 어느 특정 지역에 친척이 있음을 증명하고 그곳에 거주자와 일자리가 주어질 경우 자 신이 원하는 지역으로 할당될 수 있도록 했다. 이탈 주민으로 등록된 자에게는 등록증 발급과 함께 환영금으로 일인당 200마르크(1마르크= 약 600원)가 지급됐으며, 별도 주정부 재원으로 임시 숙소에서 지낸 후 사회보장 차원의 혜택을 받기 시작할 때까지 가장에게는 일당 30마르크, 피부양 자 1인당 15마르크씩이 지급했다. 이와는 별도로 기독교나 가톨릭 단체에서 일 인당 일괄적으로 50마르크를 지급했다. 이탈 주민 중에는 긴급 수용 시설을 이용하지 않는 부류도 있었다. 동독을 이탈한 사람 모 두가 임시 숙소를 거쳐야 하는 의무는 없었기 때문에 친척이나 친구들을 찾아 직접 여행을 한 사람들은 서독 정부의 직접적인 수용 조치를 받지 않을 수도 있었다. 다만, 새 거주지에 도착한 이탈자들은 일주일 이내 주민등록을 관할하는 관청에 가서 주민등록 신고를 해야 했 다. 이와 같은 신고는 신분 증명과 여권 발급 및 사회보험 가입을 위한 기본 의무의 하나로 반드시 필요했다. 일반적으로 이탈 주민들은 입국 후 처음 2~3일간은 연방수용소에서 체류한 후 주정부 수 용소로 분산되었으며, 주정부 수용소에서 다시 2~3일간 체류한 후 최종 정착지로 분산되었 다. 연방수용소에서 주정부 수용소까지의 여행비와 이삿짐 운송비는 연방정부에서 지급했으 며, 개별 주택이 마련되기 전까지는 임시 거주지에서 생활했다. 임시 거주지는 공동 취사장이 FES-Information-Series 있는 기숙사에서부터 개별 부엌이 딸린 개인 또는 다세대 주택에 이르기까지 각 주나 지방자 치단체의 사정에 따라 다양했다. 수용자가 갑자기 많아질 경우 호텔 또는 기타 유료 숙박 시 설에 투숙시키기도 했다. 각 주정부 수용소에서 등록 절차 및 임시 거주지 결정 시까지 약 2주 정도, 정식 주택이 공급될 때까지는 2~3년이 소요되기도 했다. 1989년 후반 동서독 장벽 붕괴 전후 동독에서 온 탈출 ․ 이주자 수가 급증함에 따라 이탈 주 민의 체계적인 등록, 신체검사, 상담 지원 등이 더 이상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한꺼번에 밀어닥친 동독 주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연방정부는 연방군 시설, 국경 수비대 시설, 경찰서, 학교, 호텔, 천막 시설 등을 임시 수용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 기간에 는 많은 이탈 주민들이 긴급수용법의 지원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 다. 이에 서독 정부는 1989년 7월 임시 거주지 확보에 관한 법률 을 제정하여 대규모 탈출자 들의 수용 시설을 확보하는 대응책을 마련했다. 동독 주민의 대규모 입국으로 서독의 사회 경제적 불안이 점차 증가할 수 있다고 판단한 서독 정부는 탈출자 문제의 조속한 해결과 함 께 동독 내부의 개혁을 촉구, 사회적 안정을 기하는 방향에 정책적 주안점을 두었다. 이어 1990년 7월 1일에는 이주민의 임시 수용에 관한 재정 지원법 과 수용법 폐지에 관한 법률 을 제정, 발효시켜 긴급 수용법에 근거한 서독 이주 동독 주민에 대한 특별 수용 절차의 적용을 종료하고 이들의 정착을 위한 모든 종류의 정부 지원을 중단했다. 4. 동독 이탈 주민에 대한 정착 지원 제도 이탈 주민에 대한 구서독 정부의 정착 지원은 동독과 서독 사회가 지난 40년 동안 이질적 인 사회 발전을 거듭하여 왔기 때문에 실제로 이들이 서독 사회에 적응하는 데에는 많은 어 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문제 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탈 주민에 대한 구서독 정부의 지원 은 서독 사회에 대한 적응력 제고와 보상이라는 포괄적인 정착 지원 방법을 통해 이루어졌 다. 그 목표는 첫째, 재외국민 연금법에 따른 연금 제공 및 의료 보호, 실업 보호, 재해 보호, 공공 부조 등 사회보장 제도의 법적 규정을 통해 서독으로 이주 후 생활 안정을 얻을 수 있 도록 하는 것과 둘째, 서독 사회에 자연스럽게 동화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재사회화가 이루 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1) 주거 지원 및 정착금 지급 FES-Information-Series 이탈 주민이 각 주로 분산된 이후 주거가 결정되지 않을 경우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관할 주정부가 이주자를 위해 임시 수용소나 호텔 또는 민간 임대 주택 등 임시 거처를 마련 하여 일정 기간 거처할 수 있도록 했다. 각 주정부는 공공 임대 주택인 복지 주택 (Sozialwohnung)을 이탈 주민을 위한 주거 공간으로 건설하여 우선 거주할 수 있도록 했으 며, 이탈 주민들이 서독으로 이주한 후 일정 기간 소득에 비해 제반 지출 요인이 많은 점을 감안하여 일반 영세민에게 제공하는 월세 보조금 특례 규정을 적용, 임대 주택 월세 보조금 (Wohngeld) 신청 자격을 부여했다. 또한, 이탈 주민이 주택을 신축 또는 구매하고자 할 경우 에는 부담조정법에 따라 연방정부 재정에서 장기 저리 융자금을 제공했다. 주택 문제 이외에 도 가재 도구 마련을 위한 비용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서독 정부는 이탈 주민의 가구 규모를 감안, 장기 저리의 융자금을 제공했다. 서독 도착 6개월 이내 가계 생활 및 주거와 관련, 저 리의 융자를 받을 수 있도록 했는데, 융자금은 2년 거치 10년 상환의 조건으로 독신자에게는 3,000마르크, 가족일 경우 가족당 4,000마르크 외 가족 일 인당 1,000마르크로 최고 10,000마 르크까지 지원했다. 한편, 이주로 인한 소득 단절을 보상하기 위해 서독 정부는 정착금과 실업 부조금을 지급 했다. 정착금은 독일 이주 1년 전 기존 거주 지역에서 최소한 150일간 임금노동자로서 종사 한 경력이 있는 이주민에게 제공되었다. 정치범 또는 정치적 이유로 취업 활동에 지장이 있 었을 경우 이에 해당되는 기간을 취업 기간으로 인정해 주었다. 정착금은 개별 이주민의 종 전 소득을 서독 임금으로 재평가한 후 이를 5등급으로 나누어 각 해당 등급의 63%를, 최고 312일까지 지급했다. 실업 부조금은 자영업자와 가족 종사자에게 제공되었는데, 정착금의 경우와 같이 독일 이주 1년 전 최소 150일간 취업 활동에 종사한 경력을 지급 요건으로 두었다. 여기에도 이주민과 유 사한 교육 수준 및 직업 능력을 가진 서독 근로자의 임금을 기준으로 독신자의 경우 이의 56%, 부양가족이 있을 경우 58%를 매월 지급했으며, 지급 기간에는 제한을 두지 않았다. 정착금 또 는 실업 부조금을 받는 기간은 수혜액을 기준으로 하는 연금 보험료를 당사자와 연방노동청이 반씩 부담하는 조건으로 연금 가입 기간으로 인정해 주었다. 그 외에도 이탈 주민에게 취업 상 담, 직장 알선, 구직 활동비 보조, 이사 비용 보조, 취업 장비 구입비를 대부해 주었다. FES-Information-Series 한편, 전쟁 포로 혹은 정치범의 경우에는 본인이 신청할 경우 귀향자 재단이나 정치원호 재단에서 일시금 형태의 보상금을 받았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부상자 혹은 희생자의 가족은 연방전쟁보상법 및 연방원호법 에 따라 원호금을 받았으며, 이주 이전 거주지에서 재 산의 압류나 손괴 등의 피해를 입었을 경우 부담조정법 에 의거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도 록 했다. 2) 사회보장 혜택 동독 이탈 주민들에게 연방사회보장법 에 따라 서독 주민에 준하는 의료보험, 연금보험, 실 업보험 및 산재보험 혜택을 주었다. 연금보험과 관련해서는 서독 이주 전 취업 기간, 전쟁 또 는 정치적 사유로 인한 구속, 교육, 실업, 질병 기간 등을 모두 연금 기간으로 산입했다. 그러 나 1990년 5월 18일 동서독 화폐 ․ 경제 ․ 사회통합조약 이 체결된 이후 이주한 동독 주민의 경 우에는 동서독 통합 경과 규정에 따라 동독의 연금 규정을 적용했다. 산재보험의 경우, 동독에서 발생했던 산재도 보험 급여 대상으로 인정했으며, 의료보험은 출신 지역을 떠나 2개월 이내에 입국한 자로서 정식 거주 허가를 받은 이후 3개월이 경과한 질병에 대해서는 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실업 부조를 받는 이탈 주민에 대해서는 실업 부조를 받는 동안 당사자의 의료 보험료를 연방정부가 부담했다. 이와 함께 출신 지역 에서 근로 활동 중 산업재해를 당한 후 장애 상태로 이주한 이탈 주민에 대해서는 서독 산재 보험의 수혜 자격을 부여했다. 그리고 산재보험 당사자의 종사 업종이 출신 지역 산재보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어 급여 혜택을 받지 못했을 경우라도 서독 제도에 상응하는 보험 급여 를 지급했다. 그 밖에도 생계가 어렵거나 기타 질병, 장해 등 특수 상황에 처한 이탈 주민에게는 일반 서독 주민과 동등한 조건으로 생계비 및 거주비, 의료 보호를 비롯한 공공부조 차원의 지원 을 제공했다. 특히, 전 거주지에서 신체적 또는 경제적으로 막대한 불이익을 당한 이탈 주민 (전쟁 포로, 정치범 등)에 대해서는 사회보장 차원의 지원 외에도 별도의 피해 보상을 해주었 다. 그 밖에도 정착 초기 일자리를 찾지 못한 이탈자들은 서독 의사의 진단을 통해 이탈자 신분을 󰡒 병가 󰡓 상태로 두어, 이 기간에 국가에서 질병 보조금을 받을 수 있게 함으로써 단기 재정적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했다. 3) 교육 지원과 자격 인정 조치 FES-Information-Series 서독 정부는 이주민의 학교 교육, 직업훈련 교육을 위해 이들이 일반학교 및 직업학교의 교육 과정을 이수할 수 있도록 함은 물론, 각종 연수 교육, 직업전환 교육, 언어, 직업 관련 세미나, 대학 입학 준비 세미나 등에 참가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교육관련 지원금에는 교육 비 외 생계비, 기타 비용, 보험 비용 등이 있었으며, 지원금 신청은 서독 도착 즉시부터 24개 월 이내에 하도록 했다. 지원 기간은 원칙적으로 36개월,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 48개월까지 연장해 주었다. 한편, 연방교육훈련 촉진법에 따라 통상 30세 미만 이주민에게 대학 교육비를 지급했으며, 학자들을 위해 경력에 도움이 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계획, 추진했다. 이탈 주민이 취득한 각종 자격은 주정부가 서독의 자격 시험과 내용면에서 동등하다고 전 제할 경우 그대로 인정했다. 동등성 여부는 관계 인정 기관이 결정했다. 이는 동독의 자격증 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서독의 자격증으로 󰡒 전환 󰡓 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와 같은 기존 교육 내용에 대한 인정은 이탈 주민으로 하여금 노동시장에서 균등한 취업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하며, 실업 수당 및 실업 보조금 수령액뿐만 아니라, 연금 산정 기간 결정에도 도움 을 주었다. 물론, 학력과 경력을 동서독 간의 변화된 노동력 수요나 기술력 차이로 그대로 인 정하기에는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이주민이 직업을 갖고 정착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동독에서 취득한 자격증에 상응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필 요한 경우 보충 교육을 실시했다. 또한, 서독 교육 기관이 동독의 대학 교수와 학자들을 수용 할 의사를 보일 경우, 2년 동안 연방정부에서 일체의 인건비를 부담했다. 이들 교육 기관은 2년 후 채용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했다. 4) 취업 상담 및 주선 이탈 주민에 대한 취업 상담, 직업 교육 및 취업 알선 등은 거주지의 노동기관에서 전담했다. 연방노동청은 이들의 취업 촉진을 위해 소요되는 비용, 예를 들어 직업교육 기간 중 생계비 보 조, 여비, 장비 구입에 소요되는 비용을 무상 지원하거나 대부해 주었다. 자영업을 원하는 자는 유리한 조건의 융자를 제공했으며, 자산 형성 장려금을 지급했다. 농업에 종사하고자 할 경우 FES-Information-Series 보조금과 함께 10만 마르크에서 15만 마르크에 이르는 장기 저리의 융자금을 지원했다. 서독 정부가 동독 주민의 정착을 위해 지원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5 . 이탈 주민의 서독 사회통합 프로그램 동독 이탈 주민들은 사회보장 차원의 지원을 통해 생활의 안정을 꾀할 수는 있었으나, 체 제 및 문화적 이질성으로 인한 사회 적응에는 문제가 많았다. 새로운 세계관과 가치 의식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였으며, 적응 과정에서 심리적 불안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점을 고려하여 서독 정부는, 이탈 주민이 서독 사회에 동화하는 것을 돕기 위해 현지 주 민과 이탈 주민이 파트너라는 관계를 설정하고, 그들 스스로 체제에 자연스럽게 적응해 나갈 수 있는 방안을 마련했다. 예를 들어, 시민대학(Volkshochschule) 프로그램에서 이탈 주민들 거주지 마련 생활 상담과 후견 생활용품, 가구 구입을 위한 저리 융자 학력 인정 교육촉진금 지원 대졸자 사회 진출 보조 자녀 수당 사회복지 지원 동독 이탈 주민 정착 지원 내용 임시수용소 주택소개 복지주택 우선입주권 제공 친인척이나 기타 연고를 통한 주택구입이 불가능 할 경우, 주택건설법 제25조에 따라 동독 출신 이주민에게 5년 동안 주택 입주 혜택 새로운 생활환경 소개 독신자, 2인 이상 가족 기본금 기타 가족 1인당 3,000DM 4,000DM 1,000DM 최고액 10,000DM 동독 취득학교 졸업증명서나 직업 연방실향민법 교육 자격증명서 인정 교육 기간에 생활비 보조 직업 정착 지원 자녀수에 따라 양육비 지급 의료 보호, 질병 급부 연금보험 실업보험 실업수당 산재보험 전쟁희생자 원호 사회부조 연방교육촉진법 학업 추가 이수 시 장학금 지원 연방자녀수당법 의료보험법에 따른 보험 급부금 수혜 연금법에 다른 개별적 급부금 수혜(동독, 동베를 린에서의 기여금 불입 기간 포함 산정, 자영업 자의 기여금 추가 납입 시 연금 대상에 포함) 동독에서의 실직 기간, 정치범으로서 구류 기간, 자영업 기간도 취업 기간에 포함 산정 단체협약임금의 63% 서독 보험법에 따른 급부 제공 연방원호법에 따라 원호 생계비 지원, 주택임대료 지원, 난방비 보조금, 의복과 가구에 대한 보조금 FES-Information-Series 이 현지 주민과 만나 서로 대화할 수 있도록 했다. 즉, 시민대학 수강자들을 대상으로 저녁 시간 초등학교나 고등학교 강의실을 이용, 현지 주민들도 참석한 가운데 대화의 광장을 열어 이주 동기 및 상황, 독일 현지 생활 등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서는 먼저 주제 발표를 한 후 서로 질문을 하거나 일정 주제에 대한 영화나 비디오를 함께 보고 토론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시민대학에 참가한 현지 주민들과 이탈 주민들이 같 이 야외로 소풍을 가거나, 연방의회, 박물관 등을 방문하면서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도록 했다. 그 밖에도 이탈 주민들이 체육 동호인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할 수 있게 함으로써 공동 체 의식을 함양하고 접촉을 통해 자기 발전과 성취욕을 북돋울 수 있도록 했다. 연방 및 주 정치교육센터와 동화 대책 담당단체들은 이탈 주민들의 참가 신청을 받아 주 말 세미나를 마련했다. 세미나의 주제는 일반적으로 시민 사회의 기능과 역할, 학교와 교육, 직장 생활, 법률과 경제 문제, 보건, 교회와 종교, 휴가와 여가 선용을 비롯하여 교육과 문화 등 다양했다. 그러나 정치 교육과 관련해서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버리고 새로운 자유민 주주의 사상을 주입시키기 위한, 다시 말해 소위 사상 전환 교육은 실시하지 않았다. 이는 이 데올로기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이탈 주민들이 민주 시민으로서 모든 것을 자체 적으로 판단, 결정하고 직접 해결할 수 있게 하는 데 역점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서독의 정 치, 경제, 사회의 작동 원칙과 기능을 설명해주고, 각자가 직접 보고 경험함으로써 스스로 판 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동독 이탈 주민들이 서독의 매스미 디어와 동서독 간 친지 방문, 전화, 우편 교류 등을 통해 서독 체제와 사회에 대해 이미 상당 한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 사상 교육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한 측면도 있었다. 그렇지 만 연방주의 정치 ․ 행정 기구 및 그 기능 등에 대해서는 학습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하여 정치 교육에 참가할 수 있도록 했다. 이탈 주민을 위한 사회동화 프로그램은 민간단체가 독자적으로 자문, 세미나 및 기타 동화 프로그램을 마련, 운용 하고, 정부는 이들 단체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방법을 취했다. 동화 프 로그램을 운용한 민간단체로는 카리타스(Karitasverband), 디아코니 재단(Diakonisches Werk), 근로자 복지단체, 독일교회협회(Deutsche Kirchen Gemeinde), 독일 가톨릭난민협의회 및 아 커만협회(Ackermann Gemeinde) 등이 있었다. 이들 비정부 단체들 가운데 기독교와 가톨릭 단체는 독일사회관계협회(Deutsche Gesellschaft f ü r Sozialbeziehungen) 를 만들어 동독의 군 인, 경찰과 기타 무력 단체에 속했던 자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정착을 지원했다. 이들이 서독 에서 일자리를 찾아 정착하기가 비교적 어렵다는 점을 감안했기 때문이었다. 본 단체의 운영 책임은 퇴역 장교가 맡았으며, 자원 봉사자들이 이를 뒷받침했다. 6. 맺음말 FES-Information-Series 이탈 주민에 대한 서독 정부의 정책은, 이탈 주민이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 서독 주민과 동등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했다는 측면에서 볼 때 성공한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탈 주민들에게는 차별화된 이주 동기, 체제의 상이성, 이탈 주민의 적응력을 비롯하여 서독 주민의 동독 주민 이주에 대한 차별적 반응 등에 따라 서독사회에 정착하는 데 겪는 일반적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직업과 삶의 질,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생명을 건 탈출을 한 사람들이나 정치적 박해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동독 당국에 이주 신청을 하고 장 기간을 기다린 결과 이주 허가를 받은 사람들은 새로운 체제에 대한 적응력이 컸다. 또한, 대 부분의 이탈 주민들도 서독 체제에 무난하게 적응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렇지만 일상생활의 각 영역에서 다양하게 경험하게 되는 이질적인 면을 완전히 극복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서독 정부의 이탈 주민에 대한 제반 정책은 그와 같은 변화 된 환경에서 발생하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합법 이주민이나 탈출 이주민에 관계없이 모두 독일 국민으로 간주하여 수용했던 정책은, 이들이 서독 사회에 적응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으며, 서독의 사회보장 제도 또한 이들에게 서독 주민과 다름없이 경제적인 안정을 이룰 수 있는 바탕을 제공해 줌으로써 서독 사회에의 적응을 가속화시켰던 것으로 판 단된다. 서독의 이탈 주민에 대한 정책은 생존이 뒷받침된 상황에서 누구든지 자신의 능력을 최대 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 키기에 충분하다. 이탈 주민의 효율적 정책 추진은 바로 이탈 주민에 적용하는 법과 제도가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함과 동시에 사회보장 제도를 통한 자연스러운 정착 지원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는 데 있음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분단기 동서독 간 교통 교류 실태와 서독의 대동독 교통부문 지원 정책 최 연 혜, 한국철도대학 운수경영학과 교수 2002년 11월 󰠲󰠲󰠲󰠲󰠲󰠲󰠲󰠲󰠲󰠲󰠲󰠲󰠲󰠲󰠲󰠲󰠲󰠲󰠲󰠲󰠲󰠲󰠲󰠲󰠲󰠲󰠲󰠲󰠲󰠲󰠲󰠲󰠲󰠲󰠲󰠲󰠲󰠲󰠲󰠲󰠲󰠲󰠲󰠲󰠲󰠲󰠲󰠲󰠲󰠲󰠲󰠲󰠲󰠲󰠲󰠲󰠲󰠲󰠲󰠲󰠲󰠲󰠲󰠲󰠲󰠲󰠲󰠲󰠲󰠲󰠲󰠲󰠲󰠲󰠲󰠲󰠲󰠲󰠲󰠲󰠲󰠲󰠲󰠲󰠲󰠲󰠲󰠲󰠲󰠲󰠲󰠲󰠲󰠲󰠲 지난 9월 18일 경의선과 동해선의 철도 및 도로 연결 공사가 착공되었다. 실로 반세기가 넘게 지속되어 온 분단과 단절의 역사를 극복한다는 감회와 더불어, 철도 및 도로의 연결이 한반도와 주변 국가들에게 가져올 다양한 파급 효과 들에 대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교통 인프라의 연결과 이의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운 용에 대해 확고한 정치적 의지와 더불어 실용적인 차원에서 현안 문제들을 사전에 검토하고, 대처 방안을 강구함으로써 시간과 시행착오를 줄여야 한다. 여기서는 분단 기간의 동서독 간 교통교류 실태와 서독의 대동독 교통부문 지원 정책 을 연구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였다. • 동서독은 40여 년의 분단 기간에 베를린 봉쇄 등 동독의 방해로 실질적인 교류가 미미했던 때는 있었지만 교통 교 류가 완전히 단절된 적은 없었다. • 서독 정부는 한결같이 동서 교통로 연결을 통한 인적 교류 활성화를 위해 노력했다. 1960년대 말부터 통일 정책으 로 추진된 소위 동방 정책의 가장 중요한 목적도 적절한 교통 정책적 합의점을 도출함으로써 동서독 간의 인적 교류를 확대하는 데 있었다. • 서독의 대동독 교통부문 지원 정책은 첫째, 일명 통행료 일괄부담금과 둘째, 교통 인프라 시설에 대한 투자 등 두 가지 형태로 구체화된다. 통행료 일괄부담금은 서독 정부가 매년 동독에 지불한 금액으로 특정 목적과 무관하게 유입된 반면, 교통 인프라 건설 투자는 특정 사업과 관련하여 지불되었고, 동독으로부터 반드시 상응하는 경제적 및 경제 외적 대가 내지는 반대 급부를 받아냈다. • 동독의 교통 인프라에 대한 막대한 투자에 대해 서독에서도 야당과 언론을 중심으로 퍼주기 라는 비난이 비등하였 다. 그러나 서베를린이 동독 내에 위치하는 특수한 상황은 서베를린으로 가는 연결 통로 확보라는 명분을 만들어 줌으로써 국민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상대적으로 유리하였다. • 교통부문에 대한 서독의 대동독 지원은 동독 정부의 재정난 해소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통일이 되고 난 후의 시점에서 평가할 때, 교통 인프라 건설이 막대한 투자액과 장시간을 요한다는 점, 그리고 타 분야 교류와 발전의 전제 조건이라는 점 등에서 결국 독일의 통일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평가받고 있다. 󰠲󰠲󰠲󰠲󰠲󰠲󰠲󰠲󰠲󰠲󰠲󰠲󰠲󰠲󰠲󰠲󰠲󰠲󰠲󰠲󰠲󰠲󰠲󰠲󰠲󰠲󰠲󰠲󰠲󰠲󰠲󰠲󰠲󰠲󰠲󰠲󰠲󰠲󰠲󰠲󰠲󰠲󰠲󰠲󰠲󰠲󰠲󰠲󰠲󰠲󰠲󰠲󰠲󰠲󰠲󰠲󰠲󰠲󰠲󰠲󰠲󰠲󰠲󰠲󰠲󰠲󰠲󰠲󰠲󰠲󰠲󰠲󰠲󰠲󰠲󰠲󰠲󰠲󰠲󰠲󰠲󰠲󰠲󰠲󰠲󰠲󰠲󰠲󰠲󰠲󰠲󰠲󰠲󰠲󰠲 1. 서 론 FES-Information-Series 독일과 한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지구상에 몇 안 되는 분단 국가의 운명을 함께 해 왔다. 그러나 독일은 1990년 통일을 이루었고, 철의 장막, 죽의 장막이라 불리던 러시아나 중국과도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한 이 시대에 남북한의 교류 관계는 여전히 극도로 제한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 9월 18일 착공된 경의선과 동해선의 철도와 도로 연결 공사는 실로 반세기가 넘게 지속되어 온 분단과 단절의 역사를 극복한다는 감회와 더불어, 철도와 도로 연결이 한반도와 주변 국가들에게 가져올 다양한 파급 효과들에 대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 동안 국토 분단으로 인해, 섬 아닌 섬으로 고립되어 있던 우리나라가 동북아 물류의 기 ․ 종착지로서 아시 아와 유럽을 잇는 철의 실크로드 시대의 주역으로 발돋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갈등과 대치 국면으로 치닫던 남북 관계도 화해와 상생의 새로운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철도와 도로 연결이야말로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일방적으로 퍼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양국 모두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올 수 있으며, 인프라의 연결을 통한 물리적 통합은 다른 분야 교류의 전제 조건이 된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남북한 양측이 모두 연결된 철도와 도로가 효율적, 경제적으로 이용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야 한다. 또한, 확고한 정치적 의지와 더불어 실용적인 차원에서 현안 문제들을 사전에 검토하고, 대처 방안을 강구함 으로써 시간과 시행착오를 줄여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분단 기간의 동서독 간 교통 교류 실태와 서독의 대 동독 교통부문 지원 정책을 살펴보기로 한다. 2. 동서독 교통조약 체결 과정 1944년 9월 12일 전승 4대국 간 체결된 런던협정의 합의 사항에는 동서독 통행에 관한 교통, 통신에 대한 공동 정책도 포함되었으나, 서방 연합국과 소련의 상이한 정치 노선으로 인해 백지화되었다. 또한 동 협정에는 베를린 분단 원칙이 합의된 반면, 서방 연합국의 점령지였던 서독으로부터 서베를린에 접근하는 방법은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후 서독과 서베를린의 연결 문제는 갈등의 불씨로 남게 되었다. 실제로 1945년 연합군 사령관이 서베를 린에 진입하려고 했을 때, 그 때까지 단독으로 베를린을 점령하고 있던 소련군 사령관은 철도, 도로, 항공에서 각 각 1개씩의 노선만을 허용하였다. 이러한 분쟁은 결국 1948년 6월 24일 베를린 봉쇄로 이어진다. 1949년 5월의 뉴 욕협정은 소련 측이 거의 일 년 동안 단행했던 베를린 봉쇄와 연합국의 베를린 공수 작전 을 종식시켰다. 연이어 개최된 파리 외무장관 회담에서는 뉴욕협정을 준수하고, 1948년 3월 이후 교통 장애 제거에 대해 합의했다. 그렇 지만 동독은 1952년 총 12개소의 도로 통과소 중 8개소를 철폐하는 등 억제 정책으로 일관해 동서 간 교통 장애는 지속되었다. 반면 동독 주민의 서독으로 향한 탈주는 줄을 이어, 1949년~1961년 사이에 270만 명을 넘어섰다. 소 FES-Information-Series 련은 이 문제의 원인이 베를린의 분단 상황에 있다고 보고, 1958년의 소위 베를린 최후 통첩에 이어 1961년 8월 13일 베를린 장벽을 설치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독일의 분단은 고착화되었고, 동서독 간 교류 및 베를린의 교통 장애와 긴장이 고조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독 정부의 끈질긴 노력으로 동독의 연금 수급자에 한해 서독행 개 인 여행이 허용되는 등 교류 장애를 완화하는 조처들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동독의 억압과 동구권 중심 의 경제 관계로 인해 1970년대 이전까지는 동서독 간 실질적인 교류는 미미한 수준에 머물렀고, 인적 교류 역시 극히 제한적으로만 허용되었다. 동서독 간 교통 교류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독 브란트 수상의 동방정책(Ostpolitik) 과 냉전과 긴장 관계를 완화하려는 국제 정세에 힘입어 급진전했다. 무엇보다 동서독 간에 중요한 교통 관련 협약들을 체결함으로써 향후 교통 교류의 법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우선, 서독은 러시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와 「동구조약」으로 불리는 일련의 조약을 맺는다. 이 조약들은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유럽 정세의 정상화와 평화 정착, 현재의 국경선 인정 과 불가침, 무력 사용 포기 등이 골자다. 동구조약은 그 자체로는 교통 문제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의 잔재를 청산하고, 독일 내의 냉전 상태를 실질적으로 종식시킴으로써 동서독 간 교통협약이 FES-Information-Series 가능하도록 만들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1971년 9월의「4대국 협정」에서는 4대 승전국이 여전히 독일 문제에 관 해 책임과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면서도, 동서독이 스스로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할 수 있다는 것과 구체적 으로 민간인의 동독 통과 교통을 용이하게 할 의무가 있다고 명시해 동서 교통 교류의 기반을 제공하였다. 위의 [그림 1]에서 볼 수 있듯이, 1971년 12월 20일 동서독 간에 「통과교통조약」이 체결되었고, 같은 시기에 동독과 서베를린 사이에 「여행 및 방문협정」이 맺어졌다. 「통과교통조약」은 서베를린이 동독 내에 위치한다는 특수한 상황에서 비롯된 조약으로서 특히, 교통 부문에서 동서독이 당사자 자격으로 체결한 최초의 협정이라는 점, 그리고 독일이 통일될 때까지 약 18년 동안 매일 적용되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총 21항으로 구성된 조약의 내용은 [표 1]에 정리되어 있다. 4대 승전국의 지원 하에 「통과교통조약」과 「여행 및 방문협정」이 조인됨으로써 서독과 서베를린 간의 연결 교통로가 확보되자, 다음 단계로는 양 국가 간에 일반적인 교통협정이 추진되었다. 즉, 1972년 6월의 「교통조약」 과 같은 해 12월의 「기본조약」은 양독 간 인적 교류를 제도화함으로써 가족 및 친지 방문의 생활화와 연간 수백 만 명에 달하는 상호 방문의 길을 열어 놓았다. 1974년 이후부터 통일이 되기까지 체결된 20여 개의 후속조약이나 보완협약들도 동서독 교통 교류를 원활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사민당-자민당 연립 내각의 2차 연도에 접어들면서 야당과 언론을 중심으로 브란트 수상의 동방정책에 대한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특히, 1972년 12월 조인된 「기본조약」은 상주대표부 교환, 제3국의 양독 공 동 승인 인정, 양독의 제3국 공동 승인, 양독의 유엔 동시 가입, 양독의 직교역과 교류 합의, 상호 불가침 등의 내 용을 포함하고 있어, 서독 내에서 많은 비판과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심지어 바이에른 주정부는 서독연방헌법재 판소에 동 조약의 위헌성 여부를 제소하였는데, 헌재는 적법하다는 판결을 내리면서도, 동독이 외국이 아니라 서독 과 마찬가지로 독일제국(Deutsches Reich)의 일부임을 천명하였다. 동방정책에 대한 서독 내의 논쟁이 계속되면서 양독 간 교통 교류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지만, 1970년대 초에 체결된 일련의 교통 관련 협정들은 양독 간 의 인적 교류를 활성화하고, 나아가 내독 무역 거래, 비상업적 물품과 이전 거래, 우편, 전신 ․ 전화 분야의 협력, 교 통 및 여행 등의 협력, 경계선 확정, 법제 ․ 문화 ․ 과학기술, 교회, 청소년, 스포츠, 보건 위생과 환경보호, 수의학, 언 론 ․ 정보 부문 등 사실상 사회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분야의 교류 ․ 협력 증진에 기여하였으며, 궁극적으로 민족의 동 질성 확보를 통해 1990년 독일이 통일을 이루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FES-Information-Series 3. 분단 기간 중 동서독 간 교통 교류 현황 FES-Information-Series 1949년 이래 집권한 모든 서독 정부는 동서독 간 인적 교류를 추진하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동독 정부와 끈질긴 협상을 해서 인적 교류의 제도화를 꾀하는 한편, 어려운 수속과 절차를 거친 후 서독을 방문하는 동독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우대 정책을 제공하였다. 비행장, 역, 접경 도시, 항구 등에서 적십자사, 종교 단체 및 일반 구호기관 등에서 영접과 안내를 비롯한 편의를 제공하고 정부에서는 1인당 연 1회에 한해 100마르크(DM) 의 보조금을 지급하였다. 또한, 동독인에 대한 비자 면제 조치와 더불어 본인이 원하는 경우 서독 주민증을 발급해 주었다. 반면, 동독은 인적 교류에 상당히 소극적으로 대처하거나 억제하는 정책으로 일관하였으며, 서독의 재정지 원 등에 대한 대가성으로 마지못해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림 2]에서 볼 수 있듯이 동서독 간 교통 교류의 유형은 합법적인 것과 비합법적인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가. 통과교통 교류 실태 1) 여 객 서독과 서베를린 간 교통로 확보는 1949년 이래 집권한 모든 서독 정부의 주요 관심사였을 뿐 아니라, 서방 3개 FES-Information-Series 연합국들이 적극 지원한 「베를린 정책」의 핵심 사안이었다. 「통과교통조약」이 발효된 이래 서독과 서베를린 (인구 200만 명)을 왕래하는 여객의 통과 교통량은 급격히 증가하였다. 위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교통 수단별로 보면, 여객의 통과교통에서는 철도보다는 승용차나 버스의 수송 분담률이 현저히 높았다. 항공 교통에 대한 권한 은 여전히 4대 전승국의 관할 하에 있었기 때문에, 「통과교통조약」에서는 제외되었다.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통일 직전인 1988년 약 2,600만 명의 여행자들이 서베를린을 왕래하였다. 2) 화 물 1949년 뉴욕협정에서 베를린 봉쇄 해제가 합의되면서, 서독과 서베를린 간 화물 열차의 1일 13편성 통과운행이 결정되었다. 6편성은 소위 흑색 열차 로 석탄, 석유 등 에너지 관련 화물을 수송하였고, 나머지 7편성은 유색 열 차 로 우편물, 컨테이너 등을 수송 하는 열차였다. 그리고 이와는 별도로 1일 3편성의 군사용 철도 운행도 협상되 었다. 1972년 통과교통조약이 체결된 후 철도의 수송 수요가 큰 폭으로 감소한 뒤에도 동독은 위의 협약 내용을 준수하였다. 철도 화물 수요가 계속 감소하면서 열차 다이아(운행 계획)에 정해진 화물 열차들이 운행하지 않는 경 우에도 그 다이아를 비워 놓았기 때문에 동독철도청에 수입 결손이 발생하였다. 1972년~1990년 사이에 장거리 도 로 화물 수송량이 2배 이상 증가한 반면, 철도를 이용한 통과 화물은 1979년까지는 답보 상태로 유지되다 그 이후 에는 소폭으로 감소하였다. 내륙 수로를 통한 통과 화물량은 같은 기간에 거의 반 이하로 감소되었다. FES-Information-Series 나. 내독 간 교통 교류 1) 인적 교류 우선, 동독 주민의 서독 방문 현황을 살펴보면, 동독은 1953년부터 연금 수급자(남자: 65세, 여자: 60세)들에 한 해 제한된 범위에서 서독 방문을 허용하기 시작했으며, 1972년부터는 서독 거주 가족의 생일, 영세, 결혼, 사망 및 금은혼식 참석 등 소위 긴급 가사 사유로 인한 서독 방문을 허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독의 국가안전원이 동독 주민의 서독 방문 신청에 대해 까다롭게 심사했기 때문에, 1982년 이전까지는 실제로 서독을 방문한 동독인 숫자는 연간 50만 명 수준에 머물렀다. 1986년부터 연금 수급자로 제한되었던 긴급 가사 사유로 인한 여행이 연금 수급자 이하 연령층에도 허용됨으로써 동독인의 서독 방문이 급증하였다. 서독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1986년 중복 여행 횟수까지 포함한 연간 방문객 숫자는 평균 140만 명으로 추산되었고, 1987~1989년 사이에 이 숫자는 연 200만 명 까지 증가하였다. 1987년 서독을 방문한 동독인의 숫자는 모두 340만 명에 달하였는데, 이 중 연금 수급자 220만 명, 긴급 가사 사유자가 120만 명이었다. 통일 직전인 1989년에는 서독을 방문한 후 서독에 눌러 앉 은 동독의 연금 수급자가 6만 명에 달하였다. 통일 전 서독인의 동독 방문은 이보다 훨씬 많았다. 1963년까지 연 1회로 제한되어 있던 동독 방문 횟수 제한이 완화되면서 동독을 방문하는 서독인의 숫자가 크게 늘어, 이미 1964년에 180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동독 정부가 여러 가지 제약을 가하면서 1969년에는 110만 명으로 줄었는데, 이 숫자가 최저 기록이다. 1972년 통과교통조약은 직접적으로는 통과교통 교류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지만, 내독 교류에도 많은 제약을 완화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예컨대, 연간 방문 횟수나 연 30일로 제한되어 있던 방문 일수 등이 증가되었고, 친척 방문으로만 한정되었던 방문 목적도 스포츠, 문화, 종교 교류 등의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었다. 1987년~1989년 사이에 서독인으로서 동독의 가 족 및 친지 방문, 관광 여행, 경계선 부근 주민의 수시 방문, 동베를린에 1일 체류(1988년 3월부터는 2일로 연장), FES-Information-Series 박람회 참관 및 사업 여행 등을 목적으로 동독을 방문한 숫자는 550만 명으로 집계되었다. 동서독 주민 간 교통 교류를 교통 수단별로 구분해 보면, 서독 주민이 동독 방문 시 약 75%가 승용차를, 그리고 23% 정도가 철도를 이 용하였다면, 동독 주민이 서독을 방문하는 경우에는 거의 정확하게 반대로, 즉 75% 정도는 철도로, 23% 정도는 승 용차를 이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동서독 주민 교류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언급할 사항은 최소 의무 환전금 제도이다. 이는 동독이 외국인의 동 독 출입국을 관리한다는 명분으로 동독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 부과하던 의무 조항으로 일정 금액을 동독 마르 크로 환전해야 하는 제도였다. 서독인의 경우, 처음에는 일인당 일일 6.50마르크를 의무적으로 환전해야 했는데, 이 금액은 통과교통조약, 교통조약, 기본조약 등 일련의 조약들이 체결된 후인 1973년 11월부터는 두 배, 즉 일 인당 일일 13마르크로 인상되었다. 이는 1980년 다시 25마르크로 큰 폭으로 인상되었는데, 이로 인해 동독을 방문 하는 서독인의 숫자가 30% 이상 감소되어, 동독의 수입은 오히려 감소되었다. 동독은 어린이와 연금 수급자들에 대해서는 15마르크로 할인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동독을 방문하는 서독인의 90% 이상이 상점이 문을 닫는 주말 에 친척을 방문하는 경우라서, 환전한 돈을 동독의 친척에게 주고 오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재환전도 되지 않았 고, 또한 반출도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소 의무 환전금 제도는 동독이 아무런 대가나 의무 없이 외화를 벌어들이는 또 하나의 수입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연간 15억~30억 마르크의 수입을 확보한 것으로 추 산된다. 반대로, 동독에서 서독을 방문할 때는 일일 최고 15 마르크로 환전 금액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독을 방문하는 동독인들은 서독의 친척이나 친지의 재정적인 도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동서독 간 인적 교류 형태 중 합법적 이주가 가능했다. 1961년부터 실시된 이 제도는 동독 주민들이 동독 정부 에 제출한 이주 신청서가 심사를 거쳐 승인될 경우 서독으로 합법적으로 이주할 수 있는 제도였다. 몇 년씩 걸리 는 긴 심사 기간, 그 동안의 직업적 불이익과 국가안전원의 처벌 위협, 감시 등에도 불구하고, 이주 신청자의 숫자 는 상당히 많았다. Rehlinger 보고서에 따르면, 1965년~1989년 사이에 25만 명이 이런 방법으로 동독에서 서독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서독으로 이주한 동독 주민들은 자동적으로 서독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한편, 1973년 조인된 기본조약에는 일정 범위의 접경 지역 주민들 간의 방문 교류를 허용하는 조항이 들어 있었는데, 해당 주민의 약 10% 정도만이 이 조항을 이용한 것으로 나타나 현실적 의미는 적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동서독 간 교류는 비합법적 형태, 또는 비공식적 합의에 따른 유형도 있었다. 동독 탈주자, 정치범의 인도, 체제 FES-Information-Series 반대자의 추방 등을 들 수 있다. 우선, 동독 탈주는 양독이 분단된 직후부터 지속된 현상으로서 동독이 1961년 베 를린 장벽을 설치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탈주 도중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고, 탈주에 실패하거나 탈주를 방조하는 경우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됨에도 탈주자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동독 정부가 발표한 탈주자 숫자는 연간 200~400명 정도지만, 서독의 시민단체들은 1970년~1990년 사이에 탈주자의 숫자를 25,000명으로 추 산하였다. 또한, 서독 정부는 1963년부터 동독에 수감되어 있는 정치범을 일정 보상금을 지불하고 인도받았다. 연방정부뿐 아니라, 교회, 시민단체, 베를린 주정부 등이 정치범 인도를 위해 노력했으며, 일 인당 보상금은 4만 마르크에서 1989년 무렵에는 9만 6천 마르크까지도 지불하였다. 외환 부족에 시달리던 동독 정부가 단순 범죄자 등을 정치범 으로 위장하여 인도하는 등 이 제도를 악용한다는 루머가 끊이지 않았다. 인도 과정은 동독의 국가 안전원이 정치 범을 통과 고속도로인 헤름스도르프-로베다 사이의 휴게소에서 서독측 담당자에게 인도하면, 버스 등을 통해 통관 절차 없이 국경 연결 지점을 거쳐 헤센(서독)으로 이송되었다. 1982년부터는 바르타 근처의 폐쇄된 도로에서 인도 절차가 진행되었고, 1987년 이후에는 동독 측이 해당 정치범 을 일단 석방시키고 나서 곧바로 이주 허가증을 발급하여 서독으로 추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서독 정부의 이러한 인도적 노력 을 통해 인도된 정치범의 숫자는 33,755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2) 내독 간 화물 운송 독일의 항복으로 인한 2차 대전 종결 이후 1949년 양독의 분단이 고착화되고,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으 로 동서독은 각각 냉전 체제의 최전방에서 대치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독 물동량은 꾸준히 증가되었다. 초 창기에는 서독의 내독무역신탁관리청(Treuhandstelle f ü r den innerdeutschen Handel) 과 동독의 무역부(DIA: Deutscher Innen- und Aussenhandel) 간의 합의가 내독 무역의 법적 토대로 작용하였다. 1972년 이후 서독 정부는 내독 무역에 대해 어떠한 통제나 관리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독 측에서는 매우 자유롭게 이루어졌다. 서독은 내독 무역을 국내 상거래와 대외 무역의 중간 형태로 간주하였고, 따라서 수입과 수출이라는 용어 대신 구입과 납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분단기 내내 동독에서 서독으로 보내는 물동량은 서독에서 동독으로 보내 는 물동량의 2배가 넘는 수준이 유지되었다. 그 이유는, 동독은 서독으로부터 정밀기계, 기계, 생산설비, 전자기기 등 값비싼 상품들을 구입하였고, 대신 서독으로 보내는 상품들은 부피가 많이 나가는 대량 소비 제품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무역액과 중량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다. 내독 무역이 각각의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의미도 달랐다. 동독의 경우, 전체 무역의 7.3%로 서독은 소련 다음으로 중요한 무역 파트너였지만, 서독의 경우 에는 내독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1.3% 에 불과하였고, 이는 1985년 이후에는 더욱 감소했다. 연간 수출입 액수 는 각각 70억 마르크 정도였다. FES-Information-Series 4. 서독의 대동독 교통부문 지원 정책 서독의 대동독 교통부문 지원 정책은 두 가지 형태로 구체화되는데 첫째, 일명 통행료 일괄부담금과 둘째, 교통 인프라 시설에 대한 투자가 그것이다. 통행료 일괄부담금은 특정 목적과 무관하게 매년 서독정부가 동독에게 지불 한 금액으로 서독 통화로 유입되었다면, 인프라 건설 투자는 특정 사업과 연관되어 지불되었고, 동독에게 상응하는 경제적 및 경제외적 반대 급부를 받아냈다는 특징이 있다. 가. 통행료 일괄부담금 서베를린 출입을 위한 통과교통에 대한 일괄 지불금은 1970년까지 동독 측이 동독으로 여행하는 서독주민들에 게 받던 징수료를 1971년 12월 「통과교통조약」의 체결과 함께 서독정부가 일괄적으로 부담하게 된 것이다. 통행 료 일괄부담금의 규모는 1972년~1975년에는 연 2억3,490만 마르크로 정해졌으나, 1976년~1979년에는 연 4억 마르 크, 1980~1989년에는 5억 2,500만 마르크로 계속 상향 조정되었다. 여기에는 내독 관계의 발전에 따른 정치적 배 려도 있었겠지만, 통과교통로 이용객의 숫자가 계속 증가한 것도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서독의 입장에서는 통행료 일괄지불금을 상당히 관대하게 지불하였는데, 이는 동독 여행을 촉진하는 효과, 동독 경제를 지원하고, 동독 주민 들에게 경제적 혜택을 가져다줌으로써 동포의 고통을 경감시킨다는 인도적 의지도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통과교통 로 이용객의 입장에서는 여행자 개개인이 도로 사용료에 해당하는 통과료를 지불할 필요가 없게 되어 금전 및 시 간상의 편의를 얻게 되었고, 그만큼 서베를린 여행이 편리해졌다. 따라서 통행료 일괄부담금의 도입은 베를린 교 통이 급속히 증가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동독의 입장에서 통행료 일괄지불금은 가장 중요한 고정 수입원이라는 의미와 함께, 특히 서독 마르크로 지불되 었기 때문에 항상 외환 부족에 시달리던 동독의 외환 계정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72~1989년 사이에 동독은 통행료 일괄부담금 명목으로 총 78억 마르크를, 1980~1989년 사이에는 이와 별도로 도로 사용료 일 괄지불금 명목으로 5억 마르크를 수령하였다. 동독은 통행료 일괄부담금에 대한 반대 급부로 통과교통로의 정비 및 시설물 설치 등을 제공하기로 하였지만, 실제로는 일괄지불금 대부분에 대해 어떠한 경제적 반대 급부도 제공 한 적이 없었다. 위의[표 3]에는 1971년부터 통일 직전까지 서독의 대동독 지원 내역이 요약되어 있는데, 각 연도 별로 통행료 일괄지불금이 전체 지원금의 50%에 육박하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FES-Information-Series 나. 동독의 교통 인프라에 대한 투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양독의 교통 인프라 상황을 살펴보면, 전쟁 중 독일의 교통 시설은 거의 대부분 파괴되었 다. 특히, 독일의 항복 직전 대규모로 감행된 연합군의 폭격은 산업 시설보다는 터널, 교량, 도로에 집중되었기 때 문에 교통 인프라 시설의 피해는 매우 컸다. 그러나 교통 시설의 복구에 관해 서독과 동독은 매우 큰 차이가 있었 다. 영토 면에서 서독이 동독의 2배 가량 되었다는 점 외에도 서독은 마샬 플랜의 지원(총 130억 달러) 하에 적극 적인 투자가 이루어질 수 있었기 때문에 벌써 1959년에 전쟁 중에 파괴되었던 모든 시설이 복구되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반면, 동독의 경우에는 소련 측에 오히려 전쟁에 대한 피해 보상을 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예컨대, 동독은 당시 복선화되어 있던 주요 철도 간선을 단선화하여 걷어낸 자재를 소련의 철도 복구를 위해 제공해야만 했다. 동 독은 1970년까지도 전쟁으로 파괴된 철도 시설의 복구를 완료하지 못한 것으로 자체 평가하였으며, 통일 이후 동 독의 교통 인프라 시설은 서독이 지원했던 몇몇 도로나 철도를 제외하고는 전쟁 전의 낙후되고 노후한 상태인 것 으로 드러났다. FES-Information-Series 서독 정부는 1975년 이래 베를린과 연결되는 통과교통로를 중심으로 한 동독의 교통 인프라의 신설 및 보수, 확 장에 상당한 투자를 해 왔다. 「통과교통조약」 제18조에 따르면, 서독이 동독에게 매년 지불하는 통행료 일괄부 담금에는 통과교통로의 유지, 보수 비용이 포함되어 있지만, 70년대부터 지속적인 재정 악화로 교통 인프라에 대 한 투자 여력이 전혀 없었던 동독은 이 약속을 이행하지 못했다. 서독 정부는 동독 교통시설의 투자 지원에 대해서는 통행료 일괄부담금과는 달리 동독 측의 경제적 ․ 경제외적 반대 급부를 엄격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거의 전 구간이 동독 내에 위치한 교통로였고, 실제로 통과교통보다는 동독 주민 들의 이용률이 더 높은 사업들이었으며, 또한 서독 측이 사업비의 거의 전부 또는 60%~70% 이상을 분담한 경우가 많았다. 반면, 동독이 제공하는 대가는 대부분 즉각적인 가시화나 계량화가 어려운 것들이어서 대부분의 서독 국민들 은 이 역시 전적으로 정치적 고려에 따른 무상 지원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서독 내에서는 퍼주기 라는 비난을 잠재울 수 없었다. 투자 지원 절차를 보면, 동독은 1974년부터 양독 간의 정례 회담 등에서 서독 측에 대해 개 량 및 신설이 필요한 통과교통로의 리스트를 건설 비용, 건설 계획 등 상세한 내역과 함께 제시하고, 이에 대한 투자를 요청하면 서독 측이 이를 수용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1975년~1989년 사이에 약 3차례에 걸쳐 이러 한 투자 요청과 지원이 있었는데, 서독이 동독의 교통 인프라 부문에 투자한 액수는 약 24억 마르크로 추정된 다. 구체적인 투자 내역은[표 4]와 같이 요약된다. FES-Information-Series 이 밖에도 1980년대 말부터 베를린-함부르크 간 고속철도 건설 사업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으나, 1990년 통일 이 됨으로써 이 사업은 통일 독일 교통 계획으로 이월되었다. 이런 준비 덕분에 베를린-하노버 간 고속철도는 1996년에 조기 개통될 수 있었다. 이처럼 통일을 이룩한 시점에서 볼 때, 서독 측이 제공한 동독 지역에 대한 교통 인프라 투자 지원은 통일 독일을 위한 선행 투자였으며, 통일 후 동독 지역의 개발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온 유익 한 투자로 평가되고 있다. 5. 결 론 분단기 동서독 교통 교류 실태와 서독의 대동독 교통부문 지원 정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바로 서베를린이 동 독 내부에 위치하고 있다는 특수한 상황에서 비롯한다. 서독 정부는 물론, 베를린의 전략적 지위를 고려한 서방 연합국들도 서독과 서베를린 간의 통과교통로 확보를 절대적인 정책 과제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서 약 1,400 Km에 이르는 동서독 국경을 따라 국경 통과를 위한 10개의 연결 도로와 7개 연결 철도가 설치되었고, 동서 베를린 간에도 8개의 교통 연결 지점이 유지되었다. 따라서 동독의 억제 정책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동서독 간 교통 교류가 완전히 단절된 적이 없었다. 서독 정부가 교통 인프라의 연결을 양독 간 긴장완화를 위한 매개체로 활용하였다는 것은 여러 가지 사실에서 나타난다. 우선, 1971년까지는 서베를린을 방문하는 개인이 지불하던 통행료를 서독 정부가 일괄적으로 부담한다는 협상 을 이끌어 내고, 동독 정부가 동 협상에 포함된 교통로 유지, 보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관대한 수준의 통행료를 매년 지불하였고, 통과교통로의 신설, 개량, 확대 사업 등에 대한 동독의 요청에 대해서도 비교적 관대하게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교통 인프라와 관련하여 서독이 동독 측에 지원한 금액은, 통행료 일괄부담금으로 총 83억 마르크, 교통 인프 라 투자로 약 24억 마르크가 유입된 셈이다. 전자의 경우, 통행료 명분이었기 때문에 서독의 마르크화로 아무런 대가 없이 지불되었고, 교통 인프라 투자의 경우에도 교통부문의 통행 장애 완화, 접경 지역의 무기 제거 등의 구 체적인 조건하에서 서독이 건설 투자비를 분담하는 형식이기는 하였지만, 국민들의 시각에서는 이 역시 무상 지원 의 성격에 가까웠다. 따라서 1990년 10월 통일이 이루어지던 당시까지도 무조건 퍼주기만 한다는 비난이 서독 국 민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이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서독 정부가 동서독 간 교통 교류 활성화를 지속 적으로 적극 추진한 것은 교통 교류가 다른 분야의 교류와 발전을 위한 전제 조건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서독 정부의 이러한 정책은 교통 교류를 통해 동서독 국민 간 민족적 동질성이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 에 통일이 가능했다는 시각 외에, 통일이 되고 난 현재의 시점에서도 교통 인프라의 수준이 구동독 지역의 복구와 경제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70년대 사민/자민 연정의 신동방·독일 정책과 정치 논쟁 박 형 중, 통일연구원 연구위원 2001년 3월 󰠲󰠲󰠲󰠲󰠲󰠲󰠲󰠲󰠲󰠲󰠲󰠲󰠲󰠲󰠲󰠲󰠲󰠲󰠲󰠲󰠲󰠲󰠲󰠲󰠲󰠲󰠲󰠲󰠲󰠲󰠲󰠲󰠲󰠲󰠲󰠲󰠲󰠲󰠲󰠲󰠲󰠲󰠲󰠲󰠲󰠲󰠲󰠲󰠲󰠲󰠲󰠲󰠲󰠲󰠲󰠲󰠲󰠲󰠲󰠲󰠲󰠲󰠲󰠲󰠲󰠲󰠲󰠲󰠲󰠲󰠲󰠲󰠲󰠲󰠲󰠲󰠲󰠲󰠲󰠲󰠲󰠲󰠲󰠲󰠲󰠲󰠲󰠲󰠲󰠲󰠲󰠲󰠲󰠲󰠲 1969년 이후 사민당/자민당 연정은 새로운 독일 정책을 추진했다. 야당인 기민/기사연은 냉전적 반공산주의의 입장에서 이를 격렬히 비판했다. 당시 야당이 제기했던 주요 논쟁점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정부/여당이 안보 현실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 둘째, 정부/여당의 정책 때문에, 대내적으로 반공산주의가 붕괴하고, 자유 민주주의적 정체성이 훼손되고 있다. 셋째, 정부/여당은 동독의 의도, 합의 이행 및 변 화 여부를 너무 안이하고 낙관적으로 판단한다, 넷째, 정부/여당은 동독과 협상에서 대내 정 치적 이유로 너무 조급하게 협상하며, 상호주의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 다섯째, 정부/여당이 동서독 국가의 통일을 포기하고 있다는 등이다. 그러나 야당의 입장은 서독 국민의 다수와 주변 국가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70년대 야 당 시절, 기민/기사연은 이념적 보수성을 기초로 사민당/자민당 연정의 독일 정책을 수용했으 며, 1982년 재집권했다. 그리하여 실용주의적 차원에서 볼 때, 서독의 독일 정책은 1969년부 터 1989년까지 지속성을 가질 수 있었다. 󰠲󰠲󰠲󰠲󰠲󰠲󰠲󰠲󰠲󰠲󰠲󰠲󰠲󰠲󰠲󰠲󰠲󰠲󰠲󰠲󰠲󰠲󰠲󰠲󰠲󰠲󰠲󰠲󰠲󰠲󰠲󰠲󰠲󰠲󰠲󰠲󰠲󰠲󰠲󰠲󰠲󰠲󰠲󰠲󰠲󰠲󰠲󰠲󰠲󰠲󰠲󰠲󰠲󰠲󰠲󰠲󰠲󰠲󰠲󰠲󰠲󰠲󰠲󰠲󰠲󰠲󰠲󰠲󰠲󰠲󰠲󰠲󰠲󰠲󰠲󰠲󰠲󰠲󰠲󰠲󰠲󰠲󰠲󰠲󰠲󰠲󰠲󰠲󰠲󰠲󰠲󰠲󰠲󰠲󰠲 FES-Information-Series 1969년 브란트 수상이 이끄는 사민당/자민당 연정이 집권했다. 사민/자민 연정은 동서 긴장 완화 추세에 맞추어 소련·동유럽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신동방 정책을 추진했다. 그 틀 내에 서 동서독 문제와 관련한 독일 정책 방향도 새로이 설정되었다. 사민/자민 연정이 집권하게 된 중요한 이유는 신동방·독일 정책 때문이었다. 그런데 신동 방·독일 정책은 서독의 대외 정책에서 중요한 전환을 의미했다. 이 전환을 둘러싸고 70년대 초 서독에서 격렬한 정치적 대립이 발생했다. 서독의 전체 역사에서 독일 정책을 둘러싸고 국 내 정치 논쟁이 이만큼 격화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사민당은 동서독 기본 조약이 체결된 10 일 후 실시되었던 1972년 11월의 조기 총선거에서 압승했다. 야당인 기민/기사연은 결국 당론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당시 야당의 격렬한 반대는 다수의 서독 국민들로 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으며, 미·소를 비롯한 동서방의 주변 국가들도 일치하여 사민/자민 연정의 긴장완화 정책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70년대 야당은 당내 논쟁을 거 치면서, 자신의 전통적, 보수적 관점에 사민/자민 연정의 독일 정책을 통합시키고자 노력했다. 이는 5년에서 10여 년의 오랜 세월이 걸렸다. 수정된 독일 정책 당론을 확정한 직후인 1982년 기민/기사연은 재집권했다. 정권 교체에 따라 서독 정부의 독일 정책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보수 화되었으나, 실용주의적 차원에서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이 때문에 사민당이 시작한 신동방· 독일 정책은 정권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2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추진될 수 있었다. 1. 70년대 초 새로운 독일 정책의 기본 개념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은 미·소 간 냉전 구도의 정착과 병행하여 1949년 성립했다. 그 후 1969년 사민/자민 연정의 집권 직전까지 서독의 동방·독 일정책의 핵심은 두 가지였으며, 이에 대하여 대체로 국내의 정치적 합의가 존재했다. 첫째, 동독을 국가 로서 승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둘째, 2차 대전 패전의 결과로 발생한(동유럽 지역에서의) 독 일 영토의 축소를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즉, 2차 대전 이후 동독과 폴란드의 경계로서 획정된 오데르-나이세 국경의 불인정)이었다. 독일 통일은 명시적 목표로 추구되었다. 통일 방안으로는 동독 지역의 자유 선거를 통한 사실상의 흡수 합병, 또는'힘의 정책'을 통해 소련이 동독을 일 방적으로 포기하도록 하는 정책이 추진되었다. 냉전이 지속되었던 동안 서독의 이러한 정책은 서방 진영의 대소 봉쇄 정책과 모순되지 않 았다. 그러나 이미 1955년부터 미국과 소련 사이에 유럽에서 정치적, 영토적 현상 인정을 기초 로 한 긴장완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즉, 미·소는 동독 국가의 인정, 오데르-나이세 국 경 인정 등을 추진하는 정책 방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는 서독의 전통적 입장과 모순되었 2 FES-Information-Series 다. 당시 서독은 독일 문제가 유럽에서의 긴장의 핵심 원인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해야 (즉, 서독 주도하에 독일 통일이 이루어지고, 패전 이전의 구 독일영토가 완전히 회복되어야) 유럽의 긴장완화가 진행될 수 있다는 연계 정책을 주장했다. 이러한 정책은 동서방 양측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다. 60년대 초 동서방 국가들 사이의 긴장완화가 심화되면서부터 서독은 점차로 동서방 주요 국가들로부터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서독은 현상 변경적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음에 비해, 서방 국가는 현상 고착화에 기초한 긴장 완화를 추구하고 있었다. 동방 국가는 특히 동유럽과 관련된 서독의 현상 변경적 대외 정책이 동방 진영의 불안정화와 동방에의 대결을 지향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1960년대 동서방 양측으 로부터 서독 동방·독일 정책이 동서 긴장완화에 순응해야 한다는 압력이 높아갔다. 그러나 60 년대 서독의 에어하르트 정부(1963-1966)와 대연정(1966-1969)은 과거 아데나우어 정부의 핵심 정책인 동독의 불인정과 국제적 고립화 추구 정책 그리고 오데르-나이세 국경선 인정 거부 정 책을 수정하지 못했다. 1969년 서독에서는 최초의 여야 간 정권 교체가 있었다. 서독의 대외 정책은 유럽의 긴장완 화 과정에 완전히 적응하고 활용하는 방향을 취했다. 서독은 동유럽의 정치적·영토적 현실을 인정하는 것을 기초로, 동유럽 여러 국가와 화해·협력 정책을 추진했다. 그것이 이른바 신동 방 정책이며, 이 틀 내에서 서독의 독일 정책도 변화했다. 동유럽 및 동독에 대한 서독의 정책 방향과 관련하여 서독 정부는 소련과 직접 협상했다. 브란트 정부를 대표한 에곤 바르는 소련 수상 코시긴 및 외무장관 그로미코와 모스크바에서 비밀리에 협상을 진행했다. 그 결과가 1969년 서독과 소련 사이에 작성된 ‘ 바르 합의문 ’ 이다. ‘ 바르 합의문 ’ 은 첫째, 오데르 -나이세 국경을 비롯한 유럽에 기존하는 국경은 ‘ 불가침 ’ 이라는 것, 둘째, 서독과 동독은 완전 한 동등성과 비차별, 내정 문제의 독립성과 자주성의 인정을 기초로 한 새로운 관계 형성을 목 표로 통상적인 국가 간 조약을 맺는다는 것, 셋째, 이러한 합의에 기초, 서독은 소련, 그리고 동독, 폴란드, 체코 등과 조약을 체결한다고 천명했다. 이러한 합의는 1970년 모스크바 조약과 바르샤바 조약, 1971년 4대국 간 베를린 협정과 동서독 간 베를린 통행협정, 1972년 동서독 간 기본 조약, 1973년 프라하 조약 체결로 이어졌다. 서독의 신동방·독일 정책은 과거의 봉쇄 정책을 반성하면서, 긴장완화를 통해 열리는 공간 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하는‘공세적 긴장완화’ 정책이었다. 그 기본 개념은 에곤 바르의 이른바‘접근을 통한 변화’에 잘 나타나 있다. 이는 동독 정권의 안정화를 통해 동독 정권을 변화시킨다는 전략 구상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에곤 바르는‘냉전’과‘공산주의 철거’와 관련되었던 기존의 봉쇄 정책은 독일의 통일을 진전시키기는커녕 분단을 더욱 심화시키며, 과 거의 압력과 반압력 정책이 현상의 고착화만을 초래했다고 판단했다. 그 대안으로서, 1963년 3 FES-Information-Series 에곤 바르는 미국의 평화 정책을 독일에 적용할 것을 주장하면서, 장기적 긴장완화 정책의 일 부로 독일 정책을 추진할 것을 주장했다. 바르의 정책 개념을 보면 다음과 같다. “ 독일 통일은 단 한 번의 조치로서가 아니라, 수많은 작은 조치들과 단계들을 거치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케네디가 말하는 바와 같이 상대방의 이익을 인정하고 고려해야만 한 다. 따라서 서방의 잠재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동독 지역을 소련으로부터 뺏어내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동독지역은 소련의 동의하에 변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목적에서 동독 지역을 지배 하는 증오스러운 정권과- 그 정권을 법적으로는 인정하지 않지만- 협상하고 협약을 맺어야 한다. 새로운 독일 정책은 상당한 기간 현상(status quo)을 인정해야 하는 데, 그 목적은(장기 적으로) 현상을 변경시키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 동독 지역에 자유가 보장되는 것은 새로운 정책의 전제가 아니라, 새로운 정책이 기대하는 결과이다. ” 또한, “ 동베를린 공산주의 정권은(동서독)의 경계와 장벽을 완화시키지 못하고 있는바, 그 이유는 완화시킬 경우, 자신의 존망이 위태로워 질 것이라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 계와 장벽을 완화해도 동독이 존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서독이 ‘ 점차적으로 동독의 우 려를 ’ 받아 주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유일하게 가능한 방도는 동독 정권의 붕괴가 아니라, 그와의 협력이다. 동독 사람들의 인간적 처지를 개선해야 하는데, 이는 동독에서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계 내에서 추진되어야 한다. 혁명적 변화의 경우, 소 련은 자신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개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애초 에곤 바르의 이러한 구상은‘너무 급진적인 것’이라고 사민당의 공식 경고를 받았었 다. 그러나 6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이는 사민당의 공식 당론이 되었다. 그 후, 사회민주당 정 책의 목표는 공산주의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접근을 통한 변화’ 정책은 동방의 변화를 목표로 동방의 정치적 관심을 일정하게 수용한다는 것(‘접근’) 을 뜻했다. 변화를 목표로 한‘접근’ 개념에 기초하여, 사민당은 오랫동안 동독이 요구하던 것을 수용했다. 즉, 동독 국가의 불인정과 고립화 정책을 포기하고, 동독을 서독과 특별한 관계 의 동등한 국가로 승인했다. 그러나 이는 동독의 내부 개혁, 동독 체제의‘인간화’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사민당은, 외부의 강요를 통해 동독 체제를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공산주의 지배 체제를 불 안정화 시키면, 체제의 경직화만 초래될 뿐, 체제 내부의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즉, 동독의 개혁은 공산주의 지배자의 의지를 거슬러서는 달성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서독은 동독 공산당의 지배를 인정하면서도, 동독을 점진적으로 변화·개혁시키고자 하는 정책 방향을 취했다. 서독 체제의 우월성은 동독의 개혁을 불가피하도록 만들 것이라고 상정되었다. 4 FES-Information-Series ‘접근’은 서독의 우월성이 동독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내야 했다. 동독이 불 안정하면, 동독 정권의 방어적 조치 때문에 동독 체제가 경직화되고, 동서독 교류·협력은 중 단될 것이지만, 동독이 내부적으로 안정되면, 서독과의 협력이 증대될 수 있으며, 내부 개혁 압 력이 강화될 것으로 상정되었다.“독일민주공화국이 일정하게 안정화될 때만이 연방공화국의 우월성이 동독 내부에 작용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공세적 협력 정책은 동방을 평화적으로 변화시켜 서방 체제에 다가오도록 만들 수 있다고 상정되었다. 2. 기민/기사연의 독일 정책에 대한 비판 신동방·독일 정책은 1970년대 초 국제 정치의 대세인 긴장완화를 서독이 수용하고 활용하 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서독 내부적으로는 아직도 냉전적 반공산주의 입장에서, 서독 정부의 새로운 정책에 대한 강력한 반대가 존재했다. 특히, 새로이 야당이 된 기민/기사연은 브란트 연정의 신동방·독일 정책에 대해 격렬히 반 대했다. 이 때문에, 1971/1972년경 브란트 정권은 연방의회에서 다수의 지위를 상실할 수도 있 는 상황에 도달해 있었다. 이러한 정권의 위기에는 사회 개혁에 대한 문제, 사민당 내부의 좌 파 급진 세력의 강화, 경제 및 재정 정책에 관한 문제 그리고 동방 정책에 대한 내외적 분란이 작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민/기사연은 연방의회에서 브란트 총리에 대한 불신임 결 의안 통과를 시도했다. 그 시도는 1972년 4월 27일 절대 다수인 249표에서 2표가 모자라 실패 로 끝났다. 브란트 정부는 1972년 5월로 예정된 모스크바 조약 및 바르샤바 조약에 대한 의회 비준이 거부될 가능성에 대해 우려해야 했다. 사민/자민당은 조약 비준을 위해 야당인 기민/기사연의 협조를 구했으며, 그 결과로 여야 간 조약에 대한 의회 차원의 공동 결의가 탄생했다. 물론, 여야 공동 결의는 서독과 소련 및 폴란드 간에 이미 성립한 국가 간 조약 내용을 수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조약에 대한 서독 측 해석과 관련하여 야당의 입장이 반영될 수 있도록 하 는 타협이 이루어졌다. 그 주요 내용은 모스크바 및 바르샤바 조약에서 기존하는 국경을 사실 상 인정하지만 최종적 결정은 평화조약 체결 시에 내려져야 한다는 것과, 독일 민족의 자결권 은 이 조약들로 인해 침해받지 않는다는 것, 독일 문제는 아직 미해결이며, 연방정부는 이 조 약 체결 이후에도 유럽적 차원에서 민족 통일의 재달성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여/야간 타협을 기초로, 당시 기민련의 당수 바젤은 기민/기사연이 이 두 개의 동방 조약에 대한 의회 비준에 찬성할 것을 종용했다. 여전히 거부적 조류가 강하여 당내 분란이 있 5 FES-Information-Series 었지만, 기민/기사연의 대다수는 비준 여부를 묻는 투표에서 기권함으로써 조약이 비준되도록 했다. 그 이유는 국제 여건상 조약에 반대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미국, 영국, 프랑 스 등 서방 동맹국들은 사민/자민 연정의 동방 정책 조약들에 긍정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또한, 동방 정책은 동서방에 공히 중요한 여러 사안들(헬싱키 협상, Salt 회담, 상호 균형 군축, 동서 간의 일반적 긴장완화 등)과 연계되어 있었다. 만약, 동방 정책이 실패한다면 이는 동서 방의 정책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서독 정부가 동방 국가들과 추진하던 조약 체 계를 붕괴시킬 경우, 기민/기사연은 동서방 대외 정책의 핵심적 목표를 방해했다는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다. 동방 조약들에 대한 야당의 부정적 태도가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곧바로 드러났다. 동서독 기본 조약 체결 10일 후인 1972년 11월에 치러진 선거는 동유럽 국가와의 화해 그리고 두 독일 국가의 접근을 상징하는 인물인 브란트에 대한 신임 투표의 성격을 띠었 다. 이 선거에서 사민당은 압승을 거두었다. 사민당은 서독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원내 제1당 이 되었다. 11월 선거 실시 이전의 원내 제1당이던 기민/기사연은 연방의회에서 반대 세력을 결집하여 동방 정책 및 사민/자민 연정의 존속 여부를 위협해 왔었다. 그러나 11월 선거는 국 민 다수가 동방 정책과 사민/자민 연정을 지지한다는 것을 확인했으며, 연방의회에서 동방 정 책과 사민/자민 연정에게 안정된 정치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이 선거에서 기민/기사연은 공산주의 세력 확대에 대한 냉전적 공포를 동원하여 사민/자민 연정의 동방 국가들과의 화해 정책에 반대하고자 했었다. 이 선거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과거 만년 여당이었고, 원내 제1당이었던 기민/기사연은 곧바로 재집권하리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 러나 서독은 내부적으로 이미 크게 변해 있었다. 이 선거에서 사민당이 압승하게 되자, 기민/ 기사연이 이제 상당히 오랜 기간 야당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 너무도 명백해 졌다. 선거 패배 충격의 결과로, 야당의 입장은 한동안 더욱 경직되었다. 야당은 사민/자민 연정의 동방 정책 및 독일 정책과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해서 결단코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야당은 동서독 간 기본 조약, 프라하 조약뿐만 아니라 1975년의 헬싱키 유럽 안보협력 최종 결의안도 반대했다. 유럽에서 헬싱키 결의안에 반대했던 정치세력은 서독의 기민/기사연과 알 바니아 공산당뿐 이었다. 70년대 기민/기사연이 신동방·독일 정책에 대해 전개했던 반대 논리의 주요 논점은 다음과 같았다. 가. 냉전적 전통에의 집착 6 FES-Information-Series 사실 기민/기사연은 냉전 시대의 전통 고수와 긴장완화라는 대세에의 적응 불가피성 사이의 모순 속에 끼어 있었다. 기민/기사연의 정체성은 냉전적 사고 방식이었지만, 긴장완화의 대세 를 거부하는 경우, 국내외적으로 완전히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사민당의 외교 정책은 동서 간 긴장완화라는 당시의 국제 정세와 너무도 잘 부합했기 때문에, 사실상 그에 대한 어떤 근본적 대안도 있을 수 없었다. 나아가 사민당의 신동방·독일 정책이 서독 국민과 조야 여론 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이 분명했다. 기민/기사연은 과거 서독의 냉전적 대외 정책 목표와 냉전적 반공산주의를 기준으로, 사민/ 자민 연정의 신동방·독일 정책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전개했다. 그러나 설득력 있는 정책 대 안을 발전시킬 수 없었다. 따라서 격렬히 비판하면서도, 완전히 거부하지 못하는 모순적 태도 를 보였다. 이러한 모순은 당 내부에서 대외 정책적 입장에 대한 분열로 나타났다. 기민/기사 연 당내에는 사민/자민 연정의 신동방·독일 정책에 대한 첫째, 찬성파, 둘째, 무소신파, 셋째, 소극적 거부파, 넷째, 적극적 거부파 등 4개의 집단이 존재했다. 기민/기사연은 사민/자민 연방정부 정책의 목표 그 자체가 아니라 주로 정책 추진의 방법과 전략에 대해서 비판했다. 또한, 공동 여당과의 의회에서 공동 결의 등을 통해, 정부/여당의 정 책에 자신의 전통적 입장들이 고려되고 반영되도록 노력했다. 그 입장의 주요 요소는 독일 통 일(‘독일인의 자결권’)과 오데르-나이세 국경 불승인 등 현상 변경을 함축하는 독일 문제에 대한 기존의 국제법적 주장의 고수 및 냉전적, 도덕적 반공산주의 등이었다. 이러한 기민/기사 연의 태도는 사민/자민 연정의 정책 방향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협상 결과들이 비교적 기민/ 기사연이 만족할 만한 수준에서 이루어지게 할 수 있었다. 나. 사민/자민 연정의 협상 전략에 대한 비판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기민/기사연의 비판은 정책 방향 그 자체보다는 추진 방법과 전략에 집중되었다. 물론, 야당이 정부 정책에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것은 의회 정치상 정상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거의 20년 동안 여당 역할만을 해왔던 기민련이 아직 야당의 정체성과 역할을 찾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당의 정책에 대한 비판이 부적절 하리만큼 첨예화되었고 절대화된 측면이 있었다. 기민/기사연은 협상에서의 비밀 외교적 측면 과 불필요한 조급성, 야당과의 불충분한 협의, 국내 선거를 의식한 협상의 도구화 등을 비판했 다. 특히, 기민/기사연은 사민/자민 연정의 협상 태도와 전략을 비판했다. 야당은, 연방정부가 (동독과 협상 시작 이전에 동독의 핵심 요구 사항 중 하나인 동독을 동등한 국가로 인정할 것 을 밝히는 등) 협상을 시작하면서 불필요한 선제 양보를 했다는 것, 또한 1972년 동서독 기본 7 FES-Information-Series 조약의 경우, 서독 정부가 총선 10일을 앞두고 동독과 기본 조약에 대해 서명했다는 것 등에 대해 강력히 비판했다. 이러한 협상 전략 때문에, 서독 측의 협상력이 약화되었고, 협상 과정에 서도 주는 것과 받는 것의 균형성을 지키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결과적으로 사민/자민 연정이 ‘ 국가 이익을 팔아먹었다 ’ 는 것이다. 기민/기사연은 ‘ 하는 만큼 해주겠다 ’ 는 것을 조약 원칙으로 확실하게 지킬 것을 요구했다. 또한, 동독과 조약을 체결할 때는 ‘ 제한적 또는 이중적으로 해석 할 여지가 없는 명확한 규정 ’ 을 고집함으로써, 나중에 동독이 마음먹기에 따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상황을 막아야 했다는 것이다. 기민/기사연이 특히 상호주의, 합의 조항의 명확성 등에 대해서 강조한 이유는, 사민/자민 연정과는 달리, 기본 조약 체결 이후 실시 과정에서 동독이 합의를 제대로 지키지 않을 것이라 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민/기사연이 보기에, 사민/자민 연정은 동독의 합의 이 행과 동독의 변화에 대하여, 기본 조약 체결 과정 및 의회 비준 과정에서 너무도 낙관적인 기 대를 하고 있었다. 당시 사민/자민 연정은 기본 조약을 통해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는 경우, 동 독은 인적 교류와 접촉의 증대로 화답할 것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동독 정권을 자유화하는 데 이바지할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그러나 기민/기사연은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기본 조약이 체결 되더라도, 동독의 서독에 대한 ‘ 차단 정책 ’ 때문에, 동서독 간 관계가 급속하게 정상화되지 않 을 것이라는 비관론적 입장에 서있었다. 기민/기사연은 동독은 사민/자민 연정과는 다른 목표 를 추구하고 있다고 보았다. 기민/기사연이 보기에 동독이 기본 조약을 체결한 이유는 서독과 의 자유 왕래나 의사 소통을 증대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동독의 국제적 지위 향상과 국제법 적 승인이었다. 따라서 동독은 서독과의 자유 왕래 및 의사 소통에 관련한 기본 조약 조문들을 제한적으로 해석하고자 할 것인데, 기본 조약에‘할 수도 있다’는 식의 조문은 바로 동독의 그러한 의도를 사실상 합법적으로 인정해주는 꼴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민/기사연의 입장 은 사민/자민 연정이 지나친 낙관론에 빠지는 것을 일정하게 막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다. 서독의 자유민주주의 질서 위협론 사민/자민 연정의 신동방·독일 정책은 곧바로 서독의 자유민주주의적 정체성 훼손 논쟁과 연계되었다. 기민/기사연은 신동방·독일 정책은 대외 정책상 패배일 뿐 아니라, 연방공화국의 자유 민주 질서를 위협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동서독 기본 조약에서 동독을 ‘ 동등한 국가로 승인 ’ 한다고 할 때, 그 ‘ 승인 ’ 의 개념 함 축이 문제로 등장했다. 사민/자민 연정은 서독이 동독을 국제법적인 의미에서 국가로 ‘ 승인 ’ 하 는 것과 그 정권을 정치적 도덕적으로 승인하는 것은 별개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야당은 기본 조약에 나타난 ‘ 승인 ’ 개념을 포괄적으로 해석하여, 사민/자민 연정이 동독을 단순히 법적 차원을 넘어서서 정치적이고 도덕적 차원에서 승인해버렸다고 주장하면서, 이에 대해 비판했 8 FES-Information-Series 다. 이와 관련한 야당의 주장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았다. 1. 연방정부의 동방 및 독일 정책은 대내 정치적으로 가치 중립성을 초래한다. 서방 민주주 의의 자유 가치가 과소 평가되는 한편,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소련의 서방 정책과 동독의 독일 정책의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이 줄어든다. 2. 연방정부의 동방 및 독일 정책은 유럽 긴장완화의 현실을 오판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국가 방위에 대한 노력이 줄어들어 연방공화국의 위기 취약성이 커지고 있다. 3. 순진한 긴장완화 개념 때문에 마르크스주의 이념이 부활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국가와 사 회의 의회 정치적 질서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다. 이 때문에 정부기관, 기업 및 정당들 내에 서 정치 선동이 먹혀들어가고 있으며, 증대하고 있다. 4. 마르크스주의 사고 체계가 널리 유포됨으로써 연방공화국 내의 정치 논쟁이 양극화, 독단 화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가 위협받고 있다. 5. 동방의 서방에 대한 일방적 침투 가능성이 높아졌다. 연방정부는 국가 간의 상호성 원칙 을 지키지 못함으로써, 서방의 동방에로의, 특히 동독 내부에 대한 영향력 확대 가능성을 관철 시키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민/자민 연정은 자유민주주의적 국가 및 사회 질서의 우월성에 대한 신념에 근거 하여, 동방 국가들과의 이데올로기-정치적 대결뿐만 아니라 연방공화국 내의 반민주적 추세와의 대결과 관련해서도 낙관론을 표명했다. 기민/기사연의 관념에 따르면, 연방공화국의 자유민주주 의는 동독의 전체주의 체제라는 적대적 대립물이 존재할 때만 서독의 대중들에게 광범한 설득 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사민/자민 연정은 전체주의 대립물이 존재해야 연방공화국의 자 유민주주의적 정체성이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자유민주주의적 정체성은‘용기 있 는 시민’의 이성과 합리성 속에 그 자체로서 존재하며, 또한 시민의 주권적 자유 의지, 그리 고 민주주의 질서 자체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연방정부의 대외 정책을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위협이라 간주했던 야당의 전략은 1972 년 11월의 선거에서 여당인 사민/자민 연정이 압승함으로써, 서독 주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 졌다. 선거 결과를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드러났다. 1. 소련이 연방공화 국을 직접적으로 위협하고 있다는 식의 주장은 불과 몇 년 전과 비교해 보아도 설득력이 없다. 2. 동방 및 독일 정책이 긴장완화에 긍정적이고 건설적으로 기여한다는 평가가 압도적이었으 며, 위협감이 줄어드는 대신에 동유럽 국가와의 협력, 정보 및 의사 소통의 증대를 기대하고 있었다. 3. 사회정치적 대결에서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심화되고 있는 것은 동방 및 독일 정책 과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직접적 원인을 제공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되었다. 라. 국가 통일론과 민족 통일론의 대결 9 FES-Information-Series 기본 조약을 둘러싼 논쟁의 주요 주제 중 하나는 ‘ 민족 ’ 과 ‘ 통일 ’ 개념의 내용이었다. 여당과 야당은 상당히 어감이 다른 ‘ 민족 ’ 과 ‘ 통일 ’ 개념에서 출발했다. 기민/기사연은 모든 민족은 자결권과 민족 국가를 형성할 권리를 가진다는 일반 원칙에서 출발했다. 또한, 기민/기사연은 정치적 자유의 실현을 민족 국가 형성의 전제로 보았다. 이러한 논리에서 보았을 때, 독일 민족의 민족 국가 형성 즉, 독일 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한 원인은, 동독 주민에게 자결권 행사 즉, 자유 선거를 통해 자신의 자유 의사를 표시할 권리가 박탈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독일 통일은(동)독일 주민이 자유 선거를 통해 자결권을 행사하는 것을 통해 성취 되어야 했다. 이는 다시 말해, 자유 선거를 통한 동독의 해체, 즉 동독의 서독 합병을 뜻하는 동서독의 국가 통일을 의미했다. 그러나 동서 진영 대결의 상황에서 이러한 방 식의 두 독일의 국가 통일을 정치적으로 어떻게 현실화시킬 가에 대해서는 해답이 없었다. 사민/자민 연정은 ‘ 국가적 통일 ’ 대신에 ‘ 민족적 통일 ’ 을 독일 정책의 핵심과제로 설정했다. ‘ 민족 통일 ’ 론은 ‘ 통일적 독일 국가 ’ 를 현실 정치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먼 미래의 일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따라서 ‘ 민족 통일 ’ 의 목표는 두 독일 국가를 하나의 영토적 민족 국가로 재결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독일이 두 국가로 분단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독일에서 독일 민족에의 소속감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두 국가로의 분단 때문 에, 독일 민족에의 소속감, 다시 말해 독일 민족 자체가 소멸될 위험이 존재하는 데, 이것이 방지되어야 했다. ‘ 민족 통일 ’ 즉 ‘ 민족에의 소속감 ’ 은 만남과 실제 경험 속에서만 존속하고 유 지될 수 있다고 간주되었다. 따라서 동서독 간 접촉을 확대하여 가족과 친지들 사이의 연계를 강화함으로써, 민족적 공통성이 유지·발전되어야 했다. 마. 기본 조약의 기본법 합치성의 문제 동서독 기본 조약에 대해서 가장 철저한 반대 입장을 취했던 것은 기사연이었다. 기사연이 집권하던 바이에른 주정부는 1973년 7월 연방헌법재판소에 헌법 소원을 내었다. 기본 조약은 서독의 기본법과 합치하지 않으며 따라서 무효라는 것이었다. 그 주요 내용은 기본 조약이 독 일민주공화국을 두 번째 독일 국가로 인정한 것은 독일 재통일 고수 요구와 어긋나며, 독일민 주공화국의 국가 주권을 인정한 것은 연방공화국이 동독의 독일인 편을 들어 간섭할 수 없게 만들고 있기 때문에, 기본법상의 독일인에 대한 보호 의무와 상충한다는 것 등이었다. 연방헌법재판소는 기본 조약이 서독의 기본법과 합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판결 내 용은 연방정부의 독일 정책적 행동 공간을 한층 좁게 만들었다. 헌법재판소는 판결에서, 연방 정부를 포함하여 헌법 기관들은 독일의 국가적 통일을 재건하는 데 노력해야 하며, 이러한 요 구를 내부적으로 유지하며, 대외적으로 대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밖에도, 헌법재판소는(두 10 FES-Information-Series 개의 독일 국가가 존재하지만 두 독일 국가는 서로 외국이 아니기 때문에) 단 한 개의 독일 국적만이 존재하며, 두 국가의 경계(국경)는 연방주 간의 경계와 같은 성격이라고 판시했다. 3. 70년대 중반 기민/기사연의 적응 과정 기민/기사연의 신동방·독일 정책에 대한 격렬한 반대는 사민/자민 연정의 지나친 낙관론을 견제하고 또한 그 추진력을 일정하게 약화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결국 전략적 실패를 향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첫째, 기민/기사연은 긴장완화라는 국제 조류를 거부할 수 없었으며, 둘째, 서독 국민의 다수가 사민/자민 연정의 정책에 대해 분명한 찬성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기민 /기사연에게 야당 시절인 70년대는 독일 정책과 관련하여 당내 보수파와 온건파의 타협과 재통 합을 위한 시간이었다. 그 결과로, 특히 기민련은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고수하는 한편, 실제 정 책 차원에서는 사민/자민 연정의 독일 정책 기본 개념을 수용할 수 있었다. 동서독 기본 조약 체결 다음해인, 1973년 6월, 당내 개혁파의 지지를 받은 헬무트 콜이 새로 이 기민련의 당수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동방 조약 및 독일 조약에 원칙적으로 찬성하던 집단 이 기민련의 주류가 되었다. 그러나 당내 다수의 연방의회 의원들은 여전히 거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콜을 중심으로 한 당 지도부는 당내 독일 정책적 보수파의 저항을 점차적으로 극복해 나갔지만, 기민/기사연은 1975년에도 유럽안보협력회의 최종 결의서의 비준을 거부했 다. 그 후 기민/기사연은 최종 결의서의 인권 조항을 동방 및 독일 정책의 핵심으로 내세웠다. 기민/기사연은 동독이 인권을 준수해야 한다고 강력히 반복하여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의 정치 적 목표는 기민련과 기사연이 달랐다. 기민련은 동독의 대내적 자유화를 촉진시키고자 한 반 면, 보다 보수적인 기사연은 동독을 불안정화 시키고자 했었다. 기민련은 동서독 기본 조약 체결 후 5년이 지난 1977년의 뒤셀도르프 당대회에서야 기본 조 약을 현실로 인정했다. 이 당 대회에서는 기민련의 독일 정책을 새롭게 정립했다. 이는 당내 온건파와 보수파 간의 타협과 통일의 산물이었다. 즉, 첫째, 이미 체결된 동서독 간 조약은 지 킬 것이지만, 둘째,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는 동독에 대하여 공세적인 대결 정책을 취한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기민련은 사민/자민 연정의 독일 정책을 수용하면서도, 그것에 독일 문제에 관한 법적 입장의 관철, 독일의 국가적 통일 요구의 고수, 공산주의와의 이데올로기적 대결 고 수 등 기민련의 전통적 관심사를 결합시켜 보다 공세적 입장에서 재해석하고 추진하는 해법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러한 기본 방향은 1980년 연방의회 선거에서 다시 한 번 패배한 이후에 최종적으로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1981년의 함부르크 당 대회에 나타난 독일 정책에 관련한 기민련의 입장은 11 FES-Information-Series 이랬다. 즉, 독일 통일이 될 때까지, 독일 정책의 주요 과제는 독일인들이 분단 때문에 겪고 있는 고통을 줄여야 한다. 두 독일 국가 간 사람들의 접촉, 의견과 정보의 교류가 최대한 늘어 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분단 상태에서도 민족 통일이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기 민련은 독일 정책의 핵심은 통일이 아니라, 동독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이 개선되는 방향 에서 동독과 협력한다는 것이라 선언하였다. 또한 기민련은 동독을 불안정화 시키는 정책을 취 하지 않을 것을 밝혔다. 동독이 일정하게 안정되어 있을 때에만, 협상이 성사될 수 있고 또한 지켜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즉, 동독과의 협상 및 조약을 기초로 한 양독 관계를 발전시키는 기본 목적은 동독 사람들이 인간 존엄성에 걸맞은 자유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서독 은 이를 촉진하기 위해서 동독에 물질적 원조를 기꺼이 제공할 것이지만, 그 경우에 동독 사회 주의통일당이 직면하게 되는 민감한 내부 정치적 문제도 배려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로 써, 기민련은 사민/자민 연정의 독일 정책과 조약들을 조건 없이 받아 들였지만, 여전히 독일 문제에 관한 전통적인 법리적 입장을 고수하면서 인권 문제를 동시에 내세웠다. 기민련은 이제 사민/자민 연정의 독일 정책 자체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민/자민 연정이 그 정책 과 조약의 가능성을 완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입장에서 독일 정책상의 야당 역할을 수 행했다. 그러나 기민련의 온건파가 관철시킨 이러한 입장에 대해서 기민련 내 보수파와 기사연은 반 대 입장을 취했다. 보수파의 입장은 1978년에 공표된 기사연 연방의회 의원 독일 정책의 기본 방향에서 나타났다. 기사연의 독일 정책적 핵심은 동독 주민에게 인권과 자결권을 확보해주는 것이며, 이를 통해서 독일 통일을 실현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인권과 자결권 요구를 수단으로 하여, 동독의 국가로서의 존재 정당성을 부정하며, 동독 사회주의통일당의 권력 지위를 불안에 빠뜨리며, 결국 이를 통해 통일을 이루자는 정책이었다. 이는 동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상황 을 사소하더라도 조약으로 확정된 조치들을 통해서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그러기 위해서 는 협상 상대방이 대내외적으로 안정되어 있어야 하며 그로써 예측 가능해야 한다는 사민/자민 연정 그리고(바로 위에서 서술한 대로 1977년 이후) 기민당의 정책 방향과 대치되는 것이었 다. 4. 결 론 독일의 분단과 서독 국가의 탄생은 동서 냉전의 산물이었다. 1960년대 초부터 동서 냉전이 이완되기 시작하면서, 서독 국가의 냉전적 정체성과 외교정책은 모순에 빠지기 시작했다. 서독 은 1970년대 초에 들어서야 사민/자민 연정에 의해 외교 정책상으로 긴장완화에 적응할 수 있 었다. 신동방·독일 정책이 그것이다. 그러나 기민/기사연을 중심으로 한 서독의 보수 세력은 냉전적 반공산주의를 고수하고자 했다. 이 문제를 두고, 70년대 전반에 걸쳐, 사민/자민 연정과 12 FES-Information-Series 야당인 기민/기사연이 국내 정치적인 대결을 벌였다. 결국, 기민/기사연의 주류는 보수적 이데 올로기를 고수하면서도, 사민/자민 연정의 독일 정책상의 기본 개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70년대의 대결이 본 논문의 주제였지만, 마지막으로 간략하게 80년대의 상황에 대해서 언급 한다. 1970년대 말 80년대 초 미·소 간 신냉전이 뚜렷해짐으로써, 두 독일 간 관계도 더불어 악화될 수 있는 위험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신냉전과 함께 서독에서는 1982년 보수적인 기민/기사연과 자민당 연정이 들어섰고, 헬무트 콜이 새로운 총리 로 선출되었다. 콜 정부는 서방 동맹에의 충실성을 분명하게 선언했으며, 동독에 대한 이데올 로기적이며, 규범적 공세를 전개했다. 이러한 입장은 분명히 과거 사민/자민 연정의 브란트 및 슈미트 정권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콜 정부는 동독과 기존에 맺어온 협력 관계를 실용주 의적인 차원에서 계속 확대해 나갔다. 콜 정부의 이데올로기적 공세의 대상은 동독도, 야당인 사민당도 아니었다. 그것은 기민/기사연의 보수파를 연정 노선에 통합시키기 위한 당 내용이었 다. 80년대 전 기간에 걸쳐, 여당인 기민/기사연 내부의 온건파와 보수파의 대립은 독일 정책 을 둘러싼 서독 내 국내 정치 대결 축의 하나였다. 1989년 11월경까지도 콜 정부는 동독 국가 를 인정하면서 교류·협력 확대를 추진하는 전통적 정책에 충실했다. 그러나 이즈음 동독 국가 의 위기가 심화됨에 따라, 콜 정부는 전통적 독일 정책을 포기하고,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통 일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리고 1990년 10월 3일 동서독 통일 조약이 체결되었다. 13 독일 통일 후 동독 지역의 통신망 구축 안 두 순,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노 영 곤, 독일 보쿰대학교 박사 과정 2000년 11월 󰠲󰠲󰠲󰠲󰠲󰠲󰠲󰠲󰠲󰠲󰠲󰠲󰠲󰠲󰠲󰠲󰠲󰠲󰠲󰠲󰠲󰠲󰠲󰠲󰠲󰠲󰠲󰠲󰠲󰠲󰠲󰠲󰠲󰠲󰠲󰠲󰠲󰠲󰠲󰠲󰠲󰠲󰠲󰠲󰠲󰠲󰠲󰠲󰠲󰠲󰠲󰠲󰠲󰠲󰠲󰠲󰠲󰠲󰠲󰠲󰠲󰠲󰠲󰠲󰠲󰠲󰠲󰠲󰠲󰠲󰠲󰠲󰠲󰠲󰠲󰠲󰠲󰠲󰠲󰠲󰠲󰠲󰠲󰠲󰠲󰠲󰠲󰠲󰠲󰠲󰠲󰠲󰠲󰠲󰠲 통일 후 동서독의 경제력 격차 해소를 위해서 동독 사회간접자본 확충이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으며, 양 독의 건전한 경제발전을 위해 통신망의 연결이 시급한 실정이었다. 통일 이전 동독의 전화 보급률은 10.6%로 서독의 45.9% 보다 훨씬 뒤져 있었으며 이러한 격차를 해소 하기 위해서 통일 전에도 양독 간의 노력이 있었지만 본격적인 작업은 1990년의 Telekom 2000 이라는 「전자통신망 현대화 종합계획」이 발표된 이후부터이다. 집중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사업 추진에 따라 동독 지역의 통신 여건은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1997년에 는 동독 주민의 두 명 중 한 명이 전화 회선을 가지게 되었고, 광케이블 설치와 디지털화 작업으로 독일 전 지역이 이동통신으로 연결되었다. 이러한 성과의 이면에는 많은 난관도 있었지만 임기 응변적 접근과 기술 문제의 실용주의적 해결로 난 관을 극복했다. 대표적 사례로 공기(工期)단축을 위해서 먼저 통신관로(通信管路)를 설치, 구리선을 연결 한 다음 점차 동일 통신관로 내에서 광케이블로 대체하는 등 효율성 문제도 동시에 해결하였다. 중앙 집중식으로 조직된 구동독 체신 체계를 분권화하고 사업 단위별로 분할하여 매각, 민영화함으로써 연방정부의 재정 부담을 덜고 경쟁 체제를 도입, 통신서비스 시장의 활성화를 도모하였다. 적극적인 남북경협을 통해서 북한 경제의 현대화를 유도해야 하는 현실에서 구동독 지역 통신망의 현대 화 경험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 FES-Information-Series 1. 체제 통합과 사회간접자본 확충의 중요성 남북 간 경협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남북 간 사회간접자본 연결에 대한 과제가 관심의 초점으로 떠오 르고 있다. 그 중에는 도로와 철도망의 연결과 함께 통신망의 확충도 포함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통일 10년 을 맞는 독일이 양독 간에 존재했던 질과 양적인 통신망 격차를 어떻게 극복하였으며 그 과정 중에 나타났던 난관은 어떠한 것들이 있었는지, 또 이를 해결하는 정책적 대안은 무엇이었는지 등에 대한 연구는 우리에게 많 은 시사점을 줄 것이다. 동서독의 통신망 연결에 많은 애로가 존재함은 1990년 10월에 있었던 통일 이전에 이미 널리 인식되었다. 이는 통일 십 년 전인 1980년대 초부터 양독 간 통신 시설 개선을 위한 공동 노력이 시작되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통일이 되기도 전에 통신망 확충 사업을 이처럼 서두른 것은 동독의 빠른 경제 재건을 통한 동서독의 경제 통합을 위해서 통신망 확충이 그처럼 중요한 위치를 점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동독에는 산업입지 조건의 중요 요소 중 하나인 통신망 시설이 낙후해서 서독이나 외국인 투자가들도 동독 지역의 산업에 투자하기를 꺼렸다. 2. 통일 당시 구동독 지역의 통신 시설 현황 몇 가지 지표만 보아도 동독 지역의 통신 시설이 서독에 비하여 현저히 뒤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통일 당시 전화 회선 확보율은 서독이 100명당 45.9명인 반면 동독이 100명당 10.6명이었다. 당시 서독에는 40만대 이상의 전송기(팩시밀리)가 보급되었는데 동독에는 팩스기가 단지 2,500대 뿐이었고, 서독에 이미 널리 보급되 기 시작하였던 현대적 기술인 BTX(영상 문자 전환기), 무선 전화선 그리고 디지털화 된 광케이블망들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텔렉스의 보급만은 양독이 비슷하여 서독은 18,192선을 가지고 있었고, 동독은 18,000선을 가지고 있었다(1989년). 동독은 통신망의 미비 외에 통신 기기 역시 기술의 후진성으로 서독과 커다란 격차를 보이고 있었다. 통신 기기들은 일부 1920년대 것을 포함, 72%가 1970년 이전부터 사용했던 기계들이었다. 또한, 지역 간 연결도 23%가 1930년대에 사용하던 낡은 기술에 의존했다. 이러한 기기나 기술로 서독이나 서방 세계와 원활한 통신 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그나마 기존의 정보 통신망이 특정 지역, 즉 동베를린에만 집중된 것도 문제였다. 통신망이 경제 행위를 위 해서 쓰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군사적 목적이나 행정 처리를 위해서 중점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동독의 수 FES-Information-Series 도였고 모든 중요한 행정 기관이 위치해 있던 동베를린에 밀집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통일 직후에 동서베를린을 합친 통신망의 수준은 유럽의 낙후 지역인 크레타 섬이나 북아일랜드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동서독을 연결했던 정보 통신망도 미약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서독에서 동독으로 연결하는 전화선은 690회선 인데 비하여 동독에서 서독으로 연결하는 선은 단지 111회선밖에 되지 않았다. 그 중에서 513회선과 95회선이 베를린 지역을 연결하는 선이었다. 즉, 동서독을 연결하는 정보 통신선의 70% 이상이 동서베를린을 연결하는 선이었다. 그러면 왜 구동독 체제하에서 통신망 시설이 미비 되었는가? 그 원인으로는 먼저 투자 부족을 들 수 있다. 구동독 체신청은 통신 사업에서 매년 흑자를 보았지만 그 중 3분의 1만이 통신 분야에 투자되고 나머지는 정부 의 다른 예산 사업에 전용되었다. 매년 통신 분야의 투자는 전 투자액의 0.7%에서 1.3%밖에 안되었다. 둘째, 통신 시설 투자의 비효율성을 들 수 있다. 구동독 정부는 민간 활동이나 경제적 목적을 위한 투자 외에 군사적인 목적이나 행정을 위해서 특별 선을 깔 정도로 투자액을 낭비했다. 셋째, 통신 시설에 대한 기술이 부족했다. 이미 2차 대전 이전의 기술로 만들어 진 기기들을 계속해서 썼고 새로운 기술 투자에 소홀했다. 넷째, 설사 신기술이 개발되어도 전자 산업 분야의 기업들이 새로운 기술의 활용을 등한시했다. 3.“Telekom 2000"의 사업 계획안 통일과 동시에 양독의 체신부는 하나로 통합되었고 동독 지역의 통신 체계 현대화와 동서독 간 통신망 확충 이 체신부의 주요 정책 과제로 떠올랐다. 이 과제 수행의 일환으로 나온 것이 Telekom 2000 이라는 전자 통신 망 현대화 종합 계획이었다. 1990년에 발표된 이 계획안은 통신망, 통신 기기 및 통신 기술 등 통신 체계에 필 요한 모든 분야를 그 상호 연관성을 감안하여 한꺼번에 현대화하는 통합적인 종합 계획이었다. 통신선이 깔려 도 통신 기기가 불량하면 정보 유통이 원활하지 못할 것이고, 인공위성의 발달 없이는 정보가 공간을 초월해서 빠른 시간 안에 전달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Telekom 2000 계획은 1989년을 기점으로 삼아, 1997년에 완료되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목표치를 설정하였 다. - 전화선을 190만 회선에서 900만 회선으로 확장 - 전송기(팩시밀리)를 5천 대에서 36만 대로 확장 FES-Information-Series - 이동통신 기기를 거의 무에서 30만 대로 설치 - ISDN 선을 5천 선에서 10만 6천 선으로 확장 - 영상 문자 전환기(BTX)를 500대에서 10만 대로 확장 - 공중 전화기를 2만5천 대에서 8만5천 대로 확장 - 유선 방송선을 무의 상태에서 5백만 선으로 확장 그 외에 정보 통신망과 통신 기기들을 현대화하고 디지털화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4. 통신망 확충 과정의 난관과 해결 방안 일반적으로 독일인들은 어떤 사업을 수행함에 있어 계획이 치밀하고, 의사 결정을 신중하게 하며, 실천도 착 실하게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Telekom 2000 같은 대규모 국책 사업을 짧은 계획기간, 신속한 의사 결 정, 그리고 다양한 설비 공사를 순차적이 아닌 동시적인 시공으로 수행한다는 것은 평시 같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Telekom 2000 의 사업은 통일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양독간 경제 통합의 초석을 놓는다는 화급 한 과제를 감안, 유례없이 큰 사업을 역시 유례없이 짧은 기간에 입안, 수행에 들어갔다. 4.1. 기술적인 문제점과 해결 방안 동독 지역의 통신 시설 확충을 위한 기술적인 문제점은 시간과 효율성 문제 등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독일 에서 통신 분야의 시설 계획은 정상적인 경우 일차로 15년에서 25년간의 장기적인 통신 분야 발전 계획을 작성 한다. 통신 분야의 장기 발전 계획은 장기적인 수요 예측, 최상의 통신 시설 계획 등을 담고 있다. 다음으로 통신 시설 시공 5년 내지 2년 전에 1차 계획에 대한 검토와 수정을 거친 구상 계획(concept plan)이 만들어진 다. 이 계획에서는 계획된 공급량이 수요의 발전 추이와 일치하는지 조사하며, 시공 기간 중 필요한 물자와 재 정 수요를 추정한다. 공사가 시작되기 1년 전에 세 번째 단계인 구체적 공사 진행 계획이 작성된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공사 계획 단계를 동독 지역의 통신 시설을 확충하는 곳에 적용하기에는 상황이 급 박했다. Telekom 2000 의 계획에 따르면, 이 사업이 1997년에 끝나게 되어 있었지만 통일 직후 동독 주민들이 신청한 전화 가입만도 130만 건 이상 적체되어 있었고 동독의 경제 재건을 위해서는 새로 설립된 생산업체나 서비스업체에게 통신 시설을 보급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급성을 감안하여 Telekom 2000 은 하나의 비상 계획으로 간주, 시간적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다 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하였다. FES-Information-Series 첫째, 수요량 계산의 간편화. 1997년까지 추정되는 동독 지역의 통신 시설 수요량 예상을 과거 동독의 추세 가 아니라 서독의 경험을 토대로 해서 더 높게 책정했다. 둘째, 장기적인 발전 계획 생략. 일상적으로 만들던 통신 분야 장기 발전 계획을 생략하고 구체적인 통신망 구조 계획으로 대체했으며, 통신 구조망의 다양한 계획을 비교, 검토한 후 선택하는 과정을 생략하여 시간을 절약했다. 셋째, 임기 응변적 접근. 궁극적 목표는 동독 전 지역의 디지털화였지만 초기의 공급 부족 상태에서는 기존 의 아날로그식 여러 통신선을 함께 연계시켜 사용하면서 점진적으로 디지털화된 광케이블로 대체했다. 넷째, 공사 시행 주체의 다양화. 일반적으로 통신망을 설치하는 것은 공공 기업인 통신 시설업체의 독점 사 업이지만, 대기업체나 행정 기관의 통신선 설치를 어느 특정 기업에 일괄 발주하는 대신 예외적으로 일반 민간 기업에 분산, 발주하였다. 다섯째, 통신선의 지상 설치. 통신선은 보통 지하에 설치하지만, 시간 제약을 극복하기 위하여 지형상 지하 설치가 어려운 곳은 일단 지상에 설치했다. 여섯째, 무선 통신망 사용. 통신망의 지속 확충에도 불구하고 시설 용량의 부족이 해소되지 않자 무선 통신 기기나 인공위성의 공급 확충을 병행하여 공급 부족 문제를 우회했다. 통신망 확충 계획에서 대두된 효율성 문제는 통신선을 어떻게 짧은 기간에 가장 효율적으로 설치하는가에 있었다. 즉, 좋은 성능의 기기를 적은 비용으로 설치하는 것이었다. 다음은 독일에서 통신망을 설치할 때 효율 성을 제고하기 위하여 취한 몇 가지 사례이다. 첫째, 디지털화된 광케이블과 구리선을 병행하여 활용했다. 통신량이 많은 지역 간의 통신망은 디지털화된 광케이블 선을 이용한 반면 통신량이 적은 각 가정이나 직장에 연결은 구리선을 이용했다. 둘째, 빠른 통신망 구축을 위해서 초기에는 기존의 구리선을 사용하였다. 이 구리선은 먼저 케이블 관을 매 설한 후 그 안에 설치, 사용하다가 차츰 광케이블로 대체하였지만 광케이블 선은 이미 매설된 케이블 관을 활 용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구리선을 광케이블로 교체할 때 이중의 공사를 방지하였다. 4.2. 조직상의 문제와 해결 방안 중앙집권체제 하에서 구동독의 체신부는 대체로 중앙집권적으로 방대하게 조직되어 있었다. 체신부 산하에 중앙에 12개 사업 부서와 지방에 15개 지방 관리국이 있었고 총 종업원은 12만 9천 명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 통신국 산하에 근무하는 인력이 총 4만 명이었고, 관리 및 행정 부서에 근무한 인력이 총 1만 8천 명이었다. 그들은 풍부한 경험과 재교육 등으로 구체제 하에서의 직무 수행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었으나, 서독의 새로운 기술을 다룰 수 있는 기술자는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또한 조직 자체가 관료주의적이고 비효율적이어서 개방 FES-Information-Series 체제 하에서 더 이상 경쟁력을 갖추지 못했다. 동서독의 체신부가 통합되면서 동독 체신부의 12개 중앙 관리 부서 들은 1990년 6월 5일 통신 총관리국, 우 편 총관리국 그리고 우편 은행 및 기업 재정 담당 총관리국 등 3개로, 그리고 지방의 15개 지역 관리국은 5개 주의 관리국으로 개편되었다. 이러한 편제의 개편과 함께 관료주의적인 비효율적 운영 체제가 효율적인 기업식 경영 조직으로 개편되었다. 즉, 통신 시장의 자유화에 맞게 경쟁 체제로 개편되고 새로운 기술을 소화할 수 있 는 인사 정책이 도입되었다. 연방 차원의 조직 개편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통신부 산하 하부 기관들을 관료주의적 분위기에 서 기업의 경영 체제로 바꾸는 작업이 더 어려웠다. 그 이유는 통신 업무의 특성상 하부 기관에서 정부의 통제 와 기업적 경영 과제가 동시에 수행되어야 하는데 과거 통신부 산하 조직은 행정 일변도로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의 경쟁 기업들을 상대로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는 독일의 체신 인력들에게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경영 마인드를 불어넣는 데에는 상당한 노력과 기간이 필요했다. 새로운 조직 개편 및 과제 수행을 위해서 모든 인력들이 그들의 작업 능력에 따라 경영 체제로 재배치되었 고, 서독의 새로운 기술이나 경영 방법을 익히기 위해서 재교육을 받아야 했다. 기업의 경쟁력과 비용을 감소 시키기 위해서 감원도 동반되었다. 이와 반대로 새로운 조직에 따라 일자리를 창출하는 기관도 있었다. 예를 들어 연방 총관리국 산하에 20개의 참모국이 새롭게 형성되었다. 4.3. 재정적인 문제와 해결 방안 당초 Telekom 2000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 서독의 통신부는 550억 마르크의 투자 계획을 세웠으나 이 금 액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사후에 판명되었다. 통신부 산하의 건물이나 통신 설비가 노후해서 개보수 수요가 증 대하였기 때문이다. 투자 금액의 증가로 인하여 통신국의 자기 자본 비율이 5%로 현저하게 떨어진 것도 부담으 로 작용하였다. 더욱이 동독 통신국의 자산은 서독 통신국 자산의 4%밖에 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독 스 스로가 투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그러므로 통신 시설 재건에 대한 모든 비용은 독일의 정부와 연방통신청 이 책임을 져야 했다. 투자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동독 지역에서 예상되는 장기 적자 재정을 어떻게 해결 할 것인지도 큰 과제로 등장하였다. 결국 민영화를 통해서만 돌파구가 마련될 것이라는 것이 결론이었다. 5. 통신 시설의 민영화 5.1. 민영화를 위한 제도 및 조직 개혁 통신 분야의 민영화는 이미 미국(1982), 영국(1984) 그리고 일본(1985)에서 실시되었다. 유럽연합은 통신 시 장 개방을 지원함으로써 민간 기업들이 통신 시장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며, 시장 내에 경쟁을 불러 일 FES-Information-Series 으켰다. 이런 시장 자유화의 흐름이 유럽연합 내에 새로운 기업법을 제정하는 기회를 만들었다. 독일의 통신 분야 개혁은 1990년 1월 1일에 실행된 우편개혁 1호의 체신구조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국영 기업이었던 연방체신청(Bundespost)은 법령에 따라서 기존의 체신 업무를 우편, 통신 그리고 우편 은행으로 나 누어 각기 독립된 공기업으로 변환되었다. 지금까지 연방체신청은 두 가지의 과제, 즉 행정적, 경영적 과제를 동시에 수행하였으나 이제는 독립된 공기업 하에서 업무가 분할되었다. 국제 간 협약 그리고 통신 시장의 공정 성을 이룩하기 위한 행정적인 과제는 체신부가 관리를 하고, 경영적인 책임은 통신 공기업이 넘겨받았다. 이러 한 자율적인 독립 경영은 동독 지역의 통신망 구축을 위한 투자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했다. 즉, 민간 기업들의 통신망 구축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1994년 6월 29일에 제정된 우편 개혁 2호의 법령은 통신 공기업이 주식회사로 바뀌게 되는 법적인 기반을 형성했다. 이 법에 따라서 1995년 1월 1일에 통신 국영기업이 독일통신주식회사(Deutsche Telekom AG)로 바 뀌었다. 주식회사로 바뀌면서 기존의 공기업이 가지고 있던 재산을 넘겨 받음과 동시에 공공 기업이 가지고 있 던 채무인 1천 250억 마르크를 책임져야 했다. 1996년 11월에는 독일 통신 주식회사의 주식이 상장되었다. 그 러나 1997년 12월 31일까지는 아직도 독일 통신 주식회사가 통신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1992년 유럽연합 이 제정한 규칙에 따라 독일의 통신 시장도 1998년 1월 1일부터 민간 기업이 시장에 참여할 수 있도록 통신 시장이 자유화되었다. 그러므로 독일의 통신 시장이 완벽하게 경쟁의 체계로 돌입하였다. 이러한 통신 분야의 질서 정책적 변화는 국가가 독점하였던 통신 서비스가 통신 개혁을 통하여 시장 경제적 경쟁 체제로 변하도록 만들었다. 기존의 독일통신주식회사도 새롭게 변화하는 통신 시장의 환경에 맞게 기업 내부의 구조를 조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 행정 과제 수행 외에 기업의 이윤을 추구하기 위하여 소비자의 구매 성향을 따르는 판매 정책을 실시하여야 했다. 다른 한편 동독의 통신망 확충을 위해 투자했던 채무를 주 식 시장을 통하여 자기 자본으로 전환함으로써 독일통신주식회사의 자기 자본 비율이 높아졌다. 5.2. 민영화에 따른 통신 시장의 변화 1998년 1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민간 기업들이 통신 시장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짐에 따라 통신 시 장은 새로운 변모를 보여 주었다.<표 1>은 1998년 1월 1일 통신 시장이 개방된 후 통신 시장에 참여한 기업수 의 변화 추이를 보여준다.<표 1>에 나타난‘인가 수’는 독일체신청으로부터 통신망 사용 허가를 얻은 회사 의 수를 나타내고, 신고 수 는 통신 시장에 참여한 기업으로서 허가 없이 단지 체신청에 신고만 한 회사를 의미 한다.<표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장이 개방됨과 동시에 이미 총 1,103개 회사가 통신서비스 시장에 참여했 고 불과 3년도 채 안되어서 1,823개 회사로 증가했다. 이것은 통신 시장 내에 기업 간의 경쟁이 증가했음을 보 여준다. FES-Information-Series <표 1> 통신 시장에 참여한 민간 기업 수 98년 2월 4일 98년 7월22일 99년 2월 3일 99년 9월22일 00년 2월23일 00년 중간 인가수 269 395 491 554 611 681 신고수 1,066 1,222 1,355 1,593 1,629 1,747 총기업수 1,103 1,276 1,458 1,707 1,723 1,823 ※ 참고: 체신부로부터 인가를 받은 기업이 자신의 소유를 다른 기업으로 이전함으로 발생한 중복된 기업 수 를 뺐음. 이동통신 시장을 보면, 오히려 민간 기업에서 이동통신 시장에 참여한 기업들이 공기업이었던 「독일통신주 식회사」보다 더 높은 시장 점유율을 가지고 있다.<표 2>는 2000년 6월 현재 독일 이동통신 시장의 점유율을 보여주고 있다. 「독일통신주식회사」의 자회사인 「독일텔레콤이동통신 유한회사」가 이동통신 시장의 39.4%를 점유한 반면, 민간 기업인 「만네스만 이동통신 유한회사」의 점유율 40.6%를 포함, 민간 기업들의 시장의 점유율이 60.6%에 이른다. 이는 이동통신 시장에서는 민간 기업들이 정부 산하에 있었던 「독일통신주 식회사」보다도 더 경쟁력을 갖추었음을 의미한다. <표 2> 독일 이동통신 시장의 시장 점유율(2000년 6월) 이동통신회사 시 장 점 유 율(%) 독일 텔레콤 이동통신 유한회사 39.4 Mannesmann 이동통신 유한회사 40.6 E-플러스 이동통신 유한회사 14.7 Viag 인터콤 유한회사 5.3 통신 시장의 자유화는 민간 기업이 통신 시장에 참여하는 기회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수요자에게도 좋은 영 향을 끼쳤다. 자료에 의하면 1997년 낮 시간에 1분당 전화 사용료가 60페니히(1마르크=100페니히)이던 것이 2000년 6월에는 6.6페니히로 떨어졌다. 이러한 결과로서 일반 전화의 판매를 통한 수입은 줄어들었지만, 다른 통신 시장의 확대로, 이동통신, 캐리어-사업, 유선방송 등, 다른 여러 시장에서 수입이 증가하였다(<표 3> 참 조). 그러므로 통신 시장의 총 수입은 1998년 864억 마르크에서 1999년에 955억 마르크로 증가했다. 이 사실로 미루어, 통신 시장의 자유화는 수요자나 공급자에게 모두 득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표 3> 독일 통신 시장의 판매액 일반 전화선 이동 통신 대여 수입 Carrier-사업 유선 방송 기타(인터넷, 정보 서비스 등) 합 계 1998년 45.8 18.6 2.1 3.5 4.5 11.9 86.4 FES-Information-Series (단위: 십억 마르크) 1999년 41.9 24.9 2.1 7.1 4.6 14.9 95.5 6. 동독 지역의 통신망 발전 추세 <표4>에는 1990년부터 1995년까지 동독 지역 전화 회선수의 발전 추이가 나타나 있다. 동독 지역에 1991년 에 50만 회선, 1992년에 7십만 회선, 1993년에 100만 회선, 1994년에 120만 회선 그리고 1995년에 160만 회선 이 각각 증가하여 1995년에 동독 지역의 전화 회선은 총 690만에 달하였다. 1991년 증가된 50만 회선 중에서 3분의 1 이상이 영업을 위주로 하는 기업이나 서비스업체에 우선적으로 연결 되었다. 이로써 동독 지역의 총 사업체 중 98% 정도가 적어도 한 대의 전화를 가질 수 있었다. 1990년에 동독 지역에 인구 100명당 10.9명이 전화 회선을 가지고 있었는데, 1995년에는 41.4명으로 늘었다. 이는 서독 보급 률의 77%에 해당된다. 1997년에 상황이 더욱 개선되어 전화 회선이 760만으로 늘어 동독 주민 두 명 중 하나 는 전화 회선을 가지게 되었다. <표 5>에는 독일 전 지역의 전화 회선 수가 나타나 있다. 독일 총 전화 회선은 1990년 3천200만 회선에서 1999년 6월까지 4천720만 회선으로 증가했다. 10년 동안에 1천520만 회선이 증가하여 근 50%의 성장세를 보 였다. 전화 회선 외에도 전화나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ISDN선이 1997년까지 110만 선이 놓여졌으며, 유선방송 선 은 460만 가정에 연결되었다. 그 외에 동독 지역에 1997년까지 14만 킬로미터의 광케이블선과 200만 킬로미터 의 구리선이 깔렸는데 이는 지구를 250 바퀴나 돌 수 있는 길이이다. 모든 도시를 연결하는 전화선과 장거리 전화선이 디지털화되었고 이로써 동독 지역 내의 통신망 현대화 작업은 일단락 지어졌다. FES-Information-Series <표 4> 동독지역 전화 회선수의 발전 과정 국가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영국 전화 회선수(백만) 24.91 25.36 25.59 26.09 26.60 27.07 백 명당 전화 회선수 43.30 44.00 44.30 45.00 45.70 46.60 프랑스 전화회선수(백만) 28.10 29.00 30.10 30.90 31.60 32.40 백 명당 전화 회선수 49.40 50.80 52.40 53.60 54.50 55.80 독일 전화 회선수(백만) 31.90 33.60 35.40 37.00 39.20 40.40 백 명당 전화 회선수 39.38 41.48 43.87 46.02 49.01 50.96 서독지역 전화회선수(백만) 30.00 31.20 32.30 32.90 33.90 33.50 (A) 백 명당 전화 회선수 47.24 49.13 50.87 51.81 53.85 53.70 동독지역 전화 회선수(백만) 1.90 2.40 3.10 4.10 5.30 6.90 (B) 백 명당 전화 회선수 10.86 13.71 17.71 23.43 31.42 41.40 B/A% 22.90 27.80 34.80 45.20 50.30 77.00 <표 5> 독일의 전화 회선수의 증가량(단위: 백만 회선)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6월 ISDN 0.1 0.2 0.4 0.8 1.7 2.8 5.2 7.4 10.1 11.7 아날로그 방식 31.9 33.5 35.2 36.7 38.2 39.2 39.0 37.8 36.4 35.5 합계 32.0 33.7 35.6 37.5 39.9 42.0 44.2 45.2 46.5 47.2 1990년 라이프치히의 춘계 박람회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었던 C-선 이라고 불리는 아날로그 방식의 이동통신 이 동독 지역에 보급되어 1990년에는 동독 주민의 80%가, 그리고 1993년에는 전 동독 주민이 이동통신 C-선 을 통하여 무선 통신을 가능하게 했다. 아날로그 방식인 C-선 은 2000년 12월 말로 폐쇄되고 모든 이동통신은 디지털 방식으로 대체될 예정이다. 다시 1994년에는 디지털화된 이동통신 D1 이 전 동독 지역에 보급되었다. 이러한 이동통신망은 초기에 전화 회선의 연결 안 된 곳에 대체용으로 사용하게 되었으며, 이동통신 D1 은 중소기업회사들의 업무 능력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동통신 가입자 수는 1992년부터 2000년 6월 까지 기하 급수적으로 증가하여 2000년 12월말에는 4천8백만에 도달, 2명 중 1명이 이동통신을 사용할 것으로 예측된다. 7. 결 론 FES-Information-Series 구동독 지역의 낙후된 통신 시설은 통일 후 동독 지역의 경제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 중의 하나였다. 동독 지역을 서독의 경제 수준으로 올리기 위한 정책 수단 중의 하나로 추진된 것이 Telekom 2000 이라는 종합정보 망 구축 사업이었다. 이 사업은 독일 체신 사상 규모가 가장 방대하고 복잡한, 그리고 기술적인 임기 응변과 변화된 여건에 신속한 적응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이 사업의 일환으로 독일의 통신 체계는 대대적으로 기술적, 조직적 그리고 제도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1997 년 12월 10일 Telekom 2000 사업에 대한 최종 보고에서 「독일통신주식회사」 회장은 사업이 계획보다 더 좋은 성과를 거두었으며, 전 동독 지역의 통신망이 디지털화되었고, 전화 가입 신청 후 10년 이상을 기다려야 했던 구동독 시절과 달리 이제는 동독 지역 주민들이 신청 후 5일이면 전화를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되었 다 고 자평했다. 통신 시장의 민영화가 동독 지역의 통신망 구축을 위해 재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비효율 적인 공기업에서 효율적인 기업 경영 체제로 전환되는 데 일조를 했다. 경쟁 체제의 도입으로 통신 시설 이용 료가 대폭 인하되어 소비자의 이익이 도모되었을 뿐만 아니라 통신 시설 사용 빈도의 대폭 증가로 통신 사업자 의 수익성도 따라서 제고되었다. 북한의 정보통신 분야도 동독 못지않게 낙후된 것으로 알려졌다. 본격적인 남북경협 시대에 진입하는 상황 에서 북한의 통신 시설을 효율적으로 확충하기 위해 독일의 경험을 좀 더 심도 있게 연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고 보인다. 통일 전 서독의 대동독 정책 김 영 윤, 민족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1998년 11월 󰠲󰠲󰠲󰠲󰠲󰠲󰠲󰠲󰠲󰠲󰠲󰠲󰠲󰠲󰠲󰠲󰠲󰠲󰠲󰠲󰠲󰠲󰠲󰠲󰠲󰠲󰠲󰠲󰠲󰠲󰠲󰠲󰠲󰠲󰠲󰠲󰠲󰠲󰠲󰠲󰠲󰠲󰠲󰠲󰠲󰠲󰠲󰠲󰠲󰠲󰠲󰠲󰠲󰠲󰠲󰠲󰠲󰠲󰠲󰠲󰠲󰠲󰠲󰠲󰠲󰠲󰠲󰠲󰠲󰠲󰠲󰠲󰠲󰠲󰠲󰠲󰠲󰠲󰠲󰠲󰠲󰠲󰠲󰠲󰠲󰠲󰠲󰠲󰠲󰠲󰠲󰠲󰠲󰠲󰠲 1. 서독은 분단 40년간 한결같이 동독을 외국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특수 관계에 두고 통일에 대비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동독은 하나의 개별 국가로서 서독에서 분리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서독은 시종일관 동 서독 관계를 미해결 상태에 두고 독일의 장래에 대해 동독 주민들이 스스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도 록 하였다. 2. 서독은 자유, 평화, 통일이라는 가치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대동독 정책을 추진하였다. 자유와 평화가 언제나 통일보다도 우선 순위에 있게 함으로써 통일을 위해 자유와 평화를 포기하는 통일 지상주의의 자 세가 아니라 동독 주민들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을 더 중요시하였다. 이를 위해 서독은 항상 인도주의적 차원의 지원과 협력을 통해 대동독 접근을 이루어 나갔다. 3. 독일 통일을 가능하게 했던 서독의 대동독 정책 기조는 접근을 통한 변화 라는 작은 걸음의 정책에 있 었으며, 이와 같은 정책은 동서독간의 여러 갈등 요인과 서독내의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일관성을 유지 하였다. 4. 서독의 대동독 정책은 동서독 간 합의를 통한 협정에 도달하고 체결한 협정을 철저히 이행함으로써 실 천되었다. 동서독 간에 체결된 협정은 서독의 대동독 정책을 실현시키는 충실한 수단으로 기능하였다. 󰠲󰠲󰠲󰠲󰠲󰠲󰠲󰠲󰠲󰠲󰠲󰠲󰠲󰠲󰠲󰠲󰠲󰠲󰠲󰠲󰠲󰠲󰠲󰠲󰠲󰠲󰠲󰠲󰠲󰠲󰠲󰠲󰠲󰠲󰠲󰠲󰠲󰠲󰠲󰠲󰠲󰠲󰠲󰠲󰠲󰠲󰠲󰠲󰠲󰠲󰠲󰠲󰠲󰠲󰠲󰠲󰠲󰠲󰠲󰠲󰠲󰠲󰠲󰠲󰠲󰠲󰠲󰠲󰠲󰠲󰠲󰠲󰠲󰠲󰠲󰠲󰠲󰠲󰠲󰠲󰠲󰠲󰠲󰠲󰠲󰠲󰠲󰠲󰠲󰠲󰠲󰠲󰠲󰠲󰠲 1. 서 론 FES-Information-Series 대동독 정책이란, 일반적으로 서독의'통일 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동방 정책 을 의미하는 것이다. 동방 정책은 구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에 대한 정책을 말하며, 독일 정책은 동서독 관계에 대한 정책을 뜻한다. 동 방 정책은 독일 정책에 큰 영향을 미치고 독일 정책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서독 정부 가 독일 문제와 관련하여 동독과의 관계 개선 및 이를 위한 소련의 이해를 고려해야 했으며, 폴란드와 체코 같은 동유럽 국가들과의 화해를 비롯하여 미국을 포함한 프랑스, 영국 등 서방 국가들의 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 글은 통일 전 서독의 대동독 정책이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그 변화 배경과 함께 동독에 대 한 기본적인 관계 설정이 어떠하였는가를 제시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2. 대동독 정책의 전개 과정 1) 힘의 우위에 의한 정책 1945년 5월 8일 독일군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한 후 전승 4개국은 같은 해 6월 5일 베를린에서 연합국 통제위원회를 설치하여 독일을 분할 통치하고 베를린을 공동 관리한다는 공동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어 7월 에는 다시 포츠담에서 독일의 무장 해제, 비무장화, 탈나찌 및 민주화라는 네 가지 원칙을 수립하고 독일 중앙정부의 수립은 당분간 보류하되, 점령 기간 중 독일 전체를 하나의 경제 단위로 취급하는데 합의했다. 독일 내 중앙정부 수립은 비로소 서방 3개 점령국이 1948년 7월 1일 서독 지역의 주 수상들에게 헌법제 정권을 허용하는[프랑크푸르트 문서]를 전달, 서독 지역에 적용될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도록 허용하면서 가 능해졌다. 서독 지역의 주 수상들은 서독에 수립되는 국가는 헌법이 아닌[기본법]을 제정하여 통일될 때까 지 효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한 뒤, 통일이 되면 독일 국민 전체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새로운 헌법을 제 정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기본법은 국회가 아닌 의회 위원회에서 제정하고, 이의 확정도 국민투표를 거치지 않고 주 의회를 통하기로 하였다. 기본법 전문은 전 독일 민족은 자유로운 자결권으로 독일의 통일과 자유를 달성해야 한다. 고 규정함으로 써 통일 문제에 관한 서독 정부의 기본 원칙을 제시하고, 제23조에는 독일의 다른 주가 독일 연방공화국에 가입하면 그 가입한 주에도 기본법이 적용된다. 고 명시하여 동독 지역의 주들이 독일 연방공화국에 가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두었다. 나아가서 제146조에는 이 기본법은 독일 국민의 자유로운 결정으로 제정된 헌 법이 발효되는 날 그 효력을 잃는다. 고 밝힘으로써 통일 이후 새로운 헌법을 제정할 수 있는 가능성도 마 련해 두었다. FES-Information-Series 기본법이 공포된 후 1949년 8월 최초로 연방의회 총선이 치러졌으며, 여기에서 기민·기사당이 자민당과 연정을 하는 정부가 구성되었다. 기민당의 아데나워가 초대 수상이 되고 자민당의 호이스는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9월 20일 아데나워는 조각을 완료하고 연방 정부를 공식 출범시켰다. 한편, 동독 지역에서는 1945년 6월 소련군사행정청(SMAD)이 설치되면서 소련에 의한 공산화 작업이 곧바 로 시작되었는데, 1945년 9월부터 토지 개혁이 실시되고 주요 기간산업이 국유화되었다. 그리고 그 이전 1945년 6-7월에 이미 공산당, 사민당, 기민당, 자민당 등 여러 정당이 창당되고, 중앙행정기관이 설립되었다. 1946년 4월에는 공산당(KPD)과 소련 점령 지역 내 사민당을 합쳐 독일사회통일당(SED)이 결성되었다. 그 후 1949년 10월 7일 임시 인민회의에서 독일민주공화국 헌법이 선포되었다. 1955년 파리조약이 발효되면서 서독은 서유럽동맹과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게 되었으며, 기존의 점령 규약도 폐지되었다. 이로써 서독은 주권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아데나워 정부는 서독의 서구 편입에는 주력하였으나, 동독에 대해서는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취임 초 그는 동독 지역의 정부 수립에 대해 동독 정권은 주민의 자유의사에 따라 수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불법이 며, 따라서 독일연방공화국만이 독일 국민을 대변할 권한이 있다 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아데나워 정부 는 동독 정부와의 어떠한 접촉도 거부했으며, 이에 한걸음 더 나아가 다른 나라들까지도 동독과 외교 관계 를 단절하게 하는 소위 할슈타인원칙(Hallstein-Doktrin)을 채택하였다. 아데나워 수상에게 대동독 정책은 실질적인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서 구의 결속과 힘을 바탕으로 대동유럽 정책을 추진하여야 하며, 이 과정에서 세력 균형이 서방측에 유리하게 전개될 경우, 동서독의 통일을 포함하여 독일 문제가 서독과 서유럽의 주도 아래 이루어질 것이라고 인식했 다. 다시 말해, 대동독 힘의 우위 정책을 견지했던 것이다."통일은 자유로운 가운데 평화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을 표면적으로 내세우면서도 이를 동독과의 협상이 아닌 소련과 직접 협상을 통해 이루려고 했 다. 그 후 1950년대 중반 이후 1960년대 말 서독이 동방 정책을 추진할 때까지 서독 정부의 대동독 정책은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즉 서독의 힘의 우위에 바탕을 둔 단일 국가와 단독 대표권 그리고 자유 총선을 통한 대동독 정책은 큰 변화를 보이지 않고 10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1961년 베를린 장벽이 구축되고 동 서 베를린 간 통행이 단절됨으로써 주민들의 고통과 불만은 높아가면서 아데나워의 친 서방 정책과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 대동독 정책은 그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2) 접근을 통한 변화 1963년 10월 물러난 아데나워 수상의 뒤를 이어 들어선 에르하르트 정권이 보다 융통성 있는 외교 정책 을 추진함으로써 서독은 동독을 제외한 동유럽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였다. 1966년 3월 서독은 동 FES-Information-Series 유럽 국가들에게 무력 사용 포기, 군비 통제 및 긴장 완화를 내용으로 하는 평화 공안을 보내는 동시에 같 은 해 폴란드, 루마니아, 헝가리와 1964년에는 불가리아와 각각 무역대표부를 설치·교환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야당인 사민당에서는 보다 적극적인 독일 정책의 추진을 주장하였는데, 베를린시 정 부 대변인이었던 에곤 바르는 1963년 투찡어 기독 아카데미 연설에서 처음으로 동독과의 관계를"접근을 통한 변화"에 맞출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당시 베를린 시장으로 있던 빌리 브란트는 베를린 장벽으로 인해 주민들이 큰 고통을 받고 있음을 인식하여, 동독을 향한 실질적인 접근 정책을 시도하였는바, 그는 1963년 12월 동독과 베를린 통과사증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서베를린 주민들의 동베를린 방문을 가능케 했다. 이 통 과사증협정 체결은 대동독 정책의 대전환을 향한 첫걸음으로서 동독을 국가로서 인정하지 않으려던 종전의 태도에서 한 걸음 나아간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동독이 주장하는 국제법 상의 국가 인정이 라는 목표에 한걸음 가까워지게 된 셈이었다. 1966년 불경기에 대한 대책을 둘러싸고 자민당이 연정에서 탈퇴함으로써 서독에는 기민당과 사민당의 대 연정이 구성되었다. 수상에는 기민당의 키징어, 외무장관 겸 부수상에는 사민당 당수 빌리 브란트가 취임하 였다. 키징어-브란트 정부는 동유럽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독과의 관계를 진전시 키고자 하였는데, 여기에서 사민당은 오데르-나이세 국경선 인정, 할슈타인 원칙의 완화, 동독의 사실상 승 인 문제 등 동독 관련 핵심 문제에서 기민 ․ 기사당보다 훨씬 진보적인 자세를 보였다. 키징어 수상은 1966년 12월 정부 성명을 통해 동독을 국가로 승인하지는 않지만 관계 증진을 추진할 의 사가 있다고 천명하면서 이전에 에르하르트 수상이 주장한 바 있는 무력 행사 포기를 다시 한 번 제의하였 다. 이어서 동독에 인적. 물적 교류를 증진시키고 분단으로 인한 고통을 해소하며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방 안에 대해 상호 협력할 것을 제의했다. 또한, 키징어는 연방의회 시정 연설에서 동독 불승인 정책을 지속할 것임을 재선언하면서도 서독의 인간적·정신적 및 경제적 관계 개선을 위한 양독 관리의 접촉을 제의하였으 며, 동독 승인 문제를 부각시키지 않으면서도 동서독의 접촉을 강화함으로써 동독 주민의 생활 증진을 추구 할 것임을 밝혔다. 그 외에도 ① 소련을 비롯한 동구 제국과의 외교관계 수립, ② 핵무기의 생산 및 보유 포기, ③'뮌헨협정' 무효 선언(국경선 문제), ④ 나토 및 미국과의 동맹 관계 유지, ⑤ 독일과 프랑스 관계 증진과 양국 협조의 필요성, ⑥ 민족 자결에 의한 독일의 재통일 등을 강조하였다. 1967년 1월 31일 서독이 루마니아와 외교 관계를 수립한 이후 사민당 당수 브란트는 곧이어 4월 12일에 는 서독의 평화협정과 긴장 완화 정책을 발표 하였으며, 4월 20일에는'할슈타인 원칙' 폐기 가능성과 동독 인정 가능성을 발표함으로써 기존의 정책에 일대 변혁을 가했다. 1969년 9월 연방의회 선거에서 사민당과 자민당이 연정을 구성함으로써 수상이 된 브란트는 대연정 당시 제기했던 신동방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브란트는 1969년 10월 독일 문제, 베를린 문제, 소련 및 동구와의 관계 그리고 유럽 평화 문제에 관한 연 FES-Information-Series 방하원 연설 및 1970년 1월 의회에 제출한 국가 현실에 관한 보고서에서 동서독 관계의 특수성 하에 두 개 독일 국가의 인정, 정부 당국 간 교섭, 동서독 간 무력 행사 금지협정 체결, 교역과 인적 접촉 등을 추진할 것을 제시했다. 베를린과 유럽 문제에 관련해서는 베를린의 안전 보장, 베를린 상황 개선을 위한 전승 4개 국의 동서 베를린 교통 및 서독과 서베를린 간 왕복 교통 보장 등을 요구하였으며, 소련과 동구의 관계에 대해 상대국의 영토 보전과 국경을 존중하는 무력 불행사 협정 체결 등을 언급하였다. 특히, 대동독 정책과 관련하여 브란트는 지금까지 동독 정부의 사실상의 승인을 피하기 위한 정책에서 탈 피하여 ① 정부 차원에서 동독과 협상하며, ② 동독을 포함하여 동유럽 국가들과 무력 불행사에 관한 조약 체결을 제안하고, ③ 동독과의 무역 확대를 추진하며, ④ 전독성을 내독성으로 개칭하는 것을 밝혔다. 이후 서독은 한편으로는 동독과, 다른 한편으로는 소련 및 기타 동구권과 관계 개선을 위해 활발한 협상을 전개 함으로써 동서독 정상 회담, 소련과 무력 행사 포기에 관한 조약, 폴란드와의 관계 개선에 관한 조약, 베를 린 지위에 관한 전승 4개국의 협정 그리고 동서독 기본조약 등을 체결하게 되었다. 3) 기본 조약 체결과 동서독 교류·협력 동서독 간 교류 협력의 확대 ․ 발전이 가능했던 것은 1972년 12월에 체결된 동서독 기본 조약 체결에서 출발한다. 기본 조약은 유럽 모든 국가들의 국경선 불가침과 영토 보전, 무력 위협이나 무력 사용의 포기를 규정하고 있는 조약 본문과 양독 간 관계 설정 및 상호 간 자주·독립 존중을 비롯하여 각 분야별 교류 협 력 등을 규정하고 있는 10개의 부속 문서로 구성되어 있는데, 기본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그 이듬해인 1973 년 9월에는 서독 통신사 특파원이 비로소 동베를린에 상주, 파견될 수 있었다. 또한 같은 해 동서독은 나란 히 유엔에 가입하게 되었다. 한편, 동독도 서독과 기본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서방 세계와의 관계 개선에 본격적으로 임하게 되었으며, 앞서 언급한 UN 등 국제기구에 가입한 것은 물론, 프랑스, 영국, 미국 등 서방국들과 외교 관계도 수립하여 국제사회의 동등한 일원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동서독 관계 개선에는 소극적이었다. 이와 같은 동독의 태도로 기본 조약에서 합의한 상주 대표부의 설치는 기본 조약 체결 후 약 1년 반이 지난 1974년 5월에 가서야 비로소 양측 대표를 교환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당시 브란트 수상은 독일에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동서독은 언어, 문화, 역사, 가족 관계 등에서 공통성을 갖 는 단일 민족이라는 양국 간 관계를 견지한 반면, 동독 수상인 호네커는 사회주의 민족 국가인 동독과 자본 주의 민족 국가인 서독은 별개의 국가로서 양국 사이에는 어떠한 특별한 관계도 없으며, 민족까지도 다르다 는 주장을 계속 견지하였던 것이다. 1974년 4월 연방 수상실 보좌관 귄터 기윰 간첩 혐의 사건을 기화로 브란트는 수상직에서 물러났으며, 그 뒤를 헬무트 슈미트가 이었지만 슈미트는 대동독 정책 관련, 브란트의 업적을 관리하는 수준에 머물렀 FES-Information-Series 다. 슈미트 수상은 독일 문제를 주로 모스크바와의 협상을 통해 해결하려는 자세를 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4년 10월 슈미트의 소련 방문 이후 동서독 간에는 1974년에서 1980년까지 총 17개 의 조약적 성격을 갖는 협정이 체결되었다. 여기에는 예를 들어 1974년 4월 건강·보건 분야 협정과 비상업적 지불 청산에 관한 협정, 1975년 12월 베 를린과 마리엔보른 간 고속도로 건설 협정, 1976년 3월 우편 및 통신 협정, 1976년 5월 상대편 국경을 넘어 선 갈탄 채취에 관한 협정, 1978년 11월 베를린과 함부르크 간 고속도로 및 베를린 텔토프 운하 건설에 관 한 협정, 1979년 12월 수의사 협정, 1980년 바르타와 헬레스하우전 간 고속도로 연결 협정, 1982년 6월 상 호 지불 거래 협정, 서베를린 시민의 동베를린과 동독 일일 방문에 관한 협정, 1982년 9월 청소년 여행 및 상호 교류에 관한 협정 등 여러 가지 협정이 있었다. 1982년 9월 자민당의 사민당과의 연정 탈퇴에 따라 헬무트 콜을 수상으로 하는 연립정부가 들어선 이후 서독 정부는 기본법 전문에 명시된 통일 명제를 다시 한 번 강조하고 독일 통일은 자유로운 자결권 행사를 통해 이룩되어야 한다 는 의지를 재확인했다. 콜 수상은 자유가 통일의 전제 조건이며 자유를 희생하면서까 지 통일을 이룩할 수 없음을 밝히면서 취임 직후부터 동서독 간 유효한 협정들에 근거하여 동서독 주민들 의 편의를 도모하는 포괄적이고 장기적인 해결책을 마련함으로써 동독과의 협력 관계를 지속할 것을 선언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독 관계에는 별다른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양독 관계의 돌파구가 마련된 것은 1983년 6월 서독 정부가 동독 정부에 대한 10억 마르크 차관 제공 보 증이 이루어지면서였다. 서독은 차관 보증의 대가로 동독에 내독 간 경계선의 자동 발사 장치를 제거하고 동서독 주민들의 상호 방문을 통제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그 결과, 1984년 11월 마지막 자동 발사 장치 가 철거되었으며, 이어 동독은 같은 해 4만 명의 동독 주민들의 서독 합법적 이주를 허용했다. 그 밖에도 여행 및 방문 시 수속 절차와 검문 검색 절차를 간소화하였다. 또한 문화와 환경 분야를 비롯하여 수질 제 거, 산림 피해 방지, 핵시설 안전 문제에 대한 회담과 협상이 이루어졌다. 1984년 7월 서독 정부는 동독에 추가로 9억 5천만 마르크의 은행 차관에 대한 보증을 섰으며, 그 결과 동독 정부는 연금 수령자의 최소 의무 환전액을 낮추고 국경 지역의 방문에 한해 2일까지 체류 기간을 연 장하는 등 상응한 조치를 취했다. 1985년 3월 12일 소련 공산당 서기장 체르넨코의 장례식에 참석한 콜 수상은 호네커와 장시간의 대담을 통해 동서독 관계 개선을 촉구하는 동시에 동서 양진영 간의 군축 협상 재개를 위해 노력했다. 이어 1987 년 9월 7일에는 동독의 국가 원수로서는 최초로 호네커가 서독을 공식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서독은 호네 커를 국가 원수로 예우함으로써 동독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는 뜻을 표하기도 했다. 당시 콜 수상은 체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양독 간 차이가 동서독 주민들에게 불편을 끼쳐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한데 대해 호네커는 이에 호응하여 비록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서로 상극이지만 구체적인 협력 관계는 지속되어야 한 FES-Information-Series 다고 강조했다. 호네커의 방문 기간 중 동서독 간에는 환경, 방사선 보호, 과학기술협력 확대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으며, 양독 국경에서의 여행, 방문과 소포 우송 문제에 대한 완화 조치가 발표되었다. 1988년 3월 에는 베를린 지역을 포함하여 동독 지역에 대한 장기적인 전력 공급 협정이 체결되었으며, 문화 교류도 활 발히 추진되었다. 1987년에는 11,500명의 동독 주민이 서독으로 이주하였으며, 1988년에는 25,000명을 넘었 다. 1989년 여름에는 동유럽의 개혁과 함께 헝가리, 오스트리아 국경의 철조망이 해제되자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 물밀듯이 몰려오기 시작했으며 이는 독일이 통일로 향해 가는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3. 대동독 정책의 특징과 효과 1) 대동독 특수 관계 통일 전까지 서독은 어떠한 기조 위에서 대동독 정책을 추진하였는가? 서독이 견지했던 대동독 정책의 핵심을 알기 위해서는 서독이 설정한 대동독 기본 관계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1949년 동독이 수립되면서 동독은 헌법에 독일은 분리할 수 없는 공화국이며, 독일 국적은 하나만 있을 뿐이다 라고 밝히면서 하나의 독일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동독의 경제 사정이 계 속 악화되는 가운데 6월 17일 동베를린에서 인민 봉기가 일어나자, 동독 정부는 1953년 9월 제16차 당 대 회에서 독일에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한다 는 것을 선언하고, 서독에 국제법적으로 동독을 인정할 것을 촉구 했다. 이는 동독이 기존에 주장해 오던 단일 국가 개념에서 탈피한 것으로 서독에 비해 힘의 열세를 인식한 동독의 기존노선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동서독 관계는 기본 조약에 명시된 표현과 이를 해석하는 쌍방의 상이한 입장에서 잘 알 수 있는데, 기본 조약 제1조에는 동서독의 관계를 상호 동등성에 기초한 정상적인 선린 관계 로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해석하는 데 동서독은 큰 차이를 나타내었다. 동독은 정상적인 선린 관계 를 상호 국제법적 승인을 포함한 동등한 주권을 가진 외국이라는 관계로 파 악하여 동서독 관계를 내독 관계 라고 표현하는 것을 거부했던 반면, 서독은 정상적 이라는 표현이 국제법 적'승인 또는 인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단순한 실체 존중 을 말하며, 선린 이란 단지 밀접한, 공간적인, 인간적인 관계 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다시 말해, 서독은 동독과의 관계를 우방국이나 동맹국의 주 민들 간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관계가 아닌, 특수한 형태 속의 관계 라고 규정하고 정상적인 선린 관계 가 동독에 대한 국제법적 승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입장을 사실상 통일 달성 시까지 일관성 있게 유지했다. 서독이 견지한 이와 같은 대동독 특수 관계 는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는 문제, 미해결 독일 문제를 비롯하 여 독일 민족의 존속과 동일한 역사, 2차 대전 패전국으로서 겪어야 하는 공동 운명을 내포하는 관계를 나 FES-Information-Series 타내는 것으로서 법적 차원이 아닌 정치적인 의미로만 파악할 수 있는 개념이다. 1973년 6월 18일 연방헌법재판소는 동서독 간 기본 조약을 어떤 법질서에 귀속시켜야 하는 가라는 판결 에서 양독 간 관계는 가깝고도, 특수한 관계로 포기할 수 없는 법적 지위를 부여 받은 관계라고 규정한 바 있다. 또한 기본 조약이 갖는 성격과 관련해서는 같은 해 7월 31일 동독은 국제법상으로는 국가인 동시 에 국제법 주체이기는 하나, 서독은 이를 국제법상으로 승인하지 않는다... 동시에 기본 조약 체결은 양독 관계의 특수한 성격을 실질적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라고 판결함으로써 기본 조약을 형식적 으로는 국제법상의 조약으로, 내용상으로는 내독 관계를 규정짓는 이중 성격의 조약으로 평가한 바 있다. 또한, 기본 조약의 내용이 기본법의 통일 명제 조항에 위배되지 않느냐는 논란에 대해서도 서독 헌법재판소 는 기본 조약이 평화 보장과 분단 고통 완화를 통한 인도적 측면에서 전 민족의 이해를 고려하고 있으므로 기본법 전문에 규정 된 재통일 명제에 위배되는 것은 아니며, 이 조약에도 불구하고 독일 민족의 단일성과 단일 독일 국적은 고수되며, 동독은 국제법상으로 인정되지 않으므로 합헌이라고 판결하였다. 이상과 같이 동서독 관계는 기본 조약을 통해 정상화되고 국제적으로 공식화되었지만 ① 양독 간의 성격 규정, 즉 국가 간 평화 공존이냐, 민족 내부의 특수 관계인가 하는 문제와 함께, ② 관계 정상화의 목표, 즉 동독은 서독으로부터의 현상 유지 인정을 통한 자국의 독자적인 국가 인정 쪽에, 서독은 조약의 도구적, 잠 정적 성격을 강조하며 분단 고통 완화를 통한 궁극적인 통일 쪽에, 그 밖에도 ③ 민족 문제, ④ 국적 문제 등에서 동서독은 근본적인 입장 차이를 보였다. 이와 관련 1974년 유엔총회 연설에서 양독의 외무장관은'민족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상이한 입 장을 표명한 바 있는데, 서독 외무장관 겐셔는 우리측은 현 분단 상태를 민족 문제 해결의 마지막 단계로 받아들일 수 없으며, 독일 민족의 자유로운 자결권 행사를 통해 분단 국가는 재통일 되어야 한다 라고 말하 면서 하나의 독일 민족에서 파생되는 양독 간의 관계는 특수 관계 라고 재차 천명했다. 이에 대해, 동독의 외무장관 피셔는 이러한 서독의 민족 자결권 강조는 현 유럽의 상태를 바꾸려는 위험한 발상 이라고 경고 하고 이미 동독 국민들은 자결권 행사를 통해 사회주의를 선택했다. 고 주장하면서 오늘날 독일 땅에는 두 개의 국가와 두 개의 민족, 즉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민족이 존재한다. 고 밝혔다. 그러나 기본 조약이 체결된 이후 동독은 국가 관계의 특수성을 부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사실 상 인정하는 상반된 태도를 견지했다. 이는 동독이 양독 관계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내독 관계로부터 얻은 혜택이 없어지는 딜레마에 기인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위와 같은 특수성 이 성립되어야 하는 양독 관계에서 서독은 경제적 희생을, 동독은 정치적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2) 신동방 정책과 통일 브란트의 신동방 정책은 의도적인 통일, 제도적인 통일이 아닌 동독 주민의 힘에 의해 스스로 서독과 하 FES-Information-Series 나가 됨으로써 자발적으로 통일을 원하는 상황을 만들 수 있었던 시발점이었다. 다음에서는 신동방 정책 추 진의 배경과 그것이 통일에 미친 영향에 대해 기술하고자 한다. 포츠담 협정에 따른 전쟁 손해배상 처리와 관련하여 소련은 자신의 점령 지역인 동독에 대해 그 배상을 청구하였으며, 서방측 연합국들은 동독 지역의 경제를 소련에 위임해버림으로써 동서독은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적·정치적으로도 분할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와 함께 연합국들과 서독 정부는 동서독 점령 지역 내에서 여러 가지 까다로운 행정 절차를 마련하여 내독 교역이 이루어지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동 독으로의 물품 반출이나 서독으로의 반입을 언제라도 차단시킬 수 있는 행정적 장치를 마련하였으며, 행정 지도 권한을 필요 이상으로 확대, 사용하는 방법을 통해 동독에 대한 선별적·한시적 경제 제재 조처를 취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조치를 서독과 서방 연합국들은 소련과 동독이 베를린으로의 통행을 봉쇄 할 때마다 맞서는 정치적, 경제적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다시 말해, 서독은 내독 교역을 베를린으로의 통행 로가 항시 열려있도록 보장하는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독 공산당을 몰락시키는 정치적 압력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하였다. 사실 당시 동독으로서는 동독 경제가 소련에 대한 전쟁 보상으로 인해 크게 악화되었기 때문에 동독 경제를 위해 내독 교역은 절실한 사안이었다. 일부 동독 제품의 경우에는 서독 시 장만큼 유리한 조건을 갖춘 곳이 없었으며, 내독 교역이 국가의 내부 거래 형식을 띠었기 때문에 동독으로 서는 큰 경제적 혜택을 누리는 셈이었다. 그러나 서방의 수출 규제가 동독의 경제 계획 달성에 큰 차질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동독은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내독 교역의 확대와 무역 규제 완화를 서독에 요청하기 까지 했다. 그러나 당시 실제 취해졌던 서방 국가를 위시한 서독의 동유럽 국가를 포함한 대동독 정책은 동독의 경 제 발전에 지장을 주었다. 그와 같은 봉쇄 정책은 결과적으로 동서독 간 생활 수준 격차를 심화시키는 요인 이 되었으며, 이는 동독 주민들로 하여금 서독으로의 탈출을 결심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동독 정부에 대해 서는 동서독 간 인적 왕래를 차단하는 조치로 작용하였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양독 간의 대립을 심화시키고 동독 경제를 사회주의 경제 진영으로 더욱 통합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동독 정부가 상호 통신은 물 론, 가족 방문마저 어렵게 함으로써 서독 주민들에게 동독은 그야말로 머나먼 이웃 나라 로 전락하는 상태 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1958년 이후 수차례에 걸친 베를린 봉쇄가 대두되었으며, 1960년 9월에는 내독 협 정이 파기되는 상황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요청에 따른 서독 정부의 대동독 경제적 고립화 정책은 지속되었다. 1961년 8월 베를린에 장벽이 설치되자 서독 정치가들은 비로소 과거에 품었던 통일의 환상으로부터 깨어 나 독일 민족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고찰하게 되었다. 독일 통일은 결코 무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강대국들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져야만 그 가 능성이 높아질 것이라는 판단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자원 및 원자재 부족 현상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쌍방 FES-Information-Series 의 노력과 협력 확대는 양측에 모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동독의 체 제 변화는 외부의 직접적 간섭을 통해서 보다는 내부의 점진적인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다 는 정치 적인 신념으로 발전하였다. 바꾸어 말해, 서독 정부는 기존에 취했던 정책, 즉 서방의 지원을 받아 서독이 잘 살게 되면 경제난에 허덕이는 동독 주민들은 자연적으로 소련 체제에 대항하게 될 것이며, 이로써 소련 군들은 어쩔 수 없이 점령 지역을 통합의 전 단계로 내어놓지 않으면 안 될 것 이라는 판단에서 벗어나 동 독과의 교류를 동독에 대한 국가 인정 문제와 결부시켜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견지하게 되었으며, 이를 바 탕으로 내독 관계 개선을 저해하는 요인들을 제거시키는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서독은 첫째, 동서 유럽 간 갈등의 근본적 쟁점 사항이었던 독일 문제를 서독 정부가 주도적으로 해결함 으로써 유럽의 안보에 기여하고, 둘째, 동서독의 제도화된 병존을 인정하며, 셋째,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실 질적 협력 관계에 바탕을 둠으로써 동독 체제의 변화를 유도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추진된 접근을 통한 변화 라는 에곤 바르의 개념에 입각한 신동방 정책은 현상 유지(status quo) 상황에서 역동화를 겨냥하고 1950년대 아데나우어의 힘에 의한 우위 정책 에 대응하는 분단 유럽 극 복의 정책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인적 접촉의 강화와 더불어 유럽이라는 틀 속에서 독일의 단일성 회복을 추구하였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신동방 정책에 의한 내독 관계 정립이 독일 통일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 였는가 하는 점이다. 신동방 정책은 그것이 추진되었을 당시 다음과 같은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첫째, 동독 체제의 궁 극적인 변화를 겨냥하고 있으면서도, 동독 체제를 인정하고 안정화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신동 방 정책의 장기적인 목표와 단기적인 정책 수행 간에는 직접적인 모순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에 게 신동방 정책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둘째, 신동방 정책은 동서독 교류 협력 기간에 동독 주민을 담보로 협상을 벌이는 동독 지도부에게 많은 것을 양보하고 동독 정권을 안정시켜 줌으로써 독재 체제의 생명을 연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서독 정부가 정부 차원의 접촉, 즉 동독 지도층과의 대화를 동독 반체제 인사들과의 대화·접촉보다 더 중요시함으로써 동독 내의 개혁 세력이 성장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앴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셋째, 신동방 정책은 공산주의 체제가 오래 존속할 것이라는 가정 하에 현상 유지 일변도의 역사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데서 근본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동방 정책은 통독 이후 그 역할이 크게 긍정적으로 재평가되었다. 긍정적인 평가의 근거는 첫 째, 공산 체제는 외부의 압력으로는 결코 극복할 수 없으므로 서독 정부가 접근을 통한 변화의 정책을 추진 하였기 때문에 소련에서의 고르바초프 출현과 동구권의 개혁, 동독의 평화 혁명이 가능할 수 있었다는 점이 다. 다시 말해, 소련의 대동구 지배 질서와 내부 체제의 붕괴 과정은 서독의 신동방 정책 추진 및 그에 따 FES-Information-Series 른 서구 진영의 대동구 화해 정책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독일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신동방 정책의 추진으로 이루어낸 많은 인적, 물적 교류가 동독 주민에게 자유 민주주의와 부유한 서독의 실체를 확인시켜 주는 기회를 안겨줌으로써 민주화와 자유화 의식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으며, 이것 이 궁극적으로는 통일 당시 서독 체제로 통일을 추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4. 결 론 서독의 대동독 정책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첫째, 동서독 관계가 모든 분야에서 상호 융화하고 조화롭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경쟁과 갈등이 나타나면서도 협력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관계를 인식할 수 있다. 동서독은 그와 같은 불가분의 연계가 이어질 수밖에 없는 역사적, 지리적, 환경적 조건을 가지고 상호 관계를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둘째, 동서독 간 교류와 협력이 어떤 과정과 형태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동서독 주 민들이 접촉하게 하였고, 이를 통해 상대방을 알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동서독 간 교류와 협력은 서로 상대방을 인식하게 하고 상대방이 처한 상황을 알 수 있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곧 통일이라는 것이, 또한 동일 민족의 동질성 회복이 비록 그것이 어떤 형태로 나타날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으며, 시간적으로도 언제 이루어질 지는 예측할 수 없어도 반드시 상대방을 알아야만 가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우치고 있다. 상대방을 잘 알 수 있을 때 비로소 동질화가 가능하며 동질화를 향한 염원 이 체제의 단일화로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독일 통일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서독의 일관적인 대동독 정책, 그 가운데서도 실질적인 교류 협력을 가능하게 했던 정책과 이를 통한 동독 주민의 서독 실상에 대한 인식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동유럽의 정치적 변화에 따른 국제적 상황 변화는 동서독을 통일 과정으로 인도했 던 중요한 도화선이 되었지만 동독 주민이 통일을 이루려는 의지와 힘을 갖게 한 것은 이미 그 이전 오랜 기간의 동서독 간 접촉과 접촉을 통한 동독의 내적 변화를 가능케 한 서독의 정책에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통일을 가능하게끔 한 서독의 대동독 정책은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독일 한부모 가족 취업모를 위한 사회 정책적 지원 박 명 선, 전주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교수 2006년 8월 󰠲󰠲󰠲󰠲󰠲󰠲󰠲󰠲󰠲󰠲󰠲󰠲󰠲󰠲󰠲󰠲󰠲󰠲󰠲󰠲󰠲󰠲󰠲󰠲󰠲󰠲󰠲󰠲󰠲󰠲󰠲󰠲󰠲󰠲󰠲󰠲󰠲󰠲󰠲󰠲󰠲󰠲󰠲󰠲󰠲󰠲󰠲󰠲󰠲󰠲󰠲󰠲󰠲󰠲󰠲󰠲󰠲󰠲󰠲󰠲󰠲󰠲󰠲󰠲󰠲󰠲󰠲󰠲󰠲󰠲󰠲󰠲󰠲󰠲󰠲󰠲󰠲󰠲󰠲󰠲󰠲󰠲󰠲󰠲󰠲󰠲󰠲󰠲 독일에서 빠르게 증가한 한부모 가족은 더 이상 비전형적인 가족 유형으로 여기지 않는다. 더구나 출산율 감소로 인한 복지 국가의 축소 위기가 논의되는 가운데 자녀를 출산하여 양육하는 한부모 가족의 사회적 중요성은 더욱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핵가족을 모델로 구조화된 가부장적 복지 국가에서, 특히 한부모 가족 취업모는 자 녀 양육으로 인한 미취업의 위험과 아버지의 역할 결여로 인한 문제 상황에 봉착하고 있다. 따라서 자녀 양육을 뒷받침하려는 가족 정책, 이들 가족의 빈곤 위험, 양육의 어려움 및 심리적 불안을 극 복하기 위한 사회 정책적 지원, 가정과 직장의 양립을 가능하게 하는 노동시장 정책적 지원이 제공 되고 있다. 2005년부터 시행되는 하르츠 제4법(Hartz IV)은 노동시장 정책과 사회 정책을 결합하여 실업 상황 에 있는 젊은 한부모 가족 여성의 취업을 위한 수요자 중심의 통합적 구직 서비스를 제공하고, 어린 자녀를 양육하면서 직업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교육-실습 이중 구조의 파트타임 교육을 실시한다. 한부모 가족의 여성들은 이제 독신모의 상황을 더 이상 위기가 아니라 기회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적인 평가가 일반화되려면 여전히 사회적 통합의 대상인 한부모 가족의 당면한 위험에 대한 공동체적인 해결 의지가 결집되어야 한다. 󰠲󰠲󰠲󰠲󰠲󰠲󰠲󰠲󰠲󰠲󰠲󰠲󰠲󰠲󰠲󰠲󰠲󰠲󰠲󰠲󰠲󰠲󰠲󰠲󰠲󰠲󰠲󰠲󰠲󰠲󰠲󰠲󰠲󰠲󰠲󰠲󰠲󰠲󰠲󰠲󰠲󰠲󰠲󰠲󰠲󰠲󰠲󰠲󰠲󰠲󰠲󰠲󰠲󰠲󰠲󰠲󰠲󰠲󰠲󰠲󰠲󰠲󰠲󰠲󰠲󰠲󰠲󰠲󰠲󰠲󰠲󰠲󰠲󰠲󰠲󰠲󰠲󰠲󰠲󰠲󰠲󰠲󰠲󰠲󰠲󰠲󰠲󰠲 1. 한 부모 가족의 증가와 가족 정책 FES-Information-Series 독일의 복지 국가적 발전이 정체되었다거나 이미 쇠퇴하였다고 보는 학자들은 그 원인의 하나를 고령화보다는 출생률 저하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출생률 저하는 소위 정상 가족 으로서의 핵 가족이 감소한 결과인데, 독일에서는 가족 유형이 급격하게 다양해지고 있다. 2005년 현재 독일에서 자녀를 키우는 전체 가구수는 1,260만으로, 이 중 73%에 해당하는 930만 가구가 전통적인 핵가족이고, 한부모 가족이 21%, 자녀를 키우는 동거 가족이 6%를 구성한다. 가족 정책의 표적 집단은 특히 18세 미만의 자녀를 키우는 가족으로, 이는 890만 가구에 이른다. 가구 유 형별로 보면, 혼인부부 가족의 68%, 동거부부 가족의 90%, 한부모 가족의 60%가 미성년 자녀를 양 육하고 있다. 2003년 통계에 따르면, 파트너와 동거하는 경우까지 포함하여 한부모 가족이 양육하는 미성년 자녀의 수가 280만 명이며, 이는 전체 미성년 인구의 10%에 해당한다. 따라서 전통적인 핵가 족 중심의 가족 정책은 이제 대안 가족의 안정적인 자녀 양육에 대한 지원도 강화하고 있다. 동거 파트너 없이 자녀를 양육하는 한부모는 2003년 현재 153만 7천 명이며, 이중 87%인 134만 명이 여성이다. 이들의 7.3%는 사별로 인해 혼자 자녀를 양육하는 경우이며, 별거인 경우가 18.4%, 이혼의 경우가 41.9%로 조사되었다. 나머지 32.4%는 비혼 여성으로서 이들의 비율은 빠르게 증가하 고 있다. 한부모 가족은 현재 모든 계층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대도시의 경우 더욱 빈번하다. 또한 사회주의를 경험한 후 과도기 전환 과정을 겪고 있는 구동독 지역의 비율은 상당히 높다. 출생률 증가를 목표로 하는 인구 및 가족 정책은 출생뿐 아니라 양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따라 서 양육자로서의 여성의 역할 수행을 강조하여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정책을 실행한다. 한편 대표적 인 빈곤위험 집단으로 꼽히는 여성 한부모 가족이 사회부조에 장기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노동시장에 기여하면서 안정적으로 자녀를 양육하도록 지원하는 노동시장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여성 취업을 늘리면서 자녀 양육의 역할을 가능하도록 유도하는 가정과 직장의 양립 지원을 통해 한부모 가족 여성의 취업률을 높이려는 것이다. 한부모 가족 여성 가구주의 취업 상황과 이에 대한 사회 정책적 지원은 한부모 가족의 특징적인 가족 기능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설명될 수 있다. 다음 장에서는 한부모 가족의 위험 상황과 일반 적인 사회 정책적 지원을 먼저 살펴본다. 2. 한부모 가족의 위험과 사회 정책적 지원 FES-Information-Series 한부모 가족, 특히 여성 한부모 가족은 대표적인 빈곤위험 집단이지만, 자발적 비혼모를 포함하여 한부모 가족이 더 이상 동질적인 집단으로 특징지어지지 않는다. 미성년 자녀를 키우는 여성 한부모 가족의 25%가 사회부조를 받고 있으며, 수급자는 특히 어린 자녀를 키우는 40세 미만의 젊은 여성이 많다. 한편 구서독 지역에서는 18세 이상의 자녀를 키우는 한부모 가족의 50%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 6-17세 사이의 자녀를 키우는 한부모 가족도 30% 이상이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구 동독 지역의 경우는 그 비율이 현저히 낮아서 각각 16%, 10% 정도이다. 이렇게 한부모 가족은 계층, 연령대, 삶의 경로가 다양한 집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핵가족 유형에서 기대하는 가족 기능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사회 구조 안에서 한부모 가족은 여전히 결여된 또는 제한된 가족 기능으로 유지된다. 특히 여성 한부모 가족 은 가부장적 복지 국가의 중심 행위자인 남성 배우자의 부재로 인한 빈곤의 위험, 사회보장 및 보호 에서 제외되는 취약한 사회적 지위, 아버지 역할의 결여에 따른 자녀 양육의 실패, 파트너 부재로 인 한 심리적 불안을 경험하고 있다. 또한 자녀 양육 때문에 미취업 상태가 지속되고, 교육 및 직업 경 력이 단절되는 등, 자립적인 사회생활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1) 빈곤 지원 빈곤 위험에 있는 한부모 가족은 생계와 자녀 양육을 지속하기 위해 아동 수당, 양육비 및 양육비 세금 공제, 생계비 대부, 사회부조와 추가 소요비용을 받을 수 있다. 본인의 집에서 자녀를 키우고 있는 한부모에게 자녀의 최저 생계를 보장하기 위한 아동 수당이 지 급된다. 한편 아동 수당 대신 자녀 양육을 위한 세금 공제를 선택할 수 있다. 1,824유로의 최저 생계 비와 1,080유로의 자녀 양육비와 교육비에 대해 세금 공제를 받을 수 있다. 자녀가 본인의 가족으로 만 등록되어 있다면, 자녀를 직접 키우고 있는 한부모는 자녀의 다른 한쪽 부모가 자녀 양육비 및 교 육비로 인해 받는 세금 공제를 자신이 받게 할 수 있다. 이러한 대안은 소득이 중간 계급에 속하는 한부모에게 더욱 유리하다. 다른 한쪽 부모에게 자녀 양육비를 전혀 받지 못하거나 최소한의 비용도 받지 못할 경우, 자녀를 직접 키우는 한부모는 생계비 대부를 받을 수 있다. 자녀의 연령이 12세까지 최장 72개월을 받으며, 첫 자녀가 받은 아동 지원금의 반에 해당하는 금액을 받는다. 불가피한 자녀 양육으로 인해 취업하지 못하거나 취업 기회가 없는 한부모 가족 여성은 다른 생계 FES-Information-Series 수단이 충분하지 못할 경우에 사회부조 수급자가 된다. 2001년의 여성 한부모 가족 조사에 따르면 이들의 27%가 사회부조를 받고 있다. 7세 미만의 자녀가 있거나 16세 미만의 자녀가 둘 또는 세 명 이 있는 경우는 사회부조 규정 금액의 40%에 해당하는 추가 소요비용을, 자녀가 4명 이상일 경우는 60%를 받는다. 추가 소요비용을 받으면서 한정적인 취업 활동을 할 경우는 이 비용에 취업자 세금 공제로 결정되는 기준액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금액을 더 청구할 수 있다. 이 때 취업 소득액은 수급 자격을 결정하는 기준 생계비에 포함되지 않는다. 조세법에는 독신 부모를 위한 특별 규정이 있고, 양육비 관련 법률이 개정되면서 한부모 가족은 더 유리한 조건으로 양육비를 청구할 수 있게 되었다. 2) 자녀보육 및 심리적 ․ 정서적 지원 독일아동및청소년지원법은 아동과 청소년의 개인적이며 사회적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사회적 보 호와 지원의 책임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부모 가족의 자녀 보육에 대한 관심은 청소년청의 주요 업무이다. 우선, 한부모 가족의 중요한 양육 조건으로서 자녀들이 다닐 수 있는 보육 시설 연계와 가정보육 사 파견을 지원한다. 구서독 지역은 3세 미만의 자녀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위한 보육 시설이 충분하지 않다. 재정이 부족한 지역 공동체에서는 보육 시설의 유지와 개선에 대한 요구 때문에 보육 료가 인상되고 있고, 한부모 가족의 경우에 소득이 낮으면 청소년청에 보육비를 청구할 수 있지만, 취 업모의 경우는 소득으로 인하여 보육비 청구가 쉽지 않다. 또한 종일제 보육은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취업모는 직장의 근무 시간을 조절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구동독 지역은 보육 시설 사정이 나은 편 으로 거의 수요에 따른 보육 시설 공급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부모 가족은 가족 교육 및 이혼, 별거 등의 상황에서 가족 관계에 대한 법적, 심리적 조언을 받을 수 있으며, 가족생활의 물질적, 심리적 문제에 대한 상담, 임신 ․ 출산 등의 가족 구성, 출산 휴가, 육아 휴직, 간병 휴가, 가족 회복 등에 대한 지원도 받을 수 있다. 청소년청은 한부모 가족의 위기 상황에 개입하는데, 6세 미만의 자녀를 키우는 경우, 자녀에 대한 보호와 양육이 불충분하다고 판단되면 가족 회복을 위해 지원 요청이 없어도 개입한다. 청소년의 불 안정한 보호와 교육에도 개입하여 정보와 상담을 제공한다. 한부모 가족의 결여된 가족 기능과 이들 에 대한 사회적 편견 및 배제와 관련하여 발생하는 독특한 장애 상황, 즉 빚을 지거나 실업으로 인한 FES-Information-Series 물질적 빈곤, 불량한 주거 환경, 자녀 양육이 과도하게 부담이 되는 경우, 장애 아동을 키우는 경우, 가정 폭력이나 약물 중독 등의 문제가 발생하면, 청소년청은 이들에 대해 물질적 지원과 함께 사회사 업적 지원을 한다. 청소년청은 호적사무소와 연계하여 혼외 자녀가 출생할 때부터 자동적으로 행정 지원을 실시하나 후견 지원은 1998년 7월 1일부터 자발적인 요청이 있어야 가능하며 친부 확인과 생계 지원을 한다. 연방정부 차원의 지원뿐만 아니라 주정부와 지역 사회 차원에서도 카리타스나 종교적인 사회봉사단 체, 사회복지단체, 한부모 자조 집단 등과 같은 자원 조직에 대해 가족 지원, 자녀 양육 및 교육 지 원, 이혼 문제 등에 관한 상담과 정보 제공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3. 한부모 가족 취업모의 취업 상황과 요구 1) 취업 실태와 문제점 2000년 현재 15-64세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은 58%에 달한다. 이들 중 18세 미만의 자녀를 키우 는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은 63%이고, 자녀의 연령이 높아질수록 그 비율은 높아진다. 18세 미만의 자녀를 키우는 한부모 가족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은 67.2%로, 혼인하여 18세 미만의 자녀를 키우 는 여성의 참여율인 62.5%보다 높다. 취업 소득은 안정적인 가족 경제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원천이지만 여성 한부모 가족은 자녀 양육으로 인해 취업 경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취업 경력을 지속적으로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되 어 있다. 따라서 전체 가구 평균 순소득 1,904유로와 비교하여 여성 한부모 가족의 평균 순소득은 1,534 유로로 평균 이하이며, 남성 한부모 가족의 평균 순소득 1,960유로와도 크게 차이가 난다. 핵가족의 평 균 순소득 2,835유로, 자녀를 키우는 동거 가족의 평균 순소득 2,516유로와는 더욱 크게 차이가 난다. 연령에 따른 가중치를 부과하여 계산한 결과, 여성 한부모 가족의 가족 구성원 1인당 소득은 모든 가족 유형의 가족 구성원 1인당 소득의 76%밖에 되지 않는다. 한부모 가족 여성의 취업에 대한 요구는 상당히 강해서 1997년 전일제 취업자의 비율은 29%로 핵 가족 취업모의 전일제 취업자 비율보다 두 배가 높다. 한편 이들의 실업 관련 조사 결과를 보면, 실 업률이 가장 높은 집단은 낮은 구직 자격과 돌봄이 필요한 자녀를 가진 경우로 나타났다. 반면 노동 시장에서 높은 구직 자격을 갖추고, 자녀의 연령이 높은 한부모 가족 여성은 직장을 구하는데 거의 장애를 받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FES-Information-Series 가정과 직장의 양립에 따른 이중 부담은 여성의 높은 파트타임 취업률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2000 년 통계에 따르면, 미성년 자녀를 가진 취업모의 5분의 3이 파트타임 취업을 하고 있다. 이 때 자녀가 한 명인 경우는 취업모의 2분의 1이 파트타임 취업을 하지만, 자녀가 4명 이상인 경우는 취업모의 3분 의 2 이상이 파트타임직에 종사하고 있어 자녀수에 따른 양육 부담이 여성의 불안정한 취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6-15세 자녀를 키우는 한부모 가족 취업모가 미취업인 경우, 가족 구성원의 1인당 소득은 1인당 평균 소득의 45%에 해당한다. 그러나 파트타임 취업을 할 경우, 1인당 소득은 64%, 전일제 취업을 할 경우는 80%까지 상승한다. 한편 소득 빈곤은 미취업의 경우는 56%, 파트타임 취업의 경우는 26%, 전일제 취업의 경우는 11%로 감소한다. 그러나 전일제 취업을 함으로써 빈곤선에서 벗어 난 약 90%의 여성 한부모 가족이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이 사는 것은 아니다. 베른트 에겐(Bernd Eggen)이 지적하듯이 이들은 근로 빈민의 상태에 있으므로 언제든지 빈곤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있다. 한부모 가족 미취업 여성에 대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이들은 미취업의 원인이 노동시장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었다. 자신들이 적극적으로 구직을 하지 않았거나 자녀를 돌봐야 하므로 직장에서의 유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미취업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비전형적이거나 조건이 나쁜 직장에도 취업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한부모 가족 취업모들은 핵가족 취 업모보다 훨씬 빈번하게 조건이 나쁜 직장에 취업하고 있다. 노동시장에서 관찰되는 상황을 살펴보 면, 한부모 가족 취업모들의 9%는 한시적인 노동 계약을 하는데, 이는 핵가족 취업모의 4%가 하는 것과 크게 차이가 난다. 한편, 한부모 가족 취업모들은 한시적 노동 계약으로 인해, 또한 더 나은 고 용 조건을 위해 이직하는 경우가 핵가족 취업모보다 두 배 더 많았다. 한부모 가족 취업모들은 주말 이나 저녁, 밤 근무 또는 교대 근무를 하는 경우가 빈번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전일제 직장을 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파트타임 근무를 더 많이 하고 있었다. 2) 한부모 가족 여성의 취업을 위한 요구 직업 상황을 향상시킬 수 있는 가능성으로 한부모 가족 여성들은 우선 기업에서 가정과 직장을 양립할 수 있는 방안들을 지원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첫째로 한부모 가족 취업모의 상황에 대한 인식과 직장인으 로서의 수용, 가족 휴가(출산 휴가, 육아 휴직, 간병 휴가) 이후의 재취업 프로그램 제공, 해고 보호, 자녀 보육 보장 등을 원했다. 둘째로는 자녀 양육비를 감당할 수 있고 나아가 보장할 수 있을 정도의 재정적인 뒷받침을 원하고 있었다. 노동 환경으로는 높은 주당 노동시간과 초과 노동시간을 지적하면서 가정과 직장 의 양립을 위해, 생계를 보장할 수 있는 보수가 주어지는 파트타임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취업 전 망과 관련해서는 숙련향상 프로그램을 강하게 원하고 있었다. FES-Information-Series 한부모 가족 취업모들은 어린 자녀뿐만 아니라 보육원이나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의 생활시간 과 일치하는 노동 시간을 원하고 있었다. 기업 차원에서 노동 시간과 작업장 선택의 유연성을 제공하 면 이는 한부모 가족 취업모가 자녀를 돌볼 수 있는 가능성을 향상시키는 효과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기업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미치게 된다. 가족 문제로 인한 한부모 가족 취업모의 결근 위험을 줄일 수 있고, 덜 긴장하면서 높은 생산성을 발휘할 한부모 가족 취업모를 동료로 활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 다. 제도적 차원에서 포괄적인 보육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보육 시설을 신설, 개선할 것과 한부모 가족 취업모들에 대한 추가적인 자녀 보육비 제공도 요구하였다. 한편 한부모 가족 취업모에 대한 부 당한 편견을 불식시키는 것도 중요한 과제로 지적되었다. 4. 가정과 직장 양립 을 위한 사회 정책적 지원 한부모 가족의 여성은 핵가족의 여성보다 경제활동 참가율이 높지만 실업률도 높다. 1993년부터 사 회법(SGB) III은 자녀를 보육하는 경우, 이를 감안하여 실업수당을 다른 실업자들보다 높게 책정하도록 하였다. 한부모 가족의 실업 여성이 이에 해당한다. 한부모 가족의 취업모는 자녀 보육으로 인해 파트타임 취업의 비율이 높다. 그러나 파트타임 취업 에 대한 법적인 보호가 미흡해서 불안정한 취업 상황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2001년부터 효력을 발생 한 파트타임 및 한시적 노동법에 따라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 법은 15인 이상 의 피고용인이 있는 기업의 경우에, 불가피한 경영상의 이유가 없고, 같은 업무를 하는 일자리가 비 어있을 때는 이미 6개월 이상 종사한 파트타임 취업자의 노동시간 연장 요구를 수용하도록 하였다. 개정된 연방양육비법에 따라 2000년부터는 자녀 연령이 3세까지의 부모기간(Elternzeit)에 부모가 주당 30시간까지 노동시간을 단축하고자 할 때 이를 수용하도록 하였다. 또한 자녀의 연령이 8세까 지 고용주의 동의하에 12개월까지 노동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법은 피고용인 15인 미만 의 소기업에는 해당되지 않아서 파트타임 취업자가 부모기간에 노동 시간 단축을 요구한 기업의 68%는 제외되었다. 연방가족ㆍ노인ㆍ여성ㆍ청소년부의 지원한 2002년의 빈곤 예방을 위한 뉘른베르크 설문 조사 에 서 여성 한부모 가족의 빈곤 상황을 구체적으로 연구하였는데, 특히 3세 미만의 자녀를 가진 여성 한 부모 가족의 취업 상황이 매우 불안정하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3세 미만의 자녀를 키우는 한부모 가 족 취업모의 5분의 4는 직업 지향적이며, 자녀 양육과 동시에 가능한 빠른 취업과 직업 복귀를 원하 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연구는 불안정한 복지 한계 집단의 빈곤 탈출을 위해서는 구직을 위 FES-Information-Series 한 지역사회 중심의 통합 정책이 필요하다는 논의를 제공하였고, 대대적인 노동시장 개혁 프로젝트 인 Hartz IV를 뒷받침하였다. 2005년부터 실시된 하르츠 제4법(Hartz IV)는 이전의 단순한 노동시장 정책적 프로그램에 사회 정책 적 특성을 결합하여 취업의 안정성, 지속성 및 경로 적합성을 목표로 한다. 이는 우선 실업 집단에 대한 적극적인 수요자 중심의 구직 서비스를 전개하기 위해 담당 행정부서를 통합, 개편하였다. 특히 젊은 구 직자의 안정적인 취업을 위해 직업훈련을 강화하고, 기업으로 하여금 적극적인 일자리 창출과 유동적인 실습훈련 과정을 제공하도록 유도하며, 이를 사례 담당자(Fallmanager)가 적극적으로 개발, 연계하도록 하였다. 노동 능력이 있는 빈곤 집단의 빈곤 탈출을 위해, 이들에게 사회부조와 실업부조를 통합한 실 업수당 II를 제공하고, 직업훈련의 기회를 제공하도록 하였는데 그 구체적인 방안이 연방가족ㆍ노인ㆍ 여성ㆍ청소년부에서 제안한 파트타임 취업교육 이다. 사회부조 또는 실업부조 수급자로서 노동 능력이 있는 여성 한부모 가족은 2005년부터는 실업수당 II의 수급자(2005년 4월 현재 457,000명)가 되었는데, 이들 중 205,000명이 직업교육을 이수하지 않은 상태이다. 특히 25세 미만의 젊은 여성 한부모 가족과,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이민 여성 한부모 가족이 이에 해당한다. 한편 급속하게 진행되는 산업 합리화로 자녀 양육 후 재취업하려는 여성 한부모 가족 도 취업을 위한 재훈련 또는 향상훈련을 받아야 하는 실정이다. 이를 위해 여성 한부모 가족을 위한 특별 직업훈련이 실시되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한부모 가족의 취업모는 불안정하고 임금이 낮 은 일자리에 취업하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따라서 전면적인 직업훈련제도 개선이 요구되었고, 헤센주에 서 실시된 젊은 한부모 가족 취업모를 위한 직업훈련 프로그램(JAMBA) 이 성공을 거두면서 2005년 4월 부터 연방직업교육법에 의하여 교육-실습 이중체계의 파트타임 취업 교육 을 실시하고 있다. 피교육자 인 한부모 가족 취업모가 이미 고정되어 있는 전일제 직업교육제도에 따라 교육 받는 것이 아니라, 자 녀 보육을 함께 할 수 있도록 유동적으로 교육 및 실습시간을 조정하면서 교육 받을 수 있게 한 것이 다. 이는 기업의 적극적인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며, 취업과 자녀 보육을 연계하기 위한 지역 사회의 네트워크 구성, 이를 구체적이고 유동적으로 연계하여 조정하는 조직 없이는 불가능하다. 또한 심리 사회적, 재정적, 물리적 시간 배분의 어려움을 겪는 한부모 가족 취업모의 복합적인 문제를 수요자 중심의 교육으로 해결하기 위해 교육 방법 등의 소프트웨어의 변화와 함께 조직적인 환경 변화, 즉 시간 구조, 자녀 보육 및 사회사업적 조언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사회법(SGB) II에 의해 구성된 지역공동체-노동사무소 협의회(ARGEn) 가 한부모 가족의 다양한 가족 및 취업 조건에 대한 구체적인 개별 사정을 통해 자녀 보육, 취업 및 직업교육 등에 관한 적합한 정보와 상담을 제공하도 FES-Information-Series 록 하였다. 또한 고용 증진을 위해 지역 사회의 전문가 풀을 구성하여 한계 집단의 지역사회 통합을 꾀하도록 하였다. 지역 사회의 지원과 이들을 통합하기 위한 조직적 네트워크의 중요성도 부각되어 한부모 가족과 지역 주민이 함께 하는 공동체 모임을 정기적으로 만드는 등, 잦은 접촉을 통해 이들 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는 방법이 실시되고 있다. 하르츠 제4법은 수요자 중심의 친가족적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여성 한부모 가족에게 보다 유리한 프로그램으로 평가 받고 있다. 또한 이 프로젝트는 이미 미국에서 신자유적인 복지국가 조정으로서 실시된 노동연계 복지 프로그램들처럼 근로 빈민을 양산하는 상황이나 유럽에서 현저히 나타나는 이 민 집단에 대한 사회적 배제가 나타나지 않도록 계획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여 성 한부모 집단과 관련하여 지적된 문제점을 보면, 그 대상이 한정적이다. 노동 능력이 있고, 가정과 의 연계 때문에 취업하지 않은, 3세 미만의 자녀를 키우는 경우에만 제공되기 때문이다. 5. 사회 정책적 지원에 대한 평가 한부모 가족 여성들의 사회 정책적 지원에 대한 평가를 설문조사를 통해 살펴보면, 이들은 공식적 이며 자발적인 지원을 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적인 상황이 변화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또한 문제 집단으로 다루어지는 것을 거부하는 경향이 강했다. 응답자의 거의 절반 정도가 공식적인 지원 없이 자신의 생활 상황을 극복하고자 했고, 극복할 수 있었다고 응답했다. 공적 기관을 통해 받은 지원은 재정 지원(자녀 탁아비, 생계비, 일시적 부조), 별거, 이혼 및 파 트너 관계에 관한 상담 서비스, 자녀 양육 관련 상담, 어린이집 입소, 일반적 정보 및 조언의 순으 로 나타났다. 상황 개선을 위한 제안으로는 다양한 보육 시설과 프로그램, 가정과 직장의 양립 가능성을 위한 구조적인 환경 조건의 개선을 들었다. 대부분의 한부모 가족 연구에서도 여성 한부모 가족의 일상생 활을 중심으로 자녀 보육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중요하다고 확인하면서, 부모 요구에 따른 탁아 시간 을 중심으로 자녀 보육이 원활하게 되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또한 이들의 제안은 경제적인 개선에 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부담의 균등화 및 한부모 가족이라는 가족 유형에 대한 인정과 평가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성 한부모 가족 유형은 빠르게 확대되어 왔고, 계속 확대될 전망이 다. 따라서 전통적 핵가족과는 차별적인 사회 정책적 전망으로 이에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축소되 FES-Information-Series 는 복지국가의 국가 과제로서 자녀 출산과 양육을 담당하는 여성 한부모 가족에 대해 이제는 비정상 적 가족 유형이라는 낙인과 이들이 처한 위험에 대한 근심보다는 이들의 삶의 방식이 새로운 도전과 기회 획득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들의 낙관적인 삶의 전망은 현재 여성 한 부모 가족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 상황을 사회적으로 극복하면서 가능해질 것이다. 독일 공적연금제도의 개혁 추이와 기업연금 김 상 호, 관동대학교 경영학부 교수 2005년 6월 󰠲󰠲󰠲󰠲󰠲󰠲󰠲󰠲󰠲󰠲󰠲󰠲󰠲󰠲󰠲󰠲󰠲󰠲󰠲󰠲󰠲󰠲󰠲󰠲󰠲󰠲󰠲󰠲󰠲󰠲󰠲󰠲󰠲󰠲󰠲󰠲󰠲󰠲󰠲󰠲󰠲󰠲󰠲󰠲󰠲󰠲󰠲󰠲󰠲󰠲󰠲󰠲󰠲󰠲󰠲󰠲󰠲󰠲󰠲󰠲󰠲󰠲󰠲󰠲󰠲󰠲󰠲󰠲󰠲󰠲󰠲󰠲󰠲󰠲󰠲󰠲󰠲󰠲󰠲󰠲󰠲󰠲󰠲󰠲󰠲󰠲󰠲󰠲󰠲󰠲󰠲󰠲󰠲󰠲󰠲 신중도 기치를 걸고 등장한 사민당/녹색당 연합정권은 공적연금제도 개혁을 중요한 목표로 설정하고 연금제도 개혁을 단행하였다. 연금법 개혁 2001 은 1957년의 연금법 대개정 이후 가 장 의미 있고 포괄적이며 혁신적인 법률로 평가받고 있다. 연금법 개혁 2001 의 핵심 내용은 공적연금제도의 개선과 사적연금 활성화를 위한 정부 지원의 확대에 있다. 연금법 개혁 2001 의 가장 큰 특징은 부과방식으로 운영되는 공적연금에만 의존하던 기존의 정책에서 탈피하여, 적립방식으로 운영되는 사적연금제도(기업연금 및 개인연금) 역시 노후 소 득을 보장하는 중요한 구성 요소로 인정하고, 정부가 다양한 형태의 정부 보조금과 세제 혜택 을 주어 사적연금제도를 적극 지원하는 점이다. 이는 공적연금에만 의존하여 노후 소득을 보 장하던 기존 정책과 큰 차이가 있다. 󰠲󰠲󰠲󰠲󰠲󰠲󰠲󰠲󰠲󰠲󰠲󰠲󰠲󰠲󰠲󰠲󰠲󰠲󰠲󰠲󰠲󰠲󰠲󰠲󰠲󰠲󰠲󰠲󰠲󰠲󰠲󰠲󰠲󰠲󰠲󰠲󰠲󰠲󰠲󰠲󰠲󰠲󰠲󰠲󰠲󰠲󰠲󰠲󰠲󰠲󰠲󰠲󰠲󰠲󰠲󰠲󰠲󰠲󰠲󰠲󰠲󰠲󰠲󰠲󰠲󰠲󰠲󰠲󰠲󰠲󰠲󰠲󰠲󰠲󰠲󰠲󰠲󰠲󰠲󰠲󰠲󰠲󰠲󰠲󰠲󰠲󰠲󰠲󰠲󰠲󰠲󰠲󰠲󰠲󰠲 1. 서론 FES-Information-Series 노후 소득을 정부가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시작한 것은 산업화 이후의 새로운 현상이다. 19세기 말까지 근로자들은 일반적으로 근로 능력을 상실할 때까지 취업했으며, 근로능력을 완전히 상실 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가족의 도움(family insurance)에 의존했다. 19세기 말부터 도입되기 시작 한 공적연금제도는 연금 지급을 통하여 은퇴할 수 있다는 근로자의 꿈이 이루어지게 하였으며, 노 후의 빈곤 완화에도 기여하였다. 독일의 공적연금제도는, 비스마르크(Bismarck)가 법률을 제정함으로써 1889년 세계 최초로 도입되었으며, 이후 서구 선진국들이 공적연금제도를 도입하는데 기여하였다. 공적연금을 구성 하는 중요한 제도로 생산직근로자연금제도(1889년 도입), 사무직근로자연금제도(1911년 도입) 및 광부연금제도(1923년 도입)가 있다. 또한 공적연금제도에는 직업별 연금제도의 특수 직종에 속하는 공무원연금제도, 농민노령부조 및 수공업종사자연금제도가 있지만 이들의 비중은 낮았 다. 보험 원칙을 중시하는 비스마르크의 독일식 제도는 부조 원칙을 중시하는 베버리지의 영국 식 제도와 함께 공적연금제도의 중요한 두 축을 구성하고 있다. 독일의 공적연금제도는 우리나 라가 공적연금제도(공무원연금제도; 1960년, 군인연금제도; 1963년, 사학연금제도; 1975년, 국 민연금제도; 1988년)를 도입할 때 모범 제도의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독일 공적연금제도의 변 화는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공적연금제도를 개혁하기 위한 중요한 법 개정은 1957년, 1972년, 1992년 및 2001년에 있었다. 초기의 법 개정이 급여 확대를 목적으로 진행된 것과 달리 1990년 이후의 법 개정은 재정 안정화 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첫째, 1957년의 연금법 대개정(大改正)에서 재원 조달 방식이 적립 방식 에서 부과 방식(적립금을 축적하지 않고 현재의 근로 세대가 납부하는 보험료로 은퇴 세대를 부 양하는 방법)으로 전환하였다. 또한 기초 부분과 소득 비례 부분으로 이원화되었던 연금 산식을 소득 비례 방식으로 일원화하였고, 임금 상승률에 비례하여 연금을 인상하는 제도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저부담-고급여 구조로의 제도 변경은 과도한 세대 간 소득 재분배를 통하여 형평 성 문제를 야기했다. 둘째, 1972년 법 개정에서는 가입 대상자가 확대되었으며, 연금 급여 수준이 추가로 인상되었 고, 조기 노령연금(여성, 실업자 및 장애근로자는 60세에, 그리고 35년 이상의 장기 가입자는 63 세에 수급 가능)과 최저 임금에 맞춘 연금을 신설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도한 급여 확대는 70년 FES-Information-Series 대의 석유 파동으로 발생한 장기 경기침체 때문에 재정을 악화시켰고, 이에 따라 시행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원상 복귀 되었다. 셋째, 1992년 법 개정은 당면한 문제인 재정 안정화에 중점을 두었다. 80년대 이후의 낮은 경 제성장률과 고령화 추세의 가속화는 부과 방식으로 운영되는 연금 재정을 위협하였다. 우선 재정 안정화를 위하여 1972년의 법 개정에서 낮추어진 연금 수급 개시 연령을 점진적으로 이전의 65세 로 연장하였다. 또한 단기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가입자는 보험료 인상을 통하여, 연금 수급 자는 급여 수준의 인하를 통하여, 그리고 정부는 국가 보조금 비율을 인상해서 재정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재정 악화가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발생하자 재정 안정화 방안의 실시 시기를 1992 년의 법 개정에서 계획했던 것보다 앞당겨 실시하였다. 아울러 1997년에 보험료율이 18.7%에서 심 리적 한계선으로 간주되던 20%를 초과하여 20.3%가 되자, 독일의 정치가들은 부가가치세 인상을 통 하여 연금 재원을 조달하는 데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1997년 12월에 부가가치세를 15%에서 16%로 인상하였고, 이렇게 조달된 재원의 일부를 활용하여 연금 재정을 지원하고 있다. 높은 재원 조달 비용이 기업의 국제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가처분 소득을 축소시켜 근로 의욕 을 상실케 하는 요인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새로 집권한 사민당/녹색당(SPD/Gr ü ne) 연립 정 권은 이러한 비판을 수용하여 법을 개정하였다. 이에 따라 유류 소비 억제를 통한 생태계 보호를 위하여 신설한 환경세 재원의 일부를 연금 재정을 지원하는데 사용하여 2000년 1월에 19.3%로, 그리고 2001년 1월에는 19.1%로 보험료율을 소폭 인하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안 역시 공적연금 제도가 직면한 수급 불균형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다. 독일 공적연금제도에서 발생한 재정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고령화의 진전과 장기 경기침체이 다. 다양한 출산 장려 정책에도 불구하고 출생률은 낮은 반면, 보건 의료 수준의 발달로 수명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2003년에는 20세~64세의 취업자 3.6명이 65세 이상의 연금 수령자 1 명을 지원하지만, 2030년에는 20세~64세의 취업자 2.2명이 65세 이상의 연금 수령자 1명을 지원 해야 하는 인구 구조로 변하게 된다. 이러한 고령화 사회의 진전은 인구 구조 변화에 민감한 부과 방식으로 운영되는 공적연금의 재원 조달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2. 연금법 개혁 2001 의 개요 신중도 기치를 걸고 등장한 사민당/녹색당 연합정권은 공적연금제도 개혁을 중요한 목표로 설 FES-Information-Series 정하고 연금제도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를 주무 부처인 보건사회부 장관의 이름(Walter Riester)을 따 리스터 개혁 으로, 또한 정부가 지원하는 사적연금을 리스터 연금 이라 부르기도 한다. 공적연 금제도, 사적연금제도 및 개인연금제도로 이루어진 3층 보장망을 활용한 노후 보장을 주요 내용 으로 하는 연금법 개혁 2001 은 1957년의 연금법 대개정 이후 가장 의미 있고 포괄적이며 혁신 적인 법률로 평가받고 있다. 연금법 개혁 2001 의 핵심 내용은 공적연금제도 내에서의 제도 개선과 사적연금 활성화를 위한 정부 지원의 확대에 있다. 먼저 공적연금제도의 개선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보험료 율의 인상을 억제하기 위하여 급여 수준을 단계적으로 인하하였다. 이에 따라 급여 수준이 2010 년에 약 5%, 그리고 2030년에 약 7% 인하될 전망이다. 둘째, 유족연금인 배우자 연금을 축소하는 반면, 육아 기간을 연금 산정에서 높게 평가하여 자녀를 양육한 여성에게 유리하도록 하였다. 1992 년 이후 출생한 자녀에 대해 3년간 보험료를 납부한 것으로 인정해 주는 인정 육아 기간에 취업하 여 보험료를 납부한 가입자에게는 실제로 납부한 보험료에 추가하여 연금에서 인정하는 소득(전체 가입자 평균 소득)을 합산하여 보험료를 납부한 것으로 인정토록 하였다. 셋째, 이혼한 사람에게 제공되는 분할 연금과는 별도로, 혼인 기간 중에 취업하여 획득한 연금 수급을 위한 최소 가입 기 간 역시 부부가 희망하면 분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이혼하지 않은 부부 역시 본인들이 희망하면 배우자의 연금 수급을 위한 인정 기간을 분할하여 본인의 최소 가입 기간을 충족시키는 데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사적연금제도의 활성화를 지원하는 방안은 연금법 개혁 2001 에서 매우 중요하다. 연금법 개혁 2001 의 가장 큰 특징은 완전 부과 방식으로 운영되는 공적연금에만 의존하던 기존의 정책 에서 탈피하여, 적립 방식으로 운영되는 사적연금제도(기업연금 및 개인연금) 역시 노후 소득을 보장하는 중요한 구성 요소로 인정하고 정부가 다양한 형태의 정부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주어 사적연금제도를 적극 지원하는 점이다. 이는 공적연금에만 의존하여 노후 소득을 보장하던 기존 정책과 큰 차이가 있다. 연금법 개정으로 더 많은 기업연금과 개인연금을 수급하기 위하여 임금 중의 일부를 보험료로 납부하는 근로자에게 제공되는 정부 보조금과 세제 혜택은 저소득 근로자와 자녀가 많은 가정에 유리하다. 또한 정부가 근로자에게 제공하는 지원 규모가 2002년부터 2008년까지 단계적으로 늘 어나도록 설계하였다. 연금법 개혁 2001 은 보험료율의 안정에 중점을 두어 보험료율이 2020년까 지 최대 20%를, 그리고 2030년까지 최대 22%를 초과하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FES-Information-Series 2020년까지 보험료율이 20%를 상회할 것으로, 그리고 2030년까지 22%를 상회할 것으로 전망되 면 연방정부가 국회에 보험료율의 인상을 억제할 수 있는 적절한 방안을 제시하도록 규정하고 있 다. 3. 연금법 개혁 2001 과 기업연금제도 연금법 개혁 2001 이전의 기업연금제도의 중요한 문제점은 근로자가 전직하여 다른 기업에 취 업할 때 이전 기업에서 받은 기업연금 수급권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한 기업에 10년 이 상 근무하고 동시에 35세 이상인 근로자가 전직한 경우에만 이전 기업에서 확보된 기업연금 수급 권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독일은 이러한 최소 근무 기간과 최소 연령 규정을 통하여 장기근속 을 유도하였지만, 이는 평생직장 개념에서 벗어나 전직이 자주 일어나는 최근의 취업 패턴에는 맞 지 않았다. 이 엄격한 규정 때문에 결혼 후 자녀 양육 등으로 휴직을 하는 여성 근로자들은 기업 연금 수급권을 상실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반영하여 독일은 연금법 개혁 2001 에서 기업연금 수급권과 관련된 규정을 다음과 같이 변경하였다. 첫째, 근로자가 납부한 기업연금 보험료는 전직 하더라도 그대로 유지하여 연금 또는 일시금으로 돌려받는다. 둘째, 2001년 이후 기업의 비용으 로 조성된 기업연금의 경우 이전 기업에서 확보된 기업연금 수급권 인정을 위한 최소 근무 기간 을 10년에서 5년으로, 그리고 최소 연령을 35세에서 30세로 하향 조정 하였다. 또한 경과 규정으 로 2005년까지 수급권이 확보되는 기업연금에 대해서는 30세 이상이기만 하면 전직하더라도 이전 기업에서의 연금수급권을 그대로 보장하기로 하였다. 또한 잦은 전직으로 여러 회사에서 기업연 금을 수급하는 근로자를 위해 연금수급권을 희망하는 회사로 옮겨 합산하여 받을 수 있도록 하였 다. 독일의 기업연금에는 다음의 5가지 종류가 있다. 이는 직접 보장과 지원 금고로 구성되는 내 부적 실행 방법과 직접 보험, 연금 금고, 연금 기금으로 구성되는 외부적 실행 방법으로 양분된 다. 전통적인 내부적 실행 방법과 외부적 실행 방법의 중요한 차이는 외부적 실행 방법에 더 많은 정부 지원이 제공되는 데 있다. 한편, 독일의 기업연금에서는 보험료를 납입할 때 세제상의 혜택 등 다양한 지원이 제공되지만, 근로자가 기업연금을 수급할 때에는 소득세가 부과된다(이는 우리 나라의 국민연금과 유사함). 4. 기업연금의 종류와 내용 1) 직접 보장 FES-Information-Series <표 1>은 사용자가 자발적으로 근로자에게 약속하고 연금 지급을 책임지는 직접 보장이 독일 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기업연금임을 보여준다(2002년 말 기준으로 650만 명 가입). 직접 보 장은 대부분의 대기업에서 활용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퇴직금제도와 유사하게 사용자가 전적으 로 소요 재원을 조달하며, 적립된 기금이 사내에 유보되어 기업의 운영 자금으로 사용되기도 한 다. 또한 적립금 운용 방법에 제한이 없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의 금융 자산에 투자하기도 한다. 이처럼 적립금 운용에 대한 정부 규제가 없는 것이 직접 보장의 특징이다. 직접 보장의 재원 조 달을 위한 충당금에는 세제 혜택이 주어지며, 근로자가 기업에 대해 연금 지급 청구권을 가진다. 표 1. 독일 기업연금의 운영 규모(2002년 말 기준) 기업연금의 종류 운영 규모 직접 보장 2,096 (59.2%) 지원 금고 248 (7.0%) 직접 보험 450 (12.7%) 연금 금고 745 (21.0%) (단위: 억 유로) 연금 기금 2 (0.1%) 연금법 개혁 2001 에 따라 기업이 보장하는 기업연금 외에 추가로 직접 보장에 가입하기를 희 망하는 근로자는 임금 중의 일부를 기업연금 보험료로 사용할 수 있으며, 이 목적으로 사용되는 임금에는 세제 혜택이 주어진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근로자는 공적연금제도 보험료 납부 상한선의 4%에 해당하는 금액(이는 2003년의 경우 연 2,448유로임)까지 소득세를 면제받고 기업 연금 보험료로 납입할 수 있다. 또한 2008년까지 한시적으로 기업연금 보험료로 사용되는 소득 에 대해서 사회보험료 납부 대상에서도 제외되는 혜택이 주어진다. 한편, 사용자의 부도에 대비 하기 위해 사용자는 연금보장조합에 가입하여야 하며, 사용자가 파산하여 지급 능력이 없을 때 에는 연금보장조합이 대신 지급하게 된다. 2) 지원 금고 지원 금고는 19세기 중반에 시작된 가장 오래된 기업연금으로 직접 보장과 비슷하다. 다만 여 기서는 연금 지급을 위한 적립금이 사내에 유보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일정한 규모의 적립금을 외부의 독립 기관이 운영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운영 기관은 단일 기업 또는 여러 기업에 의해 설립되며, 운영 기금을 회원 기업에 대출해 주기도 한다. 여기서도 근로자가 기업에 대해 연 FES-Information-Series 금 지급 청구권을 가지며, 연금보장조합을 통하여 기업의 파산 위험에 대비하는 것 역시 직접 보 장에서와 동일하다. 직접 보장과 지원 금고로 구성되는 내부적 실행 방법에서 사용자가 부담하는 보험료는 모두 법인세 납부 대상에서 제외된다. 사용자 부담으로 제공되는 기업연금에 추가하여 근로자가 더 많은 기업연금을 받기위해 임금의 일부를 기업연금 보험료로 사용할 때 주어지는 소득세와 사회보험료 면제의 혜택은 직접 보장에서 와 동일하다. 그러나 근로자가 본인 임금의 일부를 직접 보장과 지원 금고에 보험료로 납부하여도 뒤에서 설명하는 리스터 지원금이 제공되지는 않는다. 다만 사용자가 근로자와 합의 하에 직접 보 장과 지원 금고에 있는 기업연금 적립금을 다음에서 설명하는 연금 기금으로 전환하고, 여기에 본 인 임금의 일부를 기업연금 보험료로 납입하여야 리스터 지원금이 제공된다. 3) 직접 보험 직접 보험은 사용자가 피용자를 위하여 민영보험회사와 생명보험이나 연금보험 계약을 체결하 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피보험자수가 많은 보험회사와 계약을 체결하여 위험이 분산되기 때문에 직접 보험은 소규모 기업에 적합하며, 근로자는 보험회사에 대하여 연금 지급 청구권을 갖는다. 직접 보험에서도 사용자가 전적으로 보험료를 지불하였지만 연금법 개혁 2001 에 따라 근로자가 더 많은 기업연금을 수급하기 위하여 본인 소득의 일부를 기업연금 보험료로 납부하면, 이 보험료 에 대해 정부 지원이 제공된다. 4) 연금 금고 독립 법인인 외부 기관(예: 주식회사 형태)이 운영하는 연금 금고는 보험과 동일한 원리로 작동 하며, 원칙적으로 사용자가 전적으로 보험료를 부담한다. 보험 사고가 발생하면 납부한 보험료와 이의 운용 수익으로 연금을 지급한다. 연금 금고에서는 운용 자산에 대하여 일정한 수준의 수익 률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운용 자금의 35%까지만 주식에 투자할 수 있도 록 제한하고 있다. 여기서도 근로자가 연금 금고에 대하여 연금 지급 청구권을 갖는다. 5) 연금 기금 연금 기금은 연금법 개혁 2001 로 새로이 도입된 기업연금이다. 연금 기금에서는 외부의 독립 FES-Information-Series 내부적 실행 방법 (내부 적립, 리스 기 터 지원금 없음) 업 연 금 외부적 실행 방법 (외부 적립, 리스 터 지원금 제공) 표 2. 기업연금 제도의 요약 직접 보장 지원 금고 직접 보험 연금 금고 연금 기금 가장 많이 활용되며, 적립금 사내 유보, 기업에 대해 청구권 을 가짐, 우리나라의 퇴직금 제도와 유사 가장 오래된 제도, 직접 보장과 유사, 적립금의 사내 유보뿐 만 아니라 외부 운용 가능 민영보험회사와 계약 체결, 소규모 기업에 적합, 보험회사에 대해 청구권 가짐 외부 기관이 운영, 주식투자 제한, 연금 금고에 대해 청구권 가짐 새로 도입된 제도, 외부 독립 기관이 적립금 운용, 연금 형태 로만 지급, 연금 기금에 대한 청구권 가짐 기관인 연금 기금 운영 기관이 적립된 기금을 독자적으로 자본시장에서 운용하여 얻은 수익과 원금으로 보험 사고가 발생한 피보험자에게 사망할 때까지 연금 형태로 지급한다. 연금 기금은 주식 투자에 대한 제한이 없기 때문에 자본시장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여 기서도 원칙적으로 사용자가 전적으로 보험료를 부담하지만, 더 많은 기업연금을 수급하기 위해 근로자가 희망하면 소득의 일부를 보험료로 납부할 수 있다. 연금 기금에 보험료를 납부하는 근 로자에게 제공되는 정부 지원 내용은 연금 금고에서와 동일하며, 근로자가 연금 기금에 대하여 연금 지급 청구권을 갖는다. 한편 자본시장에서의 높은 투자 위험에 따른 파산을 예방하기 위해 연금 기금 운영 기관은 연방보험감독청의 감독을 받을 뿐만 아니라 연금보장조합에 가입하여야 한다. 5. 기업연금에 대한 정부 지원의 내용 1) 개요 5가지의 기업연금 중에서 리스터 지원금이 근로자에게 제공되는 기업연금은 직접 보험, 연금 금고, 연금 기금으로 구성되는 외부적 실행 방법뿐이다. 또한 일시금으로 지급되는 기업연금에 도 정부 지원이 없으며, 오직 연금 형태로 지급되는 기업연금에만 근로자에게 정부 지원이 제공 된다. 이를 통하여 독일은 사내 유보가 아닌 외부 기관이 운영하는 외부적 실행 방법의 기업연 금이 활성화되어 기업 파산으로 기업연금을 지급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예방하며, 동 시에 기업연금이 연금 형태로 지급되어 안정적인 노후 보장이 제공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2) 정부 보조금 및 특별 소득공제(리스터 지원금) FES-Information-Series 직접 보험, 연금 금고 및 연금 기금에 임금의 일부를 보험료로 납부하는 근로자는 2002년부터 리스터 지원금이라 불리는 정부 보조금이나 특별 소득공제 혜택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자 격 요건을 충족시키는 근로자가 신청할 때 지원되는 정부 보조금은 본인의 연금보험 통장으로 지 급되기 때문에 근로자는 본래의 보험료에서 이 지원금을 차감한 액만 납입하면 된다. 근로자가 사회보험료 납부 대상의 본인 소득 중에서 2002년부터 소득의 1%를, 2004년부터 2%를, 2006년부 터 3%를, 그리고 2008년부터 4%를 기업연금 보험료로 납부하면 최대의 정부 보조금을 지급 받는 다. 보험료가 이 기준에 미달하면 리스터 지원금은 미달된 금액에 비례하여 감소하는데, 이 규정 은 정부 보조금과 특별 소득공제에 적용한다. 정부 보조금 액수는 혼인 관계, 자녀수 및 본인 소득에서 차지하는 납입 보험료의 비중에 따라 차등적으로 결정된다. 예를 들면 2008년 연소득이 30,000유로이면서 두 명의 자녀가 있는 근로자 가 소득의 4%에 해당하는 1,200유로를 기업연금 보험료로 납부하면 정부가 지원하는 최대 정부 보조금인 678유로를 지급 받는다(표 3 참조). 이는 기혼자에게 주어지는 보조금 308유로와 두 명 의 자녀에게 주어지는 자녀 보조금 370유로를 합산한 금액이다. 따라서 이 근로자가 기업연금을 위하여 실제로 부담하는 보험료는 522유로이다. 이처럼 소득 수준에 관계 없이 혼인 관계와 자녀 기간 2002-2003년 2004-2005년 2006-2007년 2008년 이후 표 3. 기업연금에 대한 정부 보조금의 확대 추이(1년 기준) (단위: 유로) 미혼 기혼 자녀 보조금(1인당) 38 76 46 75 152 92 114 228 138 154 308 185 표 4. 기간별 특별 소득공제 상한액(1년 기준) 기간 2002-2003년 2004-2005년 2006-2007년 2008년 이후 특별 소득공제 상한액 525 1,050 1,575 2,100 (단위: 유로) FES-Information-Series 수에 따라 동일한 금액의 정부 보조금이 제공되어 저소득층일수록 본인이 부담하는 보험료가 적 어진다. 이러한 정부 보조금 대신 근로자는 특별 소득공제 혜택을 받을 수도 있다. 연금보험료 납부 상 한선 이내의 본인 소득 중에서 2002년부터 소득의 1%를, 2004년부터 2%를, 2006년부터 3%를, 그 리고 2008년부터 4%를 기업연금 보험료로 납부한 근로자는 본인의 소득 수준에 관계 없이 일정한 금액을 소득세에서 공제 받을 수 있다(표 4 참조). 따라서 높은 세율이 적용되는 고소득 근로자일 수록, 그리고 자녀가 없는 근로자일수록 특별 소득공제를 선택하는 것이 유리하다. 정부 보조금 또 는 특별 소득공제 중에서 본인에게 유리한 것을 선택할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소득이 높지 않으면 서 가족 수가 많은 근로자의 경우 정부 보조금을 선택하는 것이 유리하다. 독일의 실제 실업자수에 관한 논쟁과 실업 대책 선 한 승,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05년 4월 󰠲󰠲󰠲󰠲󰠲󰠲󰠲󰠲󰠲󰠲󰠲󰠲󰠲󰠲󰠲󰠲󰠲󰠲󰠲󰠲󰠲󰠲󰠲󰠲󰠲󰠲󰠲󰠲󰠲󰠲󰠲󰠲󰠲󰠲󰠲󰠲󰠲󰠲󰠲󰠲󰠲󰠲󰠲󰠲󰠲󰠲󰠲󰠲󰠲󰠲󰠲󰠲󰠲󰠲󰠲󰠲󰠲󰠲󰠲󰠲󰠲󰠲󰠲󰠲󰠲󰠲󰠲󰠲󰠲󰠲󰠲󰠲󰠲󰠲󰠲󰠲󰠲󰠲󰠲󰠲󰠲󰠲󰠲󰠲󰠲󰠲󰠲󰠲󰠲󰠲󰠲󰠲󰠲󰠲󰠲 올해 초 독일의 실업자수가 500만 명을 넘어서자 이에 대한 논쟁이 뜨겁게 일어나고 있다. 이 에 대해 실업자수의 급증은 단기적인 요인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의견과 500만 명의 실업자수는 축 소 발표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단기적인 현상으로 보는 쪽은 지난 겨울의 강추위로 인한 계절 적 요인과 사회보장제도 개혁에 따른 실업 통계 기법의 변화로 기인되었다고 보는 반면, 후자의 축소론에 따르면, 직업 훈련자, 실망 실업자 등으로 반실업 상태에 있는 자를 포함하면 6~7백만 명이 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본고는 이러한 5백만 명 실업자 시대를 맞이하여 시작된 실업자수의 논쟁을 분석하고, 슈뢰더 정부가 단행하고 있는 노동시장 개혁안의 구체적 내용을 살펴본다. 슈뢰더 정부가 역점을 두고 있 는 실업 대책의 핵심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공공 고용안정기관의 개혁을 통해 실업 대책 프로그램을 효율적으로 추진한다. 둘째, 장기 실업자에게 지급하는 사회보장비를 축소하여 적극적 으로 일자리를 찾도록 유도한다. 마지막으로, 노동시장 유연화를 위해 파견 노동제를 활성화하는 대책이다. 슈뢰더 정부가 강구하고 있는 경제 회복에 대한 여러 조치가 성과를 나타내고 최근의 고유가 추 세가 꺾이는 하반기에 가서는 세계 경제의 호전으로 독일 실업률도 낮아질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 이 우세하다. 󰠲󰠲󰠲󰠲󰠲󰠲󰠲󰠲󰠲󰠲󰠲󰠲󰠲󰠲󰠲󰠲󰠲󰠲󰠲󰠲󰠲󰠲󰠲󰠲󰠲󰠲󰠲󰠲󰠲󰠲󰠲󰠲󰠲󰠲󰠲󰠲󰠲󰠲󰠲󰠲󰠲󰠲󰠲󰠲󰠲󰠲󰠲󰠲󰠲󰠲󰠲󰠲󰠲󰠲󰠲󰠲󰠲󰠲󰠲󰠲󰠲󰠲󰠲󰠲󰠲󰠲󰠲󰠲󰠲󰠲󰠲󰠲󰠲󰠲󰠲󰠲󰠲󰠲󰠲󰠲󰠲󰠲󰠲󰠲󰠲󰠲󰠲󰠲󰠲󰠲󰠲󰠲󰠲󰠲󰠲 1. 실업 실태와 국제 비교 FES-Information-Series 지난 2월2일 연방고용공단의 실업 동향 발표에서 계절적 요인을 고려한 실업자수가 5백3 만7천 명을 기록하자 논쟁이 분분하다. 1930년 대공황 이후 역사적으로 처음 실업자수가 5백 만 명을 넘어 섰다. 표 1. EU 국가의 경제성장률과 실업률 추이 GDP 성장률 실업률 2000 2001 2002 2003 2004 2000 2001 2002 2003 2004 구 EU 15개국 독일 2.9 0.8 0.2-0.1 1.5 7.8 7.8 8.6 9.3 9.1 프랑스 3.8 2.1 1.2 0.2 1.7 9.3 8.5 8.8 9.4 9.6 영국 3.8 2.1 1.6 2.2 3.0 5.4 5.0 5.1 5.0 5.0 아일랜드 10.1 6.2 6.9 1.2 3.7 4.3 3.9 4.3 4.6 5.0 이탈리아 3.0 1.8 0.4 0.3 1.2 10.4 9.4 9.0 8.7 8.6 네덜란드 3.5 1.2 0.2-0.8 1.0 2.9 2.5 2.7 3.8 5.3 스웨덴 4.3 0.9 2.1 1.6 2.3 5.6 4.9 4.9 5.6 6.1 스페인 4.2 2.8 2.0 2.4 2.8 11.3 10.6 11.3 11.3 10.9 구EU 15개국 3.6 1.7 1.1 0.8 2.0 7.8 7.4 7.7 8.0 8.1 자료: WSI Mitteilungen 7/2004 이를 두고 여야, 학계 그리고 노사단체 사이에 논쟁이 격렬하게 일어나고 있다. 야당인 기민당(CDU)은 슈뢰더 정부의 경제 정책의 실패로 인해 오늘의 대량 실업 사태를 맞이했 다고 주장하고 공급자 위주의 경제 정책을 주창하였다. 슈토이버(Edmund Stoiber) 기사련 (CSU) 총재는 실업자수 신기록을 세운 슈뢰더 정부의 경제 정책이 문제에 직면했다고 비난 했다. 노동계는 노동자의 사회보장 제도 확충을 위한 수요 정책을 밀고 나가야 하는데 정 부는 보수주의적 경제 정책을 쓰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독일 노동시 장의 경직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지적이 많다. FES-Information-Series 슈뢰더 정부는 실업 대책을 위해 소위 하르츠(Hartz) 개혁안을 단행했다. 노동시장 개혁을 위해 노사정 및 학계 대표들이 참여하는 위원회가 만들어졌는데 폭스바겐 자동차 노무담당이사 인 페터 하르츠(Peter Hartz)의 이름을 따서 하르츠 위원회가 2002년 8월 출범했다. 이후 하르 츠 위원회는 강도 높은 노동시장 개혁안을 만들었다. 독일의 실업률은 2004년까지만 해도 EU 국가 중에서 여건이 비슷한 프랑스보다도 오히려 낮았다.<표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독일은 2004년도에 구 EU 15개국의 평균 실업률 8.1%보 다도 높은 9.1%를 기록했다. 이는 프랑스의 9.6%보다 낮고 이탈리아와는 큰 차이가 없다. 그 러던 독일 실업자수가 2004년 말부터 가파르게 상승하여 실업자수 500만 명대이고 실업률도 12%대로 두 자리를 기록한 이유로 독일 경제의 경기침체라는 구조적인 요인 이외에 다른 단 기적인 요인이 가세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독일의 실업률이 영국, 아일랜드, 네덜란 드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데에는 낮은 경제성장률에 기인한 것으로서 2004년 독일의 GDP 성장률은 1.5%로서 구EU 국가의 평균 2.0%에 못 미쳤다. 2. 실업 증가의 원인 분석과 논쟁 지난 3월1일에 발표된 2월 실업 동향을 보면, 신규로 177천 명의 실업자가 증가하여 총 실 업자수가 521만6천 명에 달했다. 이를 실업률로 환산하면 12.6%로서 2월 한 달 동안 0.5%가 증가하였다. 이러한 실업자수를 동독 지역과 구분하여 보면, 서독 지역이 15만4천 명이 증가 하여 342만1천 명이고, 동독 지역은 2만3천 명이 증가한 179만5천 명으로 각각 나타났다. 우선 독일의 노동시장 개혁안을 보면, 이들 개혁 조치가 실업자수의 증가를 초래했다는 분 석이 가능하다. 독일은 노동시장 개혁안을 통해서 실업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책을 펴고 있 다. 이러한 정책의 핵심에는 하르츠 개혁안이 자리 잡고 있다. 하르츠 개혁안은 사회보장 제 도 개혁을 통해서 실업자의 구직 활동을 강화하고 조기에 실업 상태에서 탈출하도록 하는데 있다. 슈뢰더 정부는 종전의 사회부조와 실업부조를 통합하고 실업자가 사회보장 혜택을 받 기 위해서는 실업자로 등록해야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사민당 정부는 이에 따라 단기적으로 는 실업자수가 증가하는 문제를 감수하고서라도 이들 장기 실업자를 적극적 구직 노동자로 끌어들이려는 대책을 사용했다. 즉, 이러한 개혁안이 시행되기 이전에는 사회부조 혜택을 받 는 사람 중에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실업자로 계산되지 않고 비경제활동인구(Stille FES-Information-Series Reserve)로 간주되어 실업자 통계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실업부조와 사회부조를 통합하여 “실업수당 II”로 개념화하고 이들 수혜자는 모두 실업자로 등록을 유도하게 된다. 연방고용연구소(IAB)는 이들 숫자가 2005년에는 줄잡아 30만 명으로 추산하고 이 만큼은 실 업자가 증가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또한, 지난 1월 실업자수가 급증했던 이유로서 계절적인 요인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지난 겨울 유난히도 많은 눈과 살인적 추위가 독일을 엄습하여 겨울 휴 무(Winterpause)가 장기간 계속되었다는 점도 간과 할 수 없다. 이는 주로 건설 현장 직종에 서 나타나는 현상인데 날씨 때문에 일을 할 수 없는 날짜가 늘어나서 자연히 일자리가 감소 하게 된다. 따라서 계절적인 요인이 가세하게 되면 그 만큼 실업자수는 증가하게 된다. 이러 한 계절적 요인으로 인해 실업자수가 지난 1월 중 1만6천 명 증가했다고 연방고용공단은 추 산하였다. 따라서 1월 중 실업자수는 17만7천 명 증가했으며, 이 중 계절적인 요인을 배제한 이른바 계절 조정 실업자수는 16만1천 명이다. 한편, 1월 중에 증가된 실업자를 내용별로 보면, 과거에 취업한 적이 있었던 전직 실업자 가 8천 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신규 실업자가 16만9천 명으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학교 졸업철에 맞추어 졸업자가 대거 구직 활동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독일의 실업자수가 단기적으로 급증하게 된 이유로 새로운 사회법 조항(Sozialgesetzbuch II, SGB II)으로 인한 통계 조사 방식의 변화를 들고 있다. 연방고용공단은 종전의 실업 통계 는 연방고용청 통계만으로 추계되었으나 이제는 각 주정부와 합동으로 조사하게 되어 통계의 정확성이 높아졌으며, 지역 단위에서 과거에는 제외되었던 실업자수가 이제는 모두 포함될 수밖에 없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업 통계의 정확성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국제노동기구(ILO)와 독 일사회법전 기준(SGB) 중 어느 것으로 산출하는가에 따라 차이가 난다. 즉, 지난 1월 중에 기록된 실업률은 ILO 기준으로는 9.4%에 실업자수 3백9십8만8천 명으로, SGB 기준 실업률 12.1%인 5백3만7천 명 보다도 월등히 낮다. 그렇지만 연방고용공단이 발표한 실업 통계에 대해, 학계와 야당은 실질 실업자수는 훨씬 많 FES-Information-Series 을 것이라고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독일 자민당(FDP)의 노동시장 전문가인 딕 니벨(Dirk Niebel)은 정부가 발표한 실업자 5백만 명은 허수이고 실제로는 실업상태에 있는 직업 훈련 자, 구조조정 프로그램 참가자, 전직 훈련자 등을 포함하면 6백만 명에서 7백만 명은 될 것이 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학계의 주장도 이어졌다. 예컨대, 뉘른베르그 대 학의 헤르만 쉐를(Hermann Scherl) 교수는 실업 통계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쉐를 교수는 90만 명이 적극적 노동시장 조치에 참여하고 있고, 장기 휴직 상태에 있으나 다 시 일하기를 원하고 있는 여성 노동자와 노동청에 구직 신청을 하지 않는 노동자 등이 180만 명이나 된다. 여기에다 고용공단에서 제공하는 일자리 알선 기회를 기피하고 있는 58세 이상 중고령 노동자가 40만 명이 되는데 이들 모두가 실업 통계에서 빠져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언론도 동조했는데 디 벨트(Die Welt)지 는 지난 2월3일자 기사에서 실제 독일의 실업자수가 6백만 명을 넘어섰다고 주장하면서 일할 의사가 있으나 노동청에 구 직 신청을 하지 않는 노동자가 2백만 명이라고 보도했다. 3. 실업 대책 슈뢰더 수상은 재집권에 성공하자 최우선적으로 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사회 제도 의 개혁에 주력했다. 기존의 노동사회부를 경제부와 통합하여 경제노동부로 정부 조직을 개 편하고 경제와 노동을 결합하여 실업 문제를 강력 대처하도록 시도했다. 또한 연방노동청 (Bundesanstalt f ü r Arbeit)을 연방고용공단(Bundesagentur f ü r Arbeit)으로 개편하여 공공 고 용안정기관의 혁신을 단행했다. 이와 함께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실시하여 실업자가 적극적으로 구직에 나서도록 유도하 는 개혁안을 내놓았다. 즉, 구직자는 가급적 빠른 시기에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일자리 를 빨리 구하도록 강제성을 부여하는 적극화 노동시장 정책으로 패러다임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으로 만들어진 하르츠법(Hartz I, II, III, IV)이 시차를 두고 발효되었다. 2005년 1월부터 발효된 하르츠 IV는 독일 노동시장 개혁의 핵심이다. 본 개혁안의 원칙은 독일의 만성적인 재정 적자를 줄이고 실업자가 조기에 실업 상태를 탈출하도록 유도하는 데 있다. 실업수당 지급 기간을 종전의 실업보험 가입 기간과 연령에 따라 최장 32개월까지 가 FES-Information-Series 능하던 것을 55세 미만 실업자 12개월, 55세 이상 실업자 18개월로 단축하였다(실업수당 I). 여기에다 노동 능력이 있는 장기 실업자의 경우 실업부조와 사회부조를 통합하여 실업수당 II 로 통칭하고, 그 지급 수준은 종전의 사회부조 수준으로 하향 조정 하였다. 예컨대, 실업자가 실업수당 II 를 받을 경우, 한 명에게는 345유로(동독 지역 331유로)를 지급하지만 가족 중에 한 명의 실업자가 추가되면 각각 311유로(동독 지역 298유로)로 감소하게 된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실업자가 추가되면 더욱 감소되어 276유로(동독 지역 265유로)로 줄어든다. 이는 최 소한의 생활수준 유지를 위해 보조함으로써 적극적인 구직 활동을 전개하라는 압력을 행사한 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 능력이 없는 실업자에게는 기존의 사회부조에 해당하는 사회부조 수당만 지급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는 당초에 실업수당 II 를 받기위해 실업자 등 록을 촉진하게 될 것이라는 예상과는 반대로 실업자 등록을 하지 않고 사회부조 수당만을 받는 것이 유리하다는 방향으로 나타나 실업자수가 축소되었다는 반론도 제기되었다. 그리 고 월 보수 400유로 미만의 이른바 미니-직업(Mini-Job)의 경우, 노동자의 사회 보험료를 면 제해주고 사용자에게는 사회 보험료를 포함한 임금의 25%만을 부담토록 하여 저임금 일자리 촉진 정책을 시행하는 등 공급자를 위한 획기적인 실업 대책도 내놓았다. 여기에 공공 고용안정기관의 개혁도 단행했다. 종전의 직업 알선 업무를 강화하고, 구직자 의 상담과 보호 업무를 추가하는 구직 센터(Job Center)를 설치하여 공공 고용안정 업무를 혁신하도록 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독일 의료보험 개혁(2003)의 동향과 쟁점 이 준 영, 서울시립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2004년 6월 󰠲󰠲󰠲󰠲󰠲󰠲󰠲󰠲󰠲󰠲󰠲󰠲󰠲󰠲󰠲󰠲󰠲󰠲󰠲󰠲󰠲󰠲󰠲󰠲󰠲󰠲󰠲󰠲󰠲󰠲󰠲󰠲󰠲󰠲󰠲󰠲󰠲󰠲󰠲󰠲󰠲󰠲󰠲󰠲󰠲󰠲󰠲󰠲󰠲󰠲󰠲󰠲󰠲󰠲󰠲󰠲󰠲󰠲󰠲󰠲󰠲󰠲󰠲󰠲󰠲󰠲󰠲󰠲󰠲󰠲󰠲󰠲󰠲󰠲󰠲󰠲󰠲󰠲󰠲󰠲󰠲󰠲󰠲󰠲󰠲󰠲 독일은 최근 사민당(SPD)이 기민당(CDU), 기사당(CSU)과 연합하여 다섯 번째 의료보험 개혁을 단행하였다. 최근의 의료보험 개혁은 보험료 상승으로 인한 인건비 부담이 국가 경쟁력과 고용에 미치는 영 향을 줄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환자들의 본인 부담 증가와 의료 공급자들에 대한 대책을 통해 의료비 절감을 추진하는 한편, 보험료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 재원조달 방식을 일부 수정하여 근로자와 국가의 재정적 책임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지금까지의 개혁들에서는 의료 수요 억제를 위한 대책이 중심이었지만, 2003년의 의료보험 개 혁은 비용 억제 대책뿐만 아니라 새로운 재정 방식을 도입하여 재정 안정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 이 특색이다. 본고에서는 2004년부터 시행되는 의료보험 개혁의 목표와 주요 내용을 살펴보고, 이것이 기대 한 절감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인지를 검토하였다. 독일 연방정부는 의료보험 개혁을 통해 약 130억 유로의 의료비 절감 효과를 기대하고 있으나, 환자들은 물론, 의료 공급자들까지도 개혁 방 안에 불만을 표시하였다. 따라서 의료보험 개혁이 기대한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의료보험 가입 자들과 의료 공급자들의 협조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 1. 독일 의료보험 개혁(2003)의 개혁 FES-Information-Series 1.1 개요 최근 독일은 전반적 사회 개혁 프로그램인 Agenda 2010 의 주요 분야로 제시된 의료보험의 개 혁을 위해 의료보험현대화법을 마련하였다. 지금까지 독일의 의료보험 개혁은<표 1>에서와 같이 크게 다섯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러한 독일 의료보험 개혁들의 배후에는 이른바 의료비의 폭발적 상승이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하 였다.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독일의 의료비 상승 역시 주로 의료 기술의 진보와 인구 노령화로 인해 초래되었다. 의료비의 과도한 상승은 의료보험의 재정 적자로 연결되었는데 2002년을 기준으로 의료보험의 총 수입은 1,402억 유로인데 비해, 총지출은 1,436억 유로로 34억 유로의 적자를 기록하였다. 그리하여 의료보험의 보험요율도 지속적으로 상승하여 1907년 8.2%에서 10.5%(1975년), 13.5%(1995년) 그리 고 2002년에는 14%에 이르렀다. 이 같은 상승 추세는 심각한 우려를 낳고 있는데, 보험요율이 2040 년에는 20%에 달할 것이며 최악의 경우에는 30%를 넘어설 가능성도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을 정도 이다. 현실적으로는 큰 폭의 재정 적자에도 불구하고 보험료를 무한정으로 인상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 면 독일의 의료비 지출은 GDP의 10.8%로 영국(6.7%), 오스트리아(8.2%) 그리고 네덜란드(8.6%) 등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높은 편이기 때문이다. 보험료의 인상은 인건비를 상승시켜 실업의 증가를 초래한다는 견해가 있는데, 독일 정부는 사회보험요율을 1% 인상하게 되면 첫 해에 2만 개의 일자 리가, 2년 후에는 10만 개에 달하는 일자리가 없어지는 것으로 추산하였다. 그런데 보험료 인상이 용이하지 않다고 해서 의료보험의 급여를 축소하여 환자들에게만 부담을 전가시킬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는 독일 의료보험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로 지켜져 온 사 회 연대의 원칙에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료보험의 재정을 근로자와 사용자만 부담하는 보험료를 위주로 하는 방식이 과 연 적절한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었다. 사용자의 보험료는 일정액으로 제한하고 근로자 제1단계(1989) 제2단계(1992) 제3단계(1997) 제4단계(2000) 제5단계(2003) FES-Information-Series <표 1> 독일 의료보험 개혁 의료개혁법 의료구조법 신질서법 의료보험 개혁법 의료보험현대화법 의료비 상승 억제 대책 의료비 상승 억제 대책 질병금고간의 경쟁 도입 의료전달체계의 강화 병원진료비 지불 개편(DRG) 의료보험 재정 개혁 의 보험료만 소득에 비례하도록 하자는 의견과 보험료를 가입자당 일정액으로 하자는 등의 다양한 의 견들도 제시되었다. 그 결과, 최근의 개혁에서는 의료보험 급여 중 일부에 대해 조세를 재원으로 하는 방안이 도입되었다. 결국, 과거의 의료보험 개혁들이 의료비의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주로 의료의 공급과 이용에 대 한 통제를 위주로 하였던 것에 비해, 최근의 다섯 번째 개혁에서는 의료 이용 및 의료비 상승 억제 대책 외에도 의료보험의 전통적 재정 방식의 수정을 시도한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1.2. 의료보험 재정 방식에 관한 논쟁 1) 의료분야협력전문위원회의 재정 방식 개혁안 의료보험의 재정 방식과 관련하여 이미 1997년에 독일의 의료분야의 협력을 위한 전문위원회 (SVRKAiG: 이하 전문위원회) 는 특별 보고서를 통해 의료보험에서의 사회적 연대 실현을 위한 비용 들을 분담하기 위한 새로운 방안을 제시하였다. 전문위원회는 질병으로 인한 손실은 병에 걸린 사람과 걸리지 않은 사람 간에 분담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공적 의료보험뿐만 아니라 민간 의료보험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기능을 하며 향후에도 이 원리는 계속 적용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보험료 부담은 공적 의료보험에서 질병률과 무관하게 결정되는데, 전문위원회는 보험료 산정에 질병률을 반영하는 이른바 수지상응의 원칙으로 전환하도록 권고했다. FES-Information-Series 분야 질병으로 인한 손실 보험료 부담 노령화 위험의 분산 소득의 재분배 가족 부양 부담 <표 2> 사회적 연대 비용 분담 방식의 개선 현재의 규정 개선안 의료보험 내에서 분산 질병률과 무관 (사회적 연대의 원칙) 부과방식 능력에 따른 보험료 부담 현행대로 유지 질병률을 고려 (수지상응의 원칙) ․ 인구변화를 고려한 사회기금 ․ 개인 저축과 적립방식 ․ 위험에 따른 보험료 부담 피부양자의 보험료 납입 면제 ․ 인두제 보험료 ※ 자료: SVRKAiG. 1997. p. 340에서 재정리 노령화로 인한 위험은 연령에 상관없이 보험료가 결정되는 이른바 세대 간 계약을 통해 그 비 용이 분담된다. 세대 간 계약은 부과 방식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것이 효과적으로 운영되기 위해서 는 생산 인구와 부양을 받는 노령 인구의 비율이 안정적으로 유지된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 러나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되는 것이 다. 전문위원회는 그러한 인구구조 변화에 따른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 인구 변동을 고려한 사회 기금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즉, 인구 변동에 따른 위험을 별도로 분리하여 특별한 재원을 마련하여 운용하자는 것이다. 한편, 그 기금의 재정 운용 방식은 적립 방식으로 하고, 그 기금의 재원 조달을 위해 추가적인 보험료 또는 조세를 징수해야 하지만 국민들의 거부감 때문에 실현하기 어렵고, 그 기금의 여유 자금이 다른 사회보험의 재원으로 활용되는 문제점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보았 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개별적인 저축으로 적립하는 방식을 제안하였 다. 이 방식은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논의되었던 의료 저축 계정과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소득의 재분배는 보험료 산정 기준 등을 통해 이루어지며 보험료 납입의 면제, 실업자, 사회부 조 수급권자, 연금자, 학생, 인턴사원 그리고 예술가 등 특수한 계층을 위한 특별 규정이 있다. 전문위원회는 그러한 계층에 대해 위험에 따른 보험료를 부과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보험자 들이 이들의 가입을 꺼려할 것인데, 그와 같은 시도가 차별 금지와 같은 규제를 통해 과연 효과 적으로 억제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했다. 아울러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이른바"모든 사람들 에게 의료보험을"이라는 원칙하에 위험에 따라 보험료를 부과하고, 특수한 계층으로 인해 보험료 수입이 적어지는 경우 국가의 보조를 통해 이를 보완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FES-Information-Series <표 3> 의료보험 장기 재정의 모형(Y-모델) 근로자 사회보험 방식 (노 ․ 사 공동 부담) 카알 라우터바흐(Karl Lauterbach) 의료보험료 방식 (근로자 부담) 베르트 뤼럽(Bert R ü rup) ․ 경제적 능력에 따른 부담 원칙 ․ 임금 수준 비례 보험료 ․ 사회적 형평은 의료보험 내에서 수행 ․ 보험 가입 의무 경계 소득 수준 인상 ․ 보험 가입자 및 부과 할 재원의 확대 ․ 위험에 따라 부담하는 수지상응 원칙 ․ 임금과 무관한 보험료 부과 ․ 사회적 형평은 조세제도나 소득이전제도로 ․ 민간보험의 활용 ․ 민간보험 간, 공공과 민간 간의 경쟁 강화 자료: Weller, M.& Haas, A.-K., Gesundheit und Gesellschaft. 2003. 6. p. 24 출산율 저하와 여성의 직업 활동 증가로 피부양 가족의 수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어서 가족 부양으로 인한 재정 부담은 점차 감소할 것이다. 가족 부양의 문제는 보험료 납입면제 제도에 의 해 비용이 분담된다. 의료보험에서 피부양 가족에 대한 배려는 조세나 사회보장 급여를 통한 사회 전체의 소득재분배 제도와 중복된다고 보는 견해가 있었기에, 뤼럽위원회는 재정 적자 해소를 위 해 피부양자 제도를 폐지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 제도는 독일 의료보험의 핵심적 제도라는 주장이 더 많아 그대로 유지하기로 하였다. 전문위원회는 가족 부양의 지원으로 인한 의료보험의 부담을 감소시키려면 가족 부양의 비용을 근로자와 사용자만 부담하는 의료보험에서 분리하여 조 세를 통한 소득재분배 제도로 전환시키는 것이 효율적이며, 보험료도 개인별로 각각 일정액을 납 부하는 인두제로 전환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았다. 2) 뤼럽위원회의 논의 의료보험 개혁과 관련하여 기업들의 경쟁력을 높이고 고용을 늘리기 위한 노력으로 기업들의 임 금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방안들이 논의되었다. 뤼럽위원회에서 라우터바흐 교수는 현재와 같은 근로자 사회보험을 유지, 강화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으며, 뤼럽 교수는 민간 의료보험과 같이 위험 에 따른 보험료를 중심으로 의료보험의 재원을 조달하고 사회적 형평의 달성을 위한 지출은 조세를 통해 조달하자고 제안하였다. 울라 슈미트(SPD) 연방보건부 장관은 이러한 의견들을 반영하여 2단계로 구성된 의료보험 개혁안 (2003)을 마련하였다. 개혁안의 제1단계에서는 라우터바흐 교수의 의견이 주로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상병 수당을 가입자 단독 부담으로 전환하고, 경제 전반에 걸쳐 혜택이 돌아가는 급여는 조세 로 부담하며, 본인 부담 및 개원의 수수료를 높이고 그리고 연금에 대한 보험료 부과 등 단기적 절감 조치들이 포함되었고, 제2단계는 장기적인 대책인데 뤼럽 교수의 제안을 반영하여 보험료의 재원 자 체를 변경하려는 계획이 포함되었다. FES-Information-Series 2. 의료보험 현대화법의 주요 내용 2.1. 의료 서비스의 개혁 의료보험현대화법(2003)은 높은 의료 서비스를 유지하되 의료보험의 가입자도 질병의 비용을 적 절한 보험료 수준에서 부담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타당하다는 전제하에 평균 보험요율을 13% 이하 로 낮추는 것을 목표하였다. 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새로운 개혁 방안이 마련된 것이며, 독일 연방정부는 이 개혁을 통해 약 150억 유로가 절감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의료서비스 분야에서 의료보험현대화법이 추구하는 개혁의 목표는 크게 가입자의 참여 확대, 의 료서비스의 질 향상 그리고 효율성 제고라는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가입자의 참여 확대 최근 의료보험 개혁의 주요 내용 중 하나는 의료보험에서 투명성을 제고하여 가입자들의 참여를 확대하는 것이다. 진료의 투명성을 확보하고 가입자들에게 진료비용에 대한 인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의사들이 의무 적으로 환자에게 진료 영수증을 발급하도록 하였다. 2006년부터는 전자식으로 제작된 보건증을 도입하여 중복 검사를 방지하고 응급 의료 시 필요한 정보를 신속하게 제공하도록 하였다. 질병 예방을 위한 노력이 확인되는 경우 치과 진료 등에서 본인 부담금을 면제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보상함으로써 질병 치료에 따른 비용을 억제하려 하고 있다. 의료보험 관련 정책 결정에 가입자들의 의견이 좀 더 적극적으로 반영되도록 하기 위해 2004년부 터 모든 위원회에 가입자의 대표자들이 참여하는 것을 의무화하였다. 연방 차원에서 환자들의 고충 처리를 담당하는 기관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2) 의료 서비스의 질 향상 FES-Information-Series 세계보건기구(WHO)의 2000년 보고서(World Health Report)에 따르면, 독일의 의료 서비스 수준 은 세계 22위에 머물고 있다. 따라서 독일에서는 의료 서비스의 질을 제고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 다. ① 주치의 제도 의무화 전문의들의 중복 검사 등을 방지하기 위해 의료보험개혁법(2000)에서부터 강조되어왔던 주치의 제도를 의무화하였다. ② 병원의 외래 진료 허용 당뇨병, 심장병, 유방암 등의 만성질환에 대해서는 질병관리프로그램(DMP)의 일환으로 실시하 도록 하였다. ③ 합동 진료 센터 의료보험현대화법(2003)에서는 의사와 기타 치료 관련 전문가가 합동으로 개원한 형태를 허용하 였다. 젊은 의사는 고용 형태로 근무할 수 있어 개원에 따른 위험 부담을 감소시킬 수 있으며, 의약 품에 대한 효율적 관리가 가능하고 중복 검사를 방지하는 효과가 기대되고 있다. ④ 개별 진료 계약 허용 기존에는 지역 단위로 질병금고연합회와 보험의사협회가 진료 계약을 체결하였으나, 향후에는 개 별 의사들이 질병금고(의료보험조합)와 별도의 개별 진료 계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⑤ 의사들에 대한 정기적인 교육과 자질 검증 의료 서비스의 질을 향상하기 위해 의사들에 대해 정기적인 교육과 검증 제도를 도입하기로 하였 다. 특히, 향상교육이나 세미나에 참석하지 않는 의사들은 진료비를 삭감하거나 보험의사 자격이 박 탈될 수 있도록 하였다. ⑥ 의료의 질과 경제성 전담 기구의 설치 의료의 질과 경제성 제고를 위해 이른바 독일의료질센터(DZQM)를 설립하여(의료)급여의 효과 와 질에 대하여 평가하고, 의료보험 급여 항목을 새로운 의학 지식과 의료 기술의 발전에 부응하도 록 변경하며, 의약품의 비용 편익 분석 등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3) 효율성 제고 FES-Information-Series ① 의약품에 대한 새로운 참조 가격제 시행 특허 의약품 중 명확한 치료 효과가 있는 약품들에 대해서는 참조 가격제가 적용되지 않으나, 특허 의약품이라도 치료 효과가 미미한 경우는 참조 가격제를 적용하도록 하고 있다. 참조 가격제의 약제 비 절감 효과는 경험적으로 입증되었다. 1997년부터 2002년까지 참조가격제가 적용된 약품들에 대 한 약제비는 약 90억 유로로 안정적인 반면, 비적용 약품들의 경우는 80억 유로에서 150억 유로로 증가하였다. 참조 가격이 적용되지 않는 약품을 6% 할인된 가격으로 의료보험에 납품하던 것의 할 인율을 16%로 높였다. ② 약사들에 대한 새로운 보상 제도의 실시를 통한 약제비 절감 약제비 절감에 대한 약사들의 협조를 유도하기 위해 약품 한 상자 당 8 또는 10유로와 약국 구매 가격의 3%를 지급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약국에 납품되는 의약품은 상자 1개 당 2유로를 할인해 주도록 하였다. ③ 일반의약품에 대한 자유 가격 제도 의사의 처방을 필요로 하지 않는 약품들의 경우 약국에서 가격을 자유롭게 결정하도록 하였으며, 이는 약국간의 가격 경쟁을 유도하고 환자들의 선택 가능성을 높이려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들을 통해 약 5억 유로의 약제비가 절감될 것으로 예측된다. ④ 약국 판매 약품에 대한 우편 판매 허용 이것은 만성 질환자나 약국이 문을 닫은 시간에 약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증진시키기 위한 조치이다. ⑤ 의료 서비스의 오 ․ 남용 신고 센터 설치 환자들의 불필요한 의료 이용과 의사들의 과다한 진료를 억제하기 위해 보험의사협회와 질병금고 등에 신고 센터의 설치를 의무화하였다. ⑥ 관리운영비 상승의 억제 관리운영비를 2007년까지 기본 임금에 따라 변화하도록 개정하였으며, 가입자 1인당 관리운영비 가 전체 질병 금고의 평균보다 10% 이상 상승하지 못하도록 제한하였다. 2.2 본인 부담 및 급여의 개혁 FES-Information-Series 1) 본인 부담의 변화 ① 본인 부담 제도의 단순화 지금까지의 본인 부담 제도는 다양하고 복잡하였다. 최근의 의료보험 현대화법은 일반적으로 본 인 부담을 5~10유로로 단순화하였으며, 가격이 5유로 이하인 경우는 실제 가격을 부담하도록 한 다. ② 본인 부담의 면제 및 상한선 변경 사회조항에 따라 월 소득이 일정액(2003년 952유로) 이하인 사람의 경우는 본인 부담이 면제된 다. 18세 이하의 아동도 종전과 같이 원칙적으로 본인 부담이 면제된다. 본인 부담으로 인해 환자들에게 지나친 경제적 부담이 가해지지 않도록 본인 부담의 상한선을 새로 이 결정하였다. 외래의 경우 분기 당 10유로, 입원진료의 경우 매일 10유로씩 1년에 28일까지로 제 한하였다. 또한 본인 부담의 한계는 소득 수준과 연계되는데 연간 총소득의 2%까지이며(사회 조 항), 만성 질환자의 경우는 본인 부담액이 1%를 초과할 수 없도록 하였다(과부담 방지 조항). 피부 양자가 있는 경우 이들에 대한 경감 조치로 본인 부담 상한선이 낮아지도록 하였다. ③ 보너스 제도 예방을 통한 의료비 절감 효과를 높이기 위해, 질병 예방을 위한 환자의 적극적인 노력이 확인되 급여 항목 개원의 진료 의약품 및 붕대 보조 치료 서비스/ 재가 요양 보조 기구 의료 사회사업/ 가사 보조 입원 요양 및 재활 보모의 의료 재활 <표 4> 본인 부담의 변화 본인 부담 개원의 수수료 (분기별로 10유로) 개당 가격의 10%, (최소 5유로에서 최대 10유로까지) 비용의 10% 및 10유로의 처방료 경감 조치 주치의를 거쳐 다른 전문의에게 의 뢰될 경우, 만성 질환자, 아동, 사고, 예방을 위한 정기적인 검진, 예방접 종을 위한 방문 등은 면제 주치의를 통한 의뢰는 일부 경감 1년에 28일까지로 제한 건당 가격의 10% (최소 5유로에서 최대 일일 비용의 10% (최소 5유로에서 최대 일일 10유로 10유로까지) 10유로까지) 일일 10유로 1년에 28일까지로 제한 FES-Information-Series 는 경우에 재정적 보상을 제공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주치의 제도, 만성 질환자 프로그램(DMP) 그리고 통합 진료 체계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경우에는 본인 부담의 면제나 부분적인 보험료를 경감해 주도록 하였다. 통합 진료는 병원, 개원의 그리고 약국 간의 긴밀한 협조를 의미한다. 이를 적극적으로 유도하기 위해 총 진료비의 1%를 별도로 할애하여 통합 진료 체계를 구축하는데 지원 하도록 했다. 보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질병금고에서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보너스 제도의 실시에 소요되는 재원은 비용 절감과 효율성 제고를 통해 조달하도록 하였다. 2) 급여와 관련된 변화 의료보험 개혁(2003)으로 일부 급여가 의료보험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정관 수술, 안경 그리고 일반 의약품은 의료보험에서 급여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일부 급여는 아예 폐지되기도 하였는데 장제비의 경우가 그렇다. 아울러 급여의 범위가 축소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인공 수정 시술 횟수가 축소된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 급여 보상 방식에도 부분적인 변화가 있었는데, 보조 치아는 지금까지는 무료로 진료를 받은 후 질병금고에서 진료비를 치과의사에게 지불해주는 현물급여방식을 유지해왔으나 향후에는 일정액을 지원하는 상환방식으로 전환하기로 하였다. 급여 항목 장제비 및 출산 수당 정관 수술 인공 수정 안경 및 콘택트렌즈 교통비 약제비 예외적 급여 보조치 <표 5> 급여의 변화 변경 내용 비고 급여 항목에서 제외 의학적으로 불가피하지 않은 경우 제외 50% 급여 인정, 3번 시도로 제한 여성 25-40세, 남성 50세로 제한 급여 항목에서 제외 시각 장애인과 18세 이하의 아 동에게 급여 인정 개원의 방문 교통비는 비급여 일반 의약품 비급여 조세를 통해 재원을 조달 2005년부터 임의급여 2005년부터 매월 10유로 이내의 추가적 부담 정률제에서 정액제로 전환 특수한 경우에는 급여 인정 12세 이하의 아동, 발달장애 아동, 중증질환자의 경우는 급여 인정 산모 수당, 피임, 임신중절, 아동 의 질병 시 상병 수당 피부양 가족 본인 부담 면제 2.3. 의료보험 재정방식의 개혁 FES-Information-Series 1) 예외적 급여에 대한 조세 활용 독일 의료보험의 경우, 이른바 예외적인 급여 라고 하여 산모 수당, 피임, 임신 중절, 아동의 질병 시 상병 수당의 지급 등을 제공하였다. 지금까지는 이러한 급여와 관련된 사회적 연대와 그에 따른 부담을 제한적으로 의료보험 제도 내에서만 분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급여들은 수혜자들에게 직접적인 혜택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출산율을 높여 생산 인구의 수를 증가시키므로 국민 경제 전반에 혜택이 돌아간다고 보았다. 즉, 그러한 급여들에 대하여 긍정적인 외부 효과가 있다고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2003년 의료보험현대화법에 따른 개혁에서는 이러한 급여가 국가 경제 전반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보고 향후에는 조세를 통해 재원을 조달하도록 변경하였다. 지급은 과거와 같이 질병금고에서 수행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독일 사회법전에 따라 연방정부는 예외적 급여로 인한 비용을 분담하기 위해 5월 1일 과 11월 1일 매년 두 번에 걸쳐 연방사회보험청을 통해 의료보험에 분담금을 지급하도록 규정했다. 2004년에는 10억 유로, 2005년에는 25억 유로 그리고 2006년에는 42억 유로를 지급하도록 하였다. 질병금고(의료보험조합)들의 상급단체들은 공동으로 하나의 질병금고 또는 하나의 질병금고연 합회를 센터로 정해서 연방사회보험청과 정산을 하도록 한다. 연방사회보험청은 연방의 분담금을 이 센터에 지불하여 관련된 질병금고들에게 분배하도록 하였다. 연방보건부는 연방정부의 동의를 얻어 시행령을 통해 이 분담금의 분배에 관한 세부 사항을 정한다. 분배는 예외적 급여로 인한 지 출 비율을 기준으로 이루어진다. 2) 연금급여에 대한 보험료 징수 독일은 1960년대에 연금 수급자 진료비의 90% 이상을 연금 수급자 의료보험의 보험료수입으로 충당했으나, 최근에는 이 충당 비율이 40%에도 못 미치고 있기 때문에 의료보험 재정 적자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재정 적자 폭을 줄이기 위한 대책의 일환으로 연금 수급자 가 연금 이외의 기타 소득이 있는 경우는 그것에 대해서도 보험료를 납부하도록 하였다. 보험료는 보험료 산정 상한선까지의 소득에 대해서만 납부할 의무가 있는데, 2003년에는 월 소득 3,450유로 가 상한선이었다. 3) 상병 수당의 재원 변경 FES-Information-Series 독일에서는 근로자가 질병으로 일을 못하게 되면 6주까지는 사용자가 임금을 계속 지불하지만, 그 이후에는 의료보험에서 상병 수당을 지불하여 질병으로 인한 소득의 결손을 보상하게 된다. 상병 수 당 제도를 법정 급여에서 제외하고 민간보험으로 전환하자는 의견은 질병금고들의 반대로 채택되지 않았다. 최근의 개혁에서는 상병 수당을 받으려면 사전에 가입자가 0.5%의 보험료를 별도로 부담하 도록 하였다. 이로써 그 동안 노사가 공동으로 납부했던 일반보험료에서 상병 수당의 비용을 부담 했던 것이, 향후에는 가입자가 단독으로 부담하게 되었다. 2.4. 의료보험의 구조 개혁 1) 질병금고 구조의 개혁 의료보험 현대화법(2003)에는 질병금고의 구조를 변경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서로 다 른 종류의 질병금고 간 경쟁을 강화하여 가입자 구조 등을 균등화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질병금고 간 합병도 허용하였으며, 직장질병금고에서는 인건비를 보험요율에 고려하도록 했다. 1970년 이후 독일 의료보험의 비용 억제를 위해 사용자, 가입자, 정치가 등이 모여 정책에 대한 논 의를 해왔던 의료제도협의회(KAiG) 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보아 해체하기로 결정하였다. 2) 민간 의료보험의 인정 월 소득이 3,825유로(2003년) 이상인 사람은 공적 의료보험 가입 의무가 면제되기 때문에 민간보 험에 가입하거나 공적 의료보험의 임의 가입자가 될 수 있다. 그 외에도 해외로부터 이송, 의치, 고 액의 상병 수당 그리고 안경 등을 급여로 받기 위해 민간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보완적 민간보험의 가입을 위해 질병금고는(의료)보험회사들과 협조할 수 있도록 하였다. 3) 진료비 지불 방식의 변경 의사들에게 지불되는 총 진료비의 산정은 2007년부터 전문의 집단별 법정 급여량 방식(합의된 진료량 × 환산 지수)으로 전환된다. 법정 급여량의 변화에 가입자의 질병률을 반영함으로써 질병 금고는 질병률 증가로 인한 재정적 위험은 부담하지만, 의사의 수가 증가하여 초래되는 재정적 위 험은 피하도록 하였다. 법정 급여량의 연도별 책정에서 보험요율 안정 이라는 기본 원칙을 고려하 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정해진 진료량 이상의 진료는 상당히 낮은 수가(환산 지수)로 보상받게 된 다. 개별적으로 질병금고와 계약을 맺어 총액 예산 진료비 지불 방식의 적용을 받지 않는 개별 의 사에 대한 진료비는 주로 포괄수가제 방식으로 지불한다. FES-Information-Series 4) 병원 재정 방식의 변경 지금까지는 병원의 시설 투자는 주 정부가 하고 운영비는 일일 입원비의 형태로 질병금고가 보험 료 수입에서 지불하는 2원 재정 방식으로 유지되어 왔다. 2004년부터는 병원에 필요한 총 경비를 질병금고가 지불하는 단독 재정 방식으로 전환하게 된다. 질병금고가 병원에 지불하는 총액 예산은 가입자들의 기본임금을 고려하여 주 단위로 정해진다. 3. 의료보험 개혁(2003)의 절감 효과와 전망 3.1. 재정 절감 효과 독일은 의료보험 현대화법(2003)의 제정과 2004년부터 시행되는 의료보험 개혁으로 지출 면에서 는 본인 부담 및 급여 내용의 변경, 그리고 수입 면에서는 비용 부담 및 재원 조달 방식의 변경을 통해 상당한 액수의 의료비 절감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1) 상병 수당의 재원 변경으로 인한 절감 효과 상병 수당에 소요되는 비용을 근로자가 단독으로 부담하게 되는 경우, 사용자는 71억 유로를 절 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근로자와 사용자 부담의 재분배일 뿐이며 의료보 험의 실제적인 절감 효과는 기대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2) 예외적 급여의 재원 변경으로 인한 절감 효과 질병금고들은 예외적 급여비용에 대하여 조세를 재원으로 한 국고 지원을 받게 되었다. 예외적인 급여비용을 담배세 수입을 통한 국고 보조로 전환함으로써 45억 유로가 절감될 것이며, 그 결과 보험 요율이 0.4% 인하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예외적 급여를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담배세를 2004 년 1월에 1갑 당 40센트, 2004년 10월에 30센트, 그리고 9개월에 30센트를 인상하기로 계획하였다. 담배세는 보험 재정의 확충뿐만 아니라 건강 증진 효과도 있어 일석이조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보았다. 문제는 담배세만으로 원하는 재원이 충분히 마련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과 가격 경쟁에 서 유리해 진 외국산 담배의 판매량이 증가할 수 있다는 점이다. 3) 급여 항목의 변경으로 인한 절감 효과 정관 수술 및 안경 등의 급여가 의료보험에서 제외되고 인공 수정 횟수가 축소됨으로써 7억 유로 가 절감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른바 일반 의약품은 의료보험에서 급여하지 않기로 함으로써 FES-Information-Series 10억 유로가 절감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또한 장제비의 폐지로 예상되는 절감액은 4억 유로이 다. 4) 본인 부담의 변경으로 인한 절감 효과 개원의 수수료 징수를 통해 약 17억 유로가 절감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수수료 를 분기별로 15유로로 가정한 것이었고 개혁안에서는 10유로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실제 절감 효 과는 적을 수 있다. 5) 추가적 소득에 대한 보험료 부과로 인한 재정 확충 연금 수급자들도 연금 이외의 추가적 소득이 있는 경우 보험료를 납부하도록 하였는데 이를 통 해 18억 유로의 재정 수입이 증가할 것으로 기대된다. <표 6> 개혁으로 예상되는 절감액 개혁 조치 상병 수당 비용 부담의 전환 사회부조 수급자의 의료보험 혜택 일반 의약품의 급여 제외 지출 측면 인공 수정 및 정관 수술의 제외 장제비 제외 안경 제외 주치의 제도 강화 본인 부담(입원, 의약품, 전문의) 수입 측면 예외적 급여에 대한 조세 활용 기타 소득 및 자영 소득에 대한 부과 전체 절감 효과 자료: AOK-Bundesverband. 2003. 연방보건부 추계 0 0 10 2 4 5 30 17 45 18 131 (단위: 억 유로) AOK 추계 0 0 13 2 3 5 10 11 45 18 107 FES-Information-Series 6) 전체 재정 절감 효과 <표 6>에 나타나듯이 독일 연방보건부는 의료보험 개혁(2003)을 통해 약 131억 유로가 절감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는 반면, 지역의료보험연합회는 의료보험 개혁의 절감효과가 107억 유로 정 도에 그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비록 정확한 절감 효과에 대한 다소간의 견해 차이는 존재하 나 최근의 개혁으로 상당한 절감 효과를 거둘 것이라는 점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3.2. 의료보험 개혁(2003)의 전망 의료보험 개혁(2003)에서 기대되는 절감액의 절반에 해당되는 만큼 보험요율을 인하하도록 규정 하였기 때문에 독일 연방보건부는 보험료를 2004년에는 13.6% 그리고 2005년에는 12.5%로 안정시 키는 목표를 무난히 달성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 정부의 그와 같은 낙관적 전망과는 달리, 의료보험에 관련된 여러 집단들은 다양한 불 만을 표시하고 있다. 보험 의사들은 개원의 수수료가 너무 많은 사무 처리를 필요로 하며 실제로 의 사 방문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또한 개원의 수수료로 인해 저 소득층의 의료 이용을 억제하는 효과만을 갖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제약협회는 의료보험 개혁 (2003)으로 약제비를 절감하려면 환자들이 더 많은 본인 부담금을 지불하고, 제약회사들은 약값을 16%나 할인하는 희생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심각한 문제는 그로 인해 제약회사들의 신약 개발 의지가 현저하게 저하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병원협회는 병원 예산을 질병금고가 총액 예산으로 지불하는 단독 재정 방식으로 전환하게 되면 질병금고의 통제력이 강화되고 병원들의 경영은 압박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보험 의사, 제약업체 그리고 병원 등의 의료 공급자들은 물론 가입자나 환자들도 본 인 부담의 증가와 의료 이용의 제한을 이유로 의료보험 현대화법(2003)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결국 2004년 1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의료보험 개혁시도가 기대한 효과를 통해 의 도된 목표를 달성할 것인가는 가입자, 환자들 그리고 의료 공급자들의 수용적 자세와 적극적인 협조를 얻어내는 데 달려있다. 독일의 장기요양보험 권 순 만,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교수 2004년 4월 󰠲󰠲󰠲󰠲󰠲󰠲󰠲󰠲󰠲󰠲󰠲󰠲󰠲󰠲󰠲󰠲󰠲󰠲󰠲󰠲󰠲󰠲󰠲󰠲󰠲󰠲󰠲󰠲󰠲󰠲󰠲󰠲󰠲󰠲󰠲󰠲󰠲󰠲󰠲󰠲󰠲󰠲󰠲󰠲󰠲󰠲󰠲󰠲󰠲󰠲󰠲󰠲󰠲󰠲󰠲󰠲󰠲󰠲󰠲󰠲󰠲󰠲󰠲󰠲󰠲󰠲󰠲󰠲󰠲󰠲󰠲󰠲󰠲󰠲󰠲󰠲󰠲󰠲󰠲󰠲󰠲󰠲󰠲󰠲󰠲󰠲󰠲󰠲󰠲󰠲󰠲󰠲󰠲󰠲󰠲 독일은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지방 정부가 사회부조 제도를 운영하였으나, 노령화와 가족의 역할 변화로 장기요양 대상 인구와 비용이 증가함에 따라 세계 최초로 사회보험 제도 를 통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장기요양 비용을 조달하기 시작하였다. 독일 장기요양보험의 특 징으로는 급여 수급자가 현금 급여를 선택하여 그 현금을 자신에게 요양을 제공한 가족, 친 지 등과 같은 비공식적 서비스 제공자에게 줄 수 있도록 함으로써 가족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 요양 시설과 같은 요양 기관보다는 가정과 지역 사회 중심의 서비스 제 공이 이루어지도록 유도한다는 점, 의료보험과는 달리 급여 수급자의 실제 서비스 이용량에 상관없이 세 가지 요양 등급 분류 안에서는 동일한 정액 급여액을 제공함으로 최소 급여의 성격이 강하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 1. 장기요양 제도: 특성과 유형 FES-Information-Series 평균 수명의 증가로 노령 인구가 증가하고, 이에 더하여 출산율의 감소로 인하여 노령 인 구의 부양 문제가 큰 사회적 부담을 야기하고 있다. 나아가 여성의 노동 참여 증가와 가족 의 역할 변화로 전통적으로 장기요양을 담당해 온 비공식적 서비스 제공자의 역할이 감소함 에 따라 노인에 대한 간병과 일상생활의 보조 같은 장기요양 서비스가 큰 사회적 부담으로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선진국들은 그동안 개인의 책임에 맡기던 장기요양에 대해서도 사회 적 책임이 강조되는 공적 재원 조달 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공적 재원 조달 체계는 위험 분산과 사회적 연대를 동시에 추구하는 제도로서, 그 재원을 조세 혹은 보험료에 기반을 두느냐, 그리고 국민 전체 혹은 일부 계층만을 대상으로 하느냐 라는 두 가지 차원에서 제도를 분류할 수 있다. 장기요양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사회보험을 도입한 나라로는 독일과 일본을 들 수 있다. 사회보험은 일반적으로 소득에 비례하여 보험료 를 납부하고 거의 모든 국민을 포괄하므로 가입자가 장기요양 서비스를 필요로 할 경우 재산 상태와 관계없이 급여를 받는 제도이다. 조세로 장기요양 비용을 조달하는 경우는 크게 둘로 나누는데, 자산 조사를 통해 가난한 사람만을 대상으로 사회부조적 성격을 가진 미국과 같은 제도와,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장기요양 서비스가 필요한 사람에게 급여를 제공하는 북구 유 럽식 제도가 잇다. 일반적으로 의료보다는 장기요양의 급여 범위가 더 제한적이다. 또 전 국민에 대해 의료 비용을 조세로 조달하는 국가 보건 서비스를 가진 영국에서도 장기요양에 대해서는 최근까지 가난한 사람만을 대상으로 사회부조 제도의 형태를 운영해왔다. 즉,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의 료 비용과 장기요양 비용을 서로 약간 다른 사회적 위험으로 간주한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의료 비용에 비해 장기요양 비용은 노령화와 함께 진행되는 만큼 그 예측 가능성이 더 높다. 따라서 개인이 준비할 수 있는 여력이 상대적으로 더 많고 개인의 책임으로 대처할 가능성이 더 높다. 또 젊은 층의 생산 가능 인력에게 의료 문제가 생겼을 때는 그 비용을 부담하기 위 해 자산(예, 주택)을 소진하거나 여타 소비를 희생하는 데 따른 기회 비용이 매우 크다. 따라 서 재난성 의료비용에 대한 사회적 위험 분산의 중요성은 매우 크다. 반면, 노령 인구에게는 장기요양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본인의 자산을 처분하는 것을(재산 상속자를 제외하고는) 사 FES-Information-Series 회적으로 용인할 수 있다. 나아가 젊은 층의 의료 문제는 그들의 건강을 회복시킴으로써 사회 적 생산 활동에 재투입할 수 있지만 노령 인구의 장기요양은 신체 기능의 회복을 통한 사회적 생산을 증진시킬 수 있는 기회가 매우 낮으므로 공적 재원의 투자 효과가 상대적으로 낮다고 보는 것이다. 2. 독일 장기요양보험 1) 도입 배경 독일은 1994년 5월 장기요양법이 통과되고, 1995년 1월부터 보험료를 징수하기 시작하여 1995년 4월부터 재가 요양에 대해, 그리고 1996년 7월부터 요양 시설(nursing home)에서의 장기요양에 대해 급여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독일에서 장기요양 서비스에 따른 비용은 개인이 직접 지불하였다. 다만 대부분의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지방정부는 자산 조사 를 통해 가난한 사람이나 자신의 재산을 장기요양을 위해 다 소진하여 가난해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회부조를 운영하고 있었고, 종교단체, 사회복지단체 등과 같은 비영리 민간 조 직들도 지역 사회 차원에서 장기요양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령화와 가족의 역할 변화에 따른 장기요양 대상 인구와 비용의 증가는 가난한 계층 이외의 일반 국민들 그리고 지방정부에게 심각한 재정 부담을 안겨주게 되었다. 또한, 장기요양을 위한 사회적 재원 조달 체계가 미비함에 따라 장기요양 제공 체계도 자리가 잡히지 않아 제공되는 서비 스의 질이 낮고 서비스 공급자의 수 역시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공적인 재원으로 대다수의 국민을 포괄하는 장기요양 재원 체계의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공적재원 조달 체계를 조세로 운영할지 혹은 사회보험 체계로 운영할 지에 대한 논의가 있 었다. 통독 이후 정부의 재정 부담이 상당한 상황에서 조세 체계로 장기요양 서비스의 재원 을 마련하는 것은 비현실적이었다. 또 이미 의료에 대한 사회보험제도가 도입되어 있었으므 로 장기요양에 대해서도 비슷한 제도를 도입하는 데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쉽게 형성되었을 것이다. 나아가 사회보험 체계를 도입함으로써, 장기요양 서비스에 대한 별도의 관리운영 체 계를 도입할 필요 없이 기존의 의료보험(질병금고) 조직과 인력을 이용하여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으므로 조세 체계보다는 사회보험 체계를 도입하는 것이 많은 장점을 1)‘간병보험’으로 번역되기도 하나 필자는 우리나라에서 좀 더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장기요양보험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 고자 합니다. 가지고 있었다. FES-Information-Series 의료와 장기요양 서비스를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고 대부분의 환자의 경우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따라서 환자의 효과적인 치료와 요양을 위해서는 의료와 장기요양을 하나의 제도 로 묶음으로써 두 기능 간의 통합과 연계를 도모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더 바람직한 접근일 것이다. 하지만 독일의 경우 현실적으로 비용 절감에 있어 많은 한계를 보이고 있는 기존 의료보험 체계 내에 장기요양 요소를 추가해서는 그 비용 상승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예를 들어, 의료보험은 환자가 받는 진료 수준에 따라 거의 상한선 없이 급 여를 제공하고 있는데, 만일 장기요양 부문을 의료보험에 추가한다면 이러한 장기요양 부 문에서도 거의 제한 없는 급여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비용 절감을 위한 혁신적인 장치들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제도와는 다른 별도의 새로운 제도를 설계하여 도입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장기요양과 의료의 경계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생긴 문제가 두 분야 에 대한 지불자(보험조합)가 다르기 때문에 더욱 증폭되는 양상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이러한 별도의 제도 운영은 의료와 장기요양 서비스 간 적절한 조화와 조정을 더욱 어렵게 한다는 비판에도 직면하고 있다. 3. 독일 장기요양보험 재원 조달과 급여 1) 재원 조달 사회보험 중 하나인 의료보험에 가입하는 모든 국민은 사회 장기요양보험의 가입자가 된 다. 다만 자영자나 소득이 높은 일부 피용자 계층은 사회 장기요양보험에 강제로 가입해야 하 는 의무가 없으며, 사회 장기요양보험을 선택하지 않은 경우 민간 장기요양보험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한다. 현재 약 90%에 가까운 국민들이 사회 장기요양보험에 가입하고 있다. 사회 장 기요양보험의 보험료 부과 소득상한선은 2002년까지 가입해 있던 사람은 월 소득 3,487유로 이하로, 2003년도부터 가입자는 월 소득 3,862유로 이하로 각각 다르게 적용하고 있다. 장기 요양보험은 나이에 관계 없이 젊은 층도 보험료를 납부하고 급여 역시 노인뿐 아니라 장기요 양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예를 들어, 장애로 장기요양을 필요로 하는 젊은 계층)에게 제공 된다. 하지만 장기 요양보험 급여 수혜자의 80%는 65세 이상의 노인들이다. 독일 장기요양보 험의 대상 인구는 2000년에 시작된 일본의 장기요양보험과 다른데 일본에서는 40세 이상 인 구만이 보험료를 납부하고 급여 역시 노령화와 관련된 장기요양에 국한된다. FES-Information-Series 의료보험과 마찬가지로 장기요양보험의 보험료도 고용자와 피고용자가 반반씩 부담한다. 단 고용자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법정공휴일을 하루 감소시켰다(예외: 작센주). 이러한 변화는 고 용자의 사회보험료 부담을 더 이상 높이지 않음으로서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목적도 있 지만, 질병에 비해 장기요양은 직장이나 고용에 의해 영향을 받는 정도가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논리에 기인했다고도 볼 수 있다. 연금수급자의 경우 연금에서 보험료의 반을 부담하고 실업자의 경우 실업보험에서 보험료를 전액 부담해준다. 보험료는 현재 총소득의 1.7%인데, 보험료율을 인상시키기 위해서는 의회에서 법안이 통과하여야 한다는 규정을 만듦으로서 비용억제의 의지 를 보이고 있다. 재원조달에서도 독일은 재원의 전액을 보험료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재원의 50%를 보험료로부터 그리고 나머지 50%는 조세에 의해 조달하는 일본의 장기요양보험제도와 도 차별화된다. 2) 장기요양보험 급여 장기요양보험의 급여는 나이나 노령화와 상관없이 신체적 혹은 정신적 장애(disability)로 인해 일상생활(ADL: Activities of Daily Living)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적어도 6개월 이상 타 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급여의 대상자가 되기 위해서는 의료보 험 소속 의료진(MDK)에 의한 검진(사정, 평가)을 받아야 한다. 급여대상자는 일상생활에서 개 인위생, 영양 그리고 이동과 관련된 활동들(예, 목욕, 화장실 이용, 식사 등)을 수행하는데 있어 서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타인의 도움에 의존하느냐와 가사노동에 도움을 필요 로 하는 정도에 따라 세 가지 요양등급으로 분류된다. 타인에 대한 의존도가 가장 낮은 1등급 은 하루에 적어도 한번 이상 그리고 총 90분-180분 동안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경우이고, 2등급은 하루에 적어도 세 번 이상 총 180분-300분 동안 타인의 도움에 의존해야 하는 경우이 다. 마지막으로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정도가 가장 큰 3등급은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일상 활 동을 수행하는데 있어 매일 총 5시간 이상 타인의 도움에 의존하는 경우이다. 요양등급 1 2 3 표 1. 장기요양보험 급여액 재가 현금급여 205 410 665 요양 요양급여 384 921 1,432 주간/야간 요양 요양급여 384 921 1,432 (단위: 월, 유로) 요양시설 요양급여 1,023 1,279 1,432 출처: 독일보건복지부(Bundesministerium f ü r Gesundheit und Soziale Sicherung) FES-Information-Series 급여는 크게 가정에서 하는 요양과 요양시설의 요양으로 분류될 수 있다(표 1). 재가요양의 경우 수혜자가 현금급여와 서비스급여 중 선택할 수 있다(둘 중 한 가지만 선택해도 되고, 두 가지 급여를 혼합할 수도 있음). 재가요양에 대한 서비스급여는 지역사회의 방문요양서비스제 공자(즉, 공식적 서비스제공자)에 의해 제공된다. 재가요양의 현금 급여는 그 사용처(방법)에 대한 제한이 없으며, 현금급여를 선택한 급여대상자는 그 현금을 자신에게 요양을 제공한 가 족, 친지 등과 같은 비공식적 서비스 제공자에게 줄 수 있다. 요양시설의 경우 서비스급여만 가능하고, 숙박과 식사는 급여대상이 아닌데 이는 재가요양 급여수급자에 비교해 더 유리한 급여는 제공하지 않겠다는 의도이다. 요양등급 3의 경우 재가요양과 요양시설 간 동일한 급여 액을 지급함으로써 요양시설과 같은 기관화된 장기요양서비스 제공을 감소시키기 위한 경제적 유인을 제공하고자하는 노력도 엿볼 수 있다. 그 외 주간요양과 야간요양에 대해 급여를 제공 하고 그리고 요양시설에서 하는 단기 요양(예를 들어, 환자를 돌보던 가족구성원이 휴가를 가 는 기간)에 대해서도 급여를 제공한다. 이러한 현금 급여는 소비자의 선택권을 보장하여 서비스제공자간 경쟁을 촉진할 수 있고, 또 비공식서비스 제공자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통해 가족에 의한 요양서비스 제공을 촉진시 키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물론, 동일한 요양등급이라 하더라도 현금급여액을 요양급 여액의 절반 수준으로 제한함으로써 현금급여의 남용을 막으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독일의 현금 급여는, 공식적서비스 제공자에 대해 요양급여만을 지급할 뿐 현금급여를 지급하지 않 음으로써 가족과 같은 비공식 서비스제공자에 대한 금전적 보상의 가능성을 없앤 일본의 장 기요양보험제도와 크게 대조된다. 장기요양보험은 급여에서 의료보험과 큰 차이를 보인다. 의료보험에서는 환자가 의료혜택 을 받은 만큼 거의 제한 없이 급여를 받을 수 있으나, 장기요양보험에서는 급여수급자의 실 제 서비스 이용량에 상관없이 세 가지 요양등급 내에서는 동일한(정액) 급여액이 주어진다. 장기요양보험이 도입된 이후 지금까지 급여액은 전혀 인상되지 않았으며(물가상승과도 연동 되지 않음), 예를 들어 장기요양보험의 급여액은 2000년 현재 평균적인 요양시설 비용의 60% 밖에 포괄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의료보험과는 달리 장기요양보험은 기본적인 장 기요양 요구에 대한 최소한의 급여제공의 성격이 강하다. 이러한 획기적인 차이점은 장기요 양보험을 기존의 의료보험과는 별도의 새로운 제도로 설계하고 도입했기에 가능했으리라 생각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적인 급여로 인해, 요양 등급이 높아서 장기간 많은 양의 장기요양 서 FES-Information-Series 비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급여량이 매우 불충분하고 결과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사회 보험이 도입되었어도(지방) 정부의 사회부조 프로그램에 여전히 의존하게 되는 실정이다. 급여 가 제한적임에 따라 장기요양보험의 도입 이후에도 비공식적인 서비스 제공자의 역할이 여전히 중요한 실정이다. 독일 장기요양보험의 제한적인 급여는 비용의 10%만을 본인이 부담하므로 급 여 수준이 훨씬 높은 일본의 장기요양보험 제도와도 대조된다. 4. 독일 장기요양 이용과 제공 체계 1) 장기요양 이용과 비용 지출 2000년 현재 서비스 이용자의 약 30%가 요양 시설에 입원하여 서비스를 받고 있고 나머지 70%는 재가 요양 급여를 받고 있다. 그리고 재가 요양 급여를 받는 사람의 약 75%가 현금 급 여만을 선택하고 있으므로(나머지 25%중 절반은 서비스 급여만을, 절반은 서비스와 현금 급여 를 혼합하여 받고 있음) 전체 급여 수급자의 50%를 조금 넘는 사람들이 서비스 급여 대신 현 금 급여만을 선택한 것이다. 현금 급여의 액수가 서비스 급여에 비해 훨씬 적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현금 급여를 선호하는 경향은 장기요양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전문적인 서비 스 제공자보다는 가족/친지와 같은 비전문적이고 비공식적인 서비스 제공자를 선호한다는 것 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일한 요양 등급에 대해 현금 급여의 액수는 서비스 급여의 절반에 그 치므로 이러한 현금 급여 선호는 장기요양 보험 재정에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전반적인 급여의 추세를 보면 요양 시설 입원자의 비중이 증가하고, 또 재가 급여 수급자 중 현금 급여보다는 서비스 급여를 선택하는 사람의 비중이 조금씩 증가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도 노령 인구의 평균 연령이 더욱 증가하고, 여성의 노동 참가와 핵가족화의 경향 이 가속화될 것이므로 가족 구성원에 의한 서비스 제공의 가능성이 더욱 감소하고 공식적, 전문적 서비스 제공자의 역할이 더욱 확대될 것이고 이는 장기요양보험의 재정을 더욱 압박 할 것이다. 독일의 장기요양보험은 1999년부터 당기 적자가 발생했고 2000년에는 그 적자 폭 이 증가하였다. 현재는 누적 적립금을 통해 적자를 보전하고 있기는 하지만 장기적으로 재정 건실화가 큰 과제임에는 틀림없다. 나아가 장기요양보험의 경우 적자 발생에 대해 연방정부 가 전혀 책임을 지지 않으므로 재정 건실화의 필요성이 더 높다고 하겠다. 한편으로는 급여 가 정액으로 고정되어 있으므로 의료보험에 비해서는 비용 증가의 예측 가능성이 높은 편이 FES-Information-Series 어서 경제 상황에 따른 보험료 수입이 장기요양보험의 재정에 핵심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2) 장기요양 제공 체계 장기요양보험이 도입된 후 장기요양 서비스 제공 기관의 수가 대폭 증가하였다. 1992년 약 5,000여 개였던 지역사회 중심(재가)장기요양 서비스 제공자가 1997년에는 11,700여 개로 증 가하였다. 요양 시설은 동일 기간 중 약 4,300개에서 8,000여 개로 증가하였다. 하지만 그 이 후의 증가 추세는 감소하여 2000년 말 현재 지역사회중심 장기요양 서비스 제공자는 13,000여 개, 그리고 요양 시설은 8,700여 개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급격하게 증가한 장기요양 서비스 제공 기관들의 서비스 질 관리는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법에서 정하는 장기 요양 공급 기관의 설립 요건이 최소한의 서비스 질 기준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높 다. 1999년 말 기준으로 재가요양 서비스 제공자의 법적 소유 주체를 보면 50.9%가 민간 영리, 47.2%가 민간 비영리 그리고 2.0%가 공공이었다. 요양 시설의 경우는 34.9%가 민간 영리, 56.6%가 민간 비영리 그리고 8.5%가 공공이었다. 따라서 병원 산업과는 달리 장기요양 서비스 제공자의 경우 민간 영리 제공자의 비중이 상당히 높은 편임을 알 수 있다. 장기요양보험의 도입은 장기요양 서비스와 관련된 많은 일자리를 창출함으로써 인력 노동시장에도 많은 영향 을 미쳤는데 필요 인력의 공급은 여전히 부족한 상황이다. 장기요양 금고는 법에서 정한 최소한의 기준을 충족한 모든 장기요양 서비스 제공자에게 요 양 기관의 자격을 인정해 준다(조건을 충족한 공급자와의 계약을 거부할 수 없음). 장기요양 서비스 제공 기관이 책정하는 가격은 의료 부문과 비슷하게 주요 지불자인 장기요양 금고와 지방 정부(사회부조 프로그램 지불자)가 공급자들과 협상을 통해 결정한다. 하지만 의사협 회와 보험자협회가 집단적인 협상을 하는 의료보험과는 달리 장기요양금고협회 및 지방 정 부가 개별 공급자와 협상을 한다. 요양 시설에 대해서는 예산에 대한 협상을 통해 궁극적으 로는 요양 일당 가격을 결정하고, 재가 중심 장기요양 공급자에 대해서는 서비스 항목의 가 격을 결정한다. 장기요양 서비스 공급자에 대한 소비자 선택과 경쟁을 촉진하기 위해 장기 요양 금고는 여러 공급자들에 대한 가격 정보를 소비자들에게 알려주도록 했다. 독일의 고령화 추세와 사회경제적 문제 안 두 순, 서울시립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2003년 7월 󰠲󰠲󰠲󰠲󰠲󰠲󰠲󰠲󰠲󰠲󰠲󰠲󰠲󰠲󰠲󰠲󰠲󰠲󰠲󰠲󰠲󰠲󰠲󰠲󰠲󰠲󰠲󰠲󰠲󰠲󰠲󰠲󰠲󰠲󰠲󰠲󰠲󰠲󰠲󰠲󰠲󰠲󰠲󰠲󰠲󰠲󰠲󰠲󰠲󰠲󰠲󰠲󰠲󰠲󰠲󰠲󰠲󰠲󰠲󰠲󰠲󰠲󰠲󰠲󰠲󰠲󰠲󰠲󰠲󰠲󰠲󰠲󰠲󰠲󰠲󰠲󰠲󰠲󰠲󰠲󰠲󰠲󰠲󰠲󰠲󰠲󰠲󰠲󰠲󰠲󰠲󰠲󰠲󰠲󰠲 - 독일은 1932년에 이미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다음 1972년 선진국 중 가장 빠르게 고령 사회에 진입한 바 있다. 그리고 2012년이면 초고령 사회에 도달할 것으로 예측된다. 독일은 일본을 제외하고는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고령화 지수를 보이고 있다. - 고령화 추세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가 출산율 저하와 인구 감소이다. 독일의 가임 여성 1인당 평균 출산율이 2.0명(1970년)에서 1.3명(1996년)으로 떨어졌으며, 이는 OECD 국가 중에서도 일본 다음으로 가장 낮은 것 이다. - 1998년 독일의 인구는 82.1백만 명이었으나 2030년에 현재보다 6.6% 감소한 77.0백만 명으로, 그리고 2050 년에는 이민자를 제외하면 6천만 명까지 감소할 것으로 예측된다. - 현재 독일의 남성 근로자들은 평생 36년 동안 고용되고, 38년 동안 비경제 활동 인구로 생활하는데 2030년 이 되면 고용 기간은 34년으로 짧아지고 경제 활동에서 배제되는 기간은 44년으로 늘어난다. 반면, 여성들 의 경우, 현재 29년 대 52년인 고용 기간과 비경제 활동 기간 비율이 2030년에는 39년 대 45년으로 변하여 남성보다 오히려 길어질 것으로 예측된다. 그만큼 여성의 역할이 커진다는 얘기다. - 독일에서 현재 연금 수급자 비중(취업자 대비)은 약 55%이지만, 2035년에는 최소한 90%로 상승하여 이 부분 의 재정 부담이 막중할 것이다. - 독일은 고령화가 진전됨에 따라 2000년부터 2050년 사이의 연평균 성장률이 1.6~1.8%에 머무를 것이며, 선 진국 중 일본과 함께 성장률과 노동생산성이 가장 낮은 국가에 속한다. - 이에 따라, 현재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년 15% 정도의 생산성 증가가 필요한데 이 격차를 어떻 게 줄이는지가 과제이며, 여기에는 연금보험, 의료보험, 실업보험 체계의 개혁이 포함된다. - 또한, 고령 인구의 경제 활동 촉진이 중요한 과제인데 여기에는 노인층 취업 제고, 분담금과 세금의 증가 억 제를 통한 노동 공급 증가 유도, 교육, 연구 활동과 고령자를 위한 평생교육, 향상교육 및 재교육 등을 통한 노동생산성 제고 등의 방안이 모색되고 있다. 󰠲󰠲󰠲󰠲󰠲󰠲󰠲󰠲󰠲󰠲󰠲󰠲󰠲󰠲󰠲󰠲󰠲󰠲󰠲󰠲󰠲󰠲󰠲󰠲󰠲󰠲󰠲󰠲󰠲󰠲󰠲󰠲󰠲󰠲󰠲󰠲󰠲󰠲󰠲󰠲󰠲󰠲󰠲󰠲󰠲󰠲󰠲󰠲󰠲󰠲󰠲󰠲󰠲󰠲󰠲󰠲󰠲󰠲󰠲󰠲󰠲󰠲󰠲󰠲󰠲󰠲󰠲󰠲󰠲󰠲󰠲󰠲󰠲󰠲󰠲󰠲󰠲󰠲󰠲󰠲󰠲󰠲󰠲󰠲󰠲󰠲󰠲󰠲󰠲󰠲󰠲󰠲󰠲󰠲󰠲 1 . 고령화의 정의와 원인 FES-Information-Series 오늘날 세계는 과다한 인구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으나 다른 한편 20년 후에는 세계의 인구수가 절대적으로 감소하리란 예측이 나오고 있다. 특히 21세기에 접어들어서 OECD 국 가들의 인구 감소세는 노인 문제와 함께 노동력 부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생존 전략 의 핵을 이룰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인구 구조를 논할 때, 노인의 기준은 만 65세 이상인 사람을 말한다. 국제연합(UN)은 전체 인구에서 65세 이상 인구의 비율이 7% 이상이면 고령화 사회(ageing society), 그 비율이 14% 이상이면 고령 사회(aged society), 그리고 21% 이상이면 초고령 사회(super-aged society)라고 한다. 고령화의 원인은 크게 출산율 저하와 사망률의 감소에 따른 평균 연령의 증가에 있다. WHO에 의하면, 세계 인류의 수명이 1997년의 66세에서 2025년에는 73세로 높아지고 65세 이상 노년층 비 율은 7%에서 10%로 증가한다고 한다. 고령화 현상은 이제 범세계적 추세가 되었다. 고령화와 동반된 문제는 수없이 많지만 그 중 특히 첫째, 노동력 부족과 인적 자원 확보, 둘째, 사회보장 체계의 부담과 국가 경쟁력, 셋째, 노인 문제, 성장의 한계과 삶의 질 등이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으며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고령화와 초고령화에 대비하 는 대책일 것이다. 2. 세계적으로 빠른 독일의 고령화 추세와 출산율 저하 독일은 2012년이면 초고령 사회에 도달할 것으로 예측된다. 독일은 표 1에서 볼 수 있듯이 1932년에 이미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다음 1972년 선진국 중 가장 빠르게 고령 사회에 진입 한 바 있다. 2000년 현재 독일의 고령 인구 비중은 16.4%로서 OECD 평균인 13.0%보다 3.4 %포인트 높으며 17.2%를 기록한 일본을 제외하고는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고령화 지수 를 보이고 있다. FES-Information-Series 표 1. 주요 OECD국의 고령화 및 초고령화 도달 연도 7% 일본 1970 프랑스 1864 독일 1932 영국 1929 이태리 1927 미국 1942 도달 연도 14% 20% 1994 2006 1979 2020 1972 2012 1976 2021 1988 2007 2013 2028 7% → 14% 24 115 40 47 61 71 출처: OECD(2000). Reforms for an Ageing Society. Social Issues 증가 속도 14% → 20% 12 41 40 45 19 15 고령화의 또 다른 지표로 14세 이하 인구 대비 65세 인구 비중이 이용된다. 표 2에서 보듯 이 독일은 현재뿐만 아니라 2050년에 가서도 이태리, 일본과 함께 세계에서 노인 비중이 가 장 높은 나라로 머물 것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독일인들의 평균 수명은 1960년에 여자와 남자 각각 72세와 67세였는데 2000년에는 81세 와 75세로 증가했다. 그런데 2050년에는 다시 최소한 84.5세와 78.1세로 각각 연장될 것이 며, 이에 따라 평균 연령도 2000년도의 41.1세에서 2045년에는48.2세로 상승할 것이다. 표 2. 주요 OECD국의 고령화 지수에 대한 예측 (단위:%) 세계 선진국 일본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태리 스웨덴 2000 23.0 50.5 117.0 56.7 83.6 105.1 85.6 126.6 95.6 고령화 지수 2025 42.8 142.0 238.8 99.5 144.0 201.6 134.5 235.8 186.8 2050 74.3 171.8 291.2 113.4 183.2 250.0 166.9 314.9 217.1 ※ 고령화 지수= 65세 이상 인구/14세 이하 인구 출처: Deutscher Bundestag 14. Wahlperiode; Drucksache 14/8800, Schlussbericht der Enquete-Kommission FES-Information-Series 독일에서 65세 이상 인구 비중은 1960년에 12%, 2000년에는 16%였으나 2030년에는 25% 에 달할 것으로 예측된다. 80세 이상 노인의 인구 비중은 더욱 가파르게 상승하여 1960년 1.5%에서 2000년에 3.7%, 그리고 2030년에는 무려 6.5%에 달할 것이다. 이러한 수치는 OECD 평균치보다 월등히 높아서 독일의 초고령화 현상의 심각성을 보여주고 있다. 고령화 추세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가 출산율 저하와 인구 감소이다. 독일의 가임 여성 1 인당 평균 출산율이 2.0명(1970년)에서 1.3명(1996년)으로 떨어졌으며, 이는 OECD 국가 중 에서도 일본 다음으로 가장 낮은 것이다(표 3 참조). 이는 한 사회가 인구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대체 출산율(2.1%)에 크게 미달하며, 이러한 추세는 특단의 대책이 강구되지 않는 한 지속될 전망이다. 1998년 독일 인구는 82.1백만 명이었으나 비교적 중립적인 예측을 보더라도 2030년에 현 재보다 6.6% 감소한 77.0백만으로, 그리고 2050년에는 이민자를 제외하면 6천만까지 감소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는 1년 동안의 출생자와 사망자 수의 차이가 2010년에는 30만 명, 그리 고 2030년에는 50만 명에 달하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출산율 감소, 평균 수명 연장 등의 추세는 시간이 갈수록 늙은 세대의 비중이 커져서 사회경제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 시킬 것이다. 3. 독일 인구 구조 변화와 여성 및 고령층 근로자의 중요성 고령화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노인수가 많아서 생산 활동 인구보다 비생산 활동 인구 가 많아지는 것 외에 노령화의 속도가 가속화될 수 있다는 데 있다. 연방통계청의 예측에 국가 1970년 최근 연도 최근 연도 한국 4.5명 1.4명 2000년 표 3. 국가별 출산율 추이 독일 일본 스웨덴 캐나다 2.0명 2.1명 1.9명 2.3명 1.3명 1.4명 1.6명 1.6명 1996년 1998년 1996년 1995년 프랑스 2.5명 1.7명 1996년 출처: 삼성경제연구소(2002), 고령화 사회의 도래에 따른 기회와 위협. Issue Paper 2002.6.17 미국 2.5명 2.0명 1997년 FES-Information-Series 따르면, 매년 120,000명의 이민 순유입이 있다고 하더라도 독일의 가용 노동력은 앞으로 50년 동안 40% 이상 감소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여성의 경제 활동 참가율이 남성과 비슷해지고 연금 수급 연령을 상향 조정한다고 해도 2050년에는 2000년에 비해 8백만 명정도의 생산 활 동 인구가 감소하여 독일 경제는 심각한 노동력 부족 현상에 직면할 것임을 의미한다(36백 만에서 28백만 명으로). 이로써 경제 활동 인구는 2035년에 현재보다 15% 감소하는데, 이는 경제 활동 인구 1인당 현재보다 약 15% 정도 더 많이 생산해야만 현재의 생활수준을 유지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는 또한 GDP 실질 성장률의 1/3정도를 인구 구조 및 취업자수 감 소가 상쇄함을 뜻한다. 고령화 사회에서 여성 근로자들이 노동 공급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는데 1자녀 혹은 많아야 2자녀만을 둔 25~30세의 여성 근로자들은 경제 활동 참가율이 85% 수준에 있다 가 30~40세가 되면 양육과 자녀 교육 때문에 감소하다가 40~45세가 되면 다시 85%까지 증 가한다. 현재 독일의 남성 근로자들은 평생 36년 동안 고용되고 38년 동안 비경제 활동 인구로 생 활한다. 그런데 2030년이 되면 고용 기간은 34년으로 짧아지고 경제 활동에서 배제되는 기간 은 44년으로 늘어난다. 반면, 여성들의 경우, 현재 29년 대 52년인 고용 기간과 비경제 활동 기간 비율이 2030년에는 39년 대 45년으로 변하여 남성보다 오히려 길어질 것으로 예측된다. 그만큼 여성의 역할이 커진다는 얘기다. 표 4. 독일의 연령층별 근로자 비중 변화 추이 연령층 15세 이상 30세 미만 30세 이상 45세 미만 45세 이상 60세 미만 60세 이상 1998년 22.8 43.3 30.5 3.4 2020년 20.4 32.5 37.5 9.6 (단위:%) 2050년 20.8 31.6 35.6 12.0 출처: Deutscher Bundestag 14. Wahlperiode; Drucksache 14/8800, Schlussbericht der Enquete-Kommission FES-Information-Series 또 다른 노동 공급원은 노인층 인구이다. 출산율 감소와 수명 연장으로 2020년부터 2050년 까지 노령층 인구의 경제 활동 참가율은 높게 유지될 것이다. 이는 특히 여성의 경우 두드러질 것이다. 즉, 남성의 경우 60~65세 연령군의 경제 활동 참가율은 2020년 경 75%까지 상승한 후 안정세를 유지하겠지만 60~65세 여성의 경우 2020년까지 25%로 상승한 뒤 2050년까지 지 속적으로 상승하여 남성 수준에 접근할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결정적 이유는 퇴직 연령을 현 60세에서 65세로 상향 조정하였기 때문이다. 표 4는 2050년까지 노동 공급자의 연령 구조 변화 추이를 정리한 것이다. 이를 보면, 15~ 30세 미만과 30세 이상 45세 미만의 젊은 노동력의 비중은 점차 하락하는 반면, 45세 이상 60세 미만과 60세 이상의 노령층 근로자 비중은 증가함을 알 수 있다. 특히 60세 이상 노인 층 근로자의 비중은 1998년 3.4%에서 2050년에는 12.0%로 크게 증가하여 고령화 사회에서 노인층 노동력의 상대적 중요성을 입증하고 있다. 고령화 추세에 따라 취업자 평균 연령은 현재의 39세에서 20년 후에는 42.5세로 상승한 다음 변화 없이 유지될 것이다. 4. 연금보험과 퇴직 제도 개혁의 필요성 수명이 연장된다는 것은 비경제 활동 기간이 연장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교육 기 간도 포함되지만 그보다는 실업 기간과 함께 퇴직 이후 여생이 길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수명은 연장되고 퇴직은 더 빨라지는 OECD 여러 나라에서의 현상은 퇴직 이후 비경제 활동 기 간이 길어짐을 뜻한다. 노동시장이 고령화 추세로부터 받는 압력을 재는 척도로 보통 고령자 부 양률이라는 것이 이용된다. 이는 가용 노동력(16-64세 인구) 대비 노인 인구(65세 이상 인구)의 비 중으로 측정된다. 그러나 이 지표는 실제 고용 상태를 반영하지 못하는 취약점이 있기 때문에[취 업자 대비 부양률(support ratio)= 노인 인구(65세 이상 인구)/ 취업자수]라는 지표가 더 유용한 것으로 파악되며 독일은 현재 0.4(1:2.5)이지만 2030년에 가면 0.67(1:1.5)로 대폭 악화될 것으로 보인다. 독일의 현재 연금 수급자 비중(취업자 대비)은 약 55%이지만 2035년에는 최소한 90%로 상승하여 이 부분의 재정 부담이 막중할 것이다. 이는 1972년 65세였던 퇴직 연령이 지속적 으로 단축되어 이제는 가장 많은 근로자가 60세에 퇴직하고 1992년의 연금 제도 개혁에 따라 조기 퇴직자 수가 2004년에 정점에 도달하는 사실도 연금 재원에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FES-Information-Series 연금 제도 개혁은 크게 첫째, 공적 연금의 보험료 인상이나 부과 대상의 확대 등 세입원 확 대와 둘째, 공적 연금 총지출의 억제 및 셋째, 사적 연금의 확대 유도 등으로 압축된다. 그 중 에서 공적 연금의 지출 억제책으로 y 이미 1992년에 가입 기간 1년당 급여 상승률을 1.5%에서 1%로 하향 조정하여 소득 대 체율이 인하되도록 급여 산정 공식을 변경한 바 있으며, y 역시 같은 해에 연금 급여를 각종 조세 및 사회보장 기여금을 제외한 순소득 성장률과 연 동시킴으로써 지출 증가를 억제한 것 외에, y 노령연금 수급 개시 연령을 2001년과 2012년 사이에 63세에서 65세로 점차 연장하는 등 의 조치가 취해졌다. 5. 성장 촉진의 필요성과 한계 표 5에는 몇몇 OECD 국가의 예상되는 평균 성장률이 표시되어 있다. 대부분 OECD 국가의 경 우 고령화가 진전됨에 따라 2000년부터 2050년 사이의 연평균 성장률이 1.6~1.8%에 머무를 것 으로 전망되고 있다. 선진국들 중 독일은 일본과 함께 성장률과 노동생산성이 가장 낮은 국가에 속한다. 표 5. 국가별 2000년에서 2050년 사이의 GDP 성장률과 노동생산성 국가 한국 일본 독일 프랑스 GDP 성장률 2.90 1.04 1.40 1.62 노동생산성 2.73 1.66 1.72 1.72 출처: OECD(2000). Reforms for an Ageing Society. Social Issues 영국 1.69 1.82 (단위:%) 미국 2.28 1.83 독일에서 감소하는 노동력은 자본 집약도를 높일 것이며, 이에 따라 약 6-7%의 노동 생산성 향상이 예상된다. 현재 36.8%인 독일의 노인 부양률(Altersquotient= 60세 이상 인구/20-60 세 미만 인구 비율)은 35년 후 그 2.13배에 달하는 82.3%로 상승하기 때문에 현재의 생활수 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15% 정도의 생산성 증가가 필요하다. 그러나 6-7%의 생산성 향상은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기 때문에 그 격차를 어떻게 줄이는지가 경제와 사회 정책의 과제로 남아있다. FES-Information-Series 한 가지 방안으로 출산율 장려 정책이 있다. 그러나 많은 연구 결과를 보면, 이 정책의 인 센티브 효과는 매우 미미할 뿐만 아니라 2040년에나 노동시장에 그 효과가 일부 나올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에 큰 기대는 어렵다. 또 다른 방안은 이민을 통한 노동력 확보이다. 이 또한 독일의 고령화 추세를 상쇄하려면 2035년까지 매년 750,000명의 순 이민 유입이 있어야 하는 데 이는 현실성이 희박하다. 또 다른 해결책 중 하나는 노인 인구의 경제 활동 참여율 증대를 통한 성장 촉진이다. 이 는 늘어나는 재정 수요의 충족과 동시에 노인 인구의 생산 활동 참여를 통한 삶의 질 개선과 연계시키는 목적이 동시에 추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개인 차원에서 보면 길어진 수명을 어떻게 생산적으로 보내느냐가 중요한데 사회 전체로 보면 장래 노동시장에서 수급상의 문제 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역시 심각한 문제이다. 따라서 고령 인구의 경제 활동을 어떻게 촉진 시키는가 하는 데 귀결된다. 여기에는 y 특히 조기 퇴직을 장려하는 대신 오히려 정년 이후까지 근무를 장려하여 노인층의 취업률 을 증가시키고, y 명목 임금 증가에도 불구하고 분담금과 세금의 증가로 인한 총임금과 순임금 간의 격차가 증대되는 현 제도에서 탈피, 노동 공급의 증가를 유도하는 장치를 마련하며, y 자본 집중도 제고 외에 교육, 연구 활동과 고령자를 위한 평생교육, 향상교육 및 재교육 등 인적 자본 축적을 통한 노동 생산성을 높이고, y 구조조정을 통한 산업 분야별 이동성을 높이는 등의 대안이 추천되고 있다. 참고로 OECD 국가들의 경험을 보면, 교육비 지출은 연금과 의료비와 함께 고령화가 진전 됨에 따라 증가하는 3대 지출 중의 하나로, 이는 고령 근로자를 재교육 시킬 필요성이 증가 하고 평생교육의 개념으로 전환되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6. 사회 경제 분야의 개혁 과제 고령 사회가 진전됨에 따라 근로 시기 연장 및 이에 상응하는 고용 능력 및 고용 기회의 창출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네덜란드, 미국, 뉴질랜드에서는 신규 채용, 배치, 승진, 교 육, 퇴직시 연령 차별을 금지하고 기업이 부담하는 고령자에 대한 교육비의 세금을 면제해주 고 있다. 또한, 오스트리아는 고령 근로자 고용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반면, 50세 이상의 근로 FES-Information-Series 자 해고에 대해서는 불이익 주고 있다. 이태리, 노르웨이, 네덜란드 등에서는 1997년에서 1999년에 걸쳐 학교교육 개혁 및 평생교육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독일의 경우 보조금 지급 요건을 55세 이상 근로자가 고용되어 있는 기업으로 대폭 완화하 였으며, 덴마크의 경우 고령 장기 실업자를 채용하는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캐나다 의 경우 고령의 해고 근로자에게 지급되던 임금 보조를 폐지하고 비영리 부문에 고령 근로자 를 알선하고 있으며, 프랑스의 경우 주당 평균 근로 시간을 40시간에서 35시간으로 단축하였 다. 최근 독일 총리 슈뢰더는 자신이 마련한“아젠다 2010”이라는 사회 개혁 프로그램을 자 신의 집권당인 사민당이 채택하지 않으면 총리직을 사임하겠다고까지 할 정도로 개혁의 필요 성을 강조한 바 있다. 이 프로그램은 실업 수당 지급 기간을 18개월에서 12개월로 단축, 채용 과 해고 장벽 제고를 통한 노동시장 유연화 등을 포함하고 있다. 2001년의 소득세 인하와 퇴직 연금제 개혁에 이어 2003년 1월부터 발효된 노동시장 개혁 조치는 이미 파견 근로자들의 중계 기능을 수행하는 Personal Service Agency(PSA)라는 기구의 설치와 개인 창업과 자영업 촉진을 위한 1인 주식회사(Ich AG) 제도를 도입하였다. 또한 월 400유로 이하의 소득자는 소득세와 사회보장 분담금을 일체 면제해 줌으로써 청소 년이나 고령자들의 비정규직 일자리를 활성화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이번의 개혁 프로 그램 역시 점점 줄어가는 독일 경제의 역동성을 되살려보고자 하는 의지에서 나온 것으로 고령화와 동반된 많은 도전에 대비하자는 의지가 담겨있다. 독일의 신교통 정책, 21세기「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해법 최 연 혜, 한국철도대학 운수경영학과 교수 2002년 8월 󰠲󰠲󰠲󰠲󰠲󰠲󰠲󰠲󰠲󰠲󰠲󰠲󰠲󰠲󰠲󰠲󰠲󰠲󰠲󰠲󰠲󰠲󰠲󰠲󰠲󰠲󰠲󰠲󰠲󰠲󰠲󰠲󰠲󰠲󰠲󰠲󰠲󰠲󰠲󰠲󰠲󰠲󰠲󰠲󰠲󰠲󰠲󰠲󰠲󰠲󰠲󰠲󰠲󰠲󰠲󰠲󰠲󰠲󰠲󰠲󰠲󰠲󰠲󰠲󰠲󰠲󰠲󰠲󰠲󰠲󰠲󰠲󰠲󰠲󰠲󰠲󰠲󰠲󰠲󰠲󰠲󰠲󰠲󰠲󰠲󰠲󰠲󰠲󰠲󰠲󰠲󰠲󰠲󰠲󰠲 21세기에 접어들면서 교통 정책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교통 인프라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 면에 걸친 교류의 전제 조건으로서 한 국가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동시에 환경오염과 직결되는 산업으로서 인 류의 삶의 질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온실 가스 배출 감축 의무를 골자로 하는 교토 선언과 지속가능한 성장 의 모색 등 21세기의 변화된 환경은 교통 정책의 패러다임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독일 연방 교통 정책의 새 틀 역시 미래 사회의 폭증하는 교통 수요를 소화해 내면서, 동시에 친환경적 교통 대안을 통한 삶의 질 확보 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독일 신기본 조약의 중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혁신적 신교통 정책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 형성을 통해 교통 정책의 패러다임 변화를 유도하고, 교 통 정책의 위상을 재정립하였다. 둘째, 교통 정책을 국토 개발 계획 및 도시 계획과 통합 ․ 운영함으로써 교통 증가의 원인과 파급 효과를 정책 의사 결정 과정에서 충분히 고려하고, 교통 수요와 수단의 선택 행동을 정책적으로 유도한다. 셋째, 독일 연방정부의 신교통 정책은 개별 교통수단의 차원보다는 교통 시스템의 최적화를 목표로 한다. 20 세기, 산업의 고도 성장기에 만연하였던 도로와 자동차 중심에서 탈피하여, 환경 친화성이 뛰어난 철도나 내륙 해운의 역할을 강화하는 한편, 각 교통수단이 가진 장점을 살린 복합 운송 시스템 구축을 통해 교통 시스템의 최적화를 꾀한다는 것이다. 넷째, 교통인프라 투자 계획의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10년 단위의「연방 교통인프라 계획」을 법제화하 였다. 모든 교통인프라 프로젝트들에 대해 동일한 평가 지침에 따라 투자 우선 순위를 정하는 일종의 투자 기 본 계획으로, 실제 투자는 확보된 재원 범위에 맞춰 정해진 우선 순위에 따라 실현된다. 철도와 도로 부문에 50:50의 재원 배분을 원칙으로 하며, 독일 연방정부는 연방 예산에만 의존하던 관행을 벗어나 다양한 재정 조 달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 1. 교통 정책의 패러다임 변화 FES-Information-Series 새 천년에 접어들면서 교통 정책은 각국 정부의 중요 정책 분야로 부상하고 있다. 21세기의 경제 ․ 사회 변혁과 함께 수송 수요의 급격한 증가가 전망됨에 따라 수송 능력의 확보는 산업의 입지 장소로서 한 국가의 경쟁력을 좌 우할 뿐더러 국민 경제의 성장과 고용을 위한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 또한, 교통 분야는 인적 ․ 문화적 교류의 출 발점으로서 사회의 발전 형태에도 영향을 미치며, 환경오염과 직결되는 산업으로서 21세기 인류의 삶의 질은 환경 적으로‘지속 가능한’ 교통수단의 선택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교통 혼잡과 교통 사고 가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공기 오염의 주범으로 간주되는 이산화탄소 배출의 경우, 교통 분야가 차지하는 비 중은 전체 배출량의 25%, 도심권에서는 75%에 달하고 있어, 교통 정책의 근본적인 개혁이 촉구되고 있다. 또한, 온실가스를 매년 평균 5.2%씩 감축키로 한 교토 선언(1997.12)에 따라 이제 환경 친화적인 교통시스템의 구축은 단순히 도덕적인 요구에 그치지 않고, 각국의 교통 정책에 실제적인 구속력을 가하고 있다. 선진국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는 교통 정책의 새 틀은 미래 사회의 폭증하는 교통 수요를 소화해 내면서 동시 에 친환경적 교통 대안을 통한 삶의 질 확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한정된 재원 과 국토 면적, 그리고 환경 측면을 고려한 교통시스템의 최적화로 요약된다. 이는 결국 20세기, 산업의 고도 성장 기에 만연하였던 도로와 자동차 중심에서 탈피하여, 환경 친화성이 뛰어난 철도나 내륙 해운의 역할을 강화함으로 써 각 교통수단 간 균형적인 수송 분담을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프랑스, 오스트리아는 교통 인프라 투자에 철도와 도로의 비중을 7:3으로 유지하고 있으며, 국토 면적이 작은 스위스는 자국의 고속도로에 외국의 대형 화물트럭이 통행하는 것을 금지하는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국제 화물을 철도로 유도하고 있다. 독일의 경우 에도 동서독 통일을 계기로 국토개발 종합계획의 틀 속에서 개혁적인 교통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최근에는 연 방정부가 화물운송업계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대형 화물트럭에 대한 고속도로 이용료 징수 법안을 관철시 켰다. 우리나라 역시 21세기의 변화된 경제 ․ 사회 ․ 정치 환경에 부응하는 새로운 교통 정책의 구상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점이다. 교토 선언의 의무 부담을 준수하기 위해서는 에너지 절약과 온실가스 배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교통 정책의 개혁이 불가피하다. 우리나라는 개도국으로 분류되어 당장은 의무 부담에서 제외되었으나, 온실가 스 배출 규모가 크고(세계 11위) OECD 가입국인 우리나라에 대해 의무 부담이 부과될 것이 분명하다. 이 밖에 도 교통개발연구원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현재의 수송 분담 구조가 그대로 답습될 경우 2020년에는 교통사고 사망자, 에너지 소모, 도로 혼잡 등이 현재의 2배 이상으로 증가되어 삶의 질 저하가 우려되고 있다. FES-Information-Series 그러나 교통인프라의 구축은 장기간의 계획 및 실행 과정을 요하는 국가 전략에 속하기 때문에 교통 정책을 단시간에 선회하기 어렵다. 우리나라에서는 경제개발계획이 시행된 이래 도로 중심의 교통 정책을 추진한 결과, 여타 교통수단의 발전이 한계에 부딪쳐 있어 균형적인 교통 정책을 추진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철도의 경우 일 부 지선을 제외하고 식민 통치 하의 병참선 내지는 1차 산업 위주로 건설된 간선 골격이 그대로 유지되어 도시 및 산업기지 개발에 따른 통행과 물류의 다변화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또한, 해방 이후 철도 영업 킬로미터가 거의 증설되지 못해 선로 용량이 포화 상태에 이르다 보니 추가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교통수단 간 적정한 수 송 분담률을 유도하는 정책을 추진할 수 없었다. 그러나 2004년 4월로 예정된 고속철도의 운행 개시는 우리나라 철도 역사 100여 년 이래 시속 300Km의 초고속 대중교통 시대를 개막하는 동시에 선로 용량 측면에서도 막대 한 변화를 가져온다. 여객의 경우 3배, 화물은 8배 가까이 용량이 확대됨으로써 국가는 교통 정책의 새 틀을 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1990년 통일 직후부터 21세기의 경제적, 사회적 변혁을 고려한 새로운 패러 다임의 교통 정책을 수립 ․ 추진하고 있는 독일의 사례는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2. 독일연방 신교통 정책의 주요 컨셉트 가. 교통 정책 개혁의 필요성 현 연방정부의 교통 정책에 대한 중간 평가와 향후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교통보고서 2000」에 따르면, 향 후 물류 환경 변화 중 가장 특기할 사항은 수송 수요의 증가이다. 2015년 독일의 인구는 현재 8,000만에서 8,500만으로 증가하고, 연평균 2%의 경제성장률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되는데, 이는 결국 교통 수요의 증가로 이어진다. 유럽 단일시장, 유럽연합의 확대, 유럽 시장의 개 방과 세계화 추세 등도 교통량 증가를 가져올 것이며, 개인의 이동 욕구에 따른 수송 수요 역시 계속 증가 추세 에 있다. 따라서 2015년에는 1997년 대비 여객은 20%, 화물은 64% 증가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또한, 이 보고서는 적정한 교통 정책 및 투자 정책이 시행되지 않을 경우 독일의 교통시스템, 나아가서 전 반적인 국가 시스템이 붕괴될 수도 있다는 경고를 포함하고 있다. 화물부문 수송량은 2015년까지 약 6,000억 톤/㎞에 달할 것이며, 현 상태를 그대로 방치한다면 공로 화물수송량은 2,360억 톤/㎞에서 4,220억 톤/㎞로 증가 하는 반면, 철도 화물수송은 730억 톤/㎞에서 990억 톤/㎞로 소폭의 증가에 그칠 것이다. 이 경우 도로화물 장거 리 수송 분담률은 현재의 64%에서 70%로 증가하고, 철도의 수송 분담률은 20%에서 16%로 오히려 감소한다. [그림 1] 독일의 신 교통 정책 컨셉트 FES-Information-Series 이러한 전망은 교통 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보여준다. 도로 교통의 무절제한 증가에 따른 경제적 ․ 사회적 ․ 환경적 파급 효과를 차치하더라도 독일처럼 인구 밀도가 높고, 국토 면적이 한정적인 나라에서는 공간적인 차원에서도 6차선 내지 8차선 규모의 고속도로를 무제한 건설할 수는 없다. 그리고 무제한적인 교통인프라 건설은 한정된 자원인 국가 재정의 측면에서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보다 효율적인 네트워킹과 새로운 물류 컨셉트를 골자로 하는 교통의 혁명, 교통 정책 의 개혁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이다. 나. 신교통 정책의 목표 ■ 미래 사회의 수송 수요에 대응한 수송 능력의 확보 슈뢰더 현 정부가 제시하는 새 천년을 위한 교통 정책의 목표는 폭증하는 미래의 교통 수요를 감당할 수 있는 충분한 수송 능력을 확보하는 동시에 누적되어 온 교통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다. 기존의 교통 정책 하에서 누적되어 온 교통 문제들은 교통인프라의 건설만으로 해결될 수 없으며, 무제한적인 교통인프라 건설은 가능하 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교통량과 교통수단의 선택 행동은 교통 정책을 통해 유 FES-Information-Series 도될 수 있기 때문에 연방인프라 계획은 수송 능력의 확보 만큼이나 교통 유발 요인을 억제하는 방안에 비중을 두고 있다. 즉, 교통 정책을 국토개발계획 및 도시계획과 통합 운영하여, 교통 증가의 원인과 파급 효과를 정책 의사 결 정 과정에서 충분히 고려함으로써 불필요한 교통 수요를 원초적으로 억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각 교통수 단의 균형적인 발전을 토대로 미래 사회의 수송 수요에 부응할 수 있는 수송 능력을 확보하는 것이 교통 정책의 최우선 목표다. 우선 소량화, 고가화, 다빈도화 되고 있는 수송 수요의 특성상 미래 사회에서도 도로 교통의 중 요성은 매우 높을 것으로 예상되므로 공로 수송 능력은 유지, 확대되어야 하며, 항공 교통 분야의 경쟁력 역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게 연방 교통 정책의 기본 입장이다. 다만 현재와 같은 수송 분담 구조가 유지된다면 특히 환경의 관점에서 사회 전반의 붕괴로 이어질 우려가 높 기 때문에 철도나 내륙 해운의 역할 증대가 불가피하다는 인식 하에 각 교통수단의 장점들을 통합하여 교통시스 템의 최적화를 꾀하는 데 정책 목표를 두고 있는 것이다. ■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교통 정책 독일의 경우에도 교통 분야는 대기오염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다. 일산화탄소(CO), 산화질소(NOx), 탄화수 소(HC) 및 소립자 등 기타 공기 오염원의 배출양은 최근 들어 상당 부분 감소되었고, 앞으로 더욱 감소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산화탄소(CO 2 ) 배출은 매우 우려되는 부분이다. 독일 전체 CO 2 배출의 20% 정도가 교 통 분야에서 유발된다고 추산되며, CO 2 배출양은 1990년부터 1998년 사이에 교통량의 증가와 더불어 약 11% 증가되었다. 더욱이 교통 부문의 CO 2 배출은 계속 증가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어, 신 교통 정책의 최대 목표는 환경보호에 있으며, 이 중에서도 CO 2 억제 정책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예컨대, 토지 및 도시계획 시 교통량을 원초적으로 억제할 수 있는 방안, 교통정보 시스템의 도입으로 교통망 이용의 효율성 제고, 환경 친화적인 교통수단으로의 전환, 주민에게 친환경적 교통 이용에 관한 정보 제공, 교통 수단과 에너지 기술의 최적화, 자원 절약적인 수송 수단에 대한 인센티브 제고 등이 정책 내용에 포함되어 있다. 보다 적극적인 CO 2 절감 정책으로는 각 교통수단에 대한 투자 재원의 배분 원칙을 조정하는 것이다. 1998년 10월 20일자 연립내각 계약에는 철도와 도로에 대한 투자를 50:50의 동일 수준으로 배분한다는 원칙이 포함되어 있 으며, 이 원칙은 1999년부터 지켜지고 있다. 3. 독일 신교통 정책의 주요 내용 FES-Information-Series 가. 공정한 경쟁 환경의 조성: 대형 화물차량에 대한 고속도로 이용료 부과 독일은 1995년 1월부터 일명 「유로 비네트(Euro Vignette)」를 시행해 왔는데, 이는 독일이 네덜란드, 벨기 에, 룩셈부르크, 덴마크, 스웨덴 등과 함께 자국 및 외국의 12톤 이상 대형 화물차량에 대해 부과하던 시간제 고속도로 이용료를 말한다. 독일정부는 이를 보완하여 2003년부터는 주행 거리와 배기량을 고려한 고속도로 이 용료 제도를 시행키로 결정하였다. 연방정부는 새로운 제도의 시행 목적을 다음의 3가지로 밝혔다. 첫째, 공로 건설 및 유지 ․ 보수 비용에 대한 원인자 부담 원칙 강화: 예컨대, 축중 40톤의 대형 화물차량이 유 발하는 비용은 승용차의 6만 배 이상으로 조사되며, 타 교통수단과의 형평성을 위해서라도 배기량과 통행 거리 에 따라 대형 화물차량에 대해 고속도로 이용료를 부과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논리다. 이러한 원칙은, 도로 이용 료는 실질적인 도로 사용 비용을 기초로 산정되어야 한다는(EU 지침 1999/62/EG) 유럽연합의 교통 정책이나, 독일연방정부의 환경 정책에도 부합한다. 둘째, 교통수단 간 공정한 경쟁 환경의 조성: 현재의 교통시장 구조는 각 교통수단이 유발하는 환경 비용 등 외부 효과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결과라는 인식에서, 특히 화물 분야에서 각 교통수단 간에 공정한 경쟁 환 경을 조성함으로써 경쟁의 왜곡으로 인한 희소 자원의 과소비를 막는다는 것이다. 이는 화물 수송 분담률을 공 로로부터, 특히 철도와 내륙 해운으로 이전시키려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셋째, 고속도로 이용료의 자동 징수 기술 시장 선점: 독일은 세계 최초의 첨단 기술을 이용한 징수 시스템을 개발 ․ 도입함으로써 이 분야의 선두 주자 지위를 선점할 뿐 아니라, 다른 IT 분야의 혁신을 자극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화물차량 고속도로 이용료 제도를 통해 예상되는 수입은 연간 34억 유로이며, 이중 절반 이상이 교통인프라 건설 및 유지 ․ 보수에 쓰인다. 나머지는 관련 세금이나 유로 비네트 제도가 없어짐으로써 발생하는 수입 결손금 의 충당과 전자동 이용료 징수 시스템의 구축 및 운영을 위해 사용된다. 재원이 교통인프라에 투자되는 것을 보 장하기 위해 현재 교통인프라펀드회사가 설립 준비 중이며, 이용료 수입은「교통체증완화프로그램」(2003~2007 년)에 투자되기로 확정되었다. 병목 구간을 해소하고, 교통인프라의 용량 확대를 위해 마련된 이 프로그램의 실 행 계획에서 볼 수 있듯이 재원은 공로 뿐 아니라, 철도와 내륙 해운에도 투입되는 것이 특징이다. FES-Information-Series 도로 이용료는 주행 ㎞당 평균 0.15 유로이며, 축중과 배기량에 따라 0.10~0.17유로 사이에서 차별화 된다. 화물 차량 고속도로 이용료가 철도의 수송 분담률 제고에 기여하는 규모는, ㎞당 0.15 유로라고 보았을 때 60억 톤/ ㎞ 정도가 도로에서 철도로 전환되어, 철도의 수송 분담률은 6.7% 가량 증가하고, 공로의 수송 분담률은 2.1% 정도 감소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한편, 고속도로 이용료 제도 도입 시 이용료가 부과되지 않는 국도 등으로 우회할 가능성에 대비하여 국도 전 체에 대한 이용료 부과는 EU법 상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우회 차량이 증가할 위험성이 높은 일부 국도 구간에 대해 도로 이용료를 부과할 계획이다. 본 제도 도입에 대한 화물업계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고속도로 이용료 도입에 따른 화물업계의 실질 부 담은 매우 미미한 것으로 조사된다. 예컨대, 40톤 화물트럭이 10만 ㎞ 주행할 때, ㎞당 평균 0.15유로로 계산하 면 15,000유로를 부담해야 하는데, 이는 화물차량 운영 비용이 약 10% 증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업계는 이 추가 비용을 최종 소비자에게 전가하게 될 것이므로, 고속도로 이용료 부과로 인한 업계의 부담은 없다고 볼 수 있으며, 고속도로 이용료가 최종 소비자 가격에 미치는 효과도 0.15% 로 매우 미미한 수준으로 나타났다. 그 럼에도 화물업계의 반발을 막기 위해 연방정부는 세금 경감이나 보조금 제도 등 여러 가지 경제적 및 경제외적 혜택을 마련하고 있다. 나. 복합 운송 시스템의 구축 국제상공회의소(ICC: International Chamber of Commerce)의 정의에 따르면, 복합 운송이란, 적어도 2 종 류 이상의 다른 운송 수단을 이용한 화물 운송을 말하는데, EEC지침 92/106은 이 중에서도 공로상의 연계 수송 거리가 최단 거리일 경우만을 복합 운송으로 간주하고, 다양한 특혜를 부여한다. 즉, 전후방 단계의 공로 연계 수송은 선적 시에는 화물이 적재되는 장소로부터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물류기지까지의 연계 수송이거나 하 적 시에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물류기지로부터 화물이 하적 되는 장소까지의 연계 수송이어야 하며, 또는 내륙 항만 또는 항만의 물류기지까지 직선 반경 150Km 이내인 경우에 한한다. 복합 운송의 최우선 목적은, 각 교통 매체의 장점을 살려 교통시스템의 최적화를 꾀하는 데 있다. 즉, 철도와 해운을 통해 장거리 대량 화물을 보다 효율적이고, 환경 친화적으로 수송하고, 수송 시간과 문전 수송(door to door)의 장점을 가진 트럭을 이용해 복합 운송 터미널까지 화물을 연계 수송하는 것이다. 전문가 조사에 따르 FES-Information-Series 면, 복합 운송 시스템 하에서 철도 및 내륙 해운의 성장 잠재력이 가장 큰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현 슈뢰더 정부는 미래 사회의 폭증하는 수송 수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동시에 환경보호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복합 운송 시스템의 구축이 가장 적합하다는 판단 하에 이를 교통 정책의 핵심으로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복합 운송 정책의 실적은 기대 이하이다. 1999년 철도와 내륙 해운의 수송 분담률은 각각 14.3%와 4.5%로 복합 운송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낮은 실정이고, 오히려 전년 대비 명백한 감소를 나타냈다. 이러한 추세는 반전되었지만, 철도 화물 수송량을 현재의 730억 톤/㎞에서 2015년에는 1480억 톤/㎞로 2배 이상 증대한다는 목표를 달성하려면 현재의 실적이 매우 부진하다. 연방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복합 운송 시스템 추진 실적이 부진한 이유 중의 하나는, 복합 운송이 공로 등 단일 수송 수단을 이용하는 경우보다 복잡하고, 보다 수준 높은 물류 노하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즉, 복합 운송에는 해운업자, 철도회사, 철도인프라회사, 터미널 운영자, 운수업자, 트럭업자, 하적 및 서비스업체 등 다양 한 주체들이 관여하는데, 이들 개개의 능력뿐 아니라 각 주체들의 조율 및 협력이 전체 수송 품질에 영향을 미 친다. 따라서 연방정부는 복합 운송의 역할 증대를 위해 하드웨어뿐 아니라 소프트웨어 차원에서도 보다 적극적 이고 분명한 지원책을 시행할 계획이다. 연방정부는 복합 운송의 향후 전망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특히, 국제 운송 부문에서 복합 운송의 경쟁력이 높으며, 독일 내에서도 향후 괄목할 성과가 나타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공로 -철도 수송은 1999년 이후 상승세를 보이며, 향후 5년 동안 복합 운송의 증가율은 과거에 비해서 매우 큰 폭인 30% 이상에 달할 것으로 예측되어, 2005년 복합 운송 형태의 철도 수송량은 4,610만 톤으로 추정된다. 또한, 2015년에는 철도-공로를 이용하는 복합 운송이 연간 8천 970만 톤에 이를 것으로 조사되었다. 공로-내 륙해운 부문도 1996년~2000년의 4년 동안 거의 두 배로 향상되어 2000년에는 1,050만 톤을 기록하는 등 고무적 인 추세이다. 다. 철도 산업의 경쟁력 강화: 연방철도청의 구조 개혁 독일정부의 신교통 정책의 성패는 철도 산업의 역할 증대 여하에 달려 있다. 연방건교부의 조사에 따르면, 2015년까지의 사용자 비용 추세를 살펴보면, 타 교통수단에 비해 철도 분야가 가장 큰 생산성 향상 잠재력을 가 지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잠재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여야 하며 철도의 경제 성 제고가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FES-Information-Series 연방정부는 다양한 정책을 통해 철도의 수송 분담률 제고를 유도하되, 그 정책들은 철저히 시장경제원리에 부 합하는 것으로서, 철도시스템의 경쟁력 향상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엇보다 중요 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연방철도청의 구조 개혁이라고 하겠다. 철도청 구조 개혁은 3단계로 추진되었으며 주 요 골자는 정부 기업으로 운영되던 철도청을 민간 기업 형태(DB AG)로 전환하고, 철도운영회사에 경쟁 원칙을 도입함으로써 철도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다. 통일 직후인 1990년 독일연방철도청, 동독제국철도 및 서베를린 철도를 통합하는 1단계에서 시작하여 기업 부문과 공공 부문을 분리하는 소위 상하 분리와 기업 부문을 5개의 사업 본부로 구성된 주식회사로 전환하는 2단계를 1994년에, 그리고 이들 각 사업 본부를 독일철도지주회사의 지붕 아래 독립된 자회사로 개편하는 3단계 를 1999년에 끝마쳤다. 현재 독일철도주식회사의 주식은 연방정부가 100% 소유한 공사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철도 구조 개혁이 진행되어 온 지난 10년 동안 단거리 철도 여객 부문의 수송 분담률이 40% 이상 증가하였 고, 특히 인구 조밀 지역의 교통난 해소에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철도 구조 개혁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장거리 여객 부문에서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고, 화물 부문 의 수송 분담률은 1991년~1999년 사이에 오히려 감소하였기 때문이다. 원인은 여러 가지로 추정될 수 있지만, 한 가지 중요한 원인은, 1993년 철도 구조 개혁 2단계 추진 시 제시된 바와 같이 철도의 현대화 및 구조조정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매년 90~100억 마르크가 철도 인프라에 투자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철도인프라에 대한 투자는 1998년에는 57억 마르크에 불과 하는 등 1995년 이래 오히려 현 저하게 감축되었으며, 그 결과 현재 독일의 철도 네트워크 수준은 미래의 수요를 기대하는 품질로 소화해 낼 수 없는 상황이라는 진단이 내려지고 있다. 따라서, 신교통 정책이 성공적으로 수행되려면, 향후 상당 기간 동안 철도망, 특히 기간 철도망 강화를 위한 투자가 불가피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연방정부와 독일철도주식회사는 다양한 장기 투자 프로그램을 마련 하고 있는데, 2000년 10월 발표된「미래투자프로그램」에는 철도 부문의 투자 계획도 포함되어 있다. 이에 따르 면, 선로 건설을 위해 2001년에 추가로 20억 마르크가 투자되며, 2003년까지는 60억 마르크로 증가되어 연간 총 90억 마르크가 선로에 투자된다. 이러한 추가 재원은 선로망의 재건과 병목 구간이나 정체 구간 해소를 위해 쓰 이거나, 선로망을 유럽의 변화된 교통 흐름에 적합하도록 수정하는 데도 쓰인다. FES-Information-Series [그림 2] 독일연방철도청의 구조 개혁 과정 철도 인프라에 대한 투자 확대는 독일철도주식회사가 경영 합리화를 위한 자구 노력을 한층 강화하는 것을 전제 한다. 이를 위해, 연방 정부는 철도 사업의 구조 개혁이 지속되어야 하며, 철도 운영 부문의 경쟁 도입도 가속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독일철도주식회사와 협의 하에 철도 운영과 철도 인프라 부문의 분리를 더욱 강화하고 있 다. 철도 구조 개혁과 더불어 독일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철도 경쟁력 제고 방안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철도와 타 교통수단 사이에 공정한 경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유류 세율을 인상 ․ 조정하고, 대형 화물자 동차에 대해 고속도로 이용료를 부과하며, 이용료 수입의 일부는 철도 인프라 구축에 투자한다. ∙ 철도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 유럽 통합 선로망 구축과 관련한 기술적, 행정적 장애 요인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4. 독일연방 교통 정책의 도구 및 재정 도달 교통인프라 투자는 장기간의 사전 계획이 필요로 하며, 교통 정책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교통인프라 투자 계획의 안정성과 재정 확보를 해야 한다. FES-Information-Series 가. 연방 교통인프라 계획 대형 투자 사업들은 한정된 예산을 두고 경쟁을 하기 때문에 1970년대 중반 연방정부는 각 교통수단의 상위 에 설치된 투자 정책 도구로「연방 교통인프라 계획」을 법제화하였으며, 각 교통수단 사이의 관계를 고려하고 수단별 장점을 최대한 살린다는 데 최우선 목적을 두었다. 보통 10년 단위의 계획 기간을 가진 교통인프라 계획의 주요 내용은 시나리오 기법을 이용하여 여객 및 화 물 교통량을 예측하고, 각 프로젝트들을 국민경제적 관점에서 평가하여 객관적이고 공정한 투자 우선 순위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방 교통인프라 계획은 어디까지나 투자 우선 순위를 포함한 계획에 불과하며 재정 조달 방법이나 정확한 투자 실현 시기는 확정되지 않다. 각 투자 프로젝트는 해마다 배정되는 예산 범위에 따라 실행에 옮겨진다. 금년 말까지 적용되는 현행「연방 교통인프라 계획 1992」는 발효된 지 오래되다 보니 재원 조달방법이나 프 로젝트 비용 규모의 비현실성, 교통 수요 예측의 오류나 프로젝트 평가 방법 상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지적되 고 있다. 따라서 연방정부는 최근「연방 교통인프라 계획 1992」을 수정 ․ 보완하였다. 예컨대, 프로젝트 평가 방 법의 기본원칙은 그대로 두되 환경, 국토 이용, 도시계획 등의 새로운 시각을 반영할 수 있는 지표들을 포함시켰 다. 또한, 교통인프라 계획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미래 예측 시나리오와 교통 수요 예측 등도 새로운 조사를 통해 업데이트 하였다. 연방 교통인프라 계획은 연방정부의 교통 정책이 안정적으로 추진될 수 있는 중요한 법적 기반이며, 현 정부 의 통합 교통 정책이 성공적으로 추진되어 각 교통수단의 균형적인 발전을 통해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수송 수 요를 감당하여 국가 경쟁력을 보장하면서 동시에 환경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신 교통 정책이 안정적으로 추진될 수 있는 배경이 되고 있다. 나. 연방 교통인프라 계획의 재정 조달: 재원 확보와 새로운 투자 방안 모색 신교통 정책의 성패를 좌우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교통인프라 투자 재원의 확보이다. 연방정부는「연방 교통 FES-Information-Series 인프라 계획 1992」에 포함된 투자 계획 중 투자 규모가 비현실적인 일부 프로젝트의 투자 규모를 현실적인 수 준으로 수정하는 한편, 이에 대한 재정 조달 계획을 수립하였다. 신설, 확장 및 유지 ․ 보수를 포괄하여 2015년까 지 교통인프라 부문에 총 2,600억 마르크가 투자될 계획이다. 교통인프라 투자에서 중요한 정책 수행의 원칙은 철도와 공로에 대한 투자 규모를 50:50 동일한 수준으로 유 지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연방정부의 투자 프로그램 외에 전철, 철도 건널목 또는 소음 완화공사 등을 포함하면 투자 규모는 거의 같다. 현재 시행 중이거나 이미 확정된 교통 부문의 재정 계획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연방 교통인프라 계 획에 따라 1999년~2002년 사이에 투자된 총액은 647억 마르크, 약 900개 사업이 추진되었다. 그리고 2002 년~2004년에도 약 500억 마르크가 확보되어 장기 계획들이 실현될 수 있도록 보장해 준다. 연방 도로와 내륙 수로는 연방 소유이므로 신축이나 확대, 유지 ․ 보수를 모두 연방이 책임진다. 그러나 선로망과 철도 시설의 소유 권은 독일철도주식회사(DB AG)에 이관되므로, 철도인프라의 신규 및 확장 투자는 연방이 담당하고 유지 ․ 보수 비용은 100% 연방정부가 주식을 소유하고 있는 독일철도주식회사가 부담한다. 「미래투자프로그램」은 유럽의 차세대 이동통신인 UMTS-라이센스 매각 대금의 이자 수입을 재원으로 2001 년~2003년 사이에 40억 마르크를 교통, 연구, 교육 및 에너지 분야에 투자하였고 이 중 29억 마르크가 교통 분 야에 배정되었다. 그런데 이자 지급 절감으로 87억 마르크가 추가 확보되어, 60억 마르크는 철도망의 확대를 위 해, 나머지 27억 마르크는 도로에 배정되었다. 교통 체증 해소 프로그램」은 2003~2007년 사이에 총 74억 마르크가 배정되어 있다. 이 중 37억 마르크는 연 방 도로, 28억 마르크는 철도, 그리고 9억 마르크는 내륙 수로에 투자될 계획이다. 투자 재원은 2003년부터 징수 하는 대형 화물차량의 고속도로 이용료로 충당되는데, 심각한 병목 구간과 교통 체증을 해소하기 위해 쓰인다. 지난 2000년부터는 유럽연합 지방 발전 기금의 재원도 유치되었는데, 이는 주로 구동독 지역의 교통인프라 건설에 투입되고 있다. 이 기금은 특히 범유럽 교통망(TEN: Trans European Network) 구축과 도심과 부도심의 연계망 구축 사업에 투자 우선 순위를 두고 있다. 유럽연합 지방 발전 기금에 의거한 연방교통 인프라 투자 계획 2000~2006의 내역 은[표 2]와 같다. [표 1] 교통인프라 투자 내역(1999년~2002년) (단위: 10억 마르크) 구분 연방철도 [이중 DB AG 자체투자] 유럽연합 재원 연방장거리도로 유럽연합 재원 연방내륙수로 유럽연합 재원 최우선시행사업 신규및 확장사업 유지 ․ 보수 13.4 14.7 0.24 17.9 13.8 0.68 1.2 2.6 0.02 우선 시행사업 1.3 1.3 0.25 총투자 규모 29.4 (3.6) 0.24 33.0 0.68 4.05 0.02 총액 33.44 31.10 2.85 67.39 ※ 주: 유럽연합의 재원은 유럽연합지방발전기금(EFRE: Europ ä ischer Fonds f ü r regionale Entwicklung)에서 출연됨. ※ 자료: 연방건설교통부: Verkehrsbericht 2000, 52쪽 FES-Information-Series 독일의 경우, 연방교통 인프라에 대한 투자는 거의 전적으로 연방 예산으로 조달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 나 특히 통독 이후 교통인프라 구축의 재정 조달을 전적으로 공공 예산에 의존하는 것은 한계가 있음이 분명해 졌다. 따라서 연방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교통인프라 재정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동 위원회가 제 안하는 새로운 재정 조달 방안들을 적극 수용한다는 방침이다. [표 2] 유럽연합 지방발전기금에 의거한 연방교통 인프라 투자계획(2000~2006) (단위: 10억 마르크) 구분 총투자 규모 유럽연합 지방발전 기금 연방 철도 2665.93 연방 장거리 도로 연방 내륙수로 3481.67 25.00 총액 6172.60 1060.53 2036.33 16.82 3113.68 ※ 자료: 연방건설교통부: Verkehrsbericht 2000, 53쪽 특히, 구 동독지역의 프로젝트에 유럽연합이 제공하고 있는 교통인프라 구축을 위한 재원을 적극 유치할 계획 이며, 민간투자방안도 확대할 계획이다. 최근 독일 총선의 주요 논점인 단일 세율(Flat Rate) 개혁안 김 유 찬, 계명대학교 경영대학 세무학과 교수 2005년 10월 󰠲󰠲󰠲󰠲󰠲󰠲󰠲󰠲󰠲󰠲󰠲󰠲󰠲󰠲󰠲󰠲󰠲󰠲󰠲󰠲󰠲󰠲󰠲󰠲󰠲󰠲󰠲󰠲󰠲󰠲󰠲󰠲󰠲󰠲󰠲󰠲󰠲󰠲󰠲󰠲󰠲󰠲󰠲󰠲󰠲󰠲󰠲󰠲󰠲󰠲󰠲󰠲󰠲󰠲󰠲󰠲󰠲󰠲󰠲󰠲󰠲󰠲󰠲󰠲󰠲󰠲󰠲󰠲󰠲󰠲󰠲󰠲󰠲󰠲󰠲󰠲󰠲󰠲󰠲󰠲󰠲󰠲󰠲󰠲󰠲󰠲󰠲󰠲 지난 9월 중순에 있었던 독일의 조기 총선에서 주요 논점으로 단일 세율안이 부각되었다. 이는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인 키르히호프 교수가 주도한 것으로, 그는 2001년 독일 소득세 제 도의 근본적인 변화를 지향하는 개혁안을 발표한 바 있다. 이 세제 개혁안은 소득세의 모든 감면 조항을 삭제하여 증가한 조세 수입은 세율을 25% 수준으로 낮추어 납세자들에게 돌려주 자는 것이다. 또 가족과 자녀 양육을 위한 최저 생계비는 소득세에서 더 큰 폭으로 공제하여 가족 형성에 더 우호적인 조세 정책을 제시한다. 독일 사회에서는 키르히호프 교수의 제안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되고,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제대로 진단하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전반적으로 이 개혁안에 대하여, 혹은 최소한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공감하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조세 감면 규정의 삭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이 세제 개혁안에 대한 독일 학 계의 기대는 이것을 통하여 조세 제도가 경제 주체의 활동에 중립적으로 작용하면, 이로 인해 추가적인 성장 동력이 발생하지 않겠느냐는 것과 세율이 낮아지면 탈세가 줄지 않겠느냐 것이 다. 물론 이 효과가 어느 정도로 나타날지 현재로서는 예측하기 어렵다. 종합해 보면, 독일의 단일 세율안은 조세의 형평성 문제와 적정 세수 확보의 문제, 그리고 투자에 비우호적으로 작 용할 우려 때문에 세제 개혁에서 대안으로 삼기에는 아직 부족해 보인다. 󰠲󰠲󰠲󰠲󰠲󰠲󰠲󰠲󰠲󰠲󰠲󰠲󰠲󰠲󰠲󰠲󰠲󰠲󰠲󰠲󰠲󰠲󰠲󰠲󰠲󰠲󰠲󰠲󰠲󰠲󰠲󰠲󰠲󰠲󰠲󰠲󰠲󰠲󰠲󰠲󰠲󰠲󰠲󰠲󰠲󰠲󰠲󰠲󰠲󰠲󰠲󰠲󰠲󰠲󰠲󰠲󰠲󰠲󰠲󰠲󰠲󰠲󰠲󰠲󰠲󰠲󰠲󰠲󰠲󰠲󰠲󰠲󰠲󰠲󰠲󰠲󰠲󰠲󰠲󰠲󰠲󰠲󰠲󰠲󰠲󰠲󰠲󰠲 1. 단일 세율안의 제안 FES-Information-Series 2005년 9월 18일에 치러진 독일의 조기 총선에서 기민/기사련(CDU/CSU) 연합의 수상후보 앙 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총재는 재무부 장관 후보로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역임한 하이델베르 그 대학 법학부의 파울 키르히호프(Paul Kirchhof) 교수를 지명하면서 선거전에서 조세 개혁을 핵 심 주제의 하나로 선택하였다. 키르히호프 교수는 수년 전부터 경제학자, 세무 자문가, 세무 공무 원 등으로 구성된 조세 전문가 그룹을 이끌며 독일의 소득세 제도의 근본적인 변화를 지향하는 개혁안을 2001년‘칼스루헤안’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2002년 당시 칼스루헤안은 소득세 의 누진 구조를 대폭 완화하여 15%의 최저 세율에서 시작하여 35%의 최고 세율로 끝나는 세율 구조를 제안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안을 더 발전시켜 기업과 개인에 대한 25%의 단일 세율을 제 시하였다. 현재의 소득세 최고 세율 40%와 비교하면 이 단일 세율안은 정부의 재정 적자를 심각 하게 악화시킬 수 있는 것이나 키르히호프 교수는 동 조세 개혁안에서 세율 인하와 병행하여 자 가 주택 구입 보조금, 통근 비용 공제 등 418가지에 달하는 소득세법 상의 여러 가지 조세혜택을 삭제하여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독일 총선의 결과는 어느 정당도 승리하였다고 보기 어려운 백중지세를 보여주었다. 선거 과정에 서 유권자들은 단일 세율안을 그다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고, 이를 프로그램으로 내세운 기민/기사련 연합에게 감표의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기민/기사련 연합이 향후의 연정 협상에서 주도권을 잡고 연방수상의 자리를 차지한다 하더라도 단일 세율안이 현재의 기본 구 조를 유지하며 실현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 단일 세율안은 향후의 조세 정책 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보이며 따라서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 다. 2. 단일 세율안의 배경 가. 경제의 글로벌화와 조세 경쟁의 추세 경제의 글로벌화 추세에서 자본 이동에 대한 제약이 사라지면서 자본은 수익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전 세계에서 자원의 배분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글로벌화 시대에는 자본이라는 생산 요소뿐만 아니라 노동력, 특히 고급 인력에 대한 수요도 국제적으로 동질화되면서 인력의 국제적 이동도 과거보다 훨씬 활발해진다. 결국 자본과 노동력이라는 근본 적인 과세 원천이 국가들 간 과세 부담의 차이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낮은 세율을 찾아 빠 FES-Information-Series 르게 국경을 넘나들므로 개별 국가들은 이들을 유인하기 위하여 경쟁적으로 세율을 인하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개별 국가들 간의 세제 경쟁은 EU 회원국들 간의 법인세 및 소득세 분야 의 최고 세율 인하 추세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글로벌화 된 세계에서 이동이 자유로운 세원에 대해 높은 한계 세율로 과세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나. OECD 회원국들의 소득세 제도 개혁안 중 단일 세율안의 위치 자본과 이동이 자유로운 인력에 대한 고율의 과세가 어려워지면서 개별 국가들은 일자리를 창 출할 수 있는 자본의 해외 유출을 우려하여 우선 자본과 관련된 법인 세율과 이자 소득세율을 그리고 점차 고급 인력과 관련된 소득세의 최고 세율을 낮추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학자들이 전 통적으로 이상적인 소득세 체계라고 생각하던 누진적 종합 소득과세의 체계가 흔들리게 되었 다. 소득세야말로 전체 조세에서 가장 핵심적인 세목이므로 이는 많은 나라에서 조세 체계 전체 의 틀을 바꾸는 일이 되었다. 종합 소득세의 대안으로 가장 먼저 부각되어 채택된 것은 현재 북유럽 국가들을 비롯하여 오스트 리아, 벨기에, 이탈리아 등에서 시행하고 있는 자본과 근로소득의 분리 과세(Dual Income Tax) 제 도이다. 이 제도는 이동성이 강한 이자 등과 같은 자본 소득에 대하여는 저율의 단일 세율로 과세하 고 이동성이 약한 근로소득에 대하여는 누진율 구조를 가진 상대적으로 고율의 소득세 체계를 적용 하자는 것이다. 이 제도가 과연 향후에 실현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는 의문이지만 미국에서는 그 보다 더 근본적 인 소득세 개혁안이 제시되고 있다. 즉, 자본의 이동성 때문만 아니라 극단적으로 복잡한 미국의 소 득세 제도에 비추어 소득세를 아주 폐지하거나 정부의 재정을 전적으로 소비세에 의존할 정도로 소 비세를 강화하여 소득세의 의미를 약화시키자는 것이다. 이는 과거에도 학자들 간에 많은 논란을 일 으키면서 좋은 반응을 받았으나 결코 실현된 적이 없는 칼도르(Kaldor)라는 학자의 지출세 (Expenditure Tax)와 같은 맥락의 제안이다. 소비에 대해서는 창출된 소득 중 소비 부분만 과세하 고 저축 부분은 비과세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므로 소비를 억제하고 사회의 자본 축적을 장려하여 경제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 제도가 실현되지 않은 것은 이것이 가져올 수 있는 분배의 역진성 때문이라고 보인다. 즉 고소득층은 소득 중 작은 부분만 소비하므로 세 부담이 가벼워지게 되고, 역으로 저소득층의 세 부담은 가중될 것이다. 기존의 누진적 종합 소득세에 대한 세 번째의 대안이 단일 세율 개혁안이다. 이 개혁안은 키르 FES-Information-Series 히호프 교수가 제안하기 전에 이미 미국에서 제안, 실현된 적이 있다. 그러나 미국은 단일 세안을 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누진 세율 구조를 재도입하였다. 세율 구조가 단일세로 되어 있어도 기 초 공제의 수준이나 기타의 다른 요소 때문에 미국에서 실현된 단일 세안과 이번에 독일에서 제안 된 단일 세안의 성격은 상당히 다르다. 독일의 단일 세율안은 상당한 수준의 기초 소득공제를 제 공하는 단일 세율안이지만 어느 정도 간접적인 누진율 구조를 가지는 제도이다. 여하튼 단일 세안 은, 미국의 소비세를 지향하는 근본적 조세 개혁안이나 북구 국가들의 자본과 근로소득에 대한 분 리 과세 제도에 비하면, 전통적 의미의 누진적 종합 소득세에 상대적으로 가장 근접하는 개혁안으 로 평가받고 있다. 3. 단일 세율안의 주요 내용 가. 조세 감면의 대폭적 폐지를 통한 과세 기반 확대와 세율 인하 키르히호프 교수의‘칼스루헤안’은 소득세법 및 법인세법에 규정된 여러 가지 조세 감면 혜택을 기본적으로 경제 주체의 자율적인 의사 결정에 정부가 비중립적으로 개입하는 통로로 파악한다. 이러한 조세 혜택을 세법에서 모두 제거하면 경제 전체에서 자원 배분의 효율성이 높아질 뿐만 아니라 과세 기 반이 크게 향상되면서 정부의 조세 수입이 줄지 않으면서 세율을 낮게 할 수 있는 큰 여력이 생긴다고 보는 것이다. 키르히호프 교수는 여러 차례 납세자들의 사유 재산에 과도하게 개입하여 소득 및 재산 상태 에 근본적인 변화가 야기될 정도로 심하게 과세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판결한 헌법재판소의 사례 를 상기시키며, 칼스루헤안은 과도한 과세 금지와 조세 평등주의 원칙을 같이 실현하는 방안으 로, 과세 기반에서 제외하는 모든 예외 조항을 삭제하여 증가한 조세 수입은 세율을 25% 수준으 로 낮춤으로서 납세자들에게 돌려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투자자들에게 독일의 산업 입지 를 상대적으로 강화시켜주며, 아울러 개별경제 주체에게 조세의 중립성을 보장하여 경제의 효율 성이 전체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개별 종류의 조세 혜택이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것 이라면, 향후에는 이를 조세 혜택으로서가 아니라 예산 확정이라는 의회의 민주적 절차를 거쳐서 결정하여 보조금으로 지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칼스루헤안은 소득세법 제3조의 69개 항목과 3b조에서 규정된 수많은 비과세 및 조세혜택 항목 뿐만 아니라 사업자가 당연하게 인정받는 감가상각 비용 중에서도 정율법 감가상각은 정액법에 비 하여 그 자체에 조세 혜택이 내재되어 있다고 보고 이러한 정율법의 감가상각도 허용하지 않아야 FES-Information-Series 한다고 주장한다. 이 안은 삭제하려는 조세 혜택 중 특정한 저축 이자에 대한 비과세도 당연히 포 함시키고 있으나 예외로 개인이 지출(혹은 저축)하는 노후 생활을 위한 연금 보험료는 소득공제 를 하도록 제안하고 있다. 나. 소득 종류의 단일화 칼스루헤안은 현재의 소득세법에서 구분하는 7가지 소득의 종류를 단일화한다. 이를 통해 소득 의 구별과 함께 발생하던 세 부담의 차이를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소득의 종류를 나열하는 규정을 없애면서 하나의 과세 대상을 상태적, 행위적 그리고 결과적 사실로만 규정한다. 따라서 과세 대상은 모두 수입을 위해 노동이나 자본을 투입한 취업 활동(행위적 사실)의 소득일 뿐이다. 또 시장과 연결되어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예를 들어 사업체나 근로자의 직장과 같은, 취 업 활동의 기반(상태적 사실)을 통해 소득이 있는 사람에게만 과세된다(결과적 사실). 영업 활동과 기타 소득 창출 활동의 구분이 없다면 영업세도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독일 기초 지방자치단체(Gemeinde)의 가장 큰 세수입인 영업세가 사라지는 경우, 칼스루헤안은 각 기초 지 방자치단체가 구역 내 주민에 대한 소득세의 기초 지방자치단체 분에 대하여 징수율을 자율적으 로 결정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다. 최저 생계 비용에 대한 소득공제와 자녀 공제 최저 생계비에 해당하는 소득은 납세 의무자와 그 가족이 기초 생활비로 써야 하는 부분이므로 기초 공제로서 과세에서 제외해야 한다. 최저 생계비 수준은 일반적인 경제 상황과 공동체에서 인 정하는 최소한의 필요에 따라 결정되는데 칼스루헤안에서는 1인당 연간 10,000유로 정도를 최저 생계비로 보고 기초 공제를 하고 있다. 또 개인의 질병이나 장애로 인한 추가 생계비는 조세 분야 에서 반영되는 것보다 예산 지출 면에서 고려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수 준의 기초 공제는 독일 내에 거주하는 무제한 납세 의무자에게만 허용해야 하며, 해외에 거주하며 독일의 원천 과세 대상인 제한적 납세 의무자에게는 허용하지 않는다. 최저 생계비는 납세 의무자 의 필요만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와 자녀도 포함된다. 특히 부모는 자녀 양육의 의무가 있 으며, 이에 대한 지출 필요성도 최저 생계비에서 인정된다. 칼스루헤안은 자녀 1인당 8,000유로의 기초 소득공제를 적절한 수준으로 인정함으로서 4인 가족의 경우 총 36,000유로를 공제해 준다. 라. 법적 형태에 대한 중립적 과세 현재는 법적 형태별로 기업에 대한 과세가 구별된다. 개인 기업의 소득은 개인에게 귀속시켜 과 FES-Information-Series 세하고, 법인에 대한 과세는 별도로 상대적으로 낮은 법인세율로 과세한 다음 배당에 대하여는 주 주 단계에서 추가적으로 과세한다. 이러한 구별은 결과적으로 기업의 법적 형태에 따른 세 부담의 차이를 야기한다. 칼스루헤안은 모든 자연인이나 법인을 단일 세율로 과세하고 법인체에서 받는 배당은 이미 과세된 것이므로 이중 과세를 피하기 위하여 더 이상 과세하지 않는 것을 제안한다. 4. 독일 학계와 사회의 반응 가. 전반적인 평가 독일의 기업계는 키르히호프 교수의 칼스루헤안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되고, 어떤 경제적 영 향을 미칠지 제대로 진단하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전반적으로 동 개혁안에 대하여, 혹은 최소한 개 혁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공감하는 분위기이다. 세 부담이 같은 수준에 머무르더라도 조세 제도가 단순해진다는 것, 그 자체가 기업에게는 부담을 크게 줄여주는 것이라고 기업계의 한 인사는 말하 고 있다. 함브르그 경제연구소(HWWA) 소장인 슈트라웁하르(Straubhaar) 교수는 이 세제 개혁안을 극찬하며, 이 세제 개혁을 통하여 정부는 본연의 과제에 집중하고 민간의 성장 동력을 풀어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소득세 최고 세율을 EU의 회원국들과 비교할 때, 독일의 위치는 이 안이 실현 된다면 최고 높은 세율 수준의 그룹에서 하루아침에 중간 수준으로 내려간다. 이와 같은 변화는 동 세제 개혁안이 수반할 다른 측면(예를 들어, 조세 감면의 삭제, 감가상각 규정의 변화 등)으로 인한 효과를 무시하고 보면 기업이나 개인 납세자 모두가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 한 개별 규정들의 변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 세제 개혁안이 실 현되면 소득 분배에 역진적으로 작용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며, 또 정부 활동에 필요한 충분한 조세 수입을 확보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나. 투자 및 경기에 미치는 효과 은행의 한 경제 분석가는 자녀를 둔 가족에게 소득공제를 큰 폭으로 허용하는 것이 경기 회복에 매우 유용할 것으로 판단한다. 이는 자녀가 많은 가족은 소비 성향이 높기 때문이다. 반면에 고소득 층의 세 부담을 줄여주는 것은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경제성장의 동력이라고 보는 투자재 수요에 대해 키르히호프 교수의 제안이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평가하기 어려우나, 그가 제안하는 정율법적 감가상각을 허용하지 않으면 직접적으로는 설비투자가 많은 기업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하고 투자에 해롭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이는 슈뢰더 정부가 투자 를 촉진하기위해 법인세율을 낮추는 대신에 감가상각 규정을 어렵게 하여 세수를 충당한 것이 투자 FES-Information-Series 에 전혀 이롭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명확해 진다. 기업에 적용되는 세율은 법인의 이익에 모두 적용 되는 것에 비하여 감가상각 규정은 기업의 설비투자 규모에 비례하여 영향을 주므로 세율 인하로 인한 세수 손실을 감각상각 규정을 죄어서 충당한다면 결국 설비투자를 적게 하는 기업이 유리하고 설비투자를 많이 하는 기업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설비투자가 경제 전체에 주는 파급효과를 감안 하면, 동 세제 개혁안은 결국 정부가 일반적으로 지향하는 경제 활성화라는 정책 목표와는 반대의 결과에 도달할 수도 있다. 다. 세수 효과에 대한 평가 칼스루헤안이 정부 재정에 어떻게 작용할 지는 불확실하다. 조세 감면을 줄이고 세율을 낮추는 것 이 세수에서 어떤 숫자로 나타날지 모르는 것은 이 안 자체가 아직 미완성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기업에 대한 과세 분야에서는 아직 많은 부분에 최종 내용이 제시되지 않았다. 이 단일 세율안이 기업과 개인 납세자들에게 전체적으로 세 부담을 경감해 줄 것인지도 분명하 지 않다. 그러한 결과가 나온다면 정부의 재정 적자 폭을 더 확대하는 것이므로 독일 정부의 현재 입장에서 지향하는 방향도 아닐 것이다. 라. 소득 분배의 문제 칼스루헤안이 독일 사회의 여러 계층에 미치는 세수 경감 효과 및 소득분배를 생각해 보자. 자 녀가 있는 가족에게는 이 안이 경제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현재의 자녀 1 인당 소득공제액이나 자녀 보조금(자녀 1인당 연 1,848 유로)에 비하여 훨씬 높은 수준인 8,000 유 로를 소득공제 받는다. 반면에 이 안에 따라 저축에 대한 이자소득공제가 삭제되면 소액 저축자에 게 불리하게 된다. 또 소액 투자자가 장기간 보유한 주식의 양도 차익에 대한 비과세가 삭제되면 이 또한 소액 투자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고소득 계층은 우선 세율 면에서 경제적으로 유리하 다. 그러나 고소득 계층 중 현재 여러 가지의 조세 혜택을 잘 이용하던 납세 의무자의 경우 이 혜 택이 사라지면서 경제적으로 불리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세제 개혁안이 기 업에게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법인세율은 현재의 25%가 그대로 유지되어도 동 개혁 안에 따라 영업세가 없어지면 세율 면에서는 기업에 매우 유리하다. 그러나 이 경우도 여러 가지 조세 감면이 삭제되고 감가상각 규정이 엄격해 지면 최종 결과가 기업에게 세금 부담을 줄여주게 될지 혹은 그 반대의 결과가 나타날지는 두고 보아야 한다. 킬의 세계경제연구소 소장인 데니스 스노우어(Dennis Snower) 교수는 칼스루헤안이 실현된다면 FES-Information-Series 기초 소득공제를 소득 상황을 고려한 보조금으로 대체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극빈층의 경우 공 제될 소득이 부족하다면 기초 소득공제는 도움이 되지 않으며, 이는 극빈층에 대한 보조금 없이는 적정한 수준의 소득 재분배가 이루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종합적으로 그리고 소득 계층별로 보면, 단일 세율안은 4인 가족에 대한 36,000유로의 인적 공 제를 함으로서 소득세로서 갖추어야 특징인 누진성을 간접적으로 확보하고 있다. 이 수준의 인적 공제가 허용되는 경우, 독일의 저소득층은 현재보다 과세상 유리해진다. 그러나 단일 세율안이 실 현되는 경우 중간 계층과 고소득층 사이의 조세 형평성은 더 악화될 것이다. 마. 과세 소득의 정의 일반적으로 공정한 과세는 어느 나라에서나 개인의 경제 능력에 입각하여 과세하여야 한다는 입 장(Leistungsf ä higkeitsprinzip)을 취한다. 칼스루헤안을 보면, 공정한 과세는 시장소득을 과세하는 것 이라는 어느 나라에서도 택하지 않은 과세 소득을 제한하고 있다. 이 안은 나아가 지속적으로 취 득하는 시장 소득이 과세 대상 소득이라는 더 제한적 입장을 취하는데 시장에 일회성 소득(예를 들어, 부동산 양도 차익)도 흔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또 칼스루헤안은 시장 소득이 아닌 정부의 보조금도 과세 소득에 포함시킴으로써 시장 소득 이론을 스스로 지키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러한 논리적 정당화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 안이 지향하는 과세 소득의 범주는 전체적으로 적 절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바. 세제 간편화와 징수 비용의 문제 이 개혁안은 현 소득세법의 78개 조를 단지 21개의 조로 간편화했다. 또 그 중 20개 조는 단 지 4개 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세법의 적용에서 납세자나 세무 공무원이 힘들어하는 것 은 그 세법이 길고 체계가 없을 경우뿐만 아니라 세법이 짧은 추상적인 개념으로 채워져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세법이 추상적인 경우 그 하위 법령이 구체적인 내용을 채워야 하므로 결 국 관료들의 재량권에 권한이 위임되면서 세법과 하위법령을 통틀어서는 결국 간편화의 목표도 도달하지 못하게 된다. 오히려 불명확한 법령으로 인하여 더 높은 징수 비용을 초래하는 결과가 생기게 될 것이다. 사. 연금에 대한 과세 취급 연금 보험료에 대해서는 소득공제를 해주고 향후 연금을 받을 때 과세 소득에 포함시키도록 되 FES-Information-Series 어 있다. 이는 소득이 애초에 발생했을 때 과세하지 않고 미루는 것이므로 연금 가입자에게 이 기 간에 발생한 이자만큼 비과세 혜택을 주는 것과 동일하며 이는 모든 소득에 대하여 예외 없이 과 세한다는 칼스루헤안의 원칙에 모순된다. 5. 맺으며 독일 사회가 칼스루헤안에 갖는 기대는 이 개혁안을 통하여 조세 제도가 경제 주체의 활동에 중립적으로 작용하면서 여기서 추가적인 성장 동력이 발생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과 세율이 낮아 지면 탈세가 줄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탈세 이론에서 볼 때 세율이 낮으면 탈세로 인한 기대 효용이 감소하므로 탈세는 줄어든다. 물론 이 효과가 어느 정도로 나타날 것인지도 현재로서는 예측하기 어렵다. 결론적으로 종합해보면, 독일의 단일 세율안은 조세의 형평성 문제와 적정 세수 확보의 문제, 그 리고 투자에 비우호적으로 작용할 우려 때문에 세제 개혁에서 대안으로 삼기에는 아직 부족해 보인 다. 폴머 사건을 계기로 본 독일연방의원의 부업 규정에 관한 논란 조 현 옥, 여성정치세력민주연대 대표 2005년 6월 󰠲󰠲󰠲󰠲󰠲󰠲󰠲󰠲󰠲󰠲󰠲󰠲󰠲󰠲󰠲󰠲󰠲󰠲󰠲󰠲󰠲󰠲󰠲󰠲󰠲󰠲󰠲󰠲󰠲󰠲󰠲󰠲󰠲󰠲󰠲󰠲󰠲󰠲󰠲󰠲󰠲󰠲󰠲󰠲󰠲󰠲󰠲󰠲󰠲󰠲󰠲󰠲󰠲󰠲󰠲󰠲󰠲󰠲󰠲󰠲󰠲󰠲󰠲󰠲󰠲󰠲󰠲󰠲󰠲󰠲󰠲󰠲󰠲󰠲󰠲󰠲󰠲󰠲󰠲󰠲󰠲󰠲󰠲󰠲󰠲󰠲󰠲󰠲󰠲󰠲󰠲󰠲󰠲󰠲󰠲 지난 1월 독일에서는 당시 녹색당 외교 정책 대변인이었던 루드거 폴머의 부업 사건이 터지 면서 연방의원들의 겸업 및 부업 문제가 논란의 주제로 떠올랐다. 당내 외무통으로 알려진 폴 머가 연방인쇄소 국제 업무의 자문을 맡고 있었으며 해외 여행 중 이 회사를 위해 일을 한 것 이 밝혀지면서 정치인들의 부업이 어디까지 정당한가, 다른 형태의 불법 로비는 아닌가, 현재 허용되어 있는 겸업, 부업, 그 소득액을 어느 선까지 밝혀야 될 것인가를 놓고 각 당별로, 의 원별로 다양한 의견을 피력했다. 정치인도 한 개인이기 때문에 그들의 개인정보를 보호해야 하고 의원들도 사적인 영역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주장과 연방의원들이 누구를 위해 얼마나 수입을 올리고 있는가를 아는 것은 유권자들의 권리이며, 나아가서는 정치인의 잘못된 영향력 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는 주장이 맞섰다. 그 후 폴머는 당직을 사임하였고, 연방의원의 직 업에 관한 규정은 의원들의 겸업과 부업의 수입을 당 의장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합의를 이끌 어 냈으며 결정을 앞두고 있다. 이로써 독일 연방의원들의 부업에 관한 규정은 더욱 강화된 셈이다. 정치인들의 재산 상태나 수입, 또는 정치 후원금 등은 정치인들의 영향력이 개인의 경제적 이익과 어떻게 잘못 연결될 수 있는가를 알아보는 잣대들이기 때문에 언제나 민감한 사안이 며, 이는 독일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 들어가는 말 FES-Information-Series 정치인들의 재산 상태나 수입, 또는 정치 후원금 등은 정치인들의 영향력으로 인해 그들이 부당한 이득을 얻을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잣대이므로 언제나 민감한 사안이다. 특히 정치인이 의회 업무가 아닌 다른 직업을 갖고 있으며, 그 일이 자신의 정치직과 관련 있는 일이라면 그 수입은 과연 정당한 노동에 대한 대가인가 아니면 부당한 로비 자금인가라는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한국에서도 정치 인들의 재산이 얼마인가, 축적 과정은 어떻게 되는가, 출처를 알 수 없는 수입이 있는가 등이 매우 중 요한 사안이며, 이것이 불투명할 때는 여론의 저항에 부딪혀 낙마하기도 일쑤다. 물론, 사안이나 조건으로 볼 때 한국과 다르지만 이 문제는 독일에서도 한참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지난 1월 당시 녹색당 외교 정책 대변인이며, 전 주 장관이던 루드거 폴머(Ludger Volmer) 의 원의 부업 스캔들을 놓고 연방의원들의 겸업과 부업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는 주업과 부업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문제 제기와 연방의원직 외의 종사하는 일에 대해서만 공개할 것인가, 아니면 그 수입까지 공개해야 하는가, 더 나아가 비자 사건과 함께 녹색당에 대한 공격으로까지 비화되어 한바 탕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규정을 강화하는 것으로 끝맺음되고 있다. 여기서는 폴머 사건을 계기로 불 거진 의원들의 겸업 문제를 중심으로 이를 둘러싼 공방을 살펴보고자 한다. 겸업, 부업, 수입 공개, 애매한 규정들- 사건의 발단 독일 연방의원들의 겸업이나 부업은 법적으로 허용된다. 그러나 겸업과 부업의 경계가 명확하 지는 않다. 예를 들어, 한 연방의원이 과거에 변호사였다가 의원직과 동시에 변호사 업무를 계속 하면 겸업이 되는 것이고, 폴머의 경우에는 의원이 된 후에 국영 기업체였다가 현재는 민영화된 연방인쇄소의 국제 업무에 대한 자문을 하고 있었으니 부업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겸업일 경우에 는 자신의 수입을 국회에 신고하지 않아도 되지만 부업일 경우에는 수입을 신고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겸업과 부업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아 논란이 일고 있고, 이 두 가지를 모 두 신고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주장도 있다. 폴머의 경우, 공무 여행 중 자신의 부업 업무를 같이 본 것이 문제가 되었다. 폴머는 신테시스 (Synthesis)라는 자문회사의 대표로, 이 회사의 주요 고객은 연방인쇄소다. 그는 외국에서 독일 여권 을 만드는 업무에 관해 자문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독일 연방인쇄소는 여러 업무와 함께 비자 문서 를 찍어내는 일도 맡고 있다. 폴머는 의원 재임 중 이 회사의 일로 2년간 두 번이나 남아프리카와 FES-Information-Series 베트남에 갔다는 사실을 털어 놓았는데 이 말도 질문이 여러 번 반복된 후에 나온 것이어서 의심을 가중시켰다. 신테시스사에서 폴머가 했던 일은 의회의 규정을 어기는 불법은 아니어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 중 론이다. 폴머 의원에게 주로 가해지는 비판은 주 장관직을 맡았었고, 현재 당의 외교 정책 대변인을 맡은 연방의원이 민영화된 인쇄소를 위해 외국에서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정당한가라는 것이다. 그 는 옛날 주 정부에서 일할 때 만난 사람들을 연방인쇄소의 자문 업무를 할 때도 만났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과거의 연줄을 그대로 이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더해진 또 하나의 의문은 폴머의 회사가 연방인쇄소를 위해서 실은 아무 일도 안했다는 주 장에서 비롯되었다. 일반적으로는 계약 조건이 완료되었을 때 로비를 담당했던 사람들이 그에 상응 하는 보수를 받지만 폴머의 경우에는 해결한 일도 없이 우선 돈부터 받았다는 것이다. 이름을 밝히 지 않은 인쇄소 직원에 따르면, 폴머의 회사는 40만 유로(Euro)를 받았지만 로비를 통해 성사시킨 것은 별로 없다고 한다. 이 주장은 사실 폴머의 입장을 더욱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 돈을 받은 대가 로 아무 일도 안하는 것은 의회의 규정에 따라 불법이고 녹색당의 외교 정책 대변인 자리에서 물러 설 충분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폴머는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그의 회사 동업자인 부카르트 호프마이스터(Buchkard Hoffmeister)는 강력하게 반박했다. 그는 우리는 연방인쇄소를 위해 모든 프로젝트에서 열심히 일 했고, 여러 번 외국에서 그쪽의 기업들과 거래를 준비하러 나갔으며 이런 일을 한 대가로 신테시 스는 통례적인 수입을 얻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외국에서 성사시킬 만한 거래를 찾아내고 그들의 고객에게 그 일이 알맞은지 분석하며 외국 기업의 거래 담당자를 찾아서 거래가 가능하도록 만드 는 것이 이 회사의 주요 업무라는 것이다. 신테시스사는 남아프리카, 베트남과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이와 비슷한 업무를 하였으며, 이 세 나라는 앞으로 시민들의 새 신분 증명서 발급에 몇 백만 유로 를 투자할 계획이라고 한다. 호프마이스터는 신테시스의 업무는 대부분의 자문회사가 통상적으로 하는 일이며 양심에 거리낄 것은 없고 보수도 보통의 수준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연방인 쇄소도 자기들이 신테시스에게 준 보수는 통례적인 것이며, 자문과 외국 활동에 대한 사례라고 진 술하고 있다. 큰 프로젝트에 대해 자문 받을 경우 몇 주내에 결과가 나타나지는 않기 때문에 수행 한 업무가 없다는 의심이 나왔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물론, 폴머 사건이 불거진 것도 폴머의 신테시 스를 위한 몇 차례 외국 여행 때문이므로, 아무 한 일도 없이 대가를 받았다는 주장은 신뢰도가 떨 어진다. 폴머 측에서는 이 사건이 이처럼 불거진 이유는 보수당의 정치적 전략 때문이라고 주장하 FES-Information-Series 고 있다. 그러나 위의 여러 가지 주장들만 보아도 폴머의 행위가 과연 로비가 아니었는가에 대해서 는 많은 부분 의심의 여지가 있다. 이 사건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폴머뿐 아니라 의원들의 겸업이나 부업이 가끔씩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이고, 두 번째는 녹색당에 대한 비판이다. 그동안 가장 도덕적인 정당으로 인식되어 왔던 녹색당이 폴머 사건과 또 이 사건이 밝혀 진 계기가 된 비자 스캔들로 인해 내부 갈등을 일으키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녹색당은 통독 이 후 당의 주요 이념 중 하나인 여행의 자유화를 그들이 외무장관직을 맡게 되면서 현실화해 왔다. 폴 머도 2000년 외무부 재직 시절, 독일은 세계를 향해서 더 넓게 문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확실 하지 않은 경우 비자를 불허하기 보다는 허락하는 것을 권했다. 그 결과, 불법 입국자들을 독일내로 들여보내는 사기꾼들의 활동이 왕성해졌고 비자 발급이 쉬워짐에 따라 불법 노동력이 유입되었다. 이에 대해 자민당이나 기민당은 폴머 및 녹색당, 더 나아가 녹색당과 연정을 하고 있는 집권당인 사 민당이 책임을 져야한다고 요구했으며 폴머의 부업 사건도 사실은 이 맥락에서 불거진 것이다. 폴머를 보호할 것인가, 희생시킬 것인가- 녹색당의 대처 폴머의 스캔들에 대해 녹색당 지도부는 처음에는 단결을 과시하면서 폴머의 연방인쇄소 자문으로 서의 부업은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다는 의견을 공식적으로 표명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이라는 말뜻에 숨은 함의는 우리가 지금까지 아는 바에 의하면 이라는 뜻이 더 강하다. 녹색당 지도부는 밖 으로는 폴머를 변호했지만 당내 회의에서는 폴머에게 신테시스 회사에 대해 추궁했었다. 이에 폴머 는 인쇄소의 외국 진출을 위해서 연방의원으로서의 권한을 이용하지 않았다고 단언했고 당에서는 일 단 폴머를 옹호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문제는 지도부가 아니라 녹색 당원들 사이에서 폴머나 그 자문회사가 정말 무죄인가에 대해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스캔들이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이러한 의혹 자체가 녹색당의 도덕성에 많은 피해를 입히기 때문에 당원들은 폴머가 이처럼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부업을 선택한 것이 문제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 폴머 사건에 대해 가장 불만을 나타낸 이는 동료 의원인 빈프리드 헤르만(Winfried Hermann)이 었다. 그는 폴머의 부업이 정치적으로 위험한 측면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므로 폴머는 자신이 결백 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지금 이 문제를 깨끗하게 해명하지 못하고 넘어가면 국민들의 당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녹색당 내에 짙게 깔려 있다는 것이다. FES-Information-Series 헤르만 의원은 이전에 있었던 녹색당 내의 유사한 사건들을 떠올리면서 폴머가 책임을 져야 한다 고 추궁했다. 우선 1999년에 연방의원이었던 쳄 외쯔데미르(Cem Oezdemir)가 후원자로부터 8만 마르크를 빌렸고, 공무상 얻은 마일리지로 사적인 비행기표를 구매하는데 이용했다는 것을 고백하 고 당직을 떠났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폴머도 당직을 내어놓아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즉 당내에 서 의원의 부적절한 행동이 밝혀졌을 때 그에 대응하는 태도에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물 론 헤르만 외에도 초창기에는 폴머 사건을 다시 조사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당 지도부에서 나왔으나 대부분은 당내에서 고민하고 해결하자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폴머에 대한 질의와 추궁은 당내에서 비공개로 이루어지고 공개 석상에서는 부정적인 말은 흘리지 않는 쪽으로 기선을 잡은 것이다. 이 후 당내에서 의원들의 부업에 관한 법 개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은 계속되었지만 폴머 를 구체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사건을 통해 폴머는 이미 정치적 타격을 크게 입었다. 그에 대한 사임설이 끊임없이 떠돌았고 당원들은 그를 비판하였다. 특히 자신이 과거 주 장관이었다는 것을 이용해서 사기업이 이익을 취하도록 도왔다는 것을 폴머가 감추지도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내세우고 있다는 것에 대해 서 당원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였다. 특히, 폴머에 대한 비판은 그의 지역구인 뒤셀도르프에서 더욱 심했다. 2006년 선거에서 의회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뒤셀도르프의 주 비례대표 리스트에 그의 이름이 올라야 하는데 이 스캔들로 올 라갈 확률이 거의 없게 되었다. 주 장관까지 지냈던 폴머의 정치적 생명은 끝났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녹색당이 초기에 이 사건을 축소시키려 한 이유는 우선 폴머의 행동이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도덕적으로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그가 형식상으로 부업을 제대로 신고하였기 때문에 규 정을 어긴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좀 더 심각한 데 있었다. 폴머 사건이 외무부장관인 요시카 피셔에게 번져서 비 자 발급을 둘러싼 사건이 점점 더 확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염려는 사실로 나타나 기민당에서 는 폴머 사건을 피셔 사건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이처럼 폴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피셔로 까지 사건이 확대되면 이는 녹색당의 존립에 매우 위험한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부업 규정 강화 찬반 논란 FES-Information-Series 폴머는 정부 부서에서 일하던 연줄이 신테시스에서 일하는 데 도움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분명하게 답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주 장관이었기 때문에 독일이나 외국에 자신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신테시스 일을 할 때는 의회의 규정을 항상 지켰다고 강조했다. 즉 그는 부업에 관한 보수 당의 공격이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기 보다는 정치적 전술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기민당(CDU)은 신테시스 사건이 있기 전부터 현 집권 정부인 사민당과 녹색당의 적녹 연정 을 공격할 준비를 해왔고 이 사건이 기민당에게 좋은 빌미를 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정치적 논란 을 떠나 폴머 외에도 부업과 관련된 스캔들을 일으킨 의원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를 계기로 좀 더 명확하고 새로운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의회 안팎에서 제기되었다. 이 문제의 본질은 무엇보다 연방의회 의원들의 부업에 관한 규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있다. 기 민당 당수인 안겔라 메르켈(Angela Merkel)은 적녹 연정 정부에서 의원의 부업에 대해 더욱 엄밀하 게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기민당도 이 의견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사민당(SPD)의 2 인자인 슈티글러 의원(Ludwig Stiegler)은 이에 반대하면서 완벽하게 투명한 의원 이 가능한지 묻고 있다. 역시 연방의회 의원인 페터 라우엔(Peter Rauen)은 규정을 어긴 의원을 징계해야 하지만 당이 나 의원을 완전히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부업 규정을 강화하는 여러 가지 제안들이 의도는 좋지만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개인회사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소득세를 신고하는 연말에나 자신의 수입이 얼마인지를 알게 되기 때문에 신고하기 어렵다는 것이 다. 연방의회 의원의 수입 신고에 관한 여러 가지 반대 의견이 있다. 사민당의 당수 뮌터페링(Franz M ü nterfering)은 의회가 폐쇄적 집단이어서는 안 되며 우리들 중에는 변호사, 사업가, 기업의 경영 자, 노동조합원들이 있다. 그들의 수입 공개에 관한 규정은 더 검토되어야 한다라고 한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다. 슈티글러는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투명한 의원 프로젝트를 만든다고 해서 정치인들 이 잠재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사라지거나 부정부패가 의회에서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투명성이 갑자기 확대된다고 평화와 안도가 찾아온다고 믿는 것은 착각이라는 것 이다. 의회는 각각 다른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지 맑은 주체 들이 모여 있는 곳 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에너지 기업인 바텐팔(Vattenfall)에서 돈을 받으며 환경세 법에 관해서 기업의 입장을 지지하는 라인하르드 슐츠(Reinhard Schulz) 사민당 의원을 보호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우리는 그가 어디 출신인지 알기 때문에 그것을 참고로 그의 주장을 평가하면 되며, 이익대변을 한다고 보면 점점 더 힘들어진다”고 강조한다. 사민당 의원이며 폭스바겐의 노동자 FES-Information-Series 평의회 위원인 한스유르겐 울(Hans-J ü rgen Uhl)도 부업과 수입에 대한 공개에 반대하고 있다. 개인 정보를 보호해야 하며, 연방의원들도 사적인 영역을 가질 권리가 있다 는 것이 그 이유이며, 독일에 서는 모든 수입을 드러내는 것이 관례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즉, 의원들의 부업 규정을 좀 더 철저하게 하자는 의견에 대한 반대 논리는 의회는 결코 아주 깨 끗한 사람들만 모여 있는 집합체는 아니며 의원들 자신의 사적인 영역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대도 만만찮게 나오고 있다. 과거 사민당 소속이었던 노베르트 간젤(Nobert Gansel)은 정치인들이 남몰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의원들의 부업과 그로부터 나오는 수입을 공개해야만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기민당 연방위원장인 크리스티안 불프(Christian Wulff)는 니더작센 주의 규정을 표본으로 하여 연방의회에서 규정을 바꾸면 된다고 주장한다. 니더작센 주에서는 부업의 종류와 규모에 관해 주 의 회 의장에게 신고할 의무가 있으며, 신고 내용은 유권자들이 누가 누구로부터 무엇을 위해서 돈을 받 는지 알 수 있도록 공개하는 것이다. 독일 금속노조(IG-Metall) 위원장인 유르겐 페터(J ü rgen Peter) 는 노동자평의회 위원이면서 의원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일에 대해 적절한 보상을 받아야 하지만 그 수입은 밝히는 것이 정당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즉 자문인과 감정인으로서의 업무도 공 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바이에른 주 의장인 알로이스 글뤽(Alois Gl ü ck ․ 기사당)은 규정을 더욱 엄격하게 만들어야 한다 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연방의회 의장에게 의원들이 자신의 부수입에 대 해 잘못된 정보를 주거나 아예 정보를 주지 않는 경우에는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입에 대한 대가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즉 로비 수입은 엄격히 금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한 사람 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의 검사장 볼프강 샤우펜슈타이너(Wolfgang Schaupensteiner)는 부업인 것처럼 해 서 뇌물을 받은 의원들의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부정부패 전문가인 그는 일간지인 쥐드도이체짜이 퉁에서 모든 시민들은 의원들이 누구에게서 무엇을 위해 얼마만큼의 돈을 받는지 알아야 한다고 말 하고 있다. 즉, 의원의 겸업 수입도 공개해야 하며, 부업을 겸업인양 마냥 속이고 수입을 숨기는 것 또한 앞으로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부업 의원들의 경우 FES-Information-Series 연방의원의 부업에 대한 논란은 녹색당의 폴머에서 시작되었지만 사실 다른 당의 의원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자민당(FDP) 의원인 플라흐(Ulrike Flach)는 그녀가 하고 있던 부업에 대한 비판이 커지자 결국 원내직과 당직을 포기했다. 그녀는 2005년 1월 24일 맡고 있던 연방의회의 교 육위원회 위원장직과 자민당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지구당의 부대표직을 사임한다고 발표했 다. 이는 자신의 가족과 위원회, 그리고 자민당과 일하고 있던 지멘스 회사에 피해를 입히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 플라흐는 지멘스사에서 몇 십년간 통역으로 일했고 의원직을 맡으면서도 이 일 을 계속했다. 그녀는 통역일과 보수(6만 유로 정도)에 대해서는 언제나 투명하게 의심의 여지를 남 기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나의 정치적 결정에 회사와 관련된 사항이 절대로 영향력을 미치지 않았 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여론에서 이러한 생각을 관철시키기 어려웠 고 선거를 앞두고 있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자민당 사정을 고려해서 자리를 내어놓게 되었 다고 말했다. 그러나 의원직은 계속 유지하고 있다. 기민당의 원내 부대표인 메르쯔(Friedrich Merz)와 전 연구부 장관인 리젠후버(Heinz Riesenhuber)는 자신들의 부업이 정당하다고 옹호하고 있는 정치인들이다. 메르쯔는 빌트지와의 인 터뷰에서 의회와 선거구에서 하는 일은(내 부업 때문에) 아무 타격도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른 일과 의회 업무가 겹치면 항상 의회 업무를 우선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며 자신의 겸업인 변 호사 업무와 여러 기업의 감독위원회 위원과 고문직에 대해 변명하고 있다. 메르쯔는 연방의원들이 수상, 장관이나 당대표의 일을 동시에 맡을 수 있는 것처럼 의원을 하면서 제한된 범위 내에서 직업 을 갖는 것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리젠후버도 자신이 맡고 있는 기업 자문과 여러 감독위원회와 관리위원회의 업무를 의회 업무와 조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다. 또한, 그는 의회가 열리는 기간에는 베를린에 있고 나머지 시간에는 선거구의 주민들과 대화를 할 수 있으며, 지역에서 자신이 다수의 표 를 얻어 당선된 것도 결국 유권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겸업과 부업 규정 강화로- 해결책 모색 의회 의원들의 주업과 부업의 수입을 어디까지 밝혀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다. 적녹 연정정부의 실무 연구팀에서는 센트의 끝자리까지는 정확하게 맞추지 않는 신고 양식을 제안 하였다. 녹색당 지도부는 겸업과 부업의 수입을 완벽하게 신고하자고 하지만 사민당은 이에 반대하 고 있다. 시사 주간지인 슈피겔지에 따르면, 사민당은 의원들이 부업으로 얻은 수입을 수입액에 따 FES-Information-Series 라 그룹으로 나누어서 국회 책자와 인터넷에 공개하는 것을 계획하고 있다. 그러나 슈티글러 사민당 의원은 수입 공개는 하지 말고 직업과 관련된 일만 공개하자고 말하고 있다. 완벽히 투명한 의원에 대한 규정을 내어 놓았을 때 의회에서 다수표를 얻기 힘들기 때문이다. 기민당과 기사당 내에서도 정확한 수입을 공개하는 것이 가능하고 의미 있는 일인가에 대해 의심하 는 의원들이 있다. 기민당의 폴커 카우더 의원은 수입 공개에 반대하면서 변호사들이 현재와 같은 경쟁의 장에서 그렇게 간단히 수입을 밝힐 수 없다 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의장에게 신고하 는 것에는 찬성하면서 규정을 지키지 않을 때 수입의 두 배를 벌금으로 내는 것을 제안했다. 이러한 제안은 다수의 찬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카우더의 의견이다. 초기에는 반대 입장을 표명했던 유르겐 코펠린(J ü rgen Koppelin) 자민당 대표는 다른 당의 추진 안들에 대해 고려해 볼만하다고 의견을 밝히면서 대신 이 논의에 추기경 칼 레만(Karl Lehmann)을 위원장으로 하는 독립적인 위원회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정치가들이 스스로 자신들 의 신상과 관련된 일에 대해 결정하는 것은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는 의견이다. 기민당은 좀 더 강경한 입장을 취하면서 폴머의 행위가 정신적으로 부패했고 규정에 어긋나는 행 동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독일 정치인이 외국에서 조국의 경제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나 폴머처럼 이를 통해 사적인 수입을 올리는 행위는 규정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비자 조사위원장은 이 런 식으로 의원이 의원직 외에 부업이나 겸업을 하는 것은 의회의 행동 규정에 금지되어 있다고 말 하고 있다. 기민당은 이 사건을 비자 사건과 연계하여 적녹 연정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위와 같은 논쟁과 다양한 제안들이 나오면서 독일 의원들의 겸업과 부업, 그리고 그 수입에 관한 논란은 점차 규정이 강화되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우선 의회의 법전문가들이 부수입의 공 개가 의원의 자유를 직접적으로 방해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냈으며, 대부분의 의원들도 모든 겸업과 부업의 수입을 연방의회 의장에게 신고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였다. 연방의회 의장인 볼프강 티어 제(Wolfgang Thierse)도 이번 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국민들은 의원들이 어느 쪽에서 일하는지 알 권리가 있으며, 이는 정치의 투명성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일 이라는 것이다. 부업에 관한 정보는 앞으로 매년 나오는 의회 보고서에 공개할 예정이다. 이로써, 의원의 겸업과 부업에 대한 신고 규정은 이제까지 부업의 수입만을 신고하던 것에서 더욱 FES-Information-Series 강화되게 되었다. 또한, 잘못된 정보를 주었을 경우 벌금도 가능하다. 적녹 연정은 다양한 안을 바탕 으로 여름 휴가 기간 이전에 명확한 규정을 만들기로 합의하였다. 폴머는 이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지고 2월 11일자로 그의 모든 당직, 즉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의 당대표, 중앙당의 외교 정책 대변인 자리와 신테시스 대표직에서 사임했다. 녹색당 지도부에서는 끝까지 폴머를 보호하려 했으나 쏟아지는 비판과 곧 다가올 선거전에서 이 문제가 걸림돌이 될 것 이 두려워 이같이 결정하였다. 폴머의 사임과 함께 이 문제는 여론에서 거의 사라졌다. 많은 의원들 이 부업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오랫동안 거론하는 것은 모두에게 부담이 되기 때 문이다. 폴머 사건으로 인해 불거진 의원의 겸직과 부업에 관한 논란은 정치인의 영향력과 그들의 사적인 행동 범주를 어디까지 인정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할 계기가 되었다. 정치인들의 개인정보보호 가 어디까지 적용되어야 하는가, 특히 정치인들의 경제 활동을 투명하게 공개, 제한해야 하는 것 아 닌가라는 논의는 자칫 잘못하면 부정부패에 연루되거나 잘못된 로비 대상이 되기 쉬운 정치인들에 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할 수 있다. 의회 의원을 비롯한 정치인들의 겸직에 관한 논란은 독일에 서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치인들은 다른 직업인들과 달리 그들의 정치 적 영향력이 잘못 쓰이면, 국민들에게 피해를 줄 뿐만 아니라 국가적 손실과도 연관되기 때문이다. 독일 내 국제이주 노동자 현황과 정책 강 수 돌, 고려대학교 경상대학 경영학과 교수 2005년 1월 󰠲󰠲󰠲󰠲󰠲󰠲󰠲󰠲󰠲󰠲󰠲󰠲󰠲󰠲󰠲󰠲󰠲󰠲󰠲󰠲󰠲󰠲󰠲󰠲󰠲󰠲󰠲󰠲󰠲󰠲󰠲󰠲󰠲󰠲󰠲󰠲󰠲󰠲󰠲󰠲󰠲󰠲󰠲󰠲󰠲󰠲󰠲󰠲󰠲󰠲󰠲󰠲󰠲󰠲󰠲󰠲󰠲󰠲󰠲󰠲󰠲󰠲󰠲󰠲󰠲󰠲󰠲󰠲󰠲󰠲󰠲󰠲󰠲󰠲󰠲󰠲󰠲󰠲󰠲󰠲󰠲󰠲󰠲󰠲󰠲󰠲󰠲󰠲󰠲󰠲󰠲󰠲󰠲󰠲󰠲 전 세계적으로 국제 이민자의 수는 1억 2천만 명 정도이며, 그 중 130만 명이 매년 유럽연 합으로 들어간다. 독일은 유럽연합 회원국 중에서도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국가다. 독일은 지금까지, 특히 보수 기민당(CDU) 정권 16년 동안, 보트는 꽉 찼다, 독일은 이민국 이 아니다 라는 슬로건만 되풀이하며 엄격한 노동허가제를 실시해왔다. 하지만 독일은 역사적 으로 볼 때 대표적 이민국이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독일은 상당수의 국제 이주 노동자를 취업 이민자로 받아들였으나, 1980년대 들어 그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현재 독일이 처해 있는 지속적 인구 감소와 전문 인력의 부족 현상 앞에서 기민당의 낡은 정책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이 드러났다. 특히 컴퓨터 산업 분야에 많은 전문가가 부족하여 2000년부터 해외에서 전문 인력을 유입하기 시작했다. 또 여야는 오랜 논란 끝에 해외 전문 인력(특히, 정보기술 분야)의 취업 체류를 쉽게 하고 이민을 허용하는 새 이민법 개정에 합의 했다. 이로써 매년 20~30만 명의 국제이주자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간 특히 전문 인력 분야에서 노동인구 감소로 위협받던 독일 경제계가 새 법안 덕에 활기를 되찾을 것이다. 이러한 이주 노동자 정책에 대해 여러 가지 평가가 가능하지만, 독일 사례를 노동 허가제의 실패 사례로 보기 보다는, 오히려 노동시장의 조심스런 문호 개방과 체계적인 사회통합 정책 을 조화롭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하나의 선진 사례라고 보는 것이 더 올바를 것이다. 󰠲󰠲󰠲󰠲󰠲󰠲󰠲󰠲󰠲󰠲󰠲󰠲󰠲󰠲󰠲󰠲󰠲󰠲󰠲󰠲󰠲󰠲󰠲󰠲󰠲󰠲󰠲󰠲󰠲󰠲󰠲󰠲󰠲󰠲󰠲󰠲󰠲󰠲󰠲󰠲󰠲󰠲󰠲󰠲󰠲󰠲󰠲󰠲󰠲󰠲󰠲󰠲󰠲󰠲󰠲󰠲󰠲󰠲󰠲󰠲󰠲󰠲󰠲󰠲󰠲󰠲󰠲󰠲󰠲󰠲󰠲󰠲󰠲󰠲󰠲󰠲󰠲󰠲󰠲󰠲󰠲󰠲󰠲󰠲󰠲󰠲󰠲󰠲󰠲󰠲󰠲󰠲󰠲󰠲󰠲 1. 독일 내 이주 노동자 유입 약사 1) FES-Information-Series 전 세계적으로 국제 이민자의 수는 1억 2천만 명 정도이며, 그 중 130만 명이 매년 유럽연합으 로 들어간다. 영국과 독일은 유럽연합 회원국 중에서도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이주하는 사람들 이 가장 선호하는 국가들이다. 독일은 지금까지, 특히 보수 기민당(CDU) 정권 16년 동안, 보트는 꽉 찼다, 독일은 이민국 이 아니다 라는 슬로건만 되풀이 해왔다. 하지만 독일은 역사적으로 볼 때 대표적 이민국이었 다. 2차 대전 패전 후 동유럽에서 구서독으로 1949년까지 피난 온 800만 명의 독일인을 제외하 더라도, 1950년부터 1997년까지 취업 이민자와 그 가족, 정치 망명자, 동구권 와해 후 구소련과 동 유럽에서 넘어 온 사람들을 합해 약 2,900만 명이 독일로 이주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독일은 상당수의 국제 이주 노동자를 취업 이민자로 받아들였으나, 1980년대 들어 그 수가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다. 1982년부터 1998년까지 기민당 콜 총리의 집권 동안 독일 정부는 고실업률과 빈부 격차에 따른 사회 불만, 사회 저변에 깔려 있는 외국 인에 대한 적대감 등을 들어 반(反)이민정책을 고수했다. 그러나 현재 독일이 처해 있는 지속적인 인구 감소와 전문 인력의 부족 현상 앞에서 기민당의 낡은 정책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이 드러나고 있다. 인구학자들은 1970년대부터 시작된 독일 의 출산율 저하 현상이 해소될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민 수용의 당위성을 찾고 있다. 현재 독일 인구는 약 8,200만 명인데 이 중 15~64세까지의 노동 연령 인구가 약 5,600 만 명이 며, 65세 이상의 노년층은 1,300만 명으로, 노년층 대 노동연령 층의 비율은 1:4.3명이다. 유엔이 발표한 인구 예측상황 보고서는, 독일의 경우 현재의 출산율을 기준으로 해외에서 이 주민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2050년에는 인구가 5,800만 명 수준으로 감소할 것이라 경고 한다. 따라서 노년층과 노동연령층의 비율도 1:1.8명 수준까지 떨어진다. 독일의 현 연금체제상 노동인구 1.8명이 연금 생활자 1명의 생계를 책임지는 꼴이다. 실업에 의한 비노동 인구까지 포 함하면 노동 인구가 담당해야 할 사회적 부담은 더욱 커지는 것이다. 1) 외국인 과 내국인 이라는 표현이 인종 차별주의적인 색채를 띠는 경향이 있기에 필자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외국인 노동자 대신 국제이주 노동자 라는 표현을 쓴다. FES-Information-Series 이런 예측들은 독일이 인구 구조의 변화에 현실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선 이민자 정책의 전환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보여준다. 이미 그 구체적 징후로 고실업에도 불구하고 전문 인력의 부족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독일 정부의 국제이주민과 이주 노동자 정책을 살펴보는 것은 한국 사회의 미래 정책 형성에 많은 시사점을 줄 것이다. 우선, 독일 사회에 국제이주 노동자들이 유입된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자. 1955년에 약 8만 명 정도에 불과하던 독일의 이주 노동자는 1950년대 후반부터 많은 노동자의 유입으로 1964년에 100만 명을 넘어섰다(독일은 1955년 이태리, 1960년 스페인과 그리스, 1961 년 터키, 1965년 튀니지와 각기 인력 송출 관련 양국 간 협정 체결). 그 뒤 수가 급증, 1971년엔 220만 명이 되어 드디어 전체 노동자의 10%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1973년 들어 260만 명이 들어와 독일 노동시장이 거의 포화 상태에 이르자 독일 정부는 ‘모 집 중지’ 조치를 내린다. 그리하여 새로운 이주 노동자의 공식 유입은 줄었지만 기존 노동자들 이 고국으로부터 가족들을 불러들임으로써 국제이주민의 수는 여전히 증가한다. 1980년엔 450만 명으로 독일 인구의 7%를 넘게 된다. 이에 1983년 귀국촉진법 이 제정되어 보조금 등으로 외국인의 귀국을 장려했으나 귀국자는 5%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1989년 전후로 동유럽이나 구소련으로부터 난민이 대거 유입되어 이주자가 꾸준히 증가하여 90년대 중반 경 약 700만 명에 육박한다. 한편, 1993년 들어 졸링엔에서는 신나찌 세력들이 난민 신청자 임시 숙소와 터키인 거주지를 방화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통일독일 기민당 정부는 외국인의 난민 신청권에 제한을 두려 했다. 1998년 선거로 사민당-녹색당이 다시 정권을 잡은 뒤 미국식의 이중 국적제를 도입하 려 했으나 기민당이 반대 운동을 벌이는 바람에 무산되고 만다. 2000년 세계컴퓨터박람회를 계 기로 사민당(SPD)의 총리 슈뢰더는 2만 명에 이르는 해외, 특히 인도의 컴퓨터 전문가들에게 그 린 카드(미국식 영주권)를 주는 구상을 발표한다. 이로써 1973년의 모집 중지 정책은 전환점을 맞고 독일 이주에 관한 논쟁이 첨예화한다. 2002년에 연방 상원에서 새 이민법이 통과되자 정치 적 논란이 확산되었다. 특히 이 법이 적법한 절차를 거쳐 통과되었는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연 FES-Information-Series 방헌법재판소가 이에'아니다'라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이 법은 유예된다. 2004년 3월에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난 것을 계기로 야당인 기민당은 새로 운 이민법에 국가 안전의 문제를 고려하는 조항을 추가 삽입할 것을 촉구한다. 드디어 2004년 5 월, 새 이민법이 하원을, 7월에는 상원을 통과함으로써 2005년 1월부터 새 이민법이 발효된다. 특히 기술 전문 인력에 대한 개방 폭이 확대되었다. 앞서 간단히 본 대로 독일은 고실업 상황에서도 저 출산율과 전문 기술 인력 부족으로 미래 사회에 적절히 대처하기가 어려운 상태였는데, 1999년부터 집권한 사민당의 슈뢰더 총리가 이 에 대한 대책의 일환으로 일명 그린 카드 구상이 나온 것이다. 기업들의 요구에 따라 해외에 서 정보통신 분야 전문 인력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보수 기민당은 그 직후 연방주 선거에서 인도인(IT 분야 전문 인력) 대신 우리 어린이들 이라는 외국인 적대구호를 내세우며 반대했 다. 일부 노동조합도 이렇게 실업자가 많은데 왜 외국에서 노동 인력을 데려오려 하는가 라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결국은 독일 경제를 위해 한걸음씩 양보한 셈이다. 실제로 현재 등록된 실업자는 400만 명 정도이나, 채워지지 않은 일자리도 40만 개나 있으며, 실제 노동력이 필요한 일자리는 3배 이상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모자라는 인력은 컴퓨터 분야뿐 아니라 기계공학과 항공공학, 생명공학 분야와 서비스업에도 해당된다. 앞으로는 양로원, 병원, 간병 업무나 실버 산업 에도 노동력 부족 현상이 나올 것으로 예측된다. 문제는 이 분야에 필요 한 인력을 현재의 실업자로는 채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독일의 빈 일자리는 새로운 직업적 자질 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독일은 자체적으로 필요한 교육 훈련 체제를 재정비해야 하며 그러한 자립 능력 이 공고해질 때까지는 시급한 전문 인력에 대한 개방의 문을 열 필요가 있다. 또한 제도적 개방과 더불어 외국인 에 대한 사회 심리적 적대감을 해소하는 노력도 필요하 다. 즉 외국인 들은 독일인에게서 일자리를 뺏고 망명자 수용법과 사회복지제도를 악용하는 범죄 집단 이라는 피해 의식이 사라지지 않는 한, 독일인과 소수 민족들 사이의 상호 존중과 사회 평화는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2. 독일 내 이주 노동자 구성과 현황 FES-Information-Series 2004년 현재 독일에는 약 730만 명의 국제이주민이 살고 있어 전체 인구 중 비율은 약 9%에 이르러 유럽 여러 나라 중에서도 비교적 높은 편이다. 이러한 추세는 1996년 이후 큰 변화 없이 대체로 일관되게 유지되어 왔다(표 1 참조). 이와 같이 1950년대 이래 독일은 수많은 외국인들에게 새로운 삶터와 일터를 제공하는 나라로 통해왔다. 물론 독일에서 해외로 나간 외국인도 많지만 대체로 해외에서 독일로 들어오는 외국인 이 더 많은 추세를 보였다(표 2 참조). (단위: 명) 기준 시점 1996년 말 2000년 말 2002년 말 * 자료: 연방통계청 <표 1> 독일 인구와 외국인 비중 총인구 G 82,012,162 82,259,530 82,536,700 외국인 A 7,314,046 7,296,817 7,335,592 외국인 중 EU 국민 1,836,570 1,870,062 1,859,742 A/G 비중 8.9% 8.9% 8.9% <표 2> 독일로 들어간 외국인과 떠난 외국인의 수(1996-2002) 연도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 자료: 연방통계청. 입국 외국인 707,974 615,298 605,500 673,873 648,846 685,259 658,341 출국 외국인 559,064 637,066 638,955 555,638 562,380 496,987 505,572 (단위: 명) 차이 148,890 -21,768 -33,455 118,235 86,466 188,272 152,769 독일의 총 8천 2백만 명의 인구 중 외국인 이 730만 명 정도 살고 있지만 그들의 국적별 분포 를 보면 상당한 편차를 보인다. 우선 터키인이 187만 명으로 전통적으로 최다수를 차지해왔고, FES-Information-Series 그 다음으로 유럽연합국 출신자가 180만 명을 조금 넘는 수준이다(그 중 이태리 60만 명, 그리스 35만 명, 오스트리아 19만 명, 포르투갈 13만 명, 스페인 12만 명, 네덜란드 11만 명). 다음으로 는 구유고연방 사람들이 모두 100만 명 가까이 된다(세르비아 및 몬테니그로 57만 명, 크로아티 아 23만 명,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16만 명)(표 3 참조). <표 3> 독일 내 국제이주민의 국적별 분포(2003년 말 기준) (단위: 명) 국적 터키 세르비아/ 몬테니그로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수 1,877,661 568,240 236,570 167,081 61,019 국적 유럽연합 총계 이태리 그리스 오스트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수 1,847,712 601,258 354,630 189,466 130,623 125,977 * 자료: AZR(외국인 중앙등록소, Ausl ä ndischer Zentralregister). 독일 내 국제이주 노동자로 일하는 사람의 수는 약 200만 명 내외로, 독일 취업자 중 약 7-8% 를 차지한다(표 4 참조). 예전에 10% 이상을 차지하던 시기를 생각하면 갈수록 외국인 취업자 비중이 줄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면 과연 독일 내 국제이주 노동자의 국적별 분포는 어떠한가. 1992년엔 터키 출신이 63만 명, 유고 32만 5천 명, 이태리 17만 명, 그리스 11만5천 명, 스페인 6만 명, 포르투갈 4만7천 명 기타 56만 2천 명 순이었다. 10년이 지난 2002년 6월 기준으로 보면, 터키 출신이 여전히 최다수 인 53만을 차지하나 꽤 많이 줄었음을 알 수 있고, 다음으로 구유고연방 28만 명, 이태리 19만 명, 그리스 10만 명, 포르투갈 4만 6천 명, 스페인 3만 9천 명으로 나타났다(표 5 참조). 산업별 분포를 보면, 제조업 부문에 94만 명이 취업하고 있어 전체 이주 노동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다음이 서비스업(식당, 호텔, 청소 등), 상업, 건설업 순이다. 국제이주 노동자의 노조 가입률은 33.8%로 국적별로 보면 터키인이 44.9%, 그리스인이 45%, 이태리인이 41.0%, 스페인이 41% 등이다. 특이하게도 국제이주 여성노동자들의 경우 노조 가입 률이 53%로 남성들보다 더 높게 나타나고 있다. FES-Information-Series 기준 연월 1999년 6월 2000년 6월 2002년 6월 2003년 6월 <표 4> 독일 취업자와 외국인 노동자 비중 전체 취업자수 (단위: 명) 취업자 중 외국인의 수 외국인 중 유럽연합 국민 27,361,444 27,824,486 27,571,147 26,954,686 2,033,590 1,963,620 1,959,953 1,873,939 648,007 645,513 618,212 585,160 * 자료: 연방직업소개소(Bundesagentur f ü r Arbeit) <표 5> 독일 내 국제이주 노동자의 국적 분포(사회보장 적용 받는 피용자 기준) (단위: 명) 노동자 수 국적 2002년 6월 말 2003년 6월 말 터키 구유고연방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나머지 유고 * 유럽연합 15개국 * 유럽연합 25개국 이태리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534,521 33,497 66,099 183,488 618,212 758,239 197,575 107,339 46,713 39,636 502,303 34,350 66,485 181,725 611,364 754,175 195,245 106,141 46,114 39,162 * 자료: 연방직업소개소(Bundesagentur f ü r Arbeit) 독일 노동조합은 국제이주 노동자를 초기부터 조합원의 완전한 권리를 부여하면서 통합해 왔 다. 독일노동조합연맹(DGB)의 지도부가 모든 국제이주 노동자에 대한 평등 대우에 찬성하는 근 본적인 결정을 한 것은 1954년이었다. 이 결정으로 국제이주 노동자들이 직장평의회(Betriebsrat) 선거에 참여하기도 하고 평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예컨대, 쾰른에 위치한 포드 공장의 경우 터키 출신 노동자의 80%가 금속노조(IG Metall) 조합원이고, 이는 독일인 조합원에 비해 2배 이상 높다. 광산노조(IG Bergbau)의 경우 70% 가량이 국제이주 노동자로 구성되기도 했 다. FES-Information-Series 독일은 복지 사회 원칙에 따라 모든 국민이 사회안전망의 보호를 받는다. 국제이주자들도 의 료보험, 실업보험, 사회복지 보조금, 연금, 자녀들의 의무 교육 등 기본 혜택을 받고 이민자들 또 한 사회의 복지 유지에 큰 기여를 한다. 즉, 독일 GNP의 약 10%는 국제이주민이 창출하고, 독일 산업의 일정 부문은 이주 노동자에 의존한다(특히 음식업, 건설업, 병원, 양로원 등). 그러나 50년 가까운 이주 생활에도 불구하고 여러 구조적 문제로 인해 경제적, 사회적, 문화 적으로 그들이 독일 사회에 동화되어 동등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없다. 대부분 이민자들은 단순 노동자로서 교육 수준이 낮고 출발에서부터 한계를 갖고 있으며 고질적인 저소득, 고실업률(독 일 평균보다 약 2.5배가 높다), 자녀 교육 문제 등 많은 문제를 겪는다. 물론 노동 허가를 취득하고 정식 고용된 이주 노동자는 원칙적으로 독일 노동자와 동일한 노 동 조건(특히 시간당 임금이나 주당 노동시간, 복리 혜택 등)을 얻는다. 그러나 소득 향상에 대한 열망이 높은 이주 노동자들의 경우 노동시간은 대체로 길거나 독일 노동자가 꺼리는 시간대(야간 이나 주말)에 일하기도 한다. 1993년 이후 EU 차원에서 노동력 이동의 자유가 확대되자 상황은 많이 변했는데, 독일로 들어오는 외국계 하청 회사에 고용된 이주 노동자의 경우 독일 노동자 임 금의 절반에 이르기도 했다. 이에 대해 독일 노조는 예의‘동일 노동 동일 임금’ 요구를 내세 우기도 했다. 이것은 인간적 측면의 요구이기도 하나, 동시에 저임 노동력 유입으로 인한 일자리 상실을 두려워한 결과이기도 하다. 국제이주자들이 독일 사회에서 거부, 배척을 당하면서 동화되는데 제일 큰 걸림돌은 사회 전 체에 직 ․ 간접으로 나타나는 인종 차별주의와 극우주의이다. 그 동안 독일 사회의 밑바닥에 깔 려 있던 것이 통일 후 이민자에 대한 과격한 폭력 행위의 형태로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극우파의 폭력 행위는 1982년에 80건에서, 1990년에 309건, 2000년에 998건으로 지난 20년간 12배 이상으 로 증가하였다. 최근의 동향을 보면, 독일 등 일부 OECD 국가에서는 이주 노동자를 새로이 모집하려 한다. 인구 고령화 및 노동시장의 지속적 불균형(특히, 정보기술 분야의 첨단 인력 부족현상)은 이 동 향의 일부를 대변한다. 다수 OECD 국가는 숙련 및 고숙련 이주 노동자를 끌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학위 취득 후 외국인 학생의 노동시장 진입을 원활하게 만들고 있다. 노동 이주에 관한 신규 법률 제정은 노동시장의 새로운 요구에 부응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FES-Information-Series 한편, OECD 국가들의 2002년 노동 인력에서 외국인 및 이주자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차를 보인다. 이민 국가인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미국에서 외국인 노동력은 15%에서 20% 사이의 비중을 보이고 스위스에선 22%, 룩셈부르크에선 43.2%를 차지하는데 비해, 독일은 9% 정도로, 오스트리아 9.9%, 벨기에 8.2%와 비슷한 수준이다. 3. 독일 정부의 이주 노동자 정책 독일 정부는 EU 회원국 출신이 아닌 여타 국제이주민의 취업에 대해서는 체류 허가와 노동 허 가를 통하여 규제해왔다. 국제이주민은 체류 허가 를 얻은 후에 노동 허가 를 취득할 수 있으며, 노동 허가를 받지 않고 취업한 사람은 미등록(불법 취업) 노동자로 간주된다. 독일 정부는 국내 노동시장의 구조적 상황 변동에 따라 노동 허가제를 통해 필요 노동력의 수 급 조절을 해왔다. 예컨대, 노동 허가제를 실시한 1955년 실업률은 5.2%였으며, 해외 인력 고용 을 확대하던 73년까지 연평균 실업률은 1.7%였다. 약 20년간 독일 노동시장은 인력난에 시달릴 만큼 거의 완전 고용이었다. 외국인이 독일에서 취업하려면 체류와 노동 허가를 받아야 한다. 먼저 노동 허가를 받기 위해 서는 체류 허가를 취득해야 한다. 고용촉진법(Arbeitsf ö rderungsgesetz)은 노동 허가에 대한 법적 근거를 규정하고 있으며, 체류 허가는 외국인 취업을 위한 체류허가에 관한 규정 에 근거를 두고 있다. 전통적으로 노동 허가제는 일반 노동 허가와 특별 노동 허가로 나누어졌다. 일반 노동 허가는 이주민 본인이 신청하면 해당 지역의 직업안정소가 노동시장 상황을 고려하여 허가를 한다. 노동 허가의 유효 기간은 최고 2년이지만 이 기간에 계속 고용된 경우에는 3년까지 연장할 수 있다. 특별 노동 허가는 이미 독일에 고용되어 있는 이주민에게 노동시장 상황에 관계 없이 본인의 신청에 따라 허가하는 것이다. 지역이나 직종에 제한을 받지 않고 관할 노동청에 신고한다. 특별 노동 허가에는 기한부 특별 노동 허가와 무기한 특별 노동 허가가 있다. 5년간 독일에서 합법적 으로 고용되었거나 독일인 배우자를 얻거나, 난민 여행증명서를 소지한 자나 18세 이전에 입국한 합법적 부모를 가진 이주민 자녀거나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 5년간 특별 노동 허가를 받는다. FES-Information-Series 한편, 8년간 합법적으로 계속 고용된 국제이주 노동자에 대해서는 무기한 특별 노동 허가가 발급 된다. 독일이 특별 노동 허가 제도를 채택한 이유는 고용주들의 요구 때문이다. 고용주들이 숙련 노 동자를 귀국시키고 미숙련 노동자를 새로 받아들이는 교체 순환 원칙(Rotationsprinzip)에 반발 했기 때문이다. 그 뒤 독일은 1997년 고용촉진법을 개정하여 과거의 일반 노동 허가와 특별 노동 허가를 노동 허가(Arbeitsgenehmigung)와 취업권(Arbeitsberechtigung)으로 대체했다. 한편, 독일 정부의 이주 노동자 정책의 특징은 독일의 노동시장 상황에 따라 노동력 유입을 적 절히 규제하면서도 인력 부족 산업에 기여하는 이주민을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으로 통합하려는 정책을 병행하는, 규제와 통합 의 양동 작전이다. 즉, 1973년 11월, 국제이주 노동자 모집을 중 지한 이후로도 이주자 수가 증가하자 1983년에 이주민 귀국촉진법 을 제정하는 등 이주민을 규 제하였다. 그 후에도 불법 취업자를 고용하는 사용자에 대한 벌칙을 강화하고 이주 노동자가 귀 국하는 경우 귀국 후의 주택 자금을 원조하는 등 규제 정책을 폈다. 그러나 규제 정책과 더불어 이미 독일에 정착한 이주민에 대해서는 교육 및 사회보장 등, 이주 노동자와 그 가족을 사회로 통합하려는 제도를 실시해왔다. 독일이 이런 정책을 사용하는 이유는, 일단 외국인이 독일 사회 에 정착하고 나면 현실적으로 귀국시키기 어렵고 이들이 독일 사회에 통합되지 않는 한 더 큰 사 회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라인강의 기적 으로 불리는 경제의 고도 성장기에 일시적 노동력 부족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시작했던 독일의 노동력 수입 개방 정책은 유입 제한 정책이나 귀국 촉진 정책과 같은 규제 정책과 더불어 사회 통합 정책이 결합되는 형태로 나타났다. 참고로, 독일의 정당들은 이주 노동자 정책과 관련,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기민당은 독일은 이주의 나라가 아니다 를 기본 기치로 손님 노동자 라는 말이 의미하듯, 엄격한 노동 허가제를 적 용하려했다. 사민당은 기민당과 유사하면서도 외국인도 같은 인간 이라는 입장 위에 일단 이주한 노동자에 대해선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고자 했다. 녹색당은 좀 더 근본적으로 지구촌 시민은 동 일하다 는 입장에서 노동권뿐만 아니라 시민권까지 보장하고자 했다. 한편, 노조는 처음부터 사 민당과 거의 견해를 같이 하고, 이주 노동자에 대한 동일 노동 동일 임금 원칙을 고수했다. FES-Information-Series 그런데 이러한 규제와 통합 정책도 21세기에 들어 일정한 변화를 겪는다. 특히 독일은 컴퓨터 산업 분야에 많은 전문가가 부족하여 2000년부터 해외에서 전문 인력을 초대하기 시작했다. 또 여야는 오랜 논란 끝에 해외 전문 인력(특히 컴퓨터 분야)의 취업 체류를 쉽게 하고 이민을 허용 하는 한편, 정황 증거만으로도 종교적 극단주의자나 테러 가능성이 있는 외국인을 추방하는 내용 을 골자로 한 새 이민법 개정에 합의했다. 지난 3년간 의회 내 여야 간 협상 절차를 거쳐 2004년 확정되고 2005년부터 발효되는 새 이 민법(Zuwanderungsgesetz)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노동 이민: EU 비회원 국가의 노동자들에게도 처음부터 영주권을 줄 수 있도록 하며 이민을 허용한다. 독일 기업은 엔지니어나 컴퓨터 기술자, 연구원이나 학자, 기업 간부 등 수준 높은 외 국인 노동자들을 채용할 수 있다. ◆ 유학생의 체류와 취업: 독일에 유학 온 외국인들은 종전에는 학업을 종료하면 즉시 출국해 야 했으나 앞으로는 학위를 마친 학생들이 일자리를 찾기 위해 1년간 체류하는 것을 허용한다. 다만 전문 능력이 있고 독일 내의 시급한 수요와 외국으로 두뇌 유출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 한해 노동청 동의를 거쳐 체류 허가를 내준다. ◆ 사업 이민: 독일 경제와 고용시장에 긍정적 효과를 줄 것으로 예상되는 자영업자의 이민에 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한다. 중요한 경제적 이해나 특별한 지역적 수요가 있을 경우 등으로 전제 조건을 규정해 허가한다. ◆ 잠재적 테러 용의자 추방: 독일 내에서 범죄를 저지른 일이 없더라도 의심스러운 인물에 대 해서는 내무장관이 실질적 증거 에 입각한 위협 판단 에 근거해 추방할 수 있다. ◆ 체류 허가: 영주권을 얻거나 독일 국적을 취득하려는 외국인에 대해서는 방첩 기관인 헌법 수호청이 사전 조사하도록 한다. 기존에도 헌법수호청의 조사는 가능했으나 실제 조사한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조사가 의무화된다. ◆ 독일 사회 적응 교육: 독일 사회에 통합시키기 위한 언어와 문화, 역사, 법규 등에 관한 프 로그램에 체류자들의 참여를 법으로 의무화한다. 관련 비용은 정부가 지원하되 불참자나 미이수 자에 대해선 체류 연장 불허 등의 불이익을 준다. ◆ 종교적 극단주의자와 인신매매범 추방: 극단적 이슬람주의를 설교하는 등의 종교적 극단주 의자를 추방하는 일을 더 손쉽게 한다. 현행법은 다른 사람들에게 폭력을 공개적으로 교사, 옹호 하는 경우에만 추방토록 하고 있으나, 증오를 부추기는 행위 등을 포함해 추방 대상 행위를 확대 FES-Information-Series 하고 더 구체적으로 규정한다. 인신매매와 관련해 1년 이상의 형을 받은 경우 추방할 수 있도록 한다. ◆ 인권 차원의 난민 허용: 강제로 할례를 받을 위험에 처한 여성 등 성적인 특수성 때문에 박 해를 받거나 비국가 기관의 박해를 받을 수 있는 외국인들에게 난민을 인정을 한다. 이 경우 제 네바 인권협약의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의 새 이민법이 2004년 7월 8일 상원에서 통과됨으로써 그간 순수 혈통을 고집해 왔던 독일이 다인종 국가로 전환하는 전기를 맞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전문 기술 인력이나 전 문 학술 인력의 취업 체류와 이민에 대해 합법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독일은 그 동안 유럽연합 (EU) 회원국이 아닌 국제이주 노동자들의 취업 이민을 엄격 규제했다. 그러나 새로운 이민 법안 이 2004년 5월 하원을 통과한 데 이어 7월에 상원에서 가결되었다. 이 법은 시행령과 규칙 등 하위 규정 보완 작업을 거쳐 2005년 1월부터 시행된다. 이번 이민법안의 개정으로 매년 20~30만 명의 국제이주자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간 특히 전문 인력 분야에서 노동인구 감소로 위협받던 독일 경제계가 새 법안 덕에 활기를 되찾 을 것이다. 사실 독일은 인구 고령화와 출산율 저하 등으로 2030년 노동인구가 현재의 4천2백만 명에서 3천만 명으로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런 절대적 노동력 감소를 이번 이민법 개정으로 인 해 상당 부분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20~30년의 앞일을 내다보며 독일의 노동 시장 문제를 순조로이 해결할 것이라 확신할 수는 없다. 독일에는 현재 7백30만 명의 외국인이 거주하고 있어 전체 인구 중 외국인이 차지하는 비율 (9%)이 유럽국가 중 가장 높으면서도 유럽에서 가장 보수적인 이민 정책을 고수해온 나라였다. 물론 새 이민법이 외국인의 독일 이민을 미국이나 캐나다 수준으로 만든 것은 아니나 전문 인력 들에게 문이 많이 열린 것만은 분명하다. 한편, 이민 규정이 여전히 다른 나라에 비해 까다로울 뿐 아니라 고급 외국 노동 인력을 실질 적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세부적 장치가 미비하다는 지적도 있다. 더욱이 이 법은 범죄 혐의가 없는 외국인이라도 범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추방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어 인권침해의 요소가 강하다는 비판도 있다. FES-Information-Series 국제이주민의 독일 내 통합과 관련 추가적으로 중요한 움직임들이 있었다. 우선은 국적취득법 인데, 1999년 이후 사민-녹색 연정이 이중 국적 허용을 추진하다가 보수 기민당의 반대로 다음의 합의가 도출되었다. 즉 2000년 1월 1일부터 독일에서 태어나는 이주민 아이들은 부모 중 한쪽이 적어도 8년 이상 합법 거주를 하였고 무기한 체류 허가나 영주권을 소유하고 있으면 자동으로 독 일인이 된다. 또 이주민 자녀들은 원칙적으로 만 24세 전에 독일과 부모 국적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 이로써 기존의 속인주의 원칙이 속지주의 원칙으로 바뀌었다. 법 개혁 후에 독일 국적을 신 청하는 이주민의 수는 점차 늘고 있으나 정보 부족과 고령층의 원국적 포기가 어려워 예상보다는 적다. 또 반차별대우법(Antidiskriminierungsgesetz) 제정도 있는데, 그것은 독일 국적을 취득해도 피 부색과 문화가 다른 이민자들은 사회생활에서 많은 차별을 느끼기 때문이다. 가령, 택시 운전기 사로 일할 때, 식당이나 유흥장을 이용할 때, 주택을 구할 때, 은행이나 보험 거래 시 차별 대우 를 받는다. 이런 무시 및 차별 대우는 현존하는 공법으로 다루어질 수 없기에 반차별대우법을 통 해 해결하고자 한다. 4. 독일의 이주 노동자 정책에 대한 평가 1999년 이후 새 독일을 이끄는 사민당과 녹색당은 16년간 장기 집권했던 보수 기민당(CDU) 과는 달리, 독일이 50년 가까운 이민 사회 라는 엄연한 사실에 입각하여 이민자들을 독일 사회 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그들이 정착, 동화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정책을 수립하고자 한다. 나아가 기존의 모집 중지 정책을 중단하고 새로운 전문 인력을 공급하기 위한 문호개방 정책도 펴고자 한다. 1950년대부터 약 20년간 계속된 해외 인력 도입 정책은 경제난과 노동시장 악화로 인해 1970 년대 중반 이후 유입 규제 정책, 그리고 1983년 이후 귀국 촉진책 등으로 방향 전환이 되었다가 이제 또다시 20년이 흐른 지금 정보기술 분야의 부족한 전문 인력을 대거 유입하기 위해 새로운 개방 정책이 나온 것이다. FES-Information-Series 그러면서도 독일 경제의 필요에 따른 국내 노동시장 문제나 치안과 관련한 사항들에만 초점을 맞추었던 이전의 이민자 동화 정책과는 달리, 현재는 이민자들이 독일 사회에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독일인들과 동등하게 균등 기회를 누릴 수 있게 체계적 동화 정책을 수립하려 한다. 요컨대 새 연합 정부는 이민자를 부족한 존재 로 보고 독일 사회, 문화에 흡수 적응 을 요구했던 종래 정책을 비판하고, 이민자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인정하여 이민자를 보살피는 게 아니고 파 트너로 삼자 는 기치를 내세우고 있다. 대개 노동 허가제로 상징되는 독일의 이주 노동자 정책은 많은 이주민의 귀국 거부 및 독일 내 정착, 인종 갈등 등을 근거로 하나의 대표적 실패 사례 로 지적되기 일쑤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지극히 자국민 중심적이며 심지어 인종주의적이기까지 하다. 오히려 노동력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해외 인력을 도입했다면 독일처럼 이주 노동자들도 동일 한 노동 3권과 사회보장권을 누려야 하며, 본인이 원하는 경우 일정한 조건 속에서 시민으로 정 착해서 거주하는 것도 허용해야 한다. 물론 독일 정책이 결코 완벽하거나 최선의 사례라고 보기 는 어렵다. 하지만 다양한 사회적 견해차를 해소하려 노력하면서도 인종주의에 대해 경계를 게을 리 하지 않는 노력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런 점에서 독일 사례를 노동 허가제의 실패 사례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노동시장에서의 조 심스런 문호 개방과 체계적인 사회 통합 정책을 조화롭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선진 사례의 하나 로 보는 것이 더 올바를 것이다. 독일의 개인정보보호 제도 한 재 각, 민주노동당 연구원 2004년 8월 󰠲󰠲󰠲󰠲󰠲󰠲󰠲󰠲󰠲󰠲󰠲󰠲󰠲󰠲󰠲󰠲󰠲󰠲󰠲󰠲󰠲󰠲󰠲󰠲󰠲󰠲󰠲󰠲󰠲󰠲󰠲󰠲󰠲󰠲󰠲󰠲󰠲󰠲󰠲󰠲󰠲󰠲󰠲󰠲󰠲󰠲󰠲󰠲󰠲󰠲󰠲󰠲󰠲󰠲󰠲󰠲󰠲󰠲󰠲󰠲󰠲󰠲󰠲󰠲󰠲󰠲󰠲󰠲󰠲󰠲󰠲󰠲󰠲󰠲󰠲󰠲󰠲󰠲󰠲󰠲󰠲󰠲󰠲󰠲󰠲󰠲󰠲󰠲󰠲󰠲󰠲󰠲󰠲󰠲󰠲 독일은 70년대 초부터 개인정보를 보호하기 위한 법제도를 발전시켜 왔다. 우선 일부 주에서 시작 된 개인정보보호법 제도들이 발전하여, 나중에는 연방 차원의 개인정보보호법 제도가 운영되기 시작 했다. 그 후, 이 법은 개인정보자기결정권 을 확립하는 연방재판소의 판결을 통해서 보다 강화되었으 며, 1995년 마련된 EU 차원의 개인정보보호준칙에 맞추어서 한 단계 더 발전하게 되었다. 연방 국가인 독일은 연방과 주 차원에서 각각 역할을 분담하여 개인정보보호 체계를 구축하고 있으 며, 연방과 주 차원의 개인정보보호법이 마련되어 있다. 연방개인정보보호법은 개인정보보호에 관한 연방 차원의 일반법으로서 공공과 민간 부문에 모두 적용된다. 다만, 연방 개인정보 보호관은 원칙적 으로 연방의 공공 부문에 한정하여 감독을 하며, 주의 공공과 민간 부문의 감독은 각 주의 개인정보 보호관이 담당하게 된다. 한편, 연방개인정보보호법은 질의권, 통지받을 권리, 정정권과 삭제권, 이의 제기권 및 문의권 등 정보 주체의 권리를 명확히 보장하고 있다. 주 개인정보보호관의 임무는 공공기 관 및 민간에서 이루어지는 정보처리가 연방 및 주의 개인정보보호법률에 부합되도록 감독하는 역할 을 수행한다. 독일의 민간 부문에서는 자율적 규제 방식인, 소위 독일 모델 인 개인정보 보호관 제도를 활발히 운영하고 있다. 개인정보 보호관 제도는 연방 혹은 주정부에 개인정보보호와 관련된 신고 의무를 면 제하는 대신에, 기업 내부에 개인정보보호를 책임지는 담당자를 지정하여 운영하는 제도다. 개인정보 보호관은 일정 기준 이상의 기업에는 의무화되어 있으며, 업무 수행과 관련하여 해고할 수 없는 등 높은 수준의 독립성을 보장받는다. 또한, 이들은 기업의 내부 활동이 연방법 등의 개인정보보호법률 과 일치하도록 감독하는 책임과, 이것이 지켜지지 않아 발생하는 손해배상에 대한 책임을 함께 진다. 도이췌 텔레콤의 경우, 그룹 차원에서 50여 명의 개인정보보호 담당 직원을 두고, 연간 600~700만 유 로(약 84~8억 원)의 예산을 지출하고 있을 정도다. 󰠲󰠲󰠲󰠲󰠲󰠲󰠲󰠲󰠲󰠲󰠲󰠲󰠲󰠲󰠲󰠲󰠲󰠲󰠲󰠲󰠲󰠲󰠲󰠲󰠲󰠲󰠲󰠲󰠲󰠲󰠲󰠲󰠲󰠲󰠲󰠲󰠲󰠲󰠲󰠲󰠲󰠲󰠲󰠲󰠲󰠲󰠲󰠲󰠲󰠲󰠲󰠲󰠲󰠲󰠲󰠲󰠲󰠲󰠲󰠲󰠲󰠲󰠲󰠲󰠲󰠲󰠲󰠲󰠲󰠲󰠲󰠲󰠲󰠲󰠲󰠲󰠲󰠲󰠲󰠲󰠲󰠲󰠲󰠲󰠲󰠲󰠲󰠲󰠲󰠲󰠲󰠲󰠲󰠲󰠲 1. 들어가며 FES-Information-Series 교육부가 추진한 교육행정 정보시스템(NEIS) 문제가 사회적 쟁점이 되면서, 시민사회가 오래전 부터 주장해온 개인정보보호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가 상(on-line)과 현실 세계(off-line)의 구별 없이 공공과 민간 영역의 개인 정보의 수집 ․ 이용에 대해 행정 지침이 아닌 일관된 원칙과 법체계를 통해서 규율하고, 이를 독립된 감독 기구를 통해 감시 하도록 하자는 주장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몇 십 년 앞서 개인정보보호법을 제정하고 운영 해 온 서구의 사례, 특히, 독일의 제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독일의 개인정보보호법 제도의 발달 역사와 특징을 개략적으로 살펴본 후, 독일 개인정보보호법 제도의 골간이라고 할 수 있는 연방개인정보보호법의 주요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 다. 또한, 주별로 마련하여 운영하는 개인정보보호 제도도 언급할 것이다. 민간 부문의 실질적인 개인정보보호는 주 법의 운영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에 그 실질적인 의의는 크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민간 영역의 제도도 집중적으로 살펴볼 예정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민간 영역에 적 용되는 개인정보보호 일반법이 제정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에 이는 시의적 절하다고 본다. 이를 위해서 민간 영역을 규율하는 연방과 각 주의 개인정보보호법의 규정과 독 일 전문가들이 강조하는 독일식 모델 인 개인정보 보호관 제도를 소개하려고 한다. 2. 독일 개인정보보호법 제도의 발달과 특징 1) 독일 개인정보보호법 제도의 발달 개인정보보호에 관한 법률은 1970년 헤센 주에서 처음 제정되었다. 이어서 1974년에 라인란트팔츠 주가 개인정보남용금지법을 제정하였다. 주 차원에서 개인정보보호법 제도가 먼저 수립된 후, 1977년 연방 차원의 연방개인정보보호법이 제정되었다. 당시에는 개인정보보호의 측면보다는 행정의 효율성이 강조되었던 초기 정보화 사회였기 때문에, 현재와 같이 보호와 활용의 조화를 강 조하던 시기와는 차이가 있는 선도적인 조치였다. FES-Information-Series 한편, 1983년 연방헌법재판소는 인구 조사 판결에서 수집한 데이터를 단순히 통계 목적을 넘 어 행정적인 목적으로 이용하고자 한 사건에 대해 위헌 결정을 하면서, 개인정보자기결정권 을 확 립하였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 결정을 20세기의 판결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판결 결과를 수 용하기 위해서 1986년에 1차, 1990년에 2차 연방개인정보보호법 개정이 있었다. 이어 1995년에 유럽연합(EU)의 개인정보보호준칙(Directive 95/46/EC)이 제정되면서, 독일 정부는 이 유럽연합 개인정보보호준칙과 연방개인정보보호법이 조화되도록 2001년 1월에 광범위한 3차 법 개정을 하 였다. 유럽연합의 준칙이 개정을 요구한 시기인 1998년을 넘겨 개정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법 개정에도 불구하고, 유럽연합 개인정보보호준칙이 요구하고 있는 공공과 민간 부문의 실질적 인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점과 독립성이 완벽히 보장되는 감독관청의 설립이 미흡했다는 점에 대해서 비판이 제기되었다. 독일연방정부는 현대화된 기술과 세계화 추세에 맞추어 이 법을 현대화시키기 위해 법률 개정 을 준비하고 있다. 그 중에는 독일연방정부가 정보통신 분야의 개인정보보호를 위해서 별도로 제 정한 법률 등을 통합하는 과제도 있다. 1997년 7월에 제정된<통신서비스정보보호법>과 통신법 제85조와 제 89조, 통신서비스업 정보보호규칙 등이 그 대상이다. 2) 연방 국가의 특징 연방과 주의 권력 분립 원칙에 따라 연방개인정보보호법에 근거한 연방개인정보보호관청의 감 독 범위는 연방의 공공 부문에만 한정되고, 각 주의 개인정보보호법에 근거하여 설치된 개인정보 보호관청의 감독 범위는 각 주의 공공과 민간 부문 모두를 포함한다. 다만, 주의 공공기관일지라 도 어느 한 주의 개인정보보호관청에만 감독권을 주기가 부적절한 부분에는 연방개인정보보호관 청의 감독권이 미치도록 하였다. 연방과 주정부 개인정보보호관청은 직무상 상호 독립적이지만, 업무 협의를 위해 연 2회 합동회의를 갖으면서 협력하고 있다. 3) 역사적 배경으로 인한 특징 나치 정권의 유태인 색출과 학살이 정부의 과도한 개인정보의 수집과 용이한 접근에 기인했다 는 반성과 구동독 지역에서 주민에 의한 주민 통제와 정보 유출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불안감 때문에 독일은 아직까지 연방 차원의 정보공개법을 마련하지 않고 있다(다만, 몇몇 주에서 FES-Information-Series 주정부 개인정보보호관이 정보 공개에 관한 업무까지 수행하고 있다). 공공기관이 발행하는 신분 증은 각 주의 가장 아래 단계의 관공서가 발급하는데, 수집된 개인정보는 전산화하지 않고 서류 형태로 보관하고 있으며, 원칙적으로 상급관청에 넘기지도, 다른 기관과 공유하지도 않는다. 다 만 외국인에 대한 통제는 각 주를 벗어나 연방 차원에서 실시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전산화 작업이 확대되고 있다. 3. 연방 차원의 개인정보보호법제: 연방개인정보보호법 가. 연방개인정보보호법의 적용 범위 (1) 개인정보의 범위 연방개인정보보호법은 개인정보를 특정한 또는 특정인을 유추할 수 있는 개인에 관한 일체의 (진술) 정보 라고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개인정보에는 컴퓨터 등 정보처리 장치를 이용하여 처 리하는 자동화된 개인정보 뿐만 아니라 비자동화된 개인정보 도 모두 포함된다. 여기에서 자동화된 개인정보 란 정보처리 장치를 이용하여 처리되는 정보를 말하고, 비자동 화된 개인정보 란 동일한 방법으로 작성되고 특정한 표시에 따라 접근할 수 있고 활용할 수 있 는 개인정보의 모음을 말한다(위 법 제3조). 다만, 공공과 민간 부문에 적용상의 차이를 두어, 공공기관이 처리하는 정보는 자동화된 개인정보와 비자동화 된 개인정보 모두를, 민간 정보는 자동화된 개인정보만을 연방개인정보보호법의 적용 대상인 개인정보로 규정하였다. (2) 법률 적용 대상자의 범위 연방개인정보보호법은 개인정보보호에 관한 연방 차원의 일반법으로서 공공과 민간 부문에 모 두 적용되고, 민간 영역인 경우는 자연인은 물론 법인이나 기타 단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개인정보 취급자를 법률 적용 대상자로 정하고 있다(위 법 제1조 제2항). 일반법의 지위를 갖고 있으므로 특정한 영역에 개별법이 있는 경우에는 그 개별법이 특별법으 로서 연방개인정보보호법에 우선하여 적용되고(위 법 제1조 제3항), 감독기관의 감독권이 미치는 범위에서 연방개인정보보호관의 감독 범위는 원칙적으로 연방의 공공 부문에 한정된다(위 법 제 24조 1항). FES-Information-Series 나. 연방 개인정보 보호관 (1) 법적 지위 연방 개인정보 보호관은 행정 조직상 연방내무부 소속이고, 장관의 감독을 받는 독임제 관청이 며, 현재 약 70명의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연방 개인정보 보호관은 공무원 신분으로 임기 5 년에 중임이 가능하며, 연방의회에서 선출하고 대통령이 임명한다. 또한 유럽연합의 개인정보보 호회의에 국가를 대표하여 참가하기도 하는데, 유럽연합의 실질적인 개인정보보호 대책은 각국의 연방 개인정보 보호관이 수행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연방 개인정보 보호관은 조직상 연방내무부 소속이지만 직무상으로는 독립성을 완전히 보장 받고 있다. 예를 들어, 연방내무부 장관은 연방 개인정보 보호관의 직무에 대한 감독권도, 업무 보고를 받을 권한도 없다. 연방 개인정보 보호관은 연방의회에 대해서만 업무 보고를 할 뿐이 다. 예산의 경우에도, 연방내무부에서 지원을 받지만 연방 개인정보 보호관이 매년 의회에 직접 출석하여 필요 예산에 대하여 의견을 진술하고 예산을 할당받고 있다. 감독 범위는 원칙적으로 연방의 공공 부문에 한정되며, 다음과 같다. ① 연방정부와 연방법원 ② 연방정부의 감독 하에 있는 법인, 공공시설, 재단. 이들 중 우리나라의 공사와 같은 공기업은 시장에서 경쟁에 참여하지 않는 경우(즉, 독점인 경우)에 연방의 감독 범위에 속한다. 다만, 도이췌 텔레콤은 민영화되었고 독점도 아니지만 관례적으로 연방 개인정보 보호관의 감독권에 속한다. ③ 주정부가 설립했으나 수행하는 업무 범위가 해당 주를 넘어서는 공공기관. (2) 직무와 권한 연방 개인정보 보호관은 개인정보보호에 관하여 법적인 정보 보호, 기술적인 측면에서 필요 한 교육과 자문을 하고, 개인정보와 관련된 법이나 제도의 도입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다. 둘 째, 개인정보 처리에 대한 각종 불만과 고충 사항을 접수하고 이에 대한 상담이나 기술 지원 및 분쟁을 조정하는 옴부즈맨의 역할을 수행한다. 셋째, 정보 주체의 개인정보 침해 신고가 있거나 감독관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에 연방 개인정보 보호법의 준수 여부에 대한 감 독을 위해 해당사항을 조사한다. 넷째, 조사한 기관에 법위반 행위나 개인정보 처리에서 부 적절한 점이 발견되는 경우 해당기관에 자료 제출과 함께 시정 계획을 포함한 진술서를 요구 하고, 상급기관에 통보하는 권한이 있다. 하지만 시정명령권 등 강제력은 없다. 다섯째, 정보 주체의 질의에 대해 해당기관이 거부한 경우 이에 관한 이의신청에 관련된 업무를 담당한다. 여섯째, 개인정보를 처리하는 연방 공공기관의 개인정보 담당관은 개인정보를 생산(저장, 변 FES-Information-Series 경, 전송, 차단, 삭제를 포함하는 개념)하기 전에 개인정보 처리 기관, 개인정보의 수집 ‧ 생  산 ‧ 이용의 목적, 개인정보의 삭제를 위한 기간, 제3국으로의 전송 계획 등을 보고할 의무가 있는 데, 이러한 보고를 받고 감독하는 업무를 수행한다. 다. 정보 주체의 권리 연방개인정보보호법은 정보 주체의 권리를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우선 질의권이 보장된다(연방 개인정보보호법 제19조). 정보 주체는 개인정보를 처리하는 기관에 개인정보의 출처, 수집된 정보 의 내용, 수집의 목적, 개인정보가 계속적으로 전달되고 있는 경우 그 수신처 등을 질의할 수 있다. 질의를 받은 기관은 법정 거부 사유가 없는 한 질의에 응답을 해야 하고, 응답을 거부한 경우 정보 주체는 연방 개인정보 보호관에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또한 통지받을 권리가 있다(연방개인정보보호법 제19a조). 정보 주체의 동의 없이 개인정보를 수집한 경우 그 기관은 수집 기관의 명칭, 수집 ‧ 저장 ‧ 생산 ‧ 이용의 목적 등을 정보 주체에게 통지해야 한다. 이 외에 잘못된 개인정보보호에 대해서 정정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 삭제를 요구 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며,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연방개인정보보호법 제20조). 그리고 문의 권도 보장되는데, 모든 사람은 연방의 공공부문에서 개인정보의 수집, 생산, 이용을 통해 자기의 권리가 침해되었다는 확신이 있을 경우 연방 개인정보 보호관에게 문의할 수 있다(연방개인정보 보호법 제21조). 라. 개인정보 침해에 대한 구제 수단 우선 개인정보보호 기관을 통해서 위에서 열거한 질의권, 정정 요구권, 삭제 요구권, 이의 제 기권 등을 이용하여 구제받을 수 있는 수단이 있다. 또한, 연방 개인정보 보호관은 연방 공공기 관에 대한 강제권은 없으나 개인정보 침해에 관련된 피해 신고를 접수하고 해당 기관과 분쟁을 중재하는 옴부즈맨의 역할을 수행한다. 마지막으로, 사법 절차를 통한 구제 수단이 있다. 개인정보 처리 기관이 법을 위반하거나 부적 절한 정보 처리로 인해 개인에게 손해를 입힌 때에는 해당 기관은 물론 그 기관의 개인정보 보호 관도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 재산상 손해가 없는 경우에도 인격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가 있는 경 우는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 손해 배상액은 130,000유로(약 1억8천 원)를 상한으로 법률에 정해 두었다. 4. 주 차원의 개인정보보호법제 FES-Information-Series 가. 개설 각 주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개인정보보호법이 존재한다. 공통되는 점은 연방정부와 마찬가지로 독임제 관청으로서 명칭은 다르지만 임무가 유사한 개인정보 보호관을 두고 있으며, 주정부 개인정보 보호관의 감독권의 범위는 주의 공공부문뿐만 아니라 민간부문에까지 미친다. 특이하게도 연방정부와는 달리 개인정보 보호관이 개인정보보호 업무와 더불어 정보자유 업무 (우리나라의 행정기관의 정보공개 업무에 해당)까지 수행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주도 있다(노르 트라인-베스트팔렌, 슐레스비히-홀스타인 등 4개 주). 나. 주정부 개인정보 보호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과 슐레스비히-홀스타인 주정부의 예를 간략히 살펴보자. 이들 주는 독자 적인 개인정보보호법을 갖고 있다. 이들 모두 주의회에서 선출하는 개인정보 보호관을 두고 있으 며, 개인정보 보호관은 개인정보보호 업무와 함께 정보자유(정보공개) 업무도 수행할 수 있는 권한 이 있다. 여기서 정보자유는 우리나라의 정보공개 청구와 관련된 업무에 해당한다. 정보공개는 우 리나라처럼 공공기관이 보유하는 정보에 대해 일반적인 공개 청구권이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정 보 주체 자신과 관련된 정보만 그 공개 대상으로 하고 있다. 한편, 슐레스비히-홀스타인 주의 개인정보 보호관은 현재 비정부기구인 독일정보보호연합 (DVD)의 협회장의 직위를 함께 갖고 있다. 이는 슐레스비히-홀스타인 주의 개인정보 보호관이 정부 기구로서 감독관청이지만 실제로는 NGO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주의 개 인정보 보호관은 예방적 보호 활동, 교육, 계몽, 자문 활동에 주력하고 있으며, 국제적 행사인 개 인정보보호아카데미를 연 1회 개최하는 등 국제협력 사업도 수행하고 있다. 5. 민간 부문의 개인정보보호 제도 5-1. EU 개인정보보호준칙의 관련 규정 1995년에 제정되어 독일을 비롯한 유럽 국가의 개인정보보호법률 개정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는 EU 개인정보보호준칙은 개인정보 보호관을 임명하고 역할을 부여할 수 있는 근거 조항을 제 시하고 있다. 개인정보를(자동화) 처리하기 전, 감독관청에 이를 신고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개 FES-Information-Series 인정보 처리자가 국내법에 따라 개인정보 보호관을 임명할 경우에는 신고의 의무를 면제할 수 있다 고 규정하고 있다(EU 개인정보보호준칙 제18조 2항). 또한 개인정보를 처리하기 전에 정보 주체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지를 통제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위 준칙 제20조 1항), 감독관청 혹 은 기업의 내부에서 임명된 개인정보 보호관이 그것을 통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위 준칙 제20조 2항). 5-2. 연방개인정보보호법의 관련 규정 공공과 민간 영역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연방개인정보보호법의 제1장 일반 및 공통 규정을 보 면, 이 법의 목적과 적용 범위, 개인정보보호의 원칙과 개인정보 처리에 부과되는 의무 내용 및 개인정보 보호관 등에 대해서 규정하고 있다. 특히 이 절에서 중심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규정 은 개인정보 보호관의 임명에 관한 제4f조와 개인정보 보호관의 임무에 관한 제4g조가 있다. 현 재 이 조항들은 민간 부문뿐만 아니라 공공 부문에도 적용되고 있으나, 원래 이 조항은 민간 영 역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민간 부문에 대해서 규율하는 이 법의 제3장에 포함되어 있었다. 2001 년 연방개인정보보호법의 개정 시 공공 부문에 대해서도 개인정보 보호관 제도를 도입하기 위 해서 제1장으로 옮겨왔다. 프랑스가 양자 부문을 실질적으로 통합 운영하고 있는 점이 이런 변 화의 동기로 작용한 것이다. 개인정보 보호관의 임명, 역할과 권한 등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 은 제6절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한편, 기업 등이 개인정보 보호관을 임명함으로써 면제받는 신고의 의무와 사전 통제의 의무에 대해서 개략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연방개인정보보호법 제4d조에 의하면, 민간 부문의 자 동화된 개인정보의 생산 절차는 해당 감독관청에 신고하도록 되어 있으며(1항), 개인정보 보호 관을 임명할 경우에 그러한 의무를 면제해주고 있다(2항). 또한 자동화된 개인정보 생산이 정보 주체의 권리와 자유에 특별한 위험 가능성이 있을 경우 개인정보 생산 전에 검사(사전 통제)해야 한다(5항). 사전 통제는 일차적으로 개인정보 보호관이 행하며, 필요한 경우에 해당 감독관청과 협의하도록 하고 있다(6항). 의무화된 신고 내용은 제 4e조에서 규정하고 있다. 공통적인 규정 이외에 민간 부문에 대해서 특별히 규율하는 내용은 연방개인정보보호법 제3장 (민간 부문과 공법상의 경쟁 기업의 개인정보 생산)에서 규정하고 있다. 위 법 제3장의 1절에서는 개인정보 생산의 법적 근거 에 대해서, 제3장 제2절은 관련인의 권리 를 다루고 있다. 또한 제3장 제3절은 감독관청 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FES-Information-Series 특히 제3장 제3절의 감독관청 은 민간 부문의 기업 등이 임명하는 개인정보 보호관을 감독할 책임과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제38조 5항에 따라, 감독관청은 기업 등이 임명한 개인정보 보호관 이 임무 수행을 위해 자격이 부족하고 신뢰성이 없다고 판단하면 해당 개인정보 보호관의 해임을 요구할 수 있다. 그리고 위 법 제38조 6항에 의하면 민간 부문의 개인정보보호에 관한 실행의 통 제를 담당하는 감독관청은 주정부 또는 그로부터 위임받은 기관이 지정하도록 되어 있다. 5-3. 주 개인정보보호법과 주 개인정보 보호관에 관한 법률 규정 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경우 대개의 경우 민간 영역의 개인정보보호에 대한 감독은 주의회에서 선출되는 주 개인정보 보 호관이 담당하게 된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는 주의 공공기관이 개인정보 처리 과정에서 정보 주체의 자기 결정권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 차원의 개인정보보호법을 제정하고 있 다. 이 주의 개인정보보호법은 정보보호의 일반적 사항을 제시한 1부에 이어서, 2부에서는 개인 정보보호 및 정보자유 업무를 담당하는 주 담당관(이하, 주 개인정보 보호관) 에 대해서 규정하고 있다. 명칭에서도 보듯이 개인정보 보호관은 우리나라 식으로 표현하자면 정보 공개 에 관한 업 무도 감독하도록 하고 있으며, 주의회에서 선출되어 업무를 위탁받고 있어 독립성을 가지고 있다. 개인정보 보호관의 주요 임무는 주의 공공기관에서 하는 정보처리가 연방과 주의 개인정보보 호법률에 부합되도록 감독하며, 이에 대해 상담, 교육을 하는 것이다. 또한 개인정보보호의 문제 점을 발견하였을 경우 담당 기관에 이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고 시정을 요구할 수 있고, 주의회 에 정기적으로 보고하는 의무도 가지고 있다. 한편 이 글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민간 부문의 개인정보보호와 관련하여, 연방개인정보보호법 제38조에서 규정한 민간 부문의 감독관청은 노 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개인정보보호법 상의 개인정보보호 및 정보자유 업무를 담당하는 주 담당관 으로 정하고 있다(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개인정보보호법 22조 6항). 이에 따라서 주 개인정보 보호관은 주 영역 내에 있는 기업 등의 민간 부문의 개인정보보호에 관한 감독관청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FES-Information-Series 나. 슐레스비히-홀스타인 주의 경우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와 함께 독자적이고 선진적인 개인정보보호제도를 발전시키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는 슐레스비히-홀스타인 주의 개인정보보호법은 주 개인정보 보호관 및 감독 기구 설 치에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와는 조금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는 주의회에서 한 명의 주 개인정보 보호관을 선임하지만 주의 내무부 소속이며, 그의 업무를 주 내무부 소속 공무원들이 지원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슐레스비히-홀스타인 주 개인정보보호법 은 4절에 의거하여 독립적인 감독 기구를 별도로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주의회를 통해서 선출된 주 개인정보 보호관이 독립적인 감독 기구를 이끌도록 하고 있다. 슐레스비히-홀스타인 주 개인정보보호법에서도 개인정보보호 주 독립센터는 연방개인정보보호 법 38조가 정한 주의 민간 부문의 개인정보보호를 감독하는 감독관청으로 지정되어 있다. 6. 민간 부문 개인정보보호의 독일식 모델: 개인정보 보호관 6-1. 독일식 모델의 개요 독일식 모델이란, 기업 내부에 연방개인정보보호법 등의 개인정보보호법률을 준수하도록 감 독하는 개인정보 보호관을 임명하는 대신, 정부 감독관청 등에 관련된 사항에 대한 신고 의무 등을 면제해주는 자율 규제의 체계를 의미한다. 이는 앞서 EU 개인정보보호준칙을 통해서 확립 된 접근 방식으로, 독일 이외에 몇몇 유럽 국가들도 이미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은 연방개 인정보보호법을 통해서 일정 조건 이상의 기업 등에게 개인정보 보호관을 임명하도록 하는 의 무를 강제하고 있다는 점(의무적인 자율 규제)에서, 국내법을 통해서 개인정보 보호관 개념을 적용하고 있기는 하나 선택적으로 개인정보 보호관의 임명을 할 수 있는 네덜란드와 스웨덴과 는 구별된다. 가. 개인정보 보호관의 임명 의무화 앞서 언급하였듯이 연방개인정보보호법 제4f조는 일정한 조건 이상의 기업은 개인정보 보호관 의 임명을 의무화하고 있으며, 서면으로 임명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자동화된 수단을 통해 개인정 보를 수집, 처리, 이용하는 기업들로서 그러한 활동에 4명 이상의 직원을 고용한 경우에 개인정보 FES-Information-Series 보호관 임명의 의무가 있다. 또한 비자동화된 수단으로 개인정보를 수집, 처리, 이용하더라도 20 명 이상의 직원을 정규직 형태로 고용하는 기업도 역시 개인정보 보호관을 임명해야 한다. 또한 사전 평가가 필요한 자동화된 개인정보 처리를 수행하는 기업 등은 직원의 수와 상관없이 개인정 보 보호관을 임명할 의무가 있다. 한편 개인정보 보호관 임명의 의무를 가진 기업 등은 업무를 시 작한 후 한 달 이내에 개인정보 보호관을 임명하여야 한다. 이를 위반할 경우 25,000유로(약 3천5 백만 원)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나. 개인정보 보호관의 주요 임무 개인정보 보호관의 주요 업무는 고객과 피고용인의 개인정보가 포함된 정보처리 과정에서 연방 개인정보보호법을 포함한 개인정보보호와 관련된 법률 조항들을 잘 준수하도록 독립적으로 점검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관련 기업의 해당 감독관청과 협의하도록 규정되어 있다(연방개인정보 보호법 제4g조). 특히, 개인정보 보호관은 개인정보를 처리하는 프로그램의 적절한 사용을 모니터 링하며, 기업은 이를 위해서 개인정보의 자동처리에 앞서 적절한 시기에 이에 대해서 통보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한 기업에서 개인정보를 다루는 직원들이 각종 개인정보보호 법률조항을 숙지 하고 지킬 수 있도록 교육하는 임무도 담당하고 있다(적법성의 보장). 그리고 연방개인정보보호법 제4f조에서 자동화된 개인정보 처리 절차에 대해서 해당 감독관 청에게 의무적으로 신고하도록 규정한 것과 관련하여, 기업은 제4e조에서 명시한 의무 신고 내 용을 개인정보 보호관에게 제공해야 한다. 또한 신고 의무가 면제된 기업의 경우, 개인정보 보 호관은 해당 의무 신고 내용에 대해서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적절한 방법으로 열람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만 한다(투명성 보장). 또 다른 주요 임무 중 하나는 정보 주체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이 있는 개인정보 생 산에 대해서 사전 통제를 하는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사전 통제에 대해서는 연방개인정보보 호법 제4d조 제5항과 제6항이 규정하고 있다. 특히 사전 통제를 실행해야 하는 경우를 구체적 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연방개인정보보호법 제3조 제9항의 특별한 개인정보 의 생산, 능력과 업 적, 행동을 포함하여 관련인의 인격을 평가하는 개인정보의 생산에 대해서 적용한다. 여기서 특 별한 개인정보 란 인종적 ․ 윤리적 출처, 정치적 의견, 종교적 또는 철학적 신념, 노동조합 가입 유무, 건강 또는 성생활에 대한 개인정보를 의미한다. 독일 정보보호 및 정보안전협회에 따르 FES-Information-Series 면, 개인정보 보호관의 사전 통제 결과, 합법성이 보장되지 않는 개인정보 처리는 허용되지 않 는다고 밝히고 있다(사전 통제). 다. 개인정보 보호관의 독립적 지위 및 업무 조건 보장 기업의 개인정보 보호관은 법률(민법 제626조)에 따라 보호되며, 임의로 해고되지 않는다. 다 만 감독관청은 개인정보 보호관이 그의 임무 수행을 위한 필요한 자격과 신뢰성을 잃었다고 판단 이 되면, 해당 개인정보 보호관의 해임을 요구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연방개인정보보호법 제 38조 제5항 아래). 한편, 개인정보 보호관은 기업의 최고 경영자에게 직접 복종하도록 하고 있어 독립성을 보장받고 있으나, 개인정보 보호관의 의견에 대해서 기업의 최고 경영자가 의견을 달리 할 경우에 이를 관철시킬 수 있는 권한은 없다. 다만, 그러한 이유로 개인정보 보호관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보장하여, 독립적인 활동을 보장해준다는 것이다. 또한, 개인정보 보호관은 업무 수행에 필요한 권한과 수단, 직원, 사무실, 기기와 장비, 재원 을 제공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업무 수행에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개인정보 보호관은 기업의 개인정보 처리에 관한 자료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도이췌 텔레콤의 사례는 다음 소절을 참조할 것). 라. 개인정보 보호관의 자격 조건과 의무 개인정보 보호관의 자격에 대해서 법률은 자세히 규정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연방개인정보 보호관은 임무 수행에 필요한 전문 자격과 신뢰할 수 있는 사람만이 될 수 있다는 규정만이 있 으며(연방개인정보보호법 제4f조 2항), 이로부터 유추할 수 있다. 독일 정보보호 및 정보안전협회 는 자신들의 연구를 통해서 보다 자세한 자격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개인정보보호법에 대한 전문 적 지식 , 기술 표준에 대한 충분한 지식, 경제 관련 사업에 대한 기초 지식, 기업 구조와 활동에 대한 전문적 지식 등이 그것이다. 개인정보 보 호관은 정보 주체로부터 허락을 받지 않는 한, 정보 주체의 신분과 정보 주체를 유출할 수 있는 정보에 대해서 비밀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마. 개인정보 보호관을 포함한 민간 영역의 개인정보보호에 대한 감독 앞서 언급하였듯이, 연방개인정보보호법 제38조는 민간 영역의 개인정보보호에 대한 감독관청 에 대해서 규정하고 있다. 민간 영역의 감독관청은 주로 각 주의 개인정보보호법에 의해서 규정 FES-Information-Series 된 주 개인정보 보호관청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감독관청은 개인정보 보호관이 업무수행에 문제 가 있을 경우에 해당 개인정보 보호관을 해임하도록 요구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 이외에 감독관 청에 대한 규정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감독관청은 연방개인정보보호법 등을 포함한 개인정보보호법률의 실행을 통제한다. 감독관청은 개인정보에 관한 법규 위반을 인지하였을 경우, 정보 주체에게 이를 알리고 수사기관에 이를 신고 할 권한을 가진다. 심각한 경우에는 상업에 관한 감독을 책임지고 있는 관청에게 산업법 아래에 규제 수단을 도입하도록 통보할 권한을 가진다. 또한 감독관청은 최소한 2년에 한번 활동 보고서 를 발간하여야 한다. 그리고 연방개인정보보호법 제4d조에 따라 감독관청은 신고할 의무가 있는 개인정보의 자동처리 절차 에 대한 기록을 보관, 유지할 책임을 지고 있다. 또한 감독관청은 임무 수행을 위해서 기업 및 기업의 개인정보 보호관에게 정보제공을 요구할 수 있으며, 기업 등은 다른 법에 의해서 제외되는 것 외에는 이에 응해야 한다. 감독관청이 위임한 직원이 업무 수행을 위해서 기업의 시설 등에 출입하고 감독할 권한을 가진다. 또한 감독관청은 개인정보보호를 위한 기술적이고 조직적인 대책을 수립하는 규칙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도 가진다. 중대한 문제가 발생할 경우, 특히 인격권에 큰 침해가 발생하였을 경우 에는 개인정보 처리 절차를 중지시킬 수 있다. 6-2. 도이췌 텔레콤의 사례 도이췌 텔레콤은 개인정보보호와 관련하여 크게 통신법의 제89장, 통신서비스업 정보보호규 칙, 서비스정보보호법, 미디어서비스 주 협정, 연방개인정보보호법 등에 의해 규율 받고 있다. 이 기업이 최근에 민영화되기는 했지만, 연방정보보호담당관의 감독을 받고 있다. 도이췌 텔레콤은 기업 가치를 생산하는 요소 로서 개인정보보호 문제를 인식하고 개인정보보 호제도를 발전시키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즉, 개인정보보호제도를 발전시킴으로써, 고객과 직원, 그리고 주주 사이에 장기적인 신뢰를 구축할 수 있으며, 내외부적인 프로젝트를 위해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문제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 또한 조직 내외부에서 집중적이고 투명한 협력 및 통제 절차를 얻을 수 있다. 한편, 도이췌 텔레콤은 정보보호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분야 에서도 이를 활용할 수 있으므로, 개인정보보호를 전문으로 하는 자회사를 설립해서 공공기관 등 FES-Information-Series 도이췌 텔레콤 그룹 개인정보보호 담당관 (KDSB) (개인정보보호) 그룹 조정 회의 부문 개인정보보호 책임자 (LDS) 부문 개인정보보호 책임자 (LDS) 부문 개인정보보호 책임자 (LDS) T-Mobile T-Online T-Systems 도이체 텔레콤의 개인정보보호 담당조직 개관(울머 박사의 발표 자료) 부문 개인정보보호 책임자 (LDS) T-Com 에 자문을 제공하는 등의 새로운 사업 분야로 확장하고 있다. 도이췌 텔레콤의 개인정보보호 제도의 핵심은 기업 내부의 자율적 규제를 위한 개인정보보호 담당조직의 운영이다. 도이췌 텔레콤은 1977년부터 개인정보보호담당자 제도를 도입, 운영하고 있으며, 그룹 차원에서 50여 명의 개인정보보호 담당직원을 두고, 연간 600~700만 유로(약 84~98 억 원) 정도의 예산을 지출하고 있다. 이런 조직의 운영을 통해서 20여 만 명의 내부 직원과 수천 만 명 고객의 개인정보를 보호하고 있다. 도이췌 텔레콤은 그룹 전체의 개인정보보호를 책임지기 위한 그룹 개인정보보호 담당관 과, 각 사업 부문별로 각각 부문 개인정보보호 책임자 를 임명하고 있다. 그룹 개인정보 보호담당관은 도이췌 텔레콤 경영진에게 직접 보고를 하며, 그룹 전체의 개인정보보호의 조정과 개인정보보호 조직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 또한 개인정보보호의 기술적 측면을 지휘하며, 개인정보보호 정책의 원칙을 결정한다. 한편, 부문 개인정보보호 책임자는 법에 따라 하부 조직을 가진 각각의 부문을 위해서 임명되는데, 경영진 혹은 부문의 경영진과 그룹 개인정보 보호담당관에게 직접 보고를 한다. 그리고 그룹 개인정보 보호담당관이 전체 조직에서 하듯이 부문 개인정보 보호책임자도 FES-Information-Series 해당 부문의 조정과 개인정보보호 조직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 그 외 상근 개인정보보호 자문 인 , 비상근 개인정보보호 자문인, 그리고 프라이버시 지역 관리자 가 이들을 지원한다. 한편, 각 부문별로 운영되는 개인정보보호 활동에 관한 정보를 공유, 조정하기 위해서 6-8주마 다(개인정보보호) 그룹조정회의 가 진행된다. 그룹 개인정보보호 담당관은 매월 경영진의 개인정 보보호에 책임을 지고 있는 임원에게 기업 전체 차원의 개인정보보호 사항을 보고하며, 경영진 전 체에게 연례 감사 결과를 보고한다. 이어서 그룹 개인정보 보호담당관은 부문 개인정보보호 책임 자로부터 매월 보고를 받으며, 그룹 차원의 작업반 으로부터 4개월에 한 번씩 보고를 받는다. 그 룹 차원의 작업반은 상설 운영되며 모든 부문에서 파견된 직원으로 구성된다. 이 작업반은 그룹 전체와 관련된 중심적 과제를 다루며, 법적인 요구 조건(예를 들어, 훈련 개발, 감사, 처리 절차의 개발)을 충족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그룹 조정 회의 와 정기적으로 의견을 교환한다. 그룹 차원에서 진행하는 개인정보보호 활동으로는 첫째, 도이췌 텔레콤 그룹이 법적으로 요구되 는 조건을 충족시키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룹 개인정보보호 담당관은 직원들이 개 인정보보호에 대해서 이해하도록 도와주며(의무사항 공지, 훈련과정 및 정보 제공), 영향 받는 사람 들의 권리를 보장하고(신고 및 정보 제공, 정보의 정정 및 삭제), 그룹 차원에서 높은 수준의 개인 정보보호를 일관되게 보장(행동 강령, 개인정보보호 개념과 규제 수단 제공, 보고, 감사 및 처리 절 차 목록 제공)할 수 있도록 한다. 둘째, 도이췌 텔레콤 그룹에 내 ․ 외부 프로젝트 및 상품 개발을 지원하고 자문하고 있다. 직원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진행하거나 도입할 경우에 중앙 부서를, 가격 을 산출하거나 계약과 관련된 조정에 대하여, 또 고객으로부터 민원이 제기되었을 경우에 실행 부 서를 지원하고 자문한다. 7. 결론을 대신하여 이상에서 독일의 개인정보보호 제도를 연방개인정보보호법과 일부 주별 개인정보보호법을 중 심으로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또한 민간 영역의 개인정보보호 제도를 소개하면서, 도이췌 텔레 콤의 구체적인 실례를 함께 검토해 보았다. 그러나 독일의 개인정보보호 제도 내용 및 운영 현황 에 대해 보다 완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이 글에서 다루지 못한 내용들도 함께 검토되어야 할 것이 다. 이에 대해서 몇 가지 지적하면서 글을 마무리 하겠다. 첫째, 통신서비스정보보호법 등과 같은 개별적 목적으로 제정된 법률의 구체적인 내용도 함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 독일의 개인 FES-Information-Series 정보보호법을 현대화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검토하면서, 현재 독일 개인정보보호 제도가 안고 있 는 문제가 무엇이며 어떻게 개선하려고 하는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독일 정치 교육의 의미 ․ 과제 ․ 실행 체계 박 병 석 박사, 한국민주시민교육원 원장 2004년 7월 󰠲󰠲󰠲󰠲󰠲󰠲󰠲󰠲󰠲󰠲󰠲󰠲󰠲󰠲󰠲󰠲󰠲󰠲󰠲󰠲󰠲󰠲󰠲󰠲󰠲󰠲󰠲󰠲󰠲󰠲󰠲󰠲󰠲󰠲󰠲󰠲󰠲󰠲󰠲󰠲󰠲󰠲󰠲󰠲󰠲󰠲󰠲󰠲󰠲󰠲󰠲󰠲󰠲󰠲󰠲󰠲󰠲󰠲󰠲󰠲󰠲󰠲󰠲󰠲󰠲󰠲󰠲󰠲󰠲󰠲󰠲󰠲󰠲󰠲󰠲󰠲󰠲󰠲󰠲󰠲󰠲󰠲󰠲󰠲󰠲󰠲󰠲󰠲󰠲󰠲󰠲󰠲󰠲󰠲󰠲 민주주의는 제도적 발전과 함께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토대와 실질적 참여자 가 존재할 때에만 완성될 수 있다. 과거 반세기 이상 독일에서 실시되어 온 정치 교육은 민 주주의 의식의 형성과 정치 문화 발달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시대적 변화에 따라 정치 교육 의 중심 과제도 변화해 왔지만, 이것도 보편 과제인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 질서와 가치 속에 서 추구되어 왔다. 독일 정치 교육의 실행 체계는 모든 교육체제, 즉 학교, 대학, 성인 교육 시설, 학교 외 청소년 교육 시설, 직업교육 시설 등과 연계된 다원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여 기서 연방정치교육원은 주정치 교육원과 함께 대표적 지원자 역할을 수행하고, 정치재단, 시 민사회 단체, 종교 단체, 노동조합, 시민대학 등은 핵심적으로 교육을 담당한다. 오늘날 동서 독 통일과 유럽 통합에 따른 하부체제의 새로운 변화에 직면하여 사회적 통합을 달성해야 하 는 과제를 안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 교육의 중요성은 한층 더 높아졌다. 󰠲󰠲󰠲󰠲󰠲󰠲󰠲󰠲󰠲󰠲󰠲󰠲󰠲󰠲󰠲󰠲󰠲󰠲󰠲󰠲󰠲󰠲󰠲󰠲󰠲󰠲󰠲󰠲󰠲󰠲󰠲󰠲󰠲󰠲󰠲󰠲󰠲󰠲󰠲󰠲󰠲󰠲󰠲󰠲󰠲󰠲󰠲󰠲󰠲󰠲󰠲󰠲󰠲󰠲󰠲󰠲󰠲󰠲󰠲󰠲󰠲󰠲󰠲󰠲󰠲󰠲󰠲󰠲󰠲󰠲󰠲󰠲󰠲󰠲󰠲󰠲󰠲󰠲󰠲󰠲󰠲󰠲󰠲󰠲󰠲󰠲󰠲󰠲󰠲󰠲󰠲󰠲󰠲󰠲󰠲 1. 정치 교육의 의미 FES-Information-Series 민주주의 국가와 사회는 시민의 적극적 참여와 실천력 위에 지탱되고 있다. 아무리 자유주의 헌법이 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그것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지 않는다면 공허한 형식으로 그치게 된다. 정치 교 육의 중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정치 교육의 목적과 과제는 민주주의 의식의 전달뿐만 아 니라, 정치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고유 의미의 정 치 교육은 오직 자유주의 국가에서만 가능하다. 과거 반세기 이상 독일에서 실시해온 정치 교육은 민주주의 의식의 형성과 정치 문화 발달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정치 교육은 1952년 연방정치교육원의 설립으로 보다 체계화된 후, 정치 교육의 기본 원 칙에 관한 1970년대의 격렬한 논의, 독일 통일로 인한 변화를 고려한 1992년의 연방정부 보고서와 지 식정보 사회로의 사회적 변화 속에 단행된 2001년 초의 내부개혁 등을 통해 내용, 방법, 교수법 등에서 크게 달라졌다. 그 결과, 시민들에게 다양한 주제의 세미나, 출판물, 온라인 프로그램 등 폭 넓은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정치 교육은 개념상 여러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시민 교육과 같은 넓은 의미로 쓰이지만, 좁게는 국민 개개인의 정치성 배양을 위한 시민 교육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측면은 독일 연 방정치교육원 설립 규정(Erlass, 2001)에서 명확히 나타나고 있다.“국민의 민주 시민 의식을 고양하 여, 성숙하고 비판적이며 적극적으로 정치 일상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데” 있다고 규정한다. 이전의 설립 규정에서도“정치적 사안에 대한 국민의 이해증진과 민주주의 의식의 공고화 그리고 정치적 협 력 자세의 강화”에 교육 목적을 두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 교육의 주체는 국민이며, 그 대상도 국민이다. 여기서 국가는 지원자의 역할 에 머무른다. 반대로 전체주의나 독재 체제의 교육 주체는 정부이며, 그 대상은 국민이다. 왜냐하면, 전 자의 정치 교육은 상호 의사소통(interactive communication, discourse)의 성격을 지니는 반면, 후자의 교육은 주로 일방적 교화(indoctrination, manipulation)의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 교육은 시 스템과 일상생활의 상호 연계 속에서 사회 구성원들 간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통해 진행된다. 이런 요소들을 고려하여 정치 교육의 개념을 정리한다면, 정치 교육이란“국민이 국가의 주권자로 서 정치 현상에 관한 객관적 지식을 갖추고, 정치적 상황을 올바로 판단하며, 아울러 비판 의식을 갖고 정치 과정에 참여하여 권리와 의무를 적극적으로 수행하도록 하는 의사소통적 교육이다.” 한편, 한국 에서는 과거 권위주의 체제에서 실시되었던 관치 교육에 대한 이미지 때문에 정치 교육이란 용어 대신 민주 시민 교육으로 대체하여 쓰고 있다. FES-Information-Series 2. 정치 교육의 과제 2.1. 시대적 과제 정치 교육은 물론 정치 사회화의 여러 요소들 가운데 하나이며, 그 효과도 정치 상황에 크게 의존한 다. 그래서 독일의 정치 교육은 시대적 변화에 따라 교육의 중점 사업을 달리해 왔으며, 그 내용은 연방 정치교육원의 시대적 역점 주제의 변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 50년대: 독일 연방의 건설과 운용 ▪ 60년대: 전체주의체제에 대한 계몽, 과거사에 대한 역사 정리, 사회 변혁 ▪ 70년대: 경제 문제, 동방 정책(Ostpolitik), 당시로서는 새로운 현상이었던 테러리즘, 정치 교육의 교과목 및 교수법 개발 ▪ 80년대: 환경 문제, 평화 ․ 안보 정책 그리고 신사회 운동 ▪ 90년대 이래: 동독인의 자유주의 체제 적응, 동서독 주민의 사회 심리적 화합, 극우주의, 유럽 통 합, 환경 의식, 신기술로 인한 사회 변화, 세계화 ▪ 2000년: 지식정보 사회, 다문화 사회, 뉴테러리즘 등 통일 후 지금까지 이어지는 정치 교육의 중점 과제는 동서독 시민 간의 사회 심리적 통합과 다문화 간 융화에 있다. 특히 40년간의 사회주의와 공산국가 체제를 비판적으로 정리하고, 민주주의적 사고와 형태를 지향하도록 하며, 이질 문화권 간 갈등을 극복하고 공존할 수 있는 다문화 사회의 정착에 기여코 자 한다. 이들 과제와 연관된 모든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해서 정치 교육은 전독일인이 개방적으로 대화하는 전 진 기지인 동시에 대화와 교통을 심화 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2.2. 보편적 과제 오늘날의 중점 과제인 통일 후 내적 통합도 물론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 질서와 가치 속에서 추구된 다. 그러므로 과거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내용과 연속성을 가지면서 행해진다. FES-Information-Series 정치 교육의 보편적 과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과정의 요소와 기능 관계에 대해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알려 준다. ▪ 자유주의적, 다원주의적 민주주의 기본 가치들을- 물론 구체적 실현 방법에 대한 비판은 막지 않 으면서- 수용케 하는데 기여한다. ▪ 자유주의적, 다원주의적 민주주의가 유일한 정치 질서임을 분명히 하며, 이 질서 체제 속에서만 독자적, 합리적 자기 책임의 행위가 가능하고, 또 개개인의 자기 발전을 위해 최대의 기회를 제공한 다는 점을 강조한다. ▪ 민주주의 게임 규칙의 본질을 인식시키고, 민주주의 절차를 습득하게 하며, 비판력과 합의 자세를 동시에 갖도록 한다. ▪ 정치적 대안 속에서 고려할 수 있는 능력과 자세를 기르며, 정치적 문제의식과 판단력을 기른다. ▪ 정치적 행위 능력을 발전시키고,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 행사의 기회를 적극 활용하도록 한다. ▪ 언어적, 상징적 의사소통을 이데올로기적 배경 위에서 관찰할 수 있도록 한다. ▪ 자신의 권익을 타인과의 상호 관계에서 인식하는 능력을 기른다. ▪ 자신의 이익을 다원주의적 민주주의 규칙의 범위 내에서 인식하는 능력을 기른다. ▪ 민족적 이기주의의 타파와 함께 타 문화권 ․ 타 인종의 사람들과 상호 이해하며, 평화롭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능력과 자세를 기른다. ▪ 성찰 된 참여와 책임 자세를 갖도록 한다. 정치 교육의 핵심은 결국 민주주의 공동체의 기본 지식 ․ 가치관 ․ 행태의 전달에 있다. 민주주의는 절차 에 관한 규정만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인간상과 일정한 행태 및 가치관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규칙만을 익히게 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기본 가치들을 전달하고, 그에 부합 하는 행태를 습득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만 정치 교육은 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해서도 지적할 수 있 어야 한다. 3. 정치 교육의 실행 체계 정치 교육은 오늘날 모든 교육체제와 연계되어 있다. 학교, 대학, 일반 성인교육시설, 학교 외 청소 년 교육시설, 직업교육시설에서 저마다의 교육 과정을 통해 정치 교육을 실시한다. 연방 및 주 정치 교육원과 같은 국가기관과 사회교육 시설들의 병립은 교육 내용과 정치적 입장의 다양성을 반영해 준다. 이는 독일 정치 교육체제의 다원주의적 구조를 나타내는 것이다. FES-Information-Series 정치 교육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 즉 스스로 혹은 학교에서 공부하거나 각종 교육시설의 행사 혹은 세미나에 참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정치 교육은 독일의 정치문화 형성에 상당한 기여를 했으며, 이를 통해 민주주의의 정착과 강화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이와 같이 다양한 정치 교육 실행체계의 구축은 동독 지역에서도 추진되어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3.1. 학교 내 정치 교육 초 ․ 중등학교의 정치 교육은 각 주 정부의 업무에 속한다. 정치 교육의 기본 내용은 학교 강의에 포 함된다. 여기서는 확고한 지식 전달과 민주주의적 태도의 훈련에만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정치 참여 의 능력과 자세를 기르는 것에도 노력한다. 따라서 학교 강의는 시민의 정치의식 및 행태 형성의 기초 가 된다. 정치 교육의 실시 초기에 제기되었던 전문 교과서 ․ 교육자의 부족 현상은 그 동안 많이 개선되었다. 대 학에는 관련된 전공 분야가 있으며, 교과서 시장에도 교재들이 충분히 준비되어 있다. 연방정치교육원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다양한 교재들을 공급해 왔다. 학교의 요구가 있을 때는 포스터와 필름도 제공해 주었다. 그 외에도 교사들을 대상으로 재교육 세미나를 자주 개최해 왔다. 특히 통일 후에 는 동독 지역의 교사들을 이러한 방법으로 재교육 시킬 수 있었다. 연방교육연구부 연방가족 ․ 노인 ․ 여성 ․ 청소년부 연방보건복지부 연방경제협력부 연방경제노동부 연방환경부 1) 연방사회단체 2) 정치재단 3) 언론출판단체 정치 교육의 협력체계도 연방내무부 연방정치교육원 주정치 교육원 4) 청년학생복지단체 5) 노조 및 직능단체 6) 종교단체 연방하원 연방상원 연방공보처 정치 교육국 연방법무부 연방외무부 문화국 7) 여성단체 8) 교육학술예술단체 3.2. 학교 외 정치 교육 FES-Information-Series 3.2.1. 연방정부 부처 연방 내무부와 이에 소속된 연방정치교육원 외에도 또 다른 종류의 연방 기관이 정치 교육을 실시하 거나 지원한다. 예로서, 연방 가족 ․ 노인 ․ 여성 ․ 청소년부는 젊은이들로 하여금 현재의 생활 환경에 대해 신뢰를 갖도록 하고, 다원적 문화를 지향하도록 교육한다. 청소년 지원책은 청소년들이 사회생활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 하도록 노력한다. 청소년 교육 계획을 통해 젊은이들이 자신의 개성을 자유롭게 계발하고, 자신의 권리를 인식하며, 사회와 국가에서의 자기 책임을 당당히 감당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정치 교육은 청소년 교육계 획의 중점 사항이다. 연방 국방부도 다수의 정치 교육 대상을 가지고 있다. 연방군대는 성년의 정치 교육을 법적으로 정 해 놓은 유일한 조직체이다. 군인법 제8조 규정에 따라 군인은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기본법적 의미에 서 인정, 보호하는 의무가 있음을 인식시킨다. 통일 후 동독 지역에서는 정치 교육이 당분간 학교나 직 장을 막론하고 어느 곳에서든 충분히 행해질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연방군대는 정치 교육을 통해 이 지역의 젊은 세대에게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들을 전달해 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 밖에도 연방교육부는 정치 교육을 프로젝트별로지원하고 있다. 여기서는 정치적, 시사적 재교육의 지원에 치중한다. 연방경제협력부는 개발도상국의 지원 정책 관련 교육에 힘쓰는데, 특히 개발도상국 연방정치교육원 조직 Z부(총무/행정) 인사/조직 예산 내부업무(관리) 연방정치교육원 분과 총괄부 내규, 법무 행사, 학술회의 특수집단, 교류학습 인쇄, 출판 멀티매체/IT 외부단체 지원 공보 및 조정부 베를린 프로젝트 매체통신센터 극우주의 프로젝트 이주민/EU 프로젝트 세계화 프로젝트 출처: 연방정치교육원 홈페이지(http://www.bpb.de/die_bpb/87WJSR,0,0,Organigramm.html) FES-Information-Series 의 상황과 제3 세계에 대한 상호 관계를 위해 국민의 이해를 촉진시킨다. 이를 위해 연방경제협력부 는 각 주의 필름공사와 독일필름센타를 통해 계몽용 필름과 비디오를 배포한다. 3.2.2. 연방정치교육원 연방정부는 학교 외적인 정치 교육의 분야에서 내무부 소속의 연방정치교육원을 통해 정치 교육을 실시한다. 교육원은 지난 수십 년에 걸쳐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를 독일 국민들의 의식 속에 심어주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해오고 있다. 가. 구성과 조직 교육원은 원장과 사무처 외에 9명의 분야별 전문가로 구성된 학술 고문단과 22명의 연방하원 의원으 로 이루어진 22명의 감독위원회를 두고 있다. 특히 감독위원회는 교육원 업무의 정치적 중립성에 관해 감시하는 기구로서 매년 원장으로부터 예산안, 계획서, 활동 보고서 등을 제출 받으며, 학술 고문단의 의견이나 주요 사업에 대해 수시로 보고 받는다. 사무처의 구성과 조직은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다. 나. 주요 교육 사업 ① 대중매체를 통한 교육 사업 언론인, 희곡 작가, 대중매체 교육자들과 협력하여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의 편집자들에게 정치 교 육의 기회를 제공하며, 이를 통해 대중매체의 정치 교육 프로그램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 ② 출판 간행물을 통한 교육 사업 사회, 정치, 경제 문제 등에 관한 출판물을 총서 시리즈로, 또한 시사 주간지와 청소년 대상 정간물 도 발간하며, 이들 출판물은 모두 무료로 배포된다. 그 종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주간 신문 『의회』, 전문가 시사 진단지 주간 『시사 논단』, 『정치 교육 정보』, 『유럽 속의 우 리』, 『시사 확대경』시리즈 단행본, 『정치 교육총서』『정치 교육 교수 자료』, 『논점』, 『정치 교 육 도서 목록』, 『학교 수업의 주제』,『강의 주제』,『정치 교육 관련 영화 평론』, 『주제별 시청각 자 료 목록』, 『학생용 정치 교육 수첩』 ③ 학교 외 정치 교육 및 학술회의 지원 ▪ 토론 및 실습 형태의 포럼과 같은 성인 정치 교육 행사 ▪ 학교 외 성인 교육의 교육자를 위한 재교육 세미나 ▪ 성인 정치 교육 세미나에 활용하기 위한 학습 자료의 출간 ▪ 성인 교육의 역사 유적 및 그 의미에 대한 홍보 ▪ 정치 교육적 차원에서 이스라엘 수학여행 주최 FES-Information-Series ④ 학교 내 정치 교육 지원 학교 강의에서 활용할 수 있는 출판물과 학습 자료를 개발, 배분하는 업무를 수행한다. ▪ 『정치 교육 정보』지는 주 교육부장관 회의의 심의를 거쳐 모든 학교에 배포된다. ▪ 『연례 학생 정치 교육 경시 대회』 개최 ▪ 『정치 교육 교수법 세미나』는 교사들을 위한 것으로 전 연방주를 포괄하는 교류 프로 그램이 다. ▪ 발전된 통신 매체(인터넷 등)를 정치 교육 수단으로 활용하며, 그 범위를 급격히 넓혀가고 있다. ⑤ 자체 주관 교육 사업 ▪ 전문가 세미나(정치 교육 방법론, 학교 외 정치 교육) ▪ 지방 언론인 재교육 ▪ 동서문제연구부(동유럽권 재건 관련) 세미나 ▪ 해외 연수 및 세미나 다. 외부 정치 교육 단체에 대한 지원 연방정치교육원은 민간 자원 단체에도 재정을 지원한다. 매년 평균 300여 개의 단체에 지원하는데, 이 비용을 포함한 연방정치교육원의 예산은 연방내무부를 통해 연방 예산에 책정된다. 지출에 관한 회 계 보고는 연방회계청에 제출된다. 라. 예산 규모 모든 정당이 정치 교육원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기 때문에 예산 확보의 어려움은 없다. 예산의 집행과 운용에서도 연방정치교육원이 완전히 자율적으로 시행한다. 활동 예산의 지출은‘자체 활동을 위한 부분’과‘민간 단체 활동에 대한 지원 부분’으로 양분된 다. 이 예산을 연방정치교육원과 주정치교육원 모두 자체 활동에 40%, 민간 단체 지원에 60%씩 사용한 다. 연방정치교육원의 예산 규모는 1990년 이래로 매년 평균 약 1천억 원에 달한다. 3.2.3. 주정치교육원 각 주의 정치교육원은 특히 장벽 붕괴 후 동독 지역의 사람들을 위해 정치 교육을 시작함으로써 자 신의 중요성을 증명했다. 통일 후 서독의 각 주들은 동독 지역의 자매 주에서 저마다 정치 교육을 위한 회의를 개최하고 또 많은 양의 자료들을 제공하였다. 1991년 중반에는 서독 지역의 주정치교육원들이 FES-Information-Series 모든 신연방주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이러한 자문과 지원은 몇 년간 지속되었다. 주정치교육원은 연방정치교육원의 업무를 주 수준에서 수행하는 것이지만, 예산, 인사, 업무 등은 주 정부에 의해 결정된다. 이 교육 기구는 주 수상실 소속이며, 주의회로부터 감독을 받는다. 3.2.4. 정치 재단 독일에는 2차 대전 전후에 정당별로 정치 재단이 설립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 실패가 일차적인 동기이다. 이로 인해 독일 최초의 공화국이었던 바이마르공화국은 붕괴되었고, 종국에는 국 가사회주의자들(나치즘)의 폭압적 독재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정치가들은 자유민주주의로써 대다수 시민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바이마르는 결국 민주주의자가 없는 민주주의 를 보여주었 다. 이에 각 정당들은 저마다 정치 재단을 건립하여 정치 교육을 행함으로써 독일 민주주의의 재건과 공 고화에 이바지하고자 했다. 이는 권위주의적 혹은 전체주의적 지배 형태가 더 이상 독일의 정치적, 사 회적 생활을 틀 지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정치 재단의 중심 과업은 다양한 정치 교육 활동을 통해 공동체의 자유민주주의적 기본 질서 를 공고히 하고, 협동과 아량의 덕목을 함양하는 데 있다. 이러한 과업을 세분하면 다음과 같다: ▪ 정치 교육을 통해 정치적 사안에 대한 시민의 관심과 참여 촉진 ▪ 연구 지원과 상담 활동 등을 통한 정치적 행위 능력 향상 ▪ 학문, 정치, 국가, 경제 영역 간의 대화와 연구 ▪ 정당, 정치 운동, 사회 운동의 역사적 발전과정 연구 ▪ 장학 프로그램을 통한 젊은 우수 인력의 학업 ․ 연구 활동 지원 ▪ 각종 문화 행사 및 장학 ․ 후견 활동을 통한 예술 ․ 문화 발전에 기여 ▪ 국제적 정보 및 인적 교류를 통한 유럽 통합과 국가간 이해에 기여 ▪ 다양한 프로그램 및 프로젝트를 통한 개도국의 자유민주주의 및 법치 국가 건설에 공헌 정치 재단의 이런 과업은 1986년 7월 14일의 연방헌법재판소 판결에서도 다음과 같이 강조되었다: “정치 재단은 시민들로 하여금 정치적 사안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고, 정치 문제에 대해 모든 시민 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공개 토론의 장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이를 통해 사회적, 정치적 생활에 시민 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토록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그에 필요한 갖가지 수단들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현재 독일에는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사민당), 콘라드 아데나우어 재단(기민당), 프리드리히 나 FES-Information-Series 우만 재단(자민당), 한스 자이델 재단(기사당), 하인리히 뵐 재단(녹색당), 로자 룩셈부르트 재단(민사 당) 등의 정치 재단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자매 정당과 정책적으로는 공유성을 갖지만, 법적으로나 재 정적으로는 독립된 법인체들이다. 3.2.5. 시민 대학 독일 정치 교육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담당자는 시민 대학이다. 시민대학의 교과들은 모든 분야의 학습 과정에서 통합적 요소로 발전했다. 정치적 ․ 사회적 문제와 환경 ․ 경제의 테마는 외국어와 외국 문 화의 소개, 건강 교육, 기술 문제, 역사와 사회교육학, 철학 등에서 중요한 교육 소재의 역할을 한다. 동독 지역에서 정치 교육의 필요성이 매우 높아 감에 따라 시민 대학은 이 분야를 크게 확대하였다. 시민 대학은 중소 단위의 행정 구역마다 설치되어 있어 주민들의 대화와 만남의 장소로 인기가 높으 며, 청소년 직업 훈련과 학생 과외 학습, 성인 취미 강좌 등도 제공한다. 3.2.6. 자원 교육 단체(시민 ․ 사회 ․ 교회 단체) 청소년과 성인에 대한 학교 밖의 정치 교육은 기본적으로 다수의 자원 봉사자에 의해 발전되어 왔 다. 연방정부도 자원 교육자의 활동을 적극 지원한다. 여기서 연방정부는 이들 자원 교육자의 자율성 을 존중한다. 정부의 지원 조건은 자원 교육자가 헌법의 범위 내에서 활동하는데 있다. 연방 차원에서는 각 부처(부)와 연방정치교육원이 자율적 사회 교육자의 활동을 지원한다. 2000년도 를 기준으로 연방정치교육원의 파트너로 인정받거나 위임 받은 단체로는 300여 개의 교육 센터 혹은 연 합체들이 있다. 그러나 동독 지역의 정치 교육에서 자원 교육자가 겪어야 하는 어려움은 무척 많다. 참가자의 관심, 비판력, 대화 능력 등은 사람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난다. 그러나 참가자들이 공통으로 갖는 관심사는 구 조 변화에 직면한 실생활의 문제와 법적 문제 그리고 구체적인 경제 정보이다. 왜냐하면, 변화된 상황에 가능한 한 유동적으로 또 신속히 적응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초기 정치 교육의 경험은 그리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동독 지역 참가자들은 정치 교육 자체에 깊은 불신을 갖고 있었다. 이는 수십 년 동안 과거 동독에서 행해져 온 이념과 선전술 등에 시달 려 온 탓이다. 이러한 교육 행사에서 정치 교육 담당자의 대화 자세와 대화력에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 다. 동서독 주민의 화합을 위한 노력의 성과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노력에 힘입은 바가 크다. 동서독 교 회간 혹은 마을간 자매 결연을 통해 세미나 등과 같은 교육 행사를 개최하여 서로 교류할 기회를 갖는 FES-Information-Series 다. 여기에는 홈 스테이와 같은 친목 프로그램도 상당 포함되어 있어서 그 효과가 매우 크다. 3.3. 전망 독일에서도 정치 교육의 정당성, 과제, 목적, 접근법을 두고 수많은 논의가 전개되어 왔다. 이러한 논의들은 물론 시대 정신의 범주에서 행해지고, 평가되었다. 이는 정치 교육의 이론 발달에 기여하기 보다는 실제적 과제와 요구들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켜 통일 독일에서 뿐만 아니라, 앞으로 유럽과 세 계에서의 공존에 기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울러, 정치 교육은 하나의 정치학 전공 분야로 설치되어 다양하게 연구되고 있다. 독일은 동서독 통일과 유럽 통합에 따른 하부체제의 새로운 변화에 직면하여 사회적 통합을 달성해야 하는 과제를 안 고 있으므로 정치 교육에 대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치 교육은 동서독 주민 간 그리고 다문화 ․ 다인종 간의 대화와 접촉을 위한 전방 기지 역할을 수행하여 공동의 정치 문화를 조성하 기 위해 더욱 노력할 것으로 보인다. 독일 주둔 외국군 구성원의 법적 지위 한스-위르겐 카악, 전 독일연방내무부 통일분석과 과장, 현재 베를린 시민재단 이사 2003년 4월 󰠲󰠲󰠲󰠲󰠲󰠲󰠲󰠲󰠲󰠲󰠲󰠲󰠲󰠲󰠲󰠲󰠲󰠲󰠲󰠲󰠲󰠲󰠲󰠲󰠲󰠲󰠲󰠲󰠲󰠲󰠲󰠲󰠲󰠲󰠲󰠲󰠲󰠲󰠲󰠲󰠲󰠲󰠲󰠲󰠲󰠲󰠲󰠲󰠲󰠲󰠲󰠲󰠲󰠲󰠲󰠲󰠲󰠲󰠲󰠲󰠲󰠲󰠲󰠲󰠲󰠲󰠲󰠲󰠲󰠲󰠲󰠲󰠲󰠲󰠲󰠲󰠲󰠲󰠲󰠲󰠲󰠲󰠲󰠲󰠲󰠲󰠲󰠲󰠲󰠲󰠲󰠲󰠲󰠲󰠲 1945년 5월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식된 이래 여러 국가의 군대들이 끊임없이 독일에 주둔해오 고 있다. 정치사적으로 고찰해 볼 때, 이러한 군사 동맹의 본질은 지속적으로 변화해 왔다. 다시 말해, 이들 군사 동맹은 해방군에서 점령군으로, 또한 냉전 기간 중에는 점령군에서 소련의 호전적 정책에 대항 하는 방위군으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현재 벨기에,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미국에서 파견된 이들 군대는 나토 동맹군이다. 법적 관 점에서 보면, 이들 군대가 구연방주에 주둔하기 위한 근거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 통일을 준비했 던 2+4 조약에 근거하여, 외국 군대는 신연방주와 베를린시에 주둔할 수도 없고, 또 그곳으로 이전할 수 도 없다. 하지만 연방 정부의 사전 승인이 있는 경우에는 일시적인 주둔이 가능하다. 형사 재판권은 파견국과 독일연방공화국이 나눠 갖고 있다. 나토군 지위협정은 이를 전속적 재판권과 경합적 재판권(어떤 행위가 양국의 법에 모두 저촉되는 경우)으로 구분하고 있다. 경합적 재판권의 경우 그 행위가 직무 수행 중에 일어났다면, 특히 형사 소추의 우선권은 파견국이 갖 는다. 독일연방공화국은 경합적 형사 재판권의 행사 권한이 자국에 있는 사안에도 파견국의 요청이 있는 경우 형사 소추를 포기하고 있다. 󰠲󰠲󰠲󰠲󰠲󰠲󰠲󰠲󰠲󰠲󰠲󰠲󰠲󰠲󰠲󰠲󰠲󰠲󰠲󰠲󰠲󰠲󰠲󰠲󰠲󰠲󰠲󰠲󰠲󰠲󰠲󰠲󰠲󰠲󰠲󰠲󰠲󰠲󰠲󰠲󰠲󰠲󰠲󰠲󰠲󰠲󰠲󰠲󰠲󰠲󰠲󰠲󰠲󰠲󰠲󰠲󰠲󰠲󰠲󰠲󰠲󰠲󰠲󰠲󰠲󰠲󰠲󰠲󰠲󰠲󰠲󰠲󰠲󰠲󰠲󰠲󰠲󰠲󰠲󰠲󰠲󰠲󰠲󰠲󰠲󰠲󰠲󰠲󰠲󰠲󰠲󰠲󰠲󰠲󰠲 1. 시작 상황 FES-Information-Series 1945년 5월 8일 독일군이 항복하자 독일을 나치주의자들의 지배에서 해방시킨 연합군은 점령군이 되었다. 하룻밤 사이에 해방군에서 점령군이 된 것이다. 그리고 불과 몇 년이 지난 후 동서 진영 간의 냉전은 유럽 대 륙을 갈라놓았고, 이에 따라 독일에 주둔하던 외국군의 성격도 다시 달라졌다. 다시 말해 이들은 점령군에서 방위군으로, 그리고 결국에는 바르샤바 조약에 대항하는 나토군 소속의 동맹군이 되었다. 중부와 동부 유럽에 서 공산주의 정권들이 몰락하고 1990년 10월 독일 통일 이후 독일은 우방들로 둘러싸여 있다. 이러한 상황 속 에서 불과 몇몇 외국군 부대들만이 독일 영토 내에 주둔하고 있다. 이들은 오늘날 다른 이유 못지않게 경제적 이유에서 환영받는 손님들이다. 이들의 철수가 거론되면 철수에 반대하는 대중 시위가 일어나곤 한다. 베를린 에서 발행되는 일간지“타게스슈피겔”은 2003년 초에 이러한 실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그들은 호감이 가는 점령군 병사들이었고, 게다가 돈벌이가 되기도 하였다. 구독일연방공화국의 전 지역은 미군이라는 경제 요인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예전에는 30만 명의 미군 병사들이 주둔했지만, 지금은 그 수가 7만여 명에 달할 뿐이다. 독일 전역에 걸쳐 만 오천 명에 달하는 독일 민간인 직원들과 그 밖에 병원과 유원지, 요식업소들 이 미군 병사들에 의존하고 있다.” 1) 2. 법적 근거 외국군의 독일 주둔에 대해 현재 유효한 법적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주둔 조약(1954년) 2) 이 조약은 벨기에, 캐나다,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미국, 덴마크, 그리고 룩셈부르크에 대해 자국 군부대 의 구독일연방공화국 상시 주둔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캐나다와 덴마크, 룩셈부르크는 현재 독일에 부대를 주둔시키지 않고 있다. 나토군 지위협정(1951년) 3) 1) 󰡒 타게스슈피겔(Der Tagesspiegel)”, 베를린, 2003년 3월 5일자. 2) 1954년 2월 23일에 체결되고, 1955년 5월 5일에 비준된 외국군의 독일연방공화국 주둔에 관한 조약, 연방법률관보 1995년판 2권 253쪽. 3) 주둔군의 법적 지위에 관한 북대서양조약 회원국 간의 협정, 연방법률관보 1961년판 2권 1190쪽 FES-Information-Series 이 협정은 비준 국가들에 대해 주둔 기간의 부대와 군속, 그리고 그 가족들의 법적 지위를 규정하고 있다. 그 내용은 특히 입국 규정과 운행 허가, 재판권, 손해배상 의무, 세금, 그리고 관세에 관한 것이다. 이 규약은 신연방주에 적용되지 않는다. 나토군 지위협정에 대한 보충협정(1959년) 4) 이 보충협정은 벨기에, 프랑스, 캐나다,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미국이 구연방주에 주둔하는 동안 부대와 군속, 5) 그리고 그 가족들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 상세히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들은 훈련과 작전의 실행, 세 제상의 혜택, 그리고 건축법, 도로교통법, 노동법 부문에서 독일 규정을 어떻게 적용 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 다. 2+4 조약 6) 의 결과로 1990년 9월 25일에 처음 만들어졌고, 1994년 9월 12일에 개정된 외교 문서 교환 7) 독일 통일을 가능하게 했던 2+4 조약의 5조 3항을 보면, 외국군은 신연방주나 베를린시에 주둔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곳으로 이전할 수도 없다. 뿐만 아니라 통일조약 8) 은 나토군 지위협정과 독일보충협정의 적용 지역을 구연방주로 제한하고 있다. 그 때문에 벨기에, 프랑스, 영국, 캐나다, 네덜란드, 그리고 미국 군부대 의 일시적인 주둔을 위해 이 외교문서 교환을 합의했다. 이에 따라, 주둔을 위해 그 때마다 연방정부의 사전 승인을 받은 경우, 이들 국가의 부대는 베를린시와 신연방주에서도 구연방주에서와 같은 법적 지위를 갖는 다. 3. 조약의 구분과 내용 이상의 개관으로부터 독일 내에서의 주둔법은 근본적으로 다음 두 가지 법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독일연방공화국에 주둔하고 있는 외국 군대와 관련하여 1959년 8월 3일에 체결된, 주둔군 법적 지위에 관한 북대서양조약 회원국 간의 협정에 대한 보충협정, 연방법률관보 1961년판 2권 1218쪽; 1973년판 2권 1022쪽; 1994년판 2권 2594쪽 5) 나토군 규약 1조 1항 b에서는‘군속’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군속’은 나토 회원국 군대에 근무하고 있는 자로서 부대를 수행하는 민간인 직원들을 의미하며, 이들은 국적이 없거나, 북대서양조약 회원국이 아닌 국가의 국민이거나, 혹은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국 가의 국민이어서도 안 되며, 주둔국에 주 거주지를 두지 않은 자를 말한다. 6) 2+4 조약, 1990년 9월 12일에 체결된 독일 관련 종결 규정에 관한 조약, 『독일 통일을 위한 조약들』(뮌헨: 1990). 7) 베를린시와 신연방주들에 주둔하는 군대의 법적 지위를 위해 1990년 9월 25일에 있었던 외교문서 교환. 그 내용은 1994년 9월 12일자 외교 문서 교환을 통해 개정됨, 연방법률관보 1994년판 2권 3716쪽. 8) 독일 통일 수립에 관한 1990년 8월 31일자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 간의 조약,『독일 통일을 위한 조약들』(뮌헨: 1990) FES-Information-Series 󰋮 주둔을 위한 법(ius ad praesentiam): 주둔조약 󰋮 주둔 기간의 법(ius in praesentia): 나토 군 지위협정 위 조약들에 대한 추가 협정과, 2+4 조약에 따라 신연방주들에 대해 유보적인 규정들도 있다. 중요한 점은 통일된 독일에서 구연방주냐 신연방주냐에 따라 상이한 형태의 주둔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주둔을 위한 법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식부터 독일의 주권 회복 때까지 외국 군대는 오로지 독일 영토에 대한 점령권만을 근 거로 주둔하고 있었다. 파리 의정서 9) 의 발효로 독일연방공화국은 1955년 5월에 주권 국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기에, 프랑스, 캐나다,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미국 군대의 주둔은 무엇보다 공산주의 치하의 동구권 군대들에 맞서는 군사적 경고라는 이유에서 그 이전과 똑같은 병력을 유지해야 했다. 이를 위해 국제법상 조약 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 조약이 바로 1955년 5월 5일에 비준된 주둔조약 10) 이다. 독일 통일을 위한 협상 중에 주둔조약이 새로 편입되는 연방주들, 다시 말해 구동독 지역에 대해 유효성을 갖는지, 갖는다면 어느 정도의 범위 내에서 유효한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당시 구소련은 나토군 주둔 지역의 실제적인 확대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독일 통일로 나아가는 역동성에 제동이 걸려서도 안 되었다. 이런 이유에서 기존 주둔조약의 유효성은 구연방주들 즉, 구서독 지역에 국한되어야 한다 는 점에 합의를 보았다. 신연방주들과 베를린시에 대해서 2+4 조약은“이 지역에는 외국군 부대가 주둔할 수도, 이전할 수도 없 다” 11) 라고 규정하고 있다. 합의된 의정서의 표현에 따르면,‘이전’ 개념의 내용에 관해서“통일 독일 정 부는 각 조약 회원국의 안보 이익을 고려하는 가운데 합리적이고 책임감 있게 결정할 것이다.” 12) 이는 신연 방주들에서 외국군 부대의 지속적인 주둔은 허용되지 않지만, 통과나 군사 훈련 참여 목적을 포함한 일시적인 주둔은 독일 정부의 사전 승인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둔 기간의 법 현재 독일에 주둔하고 있는 5개국(벨기에,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미국) 군대의 법적 지위는 나토군 지위협 9) 1954년 9월 23일에 체결된 파리 의정서, 연방법률관보 1955년판 2권 213쪽. 10) 각주 2 참조. 11) 각주 7 참조. 12) 각주 5 참조. FES-Information-Series 정과 독일보충협정에 규정되어 있다. 13) 독일보충협정은 1993년 3월 18일자 개정 협정을 통해 작전과 상이한 훈련 들, 토지, 교통, 법률 문제, 기타 와 결론 규정 부문에서 개정되었다. 14) 새 규정들은 무엇보다도 소송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주둔군의 실질적 법 지위는 바뀌지 않았다. 파견국 군대는 독일연방공화국의 법질서를 준수해야 한다는 점을 나토군 지위협정뿐만 아니라 독일보충협 정도 명기하고 있다. 이들 국가의 군대는 건축 규정이나 자동차의 모델과 기술 설비에 관한 규정들로부터는 자유롭지만, 외환 규정은 지켜야 한다. 동맹 주둔군은 일반적으로 독일 재판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주둔 군 부대로 인한 손해 발생 시 파견 국가에 대한 독일연방공화국의 배상 요구에 대해 의견이 상이한 경우, 그 손해가 비군사적인 독일연방정부 소유물에 대한 것일 때 한하여, 양측의 합의 하에 지명된 중재 재판관이 판 결한다. 군사적으로 사용되는 재산 손실에 관해 나토군 지위협정 8조는 조약 회원국들이 일반적으로 손해 배 상 요구를 포기할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주둔군의 불법 행위로 인한 제3자의 배상 요구는 파견국이 아닌 주둔국을 상대로 주둔국의 법정에서 다뤄진다. 이 경우, 부대의 기록 보관소나 문서, 인식 가능한 관용 우편물 과 재산은 조사나 몰수할 수 없다. 이에 반해, 반입이나 반출이 전적으로 자유롭지만은 않은데 특히 국가 관세 규정에 대한 일반적인 면제는 허용되지 않는다. 파견국의 군 당국은 자국군 구성원에 대한 형사 및 징계 재판 권을 가지며, 자신의 소유지에서 치안권을 행사한다. 군 구성원들과 그 가족들은 원칙적으로 독일연방공화국의 법 지배하에 있다. 하지만 이들은 외국인특별법 규정을 적용받지 않는다. 형사 재판권은 파견국과 독일연방공화국이 나눠 갖고 있다. 나토군 지위협정은 이를 전속적 형사 재판권과 경합적 형사 재판권으로 구분하고 있다. ∙ 파견국은 독일연방공화국 법에는 저촉되지 않지만 자국법에 따라 유죄인 행위들에 대해서 전속적 형사 재 판권을 갖고 있다. ∙ 그 행위가 오로지 독일연방공화국 법에 의거해서만 유죄인 경우, 독일연방공화국은 전속적 형사재판권을 갖는다. 13) 각주 3과 4 참조. 14) 프랑크 부르크하르트와 하인리히 그라노프, 나토군 지위협정에 대한 독일보충협정의 개정을 위한 협정,『새로운 법률주간지(Neue Juristische Wochenschrift: NJW)』(1995), 424쪽 이하 FES-Information-Series 그 행위가 양국의 법에 의거하여 모두 유죄인 경우 경합적 형사 재판권이 성립한다. ∙ 직무 수행 중에 이뤄진 행위나 단지 파견국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 군의 다른 구성원들을 상대로 이뤄진 행위를 추적할 때 우선권은 파견국이 갖고 있다. ∙ 그 외의 모든 경우들에서는 독일연방공화국이 접수국으로서 형사 재판권과 관련하여 우선권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연방공화국은 독일보충협정 제19조에서, 파견국이 그에 대한 요청을 하는 경우 자신 이 갖고 있는 경합적 형사 재판권의 실행 특권을 포기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의 관할 관청들이 개별 사건의 특 수한 상황을 근거로 독일 법 집행의 본질적 이익을 위해 독일의 재판권 실행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관청들은 성명을 통해 위의 특권 포기를 철회할 수 있다. 나토군 지위협정과 독일보충협정은 구소련이 지배했던 바르샤바 조약의 와해로 독일 주둔군의 규모를 포함 한 유럽 안보 상황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불가피했을 당시에 이미 시험을 거쳤다. 독일 통일을 위한 2+4 회담 과, 베를린시와 독일의 통일에 따라 제2차 세계 대전의 4대 전승국들의 권리와 책임이 종결됨과 관련하여 주 둔군의 권리와 의무도 새롭게 평가되어야 했다. 이를 위해 독일보충협정에 대한 개정협정이 협의되었고, 이 개정협정은 1993년 3월 18일에 비준되었다. 15) 중요한 개정 내용을 독일보충협정의 조항과 관련하여 살펴보면, ‑ 45조: 전속 사용을 위해 제공된 토지 이외 지역에서 훈련과 작전을 수행하려면 독일 당국의 승인을 받아 야 한다. ‑ 46조: 영공상의 작전과 상이한 훈련을 하려면 정해진 훈련 조건들을 참작해서 독일 군사 당국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 49조: 건축 조치들을 취할 때, 독일 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점이 이 조항에 명시되어 있다. 필요한 허가를 얻기 위해 주둔군 당국은 독일 관할 관청과 협력한다. 기존 시설과 설비를 지속적으로 가동하기 위해서 는 기존물 보호가 필요하며, 가동상의 중대한 변화가 있을 경우에는 개정 허가를 얻어야 한다. ‑ 53조: 훈련을 목적으로 독일로 이동한 부대들의 토지(군 훈련장이나, 공중 및 지상 사격 훈련장, 주둔군 연병장, 주둔군 사격 시설) 이용을 위해 사전에 독일 관청에 통보하고 승인을 받아야 한다. 15) 연방법률관보 1994년판 2권 2594쪽. FES-Information-Series ‑ 53조 A: 제공된 토지의 사용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독일 법을 적용한다. 토지 사용 허가나 승인, 그 밖 에 공법상의 인가가 필요한 경우 독일 관청은 필요한 신청을 하며, 부대를 위해 행정 절차나 소송 절차 를 밟는다. ‑ 57조: 사고 장소에서의 행동과 위험물의 운송에 관한 규정을 포함한 독일 교통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 위험물의 운송을 위한 특별 허가나 예외적 허가와 면제는 이것들이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독일 연방군의 관할 부서에서 발급된다. 치수와 차축 중량, 총중량의 통용 한도를 초과하는 자동차와 연결 차량을 정해 진 도로망 이외의 도로에서 운행하는 경우에는 그를 관할하는 독일 관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 60조: 전신 전화 설비는 독일 관청과 합의된 절차에 따라 설치, 운영, 유지되어야 한다. 주둔 비용 나토군 지위협정과 독일보충협정에 따라 외국 군대는 자국 부대의 독일 주둔 비용을 원칙적으로 자체 부담 한다. 주둔 비용에는 병사들과 군속의 봉급과 급료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그들의 숙소와 복지, 필요한 건축 조치를 위한 비용과 독일 민간 인력의 임금, 급료도 포함된다. 독일연방공화국은 자국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여느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정해진 주둔 초래 비용만을 부담하며, 따라서 파견국에 대해 아무 것도 직접적 으로 지불하지 않는다. 독일연방공화국 재정상의 이러한 지출은 지난 몇 년간 주둔군 부대 감축으로 인해 감소 하였다. 이 비용은 1996년 1억 3천3백5십만 유로에서 2000년에는 8천8백4십만 유로로 감소하였다. 주둔 초래 비용 중 주요 지출은 ∙󰡒 사회적 보장 󰡓 이라는 임금 협약에 따라, 부대 감축으로 일자리를 잃은 주둔군의 민간 실직자에 대해 지급하는 생활 안정 보조금, ∙ 작전 수행과 관련한 피해와 이전에 군사적으로 이용한 토지의 환경 피해나 숙영으로 인한 피해 복구를 위한 비용, ∙ 주둔군이 현재 반환한 토지에 대해 자체 자금으로 지불했던 가치 상승에 대한 보상이 있다. 손해 배상 규모는 나토군 지위협정 8조 5항에 확정되어 있다. 이 조항은 직무 수행 중에 제3자에게 끼친 손해에 대한 배상 비율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FES-Information-Series ∙ 손해에 대한 책임이 주둔군에게만 있는 경우, 주둔군은 손해 배상의 75%를, 독일연방공화국은 나머지 25%를 부담한다. ∙ 손해에 대한 책임이 여러 주둔군들에 있는 경우, 이들은 동등한 비율로 손해 배상의 책임을 진다. 이에 반해, 독일연방공화국은 각 주둔군이 부담하는 액수의 반만 지불한다. 이 규정은 주둔군들 사이의 책임 소재를 명확하게 밝힐 수 없는 경우에도 유효하다. 독일연방정부는 외국군이 독일 주둔을 위해 자체 부담하는 지출액에 관한 지료를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파 견국들이 자국군의 독일 주둔을 위해 드는 비용은, 독일연방정부가 그들의 주둔을 위해 부담하는 총액의 몇 배 에 달하는 것이 확실하다. 나토군 지위협정 11조에 의하면, 공무 수행뿐만 아니라 병사들과 그들 가족, 그리고 군속의 사적인 소비에서 도 주둔군에게 광범위한 특전이, 특히 면세의 형태로 주어진다. 이때에도 접수국의 관세법은 원칙적으로 유효 하다. 하지만 주둔군은 특히 기술 설비와 양식, 공급품, 그리고 부대뿐만 아니라 군속과 그 가족들을 위해서도 허가된 그 밖의 물품들을 면세로 반입, 반출할 수 있다. 부대 구성원과 군속은 그들의 개인 소유물과 가재도구, 승용차를 면세로 반입할 수 있다. 나토군 지위협정에 제시되어 있는 특권 부여 요건들은 나토 회원국에 주둔하 고 있는 독일 부대들에도 같은 규모로 적용된다. 독일 내의 나토군 사령부들 나토군의 국제군사사령부 16) 에 대해서는 사령부협정 17) 과 독일 내에서만 유효한 이에 대한 보충협정이 사령부 와 그 구성원의 법적 지위를 규정하고 있다. 통일조약에 따르면, 이 두 협정들은 구연방주에서만 유효하다. 사 령부협정은 나토군 지위협정의 규정들을 가능한 범위 내에서 국제 사령부들에 적용하고 있다. 사령부협정 제4조는 나토군 지위협정에 따라 주둔군에 주어지는 권리 및 의무와 관련하여 군사 사령부도 파 16) 독일 내의 나토군 사령부들: - 라인달렌시 소재 유럽연합군 신속 대응 부대(ACE Rapid Reaction Corps) - 람슈타인시 소재 북부 동맹 부대 사령부(Headquarters Allied Forces North) - 하이델베르그시 소재 통합 사령부 센터(Joint Headquarters Centre) - 칼카르시 소재 공군 대응 부대 스태프(The Reaction Forces(Air) Staff) (자료: http://www.nato.int/ structure/ struc-mcs.htm) 17) 1952년 8월 28일자 북대서양조약을 토대로 세워진 국제 군사 사령부들의 법적 지위에 관한 의정서, 연방법률관보 1969년판 2권 2000 쪽. 견 국가와 동일시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FES-Information-Series 주둔국들과 독일연방공화국 사이에 보충적으로 체결된 지위협정 18) 은 사령부의 구성원들도 부대 내에 주둔하 고 있는 병사들과 같은 권리와 세제상의 특전을 누려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사령부에는 주둔군 국가의 병 사들뿐만 아니라 그 밖의 나토 회원국 병사들도 근무하고 있으므로, 그에 상응한 협정들을 통해 사령부의 모 든 구성원들이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번역: 최용호(외국어대학교 통역번역연구소 연구원) 18) 독일연방공화국 내의 나토 국제 군사 사령부에 배속된 파견국 구성원들의 법적 지위에 관한 협정, 연방법률관보 1969년판 2권 2044쪽. 독일의 과거 극복과 역사 교과서: 홀로코스트의 서술을 중심으로 김 유 경, 경북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 2002년 9월 󰠲󰠲󰠲󰠲󰠲󰠲󰠲󰠲󰠲󰠲󰠲󰠲󰠲󰠲󰠲󰠲󰠲󰠲󰠲󰠲󰠲󰠲󰠲󰠲󰠲󰠲󰠲󰠲󰠲󰠲󰠲󰠲󰠲󰠲󰠲󰠲󰠲󰠲󰠲󰠲󰠲󰠲󰠲󰠲󰠲󰠲󰠲󰠲󰠲󰠲󰠲󰠲󰠲󰠲󰠲󰠲󰠲󰠲󰠲󰠲󰠲󰠲󰠲󰠲󰠲󰠲󰠲󰠲󰠲󰠲󰠲󰠲󰠲󰠲󰠲󰠲󰠲󰠲󰠲󰠲󰠲󰠲󰠲󰠲󰠲󰠲󰠲󰠲󰠲󰠲󰠲󰠲󰠲󰠲󰠲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50여 년 동안 독일 사회는 과거의 역사, 특히 나치스 체제가 남긴 부담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극복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실로 나치스의 범죄 행위는 오늘에까지 국가, 사회, 국민에게 끊임없 는 정신적 고통을 주는 역사의 부담이었다. 독일의 정치와 문화는 지난날의 과오를 정직하게 시인하고, 피해 자에 대한 보상, 주변 국가와 화해를 지속적으로 추구해왔다. 그리하여 오늘날 독일의 역사 교과서는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 대한 속죄, 책임의 통감을 2세 국민에게 정직하게 전달하고, 유사한 비극을 방지하고자 하는 노력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거 극복의 성과가 모범적이라는 평을 받는 수준에 도달하는 데는 역시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고, 나름대로의 우여곡절도 있었다. 이 글에서는 독일의 역사 교과서가 오늘과 같이 모범적인 수준에 도달하게 되었던 외부 환경과 논의 의 변화를 고려하면서, 나치스가 저지른 범죄의 대명사인 홀로코스트가 역사 교육, 역사 교과서에서 어 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본보기로 살펴보았다. 역사 교과서는 전문 역사가의 학문 탐구와 달리 일정한 시 기에 해당 국가에서 일어난 광범한 사회적 합의를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독일의 역사 교과서가 제시하 는 과거에 대한 정직한 대결은 일단 독일사회의 표준적인 견해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역사 교과서로 실천되는 독일의 과거 극복이 갈등없이 순조롭게 진행된 과정이 아니었고, 그 나름대로 의 역사를 갖고 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 FES-Information-Series 1. 학교와 교과서는 오늘날의 사회가 시민 정신을 비롯하여, 이상적인 과거의 모습과 미래의 전망을 전달하는 중요 한 통로이며 도구다. 특히, 역사 교과서는 한 국민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에 대하여 권위 있는 이야기를 제공하며, 시민이 취해야 할 적절한 행동의 모델을 제시하여 국민적 일체감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하게 마련이다. 그 러나 한 민족이나 국민의 경험을 교과서 형태로 정리하는 역사적 서사(敍事)는 늘 미완성의 과업으로 남아있으며, 항상 변동하는 시대에 부응하도록 지속적인 개정과 재해석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국민적 일체감에 대한 기존의 지 배적인 전제가 동요하거나, 국제 관계가 급격히 변동할 때는 국내외적으로 교과서에 서술한 내용에 대한 분쟁이 자주 야기되기도 한다. 대개의 국가에서 역사 및 사회과 교과서 일반은 당시의 국민적 정체성과 애국주의를 형성하는 데 기여한 경험을 조명하는‘공식적인 이야기’를 제시한다. 동시에 국가와 사회의 관계에 일정한 질서를 부여하고, 국가 공민으로 서 시민의 자격에 대한 테두리를 설정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교과서에 관심을 갖고, 이의를 제기하는 이유는 바로 이 점 때문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교육 및 교과서는 기본적으로 미래를 지향하고 있으며, 사회 구성원의 심성 내부 에 깊숙이 작용하고, 더욱이 이것이 국가 권력을 통해 지도되거나 관리되기 때문이다. 교과서는 작성과 배포에서 개별 국가마다 무수한 제도적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직 ․ 간접적으로 국가의 인 ․ 허가라는 절차에 종속되어 있어 그 내용이 각별한 권위를 지니게 마련이다. 한 사회의 구성원은 과거에 대한 기억을 다른 종류의 자료, 즉 기념물, 문화재, 박물관, 기념 행사, 각종의 비공식적인 매체나 예술적 창작품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으나, 가장 권위 있고 밀도가 높은 내용의 체계적인 전수는 제도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그 수단인 역사 교과서는 특별한 기억의 장(場) 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이유에서 역사 교육과 역사 교과서는 국가와 개인의 요구가 교차하는 일정한 갈등 상황 속에 처 해있고,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그 제도적 발현 형태와 실천 양상은 여러 욕구의 갈등이 조정된 합의와 균형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어디에서나 국가와 국민의 자화상(自畵像)을 그려내는 작업에서는 통상적으로 과거에 대한 긍정적 기억, 위대한 유산과 시대에 대한 회상이 건설적인 역할을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통상적인 형태가 독일연 방공화국에서는 자연스럽게 적용될 수 없었다. 독일연방공화국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업에서 건국 당 시부터 극도로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및 제3 제국, 그리고 이 체제의 해악을 압권으로 대표하 는 유태인 절멸 정책(홀로코스트) 의 유산과 스스로를 단절해야 하면서도 그보다 오랜 역사 구성체로서의 독일을 이어가야 하는 힘겨운 과제에 봉착했다. FES-Information-Series 소위 과거 극복(Vergangenheitsbew ä ltigung) 이라고 알려진 독일 사회의 특유한 개념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독 일연방공화국이 과거가 물려준 부담과 대결하는 과정과 경험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개념은 1950년대 독 일연방공화국(서독)에서 형성되어, 60년대부터 정치적, 사회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의미 심장한 어휘가 되었다. 물 론 여기에서 말하는 과거는 나치스 시대(1933~45) 12년간을 의미하고, 극복 이라고 편의적으로 지칭되는 행위는 나치스 체제의 파국적인 귀결과 대면하는 일체의 노력을 가리킨다. 전후에 전개된 독일의 분단 상황에서 이 개념 으로 파악되는 일련의 과업은 서독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논의, 추진되었고, 동독에서는 나치스의 과거와 대면하는 방식에서 서독과 구별되는 다른 길 을 갔기에 이 자리에서 우리의 논의는 서독 사회에 집중된다. 아우슈비츠, 홀로코스트로 대표되는 부정적 유산의 극복은 전후 독일 사회의 정신적 갱생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 니라 정치적, 사회적 실천까지 포함하는 총체적인 과제로서 지금까지 공공 여론에서 지속적으로, 또 현대 독일 사 회가 봉착한 과제 상황의 중요한 계기에 따라 더욱 격렬하게 논쟁되어 왔다. 특히, 1989~1990년의 급작스러운 통 일 이후 사회적 부작용 현상으로 불거져 나온 극우적 운동의 대두, 동독 공산체제(독일민주공화국)가 남긴 또 하 나의 불편한 유산 을 정리하는 문제와 겹쳐지면서 독일의 과거 극복은 다시금 주목을 받는 현안 문제가 되었다. 독일연방공화국에서 홀로코스트를 역사 교육에서 처리하는 방향 설정을 둘러싸고 전개된 논의와 실천, 그리고 그 가시적인 수단인 역사 교과서는 이와 같은 포괄적인 과거 극복 과정의 정신적 측면을 반영하는 하나의 중요한 지표이면서 동시에 과거 극복을 둘러싼 독일 사회 내부의 여러 가지 모색과 논쟁에서 하나의 중심에 놓여있는 문 제이기도 했다. 독일에서 역사 교육과 역사 교과서로 실천되는 과거 극복의 정신적 측면은 한국 사회의 여론에 상 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것으로 비치는 일본의 경우와 비교되어 매우 모범적인 사례로 알려지고 있다. 적어도 최근에 발행되어 사용하는 독일의 역사 교과서 몇 종을 표본적으로 살펴보기만 해도 그러한 인상은 충분 히 받을 수 있다. 그러나 1945년 나치스의 패망 이후부터 오늘에까지 이른 독일의 과거 극복 과정 전체가 그 나름 의 역사를 갖는 우여곡절을 보여주고 있듯이, 역사 교육, 역사 교과서로 실천되는 정신적인 과거 극복 역시 순조롭 게만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사회 기능을 담당하는 주체 세력의 교체와 적절한 계기를 만나면서 지속적인 논란과 함께 심화되어온 과정이었다. 2. 최근까지도 독일에서는 제3 제국의 유산과 대결하는 문제, 즉 과거 극복의 성과에 대해서는 극단적으로 상반하 는 평가가 병존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부정적인 유산을 침묵하고, 기만하고, 거부하며, 기억에서 지워버림으로써 독일인은 심지어 두 번째의 책임과 범죄 를 안게 되었다고 보기도 하며(랄프 지오르다노), 다른 한편에서는 독일 FES-Information-Series 연방공화국의 민주주의가 과거 나치스의 죄악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책임을 철저하게 추궁했으며, 현실적인 피 해 보상과 복구까지 실천하여 유례가 드물게 성공적인 것이었다고 평가한다(알프레트 그로서). 오늘날의 시점에서 정리할 때, 독일연방공화국의 과거 극복이 추구하는 목표는 나치스 체제의 범죄적 유산과 단절하고, 이러한 과거의 과오가 재발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실천적 과제는 패망 한 체제의 범죄적인 조직을 제거하고, 정치체제의 민주화, 범죄 행위자의 처벌, 희생자의 보상 그리고 민주적 정치 문화를 수립하기 위한 과거사의 비판적 성찰에 있었다. 이는 매우 거대하고 다양한 과제로서 여러 차원에 서, 여러 주체가 추진해야할 사항이었다. 동시에 이 과업은 다시금 정치의 공식적 측면, 즉 제도적 규제와 법률의 차원에서, 다양한 사회적 집단의 이해관계가 마주치는 공공 여론의 차원에서, 나아가 인간의 태도와 의견, 행위 양 식에서 발견되는 정치적, 문화적 심성의 차원 등, 모든 면에서 장기적으로 추진해야할 과제였다. 과거 극복의 과제 가 내용적으로 이렇게 복합적이어서 그 성과는 포괄적으로 간단히 평가될 성질이 아니었으며, 전후의 각 시기와 부문마다 그 과제가 한결같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과거 극복 과정 자체가 섬세한 고찰이 요구되는 하나의 역사학적 과제가 되었다. 전후 서부독일에서 제기된 과거 극복의 과업은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지속된 전승국의 점령기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미국으로 대표되는 전승국은 제3 제국의 조직을 제거하고 독일의 정치체제를 민주적으로 개편하 려고 했다. 그리하여 과거의 정치 ․ 사회 엘리트를 교체하는 탈나치화 작업을 추진하고, 독일인에게 민주주의적 가 치를 내면화하는 광범한 재교육 사업을 시도했다. 1945년 10월 18일부터 개최된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은 탈나치화 작업의 개시를 알리는 상징이었다. 프랑스나 영국의 점령 지역에서도 탈나치화 작업은 광범위하게 추진되었다. 재판 절차를 통해서만도 수천 명의 인사들이 전 범으로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이 시기 독일인들의 정치적 여론은 심정적으로 수동적이거나, 체념하는 편에 기울 어져 있었다. 다수의 독일인들은 나치스의 패망 이후에야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엄청난 반인륜적 범죄의 전모를 알 게 되었지만, 이 사태에 대해서 자책감을 느끼기보다는 스스로가 히틀러와 전승 연합국의 희생자로 느끼고 있 었다. 그리고 반유태주의적 사고 방식도 여전히 높은 수준으로 남아 있었다. 독일연방공화국의 건국과 함께 나치스의 범죄자에 대한 형사적 소추가 가라앉기 시작하면서 독특한 과거 정책 이 형성되었다. 말하자면, 정 치적 차원에서 나치스 독재의 제도적, 인적 유산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라는 문제가 독일인의 과업으로 넘겨지 면서, 법률적 형태로 이루어지는 현실 정치적 수단이 새로이 조정되었다. 격화되는 냉전 상황에 직면하여 콘 라드 아데나워 정부는 아직도 미약한 독일연방공화국 민주주의의 안정과 사회적 통합이냐, 아니면 나치스 범 죄자의 유보 없는 처벌과 정리냐? 라는 과업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FES-Information-Series 아데나워 정부의 선택은 전자로 기울어졌다. 물론 야당인 사회민주당(SPD)의 당수 쿠르트 슈마허와 같이 나치 스의 범죄, 특히 600만 명의 유태인 학살을 공공연히 발언하며 과거의 공포를 일깨우는 정치가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1952년에 사망했다. 아데나워 정권의 과거 정책은 일부의 저항이 있었지만, 거의 모든 정치 세력의 연 대와 당시 서부 독일인의 심리적 욕구에 기초한 것으로 결국 전승국이 촉발한 탈나치화 작업의 소용돌이를 신속히 종결하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50년대 초에는 전승국 점령 시기에 해임되었던 관료 및 각종 전문 기능 요원이 지나칠 정도로 관대하게 재임용되었다. 이들 중에는 나치스 시대의 과오에 심각한 부담을 안고 있던 인사들도 수 만 명에 달했다. 나치스의 고위 인사는 정치적으로 생존하지 못했으나, 중견의 간부 요원 다수는 새로운 국가에서 신속히 제자리를 찾았다. 유명한 사례로 유태인에 대한 갖가지 차별을 규정한 1935년 뉘른베르크의 인종법에 권위 있는 주석을 가한 한 스 글로프케가 아데나워의 총리실에 차관급의 고위직으로 재등용된 일도 있어, 새로운 민주주의의 장래를 우려하 게 할 정도였다. 아데나워 정부가 추진한 서독의 서방 편입에 따라 연합국이 심판한 전범자도 석방되었고, 과거 정규군의 고위 장교들도 복권되어 서독의 재무장에 동원되었다. 정규군의 전시 행동은 정상적인 전쟁 에서 취해진 애국적 행동으로까지 평가되었고, 한국 전쟁으로 인하여 냉전 이 험악해진 상황까지 가세하여 대전기 독일의 대소 전쟁은 반공산주의적 서유럽의 통합에 기여한 것으로까지 해석 되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서독 사람들의 기억과 회상은 갑자기 스탈린그라드에 집중되었다. 이를 테마로 하 는 대중 소설, 회고록, 영화가 발표되고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패배한 전쟁을 사후적으로 다시 승리한 것으로 만 들고 싶어 했다(에리히 쿠비, 1959). 1950년대 말까지 홀로코스트와 같은 문제는 공공 여론에서 거의 언급도 되지 않았다. 서독의 역사학도 이 문제에 대한 연구를 회피했다. 서독인의 잠재 의식과 심성에는 아직도 민주주의 이전의 사고 방식과 태도가 지배하고 있었고, 반유태주의적 정서도 여전히 살아있었다. 여론에서는 제3 제국에 대한 침묵이 지배하고 있 었다. 단지 소수의 지식인들만이 이러한 분위기를 흔들어 보려 했을 뿐이고, 대세는 과거의 거부, 책임 의식의 망각이 지배하고 있었다. 당시의 역사관에서 국가사회주의(나치즘)는 악마와 같은 지도자의 탄생으로 말미암 은 것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비합리성의 우발적 폭발이며 저주로 비쳐졌다. 일반 대중이 보기에 나치스의 독재와 동독 공산주의의 독재는 별로 차이가 없어 보였다. 이와 같은 대중 여론의 자세는 어쨌든 나치스와 공산 동독의 체제를 분명히 거부하도록 했으며 신생 독일연방공화국의 민주주의를 안정시 키는 데 일조했다. 나치스의 인적 요소 처리에 대한 아데나워 정부의 애매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원칙적으 FES-Information-Series 로 연방공화국의 정치, 사회 제도가 나치스 체제를 부정하는 것으로 천명하여, 헌정 체제의 지속적인 원칙은 분명 히 했다. 초창기 독일연방공화국이 처해있던 국내외의 여러 악조건 ― 패전국 국민의 저하된 사기, 경제적 궁핍, 냉전 체 제의 압박 등 ― 때문에 이와 같은 정치적 선택은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정치적 고려와 선택은 나치 스의 희생자에 대한 보상 조치에서도 오랫동안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아데나워 정부가 시행한 이스라엘에 대한 보상금 지불의 배후에는 서방 진영의 압력이 작용했다. 피해 보상에는 도덕적 확신보다 정치적, 외교적 득실 이 더 많이 고려되었다. 세계적인 냉전 구도와 관련되어 서방 진영에 거주하는 피해자에게는 보상받을 기회가 제 공되었으나, 동구권의 피해자에게는 대개 돌아갈 몫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서독 정부의 피해 보상은 독일 국민의 여론에서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으며 때에 따라서는 저항을 받기도 했다. 과거 극복을 둘러싼 정신적 분위기는 1960년대에 들어서 변화되었다. 하나의 계기로 1959년에 일부 지역의 유태 인 회당과 묘지가 나치스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나치스의 갈고리 십자 휘장, 특히 깃발에 대표적으로 사용)로 도 배되어 국내외 여론에 충격을 주었던 사건이 있었다. 학교 교육과 국민 일반을 위한 민주주의 정치 교육에서 연방 공화국 초기의 과거 정책에 내재된 결함이 분명히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1960년경부터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 회복의 성과가 안착되면서 서독인들은 한숨 돌리고 과거를 돌아볼 여유를 회복하여, 이미 전후부터 간간히 제기되던 비판적 지식인들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사 람들이 더 많아졌다. 마침내 이 시기에 등장한 세대 갈등은 나치스 시대와의 대결에 새로운 동력을 제공하 기에 이르렀다. 아데나워 정권이 종료되고 새로이 수립된 대연정에 대한 항의로 시작된 1968년의 학생 운 동, 원외 저항 이 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68년의 세대들은 부모 세대의 경험을 논쟁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비판적으로 고찰할 수 있었다. 1967년에 발표된 사회학자 미쳘리히 부부의 애도하지 않는 독일인 은 나치스 시대의 범죄에 대한 독일인의 침 묵을 비판하여 새로이 격렬한 논쟁의 장을 열었다. 이 시기에 연방의회에서는 나치스의 범죄, 특히 학살 범죄에 대한 공소 시효를 사실상 폐지하도록 결의했다. 1969년부터 빌리 브란트의 사민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제3 제국이 저지른 범죄의 시인과 이에 대한 사죄의 발언이 공공연해졌다. 나아가 1970년 5월 8일(종전 기념일)에는 전후 최 초로 연방정부가 2차 세계 대전의 종료에 대한 공식적 입장을 표명하면서, 특히 동유럽의 희생자에 대한 화해를 요청했다. 정치적 실천을 비롯하여 과거 극복에 대한 공공 논의가 이 시기부터 본격화되었다. FES-Information-Series 1970년대 중반부터 서독에서는 독일인의 정체성 에 대한 논쟁이 터져 나왔다. 이는 10여 년 뒤인 1980년 대 후반의 역사가 논쟁 에까지 이어지면서 독일인의 자의식에서 나치스 체제와 시대를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라는 고민을 제기한 것이었다. 사민당-자민당(FDP) 연정의 붕괴 이후 낙관적인 정치적 기대가 냉각된 분위기에서 보수적인 정치가와 지식인들 은 독일인의 정체성 위기 를 말하게 되었다. 이들은 서독이 달성한 민주주의의 성과에 확고한 역사적 근거와 전통 이 결여되어 있음을 염려했다. 이들이 보기에 좌파적인 경향에서 제기되고 추진된 과거 극복은 궁극적인 과거의 정리를 저해하고 긍정적인 역사상과 기억에 기초를 두어야 마땅한 국민의 정체성 수립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이 었다. 헤센주 기독교민주당(CDU) 수반인 알프레트 드레거는 1981년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역사는 12년이 아니라 1200년에 달한다. 그리고 나머지 1188년에는 다른 민족의 역사 만큼이나 좋은 면도 있었다. 갈색의 12년 동안에 저 질러진 범죄는 모두가 아니라 일부의 뜻이었다. 그러나 이 12년간의 역사에 대한 기억은 대다수 국민들에게는 여 전히 거북한 것이었다. 1979년 미국에서 제작된 텔레비젼 연작극 홀로코스트가 제1 국영방송국(ARD)의 전파를 타 고 독일 전역에 방영되었다. 허다한 비평가들과 전문 역사가들이 이 프로그램에서 유태인 탄압과 절멸의 스토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해도, 미흡함, 과장, 다소의 위작을 지적했다. 그러나 시청자들의 반응은 매우 센세이셔널한 것 이었다. 수백만 명의 시청자들에게 이 방송극은 엄청난 계몽의 효과를 발휘했다. 당시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65% 의 시청자들이 충격을 받았으며, 45%는 수치심을 느꼈고, 81%는 방송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역사학은 대중의 욕구와 빗나간 전문적인 연구에 매몰된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60년대 후반부 터 오랫동안 나치스 과거는 더욱 더 전문적인 학문적 관심사가 되었고, 고도로 전문화된 세부 연구 속에 매몰되는 경향조차 나타났다. 그러나 1980년대 초부터는 전문 역사가들도 가담하여 전쟁 기념일, 유력한 정치인들의 기념 연설, 기념물(특히 과거의 비극적 과오에 대한 경고의 뜻으로 세운다는 독일적 상황 특유의 산물인 경고의 기념물(Mahnmal), 박물 관 건립 등을 둘러싼 역사 정책적 논쟁이 활발하게 제기되었다. 통일을 이룬 헬무트 콜 총리의 집정 기간 내내 과 거 극복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논쟁이 따라다녔다. 1985년 종전 40주년을 기념하는 바이체커 대통령의 연설은 나치스 과거의 범죄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독일인 이 이에 대하여 반성하며, 그 기억을 영구히 간직할 것을 역설하여 세계적인 칭송을 받았으나, 과거 극복을 둘러 FES-Information-Series 싼 독일인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1986~1987년에 제기된 역사가 논쟁 은 공공의 논쟁이 절정에 이른 것이었다. 일군의 보수적 역사가, 특히 에른스트 놀테가 히틀러와 나치스의 범죄를 인류 역사상에 수없이 존재한 정복 전쟁, 야만적 학살 행위와 동일시하여 특수한 독일적 의미를 희석하려고 하자, 이에 대하여 하버마스의 비판을 필두로 다수의 현대사 전문가들과 지식인들이 참여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은 단 순한 역사 파악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40여 년간의 성공적인 민주주의 끝에 서독이 획득한 역사적 ․ 정치적 자의식의 본질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였 다. 동시에 서독 내의 문화적, 정신적 헤게모니를 둘러싼 투쟁이기도 하였다. 나아가 전후 3세대가 등장하는 시대 적 조건에서 나치스 과거에 대한 기억에 어떤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기초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했다. 보수적인 입장에서는 70년대부터 지배적인 과거 극복의 정체성 에서 벗어나 다른 나라의 국민과 같이 긍정 적인 역사상에 의거한 정상화된 국민적 정체성 을 회복하기를 원했는데, 이제 스스로에게 고통을 가하는 죄의식, 상처 입은 국민 의 자의식이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역사를 계속 악운의 역사로 전달하지 말 고, 더 순조롭게 합의할 수 있는 역사상(歷史像)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대외적으로 서독이 서방적 국제 질서에서 지난 세월의 민주적 성취에 걸맞게 더 큰 비중을 획득하려는 것을 의미했다. 비판적 지식인들, 특히 그 대표격인 하버마스와 같은 이는 이러한 보수적 노선에 대하여 서독 시민의 기억에서 나치스와 아우슈비츠에 대한 수치심을 몰아냄으로써 독일을 서방에 연계해주는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토대를 파괴하려는가? 라고 반문했다. 이들이 보기에 서독의 민주적 법치 국가성과 국제 질서, 특히 통합된 유럽으로 대 표되는 정신적 가치 지향으로의 연계를 담보하는 것은 나치스 시대에 대한 기억 과 반성 이었다. 전후의 지체와 우여곡절, 논쟁 끝에 적어도 독일 사회가 도달한 합의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나아가 통일 이후에도 과거의 기 억 은 독일인의 자의식에서 여전히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한편 이와 다른 견해가 존재하는 현실에 서 이 기억 은 여전히 긴장을 안고 있는 것이다. 3. 역사 교과서에 투영된 과거 극복의 노력은 이러한 정치적 실천과 공공의 논쟁으로 전개된 전체적인 과거 극 복의 문맥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또한, 교과서는 국가-사회-개인의 욕구가 합의점에 도달한 결과인 점에서 교육 및 교과서 제작을 둘러싼 제도적 조건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며, 각 시기의 지도적인 역사의식, 교육관을 반영하고 있었다. 1945년 나치스 체제의 패망과 함께 전승 연합국, 특히 미국은 전범의 처벌과 함께, 독일 국민 에 대한 광범위한 재교육 정책을 기획하고 시행했다. 역사 교과서의 개편은 재교육 프로그램에서 중요한 몫을 차 지하는 문제의 하나였다. 나치스의 과거에 심각하게 연루되어 있지 않았던 독일의 역사가와 역사 교육자들, 교사 단체 성원들도 이 문제에 관해 진지하게 대안을 모색했다. FES-Information-Series 점령 당국, 특히 미국은 독일의 교육체제 일반을 근본적으로 개편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고, 독일의 교육 정책 가들도 불운한 독일의 과거로부터의 결별 을 강조하며 민주주의를 향한 의지와 나치스의 폭력적 통치로부터의 급 격한 단절 을 지향할 것을 천명했다. 그리하여 점령 당국과의 협의 속에서 전반적인 교육체제, 교육 내용과 방식의 개혁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일연방공화국의 건국과 함께 냉전 상황이 격화되기 시작하는 1950년대 초부터 이러한 움직임은 오히려 후퇴하였다. 종전 직후 미국이 주도한 교육체제의 개편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독일 특유의 복선형 교육체제, 즉 초등 과정 이후에 대학 진학을 목적으로 하는 중등학교(김나지움 Gymnasium), 직업 진출 및 직업교육 단계로의 진학을 목표로 하는 중등학교(기본학교 Hauptschule 및 실용학교 Realschule)로 갈라지는 전통적인 학교체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미군 점령 당국은 이 복선형 교육체제가 독일의 민주화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보고, 그 개편을 집요하게 추구했으나 결국 좌절하였던 것이다. 교육의 운영에서는 원래의 지방 분권적인 교육 자치제가 복구되어 주정부가 최고의 책임을 지는 체제가 수립되 었다. 주정부의 교육부는 각급 학교에 대한 재정과 행정 지원을 담당하며, 각 교과목의 기본 학습 내용의 요소를 규정하는 교과이수 지침을 제정한다. 복선형 학제로 인하여 중등학교의 역사 교과만 하더라도, 4년제 기본학교, 6 년제 실용학교, 7~9년제 김나지움의 유형에 따라 학습 내용의 분량과 수준이 상이한 교과이수 지침이 공포된다. 이 지침의 갱신 기간은 주마다 다르지만 평균 10~15년이며, 하나의 교과이수 지침이 확정되는 데 착수부터 확 정 ․ 공포까지 최소 2~3년 정도가 걸린다. 출판사들은 공포된 지침에 따라, 여러 가지 학교 형태에 부합하는 다양한 종류의 교과서를 제작하고, 해당 주정부 교육부에 검정을 신청한다. 그리고 이 검정을 통과하면 각 출판사가 자유 시장의 경쟁 원칙에 따라 각급 학교에 판매한다. 실제로 각급의 개별 학교가 사용하는 교과서는 해당 교과목 담 당 교사가 결정하며, 채택된 교과서의 구입에 필요한 예산은 전액 국고가 부담한다. 이러한 제도적 조건으로 인하여 독일의 역사 교과서- 다른 모든 과목의 교과서도- 는 어느 한 시점에서라도 손쉽게 일별하고, 수집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다양성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될 사항은 이 다 양한 교과서도 앞서 말한 대로 역사 교육을 둘러싼 여러 교육 주체 및 관련 당사자- 즉, 국가, 사회, 개인의 요구-의 긴장과 갈등 끝에 도달한 합의로 생성된 것이라는 점이다. 특히, 우리의 주목을 끄는 부분은 국가, 즉 정부의 간여이다. FES-Information-Series 각 주정부는 교과이수 지침의 편수를 관장하며, 개별 출판사가 제작한 교과서를 검정한다. 그리고 교과서의 구입과 배포에 재정 지원을 한다. 국가를 비롯한 교육 관련 당사자의 이해관계는 이수지침의 작성 과정- 최소 2~3년 정도가 걸린다는 점에 주목하자- 에 가장 집중적으로 개입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이수 지침의 작 성은 완전 공개리에 이루어지며, 그 시안은 해당 교과와 관련된 전문 연구자, 현직 교사, 교사 단체에 수백 부 가 발송되어 의견을 수렴한 뒤에 확정된다. 특히, 독일의 역사 교육 전문 학술지, 학문과 교육 속의 역사(Geschichte in Wissenschaft und Unterricht) 에는 각 주정부가 작성하는 교과 지침에 대한 평가와 비판이 논고의 형태로 자주 게재되고 있다. 각 출판사는 이 교과 이수 지침에 다르거나 나름대로의 자금과 아이디어를 투자하여 교과서를 개발하는데, 주교육부가 별도의 상세한 규제를 가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이나 일본의 교과서 제작 과정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의 자유로운 재량과 창의 적인 역량 발휘의 여지가 주어진다. 또 제작된 교과서의 내용 편성이 주교육부의 교과이수 지침에 부합하기만 하 면, 대개 인가되고 그 채택 여부는 각급 학교의 과목 담당 교사의 판단, 즉 일종의 시장 기능에 맡겨진다. 오늘날 독일의 교과서 제도에서는 한국의 교육체제와 같은 국정 교과서 의 형태를 찾아볼 수 없고, 서술 내용에 대한 국가 권력의 직접적인 간여도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이러한 제도적 틀 속에서 교과서의 내용 조직과 형태, 디자인도 지난 50여 년 간에 많은 변천을 겪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교육의 방법론과 자료 제시 방법을 비롯한 교과서관, 역사학의 연구 중점과 방법론에서 이루어진 변화와 경험의 축적이 실현되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4. 그러면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을 둘러싸고 전개된 과거 극복의 노력은 역사 교과서에 어떻게 정리되었을까? 종 전 직후 점령 당국의 요구와 내적인 요구에서 추진된 반성적 성찰을 구현하는 교과서는 당장 현실화되기 어려웠 다. 1950년 초까지 일종의 응급조치로서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교과서가 부분적으로 수정, 배포되었으며, 점령 당국의 요구에 따라 나치스 시대의 역사, 특히 유태인 탄압의 서술이 일종의 별책으로 제작되어 배포되기도 했 다. 물론 이렇게 부과된 나치스 과거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순조롭게 수용될 수 없었다. 독일인들은 스스로를 나치스와 점령 당국 모두에 의한 희생자로 생각하는 자기 연민의 체념 속에 빠져있었고, 점령 당국이 공개하는 나치스의 만행을 외면하고 싶어 했다. 1950년 초 아데나워 정권의 타협적인 과거 정책이 추진되면서부터는 한동안 퇴행적인 경향이 지배했다. 새로 운 교과서에서는 독일사를 유럽사의 문맥에서 파악하고 서술하려는 노력은 다소의 진전을 보았으나, 1933년 나 치스 집권 이후의 반유태주의적 책동은 부차적으로만 다루어졌고 대량 학살조차도 매우 축소되어 서술되었다. FES-Information-Series 사태의 책임자로서도 오직 히틀러만이 언급되었고, 경찰이나 정규군은커녕 나치스 친위대(SS)조차도 언급되지 않았다. 이에 반하여 전시에 독일인이 겪은 고통, 제3 제국에 대한 교회의 저항, 전후 난민의 참상에 대해서는 동정적으로 서술되었다. 전체적으로 역사 교과서에서 2차 대전과 나치스에 관련되는 시기는 희생자의 관점에서 서술되지 않았고, 오히려 독일인 일반을 제3 제국의 테러와 집단 수용소에 저항할 능력이 없던 무죄한 희생자로 보고 있었다. 일부의 교과서 에서는 뉘른베르크의 전범 재판과 점령 당국에 의한 탈나치화 작업조차 언급을 회피했다. 실제의 학교 수업에서는 1차 세계 대전의 발발까지나 겨우 다루어지는 형편이었다. 10여 년 전에 끝난 전쟁에 대해서보다 2천 수백 년 전 에 있었다고 하는 호메로스의 트로이 전쟁 이야기를 희랍어 원전으로 읽는 데 더 많은 수업 시간이 할애되었다. (소설가 페터 슈나이더의 회고) 말하자면, 애매한 과거 정책과 함께 역사 교과서에도 나치스 과거에 대한 침묵, 기 억에서의 방출이 지배하고 있었던 50년대였다. 이미 1955년부터 교육에서 나치스 과거를 다루는 태도에 결함이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에 들어 다시금 높아진 반유태주의의 물결로 지난 전후의 10여 년간에 이루어진 역사 및 정치 교육의 성과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야기되었다. 각 주의 교육부 장관이 모여 개별 주의 교육 정책을 연방 차원에서 조율하는 협의회는 교과이수 지침을 개편하여 현대사 교육의 강화를 권고했다. 전국적인 대학생조직연합체도 교사 양성 과정과 학교 교육에서 다루는 유태인 문제 에 관한 학술회의를 개최하기도 했다. 1960년대 초에는 교과 과정과 교과서 서술에서 유태인 탄압과 홀로코스트를 다루는 방식에서 일대 전기를 마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교과서에서 이 문제의 서술은 양적, 질적으로 이전의 교과서보다 현저히 개선된 모 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일부의 교과서, 예컨대 시간과 인간(Zeiten und Menschen, 1970) 의 자료 학습 과제 에서 나치스와 홀로코스트에 관한 본보기 자료가 5면에 걸쳐 제시한 것과 같은 개선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에는 일부 교과서가 이와 같이 나치스의 과거에 대해 사진과 사료 표본을 제시하여 축 소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태도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나, 기본적인 서술 시점에서 희생자의 관점은 여전히 결여되어 있었다. 유태인 공동체 내부의 삶과 이들의 저항은 매우 소략하게 다루어졌고,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과 탈나치화 작업도 여전히 간략하게, 그리고 긍정적이지만은 아닌 어조로 다루어졌다. 68 학생 운동으로 촉발된 과거의 비판적 반성과 역사학에서의 새로운 모색, 특히 60년대 중반부터 활발해진 나치 스 시대의 연구 성과와 사회 구조의 변천을 중시하는 역사 학풍이 교과서 서술에 반영되기에는 좀 더 시간이 걸렸 다. 1970년대에는 역사학과 역사 교육에 대한 회의와 위기 의식이 팽배해지면서, 역사학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논 의가 학계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FES-Information-Series 한편, 68 학생 운동의 지도 이념이기도 했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 이론이 풍미하면서, 나치스 과거에 대한 성찰이 제고되었다. 그리하여 특히 1978~79년부터 제3 제국 시대 유태인의 처지와 홀로코스트는 교과이수 지침 과 교과서 서술에서 양적, 질적으로 더욱 고양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홀로코스트는 교과서에 자각적이며 의 미심장하게 들어오게 되었으며, 역사적으로 드러났던 현상의 차원에서 일반적으로 매우 상세하고 사실적으로 정 확하게 서술되었고, 관련 자료가 매우 생생하게 제시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이 시기에는 역사 교육에서 학문 중 심적 방법이 교과서의 서술과 내용 조직, 교육 방식에 관철되기 시작했다. 즉, 역사 교육의 목표는 역사 지식이나 역사 연구의 성과를 단순하게 습득(즉,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다룰 줄 아는 지적 역량의 함양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 교육은 여러 가지 상이한 사회 사상과 이론에 대하여 개방적인 입장을 취해야 하고, 학습자가 스스로 역사 지식의 생산 과정을 체험하도록 수업 자료를 조직하고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를 배 우는 학생은 자료(사료 및 2차 자료)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나름대로의 역사상을 구축하는 연습을 통해 하나 의 작은 역사가 가 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서술이 풍부하고 정확하게 이루어지고, 학습자에게 역 사적 책임감을 갖도록 호소하였으나, 현상의 원인을 설명하는 방식에서는 여전히 책임을 회피하는 듯한 논거가 나타나고 있었다. 즉, 나치스 시대의 범죄 행위와 홀로코스트의 원인을 히틀러에게, 그리고 소수의 광신적 나치 스 분자에서 찾는 방식이었다. 1980년대에 들어 독일의 유태인 중앙위원회 와 교원 노조 의 공동 권고, 그리고 독일-이스라엘 교과서 협의회에서 나온 교과서 개선 권고안에 따라 홀로코스트의 서술은 더욱 개선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89~90년 이후, 통일된 독일연방공화국에서는 교과이수 지침과 교과서의 대대적인 개편이 이루어졌다. 이 는 독일 통일에 따라 등장한 새로운 과거 극복의 과제가 교육과정과 교과서에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새 교과서는 1990년대 중반부터 순차적으로 등장했다. 공교롭게 1996년에 발표된 미국의 정치학자 골드하겐의 저서 히틀러의 자발적인 사형 집행인(Hitler's Willing Executioners) 은 과거 극복과 관련하여 독일 사회에 또 격렬한 논쟁의 불을 지폈다. 학계의 울타리를 넘어서 일반 여론에까지 널리 비화된 이 논쟁의 핵심은 나치스의 범죄와 홀로코스트에서 평범한 독일인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FES-Information-Series 전문 역사가들이 이 저작의 결함을 여러 방면에서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저작이 야기한 논쟁은 독일인들 에게 끊임없이 과거의 부담을 상기시켰다. 이러한 논쟁으로 일깨워진 의식이 여러 종류의 역사 교과서에 널리 수용되었음은 물론이다. 1998년에 출판된 중등학교(김나지움)용의 어느 역사 교과서(모두 4권으로 구성)- 오늘 날 가장 많은 판매부수를 자랑하고 있는데, 우리가 만드는 역사(Wir machen Geschichte) 라는 표제를 달고 있 다.- 에서는 홀로코스트에 관하여 전문 연구에서 축적된 성과를 충분히 반영하는 심층적인 서술을 보여주고 있 다. 나치스의 폴란드 점령 정책, 유태인의 학살에서 나타난 잔혹 행위에 대해서 나치스 핵심 성분, 친위대만이 아니라 경찰, 정규군의 가담과 책임을 분명히 서술하고 있는 것은 물론, 평범한 독일인 의 책임에 대한 성찰과 숙고를 학습 과제로 제기하는 방식으로 가차없는 역사적 진실 과 직면하도록 편성되어 있다. 5. 독일의 교과서, 역사 교과서는 제도적 유연성과 여유로 인하여 경직된 교육체제와 교과서 제도를 취하고 있는 나라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일관된 정책을 쉽게 드러내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와 같은 제도적 유연 성으로 인하여 각 시기마다 독일 사회의 구성원이 도달한 의식 수준과 합의를 다소의 시각 차이는 있지만 더욱 정 직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교과서에 표출되는 독일인의 과거 극복은 지난 세월 동안에 정치적 실천과 여론의 논쟁으로 전개된 과거 극복의 정신을 불충분한 면에서나, 충분한 면에서나 남김없이 반영하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독일의 교과서는 독일 사회의 정치적 리더십- 전문 연구- 교육 관련 종사자- 교육 수혜자 등 교육과 관련된 모든 이해 당사자의 합의가 충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역사 교과서에 정리된 나치스 과거의 이해와 성찰은 최근까지 더욱 깊이 내면화 되어왔던 바, 여기에서 적어도 과거의 과오를 감추려 하지 않고, 끈질기게 상기 함으로써 과거의 부담을 극복하려는 태도가 독일 사회의 주류임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모든 교육이 그러하듯이 이 와 같은 교육적 의도와 노력이 현실에서 남김없이 효과적인 성과를 거두었는지 또 거두고 있는지는 별도의 검증과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크게 보아 이 과거 극복의 지속적인 성과는 독일의 지난 50여 년간의 역사가 그러했듯이 앞으로 나타날 독일 사회의 미래가 입증할 문제라고 하겠다. 통일 독일의 과거 청산: 강제 징용 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배상 정 현 백,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송 충 기, 독일 보쿰대 사학과 박사과정 2000년 9월 최근 독일 의회에서는 역사적으로 아주 뜻 깊은 법안 하나가 통과되었다. 독일 정부와 기업이 공동으로 기금을 출연하여<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Erinnerung, Verantwortung und Zukunft)라는 이름의 재단을 설치하려는 법안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역사적인 의미를 띠는 까닭은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강제 징용된 외국인 노동 자들이 반세기를 넘기는 기나긴 투쟁 끝에 드디어 독일로부터 보상받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독일은 일본과는 달리, 히틀러 정권 하에서 자행된 참혹한 비인간적인 범죄에 대한 속죄에 대해 적 극적이었다. 전후 일본 정치가들이 불행했던 과거에 아직 사과의 수준에도 못 미치는 애매한 유감 표명을 하는 데 그치고 있는 반면, 독일 정치가들은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려는 노력을 줄곧 보여 왔다. 과거 브란트 수상이 홀로코 스트 희생자들의 영령 앞에 참배하면서 무릎을 꿇은 것이나, 1985년 제2차 세계대전 종결 40주년을 맞아 당시 대통 령이던 바이체커 대통령이 국회에서 과거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 연설을 한 것이 그 사례라 하겠다. 게다가 독일은 역사 교육이나 역사 교과서, 그리고 일반 대중들에 대한 정치 교육에서도 히틀러 정권의 잔학성을 고발하는 노력을 계속해 왔다. 그러나 과거 청산에 대한 이러한 독일 정부의 전향적인 자세에도 불구하고 강제 징용된 외국인들에 대한 보상 문 제만큼은 지금껏 외면당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독일 정부는 이제까지 나치정권의 피해자에게는 약 1400억 마르크(일 부 강제 노동자에 대한 보상금 포함)라는 적지 않은 액수를 보상 해왔다. 그러나 유독 강제 징용된 외국인 노동자들 이 요구하는 체불된 임금과 강제징용에 대한 보상 문제에 대해서는 법적 근거가 부재하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거부 해 왔었다. 그래서 외국인 강제 노동자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전후 보상에서 누락되어 왔으며, 그리고 예전에는 논 의조차 금기시되던 이들에 대한 보상 문제가, 특히 통일 이후, 어떻게 정치적인 타결에 이르게 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1. 강제 노동자란 누구를 말하는가? FES-Information-Series 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 정권은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군수 물자 생산에 노동력 부족이 심화되자, 독일 점령 하에 있던 지역에서 수백만 명에 달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강제로 동원했다. 여기에는 아주 다양한 국적과 신분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고 강제 동원한 방식, 상황, 시기도 각각 달랐다. 이렇게 강제 노동에 징용된 사람들을 여러 부류로 나눌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다음 네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로,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로 동원된 외국인 민간 노동자로서, 소위 외국인 노동자 로 불린 사 람들이다. 폴란드와 소련 지역에서 온 동유럽 노동자 들을 제외한 다른 서유럽 민간 노동자들은, 맡은 역할 에 따라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독일 노동자들과 똑같은 임금을 받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폴란드 노동 자들은 독일 노동자 수준의 임금에서- 이들은 독일인과 달리 군대에 가지 않는다는 괴상한 명목으로- 15 퍼센트를 세금으로 공제 당했다. 그 반면, 소련 지역에서 온 민간 노동자들은 따로 규정된 임금을 받았는데, 그 명목임금의 수준은 독일 노동자나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에 비해서 약 40퍼센트 정도가 낮았으며, 실질임 금은 더 낮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규정상의 일이고, 실제로 임금을 아예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아예‘민간인 포로’처럼 취급당하기 일쑤였다. 여기에는 또한 인종주의적인 차별도 한몫했다. 곧 동유럽 노동자 들은 그 외에도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과 구분되도록, P(폴란드 노동자)나 Ost (동부: 소련 지역에서 온 노동자)라는 표찰을 붙이고 다녀야 했고, 수용소에 거주하면서 특히 엄한 감독과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부당 행위에 시달렸다. 이들 노동자들의 절반 이상이 여성들이었으며, 그 평균 나이는 20살도 채 못되었다. 그 배후에는 이들 동유럽 노동자 가운데 절반 이상을 여성으로 채우게 함으로써, 이들 동유럽 남성 노동자들이 독일 여성에게 접근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여 독일인의 피를 보호 해야 한다는 인 종주의적인 의도가 다분히 숨겨 있었다. 두 번째 부류는 전쟁 포로들이다. 1939년 전쟁 개시 이후 폴란드에서만 30만 명 이상의 전쟁 포로가 독 일 군수 산업에 투입되었는데,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나중에 민간인 신분으로 전환되었다. 여기에다가 1940년 프랑스 전선에서 독일의 계속적인 승리로 백만 명 이상 되는 프랑스 전쟁 포로가 추가로 동원되었 다. 또 소련과의 전투에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전쟁 포로가 독일인 수중에 떨어졌는데, 그 중 많은 사람들이 독일인들의 학대로 말미암아 굶어 죽었고, 나머지는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 여기에서 또 빠뜨릴 수 없는 집단은 60만 명에 달하는 이탈리아 군인들이었다. 이들은 1943년 이탈리아가 추축국에서 제외되자 독일군 감시 하에 놓이게 되었는데, 나치 정권은 이들조차 독일로 끌어와 강제 노동에 동원시켰다. FES-Information-Series 세 번째는 나치의 특수 군대인 SS의 관할 하에 있던 독일 내 강제 수용소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다. 1944 년 전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소련과의 전투에서 상황이 날로 악화되면서 전선에 투입해야 할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게 되자, 그 자리를 메울 노동자들의 부족이 심각해졌다. 그래서 강제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의 노동력 을 이용하는 방안이 대두되었다. 나치의 강제 수용소는 원래 정치범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으나, 점차 일반 범죄자, 반(反)사회범, 동성 연애자, 유대인, 집시, 그리고 전쟁 때에는 적대적인 외국인들까지 수용하고 있었다. 전쟁 초기에는 2만 명 정도에 그치던 수감자 수가 전쟁 말기에는 60만 명에 육박했고, 그 가운데 외국인의 수도 크게 증가했다(전쟁 말기에 독일인 비율은 약 8퍼센트였다). 이들을 경제적으로 이용 하려는 생각은 SS가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기업들이 생겨나면서 그 이전부터 현실화되고 있었으나, 적어도 1942년 중반까지는 주로 이들을 교화 시켜야 한다는 정치적 목적에 치중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전쟁 상황이 날로 악화되자, SS는 이들을 사기업에게 대여 하는 원칙으로 방침을 바꾸었다. 곧 수감자들이 노동력을 제공해야 할 기업의 근처에 임시 수용소가 설치되어 그들의 숙소로 사용되었고, 이 노동력을 이용하는 사기업은 SS에 그 대가를 지불했다. 이 부류의 강제 노동자에게는 임금이 전혀 지불되지 않았다. 마지막 부류는 유대인들로서, 특히 동유럽 지역의 유대인들이 강제 노동에 이용되었다. 독일 지역 내에 있던 유대인 가운데 실업자로서 실업 생계보호를 요청한 사람은 이미 1939년 전쟁 이전부터 부분적으로 강 제 노동에 이용되었다. 그러나 1941년 초반에 유대인들을 멸종 시키려는 정치적 프로그램이 대두하자, 히틀 러 정권은 유대인을 계속 경제적으로 이용할 것인가, 아니면 아우슈비츠와 같은 학살 수용소로 끌고 가서 일단 독일 내에서 만이라도 유대인을 없애도록 할 것인가 하는 정치적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실제 진 행된 결과는 후자였다. 곧 1943년 여름까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군수 산업에 중요한 노동자로 판단된 유대인들까지 모두 독일 지역에서 동유럽 점령지로 추방되었다. 그곳 독일 점령지 내의 유대인들도 이와 비 슷한 운명에 처해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1939년 10월에 이미 14살에서 60살까지의 모든 유대인 남성이 강제 노동의 의무를 지게 되었고, 몇 주 후에는 여성에게도 이 규정이 확대 적용되었다. 그렇지만 이들의 노동력 도 죽음의 운명을 모면시켜주지는 못했다. 이들 동유럽 유대인들은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가기 전에 노동 능력자 로 판정을 받으면 게토나 강제 노동 수용소에 거주하면서 일정 기간 강제 노동에 종사했다. 폴란드 유대인 가운데 절반 정도가 그런 판정을 받았으며, 다른 지역에서 그곳으로 추방된 유대인들 가운데서는 노 동 능력자 로 판단된 사람의 비율이 더 낮았다. 곧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잠시 중간 집결지를 거쳐 곧바 로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갔던 것이다. 1944년에 들어 유대인들을 다시 노동력으로 이용하려는 움직임이 있 긴 했었지만, 전반적으로 나치 정권은 심각한 노동자부족에 시달리면서도 노동자로 이용할 수 있는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쪽을 택했다. FES-Information-Series 이런 강제 노동에 종사한 외국인 수는 1944년 당시를 기준으로 하면 대략 8백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그 가운데 민간 강제 노역자는 570만 명, 전쟁 포로 190만 명, 강제수용소 수감자 50만 명 정도였다. 따라서 이 당시 외국인 강제 노동자의 수는 전체 독일 경제 종사자의 약 4분의 1을 차지했다. 육체 노동을 많이 필요로 하는 기업체나 군수 산업에서는 외국인 강제 노동자의 비중이 더욱 컸다. 혹사, 영양 부족, 열악한 시설 및 위생 환경으로 말미암아 이들이 사망에 이른 경우도 부지기수였으며,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이후 고 질병에 시달려야 했다. 이들은 산업 분야에 한정되지 않고 농업, 숙박업, 일반 공공 관청에 까지 투입되었으 며, 심지어 가정에서 보모로서 일한 경우도 있었다. 최근 가톨릭계는 가톨릭 교회도 역시 강제 노동자들을 고용했었다고 밝히고, 이제 어떤 방식으로 보상에 참여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는 중이다. 2. 강제 노동자에 대한 보상 누락- 또 하나의 정신적 강제 노동 의 시작 히틀러 정권의 주요 전범을 다룬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노예노동자 프로그램(Sklavenarbeiterprogramm)이 핵심 죄목 가운데 하나였다. 강제 노동자 동원에 직접 책임이 있는 자우켈(Sauckel) 및 군비 책임자였던 스 페어(Speer), 강제 노동자들을 이용한 크룹(Krupp) 및 이게파르벤(I.G. Farben) 등을 위시한 많은 기업가들 이 이 죄목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렇지만 이 문제가 그 당시에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그것은 홀로코 스트라는 역사상 유례없는 인종 말살이라는 죄악에 가려‘외국인의 강제 노동’은 상대적으로 가볍게 취급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쟁 직후의 경제적 어려움이 제대로 된 과거 청산을 어렵게 만들었다. 또한, 일반 독일인들의 과 거 청산 의지도 대단히 약했다. 모두 직간접으로 전쟁 당사자였던 이들은 미군이 독재 의 그늘에서 자신들 을 구해낸 해방군 이라는 점에 대해 여전히 의문 부호를 달고 있었다. 전쟁의 종결 에 대해서는 이들이 환 호했을지 모르지만, 전쟁의 패배 에 대해서는 쉽사리 승복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 독일 일반 대중 에게는 과거란 망각해야 할 대상이었지, 과거를 다시 들추어내어 그 상처를 다시 하나하나 직시해야 한다는 것은 고통 그 자체였다. 이들에게는 다행히도 유대인의 살상 행위는 나치즘의 보도 지침때문에 일반 독 일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유대인 살상 행위에 대해 일반 대중은 집단적인 죄의식에 크게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곧 이들은 이 모든 행위를 나치 정권 자체의 잘못으로 넘기 고,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강제 노동자 문제는 크게 달랐다. 왜냐하면 강제 노동자들은 이들 주변에 항상 존재하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 대중들에게는 강제 노동의 비 인간적 행위를 들추어내어 집단적인 죄의식에 시달리기보다는 그것을 기억에서 일찍 지워버리려는 경 향이 강하게 박혀있었다. FES-Information-Series 이로써 전후 보상 문제의 원칙은 자연스럽게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대인의 박해는 나치 정권의 죄 악으로 크게 부각되고, 그 희생자들에게 대해서는 적극적인 보상책이 강구되었다. 그렇지만 나치 정권, 기업 그리고 일반 개인들까지 연루된 문제인 외국인 강제 노동자 문제를 들춰내는 일은 금기 사항이 되다시피 했다. 실제로 나치즘의 피해자들을 보상하기 위해 1956년에 제정된 독일연방보상법(Bundesentsch ä digungsgesetz: BEG)의 내용이 그것을 아주 잘 보여준다. 이에 따르면, 그 보상의 대상이 독일 국민이거나 독일이 점령한 지역의 주민으로 제한됨으로써 전쟁 당시 독일과 적대적이었던 국가의 국민이 여기에서 제외되었고, 따라서 대다수의 외국인 강제 노동자들(민간인 노동자와 강제 수용소에 있던 외국인들)은 애초부터 그 보상 의 근거를 박탈당했다. 만약, 외국인 강제 노동자가 서독 당국이 제정한 나치즘 피해자에 대한 보상 원칙에서 제외된다면, 외국 인 강제 노동자는 전쟁 배상을 통해서 그 보상을 받아야 했다. 그렇지만 전쟁 배상에서도 외국인 강제 노동 자는 배제되었다. 서독은 국가 간의 전후 배상 문제를 1953년 런던채무협약(Londoner Schuldenabkommen) 을 통해 일괄 타결했다. 여기에서 서독 측은 미국 측의 도움으로 피해국의 배상 요구액에 훨씬 못 미치는 73억 마르크를 12년 상환으로 지불한다는 유리한 결정을 얻어냈다. 주요 채무국인 미국이 당시 냉전의 위협 하에서 서독을 빨리 부흥시키고 반공산주의의 보루로 만들어야 한다는 세계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기 때문 에, 연합국 쪽으로서는 배상 문제의 신속한 해결이 급선무였던 것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체결된 이 협약의 규정에 따라, 강제 노동자에 대한 보상 문제는 사실상 영구히 유예되 었다. 이 협약 제5조 2항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규정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 전쟁 상태에 있 었거나 독일의 점령지였던 국가나 국민이 독일 제국이나 그로부터 위임을 받은 당국이나 사람들에게 전쟁으 로 인한 보상을 청구할 경우, 이에 대한 검토는… 이 배상 문제의 최종적인 규정이 확정될 때까지 유예한 다. 곧 더 이상의 배상 요구가 나오면 서독의 배상 능력을 넘어서게 되어 원래 이 조약의 목적에 위배되기 때문에, 더 이상의 배상 논의는 최종 규정, 곧 평화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유예한다는 것이다. 이후 독일은 예정보다 앞당겨 요구받은 채무를 이행했지만, 이 조항에 따라 강제 노동자에 대한 보상 문 제는 더 이상 제기되지 않았다. 잠정적인 보류가 영원한 보류로 둔갑했던 것이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 으로 인한 모든 배상 문제는 해결되었으며 외국인 강제 수용소 수감자와 외국인 강제 노동자들의 보상 요 FES-Information-Series 구를 막는 법적인 근거가 마련되었다. 더욱이 서방측에서 뿐만 아니라 소련의 영향권 내에 있던 동유럽 국가 들에 대해서도 개인적인 보상 권리가 점차 배제되었다. 1953년 소련 당국은 폴란드 정부와의 합의에 따라 동 독에 대한 더 이상의 배상 요구를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서독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지 않던 국가들, 곧 주로 런던채무협약에 참여하지 않은 구 공산권 국가의 구성원들의 보상 문제도 사실상 매듭지어졌다. 이 문제가 현실적인 국제적 상황 논리에 밀려 논의조차 되지 않음으로써, 강제 노동자 당사자들은 역사적 인 청산이라는 또 다른 정신적 강제 노동 까지 스스로 떠맡은 꼴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 대기업들(AEG, Krupp, Volkswagen, Bayer, Siemens)은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보상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버텼다. 이들은 런던채무조약으로 법적인 근거를 갖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소송비라는 현실적인 요소까 지 계산에 넣고 있었다. 곧 강제 노동자 개개인이 엄청난 소송비를 감수하면서까지 승산이 보장되지 않은 법정 투쟁을 벌일 수 없다는 것을 감안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골리앗에 대한 다윗 의 싸움이었다. 이런 골 리앗을 그나마 약간 움직이게 한 것은 유대인 조직들이었다. 이들은 강제 수용소에 감금되었던 많은 유대인 들이 강제 노동에 시달렸는데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보상이 전혀 지급되지 않자, 이들 당사자들의 이해를 대변하여 보상 문제에 나서게 되었다. 이들의 법정 투쟁은 그다지 순탄하지 않았다.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한 폴란드 인이 1963년 강제 노 역에 대한 임금을 추후 보상하라는 요구를 제기했는데, 서독 연방재판소는 이를 기각했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그 기각 사유이다. 런던채무협약 제5조에 따르면, 국가인 서독 정부만이 아니라 그 정부의 경제 및 환율까지 배상 청구권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라고 규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강제 수용소에 수감 중이 던 사람을 고용한 사기업은 그 보호의 대상인가 아닌가? 여기서 문제는 사기업들이 소위 독일제국으로부터 위임을 받은 당국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강제 노동자의 보상 청구권을 기각한 사유에 따르면, 이들 기업주들도 국가적인 수감자를 관장하는 보조 기구 였다고 판단된 것이다. 그러나 역사 연구를 통해서 이 강제 노동자를 고용한 사기업들의 책임 소재가 다시 논란거리로 부상했다. 왜냐하면 역사 연구 결과에 따르면, 국가가 강제 노동자들을 사기업에 강제적으로 할당시킨 것이 아니라, 기업가들이 그 값싼 노동력을 탐내 그들을 고용하기를 자청했던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에는 아직 섣부르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전쟁 중에 외국인 노동자 비율이 전체 고용원 수의 절반을 넘었던 많은 대기업들에게는 이 법적 논란은 대단한 효력을 발휘했다. 연방재판소가 강제 노동자들에 대한 보상 요구를 기각시킨 또 하나의 법적 사유는 이들 외국인 노동자들 FES-Information-Series 이 나치의 전형적인 박해를 받았다고 보기가 어렵다는 데 있었다. 가령 한 폴란드 노동자가 전쟁 중에 체 포되어 독일에 끌려와 강제 노역에 종사했다고 하더라도, 이 과정에서 강제로 끌어온 부당한 행위의 핵심적 인 원인은 나치의 전형적인 박해 가 아니라, 단지 노동력 부족 에 있었다는 것이다. 또 SS가 강제 수용소에 있었던 수감자들을 일터로 내보낸 행위는, 그를 수감자로서가 아니라 군수 산업에 필요한 숙련 노동자 로 간주했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것을 나치 정권의 부당한 박해 행위 의 하나로 보기 어렵다고 연방재판소는 밝혔다. 이들이 어려운 노동 조건에 처했던 것은 전쟁으로 인한 불가피한 결과였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강 제 노동에 동원되었던 사람들은 독일 연방보상법을 통해 보상받을 수 있는 길에서조차 차단된 것이다. 이런 시각 역시 역사 연구를 통해 부분적으로 수정되고 있다. 왜냐하면 강제 노동자나 강제 수용소 수감자가 사 기업에서 일하면서 수많은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 자발적으로 나서서 보상에 적극적이었던 한 중소기업의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 분의 기업은 이 보상을 완강히 거부했다. 이들의 입장은 다음과 같은 한 기업 변호인의 말에서 단적으로 드 러난다. 강제 수용소에 있다가 강제 노동에 동원된 사람들이 특별히 많이 죽었다는 주장을 나는 결코 받아 들일 수 없다. 아니 그 반대이다. 이들은 강제 수용소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을 기뻐했다. 왜냐하면 알다시피 기업에서 그들은 죽음의 강제 수용소에서는 갖지 못할 생존의 가능성과 합리적인 보살핌을 받았기 때문이 다. 이 논조에 따르면,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은 무일푼으로 강제 노동에 종사할 수 있게 해준 기업에 대해 오히려 감사해야 할 처지라는 것이다. 이들 기업가들은 기업 윤리를 망각한 악독한 자본가가 아니라 온정 있는 생명의 은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기업들은 유대인 조직의 끈질긴 법정 소송에 시달리게 되고 계속 여론에서 문제시되자, 협상에 응할 뜻을 비쳤다. 끈질긴 협상 끝에 몇몇 대기업(예를 들어, 크룹, 지멘스, AEG 등)은 최소한의 보상을 내 놓았다. 이때 기업들은 이 보상이 법적인 의무 때문이 아니라 인도적인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배려하는 것이 라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보상은 강제 수용소 수감자 출신의 노동자들에게만 주어졌 다. 노동자 수용소 에 있던 민간인 강제 노동자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물론 1980년 이후 노동조합의 주도로 민간인 강제 노동자에 대한 보상과 과거 청산에 나선 대기업도 있 다. 가령 풍뎅이 차로 유명한 자동차 회사인 폴크스바겐은 1937/8년에 나치의 주도로 세워진 그야말로 나치 정권을 대표하는 기업이다. 신생 기업으로서 노동자 수급에 적잖은 어려움이 있던 이 회사는, 전체 종업원 가운데 강제 노동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⅔가 될 정도로, 강제 노동자에게 크게 의존했다. 이 회사가 나치에 FES-Information-Series 협력했던 어두웠던 과거사를 제대로 조명하는 등 과거 청산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은, 이 회사 노동자 대표들이 1985년 기업 이사회에 강제 노동자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했었기 때문이다. 그 과거 청산 작업의 일 환으로, 이 회사에서 일했던 강제 노동자들은 일회적인 금전적인 보상을 받게 되었다. 이런 예외를 제외하면, 민간인 강제 노동자들은 이후 역사에서 그 존재가 완전히 잊혀졌다. 특히 구소련 에서는 이들 강제 노동자들이 보상 대상자가 되기는커녕, 대부분 나치에 협력한 배반자 라는 따가운 의심의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나치 독일에서 문자 그대로 인간 이하의 존재(Untermensch)로 취급당했던 이들이 드디어 소련 땅에 발을 내딛었을 때,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따뜻한 환대가 아니라 소련 비밀 경찰의 소위 여과 수용소 였다. 또 여기에서 누구나 집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다시 소 련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사람도 있었다. 1953년 스탈린의 사망 때까지 이들은 비밀 경찰의 감시 하에 있 었으며, 직업상 차별을 당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 들어와 동유럽과 서독의 외교 관계가 진전되면서 강제 노동자의 문제가 다시 현안으로 대두 되었다. 동유럽 가운데 특히 폴란드는 이에 대한 보상 문제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양국은 명목과 실리를 둘 러싼 줄다리기를 계속하다가, 결국 1975년 서독이 폴란드에 경제 차관이란 명목으로 10억 마르크를, 그리고 폴란드 출신 강제 노동자들의 연금 청구를 상쇄하는 대가로 13억 마르크를 제공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 액수는 여러 면에서 보더라도 ― 서독 노동자들의 연금 수준과 비교하거나 서독 연방보상법에 의해 나치 희생자들이 보상받는 것에 비하면 ― 약소한 것이었다. 3. 통일 후 새로운 법적인 해결 노력 이처럼 법적 근거에 밀려, 강제 노동에 대한 보상이 해결되지 않은 채 독일은 통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물론 통일 이전에 이들 강제 노동자들에게 보상을 해주려는 정치적인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다. 1986년에 유럽의회는 녹색당의 발의로 독일 기업들에게 보상 기금을 설치하도록 하는 요구 안을 통과시켰 다. 또한 서독 내에서도 1989년에 녹색당과 사민당이, 강제 노동자의 보상을 위해, 재단을 설치하려는 목적 의 법률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서 이루어진 독일 통일은 이 보상 문제에 새로운 법적인 근거와 정치적인 해결에 활력을 가져 다주었다. 왜냐하면 1990년 독일 통일을 위해 동독과 서독 그리고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이 2+4 협약 FES-Information-Series (Zwei-plus-Vier-Vertrag)에 조인함으로써, 소위 평화협정에 준하는 규정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런 던채무조약의 전제 조건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해졌다. 따라서 그에 따른 심각한 결과를 우려한 통일 정부는 구소련 국가 및 폴란드와 협정을 체결하여 15억 마르크를 일시불로 지불하고, 그 기금 가운데 5억 마르크를 나치 정권의 희생자들을 위한 보상에 쓰도록 함으로써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렇게 해서 배상 문제는 전쟁 종결 50년 이후에 물질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보고, 대신 이 평화조약에 준하는 2+4 협약에는- 런던채무협약 5조 2항에 명기된 것과는 달리- 배상 문제가 최종적으로 규정되지 않았다. 따라 서 구체적인 배상규정을 기대했던 많은 강제 노동자들은 이에 실망을 금치 못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배상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규정이 누락됨으로써, 역설적인 법률 해석이 가능하게 되었다. 암 묵적으로 배상 규정을 빠뜨린 것은 배상 요구권이 사라진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 치 희생자에 대한 배상 근거에 따라 그 배상 요구를 들어주도록(말하자면,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 은 아닌가? 후자의 해석을 따른다면, 개인적인 법적 청구권이 다시 허용되고 있는 셈이다. 독일 법정도 이 문제에 대해 엇갈린 판결을 내렸다. 여러 독일 법정에서는 이 보상 청구권의 소멸을 인정하지 않았다(하지 만 다른 이유로 그 청구권을 기각시켰다). 하지만 미국 법정에서는 국제법상의 협상을 우선함으로써 그에 관련된 집단 소송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 다음 문제가 되는 것은 보상 청구권의 법적 시효였다. 여기에는 두 가지 논란거리가 있다. 첫째는 그 법적 시효가 얼마인가 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발효 시점을 언제라고 보느냐 하는 것이다. 이미 1967 년에 서독 연방법정은 독일인 강제 수용소에 있던 한 사람이 제기한 소송에 대해 민법 196조 9항(임금 청 구)에 의거하며 법적 시효 기간이 2년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임금 청구만이 아니라 부당한 범법 행위에 관 한 규정을 적용해도 독일 민법상 시효 기간은 2년이다. 이에 대해 여론의 비난이 쏟아지자, 부당 이익 취득 죄를 적용해서 3년을 적용할 수 있다는 새로운 해석이 나왔다. 지금까지의 판결 사례로 보면, 대체로 이에 대한 시효는 짧은 것으로 결론 지워지고 있다. 이 보상청구권의 시효가 짧은 관계로 그 시효의 시작이 언제인가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쟁점으로 등장 했다. 일각에서는 2+4 협약을 그 시작으로 보는 시각이 많은데, 그렇다면 그 시효는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94년 3월 15일에 말소되었다. 이를 근거로 청구권의 기각을 판결한 선례가 최근에도 있었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의 판례가 나왔다. 그러나 소송 담당자들의 시각은 이와 다르다. 1996년 독일 헌법재판소가 내린 결정(기존의 법적인 근거로는 청구권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독일 정부가 나름의 권리에 따라 외국인 강제 FES-Information-Series 노동자들의 청구를 허용한다고 해도 그것이 헌법에 저촉되지 않는다)에 따라 비로소 피해자들은 이 소송이 가능한지에 대한 근거를 갖게 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까지 독일 법정들이 내린 판결이 소송 담당자들이 청 구할 수 있는 길을 방해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 시효의 시작은 이 판결이 내려지고 난 이후부터라는 주장이 다. 그러나 이에 대한 법적인 반론도 또한 만만치 않아서 현실적으로는 소송자들이 법적으로 상당히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 특히 손해배상에 대한 집단 소송이 독일에서는 불가능하고 미국에서나 그것이 가능한 데, 미국의 집단 소송이 법정에서 이런 시효나 국제법상의 규정을 들어 이미 기각된 상태에서, 법적 처리는 다소 비관적인 전망에 놓이게 되었다. 4. 법적인 해결에서 정치적, 윤리적, 역사적 해결로 강제 노동자 보상 문제는 이렇듯 통일 이후에도 여전히 법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전망이 적어졌지만, 그 만큼 여론의 공세는 오히려 거세졌다. 게다가 나치 시대 때 기업가들의 윤리적인 문제가 계속 여론에 흘러 나와 그 정치적 공세를 자극시켰다. 그 가운데 하나는 바로 1997년에 불거진 스위스 은행의 문서 유출 사 건이다. 많은 독일 기업들이 계속 소송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본 이 은행은 스스로 갖고 있던 문서를 파기 함으로써 그 소송의 소용돌이에서 아예 벗어나려고 했다. 이것을 그 은행의 한 경비원이 알아내고 문서를 빼내어 공개했다. 이로써 소위 주인 없는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구좌에 대한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여 론에서는 이 사건으로 인해 그동안 소문과 추측으로만 나돌던 스위스 은행의 나치 범죄 행위가 다시 도마 위에 올려졌다. 이에 대해 뉴욕에서 집단 소송이 준비되었고, 스위스산 물건에 대한 보이코트가 연일 여론 에서 거론되었다. 그러자 이 은행은 1998년 들어 이에 굴복하여 22억 마르크로 정의 기금 을 만들어 보상하 기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자극을 받아 독일 은행과 대기업에 대해서도 강제 노동자 보상에 관한 집단 소송이 미국에서 제기 되었는데, 여기에서는 강제 노동자 문제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로부터 재산을 불법적으로 빼앗거나, 홀로코스 트 희생자들의 금붙이를 모아서 이득을 챙긴 죄목이 주로 거론되었다. 이 과정에서 논쟁은 법적인 문제를 떠나 점차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되었다. 이 문제가 정치적으로 해결될 기미를 보인 것은, 1998년에 16년간 정권을 잡고 있던 콜 수상의 기민당/기 사연 및 자민당 연립정부가 무너지고 사민당과 녹색당의 연립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였다. 기민당/기사연과 달리, 그동안 이 문제에 전향적인 자세를 보였던 양 정당은 연립정부를 출범시키면서 연방정부와 기업들이 FES-Information-Series 강제 노동자들의 보상을 위한 재단을 세워야 한다는 데 쉽게 합의를 보았다. 슈뢰더(Schr ö der) 수상은 이 문제를 직접 관장하여 주요 대기업의 경영자들에게 정치적으로 해결할 것을 종용하고 나섰다. 대기업이 이에 대해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게 된 것은 독일 대기업에 대한 반대 여론이 거세졌기 때문이 다. 예컨대, 독일 은행인 도이치방크가 미국 뱅커스 트러스터 회사를 인수하려고 했을 때, 뉴욕 시의회는 그 에 대한 허가를 내주지 말도록 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벤츠와, 베르텔스만과 같이 미국계 기업과 합작하 거나 기업을 인수한 독일 기업들은 미국에서의 기업 이미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나치와 관련 된 소송이 일단 제기되면, 그 결과에 관계없이 좋지 않은 이미지를 얻게 될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보도가 계속되는 만큼 이로울 것이 없다는 판단도 여기에 한몫 작용했다. 그 뿐만 아니라 수출 주력 기업들은 직접 적인 보이코트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미국 시장의 규모가 작지 않은데다가 그 여파가 다시 유럽 전역으로 퍼질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이런 정치적 압력 속에서 1999년 2월 독일 굴지의 보험회사, 은행 및 대기업들(도이치방크, 드레스드너방 크, 알리안츠, 다이믈러크라이스-벤츠, 지멘스, 바이어, BMW, 폴크스바겐, 티센-크룹, 베르텔스만, BASF 등) 은 강제 노동자들에 대한 보상에 참여하기로 결정하고, 재단 건립을 위한 발기 회의를 개최했다. 이와 동시 에, 독일 정부, 미국 정부, 동유럽 및 유대인 희생자 그리고 경제계 대표들이 모여 재단 건립에 관한 협상 을 개시했다. 이 협상은 재단 기금의 액수 때문에 번번이 난관에 부딪치기도 했으나, 1999년 12월에 최종 액수를 100억 마르크로 최종 합의했고, 올해 3월에는 약 1년간에 걸친 끈질긴 과정 끝에 분배 문제까지 마 무리되었다. 여기서 또한 신속한 해결을 부추겼던 한 요인은 바로 보상금을 받을 당사자들의 노령화 문제였다. 그들의 사망률은 매년 10퍼센트로 추정되고 있다. 사실상 보상 합의가 늦어지면서‘생물학적인 자연사 해결 방 법’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비난의 목소리 또한 적지 않았다. 그 때문에‘어떻게든 올해(2000 년) 안에 보상금 지불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부담이 협상 관계자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그 밖에도 독일 경제계는 더 이상의 소송이 제기되지 않는다는 법적인 안전 장치를 요구하고 나섰다. 미 국 정부 측으로서도 이에 대한 완전한 법적인 보장을 할 수 없는 입장이어서, 협상이 다시 제자리를 맴돌았 다. 그런데 6월에 들어서면서 미국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것에 양자가 합의를 함으로써, 드 디어 협상의 마무리를 보게 되었다.(이 법안의 내용 및 그에 관련된 자세한 사항은 인터넷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http://www.ns-zwangsarbeiterlohn.de/, 2000년 8월 26일자) 강제 노동에 대한 보상 기금 내역(단위: 마르크) FES-Information-Series 이번 협상 과정에서 보듯이, 문제 제기와 협상의 주역은 유대인 피해자들과 그 대변인들이다. 비록 이들 이 동유럽 강제 노동자들의 이해관계까지를 대변하긴 했지만, 역시 전후에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이 미 국 지역에서 집단 소송을 제기했고, 여론의 공세를 취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미 협상 과정부터, 보상 문제가 타결될 경우, 유대인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적지 않게 일었다. 동유럽 강제 노동자들이 수적으로 다수일 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보상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통과된 법률안의 대체적인 윤곽에 따르면, 전체 액수로 보아 동유럽 지역의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금액이 배당되었다. 그렇지만 1인당 보상액수에서 관건이 되는 문제는 이 지급 당사자 가운데 지 금까지 살아남은 생존자가 몇 명이나 되는가 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지금껏 정확한 통계가 나와 있 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 법률안의 대체적인 분배 원칙은 추정된 수치에 따른 것이다. 강제 수용소 및 유대인 게토의 강제 노동자들의 경우에 일시금으로 1만 5천 마르크가 책정되어 있는 반면, 민간 강제 노동자들의 경우에는 몇 가지 부류로 더 세분화하여 보상금을 차등 지급할 예정이긴 하지만- 이를 위 해서는 일정한 증빙 서류를 제시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어쨌든 추후 실제로 보상금이 어떻게 지급될 것인지 그 과정이 주목된다. 5. 맺음말 FES-Information-Series 망각하려는 것은 유랑(流浪)을 연장시키고, 기억이야말로 구원의 열쇠이다- 동유럽 유대운동의 신비주 의자인 발 셈 토브(Baal Shem Tov)가 했다는 이 말은 전후 독일 정치가들이 과거 청산을 언급할 때 자주 인용되는 문구이다. 이것은 바이체커 대통령의 연설에서도 언급되었고, 요시카 피셔 현 독일외무부 장관이 최근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홀로코스트 희생자의 추모지인 야드 바셈(Yad Vashem)의 방명록에 이 말을 남기 기도 했다. 과거를 청산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망각시키려고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번 강제 노동자 보상 문제가 중요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물질적인 보상이, 강제 노동자들이 나치 정권의 가혹한 탄압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겪은 정신 적인 고통까지 치유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게다가 이들은 전후에도 현실적인 법적 논리만 앞세우 는 독일 정부와 이 문제를 금기시하는 여론에 가로막혀, 반세기가 넘도록 그것을 보상받기 위한 기나긴 또 다른 정신적 강제 노동 에 시달려왔다. 그렇지만 이제 이중의 강제 노동 을 역사화 하는 노력이 시작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귀추가 주목되는 것은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중국인 강제 노동자들이 일본 기업들 (미쓰이, 미쓰비시)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이다. 주지하다시피 그동안 한국인을 포함한 많은 외국인 강제 노 동자들이 일본에서 법정 소송을 벌였지만, 그 결과는 아주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따라서 이번 미국 법정의 공방이 이 문제에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인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번 독일의 정치적 해결이 어떻게 작용 할 지 커다란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독일의 선거 제도 박 병 석, 성균관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정 범 구, 시사평론가 1998년 6월 󰠲󰠲󰠲󰠲󰠲󰠲󰠲󰠲󰠲󰠲󰠲󰠲󰠲󰠲󰠲󰠲󰠲󰠲󰠲󰠲󰠲󰠲󰠲󰠲󰠲󰠲󰠲󰠲󰠲󰠲󰠲󰠲󰠲󰠲󰠲󰠲󰠲󰠲󰠲󰠲󰠲󰠲󰠲󰠲󰠲󰠲󰠲󰠲󰠲󰠲󰠲󰠲󰠲󰠲󰠲󰠲󰠲󰠲󰠲󰠲󰠲󰠲󰠲󰠲󰠲󰠲󰠲󰠲󰠲󰠲󰠲󰠲󰠲󰠲󰠲󰠲󰠲󰠲󰠲󰠲󰠲󰠲󰠲󰠲󰠲󰠲󰠲󰠲󰠲󰠲󰠲󰠲󰠲󰠲󰠲 1. 독일의 의원내각제는 협의제 민주주의(consociational democracy)의 한 유형으로서 다수 제 민주주의(majoritarian democracy)로 분류되는 영미계통의 내각제나 대통령제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2. 협의제 민주주의는 연방과 지방에서 서로 다른 정파 간의 연정 구성을 통해 이질적 사회 집단 간 정치적 타협을 이룩하고, 궁극적으로는 고도의 국민통합을 실현한다. 3. 연방대통령, 연방정부, 연방의회, 연방상원, 연방헌법재판소 간의 적절한 역할 분담과 상호 견제를 통해 권력의 횡적, 종적 분산을 도모함과 동시에 연방주의 원칙을 준수한다. 4. 사회와 정치 영역 간의 균형적, 안정적 매개를 위해 인물과 정당을 분리·선택하는 1인 2 표의 인물본위 비례선거제와 5% 봉쇄 조항 그리고 헤어/니마이어식의 의석 산출법을 적용한 다. 5. 정당 후보자 선출은 철저한 당내 민주주의 절차에 따라 행해진다. 6. 선거 비용은 자체 조달 외에도 득표수에 비례한 국고 보조로 충당되며, 선거구는 독립된 선거구 획정위원회를 통해 신속히 조사·변경케 하며, 선거일은 선거마다 다르게 정해져 있 다. 󰠲󰠲󰠲󰠲󰠲󰠲󰠲󰠲󰠲󰠲󰠲󰠲󰠲󰠲󰠲󰠲󰠲󰠲󰠲󰠲󰠲󰠲󰠲󰠲󰠲󰠲󰠲󰠲󰠲󰠲󰠲󰠲󰠲󰠲󰠲󰠲󰠲󰠲󰠲󰠲󰠲󰠲󰠲󰠲󰠲󰠲󰠲󰠲󰠲󰠲󰠲󰠲󰠲󰠲󰠲󰠲󰠲󰠲󰠲󰠲󰠲󰠲󰠲󰠲󰠲󰠲󰠲󰠲󰠲󰠲󰠲󰠲󰠲󰠲󰠲󰠲󰠲󰠲󰠲󰠲󰠲󰠲󰠲󰠲󰠲󰠲󰠲󰠲󰠲󰠲󰠲󰠲󰠲󰠲󰠲 1. 독일의 정치 체제 FES-Information-Series 1.1. 협의제 민주주의의 구조 1) 독일의 정치 체제는 연방주의, 다당제, 인물본위 비례선거제도, 내각책임제의 제도 위에서 연립정부의 운영을 기반으로 삼고 있다. 2) 독일의 내각책임제는 협의제 민주주의의 한 유형으로 다수제 민주주의로 분류되는 영·미 계통의 정부 형태와 확연히 구분된다. ƒ 다수제 민주주의는'다수자의 지배'를 당연시하고 있는 반면, 협의제 민주주의는"다수자의 지배는 배제의 원칙이기 때문에 비민주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보고, 민주주의의 일 차적 의미를"정치적 결정의 형성에 직·간접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데서 찾는다. ƒ 이익과 가치관이 크게 이질화된 사회에서 다수자의 지배 원칙을 적용한다면, 권력에의 접근 이 계속 불가능한 소수자는 소외와 차등의 심리를 갖게 될 것이고, 그에 따라 체제에 대한 불만도 점차 커질 것이다. 이런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근소한 과반수보다 지배자 수의 최대화, 곧 협의제 민주주의다. ƒ 협의제 민주주의의 실제도 지역, 계층, 문화, 인종, 가치관 등의 다양한 갈등을 안고 있는 유럽 대륙 국가들에서 예외 없이 발견된다. 복잡한 사회 균열을 안고 있는 이들 국가는 협 의제 민주주의를 통해 높은 국민 통합력을 유지하고 있다. 3) 독일의 정치 체제에 내재된 협의제 민주주의의 요소는 다음과 같다. ƒ 연정(聯政)을 통한 행정부 권력의 분점 ƒ 정부와 의회 간 권력 관계의 공식 내지는 비공식적 분산 ƒ 양원제와 소수대표권 ƒ 다당제 ƒ 비례선거제 ƒ 연방제 1.2. 연립 정부의 운용 2 FES-Information-Series 1) 협의제 민주주의는 현실에서 대부분 연립 정부의 형태로 운용되며, 그 유형은 독일이나 이태리 등 유럽의 대다수 국가들이 수용하고 있는 대륙형 내각책임제, 프랑스의 이원 집정제 그리고 스위스의 합의제 등이 있다. 2) 독일의 연정은 경험적으로 높은 정치 안정도를 보여주고 있다. ƒ 독일의 정당체제는 다당제로서 정당체제의 스팩트럼상 동류에 속하는 정당들끼리 연립 정 부를 구성하여 통치하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다. ƒ 원내 정당은 기민련, 기사당, 자민당, 사민당, 녹색당, 민사당 등 평균 5-6개 정도이다. 기사 당은 기민련을 대신해 독일 남동부 바이에른주를 대표하는 지역 정당이며, 민사당은 동독 공산당의 후계당으로 독일 정당체제에 새로 편입된 정당이다. ƒ 지역 정당인 기사당은 기민련과의 제휴를 통해 끊임없이 중앙정부에 참여할 수 있었다 ƒ 경제 정책과 외교 정책을 주도해온 자민당은 거의 빠지지 않고 연정에 참여해 왔으며, 불과 6-11%의 지지에 기반을 둔 소 정당이지만 자신의 고유한 정당 정책을 펼칠 수 있었고, 이 를 통해 독일은 외교와 경제 분야에서 정책적 일관성을 유지해 올 수 있었다. ƒ 기민련과 사민당 혹은 사민당과 자민당의 연정은 국가 위기 시 사회적 갈등 계층 간의 협 력과 동조를 끌어낼 수 있었다. ƒ 연정의 장점은 연방 정부뿐만 아니라 지방 정부 차원에서도 나타난다. 환경과 생태계 보호 를 강조하는 녹색당은 주정부의 내각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고유한 환경 중심 정책 을 펼쳐 나갈 수 있었다. ƒ 이처럼 연립 정부는 사회적으로 분리된 이익과 가치들을 서로 결합시키거나 타협하여 균형 잡힌 정책의 실시를 가능케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정치적 결정과 재화의 분배에 있어 가능 한 한 소외 계층을 적게 만들고, 그 결과 높은 국민 통합을 이루어 왔다. 3) 연정의 정치 안정도를 높이기 위한 별도의 제도적 장치로는‘건설적 불신임 투표제'를 들 수 있다. ƒ 정부의 안정적 통치를 보장하는 장치로서 현 수상의 불신임이 바로 의회 해산으로 이어지 는 게 아니라, 다음 수상을 의회에서 먼저 선출하여 현재의 수상을 해임하고 국정의 공백을 없애는 역할을 한다. ƒ 건설적 불신임 투표가 실제 적용된 사례는 두 번 있다. 첫 번째는 1972년 당시 야당이던 기민련의 바르쩰(R. Warzel)이 연방수상이던 사민당의 브란트(W. Brandt)를 상대로 행해졌 3 FES-Information-Series 으나 의회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해 실패했고, 두 번째는 1981년 당시 야당이던 기민련의 콜(H. Kohl)이 연방 수상이었던 사민당의 슈미트(H. Schmidt)를 상대로 실시되어 콜은 의 회 다수로 후임 수상으로 선출되고 슈미트는 불신임을 당했다. 이어 1981년 말 의회가 해 산되고 1982년 초 총선을 실시하여 콜은 재선되었다. 4) 정치 안정의 유지와 관련한 이러한 특징을 제한적 의원내각제로 부르기도 한다. 이는 정 부가 의회에 대해 우월성을 지닐 뿐만 아니라, 연방수상에 대한 불신임안도 의회의 과반수 찬 성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1.3. 주요 헌법기구 * 도표 연방정부 임명 연방 장관 연방 수상 연방 대통령 선출 연방 연석 회의 제청 임명 연방수상 제청 연방 선출 헌법재판소 견제 연방 의회 재판관 선출 법률안 견제 재판관 선출 법률안 견제 연방 상원 구성 주의회 주정부 대표자 파견 선거 국 선거 민 4 FES-Information-Series 1) 연방대통령 ƒ 연방국가의 내외적 대표 ƒ 연방법률의 심의 ‧ 서명 ‧ 공표, 입법 비상사태의 선언 ƒ 연방수상의 제청 ‧ 임명 ‧ 해임, 연방장관의 임명·해임 ƒ 연방재판관 ‧ 연방 공무원 ‧ 연방 장교 및 하사관 임명 · 해임 ƒ 사면권 행사 ƒ 연방의회와 모든 주 의회 의원들이 연방 연석회의에서 대통령 후보자를 제안, 연방 연석회 의 정족수의 과반 이상의 지지표를 얻은 후보자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ƒ 대통령 선거는 5년마다 실시되며, 적어도 임기 만료 30일전까지 실시되어야 한다. 2) 연방상원(Bundesrat) ƒ 입법에 참여 ƒ 중재위원회 구성: 연방의회와의 법률안 조정 ƒ 연방 법령, 연방 행정 규정의 승인 ƒ 타 헌법기관에 대한 연방헌법재판소의 헌법 소원 ƒ 국가 비상사태 시 국방·안보의 특별 조치 시행에 참여 ƒ 연방 기구의 주요 인사 임명에 대한 승인 ƒ 주 정부 참여자(주 수상, 주 장관 등)로 구성 ƒ 각 주의 투표권은 크기에 관계없이 3표를 가지며, 인구수가 2백 만 이상은 4표, 6백 만 이 상은 5표, 7백 만 이상은 6표를 각각 가진다. ƒ 1명의 의장과 3명의 부의장을 두며, 의장은 1년 임기로 주의 인구수가 많은 순서대로 해당 주의 수상이 맡는다. ƒ 약 3주마다 한차례 개회된다. ƒ 연방의회와 마찬가지로 분야별로 상임위원회를 둔다. 3) 연방의회 ƒ 의장단, 원로 자문회의, 사무처 ƒ 상임위원회: 운영, 청원, 외무, 내무, 체육, 법무, 재무, 예산, 경제, 식량 · 농림, 노동·복 지, 국방, 가정 · 노인·여성·청소년, 보건, 교통, 환경·자연보호·방사능 안전, 체신·통 신, 조경·건설·도시 계획, 교육·과학·연구· 기술·기술 영향 평가, 경제 협력, 국외 교 5 FES-Information-Series 통·관광, 유럽연합위원회 ƒ 조사위원회: 플루토늄, 구동독 몰수 재산 조사위원회 ƒ 앙케트위원회:"인간 자연보호"."구동독 공산 통치의 유산 극복","인구 변화","대중매체의 미래","이단 종파 및 사이코 집단" ƒ 중재위원회: 연방상원과 법률안 조정 ƒ 양원 공동 위원회: 연방의회 의원 32명과 연방상원 구성원 16명으로 구성하고, 위원장은 연 방의회 의장이 맡는다. ƒ 특별위원회 ƒ 원내 교섭단체: 기민/기사당, 사민당, 동맹90/녹색당, 자민당, 민사당 등 5개 교섭단체 4) 연방정부 ƒ 연방수상:정책 방향의 설정, 연방정부 업무의 지휘, 특히 내무 ‧ 외교 정책의 전체 목표 설 정, 정부 정책의 제안 ‧ 실천, 비서실(Bundeskanzleramt)에는 1명 비서실장(장관급)과 2명의 비서(차관급)를 둔다. ƒ 연방장관: 외무, 내무, 법무, 재무, 경제, 식량, 노동 ‧ 복지, 국방, 가족·노인·여성·청소년, 보건, 교통, 환경·자연보호·방사능 안전, 조경 · 건설·도시 계획, 교육 · 과학 · 연구 · 기술, 경제 협력 및 개발 등의 부서가 있다. 각 장관은 연방수상의 정책 노선 내에서 자신의 책임 아래 고유 업무를 수행 5) 연방헌법재판소 ƒ 연방 정부와 주 정부, 연방 기관과 주 기관, 연방 법률과 주 법률, 연방 정당과 주 정당 간 의 충돌 등 연방국가 보호에 위배된 사안이 발생할 경우, 이에 대한 사법적 판결을 내린다. ƒ 연방 헌법기구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이의 발생 시 헌법에 기초하여 유권 해석을 내린다. 2. 독일의 선거제도 * 도표 6 기초 단체 (Stadt, Kreis, Gemeinde) 기초 의회 (Stadtrat, Kreistag, Gemeinderat) 연방 정부 (Bundesregierung) 연방 의회 (Bundestag) FES-Information-Series 주 정부 (Landesregierung) 주 의회 (Landtag) 기 기 자 사 녹 민 기 민 사 민 민 색 사 타 련 연 당 당 당 당 Reps. CDU CSU FDP SPD Grüne PDS DVU 인물본위 비례선거제 혹은 단순 비례선거제 인물본위 비례선거제 인물본위 비례선거제 혹은 단순 비례선거제 2.1. 연방의회의 선거 * 도표 국 시민 민 사회 1인 2표 인물 선거(선거구 선거) 비례 선거(명부 선거) 선거구 의원 주명부 의원 직선 의석: 328개 선거구에서. 328명의 의원을 상대 다수선거제를 통해 선출 정당별 배당 의석 산정: 총의석수 656석으로부터 선거구 의석수를 뺀 나머지 수만큼 주 명부 후보 자에게 의석을 배분(약 328석 ) 연방의회 656석 7 FES-Information-Series 1) 인물 본위 비례 선거제 ƒ 독일의 연방의회는 656명의 의원들로 구성되며, 의원은 후보자 개인에 대한 인물 선거와 정당에 대한 비례 선거가 결합된 방식으로 유권자의 보통 선거에 의해 선출된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인물 본위 비례 선거제라고 부른다. ƒ 따라서 유권자는 2개의 투표권을 가진다. 제1표는 선거구 의원의 선출을 위하여, 제2표는 주명부의 선출을 위하여 행사된다. ƒ 의석의 정당별 분할은 제2투표에 의해 결정되며, 의원 개개인의 선출은 선거구 후보자 추천 명부와 주후보자 추천 명부(주명부)로부터 각각 절반씩 이루어진다. ƒ 선거구 선거에서는 각 선거구 별로 1인의 의원이 선출되며, 최다 득표를 한 후보자가 당선 된다. 동수의 최다 득표자가 발생할 경우, 선거구 선거 위원장이 추첨을 통하여 결정한다. ƒ 선거구에서 직접 선출된 후보자는 주명부에서 고려되지 않지만, 선거구에서 낙선한 후보자 는 그가 주명부에 기재된 경우, 주명부에서 고려된다. 2) 후보자 선정 ƒ 후보자 선정에서도 제1표 후보자(선거구 후보자)와 제2표 후보자(주 명부 후보자)에 따라 상이한 조건이 붙는다. 이들 후보자 추천서는 공히 선거일전 34일 18시까지 제출되어야 하 지만, 선거구 후보자 추천서는 선거구 선거 위원장에게 그리고 주 후보자 추천 명부는 주 선거위원장에게 각각 제출된다. ƒ 선거구 후보자 추천 - 이는 주당 대표자의 서명으로 이뤄지며, 만약 정당이 연방의회나 주 의회에 5개 이상의 의석 을 보유하고 있지 못한 때에는 해당 선거구내 유권자 200명 이상의 서명을 필요로 한다. - 정당의 선거구 후보자는 당원 총회나 전체 대의원회의에서 비밀 투표로 선출된 자만이 지명 될 수 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선거구 후보자 추천서 제출시 장소, 시간, 소집 형식, 참석 당원 수 등을 포함한 회의 과정과 투표 결과 등이 기록된 의사록 사본을 함께 제출해야 한 다. 아울러 회의의장과 회의에서 선정한 2인의 참여자가 후보자 선출이 비밀 투표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선거구 선거위원장에게 선서로써 보증해야 한다. - 이렇게 제출된 선거구 후보자 추천서에 대해서는 선거구 선거위원회가 선거일 전 30일까지 승인 여부를 결정, 통보하고, 이를 선거일 전 20일까지 공고한다. ƒ 주명부 후보자 추천 - 이는 정당만이 제출할 수 있는 것으로 반드시 주당 대표자의 서명이 있어야 한다. 만약 정당 이 연방의회나 주의회에 5개 이상의 의석을 보유하고 있지 못한 경우에는 해당 주 내 유권 자 총수의 1/1,000 이상의 서명이 있어야 하며, 그 상한선은 2,000명 이하이다. - 주명부 후보자의 성명은 순위대로 기재되어야 하며, 후보자는 1개 주에 한하여, 1부의 주명 8 FES-Information-Series 부 추천서에만 추천될 수 있다. - 주명부 후보자도 선거구 후보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당원 총회나 전체 대의원 회의에서 비 밀 투표로 선출 된 자만이 지명될 수 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주명부 후보자 추천서의 제출 시 장소, 시간, 소집 형식, 참석 당원 수 등을 포함한 회의 과정과 투표 결과 등이 기 록된 의사록 사본을 함께 제출해야 한다. 아울러 회의 의장과 회의에서 선정한 2인의 참여 자가 후보자 선출이 비밀 투표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선거구 선거위원장에게 선서로써 보증해야 한다. - 이렇게 제출된 주명부 후보자 추천서에 대해서는 선거구 선거위원회가 선거일 전 30일까지 승인 여부를 결정·통보하고, 이를 선거일 전 20일까지 공고한다. 3) 의석 산출 ƒ 정당별 및 주별 배분 의석수는 제2표(주명부 선거)의 득표율에 따라 결정된다. 여기에는 헤 어/니마이어식(Hare/Niemeyer)의 의석 산정 방식이 적용된다. ƒ 실제 산정 과정을 1987년 연방의회 선거의 결과로써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당시 베를린의 특별 의석 22명을 제외하면 총 의석은 496석, 통일 후 현재의 총 의석은 656석). - 제1단계: 헤어/니마이어식에 따라 각 정당에 배분될 의석수를 결정한다. - 제2단계: 다시 헤어/니마이어식에 따라 각 정당의 주별 배정(선거구 의석과 주명부 의석을 모두 포함한) 의석수가 정해진다. - 제3단계: 각 주의 선거구들에서 획득한 선거구(직선) 의석수를 정 당별로 합산한 다음, 이를 위에서 정해진 정당별 총 배분 의석수로부터 감산한다. <제 1단계 도표> 정당 사민당 기민련 기사당 자민당 녹색당 합 총의석 496 x 계 정당별 제2 득표수 14,025,763 13,045,745 3,715,827 3,440,911 3,216,256 37,354,502 제2 득표수 합계 # 기본 의석수 186.236 173.223 x 1/37,354,502= 49.339 45.689 41.511 494 최다과잉 투표수법 ## +1 +1 +2 배분 의석 186 173 49 46 42 496 # 이 수치는 5%이상의 득표율이나 3개 이상의 선거구 직선 의석을 획득한 정당들의 제2표 득표수를 합한 것이다. ## 소수점 이하의 크기에 따라 모자라는 의석수 만큼 의석을 배정해서 얻어지는 의석을 균형 의석이라고 한다. 9 FES-Information-Series <제2단계 도표> 주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함부르크 니더작센 브레멘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186 X 헤센 라인라드 팔쯔 바덴뷔템베르크 바이에른 자알란트 합 계 정당별 제2 득표수 679,229 427,872 1,967,443 198,920 3,216,256 1,370,454 912,175 1,643,202 1,816,885 316,502 14,025,763 제2 득표수 합 계 x 1/14,025,763 = 기본 의석 수 9.007 5.674 26.090 2.637 62.236 18.174 12.096 21.791 24.094 4.197 183 최다과잉 투표수법 +1 +1 +1 +3 배분 의 석 9 6 26 3 62 18 12 22 24 4 186 - 제4단계: 감산되고 남은 수치만큼 주명부에 기재된 후보 순서대로 주명부 의원들이 정해진 다. ƒ 만약 제4단계에서 감산된 수치가 마이너스일 경우, 즉 선거구의 직선 의석수가 제2표에 의 해 배정받은 의석수보다 더 많을 경우, 이를 초과 의석( Ü berhangmandate)이라고 부르며, 아울러 일반 의석과 동일하게 인정한다. ƒ 의석 결정에 적용되는 또 다른 조항은 정당의 집중 효과가 있기 위한 봉쇄 조항이다. 이는 의회 체제의 기능을 제고시키고 정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그 내용은 정당이 전체적으로 최소한 5%의 득표를 차지했을 때 혹은 최소 3개의 직선 의석을 획득했을 때에 만 의석이 배분되도록 규정하고 있다. 4) 선거일 ƒ 연방의회 선거일은 연방대통령이 정하며, 반드시 일요일이나 법정 공휴일을 택한다. ƒ 독일의 선거일은 연방의회 선거, 주의회 선거, 기초단체 선거, 유럽의회 선거마다 서로 다 를 뿐만 아니라, 주의회와 기초단체 선거의 경우는 지역마다 선거 시기가 또 다르다. ƒ 물론, 이들 선거가 시기상 중첩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결코 의도적인 것이 아니다. ƒ 예로서, 1998년에는 4월 26일에 작센-안할트 주의회 선거, 9월 13일에 바이에른주의 주의회 선거, 9월 27일에 연방의회 선거가 있고, 가을에는 멕크렌부르크-포오포먼 주의회 선거와 브란덴부르크주의 기초단체 선거가 있다. 5) 선거구 획정 ƒ 선거구 획정은 선거구 획정위원회에 의해 이루어지며, 이 위원회는 상설 기구로서 연방 통 계청장, 연방행정재판소 판사 1명과 5명의 위원 등 7명으로 구성된다. 10 FES-Information-Series ƒ 이 위원회는 각 선거구의 인구 변동을 주시하여 필요할 경우, 선거구를 변경할 수 있다. 선 거구 변경 시에는 다음 사항을 준수해야 한다. ‑ 각 주의 경계선은 지켜야 하며, 가능한 한 지방 행정 구역을 지켜야 한다. ‑ 선거구 확정 시, 한 선거구의 인구수가 모든 선거구의 평균 인구수와 25% 이상의 차이가 나 지 않도록 해야 하며, 인구수가 33.3% 이상 차이가 나면 선거구가 새로 획정되어야 한다. ‑ 각 주의 선거구 수는 가능한 한 인구 비례에 따라 할당되는 수와 부합되어야 한다. 인구수 의 산정 시 외국인의 수는 제외된다. ‑ 선거구는 서로 연관된 지역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 시, 읍, 면(Gemeinde), 군(Kreis), 소도시(Kreisfreie Stadte)의 경계도 가능한 한 유지되어야 한다. ‑ 선거구 획정위원회의‘현 선거구의 문제점과 변경 필요성 등에 관한 보고서’는 연방의회 의 새로운 임기 개시 후 15개월 이내에 연방내무부 장관에게 제출해야 하며, 연방내무부 장 관은 이를 즉시 연방의회에 제출하고 연방 공보에 공표해야 한다. 6) 선거 비용 ƒ 연방의회 선거나 유럽의회 선거에서 0.5% 혹은 주의회 선거에서 1% 이상의 득표를 기록한 정당은 선거 비용을 국고에서 보상 받는다. ƒ 득표수의 처음 500만 표까지는 1표당 1마르크 30페니히를, 그 이상의 득표부터는 1표당 1 마르크를 보상해 준다. ƒ 주명부가 없이 직선 선거구에만 후보자를 낸 군소 정치 집단들은 해당 선거구에서 최소한 10%의 득표를 해야 위와 같은 보상을 받는다. ƒ 기초단체 선거에서는 지금까지 국고로부터의 선거비 보상이 없었다. ƒ 선거와 관계없이 국고로부터 정당에 지급되는 것으로는 각 정당이 연차 회계 보고를 통해 공개하는 당비 및 기부금의 1마르크마다 0.5마르크(50페니히)씩 붙여지는 보조금이 있다. ƒ 그러나 선거비 보상과 정당에 대한 국고보조의 총액은 정당의 자체수입 총액을 넘어서도, 연방헌법재판소가 판시한 상한액 2억3천만 마르크를 넘어서도 안 된다. 2.2. 주의회 선거제도 11 도표 1 1인 1표 비례 선거 (명부 선거) 주명부 의원 정당별 배당 의석 산정 주의회 51석 (자알란트주의 경우) FES-Information-Series 도표 2 2표 인물 선거 (선거구 선거) 비례 선거 (명부 선거) 선거구 의원 주명부 의원 직선 의석 (51석) 명부 의석 (50석) 주의회 101석 (라인란드-팔쯔주의 경우) 12 FES-Information-Series 1) 독일의 주의회 선거 제도는 각 주에 따라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지지만, 대부분의 주에서는 연방의회 선거 제도와 마찬가지의 방식을 따른다. 2) 인물 본위 비례 선거제 ƒ 구속 명부식: 연방의회 선거와 마찬가지로 의원은 후보자 개인에 대한 인물 선거(선거구 선 거)와 정당에 대한 비례 선거(주명부 혹은 소구역명부)가 결합된 방식으로 유권자의 보통 선거에 의해 선출된다. 13개 주(바덴-뷔텐베르크, 바이에른,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헤쎈, 멕 클렌브르크-포폼머른, 니더작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라인란드-팔쯔, 작센, 작센-안할트,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튀링엔)에서 적용하고 있다. ƒ 자유 명부식: 바이에른주에서는 구속 명부식 대신, 투표자가 명부 순위를 바꿀 수 있는 자 유 명부식을 택하고 있다. 3) 단순 비례 선거제 ƒ 구속 명부식: 주의회 의원을 모두 명부를 통해서만 선출하며, 위의 13개 주를 제외한 나머 지 3개 주(브레멘, 함부르크, 자알란트) 주의회 선거에 사용하고 있다. 2.3. 기초단체 선거제도 도표 1 2표 인물 선거 선거구 의원 직선 의석 명부 선거 명부 의원 정당별 배당의석 산정 기초의회 13 도표 2 1표 혹은 다수의 표 FES-Information-Series 비례 선거 (명부 선거) 명부 의원 정당별 배당의석 산정 기초의회 1) 기초단체 선거 제도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눠지지만, 세분하면 다시 네 가지 유형으 로 나눠진다. 2) 인물 본위 비례 선거제 ƒ 구속 명부식: 연방의회 선거와 같은 방식으로 투표자는 선거구 선거와 명부 선거를 위해 2 개의 투표권을 행사하며,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서 사용하고 있 다. 3) 단순 비례 선거제 ƒ 구속 명부식: 투표자는 명부에 1개의 투표권만 행사하며, 헤쎈과 자아란트주의 기초단체 선 거에서 사용하고 있다. ƒ 이완 명부식: 기초의회 의원의 정수만큼의 투표권을 가지고 명부상의 후보자에게 중복 투표 를 할 수 있으며(집적 투표제: Kumulieren), 또한 후보자 순위를 원하는 대로 조합할 수 있 다.(배합 투표제: Panaschieren). 이러한 투표법은 바덴-뷔텐베르크, 바이에른, 라인란트-팔쯔 주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브란덴부르크주를 비롯한 구동독에서는 투표자에게 3개의 투표권 이 부여된다. 4) 5%(혹은 3석) 봉쇄 조항은 대부분의 기초단체 선거에서 적용되고 있지만, 니더작센주와 구동독 주에서는 적용하지 않고 있다. 14 독일의 환경 교육 이 무 춘, 연세대학교 환경공학부 교수 2005년 8월 󰠲󰠲󰠲󰠲󰠲󰠲󰠲󰠲󰠲󰠲󰠲󰠲󰠲󰠲󰠲󰠲󰠲󰠲󰠲󰠲󰠲󰠲󰠲󰠲󰠲󰠲󰠲󰠲󰠲󰠲󰠲󰠲󰠲󰠲󰠲󰠲󰠲󰠲󰠲󰠲󰠲󰠲󰠲󰠲󰠲󰠲󰠲󰠲󰠲󰠲󰠲󰠲󰠲󰠲󰠲󰠲󰠲󰠲󰠲󰠲󰠲󰠲󰠲󰠲󰠲󰠲󰠲󰠲󰠲󰠲󰠲󰠲󰠲󰠲󰠲󰠲󰠲󰠲󰠲 독일 환경 교육은 산업화와 관련이 있으며 특히 현대 사회에서의 환경 교육은 광범위하고 체계적으로 실시되고 있다. 1970년대 새롭게 추진된 환경 정책은 환경 교육 발전의 토대가 되 었다. 초기 환경 교육이 자연보호 분야에 중점을 두었다면 70년부터는 환경오염 문제를 중심 으로 전환되었다. 1990년대부터는 환경 교육의 범위가 자연 및 환경 보전 분야에서 지속가능 한 발전 모델을 위한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연방과 주 정부는 지속성 환경 교육을 위해 재정 을 지원하고 각 부처가 협력하여 계획적이며 체계적으로 일을 추진하고 있다. 독일 환경 교육 의 특징은 정규 교육 과정 외에 환경단체를 중심으로 사회 환경 교육의 활동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 1. 서론 FES-Information-Series 현대 사회의 대표적 과제인 환경 문제의 해결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자발적인 협조와 실천이 우선적으로 요구되고, 환경에 대한 의식과 태도 변화에 크게 영향을 주는 환경 교육 의 비중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어느 나라보다도 이 부분에서 앞장서 가는 나라가 독일이다. 독일에서 환경 교육은 독일의 산업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산업화 과정에서 자연을 파헤치는 일 이 광범위하게 발생하자 자연보호를 위한 시민 운동이 시작되었고 이와 함께 환경 교육도 실시되 었다. 우선 환경 교육의 개념 변화, 환경 교육 정책 및 관련 기관을 살펴보고, 다음으로 환경 교육의 발전 단계와 사회 환경 교육을 포함한 독일의 환경 교육 실태를 다룬다. 2. 환경 교육의 개념 UNESCO 보고서에 의하면, 환경 교육은 인류로 하여금 생물적, 지리적, 사회적, 경제적 및 문화 적 제 요소들 간의 복잡한 상호 관련성을 이해하게 하고, 동시에 환경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며 환경의 질을 관리할 수 있는 지식, 가치관, 태도 및 기능을 습득하게 하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독일 환경 교육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환경 교육에는 독일어로 Umweltbildung과 Umwelterziehung이란 용어가 있는데 이들을 환경 교육 으로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환 경 교육의 방향과 관련이 있어 내용적으로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고 서로 구분할 필요가 있겠 다. 인간의 이기적인 사고와 행동이 환경 파괴로 이어지고 이는 생태적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그러 므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교육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방식으로 교육을 실시하여야 하는지 1970년대에 많은 논의가 있었다. 환경 교육의 방향은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무분별한 인간의 활동에 민감한 자연을 이해하고 인간과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생태 적 학습, FES-Information-Series 둘째, 자연 환경을 지나치게 이용하고 훼손하는 경제적 발전과 기술 개발을 환경 파괴의 근본 적인 원인으로 간주하여 이의 계몽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 셋째, 환경 문제는 발전된 과학과 기술을 통해 해결 가능하다고 보고 이에 대한 전문지식과 복 잡한 생태 시스템 관계를 수업을 통해 전달하는 교육(Umwelterziehung). 이러한 세 가지 형태의 환경 교육 방법들은 이론적이어서 실제로 서로 명확한 구분이 어렵고 환경 교육 현장에서도 별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독일에서는 세 가지 용어를 통합한 Umweltbildung(환경 교육)이라는 용어를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최근 독일에서는 환경 교육 외에 지속성 교육 이라는 용어도 사용하고 있다. 이는 1992년 리우 환경 정상회의에서 논의된 Agenda 21의 취지에 걸맞은 새로운 방향의 교육철학으로서 선진국과 후진국의 평등 문제와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경제적, 사회적 요인을 고려하여 교육을 실시하여야 환경 교육 전통적으로 녹색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 ․ 자연환경 ․ 유기농법 ․ 자원 낭비의 감소(에너지, 폐기물, 물) 해결방안 ․ 민감성을 키워준다. ․ 자연을 보호, 보전, 관리한다. ․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한다. ․ 반대 의사를 표명한다. 체계적 접근성이 미약하고 단편적이다. 지속성 교육 새로운 문화적 관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 ․ 세계적 평등 ․ 경제적 효율성과 견고성 위주의 경제활동 추구 ․ 환경 친화적 생활양식 구조적 능력 배양 ․ 예견할 수 있는 능력 ․ 지속성 전략 ․ 참여와 연대 실증적, 복합적 통찰 하에 과제를 도출하고 대안 을 제시한다. FES-Information-Series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방향 전환은 자연 또는 환경 분야 외에 사회적, 경제적 구조 요 인과 국내외적 관점이 함께 고려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3. 환경 교육 정책 및 교육 기관 1953년 자연 및 경관 보호 교육은 생물과 지리 교육 분야에서 학교 교과 과정의 일부로 실시하 였다. 1971년에 독일 정부는 연방 환경 프로그램 이란 명칭 아래 환경 정책 기본 원칙을 채택하였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지속성 교육은 환경 교육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 환경오염의 예방 원칙 ▶ 오염 원인자 부담의 원칙 ▶ 공동 책무와 협력의 원칙 ▶ 국제 협력의 원칙 이 원칙은 독일 환경 정책의 출발점이 되었고, 지금도 적용하고 있다. 이 원칙으로 환경 정책 및 환경 교육 분야에 중요한 변화가 생겼으며, 학교 교과 과정에 환경 교육을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교사들이 환경 교육을 받지 않아 환경 교육을 실시하는 데 어려움이 있 었다. 1974년에 설립된 연방환경청(Umweltbundesamt)은 부분적으로 독일 유네스코 사무소와 공동으 로 환경 교육에 관한 논문, 연구 보고서 등을 발간하는 환경 교육 관련 기관이라 할 수 있으나 그 역할은 그리 크지 않다. 1978년에는 독일 뮌헨에서 유네스코 환경 교육 심포지엄이 개최되었고 여기서 티빌리시(Tibilisi) 의 환경 교육 헌장을 채택하였다. 그 이후 주 정부의 환경 및 교육부장관들이 환경 ‧ 교육위원회를 설립하여 1980년에 교육부장관 회의(KMK)에서 환경과 학교 에 관한 결의 사항을 발표하였다. 그리 고 1987년에 연방 교육과학부 장관은 환경 교육 백서를 발간하였다. FES-Information-Series 1987년에 교육 계획 및 연구 촉진 연방과 주정부 위원회는 환경 문제와 교육 체계의 연계 기 준 에 관한 목록을 작성하였다. 그 이후 연방 교육부와 연방 과학부 장관은 유치원, 학교, 직업 훈 련소, 고등 교육 기관 등에서 115개에 달하는 시범 프로그램을 실시할 수 있도록 재정 지원을 하였 다. 이와 더불어 연방 교육부 및 과학부 장관은 독일의 환경 교육의 실태를 평가하기 위해 약 5천 만 마르크에 달하는 연구 과제를 지원하였다. 그 외에 1990년에 설립된‘독일연방환경재단’은 환경 교육과 관련된 연구 과제를 재정 지원하 고 있다. 환경 교육 관련 기관으로는 정부 기관, 대학교와 NGO 등이 있으며 이들은 서로 협력 체계를 이루 어 환경 교육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환경 교육 관련 정부 기관은 연방 교육부와 환경부, 연방 환경청(http://Umweltbundesamt.de)이 있다. 대학교에서 환경 교육을 주로 연구하는 기관은 킬대 학교의 자연과학 라이프니쯔연구소(IPN, http://www.ipn.uni-kiel.de/)와 에센대학교의 환경교육 센터(ZUE, http://www.uni-essen.de/zue/sitemap.htm), 베를린 자유대학교의 교육학적 미래 연구소(http://www. institutfutur.de)가 있다. 킬대학교의 자연과학 라이프니쯔연구소(IPN)는 환경 교육 분야에서 선도적 연구를 수행하고 있 다. IPN은 1977년에 개최된 티빌리시의 환경 교육 회의에 서독 파견단의 일원으로 참여하였고 그 후속 회의를 개최하고 독일연방정부에 환경 교육 정책을 건의하는 주요한 연구 기관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에센대학교의 환경교육센터(ZUE)는 1977년 유네스코 환경 교육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설립되 었고, 독일 대학에서는 최초로 환경 교육 분야만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기관이며, 베를린 자유대학 교의 교육학 미래연구소는 구환경교육연구소로서 최근의 동향, 즉 환경 교육을 지속적 발전과 연 계해서 보는 환경 교육 패러다임을 연구하는 기관이다. 1996년 환경교육연합회에 따르면, 독일 전국에 약 570개 환경 교육 관련 단체가 활동하는 것 으로 나타났다(http://www.umweltbildung.de/nachhaltigkeit/pdf/anu.pdf). 이들은 회비, 자체 사 업 또는 정부 기관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다. 이들 중 전국을 대상으로 활동하는 주요 단체 몇 개를 소개하면 우선 독일환경교육연맹(DGU, http://lbs. hh.schule.de/umwelterz/DGU)이 있 다. 이 단체는 1986년 학교에 종사하는 교육자들이 설립하였다. 독일 주요 도시에 지부를 설립하 여 활발하게 환경 교육 관련 행사를 진행하는 중요한 단체 중 하나이다. FES-Information-Series 그 외에 자연교육 및 환경교육연합회(ANU, http://www.umweltbildung.de/)는 사회 교육을 대상으로 1988년 설립되어 1990년부터 14개 연방주에 지부를 운영하여 환경 교육 관련 기관과 네 트워크를 구축하여 지원하고 있다. 오랜 역사를 가진 독일자연보호연합회(DNR, http://www.dnr.de/)는 1950년에 15개의 자연 및 환경보호 단체의 연합회로 출발한 단체로서 현재 94개 단체가 소속되어 있다. 환경 교육은 이 단 체 활동 중 하나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1975년에 설립된 분트(BUND, http://www.bund.net)는 365,000명의 회원을 거느린 독일 최대의 환경 NGO이다. 분트는 독일 환경자연보전연맹(Bund f ü r Umwelt- und Naturschutz)의 약자 로서 16개 연방주에 지부와 지방자치 단체별로 총 2,200개의 하위 조직을 갖춘 방대한 환경 NGO 이다. 또한 분트는 청소년과 국제 분트로 구분되어 활동하고 있다. 4. 환경 교육의 발전 단계 독일의 환경 교육은 크게 3개의 발전 단계로 구분된다. 1970년대를 기준으로 이전의 자연보호 및 향토 문화 보호에 대한 환경 교육을 주로 실시하던 1단계와 근대 환경 교육을 실시하는 2단계 와, 1990년대부터의 3단계로 또 다른 형태의 환경 교육이 논의되는 데, 바로 지속가능한 교육의 개 념이다. 1단계 환경 교육 1단계의 환경 교육은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것으로, 산업화로 인한 반대급부, 인구 증가, 도시 팽창 등으로 자연 환경 훼손과 향토 문화 손실이 심각하게 나타나자, 자연보호의 필요성이 사회적 요구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미 200년 전부터 자연보호 활동이 시작되었고 100년 전에 자연보호단 체가 설립되어 오늘날 100만 명 정도의 국민이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다. 당시에는 생산 과정에서 배출되는 오염물로 인한 환경오염보다는 자연 및 향토 사랑으로, 자연보호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 고 있었다. 독일 최초의 자연보호법은 1935년에 제정되었다. 자연보호 정책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분단 독 일에도 이어졌다. 당시 동독은 1954년에, 서독에서는 1976년에 새 자연보전법이 제정되었다. 1960년대 이후 국가 환경 교육 전략은 연방 및 주 정부의 각 부서 간에, 그리고 사범 대학과 자 FES-Information-Series 연 및 환경보호 관련, 연구 기관 비정부 기구 등에서 다소 독립적으로 진행되면서도 연방과 주정부 의 각 부서와 협력 하에 상호 영향을 미치는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2단계 환경 교육 독일 정부의 현대적 환경 정책은 1972년 환경 프로그램에 의해 천명되었고 이를 기점으로 2단 계의 환경 교육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환경 프로그램은 국가와 사회의 안녕을 위한 과 제인 환경 교육이 모든 교육 과정에서 실시되어야 한다고 설정하고 있다. 생활 기반인 자연환경 을 보전하기 위해 기존의 반자연적 사고를 바꾸는 환경 교육이 필요하다는 기본 방침에 따라 모 든 학교에서 환경 교육을 시작했다. 독일 환경 교육의 목적, 주제와 내용 등은 스톡홀름 및 베오그라드 헌장과 티빌리시 선언 등을 근거로 하고 있다. 1977년 티빌리시에서 열린 환경 교육 세계 회의에 즈음해서 독일에서는 현재의 환경 교육 상황 보고서 가 작성되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환경 교육이란, 수업 대상으로서의 환 경보호라는 차원을 넘어 광범위하고 복합적인 주제와 그 상호 관계를 다루는 것 으로 규정하고 있 다. 1978년 뮌헨에서 열린 유네스코 환경교육 회의에서는 구소련 티빌리시에서 채택한 환경 교육에 관한 권장 사항을 환경 정책에 반영하기 위한 건의 사항으로 채택하였다. 1980년대부터는 연방이나 주 차원에서 환경 교육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고 법적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다. 바이에른 주는 주 헌법 131조에 따라 자연과 환경을 보호하는 책임 의식을 심어주는 데 주 안점을 두고 학교 환경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1990년에 바이에른 주 학교 환경 교육 지침 을 마련하여 학교 환경 교육을 효율적으로 하고 있다. 표 1. 독일 사회 환경 교육 기관의 유형 및 구성 비율 기관 구성 비율(%) 기관 환경단체/NGO 20.9 관청 환경/자연보호센터 13.6 기업 일반 사회단체 10.6 연구 기관 시민 대학 10.5 박물관 출처: Giesel, de Haan and Rode(2000) 구성 비율(%) 8.8 6.3 4.0 4.0 FES-Information-Series 라인란드-팔쯔 주는 헌법 33조에 자연과 환경보호 의식을 명문화하였고, 1995년에 학교환경 교육 의 주 정책 방향 과 초등학교 환경 교육 지침 을 마련하였다. 3단계 환경 교육 3단계의 특징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를 통해 학생과 시민들이 주체가 되어 사회 운동이 사회 환경 교육으로 발전하고 있고, 학교 환경 교육은 지속성에 입각하여 실시되고 있다는 데 있 다. 독일 사회 환경 교육 기관에 대한 평가 라는 연구보고서(2000)에 따르면, 독일에는 4,600개 이 상의 사회 환경 교육 기관이 있다. 사회 환경 교육의 주체기관은 환경단체, 자연보호/환경센터, 시민 대학, 유치원, 기업, 박물관, 동물원, 정당, 교회, 관청, 환경부 등이다. 표 1에서 보면, 환경 단체의 수가 사회 환경 교육 기관의 20%로 독일 사회 환경 교육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회 환경 교육 기관에서는 총 80,000명이 종사하고 있는데, 그 중 약 10,000-12,000명이 환경 교 육을 주 업무로 하고 있다. 환경 교육 담당자의 약 90%가 대학을 졸업하였고, 그 중 10%가 박사 학 위 소지자이다. 교육 담당자의 3/4은 다른 업무를 처리하면서 환경 교육을 부분적으로 담당하고 있 었다. 사회 환경 교육 기관의 교육 활동은 환경 현황에 대한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시작되었다. 사회 환경 교육 기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자연을 배우고 총체적인 자연 경험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다. 독일 사회 환경 교육 기관의 70% 이상이 자연보호, 농업, 임업 등 자연과 관련된 녹색 주제를 교육 내용으로 선택하고 있다. 3단계 환경 교육의 또 다른 특징은 환경 교육을 지속가능한 발전과 연계해 보려는 정책적 변화라 할 수 있겠다. 1992년 브라질 리오의 환경 정상회의에서 채택된 지속가능한 발전의 개념을 환경 교육과 접목하여 새로운 개념으로 환경 교육을 인식하게 되었다. 새로운 개념의 환경 교육은 전통 적인 자연보호 및 환경 교육에서 탈피하여 Agenda 21에 따라 지속적 발전이 가능한 사회를 구축 하는 교육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독일 정부는 아래와 같이 여러 과정을 거쳐 1998년에 지속적 발 전을 위한 교육 정책의 기본 골격 을 결의하였다. 이를 토대로 연방과 주정부 위원회(BLK)는 연방 과 주정부 위원회 프로그램 21 을 수립하였고, Agenda 21의 토대 위에 지속적 발전을 위한 교육 을 위한 목적으로 새로운 교육 정책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FES-Information-Series 예를 들어, 지속적 교육을 실현하기 위해 지속가능한 회계 감사, 지속가능한 학교 회사 운영과 생태 감사 제도(Eco-Audit) 등 세 가지 방법을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5. 연방과 주 정부 위원회 프로그램 21 연방과 주정부의 긴밀한 협조 하에 수립된 연방과 주정부 위원회 프로그램 21 은 기본적으로 ① 간학문적인 지식, ② 참여 학습, ③ 혁신 구조 등 세 가지 주요 교수법과 조직적 원칙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 핵심은 지속적 발전을 위한 지원 체계를 구축하는 데 있다. 연방과 주정부 위원회 프로그램 21 에 16개주 총 200개 학교가 참가하였고 27개 네트워크를 구 축해서 협력하였다. 여기에 참가한 학생 수는 65,000명이 넘는다. 학교를 개방하고 교내외적 활동 을 통해 지방자치단체와 기타 시민단체 및 국립 또는 민간연구소와의 협력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연방과 주정부 위원회 프로그램 21 을 통해 56가지의 지속성 교육 자료가 개발되었다. 그 외 학 교의 지속가능한 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관련 단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들을 마련하였으며 교사 교육프로그램 및 지속적 발전을 위한 교육 지침 도 개발하였다. 이러한 방대한 교육 자료를 학교와 관련 단체에 적용, 확산하기 위한 과제는 Transfer 21 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추진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교육을 확산하여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을 위해 연방 ․ 주정부 교육 계획 및 연구 지원 위원회(KMK)는 1000만 유로를 지원하 고 있다. ▪ 연방과 주정부 위원회 프로그램 21 에서 개발한 연구 결과가 연방주 전체 학교의 10%에 해당 하는 4,500개의 학교에서 정규 교과 과정에 반영되도록 한다. 이 목표의 달성은 개발된 자료 를 광범위하게 확산시키고, 인터넷과 이미 참여한 핵심 학교를 이용하거나, 캠페인(환경 학교, 아젠다 학교, GLOBE 등)을 통해 가능하도록 한다. ▪ 환경 전문가 또는 지속성 전문가를 체계적으로 육성하여 지속성 교육에 관한 상담과 지원을 받도록 한다. ▪ 고도의 전문성을 가진 전문가를 육성하여 신개념의 지속적 발전을 위한 교육 정책을 배가시 킨다. 배가자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기관은 연구 기관, 환경 교육 센터, 지역 아젠다 단체 등이 될 수 있다. FES-Information-Series ▪ 1999년부터 시작하여 2004년까지 실시된 시범 단계서는 중학교가 대상이었으나 이제는 초등 학교까지 확대 적용한다. ▪ 대학교 및 교육 기관 등을 Transfer 21과 연계시켜 교사 양성을 지원한다. 6. 종합 독일의 환경 교육은 이미 200년 전에 시작된 자연보호 역사를 통해 발전해왔으며, 특히 1970년 대 이후의 현대적 환경 정책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학교 환경 교육의 개념은 과학과 생물 분야 중심에서 환경적, 사회적, 경제적 요인을 고려한 지속성의 관점으로 확대되고 교육의 대상인 학생 과 함께 진행하는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 또한 학교 환경 교육 외에 사회 환경 교육이 환경 교육의 중요한 축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독일의 재생 가능 에너지 이 필 렬, 에너지대안센터 대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 2003년 2월 󰠲󰠲󰠲󰠲󰠲󰠲󰠲󰠲󰠲󰠲󰠲󰠲󰠲󰠲󰠲󰠲󰠲󰠲󰠲󰠲󰠲󰠲󰠲󰠲󰠲󰠲󰠲󰠲󰠲󰠲󰠲󰠲󰠲󰠲󰠲󰠲󰠲󰠲󰠲󰠲󰠲󰠲󰠲󰠲󰠲󰠲󰠲󰠲󰠲󰠲󰠲󰠲󰠲󰠲󰠲󰠲󰠲󰠲󰠲󰠲󰠲󰠲󰠲󰠲󰠲󰠲󰠲󰠲󰠲󰠲󰠲󰠲󰠲󰠲󰠲󰠲󰠲󰠲󰠲󰠲󰠲󰠲󰠲󰠲󰠲󰠲 재생 가능 에너지의 이용은 독일에서 해마다 크게 늘어나고 있다. 이는 독일 국민, 정부와 기업이 긴밀히 협력한 결과 이다. 정부에서는 재생 가능 에너지의 확산을 북돋울 수 있는 전력매입법, 10만 태양지붕 계획, 재생가능에너지법 등의 정책을 수립하여 시행했거나 시행하고 있다. 이는 많은 시민들이 호응하여 태양에너지, 풍력 등의 이용 시설을 건 설하는 데 적극 참여하고 있으며, 기업체들은 연구와 개발에 주력하여 뛰어난 제품들을 내놓음으로써 재생 가능 에너지 확산을 위한 기술적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이용 가능한 재생 가능 에너지의 양은 전기의 경우 수 력 30TWh(테라와트시), 풍력 320TWh, 태양광 발전 166TWh, 바이오매스 46TWh, 열에너지의 경우 태양열 593TWh, 바 이오매스 121TWh, 지열 350TWh로 추정된다. 전기는 연간 526TWh, 열은 1003TWh를 생산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양은 1997년 독일의 전력 및 열에너지 수요와 비교할 때 전기는 103%에 해당하고, 열은 70%에 해당하는 것이다. 2002년 12월 31일 현재 독일의 풍력 발전 용량은 12,001MW(메가와트)로, 독일 전체 발전 용량의 약 5%를 차지하고 있다. 2010년 풍력 발전의 발전 용량은 22,500MW로 증가하고 독일 전체 전력의 약 10%를 공급할 것으로 예상된다. 2000년 현재 태양열 집열판에서 얻어지는 열은 독일의 가정용 열에너지의 0.2%에도 못 미치지만, 연방환경부의 에너지 시나리오에 따르면 2050년까지 전체 열에너지 수요에서 태양열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20%에 달할 것으로 예측된다. 태 양광 발전은 생산 원가가 매우 높음에도 불구하고 사민-녹색 연립정권이 들어선 1990년대 말부터 급속히 증가했다. 1990 년 전선망에 연결된 태양광 발전 시설의 용량은 1MW였던 것이 2001년에는 176MW에 달했다. 그러나 2000년에 태양광 발전 시설에서 생산된 전기는 9,000만 kWh로 전체 전력의 0.02%밖에 안 된다. 연방환경부의 에너지 시나리오에 따르면, 2050년 전력수요 중에서 태양광 전기가 차지하는 비율은 약 6%에 달할 것으로 예측된다. 수력 발전의 용량은 2000년 현 재 약 4,500MW이고, 전력 생산에서 수력이 차지하는 비율은 4.4%이다. 1999년 독일에서 바이오매스로부터 얻은 에너지 는 모두 477억 kWh였는데 이중에서 거의 90%가 대부분 열 생산에 투입되었다. 바이오매스는 독일에서 소비된 전체 일 차 에너지의 1.4%를, 지열은 2000년 독일 전체 열 소비의 약 0.1%를 공급했다. 독일에서 재생 가능 에너지는 앞으로도 크게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연방환경부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2050년에 전 체 에너지 소비 중에서 재생 가능 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율은 60%로 늘어날 것이다. 󰠲󰠲󰠲󰠲󰠲󰠲󰠲󰠲󰠲󰠲󰠲󰠲󰠲󰠲󰠲󰠲󰠲󰠲󰠲󰠲󰠲󰠲󰠲󰠲󰠲󰠲󰠲󰠲󰠲󰠲󰠲󰠲󰠲󰠲󰠲󰠲󰠲󰠲󰠲󰠲󰠲󰠲󰠲󰠲󰠲󰠲󰠲󰠲󰠲󰠲󰠲󰠲󰠲󰠲󰠲󰠲󰠲󰠲󰠲󰠲󰠲󰠲󰠲󰠲󰠲󰠲󰠲󰠲󰠲󰠲󰠲󰠲󰠲󰠲󰠲󰠲󰠲󰠲󰠲󰠲󰠲󰠲󰠲󰠲󰠲󰠲󰠲󰠲󰠲󰠲󰠲󰠲󰠲󰠲󰠲 1. 머리글 FES-Information-Series 2002년 2월 26일 독일 북부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에서는 독일의 재생 가능 에너지 이용 면에서 역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날 이 지역에서 필요한 전기가 모두 그곳에서 돌아가는 풍력 발전기로부 터 생산, 공급되었다. 이 사건은 독일 재생 가능 에너지의 현황과 미래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슐레스비히-홀슈 타인 주는 북해에 면한 바람이 많은 지역으로 재생 가능 에너지 중에서 풍력을 적극적으로 개발해서 이용하고 있다. 이러한 개발의 결과 잠시나마 전력을 100% 풍력으로 공급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재생 가능 에너지의 확 대를 위해서 힘을 쏟고 있는 독일의 노력과 앞으로의 목표점을 분명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독일의 재생 가능 에너지 이용은 해마다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풍력의 경우 1990년부터 2000년까지 10 년간 풍력 발전기의 용량이 100배 가량 증가했고, 발전량도 100배 이상 증가했다. 태양 에너지의 이용도 지난 10년간 가파른 증가세를 보여 왔으며, 바이오매스(생물자원)도 난방 및 자동차 연료 자원으로 퍼져가고 있다. 그 밖에 지열 개발도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고, 수력 이용도 소규모 발전 시설을 중심으로 조금씩 증가하고 있다. 현재 독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재생 가능 에너지의 대대적인 확산은 독일의 국민, 정부, 기업의 긴밀한 협력 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정부에서는 재생 가능 에너지의 확산을 북돋울 수 있는 전력매입법, 10만 태양지붕 계획 , 재생가능에너지법 등의 정책을 수립하여 시행했거나 시행하고 있고, 이에 많은 시민들이 호응하여 태 양에너지, 풍력 등을 이용하는 시설의 건설에 적극 참여하고 있으며, 기업체들은 연구와 개발에 주력하여 뛰어 난 제품들을 내놓음으로써 재생 가능 에너지 확산을 위한 기술적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 기에 상황이 열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솔선해서 구체적인 시설의 건설을 통해 시범을 보임으로써 재생 가능 에 너지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고 그 가능성을 시험해 보였던 사람들은 핵 발전에서 벗어나기를 열망한 일반 시 민이었다. 이들은 1970년대 초부터 일어난 대대적인 원자력 발전 반대 운동을 거쳐 원자력을 대신할 에너지 대안을 찾았고, 이들 대안을 재생 가능 에너지 시설의 건설을 통해 스스로 실천함으로써 재생 가능 에너지가 가능하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었던 것이다. 재생 가능 에너지에 기반을 둔 대안의 가능성은 70년대 말 에너지 전환 이라는 말로 표현되었고, 이를 위한 초기 연구가 생태연구소 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노력으로 1990년대에 에너지 전환 이라 는 말이 언론과 에너지 전문가들 사이에 정착되었고 전환에 대한 믿음이 퍼져나갔다. 에너지 전환 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얼마만한 기간에 어떤 방법으로 어떤 경로를 거쳐야만 하는가를 보여주는 에너지 시나리오에 대한 연 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그동안 재생 가능 에너지로의 전환을 위한 다양한 에너지 시나리오가 작성되었다. 시민들의 원자력 발전 반대 운동과 그 후의 에너지 전환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것에 비해 독일 연방 FES-Information-Series 정부의 정책은 특별한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1970년대의 슈미트를 수반으로 하는 사민당 정부는 원자력 발전 을 유지, 확대하는 정책을 고수했고, 1980년대 기민/기사 연합의 콜 정부도 이 기조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 았다. 그러나 1986년 4월 체르노빌 사고가 발생하여 독일 전역을 뒤흔들고 원자력에 대한 반대 여론이 거세 게 일어남에 따라 사민당은 원자력 발전 포기를 당론으로 결정했고, 콜 정부도 원자력 발전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고 환경부를 신설하는 등의 조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일부 사민당이 정권을 잡은 주정부에 서는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재생 가능 에너지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지원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이 에 따라 1980년대 말부터 서서히 퍼져가던 재생 가능 에너지는 1990년대로 들어와 정부, 국민, 기업의 원활한 협력에 힘입어 빠른 속도로 퍼지게 된다. 이에 따라 1990년에는 전체 에너지 중에서 재생 가능 에너지가 차지 하는 비율이 1.7%였던 것이 1995년에 2.1%로, 1999년에는 2.9%로 증가했다. 현재 독일은 전 세계에서 재생 가 능 에너지 정책의 시행과 일반 국민들의 관심과 호응 면에서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나라로 평가된다. 2. 자연적 ․ 사회적 조건 기술적으로 이용 가능한 재생 가능 에너지 잠재량 및 경제성 독일에서 재생 가능 에너지에 대한 인식은 1980년대부터 조금씩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여 1990대 말에 들 어오면 이에 대한 믿음이 상당히 견고하게 자리 잡게 된다. 사실 1980년대 말까지도 원자력이 에너지 문제와 기 후변화 문제 해결에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다는 생각이 꽤 많이 남아 있었고, 재생 가능 에너지에 대한 회의적 인 시각이 우세했다. 재생 가능 에너지에 기반을 둔 에너지 전환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전과 다름없이 몽상가 정 도로 치부되었고, 재생 가능 에너지는 아무리 잘해야 전체 에너지의 일부분만을 공급할 수 있는 것으로 폄하되 었다. 또한 화석 연료나 원자력과는 경제성 측면에서도 경쟁이 안 될 정도로 값이 비싼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재생 가능 에너지의 지지자들은 재생 가능 에너지로는 에너지 수요를 절대 충족시킬 수 없고 경제성 이 없다는 반대자들의 두 가지 주장을 구체적인 연구. 분석을 통해서 반박하는 시도를 했고, 이러한 시도의 결 과가 국민들 사이에서 설득력을 얻으면서 재생 가능 에너지에 기반을 둔 에너지 전환의 현실성이 점차 받아들 여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독일 전역에서 개발하여 이용할 수 있는 재생 가능 에너지의 잠재량을 조사하여 그 수치로 반대자들의 주장을 논박했고, 원자력이나 화석 연료를 이용할 경우 환경오염, 기후변화로 인해서 발생 하는 사회적 비용을 재생 가능 에너지를 이용했을 경우의 사회적 이익과 비교함으로써 단순한 경제성 비교의 맹점을 공격했다. 재생 가능 에너지의 잠재량은 이론적, 기술적, 경제적, 이용할 만한 잠재량으로 나눌 수 있다. 이론적 잠재량 FES-Information-Series 이란 그 지역에 존재하는 재생 가능 에너지의 총량을 말하는 것으로, 그곳으로 들어오는 태양에너지의 총량과 거의 같은 양이다. 일 년간 지구 전체에 들어오는 태양에너지의 양이 인류의 연간 에너지 소비량의 15,000배 가량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론적 잠재량은 어느 지역에서나 풍부하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기술 적으로 이용 가능한 잠재량인데, 이러한 잠재량은 이론적 잠재량에 비해 크게 줄어든다. 독일의 재생 가능 에너지 잠재량에 대한 추정은 바젤의 프로그노스 연구소, 연방의회 기후보호 앙케트 위원 회, 생태연구소, 연방환경부 등 여러 기관에서 수행했고, 이들 기관에서 내놓은 수치는 추정에 사용한 파라미터 에 따라 상당한 편차를 보인다. 가장 최근에 나온 잠재량 연구는 연방환경부의 위탁을 받아 부퍼탈연구소 (Wuppertal Institut f ü r Klima, Umwelt, Energie), 독일항공우주센터(Deutsches Zentrum f ü r Luft- und Raumfahrt) 등에서 수행한<재생 가능 에너지를 이용한 기후보호>(Klimaschutz durch Nutzung erneuerbarer Energien)라는 광범위한 연구보고서에 실린 것으로 여기서는 재생 가능 에너지로부터 일 년 동안 얻을 수 있는 전력 잠재량을 수력 30TWh(테라와트시), 풍력 320TWh, 태양광 발전 166TWh, 바이오매스 46TWh로, 열에너 지 잠재량을 태양열 593TWh, 바이오매스 121TWh, 지열 350TWh로 추정하고 있다. 즉, 전기는 연간 총 526TWh 를 생산할 수 있고, 열은 총 1,003TWh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양은 1997년 독일의 전력 및 열에너지 수요와 비교할 때 전기는 103%에 해당하고, 열은 70%에 해당하는 것이다. 연방환경부의 이러한 잠재량 조사결 과는, 전기는 현재의 소비 수준을 유지하고, 열은 30% 가량 절약하면 재생 가능 에너지에 기반한 완전한 에너 지 전환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재생 가능 에너지의 경제성을 화석 연료와 단순 비교하면, 태양광 발전의 경우는 경제성이 전혀 없다는 결과 가 나온다. 태양광 발전으로 전기를 생산할 경우 1kWh를 생산하는 데 약 0.5~0.8유로의 비용이 투입되는 반 면, 화석 연료의 경우는 그것의 7분의 1가량의 비용이면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태양열로 온수나 난방열을 생산하는 경우에도 석유를 사용할 때보다 5배 이상 더 많은 비용이 든다. 화석 연료의 발전 단가에 가장 근접 하는 재생 가능 전기 생산 방식은 수력과 풍력이다. 수력은 1kWh의 전기를 생산하는 데 0.1~0.2유로의 비용이 들고, 풍력은 대형 발전기의 경우 0.1유로 미만이다. 이와 같이 생산 비용이 높다는 이유로 기존의 에너지 시스템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태양에너지 이용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를 보이지만, 기후변화와 환경 문제를 크게 중시하는 환경주의자들은 단순한 생산비보다 에너지 의 사용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외부 비용) 또는 환경 훼손을 방지함으로써 오는 외부 이득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외부 비용이나 이득은 정확하게 추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연구 기관에 따라 크게 편차를 보이는 데, 풍력 발전의 경우 1kWh에 대략 10페니히, 태양광 발전의 경우 1kWh에 20페니히 가까이 될 것으로 추정된 다. 화석 연료와 원자력 발전의 경우, 프로그노스 연구소와 프라운호퍼 연구소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화석 연 료는 외부 비용이 1kWh에 70페니히, 원자력은 1kWh에 3.6마르크로 추정된다. 재생 가능 에너지 지지자들은 FES-Information-Series 경제성을 비교할 때 이러한 외부 비용까지 고려해야 하며, 그럴 경우 재생 가능 에너지가 화석 연료보다 경제 성이 떨어질 것이 없다는 견해를 보인다. 이들은 또한 재생 가능 에너지를 이용할 경우 지역 경제에 미칠 긍정적인 영향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석유, 석탄, 원자력은 거대한 에너지 생산 시설을 필요로 하고 이는 자동적으로 거대한 중앙 집중적 인 규모로 이용될 수밖에 없지만, 재생 가능 에너지는 각 지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고 작고 분산적인 규모로 이용되기 때문에 지역민의 참여를 보장하고 지역의 경제에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3. 정책적 조건 독일 정부에서 재생 가능 에너지의 확산을 위한 정책을 시행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 다. 하나는 기후 변화를 일으키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기 위한 것이고, 또 하나는 국내 지역 경제의 활성화 를 꾀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2000년 4월 1일부터 발효된 재생 가능 에너지법(Gesetz f ü r den Vorrang erneuerbarer Energien)의 입법 취지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여기에서 독일정부는 기민/기사연합 집권 시 약속한 2005년까지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1990년을 기준으로 25% 감축하기 위해서는 소위 새로운 재생 가능 에너지를 동원하는 것이 필요 하고, 또한 재생 가능 에너지원의 확대는 일자리 창출에 기여 하고 지역의 발전 을 지속적으로 지원 하며, 산업적 ․ 상업적 측면에서도 특별한 의미 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독일 정부는 재생 가능 에너지의 확산이 환경적, 산업적 측면에서 모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보고, 시민과 기업이 함께 힘을 합쳐 재생 가능 에너지 확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의 재생 가능 에너지 정책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정책은 재생 가능 전기 매입정책 과 10만 태양지붕 프로그램 이다. 재생 가능 전기 매입 정책 은 1991년 1월 1일에 발효된 전력매입법(Stromeinspeisungsgesetz)의 제정으로 시작되었다. 재생 가능 에너지로 생산한 전기를 지역 전기회사가 소비자 가격의 80~90%로 구매해야 한다고 규 정한 이 법을 통해 재생 가능 에너지를 이용한 발전 시설이 확대되었다. 이 법에 따라 풍력 전기와 태양 전기 의 가격이 kWh당 17페니히로 책정되었다. 이 가격은 풍력 발전의 발전 원가를 충분히 충족시키는 것이었기 때 문에 풍력 발전이 화석 연료와 경쟁력을 갖게 되었고, 따라서 이 법의 발효 후 풍력 발전기의 건설이 크게 늘 어났다. 1991년부터 2000년까지 풍력 발전기의 용량이 100배 가량 늘어난 것은 이 법의 제정 덕분이다. 그러나 kWh당 17페니히라는 구매 가격은 태양광 발전의 경우에는 발전 원가의 5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태양광 발전 시설의 확산에는 별로 기여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시민단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지방정부 소유의 전력공사에서 태양광 전기 생산 원가를 보장하는 2마르크 정도의 높은 가격으로 태양 전기를 구매하도 록 조례를 제정한 곳이 늘어났고, 그 결과 태양광 발전 시설도 조금씩 늘어났다. 이러한 제도는 1992년 아헨에 서 처음 시행되었기 때문에 총비용 보장 구매 제도 또는 아헨 모델로 불리는데, 이 모델을 채택한 지자체에서 FES-Information-Series 는 다른 지자체보다 태양광 발전 시설의 성장이 훨씬 빨랐다. 아헨 모델은 아헨의 SFV(Solarenergie-F ö rderverein)라는 시민단체에서 처음 고안한 것으로, 그 후 다른 시민단체에서도 받아들여 자신들이 활동하는 지자체에 시행을 요구하여 점차 퍼져나갔다. 2000년 4월부터는 전력매입법을 보완, 발전시킨 재생 가능에너지법이 시행되어 재생 가능 전기 중에서도 특 히 태양광 발전의 광범위한 확산을 가져왔다. 이 법은 전력매입법의 단점들을 보완하고 재생 가능 에너지의 확산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태양광 발전으로 생산한 전기 를 kWh당 99페니히(약 600원)로 매입하도록 규정한 것이다. 매입 가격은 2002년 1월부터 설치된 것은 해마다 5%씩 감소하는데, 그 이유는 시간이 지날수록 기술 개발과 시장 확대로 발전 원가가 떨어질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이다. 태양광 전기의 구매 가격은 다섯 배 이상 올랐고, kWh당 99페니히로 되어서 이제 실제 전기 생산비 에 거의 근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설비에 대해서는 구매 가격을 해마다 내리도록 되어 있는데, 풍력 발전기의 경우에는 해마다 1.5%, 태양광 발전기의 경우에는 해마다 5%씩 내린다. 이는 2005년에 설치된 태양광 발전기의 경우에는 kWh 당 77페니히 밖에 주어지지 않지만, 2000년에 설치된 설비로부터 생산된 전기는 99페니히로 매입되는 것을 의 미한다. 태양광 전기의 구매 가격은 다른 설비에서 생산된 전기보다 훨씬 높게 책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 법에 따라 구매 대상이 되는 태양광 발전기의 전체 용량은 350MW로 제한된다. 태양광 발전 시설이 늘어나서 용량이 350MW가 넘으면 99페니히로 매입하는 것이 중단되는 것이다. 그 후의 규정은 350MW가 넘은 후 바로 제정되 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그밖에 다른 재생 가능 에너지원에 대해서는 용량에 대한 한계가 없다. 태양광 발전기에서 생산된 전기의 매 입 가격은 아헨 모델에서 주장하는 발전 원가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지만, 10만 태양 지붕 정책의 지원 제도 와 결합하여 태양광 발전을 독일 전역에서 급속히 증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재생 가능 에너지법에서 태양광 전기를 kWh당 99페니히로 구매하는 것은 독일 정부의 태양광 발전 설비 지원을 위한 10만 태양 지붕 프로그램과 연계되어 있다. 이 프로그램은 1999년 4월에 시작되었는데, 그 기본 내용은 주택이나 공공건물의 태양광 발전 설비 설치 비용을 연방정부에서 전액 무이자로 대여해주고, 빌린 돈의 거의 90퍼센트만 7년 동안 상환하도록 한다(나머지는 8년째에도 발전 설비에서 전기를 생산하고 있으면 탕감된 다). 이 프로그램의 목표는 평균 최대 용량이 3kW인 10만 개의 태양광 발전 시설을 5년 안에 독일 전역에 설치하 려는 것이다. 이 계획이 제대로 진행되면 1998년에 50kW이었던 태양광 발전 설비의 용량은 2003년 말에 총 350MW로 증가하고, 이로써 전선망을 통한 전기 공급에서의 태양광 전기의 비율은 10배 증가하게 된다. 10만 태양 지붕 프로그램에는 거의 10억 마르크가 투입될 것이고, 총 25억 마르크의 투자를 유발할 것으로 FES-Information-Series 기대된다. 이러한 액수를 고려하면 이 프로그램은 지금까지 시행된 전 세계의 태양광 발전지원 프로그램 중에 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또한 기대하는 효과는 독일의 안정된 시장을 창출해서 환경보호에 기여하고 에너지 전환을 앞당기는 것만은 아니다. 이를 통해 독일 내의 시장이 형성되면 태양광 발전 관련 기 업들이 이를 기반으로 급속히 성장하는 세계 시장에서도 성공적으로 자기 위치를 확립할 수 있는 것이다. 10만 지붕 프로그램에서 지원하는 대상은 설비 용량 1kW 이상의 새로운 태양광 발전 설비 또는 그 이상으로 확장한 설비이다. 그밖에 전력 매입 정책이나 10만 태양 지붕 프로그램보다는 주목받지 못하지만 재생 가능 에너지 확대에 도 움을 주는 정책으로 재생 가능에너지 시장 활성화 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그램은 1999년에 시작되었고, 연 간 예산은 2억 마르크로 그 이전의 여러 유사한 프로그램에 비해서 10배나 증액된 상당히 많은 액수이다. 그 런데 이 프로그램은 재생 가능 에너지의 좀더 바람직한 장려 계획의 관철에 반대하는 주로 보수당 의원들과의 타협의 산물이었다는 한계가 있다. 생태적 세제 개혁에 따르면, 화석 연료에 대해서는 세금을 높이 올리지만 재생 가능 에너지로 얻은 전기에 대해서는 본래 세금을 면제해주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게 되면 재생 가능 에 너지가 점차 가격 경쟁력을 갖게 되어 재생 가능 에너지의 시장 활성화가 자동적으로 되지만, 재생 가능 전기 에 대해 세금을 면제하는 것이 의회에서 통과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의 타협책으로 나온 것이다. 즉, 재생 가 능 전기에 대해서 세금을 거둘 수밖에 없다면, 그 일부를 가지고 재생 가능 에너지의 이용 시 이득이 되도록 지원하자는 것이 이 프로그램인 것이다. 이 프로그램의 총 지원 금액은 2003년까지 5년 동안 10억 마르크로 책정되어 있다. 지원을 받는 것은 태양 열 집열판, 고형 바이오매스를 연소하는 중앙 집중 난방 시설, 전기 생산을 위한 바이오가스 설비, 바이오가스 열병합 발전 설비, 소수력 및 재생 가능 전기로 가동되는 전기 열펌프 등이다. 또한, 지역 이용 설비도 지원을 받는다. 지원금은 적용된 기술과 가동에 따라 투자비의 10~30% 정도가 주어진다. 매년 2억 마르크씩 지원금 이 주어지면 연간 최대 20억 마르크까지 투자가 이루어질 것으로 추정되는데, 1999년 초부터 말까지 1년 동 안 지출된 지원금의 액수는 5천만 마르크에 달했다. 4. 재생 가능 에너지 현황 4.1 풍력 2002년 9월 30일 현재 독일의 풍력 발전 용량은 10,639MW로 독일 전체 발전 용량의 약 5%이며, 가동률을 고려했을 때 전체 발전 용량의 약 4%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1990년의 발전 용량 68MW와 비교할 때 150배 증가한 수치이다. 용량이 크게 증가한 것에 비해 풍력 발전기의 숫자는 1990년의 548개에서 2002년 12,810개 로 약 20배밖에 증가하지 않았는데, 이는 풍력 발전기 하나의 발전 용량이 계속 대형화되어왔음을 말해준다. FES-Information-Series 풍력 발전기는 풍력 발전이 급속히 보급되면서 발전기 한 개의 용량도 급속히 증가하여, 1990년에는 새로 건 설된 풍력 발전기의 평균 발전 용량이 160kW이었던 것이 1996년에는 560kW, 2000년에 1,000kW(1메가와트) 를 넘어섰고, 2002년에는 거의 1,400kW에 달했다. 현재 풍력 발전기는 2MW급이 상용화되고 있고, 3MW, 5MW급도 곧 개발되어 상용화될 것이다. 현재 독일에서 가장 많이 건설되고 있는 1.5MW급 풍력 발전기의 크 기는 발전기까지의 높이가 70~90미터, 날개 지름이 70~80미터에 달한다. 풍력 발전기에서 생산된 전기의 양은 2002년에 약 20TWh(테라와트시, 1TWh는 100억kWh)에 달할 것으로 예측 되는데, 이것은 500TWh 가량 되는 독일 전체 전력 생산량의 4%에 해당하는 양이다. 생산량은 1995년에 2.5TWh였 던 것이 1998년 5TWh로 전체의 1%를 넘었고, 2000년 10TWh로 2%, 2001년에는 15TWh로 3%에 달했다. 2년마다 두 배씩 증가한 셈인데, 이러한 급속한 증가 추세가 앞으로도 계속되지는 않겠지만, 2010년까지 풍력 발전의 발전 용량은 22,500MW로 증가하고 독일 전체 전력의 약 10%를 공급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값은 독일 연방환경부의 시나리오에서는 2020년에야 도달 가능한 것으로 예측한 것이지만, 풍력 발전의 확대 속도가 예상 보다 빨라서 목표치가 10년이나 앞당겨져서 도달하게 되는 셈이다. 연방환경부의 장기 에너지 시나리오에 따르 면, 2050년에 풍력 발전으로 생산되는 전기는 전체 전기의 18%를 공급하게 되는데, 해양 풍력 발전 단지가 예 정대로 건설되면 이 목표도 2050년 전에 달성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 재생 가능 에너지법은 풍력 전기를 전력회사에서 kWh당 13.5~17.8페니히로 구입하도록 규정하고 있 다. 구매 가격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표준 입지 모델을 정해서 표준 입지보다 바람이 잘 부는 지역의 FES-Information-Series 풍력 발전기에 대해서는 낮은 구매 가격을 적용하고, 표준 입지보다 바람이 덜 부는 지역의 풍력 발전기에 대 해서는 높은 구매 가격을 적용한다. 이에 따라 전에는 바람이 잘 부는 해안지역에 풍력 발전기가 집중되어 건 설되었지만, 재생 가능에너지법의 시행 후에는 내륙 지역에도 상대적으로 많은 풍력 발전기가 건설되었다. 그 래도 전체적으로는 해안 지역에 풍력 발전기가 집중되어 있다. 2002년 9월 30일 현재 풍력 발전기가 가장 많은 곳은 니더작센 주로 전체 용량이 2,981MW이고,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가 전체 용량 1,702MW로 그 뒤를 따 르고 있다. 가장 낮은 지역은 내륙의 바이에른 주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로 풍력 발전기의 용량은 각각 니더 작센 주의 20분의 1 정도밖에 안 되는 139MW와 157MW이다. 소비 전력을 기준으로 할 때 풍력 발전의 비율 이 가장 높은 지역은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로 2000년 현재 전체 전력의 16.5%가 풍 력 발전으로 공급되었다. 독일의 풍력 발전 관계자들은 앞으로 육지에서는 풍력 발전의 확대가 완만하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한다. 왜냐 하면, 바람이 웬만큼 부는 지역은 상당 부분 풍력 발전 단지가 들어섰고, 따라서 입지를 찾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 고 있기 때문이다. 육지에 풍력 발전 단지를 건설하는 것이 어려워지면서 사업자들은 눈을 바다로 돌리고 있다. 바다는 육지보다 바람이 훨씬 잘 불고 풍력 발전 단지를 건설할 만한 곳은 많기 때문이다. 문제는 건설비가 육지 의 경우보다 높고 기술적인 면에서 건설이 어렵다는 것이지만, 사업자들은 바다에서 바람이 더 잘 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상쇄된다고 말한다. 바다는 접근이 쉽지 않고 따라서 풍력 발전기의 숫자가 많으면 점검이나 수 리에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바다에는 보통 초대형 풍력 발전기를 건설한다. 바다에 건설될 예정인 풍력 발전기의 용량은 보통 2~5MW이다. 독일 북해와 동해에 건설될 풍력 발전 단지로 심사 중이거나 승인난 곳은 모두 25개이고 예정된 전체 발전 용량은 약 18,000MW이다. 이것은 2002년 9월 현재 육지에 건설된 풍력 발전 기의 용량 10,000여 MW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양이다. 풍력 발전 관계자들은 2030년까지 북해와 동해에 건 설될 풍력 발전 단지의 전체 발전 용량은 약 25,000MW에 달할 것이고, 여기서 약 100TWh의 전기가 생산될 것으로 전망한다. 이것은 독일 전체 전력 생산량의 20%에 달하는 것으로, 육지에서 생산되는 것까지 합하면 풍 력 발전으로 25% 이상의 전력을 공급하게 되는 셈이다. FES-Information-Series 풍력 발전의 생산 원가는 1990년 이래 계속 떨어지고 있지만 1995년을 넘어서서는 떨어지는 속도가 그 전에 비해 크게 느려졌다. 1995년의 생산 원가는 1990년의 60%였지만, 2002년 현재의 생산 원가는 그것보다 10% 낮은 50%이다. 1990년부터 1995년까지 5년 동안 발전 원가가 80% 가량 떨어졌지만, 1995년부터 2002년까지는 생산 원가가 1995년을 기준으로 할 때는 20%밖에 떨어지지 않은 것이다. 앞으로는 생산 원가가 더욱 완만하게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연방의회의 지속 가능한 에너지 수급 앙케트 위원회 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 해 양 풍력 발전기의 생산 원가는 kWh당 3.6~7.5센트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풍력 발전의 급속한 확대는 관련 일자리도 크게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았는데, 1990년 풍력 발전 관련 업종의 종사자가 수천 명이었던 것이 1995 년에는 만 명으로 증가했고, 2001년에는 43,000명으로 증가했다. 2000년 현재 풍력 발전 관련업체의 매출액은 36억 마르크에 달했다. 4.2 태양에너지 태양에너지의 이용은 태양열을 이용해서 온수 ․ 난방용 에너지를 생산하는 것과 태양광을 이용해서 전기를 생 산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온수 ․ 난방용 에너지는 태양열 집열판을 이용해서 생산하고, 전기는 태양광 발전 기를 이용해서 생산한다. 집열판의 보급은 1990년경부터 꾸준히 증가했는데, 1990년에는 새로 설치된 집열판 의 면적이 5만 제곱미터였던 것이 1995년에는 20만 제곱미터를 넘어섰고, 2000년에는 60만 제곱미터, 2001년 에는 90만 제곱미터를 넘어섰다. 2001년 말 현재 독일 전체에 설치되어 있는 집열판 면적은 거의 380만 제곱 미터에 달한다. 이것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치이다. 태양열 집열판은 지붕 부착형, 지붕 일체형, 벽체 부착 형 등 다양한 형태로 적용되고 있고, 가정 온수용, 가정 난방 ․ 온수용, 계간 축열조를 이용한 집단 난방용 등으 로 이용되고 있지만, 설치되는 집열판의 대다수는 가정 온수용이다. 2000년에 설치된 가정 온수용 집열판의 수는 75,000개에 달했다. 집열판으로 온수를 만들어 쓰는 경우 화석 연료를 이용하는 경우보다 경제성은 크게 FES-Information-Series 떨어진다. 집열판을 이용해서 1kWh의 열을 생산할 때 드는 비용은 거의 50페니히에 달하는데, 이것은 석유나 가스의 경우보다 5배가 넘는 액수다. 대용량의 집열판 시스템을 이용해서 열을 생산하면 20페니히로 떨어지지 만, 이 경우도 여전히 석유, 가스의 경우보다 2배가 넘는다. 지방 정부에 따라 설치비의 15~20% 가량 지원금 을 주기도 하지만, 이것은 생산 원가를 거의 낮추지 못하는 미미한 액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에 75,000개의 온수용 집열판이 설치되었다는 것은 독일 시민들의 재생 가능 에너지 에 대한 의식이 크게 높아졌음을 보여준다. 독일의 전체 집열판 면적은 절대 면적으로는 유럽에서 가장 많지만, 인구 1,000명당 집열판 면적은 2000년 말 현재 약 40제곱미터로, 유럽에서는 오스트리아, 그리스, 스위스, 덴마크에 이어 다섯 번째밖에 안 된다. 2000년 말 현재 오스트리아는 인구 1,000명당 265제곱미터로 독일의 4배에 달한다. 2000년 현재 태양열 집열 판에서 얻어지는 열은 독일의 가정용 열에너지의 0.2%에도 못 미치지만, 독일 연방환경부의 에너지 시나리오 에 따르면 2050년까지 전체 열에너지 수요에서 태양열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20%에 달할 것으로 예측된다. 2000년 태양열 설비의 매출액은 10억 마르크로 1999년의 7억 마르크에 비해 거의 50%나 증가했다. 태양열 산 업에 직, 간접적으로 종사하는 노동자의 수는 거의 1만 명에 이른다. 태양광 발전도 생산 원가가 매우 높음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특히 사민-녹색 연립정권이 들어선 1990년대 FES-Information-Series 말부터 급속히 증가했다. 1990년 전선망에 연결된 태양광 발전 시설의 용량이 1MW이었던 것이, 1995년에 16.1MW, 2000년에 101MW, 2001년에는 176MW에 달했다. 2003년에는 350MW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되는데, 연방환경부의 에너지 시나리오에 따르면 2050년 전력 수요 중에서 태양광 전기가 차지하는 비율은 약 6%에 달 할 것으로 예측된다. 2000년에 태양광 발전 시설에서 생산된 전기는 9,000만 kWh로 전체 전력의 0.02%밖에 안 된다. 태양광 발전으로 생산된 전기의 원가는 시설의 크기에 따라 달라지지만, 2000년을 기준으로 대략 1~1.5마르 크 또는 0.59~0.71 유로로 추정된다. 이것은 화력 발전으로 생산된 전기의 7~10배 가량 되는 높은 것이지만, 태양 전기의 생산 원가는 그동안 급속히 떨어졌고 앞으로도 이 추세는 수십 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태양 전기의 생산 원가는 1968년부터 시장이 2배로 확장될 때마다 20%씩 떨어졌고, 지난 10년간 절반으로 떨어졌 다. 1990년부터 2000년까지 10년 동안 태양광 발전 시설의 가격은 해마다 5%씩 떨어졌는데, 2010년까지도 10 년간 발전 원가는 해마다 5%씩 떨어져서 2010년에는 1999년의 58% 수준으로, 그 후 10년간은 해마다 7~8%씩 감소하여 2020년에는 1999년의 약 4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질 것으로 예측된다. 그 후에는 가격 하락이 완만히 이루어져서 2050년에는 1999년의 6분의 1 정도로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생산 원가가 떨어지고 화석 연료의 가격이 상승하게 되면 2010년 이후에는 태양광 전기가 첨두 부하용으로 경쟁력을 갖게 되고, 2030년경 에는 기저 부하용으로도 경쟁력을 갖게 될 것으로 예측된다. 2000년 태양광 발전 시설의 매출액은 6억 마르크로, 그 전해에 비해 3배 가량 증가했다. 이는 10만 태양 지붕 프로그램의 본격적인 실행에 기인한 바가 큰데, 2001년에는 그것과 더불어 재생 가능에너지법에 따라 kWh당 0.99마르크의 매입 가격이 도입되어 2000년보다 80% 가량 증가했다. 현재 독일에서 태양광 발전 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의 수는 4,000명에 달한다. 4.3 수 력 수력은 풍력 발전이나 태양에너지 이용이 퍼지기 전에 바이오매스에 이어 가장 많이 이용되던 재생 가능 에 너지원이다. 2000년 수력 발전의 용량은 약 4,500MW이고, 전력 생산에서 수력이 차지하는 비율은 4.4%로 재 생 가능 에너지 중에서는 여전히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수력은 상당히 많이 개발된 상태이 기 때문에, 앞으로 수력 발전의 증가 속도는 풍력이나 태양에너지의 증가보다 훨씬 완만할 것으로 전망된다. 수력 발전기는 숫자로 따지면 90% 이상이 흐르는 물을 이용해서 발전하는 1MW 이하의 소수력 발전기이지만, 이들 소수력 발전기에서 생산되는 전기의 양은 수력발전으로 생산되는 전기의 10%에도 채 못 미친다. 수력 발 전에서 생산된 전기의 2000년 매출액은 약 18억 마르크에 달하고, 수력 발전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수는 수천 명으로 추정된다. FES-Information-Series 4.4 바이오매스(생물자원) 바이오매스는 난방이나 발전용 연료뿐만 아니라 자동차 연료로도 이용된다. 바이오매스는 원래의 형태 그대 로 이용되기도 하지만, 발효나 분해를 통해 가스로 만들어서 열병합 발전에 이용되기도 하고, 식물의 씨앗으로 부터 얻은 기름은 바이오 디젤로 가공되거나 가공되지 않은 형태로 자동차 연료로 이용되기 때문이다. 독일에 서는 이러한 여러 형태의 바이오매스가 전력 생산용, 난방용, 운송용으로 모두 사용되고 있다. 1999년 독일에서 바이오매스로부터 얻은 에너지는 모두 477억 kWh인데 이중에서 거의 90%가 고체 형태 로, 즉 거의 가공되지 않은 상태로 이용되었고, 대부분 열 생산에 투입되었다. 이로써 바이오매스는 독일에서 소비된 전체 일차에너지의 1.4%를 공급했다. 지역별로는 바이에른 지방이 3.2%로 바이오매스 비율이 가장 높 았다. 자동차 연료로 투입된 바이오 디젤의 비율은 전체 자동차용 연료의 0.55%에 달했고, 전체 전력 중에서 바이오매스로부터 생산된 것은 약 0.3% 정도 되었다. 작은 가정용 바이오매스 설비를 이용해서 열을 생산할 경 우 비용은 kWh당 5~10페니히로, 화석연료의 경우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태양열 집열판으로 열을 생산하는 경우보다 훨씬 싸고 최신 기술을 적용한 설비는 매연도 거의 내놓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시설은 널리 퍼져가 고 있다. 바이오매스를 이용해서 집단 난방을 할 경우에는 kWh당 비용을 5페니히 이하로 낮출 수 있다. 바이 오매스 이용은 앞으로도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예측되는데, 연방환경부의 에너지 시나리오는 2050년 열 생산 의 바이오매스 비율은 약 20% 정도 될 것으로 추정한다. 4.5 지 열 지열은 엄격하게 따지면 고갈되지 않는 재생 가능 에너지는 아니지만 인간의 시간 차원에서 볼 때 아주 오랫동 안 쓸 수 있기 때문에 재생 가능 에너지로 간주한다. 독일에서 이용할 수 있는 지열의 잠재량은 꽤 많은 것으 로 추정되지만 아직 제대로 개발되지 않고 있다. 지열 이용 방식은 지표의 지열을 이용하는 것과 심층의 열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지표로부터는 섭씨 최대 25도의 온도를 얻을 수 있고, 심층에서는 최대 섭씨 170도의 높은 온도를 얻을 수 있다. 지열은 냉난방용으로 이용할 수도 있고, 발전용으로도 이용할 수 있다. 지열은 직접 이용하기도 하지만 열펌프에 연결해서 이용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순수한 지열 이용량을 계산하 는 것은 쉽지 않다. 1999년 직접 이용한 지열의 양은 약 1,568페타줄, 열펌프를 이용해서 생산한 양은 5,400페타줄 로 추정된다. 열펌프의 경우 펌프를 돌리는 데 들어간 전기에너지를 제외하면 3,600페타줄 정도가 된다. 전체적으 로는 지열로 5,168페타줄(약 1.4TWh)을 생산한 셈이다. 이것은 독일의 2000년 열 소비의 약 0.1%에 해당하는 양 이다. 지열의 경우 생산 원가는 깊이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데, 예를 들어, 3,400미터 정도의 깊이에서 열을 뽑아 올려 이용할 경우 kWh당 열 생산 비용은 5페니히, 1,000미터 깊이의 경우는 13페니히이다. 화석 연료와 비슷한 수 준이다. 그러나 열펌프를 이용해서 지표열을 쓸 경우에는 비용이 kWh당 30페니히 이상으로 올라간다. 5. 맺음말 FES-Information-Series 독일 연방환경부에서 내놓은 에너지 시나리오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독일은 기후 변화 문제의 해결과 화 석 연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이와 동시에 재생 가능 에너지 이용을 확대해가기 위해 여 러 가지 정책을 수립하여 시행하고 있다. 이들 정책은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대부분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 고, 그 결과 풍력, 태양에너지, 바이오매스 등의 각종 재생 가능 에너지의 이용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2002년 9월 독일 총선에서 기민/기사연합이 정권을 잡을 경우 지금까지의 에너지 정책이 바뀔 것이라는 우려 도 있었지만 사민/녹색당이 승리함에 따라 재생 가능 에너지의 확대 정책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 리고 다음 총선이 실시되는 2006년까지 4년 동안 이러한 기조가 계속되면 재생 가능 에너지의 긍정적인 면이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어 정권이 바뀌더라도 독일의 재생 가능 에너지 확대 정책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재생 가능 에너지 관련 운동을 벌이고 있는 독일의 많은 시민단체들은 독일이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지 만, 독일은 에너지 절약과 재생 가능 에너지 확대라는 면에서 다른 나라보다 크게 앞서 가고 있다. 최근 들어서 독일의 예를 따르려는 나라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지만 독일처럼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시민, 정부, 기업이 만들어내는 삼박자가 약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재생 가능 에너지 정책을 수 립할 때 이 점에 특히 유의해야 할 것이다. ※ 비용 계산에서 마르크와 유로 단위를 혼용했는데, 이는 원 자료에 나오는 것을 그대로 썼기 때문이다. 1 유로= 약 2마르크이다. 유럽연합의 대학교육 현대화와 개혁 정책 김 숙 원, 저널리스트 2006년 6월 󰠲󰠲󰠲󰠲󰠲󰠲󰠲󰠲󰠲󰠲󰠲󰠲󰠲󰠲󰠲󰠲󰠲󰠲󰠲󰠲󰠲󰠲󰠲󰠲󰠲󰠲󰠲󰠲󰠲󰠲󰠲󰠲󰠲󰠲󰠲󰠲󰠲󰠲󰠲󰠲󰠲󰠲󰠲󰠲󰠲󰠲󰠲󰠲󰠲󰠲󰠲󰠲󰠲󰠲󰠲󰠲󰠲󰠲󰠲󰠲󰠲󰠲󰠲󰠲󰠲󰠲󰠲󰠲󰠲󰠲󰠲󰠲󰠲󰠲󰠲󰠲󰠲󰠲󰠲󰠲󰠲󰠲󰠲󰠲󰠲󰠲󰠲󰠲󰠲󰠲󰠲󰠲󰠲󰠲󰠲 글로벌화로 세계 시장은 재구성되고 있다. 특히 유럽은 저조한 경제성장, 고령화, 높은 실업 률, 인도와 중국 등 신흥공업국가의 부상 등으로 인해 사회 경제적으로 도전 받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유럽 연합은 2000년부터 경제, 사회, 교육 전반에 걸친 구조적 개혁 정책을 실시하고 목표 달성을 위한 아젠다를 마련하였다. 특히 첨단 기술 개발과 탁월한 인재 양성 을 통해 세계 시장에서 유럽의 경제적 위치를 확고히 하고 사회 고용 정책과 대학교육 정책 의 연계를 강화하여 취업률을 높이고자 한다. 대학교육의 개혁은 유럽의 미래 사회 실현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유럽연합은 우선 유럽 대학의 교육 수준을 본질적으로 향상시키고, 최고 수준의 인재들을 양성하는 엑셀 런트 센터를 건설하여 첨단 기술과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의 인적 자본을 개발하고자 한 다. 또 학생과 학자들의 해외 유학을 장려하고 나라마다 다른 대학교육 체제와 행정 도구를 통일하여 해외 유학을 활성화하고자 한다. 그 밖에도 국제적으로 유럽 대학의 인지도를 높이 기 위해 다른 대륙의 대학들과의 협력 프로그램도 다양화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2000년부터 실행하고 있는 유럽연합의 대학교육 현대화와 개혁 정책의 전략과 목적, 그리고 구체적인 프로그램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 1. 머리말 FES-Information-Series 2000년대 세계 시장은 재구성되고 있다. 유럽연합은 글로벌화로 나타난 경제성장의 둔화, 높은 실업률, 인종 간 문화적 갈등, 아시아 지역의 세계 시장 점유율 증가 등으로 인해 구조적 어려움 을 겪고 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장기적 경제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유럽연합은 사 회와 경제에 걸친 구조 개편을 시도하고 교육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설정하였다. 특히 연구기관을 육성하여 개발 산업을 활성화하고, 대학교육의 현대화를 추진하는 한편, 인재와 첨단 기술 개발을 위해 유럽 내 대학 간 협력과 산학 협력은 물론 대외적 교류도 강화하고 있다. 저자는 이 글을 통해 변동하는 세계 흐름에 대비하여 미래를 준비하는 유럽연합의 대학교육 현대화 과정을 소개 하고자 한다. 2. 대학 교육의 현대화 대학교육의 현대화 작업에서 반드시 언급해야 할 것이 리스본 전략과 볼로냐 프로세스다. 왜냐 하면 이 두 가지가 정치적 차원에서 대학교육 발전의 기본 전략과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1) 리스본 전략 유럽 정상들은 2000년 리스본 정상회담에서 지식에 바탕을 둔 새로운 경제 창출의 절박성을 확인했다. 그들은 2010년까지 유럽연합을 계층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합리적인 사회이면서도, 경쟁력 있고 역동적인 경제 공간으로 만들 것을 결의하고, 구조 개혁을 착수하였다. 그러나 2005년 중간 평가를 통해 그들은 애초 세계 최강이 되겠다는 야심적인 목표를 실현할 수 없음 을 인정해야 했다. 이러한 좌절에도 유럽연합은 개혁 추진의 절심함을 재확인하였고, 목표 달성을 위해 새로운 조절 단계로 들어섰다. 2) 볼로냐 선언과 추진 과정 최근 조사에 따르면, 소수의 영국 대학을 제외한 유럽 어느 대학도 세계 20위 안에 들지 못했 으며, 겨우 몇 대학만이 50위 안에 들었다. 연구 사업을 비교해 보면, 유럽연합은 1000 명의 직장 인 중 5.5명이 연구직 종사자로 미국(9.0)과 일본(9.7)의 수준에 훨씬 뒤지고, 또 자연과학과 과학 기술에서 아시아 대학들의 급속한 성장도 유럽을 위협하고 있다. 더구나 유럽 대학은 외국 학생 과 학자들에게 점차 인기를 잃고 있다. 외국인들이 유럽 대학을 여전히 선호하고 있지만, 남아메 리카와 아시아 학생들 대부분은 유럽 보다 미국을 선호하며, 미국에 유학하는 유럽 학생 수도 유 럽으로 유학 오는 미국 학생 수의 두 배에 이른다. FES-Information-Series 유럽 대학의 교육 수준을 본질적으로 향상시킬 목적으로 1999년 유럽의 29개 국가 교육부 장관들이 볼로냐에 모여 대학교육 개혁을 위한 전략과 목표를 선언하였으며, 2년마다 유럽연합 각료이사회를 열어 대학교육의 현대화를 감독, 추진하고 있다. 현재 러시아, 동유럽 국가들과 과거 소비에트 공화국에 속했던 중앙아시아 국가를 포함한 45개국이 볼로냐 프로세스에 동참 하고 있다. 3. 교육 개혁 추진에 중요한 항목들 유럽연합은 첨단 기술과 지식을 바탕으로 세계 시장에서 확고한 위치를 확보하고, 사회 고용 정책과 교육 정책의 연계를 강화하여 건전한 노동시장을 창출하고자한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 한 것이대학교육의 현대화다. 대학교육 개혁의 주요 항목은 크게 5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대학교육의 유럽적 공간(European Higher Education Area, EHEA) 확립 유럽 대학들은 오랜 전통을 자부하면서 시대에 뒤떨어진 관료적인 체계를 유지해 왔다. 또 해외 유 학이나 해외 취업을 원할 경우, 나라마다 서로 다른 대학 체제로, 학위, 경력, 학점 등을 인정받기 어 렵기 때문에 유럽 내 교류도 원활하지 못했다. 따라서 대학 발전과 관련 절실한 문제는 글로벌 시대 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대학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유럽연합은 대학 행정과 체계를 단순화하여 유 럽 대학을 학 ․ 석 ․ 박사 체제로 통일하고, 학점과 학위 취득, 경력 인정을 합리화하여 유럽 내에서 학생 과 학자의 교류를 촉진하며, 유럽 차원의 커리큘럼을 개발하여 EHEA를 확립하기로 하였다. 이는 대 학 행정의 전반적인 수정을 의미한다. 2) 교육수준 보장제도(Quality Assurance System, QA) 대학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 유럽연합은 모든 유럽 대학에 적용할 수 있는 엄격하고 투명한 공동 QA를 개발하기로 하였다. 이는 객관적이고 치밀한 평가를 통해 발견한 문제를 개선, 발전 시키고자 함이다. 한편, 각 대학이 대학 자체 QA를 설치하여 문제를 스스로 개선하고, EUA(European University Association)와 ENQA(European Network for Quality Assurance in Higher Education)와 같은 전문기관이 유럽 차원에서 합리적으로 QA를 실시할 수 있도록 대학 행정체제를 개편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대학은 정부나 기업의 지원을 받으며, 유럽집행위원회 가 이 모든 과정을 자문, 감독한다. FES-Information-Series 3) 학점제 통일(European Credit Transfer and Accumulation System, ECTS) 나라마다 다른 성적 평가제들을 유럽식 학점제인 ECTS로 통일하여, 유학 기간, 학점, 학위 인 정을 쉽게 하고 유학을 통한 손실을 없앤다. 세미나, 출석, 리포트, 시험, 강독, 개인 학습 등 대학 에서 취득한 성과물을 점수로 환산해 학생들의 점수를 쉽게 비교할 수 있게 한다. 또 ECTS는 인 적 자원을 개발하는 제도이다. ECTS는 점수 축적 시스템으로 시민들이 직업 경력을 위해 졸업 후 에도 평생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점수를 모을 수 있다. 유럽연합은 ECTS를 통해 유럽 내 노동 시장의 연계성을 더 강화하여 시민들이 노동시장에 신속하고 탄력성 있게 적응하도록 돕는다. 4) 연구 기관과 EHEA의 연계 EHEA는 박사를 늘려 대학교육의 상향적 발전을 추구하며, 박사 과정과 박사 이수 후 국가 간 공동 연구를 지원한다. 또 박사 학위자들은 EHEA의 정예 그룹으로서 학과를 초월한 혁신적인 연 구에 참여하여 세계 경제에 민첩하게 대응하고, 현장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한다. 5) EHEA의 인지도 향상 세계로 유럽 대학을 개방하여 다른 지역과 협력을 강화한다. 다자 간 네트워크를 기본으로 하는 협 력 관계를 통해 각 대학의 특성을 조합한 다양한 협력 프로젝트를 실행하며, 세계 각처의 인재들이 유 럽의 다양한 문화 자본과 유럽 대학의 특성을 경험할 수 있게 한다. EHEA의 건설은 유럽의 다양한 전통, 문화유산, 다른 언어와 사회적 배경을 고려하여, 그 특성 에 맞게 각 나라의 책임 아래 추진된다. 또 교육의 현대화 작업이 모든 회원국에서 성공적으로 실 현될 수 있도록, EUA, EURASHE(European Association of Institutions in Higher Education), ENQA 같은 대학교육 전문기관들이 유럽연합 각료이사회에 참여하여 자문 역할을 담당할 뿐 아 니라 QA의 공동 기준과 공동 처리 방식을 개발하고, 대학과 회원국 행정부에도 자문을 제공한다. 4. 유럽 내 대학 협력 에라스무스는 1987년에 시작한 유럽 내 대학교육 프로그램이다. 현재 3기(2000-2006년)가 진 행 중인 이 프로그램에는 31개 국가의 2000여 개 대학이 참여하고 있다. 에라스무스를 다음과 같 이 프로젝트 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유럽연합 역내 유학 지원 에라스무스의 주요 사업은 학생, 교수, 연구원의 해외 유학 지원이다. 제3기 유학 지원 예산은 FES-Information-Series 에라스무스의 총 예산 9억5천 유로의 79%인 약 7억5천 유로이다. 체류 기간은 대학생의 경우 3~12개월이며, 교수와 연구원은 1주일에서 6개월로 제한한다. 특히 대학생 유학은 전문대학, 일 반대학의 모든 학과를 대상으로 할 뿐 아니라 박사 과정도 포함하고 있다. 표 1에서 보면, 이 프로그램의 참여도는 매년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유럽집행위원회가 유 학 지원액의 규모를 늘렸음에도 지원자들이 급증함에 따라 한 명당 배분되는 지원액은 점차 줄 고 있다. 유럽집행위원회는 교수와 연구원에게 1997/98년 평균 842 유로, 1998/99년 763유로, 2003/04년 575유로를, 학생에게 매월 150 유로를 지원했다. 또 에라스무스 학생은 자국 대학에 학비를 납부하기 때문에 해당 대학에 대한 학비 부담 없이 무료 어학 과정과 대학의 다양한 프 로그램에 참가할 수 있다. 2) 조인트 스터디 유럽연합의 독창적 프로그램인 조인트 스터디는 세계 최고를 겨냥한 석사 과정이다. 유럽집행 위원회가 지원하는 이 프로그램은 최소 세 나라의 3개 대학으로 구성되며, 1~2년 과정이다. 원 칙적으로 학과의 구분을 두지 않으나, 자연 과학과 과학기술 분야에서 노동시장과 긴밀히 연결 되는 분야, 글로벌화 과정에서 발생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메커니즘, 다양한 문화 교류와 이해 관련 테마들이 주로 채택되었다. 공부를 성공적으로 마친 학생들은 해당 대학에서 이중 또는 삼 중의 학위를 받는다. 유럽연합은 조인트 스터디를 학사와 박사 과정으로까지 확대할 예정이다. 유럽집행위원회는 조인트 스터디를 위한 커리큘럼의 공동 개발과 대학 간 조직 분담, 입학, 학 점 평가, 학습 목표, 상호 학점 인정에 대한 공동 원칙과 기준도 마련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3) 유럽 모듈의 공동 개발 유럽집행위원회는 학생들이 강의를 통해 유럽적 동일성을 발견할 수 있는 커리큘럼 개 발을 지원한다. 각 나라의 2~3개 대학이 협력하는 이 프로젝트는 유럽인들의 공감대와 공동의식 을 높이기 위해 유럽의 역사, 사회, 문화, 정치, 경제구조를 소재로 한다. 그 예로 유럽연합의 발 전사, 유럽연합의 구조 또는 일정한 테마를 중심으로 한 유럽 국가들의 비교가 있다. 4) 전략 개발 대학과 연구 기관의 협력으로 교육의 미래를 위한 전략을 개발한다. 예를 들어, 대학 경영, QA 개발, 교수법 개선, 특수 대학 과정이나 강의 개발, 프로그램 개발 등이 있다. 이는유럽 국가들의 교 육제도를 비교, 연구함으로써 대학의 효율성과 질을 향상시키는 프로그램이다. FES-Information-Series 표 1.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으로 유학한 학생과 교수의 수 년도 학생수 체류 기간(개월) 교수(명) 1987 3,244 1988 9,914 1989 19,456 1990 27,906 1991 36,314 1992 51,694 1993 62,362 1994 73,407 6.4 1995 84,642 6.4 1996 79,874 6.3 1997 85,999 6.4 7,797 1998 97,601 6.7 10,605 1999 107,666 6.7 12,465 2000 111,092 6.7 14,356 2001 115,432 6.6 15,872 2002 123,957 6.6 16,934 2003 135,586 6.6 18,496 출처: 유럽집행위원회 통계 자료로 저자가 제작. http://europa.eu.int/comm/education/programmes/socrates/erasmus/stat_en.html 체류 기간(일) 6.9 6.8 6.7 6.4 5. 해외 협력 유럽 국가들은 오래 전부터 세계 여러 나라와 협력해 왔다. 그러나 단순한 교환 학생 형태였다. 그 동안 유럽은 에라스무스를 통해 많은 경험을 쌓았고 교육 협력을 위한 행정력도 향상시켰으며, 상당 수 대학들은 유학생을 위한 전문 담당 부서와 기숙사, 어학 수업 시설을 갖추었다. 또 볼로냐 프로세 스에 따라 해외 협력 프로그램도 다양해졌다. 두 대학 차원의 단순한 교환 학생 프로그램이 다양한 문화적, 학문적 교류를 위한 다자 간 교환학생의 형태로 발전했으며, 커리큘럼, QA와 조인트 프로그 FES-Information-Series 램 개발 등 프로젝트의 종류도 다양해 졌다. 유럽 대학의 해외 협력 전략을 크게 4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 선진국과 협력 미국, 호주, 캐나다, 일본, 뉴질랜드와의 협력을 들 수 있다. 미국과는 풀 브라이트 장학제도 와 유럽연합의 조인트스터디 프로그램이 병행해서 협력하고 있으며, 뉴질랜드, 호주, 일본과 는 현재 실험 단계에 있다. 이러한 협력의 목표는 먼저 학생들에게 언어 능력과 문화적 이해 능력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고, 나아가 고도로 발전된 인적 자원과 능력, 정보 를 상호 교환하는 데 있다. 유럽 세 나라의 3개 대학들과 파트너 국가의 다양한 지역에 있는 2~3개 대학이 협력한다. 유럽 학생은 파트너 국가의 2~3개 대학으로, 파트너 국가의 학생들 은 유럽의 2~3개 대학으로 파견된다. 성공적으로 공부를 마친 학생들은 이중 또는 삼중으로 학위를 받는다. 또 학생들은 자국 대학에 학비를 납부하기 때문에 파트너 대학에 대한 학비 부담이 없다. 2) 후진국 지원 유럽연합은 1990년 이후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과는 학문적 훈련 프로그램(심포지엄, 세미나 등)인 알파(ALFA)를, 러시아, 동유럽 국가, 중앙아시아, 지중해 남부 지역 국가들과는 템퍼스 (TEMPUS)를, 2002년부터 아시아 링크(AsiaLink)를 만들어 아시아 지역과 협력 프로그램을 실시 하고 있다. 또 2003년부터석 ․ 박사 장학 프로그램인 알반(Alβan)을 통해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과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제3세계 국가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 즉 자연 재해, 가난 극복, 사회 계층과 성 차별, 인권 침해, 정치적 갈등 등을 학문적 차원에서 지원하여 그들이 문제를 스스 로 해결하도록 도우는 한편, 세계 평화 유지를 위해 노력하고, 그들의 정치, 경제 파트너로서 한몫 하고자 한다. 인적 자원 개발을 목적으로 학생과 학자 파견을 중점으로 선진국과 협력하는 것에 비 해 후진국과는 프로젝트 중심으로 파트너 대학들과 네트워크를 만들어 당면 문제를 함께 해결하 려고 노력한다. 3) 유럽학 마스터 스터디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전 세계에 유럽 통합에 대한 지식을 보급하고 유럽학 전문가를 양성하는 것이다. 유럽연합의 지원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① 유럽학 마스터 스터디 유럽집행위원회는 석 ․ 박사의 미래 전문가들을 위해 유럽통합 과정을 강의하는 5개 주요 대학 을 지원한다. College of Europe(벨기에 브뤼께, 폴란드 바르샤바), European University FES-Information-Series Institute(이탈리아 플로렌스), European Institute of Public Administration(네덜란드 마스트리히 트), Europ ä ische Rechtsakademie Trier(독일 트리어), Centre inter- national de Formation europ é enne(프랑스 니스)가 여기에 속한다. ② 자료 센터와 유럽학 강의 유럽연합은 모든 대학이 유럽법과 유럽 통합에 관련한 자료를 이용할 수 있도록 서적, 강좌, 유 럽학 교수, 대학, 전문 기관들을 서로 연계시킨다. 또 유럽학 강의를 개최할 수 있도록 재정을 지 원한다. 현재 전 세계 55개 국가의 약 750개 대학에서 유럽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서울대학교가 유럽집행위원회의 지원을 받고 있다. ③ 유럽학회 지원 유럽집행위원회는 전 세계적으로 유럽학 교수와 연구자로 구성된 유럽학회(European Community Studies Associations) 설립을 지원한다. 또 유럽학 교수와 전문가들이 네트워크를 형 성하여 연구 업적들을 서로 논의하도록 지원하며, 인터넷 사이트와 각국의 언어로 출판되는 유럽 학회 소식지 출판을 후원한다. 현재 전 세계 52개 유럽학회에 7,000명의 전문가들이 참가하고 있 다. 한국EU학회도 여기에 등록되어 있다(www.keusa.or.kr). 4) 조인트 스터디 2003년 12월, 유럽의회와 유럽연합 각료이사회는 조인트 스터디에 외국인 장학생을 선발하기 로 결정하고, 제1기(2004-2008년) 투자 예산으로 2억3천 유로를 책정하였다. 이 장학 프로그램 은 에라스무스 문두스라 불리며, 2~3개 유럽 대학이 협력하여 세계 각처의 인재들에게 유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유럽 대학의 탁월성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외국 유학생들의 다양한 학문적 시각을 통해 EHEA 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또 유럽 대 학들은 조인트 스터디를 실행하여 얻은 경험을 일반 대학 교육에 정착시켜야 할 것이다. 유럽 집행위원회는 조인트 스터디에 참여하는 교수와 학생에게 체류, 이동, 학습, 연구 활동 등에 관 련한 모든 비용을 제공한다. 학생들은 3개 유럽 대학 가운데 적어도 2개 대학에 일정 기간 체 류해야 하며, 총학점의 최소 30%를 각 대학에서 취득해야 한다. 2005년 유럽집행위원회는 에라스무스 문두스에 특수 카테고리를 추가하여 1억 유로를 더 투자 하기로 하였다. 이 카테고리에는 일본과 한국을 제외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적용된다. 즉 아시 아 20개국의 장학생을 추가 지원하기 위해 2005년부터 3년간 5천7백만 유로의 예산을 책정하 고, 약 1600명을 선발할 예정이다. 한편, 2005년부터 3년간 9백만 유로를 별도로 투자하여 중국 FES-Information-Series 과 실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여기에 중국 학생 200명이 추가 참여한다. 표 2에는 유럽집행위원회가 머릿수대로 지불한 장학금을 집계하였다. 2004년과 2005년 장학 혜택 을 받은 한국 학생과 학자가 동일 인물일 경우, 총 4명의 장학생이 선발됨으로써 조인트 스터디에 대한 한국의 참여도는 결코 높지 않다. 표 2. 에라스무스 문두스에 참가한 외국 학생과 학자의 수 일반 카테고리 특수 카테고리 (한국과 일본 제외) 동남아시아 국가 중국 2004 학생 140(명) 52(개국) 한국학생 3(명)- (년) 학자 28 16 한국학자 1- 2005 학생 808 (년) 학자 133 90 한국학생 3 353(명) 14(개국) 21(명) 35 한국학자 1-- 출처: 유럽집행위원회 통계자료로 저자가 제작. http://europa.eu.int/comm/education/programmes/mundus/index_en.html 유럽연합과 한국의 협력 관계는 아직 미미하다. 그러나 2006년 1월 유럽연합은 2007-2013년까 지 대외 정책 전략을 발표하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교육, 과학 기술과 산업 분야에서 한국과의 협 력을 강화하고 한국에서 유럽연합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것을 표명하였다. 따라서 한국과 유럽 연합의 관계는 더 긴밀하게 발전할 전망이다. 6. 맺음말 글로벌화로 인해, 우리사회는 지식을 토대로 한 고도 산업사회로의 전환에 직면해 있다. 사회 패러다임의 변화로 인적 자원과 첨단 과학기술 개발이 사회 발전에 더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게 되었다. 현대는 어느 때 보다도 교육이 사회 발전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우수한 인재가 필요한 시대이다. 글로벌화로 지역 간 협력도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유럽연합, 아펙, 아셈 의 탄생이 그 예다. 지역 간 교육 협력 정책도 역사상 지금만큼 활발했던 적은 없다. 유럽연합은 2000년 리스본 전략을 통해 경제성장을 지속하고 새로운 직업을 창출할 수 있는 사 회로의 구조 개혁을 선언하였고, 학교 교육과 직업 교육 등 교육 전반을 재구성하기로 하였다. 특 히 볼로냐 선언을 통해 유럽 대학의 국제 경쟁력을 강화할 것을 결의하고, 이를 위한 4가지 기본 FES-Information-Series 전략을 세웠다. 그 전략으로는, 첫째, 유럽 대학교육의 질을 본질적으로 향상시키고, 둘째, 사회고 용정책과 교육정책의 연계성을 높이는 것이다. 셋째, 평생 교육을 통해 인적 자본을 꾸준히 발전 시킨다. 넷째, 세계 대학들과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유럽집행위원회 대표, 대학교육 전문기관 들, 각 회원국 교육부 장관들은 2년 마다 유럽연합 각료이사회를 개최하고, 볼로냐 선언을 실현하 고자 노력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유럽만의 고유한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세계 첨단의 기술과 지식을 갖추고 세계 를 주도할 수 있는 유럽이 되고자 한다. 유럽인들의 이러한 꿈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기 에, 그들은 힘겹고 어렵지만 미래를 향한 근본적인 행보를 하고 있다. 독일의 학교 개혁 이 병 준, 부산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2001년 6월 󰠲󰠲󰠲󰠲󰠲󰠲󰠲󰠲󰠲󰠲󰠲󰠲󰠲󰠲󰠲󰠲󰠲󰠲󰠲󰠲󰠲󰠲󰠲󰠲󰠲󰠲󰠲󰠲󰠲󰠲󰠲󰠲󰠲󰠲󰠲󰠲󰠲󰠲󰠲󰠲󰠲󰠲󰠲󰠲󰠲󰠲󰠲󰠲󰠲󰠲󰠲󰠲󰠲󰠲󰠲󰠲󰠲󰠲󰠲󰠲󰠲󰠲󰠲󰠲󰠲󰠲󰠲󰠲󰠲󰠲󰠲󰠲󰠲󰠲󰠲󰠲󰠲󰠲󰠲 다른 선진국들과는 달리 오랫동안 독자적인 교육 체제를 구축해왔던 독일은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새 로운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독일의 학교 개혁은 내부와 외국의 변화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그 중심에는 1990년도 중반에 발간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교육위원회의 보고서가 있다. 독일 학교 개혁의 핵심은 변화하는 사회에 맞춰 학교의 질을 어떻게 하면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가에 있다. 이러한 학교 개혁 의 내용은 첫째, 학교 운영, 인사 관리 및 예산 활용의 독자적인 권한을 개별 학교로 이양하고, 둘째, 학 교를 학습 조직으로 파악하여 지속적인 교육의 질의 혁신을 가져오게 하며, 셋째, 학교 및 교육프로그램 의 평가를 통해서 학교의 질을 지속적으로 개선하도록 하고 있다. 󰠲󰠲󰠲󰠲󰠲󰠲󰠲󰠲󰠲󰠲󰠲󰠲󰠲󰠲󰠲󰠲󰠲󰠲󰠲󰠲󰠲󰠲󰠲󰠲󰠲󰠲󰠲󰠲󰠲󰠲󰠲󰠲󰠲󰠲󰠲󰠲󰠲󰠲󰠲󰠲󰠲󰠲󰠲󰠲󰠲󰠲󰠲󰠲󰠲󰠲󰠲󰠲󰠲󰠲󰠲󰠲󰠲󰠲󰠲󰠲󰠲󰠲󰠲󰠲󰠲󰠲󰠲󰠲󰠲󰠲󰠲󰠲󰠲󰠲󰠲󰠲󰠲󰠲󰠲 FES-Information-Series 1. 독일 학교 개혁의 최근 동향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독일에서는 학교 개혁의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 이러한 학교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는 한편으로는 세계 선두를 달리고 있는 독일 경제를 학교 개혁을 통해서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경제적 논리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 통일을 계기로 새롭게 독일 전체의 교육 제도와 내용을 혁신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교육적 논리에 따라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학교 개혁은 정치계와 경제계의 효과 성 과 유연성 을 강조하는 경제적 논리로써 교육 구조 개편뿐만 아니라 임금체제 구조의 개선 등 중요한 사 회체제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시도하려고 하고 있다. 독일에서 학교 개혁이 요청되는 또 다른 배경에는 유럽공동체의 출범이라는 정치적 및 경제적 환경의 커 다란 변화가 자리하고 있다. 유럽연합(EU)에 속해 있는 모든 시민들이 앞으로는 유럽연합의 어느 나라에서 나 일자리를 가질 수 있게 됨에 따라, 노동시장 구조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교육체제도 주위의 환경 변화에 적응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장이 점차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독일은 특히 다른 유럽공동체 국 가들에 비해 중등 교육과 대학 교육의 수학 기간이 길어 노동시장에서 자국 인력들이 장차 상당한 불이익 을 당하게 되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으며, 또한 거의 모든 교육체제가 국공립화되어 있어 각 교육 기관들이 다양하고도 급격한 사회 변동에 적응하고 혁신하는 순발력이 떨어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독일의 학교 개혁 작업은 다양성, 자율성, 그리고 교육 내용의 개선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주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공통된 교육적 쟁점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첫째, 독일 통일과 유럽통합에 따라 교육의 수학 연한을 축소해 나간다. OECD 회원국 대부분이 고등학교 졸업까지를 12학년으로 규정하고 있으므로 학력 수준의 질 저하가 없는 것을 전제로 인문계고등학교(김나지 움) 졸업까지를 13년에서 12년으로 단축한다. 이와 아울러 현재 일반화되어 있는 장기간의 대학 수학 기간 (평균 6-7년)을 권장 학기제의 적극적인 시행으로 4-5년으로 단축시킨다. 둘째, 학교 운영에서는 단위 학교에 보다 확대된 재량권과 자율성을 부여한다. 교육 과정의 틀을 기초만 제시하고 가능한 한 단위 학교의 선택 및 재량, 그리고 교육 과정의 개발의 폭을 넓힌다. 동시에 학부모와 학생들이 스스로 학교 운영에 적극 참여하는 과정 중심의 민주주의 방식을 강화한다. 셋째, 남녀 평등, 환경 문제, 정보화 문제, 문화적 다양성 등 이른바 시대적 요청이라고 할 수 있는 새로 운 문명사적 변화와 관련된 주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수용한다. 넷째, 다양한 중등 교육체제, 즉 학교 유형의 구별화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교육의 목적과 내용을 점차 통 FES-Information-Series 합하고 학교 유형보다는 각 학령에 따르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다섯째, 학교를 지식 전달의 장소로 뿐만 아니라 인성 교육을 위한 장소와 체험의 장소로 확대하여 학교 의 주변 환경 변화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학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화해 간다. 또한, 학교가 지역 사회의 사회 문화적인 중심 공간이 될 수 있도록 학교의 개방을 촉진한다. 지역 사회의 사회적, 경제적 지원을 끌어내기 위하여 지역 학교와 지역의 기초단체 그리고 기업들과의 긴밀한 관계가 요구된다. 2. 교육의 미래- 미래의 학교 독일에서의 학교 개혁에 대한 최근의 논의에는 1995년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주의 교육위원회에서 발간한 교육의 미래- 미래의 학교(Zukunft der Bildung- Schule der Zukunft) 라는 보고서가 그 중심에 있다. 교 육위원회는 독일 학교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 변동의 징후를 생활 양식과 사회적 관계의 다양화, 새로운 기 술과 미디어를 통한 세계의 변화, 생태학적 문제, 인구 변화와 이주에 대한 영향, 생활 관계의 세계화, 가치 와 지향점의 변화 등 여섯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교육위원회는 여전히 전통적인 틀에 매어 있는 현재의 독 일 학교가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질적인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고 보고 있다. 교육위원회는 변화 하는 시대의 학교 교육의 모습과 학교 교육이 추구하는 목적, 그리고 공적 교육의 책임과 통제에 있어 필요 로 하는 변화들에 주목하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권고를 하고 있다. 첫째, 학교의 질 관리를 위하여 개별 학교가 더 많은 권한을 가지고 그에 대한 책무성을 다하여야 하며, 학교의 질 관리는 학교와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내 ․ 외부 평가를 통해 점진적으로 개선한다. 둘째, 개별 학교의 권한은 인사권과 예산 운영권의 책임과 효율성을 확보하는 데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셋째, 지역에서의 학교들과 그들의 프로그램들이 좀 더 연계되고 서로 전이 가능하도록 교육 프로그램과 교육 시스템의 네트워크를 구축하여야 할 것이다. 넷째, 교육 연한에 대해서는 개인들의 관심과 능력에 따라 유연성을 주는 형태로 변화되어야 한다. 3. 학교 개혁의 중점 과제 (1) 학교 개혁 프로젝트 학교와 회사 현재 독일 학교의 개혁 특성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서 52개의 학교가 참여하였 FES-Information-Series 던 학교와 회사 프로젝트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1997년과 1998년 독일의 베르텔스만 재단과 노르트라 인-베스트팔렌 주정부의 교육부는 공동으로 학교와 회사 프로젝트를 레버쿠젠시와 헤어포드시에서 수행했 다. 두 도시에서 52개의 모든 종류의 학교들(레버쿠젠시에서는 15개, 헤어포드시에서는 37개의 학교가 참여 하였음)과 관공서, 학교 외 기관들이 지역 교육의 활성화를 위해 참여하였다.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첫째, 학교의 질적인 측면에서의 자기 통제를 통해서 지역의 교육을 활성화시키고 둘째, 학교 내에서의 교육 사업을 촉진하고 학교 내부의 협력체제와 지도력을 개선하며 셋째, 학교와 학교 주변 환경과의 협력 체제를 개선하며 넷째, 지역 자치구역 내에서의 적절한 의사소통의 구조를 만들어내고 학교를 지원하는 체제를 구축하며 교육 재정을 개선하고 학교 프로그램의 협력체제를 이루며 학교체제의 개 방을 가져오는 데 있다. 이러한 학교의 질 관리프로젝트는 두 가지 측면에서 다른 교육 개혁 프로젝트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첫째, 이 프로젝트는 일정 기간 후에 끝나는 사업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개별 학교와 지역 단위의 교육 문제 해결 과정을 통해 교육 개념과 수업 및 행위 전략 등을 끊임없이 수정해 가는 시작의 프로젝트이다. 이 프 로젝트를 통해 앞으로 학교의 발전을 가져오게 될 마스터플랜이 도출되며, 그에 따라 다양한 후속 작업이 이루어지게 된다. 둘째로 이 프로젝트는 학교 교육의 질을 개선하려는 밑으로부터 의 시도이다. 따라서 학 교 지휘 계통이나 외부로부터의 강제가 아닌 학교구성원들의 문제 의식에서 도출되는 프로젝트이다. 이 프 로젝트에서 학교 구성원들은 학교라는 하나의 학습 조직을 구성하는 구성원들로 파악되며 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학교의 질을 관리해 나간다. 이 프로젝트는, 모든 학교는 체계적인 질 관리와 개발의 과제를 가지고 있다는 조직 진단에서 출발한다. 이 프로젝트의 특성은 이미 정책적으로 만들어진 어떠한 교육적 해결책을 현장에 그냥 적용하는 것이 아니 라 학교가 당면한 실제 문제에 대한 분석을 통해 앞으로의 학교 발전 과제를 도출해 내는 것이다. 학교 발 전 경영 프로젝트로 이해될 수 있는 학교와 회사 프로젝트는 2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 학교 내부 의 조직이 이전과는 달리 새로이 재구성되어야 할 필요가 생겼다. 학교를 하나의 학습하는 조직으로 파악할 때 학교는 두 가지 영역으로 나뉜다. 우선 학교를 수업 개발의 측면에서 관찰해야 하며, 다른 하나는 학교 에서의 체계적인 조직 개발의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 프로젝트에 따라 각 학교에서는 세 명에서 여덟 명이 참여하는 통제 집단들이 형성되었고 통제 집단들은 아래와 같은 다섯 가지 행위 영역을 그들의 실천 행위의 대상으로 규정하였다. - 교육 및 학교의 비전 수립 FES-Information-Series - 학교 발전 과정의 계획과 구조화 - 정보 공유 - 학교 내 팀(Team) 개발 - 회의 진행과 프레젠테이션 이 프로젝트에서 강조되었던 사항은 세 가지이다. 첫째, 학교의 수업을 담당해야 할 교사팀이 지속적으로 능력을 개발하여 자질을 갖추도록 해야 하며, 둘째, 학교의 핵심은 수업이며, 수업의 질을 지속적으로 개발 하는 것이 중요하고, 셋째, 학교 조직 개선의 핵심은 학교장에 있으며, 이들을 위한 지속적인 능력 개발 세 미나를 개최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 프로젝트의 결과로 레버쿠젠시와 헤어포드시의 학교에서는 다 음과 같은 사항들이 추진되었다. - 개별 학교와 학교 외 교육 기관과의 공동 작업, 예를 들어 몬테소리 초등학교와 레버쿠젠시의 시민대학 의 몬테소리 교사 양성 과정의 공동 수업 교재 개발 - 레버쿠젠시 학교와 학교 외 기관(예를 들면, 청소년 상담실)과의 협력 네트워크 구축 - 헤어포드시 학교들은 기업체와 개별적인 파트너십을 가지며, 교사와 학생들의 교수 계획은 파트너 기업 체의 생산 및 마케팅 과정과 연계를 가지게 한다. - 지역 단위의 공적인 교육 문제 포럼을 운영한다. - 지역의 아동들과 청소년들의 학습 기회를 개선하기 위하여 지역 사무실을 개설한다. (2) 학교 평가 독일의 교육 개혁에서 교육 평가, 특히 학교 프로그램에 대한 평가는 핵심적인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강 의와 연구에 대한 평가를 지향하는 대학 교육과는 달리 중등 교육의 평가 문제는 현재 두 가지 관점에서 활발히 이야기되고 있다. 첫째, 어떻게 하면 개별 학교들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구상들을 점점 더 기업에서 논의되고 있는 조직개발 의 개념에 도움을 얻어 학교 발전과정을 위한 기초로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학교를 학습하는 조직(lernende Organization) 으로 이해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것이다. 둘째, 개별 학교에게 더 많은 자율성을 부여하면서 학교 교육의 질을 향상시키려고 할 때 국가는 앞으로 학교 감독 기관에게 어디까지 권한을 위임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교육 개혁 보고서는 지금까지 학교 감독 관청이 가끔 수업 평가를 했던 FES-Information-Series 것 외에는 학교의 책무성에 대한 요구가 전혀 없이 안이했던 학교 구조를 비판하면서 학교 교육의 질을 개 선하고 학교를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학교 평가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학교 발전 계획의 핵심은 학교 및 교육프로그램의 평가에 있다. 개별 학교들은 교육적 프로필을 스스로 구성할 수 있 게끔 자율성을 법적으로 보장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학교 평가는 평가 문제 및 기준을 명료히 하고 이에 준 해 평가 자료를 수집, 분석, 진단하여 평가 결과를 피드백 시키는 과정을 따르며, 이러한 평가 과정을 통하 여 각 학교는 학습하는 조직 으로 발전한다. 학교 프로그램을 만들게 하고 성취 여부를 평가하는 일은 각 학교를 좀 더 잘 통제하려고 하거나 학교 감독청의 업무를 단순히 간편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각 학교들이 설정한 교육적 과업을 좀 더 효과적으로 달성하게끔 도와주려고 하는 학교 발전의 취지에서 실시 되고 있다. 이미 독일에서는 대부분의 학교들이 학교 평가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하 여 학교들은 개선해야 할 사항들이 무엇인지, 어떠한 시스템을 필요로 하는지를 알아가고 있다. 학교 평가는 대체로 학교의 자체 평가, 외부 평가, 그리고 공적인 알림의 세 가지 구성 요소로 이루어진 다. 학교 내부의 자체 평가는 학교 내에서 구성된 평가 집단이 실시하는데 이는 외부 평가의 기초가 되는 것으로 그 주요 평가 대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교육 사업의 질 - 학교 조직 및 자원 사용에 대한 결정과 인력 배치의 효율성 - 국가가 설정하는 기본적인 틀의 기능성과 그 효율성 외부 평가는 전문가로 불리는 평가 집단이 장기간 비판적인 관찰을 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외부평가에는 대화, 인터뷰, 집단 토의, 자료에 대한 분석과 해석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학교 감독 기관은 학교 평가의 업무를 전문 기관에게 넘겨주어 부담을 덜게 된다. 현재 헤센주는 학교 평가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척도를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 어느 정도의 학생 비율과 규모로 학교가 수업 교과나 수업 이외의 교과에서 자신이 설정한 교육 의 목적과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는가? 둘째, 모든 학교 관계자들(특히, 교사, 학생, 학부모 등)이 학교에 대하여 긍정적인 차원의 정체감을 가지 고 있는가? 셋째, 학교 내부의 규정들이 학교 관계자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공동 작업을 촉진 또는 방해하고 있는가? 넷째, 학교의 업무 수행을 위한 개별적인 사안에서 어떤 낭비와 수확이 있는가? 어떠한 기준으로 이것을 검토할 것인가? FES-Information-Series 학교에 관한 내 ․ 외부 평가를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참여자들의 의사소통 구조가 신뢰를 바탕으로 원 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각 학교는 내부 및 외부 평가의 결과를 학교 감독 기관에게 의무적으로 보고할 필 요는 없고, 단지 학교 감독 기관과 상의하여 어떤 범위 하에서, 또 어떤 형태로 평가 결과를 공개할 것인지 를, 아니면 아예 공개하지 않을지를 합의하면 된다. 헤센주 당국은 모든 헤센주 학교에 대한 평가 결과를 모아 교육 제도의 종합적 발전 계획에 참고하려 한다. 4. 맺음말 최근 독일 교육 개혁의 흐름, 특히 학교 발전 경영 모델과 학교 평가 모델의 도입은 우리나라에게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 우리나라도 1991년에 지방자치 교육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후 10년 동안 학교 운영위 원회 구성과 더불어 개별 학교의 학교 자치에 이전보다 많은 재량권이 주어져 왔다. 아마도 학교 자치를 통 한 개별 학교의 발전 모델은 세계적인 추세인 듯하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독일의 학교 개혁에서 받을 수 있 는 시사점은 독일의 학교는 기업 경영 진단 모델을 학교에 맞게끔 재구성하여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 근 독일의 학교 개혁 논의는 학교를 학습하는 조직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새롭다. 이러한 시도는 일찍이 기업체에서 있어왔던 것으로 기업 조직 개발 상담의 모델이 학교에까지 확장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러 한 시도로 인해 학교 조직이 발전하고 수업 전략이 개선된다고 본다면 이러한 방법의 적용은 매우 의미 있 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아울러 학교가 자기 조직을 스스로 평가해 보게 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무분 별한 외부 평가로 학교 개혁이 주도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파행적으로 실행되는 우리의 상황과 비교해볼 때, 평가 목적이 통제가 아니라 자기 수행 능력의 신장이라고 하는 것이 뚜렷해지고, 또한 평가를 통해 학교 조 직이 지속적으로 개선될 수 있도록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독일의 직업 교육 박 덕 규, 한국교육개발원 교육정보연구 부장 1999년 5월 󰠲󰠲󰠲󰠲󰠲󰠲󰠲󰠲󰠲󰠲󰠲󰠲󰠲󰠲󰠲󰠲󰠲󰠲󰠲󰠲󰠲󰠲󰠲󰠲󰠲󰠲󰠲󰠲󰠲󰠲󰠲󰠲󰠲󰠲󰠲󰠲󰠲󰠲󰠲󰠲󰠲󰠲󰠲󰠲󰠲󰠲󰠲󰠲󰠲󰠲󰠲󰠲󰠲󰠲󰠲󰠲󰠲󰠲󰠲󰠲󰠲󰠲󰠲󰠲󰠲󰠲󰠲󰠲󰠲󰠲󰠲󰠲󰠲󰠲󰠲󰠲󰠲󰠲󰠲 1. 독일의 청소년들은 9학년이나 10학년을 마친 후 상급 학교로 진학할지, 아니면 직업 교육 을 선택할지를 결정한다. 직업 교육 과정을 마친다는 것은 미래의 직업인으로서의 삶에 큰 의미를 갖는다. 직업 교육 과정은 직업학교와 생산 현장에서 받는 2원제(Duales System)이 다. 2. 독일의 2원제 직업 교육 제도는 독일이 교육 선진국임을 상징하는 제도이며, 교육 기회의 균등 실현과 장인 정신을 바탕으로 학교 교육이 곧 생애의 삶을 준비하는 과정임을 의미한 다. 3. 직업 교육은 산업 현장의 생산 체제와 일치해야 하며, 변화하는 기술에 따라 적응해야 하 는 미래 지향적 생산 능력을 갖추도록 한다. 따라서 교육 내용, 방법, 과정, 시험 등은 항상 개선되어야 한다. 4. 현장 교육을 담당하는 기업은 청소년들에게 충분한 훈련장을 제공해야 하는데, 경기 침체 등으로 직업 교육 수급 정책에 차질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국가, 자치단체 또는 사회 기관들이 기업을 대신하여 현장 실습을 위한 교육장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산업 기반 이 취약한 구동독 지역에서는 2원제 직업 교육을 위하여 불가피하게 국가가 실습장을 제공 하고 있다. 󰠲󰠲󰠲󰠲󰠲󰠲󰠲󰠲󰠲󰠲󰠲󰠲󰠲󰠲󰠲󰠲󰠲󰠲󰠲󰠲󰠲󰠲󰠲󰠲󰠲󰠲󰠲󰠲󰠲󰠲󰠲󰠲󰠲󰠲󰠲󰠲󰠲󰠲󰠲󰠲󰠲󰠲󰠲󰠲󰠲󰠲󰠲󰠲󰠲󰠲󰠲󰠲󰠲󰠲󰠲󰠲󰠲󰠲󰠲󰠲󰠲󰠲󰠲󰠲󰠲󰠲󰠲󰠲󰠲󰠲󰠲󰠲󰠲󰠲󰠲󰠲󰠲󰠲󰠲 직업 교육의 특징 FES-Information-Series 독일의 청소년들은 9학년이나 10학년을 마친 후 상급 학교로 진학할지 아니면 먼저 직업 자 격증을 취득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현재 독일에는 국가가 인정하는 직업 관련 자격증이 약 380 개 있다. 국가에서 인정하는 직업 과정을 이수하려는 학생은 실습장을 제공하는 기업과 계약을 맺는다. 교육은 기업과 직업 교육 학교에서 동시에 행해지는‘이원화 제도’를 통해 이루어진 다. 직업 교육은 의무적으로 받아야 한다. 현재 독일에서는 직업 교육을 받으려는 청소년들을 위한 실습 자리가 많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 점은 정책의 문제점으로 대두되고 있다. 경기가 좋으면 기업들이 실습 자리를 많이 제공하 지만, 경기가 침체되면 그 수를 줄이게 된다. 직업 교육을 위한 실습 자리가 부족한 경우, 실 습을 원하는 모든 청소년들이 실습 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민간 기업이나 자치단체 등은 실습 자리 제공에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권고를 받는다. 직업 교육 제도 독일의 직업 교육은 직업학교와 생산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2원제이다. 직업 교육은 직업 현 장과 일치해야 한다는 장인 정신의 전통에 따라 실습이 중요한 직업 교육 과정과 내용이 되며, 평생 교육 차원에서 상급 학교에 진학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인문 교육을 직업학교에서 담당 하는 것이다. 이렇게 직업 교육이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지므로 이를 2원제라 한다. 직업 교육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① 10학년(또는 9학년)을 졸업하지 못하여 직업학교에 입학하지 못하는 청소년은 직업 준비 교육을 받는 1년 과정의 전일제 직업학교. 이 과정을 마치면 2원제 직업 교육 과정에 들 어갈 수 있다. ② 10학년을 졸업했으나 실습 계약을 체결하지 못한 청소년들을 위해 실습을 포함한 직업 기초 교육 과정 ③ 2원제 직업 교육 과정. ②와 ③은 자격시험에 합격하여 졸업한다. 직업 교육은 크게 세 가지 영역의 교육 과정에서 실행한다. ① 기술계 영역 ② 경제, 행정, 영양 및 가정 경제 2 ③ 농업 그러나 한 영역의 과정에서 다른 과정을 운영할 수 있다. FES-Information-Series 이론 교육은 직업학교에서 1주에 1-2일, 실습은 실습장에서 주당 3-4일간 배운다. 이를 정시 제 과정(파트타임)이라 한다. 대기업체의 직업 교육은 학교와 실습장이 한 곳에 있으며, 소수의 실습생만을 교육시키는 중소기업체는 지역별로 운영되는 실습 기관 및 직업학교에 보내게 된 다. 이러한 제도를‘기업외 교육 과정’이라 한다. 교육 기간은 직업의 종류에 따라서 2년에서 3년 반으로 다양하며, 교육생의 교육비는 일체 무료이다. 직업학교는 국가가 책임지며, 실습 경비는 기업체가 부담한다. 기업외 교육 과정은 자치단체가 부담한다. 2원제 직업 교육 주유사부터 고층 건물 유리창 청소부까지 현존하는 모든 직업과 새로 필요로 하는 직업을 모두 국가 인정 직업으로 정하여 청소년들을 학교에서 가르쳐 사회에 배출하는 독일은 인간 교육을 중시하는 나라이다. 또한, 생산 인력의 자질을 향상시켜 고도의 국가 경쟁력을 유지· 발전시키고, 개인적으로는 자아실현과 여가 활용을 만끽할 수 있으므로 국민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이다. 2원제 직업 교육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ƒ 동일 연령층 청소년의 약 60% 가 2원제 직업 교육을 받고 있어 정규 학교의 진학에 따른 교육 재정의 낭비를 막고, 양질의 생산 인력 구조와 노동 시장을 건전하게 육성·유지할 수 있다. ƒ 청소년들이 지니게 되는 일차 직업 교육은 평생교육 차원에서 계속 교육의 기회를 보장하 는 제2의 대학 진학의 길을 보장하고 있다. 직업 교육을 받은 후 자신이 원하는 시기에 언 제든지 상급 학교에 진학할 수 있도록 직업학교의 교육 과정을 정규 학교의 교육 과정과 맞춰가고 있다. 또한 직업 교육은 직업적 기능뿐만 아니라 인격 형성도 중요시한다. ƒ 현장에서 직접 생산 활동에 참여하는 교육을 시킴으로써 교육비용이 절감되며, 청소년들의 학습 동기를 극대화 시킬 수 있다. 정규 학교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과목을 배우게 하여 학교 공부에 대한 거부감을 갖게 된 청소년들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기 보다는, 청소년 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한 가지 분야만 전문적으로 학습하게 되므로 보람과 흥미를 느낄 수 있다. 자신이 평생 지녀야 하는 직업이므로 애착심이 생기며, 한 가지 직업에서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으므로 누구나 만족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ƒ 변화하는 과학 기술과 생산 방법에 적응, 신제품 개발과 불량품 생산 예방, 인간의 삶의 실 제를 배우는 2원제 직업 교육 제도는 청소년들이 희망을 갖게 하며, 국가 산업의 발달과 3 FES-Information-Series 번영을 보장하는 유일한 교육 과정이다.‘made in Germany’는 바로 2원제 직업 교육의 결과이다. ƒ 그동안 학교에서 배운 다양한 교육 내용이 직업 세계에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비교 할 수 있고, 자신에게 필요한 새로운 지식과 갖추어야 할 자질, 자신의 소질과 능력의 한계 를 알게 되어 참된 민주 시민으로서 인격을 갖추게 되므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산 교육 과정이다. ƒ 실제 생산에 대한 교육 과정에서 근로에 대한 가치를 바르게 배울 수 있어 청소년들의 다 양한 인격 발달을 도모할 수 있다. 직업 교육 담당자 독일의 전통적인 장인 정신에 입각한 직업 교육은 직업학교에서는 교사에게 이론을 배우고, 직업 능력은 현장에서 직업적 경력과 능력을 쌓은 장인에게서 배운다. 이를 직업 교육 실습 담 당자라 한다. 직업학교 교사는 대학에서 양성한다. 중등 II 단계 교사 또는 직업학교 교사 자격증을 소지 해야 하는데, 대학에서 전공 교과와 교육학을 공부하고 1차 국가 교사 자격시험에 합격한 후, 2년간의 인턴 과정인 지역교사 양성 세미나 과정을 거쳐 2차 국가 교사자격 시험에 합격해야 정교사 자격증을 받는다. 실습 담당자는 교사가 아니며, 5년 이상의 직업 경력과 실적을 쌓고, 상급 직업 전문학교에 서 마이스터 자격증을 받은 자 중에서 직업 교육 담당 적성 검사에서 합격해야 한다. 마이스터 과정에서는 직업 교육학을 배운다. 직업 교육 지원 체제 독일의 2원제 직업 교육 제도는 국가, 경제 단체, 교육부 및 피고용자 등 관련자들의 이익과 필요성에 따라 모든 차원에서 계획, 실행 및 계속 발전을 위하여 협력하고 있다. 특히, 개인의 행복한 삶과 기업체의 이익 및 국가 경제 발전이라는 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국가의 정책과 관 련 당사자들이 부분적인 이익을 버리고 마찰을 피하기 위한 해결 방안을 찾아 노력한다. 그 결 과는 국가 전체를 위한 것이며 노동 시장을 건전하게 육성하는 것이다. 연방정부, 주, 지역 및 기업체의 2원제 직업교육에 대한 공동 노력은 모든 차원에서 합리적 으로 조직, 운영되고 있다. 연방정부 차원에서는 교육부 장관이 기본 및 주관 업무를 관장한 4 FES-Information-Series 다. 다른 부서의 장관은 교육부 장관의 방안에 따른다. 다른 부의 장관이 규정이 필요할 때에 는 교육부 장관의 이해하에 제정된다. 2원제 직업 교육의 기업 내 교육에 대한 법적 기초는 1969년에 제정된 연방직업교육법이다. 수공업 분야를 위한 ‘ 연방수공업규정 ’ 이 별도로 제정되어 있다. 직업 교육의 계획과 운영에 관한 ‘ 연방직업교육촉진법 ’ 이 있고, 산업 현장에서 교육 받는 청소년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 청소년근로보호법 ” 을 적용하고 있다.  주 차원에서는 주 정부의 2원제 직업 교육 운영을 위한 ‘ 직업교육 주위원회 ’ 가 결성되어 자 문한다. 이 위원회는 경제 단체, 노동조합 및 주 정부의 대표로 구성된다. 지역 차원에서는 경제 자치단체와 상설 기구로 조직되어 운영된다. 상설 단체로는 공법상의 상공회의소, 의료 협회, 수공업 협회, 변호사 협회 등이 있고, 이 협회들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지역의 직업 교육을 감독, 자문, 통제한다. 특히, 직업 교육 계약 체결 상황을 점검하며, ‘국가인정직업자격시험에관한규정’을 제정하여 시험을 관장한다. 각 상설 기구에는 이러한 업무를 위하여 분과 위원회가 조직, 운영된다. 이 위원회는 경제 단체, 노동조합, 직업학교연 합, 각종 회의소 등의 추천을 받은 기업체의 대표, 직업학교의 전문가들로 구성된다. 기업체의 교육 부서에는 피고용자 대표 또는 노동자 평의회 대표가 상주하며, 교육 담당자의 임용, 교육 프로그램의 기획과 실행을 주관한다. 2원제 직업 교육의 문제점 독일의 2원제 직업 교육 제도는 국가적 차원에서 존재하며, 계속 발전시키려는 노력에도 불구 하고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ƒ 직업 교육을 받으려는 학생 수가 감소하고 있다. 1990년 이후 수공업 분야는 43%, 제조업 분야는 24%, 서비스업 분야는 34%의 지원자 감소 현상이 나타났다. 이 원인은 직업 교육 을 받게 되는 보통 학교의 학생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인구학적으로 출생률이 저하되었고, 기초 학교 4학년을 이수한 후 보통 학교 5학년으로 진학하는 학생 수가 고등 교육의 단계 로 향하는 김나지움과 중간 학교로 진학하는 수보다 적기 때문이다. ƒ 직업학교 학생이 줄어드는 현상은 2원제 직업학교 학생들의 자질 저하를 불러 오고, 이는 다시 중도 탈락하는 비율을 증가 시킨다. ƒ 산업체의 2원제 직업 교육의 기피 현상이 있다. 산업체의 2원제 직업 교육 기피 현상은 청 소년들에게는 실습장을 빼앗는 결과를 초래하여 삶의 의욕을 상실케 한다. 21세기에 독일 이 추진하려는 고도의 기술 문명사회의 건설은 양질의 고학력자를 선호할 것이 예상되어 고등 교육의 수혜자는 상대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그러나 학업 성취도가 낮은 청소년들에게 도 생애 준비 교육으로서 2원제 직업 교육은 여전히 중요하므로 특히 대기업들은 충분한 5 실습장을 제공해야 한다. FES-Information-Series 2원제 직업 교육 제도의 개혁 ▶ 직업학교와 실습 현장 간 상호 협력 체제 구축 직업학교의 강의 내용과 실습 간 문제뿐만 아니라 교육 과정 자체에 대한 개선에도 연계성을 강화 시켜가고 있다. ▶ 현장 중심의 직업 교육 강화 현장에서의 실습 교육이 산업 생산 과정과 공정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기업체의 지적에 따라 이를 개선해 가고 있다. ▶ 교육을 계속적으로 받을 수 있는 기회 확대 일차 직업 교육을 받고 취업한 후 상급 학교로 진학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하여 교육 제 도의 탄력적 운영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또한 승진과 상급 자격증 획득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 직업 기초 교육의 강화 변화하는 직업 세계에 적응하기 위하여 직업 기초 교육을 강화했다. 세분화되어 있는 직업군을 통합한 것도 동일한 차원의 개혁 조치이며, 평생 학습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도 기초 교육 을 강화 시켜 주어야 한다. ▶ 새로운 직업 개발 21세기 지식정보화 사회가 요청하는 새로운 직종과 이에 알맞은 직업 교육 프로그램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연방 정부는 1997년에 23개, 1998년에 11개의 신종 직업 분야를 개발했다. ▶ 직업 교육과 정규 학교 교육의 일치성 추구 국가 인정 직업 자격증과 정규 학교 졸업증을 동일하게 인정하여 상급 학교 진학을 가능하게 하는 유인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 여성의 직업 교육 강화 이미 1980년대부터 추진해 오고 있는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모든 직 업 교육 분야에 여성 의 진출을 더욱 확대, 개방했다. ▶ 구동독 지역(5개 신연방주) 청소년을 위한 직업 교육 강화 경제 기반이 취약하여 2원제 직업 교육이 어려운 구동독 지역에 국가 주도의 직업 교육을 강 화하고 있다. 6 난자 제공에 관한 독일의 입장 신 동 일,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 2006년 5월 󰠲󰠲󰠲󰠲󰠲󰠲󰠲󰠲󰠲󰠲󰠲󰠲󰠲󰠲󰠲󰠲󰠲󰠲󰠲󰠲󰠲󰠲󰠲󰠲󰠲󰠲󰠲󰠲󰠲󰠲󰠲󰠲󰠲󰠲󰠲󰠲󰠲󰠲󰠲󰠲󰠲󰠲󰠲󰠲󰠲󰠲󰠲󰠲󰠲󰠲󰠲󰠲󰠲󰠲󰠲󰠲󰠲󰠲󰠲󰠲󰠲󰠲󰠲󰠲󰠲󰠲󰠲󰠲󰠲󰠲󰠲󰠲󰠲󰠲󰠲󰠲󰠲󰠲󰠲 난자 제공을 둘러 싼 사회적 관심은 생명 공학이 발달하면서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인간 생 식 세포를 이용한 연구와 새로운 치료술이 꾸준히 개발되면서 인간 생식 세포에 대한 윤리적 인 문제점도 함께 드러났다. 독일의 생물학과 생명 공학 분야는 매우 진보적으로 발전하고 있지만, 독일은 인간 생식 세포 이용과 체세포 복제 같은 윤리적인 사항에 대해서 매우 엄격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생명 공학 에서 매우 중요하게 인정하는 인간 난자 이용에 대한 독일법의 태도도 마찬가지이다. 독일은 난 자 제공 자체를 법으로 특별히 규제하고 있지 않지만, 난자 채취나 수정란 발생 자체가 임신 목 적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다른 국가에서 생명윤리적으로 논란이 많은 수정 란(배아)의 냉동 보관도 독일에서는 잔여 배아가 남지 않도록 배아보호법에서 유도하고 있기 때 문에 발생할 여지가 희박하다.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독일의 입장은, 형식적으로는 헌법 제1조 제1항의 인간 존 엄성 존중 원칙에 따라 제정된 배아보호법 등의 제반 법률 구조로 인하여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법률 규정으로만 인간 생식 세포 보호를 제도화하였다기 보다는 오히려 독일 사회의 기본적인 생명 존중 사상이 법률화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난자와 같은 인간 생식 세포 역시 살아 있는 인간 개체와 유사하게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1. 머리글 FES-Information-Series 독일의 난자 제공 관련 법체계나 규범은 형식면에서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법체계와 규범의 실질적인 배경은 우리와 조금 다르다. 지난 수년에 걸친 논의 결과가 현재 독일의 난자 및 생식 세포에 관한 법규범에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가 살펴봐야 할 것은 단순히 독일 법률의 문구가 아니라 그 법률에 내재하고 있는 규범 구조이다. 2. 이해를 위한 설명 생명윤리는 인간 생명을 비롯한 모든 생명과 생태에 대한 사항을 다룬다. 물론 여기서 핵심은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 생명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도와주는 환경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의 생 명윤리 논의는 인간 생식 세포와 배아 같은 세부 단편 사항은 물론이고, 그와 관련한 유전 정보 등의 제반 사항들을 포함하고 있다. 1) 난자 제공 난자 제공(Eizellspende)이란, 여성의 자연 배란 주기에 인위적인 가공을 하여 난자를 채취 한 후 특정한 목적에 공여하는 것을 말한다. 난자 제공의 주요 목적은 인공 체외 수정이며, 다른 이유로는 수정된 배아를 이용한 배아줄기 세포 채취나 특별한 실험 목적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난자 제공 행위는, 생명윤리 면에서 보면, 인간의 생식 세포를 다른 목적 에 이용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엄밀히 말해서 난자에는 배아나 수정란처럼 인간으로서의 잠재성이 없다고 보는 관점이 지배적 이다. 대부분의 국가에서도 난자를 단순한 세포질로 이해하여 인간 정자를 처리하듯 다루는 것이 보통이다. 독일 법상으로도 난자 제공 자체를 금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독일인들의 의식은 인간 난자를 단순한 세포 덩어리로 보지 않는다. 배아보호법에 관한 논의가 한창일 때, 난자와 정자 같 은 인간의 생식 세포를 특별하게 취급하여 존중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 결과, 자발적인 난자 채취나 기증에 대해서는 통제하지 않지만, 난자는 오직 임신 목적으로만 획득할 수 있도록 배아보호법에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연구 목적의 난자 제공이나 실험 목적의 난자 채취를 금지 하고 있다. 매우 제한적이기는 하나 배아 줄기세포의 연구를 위한 특별 예외가 있지만, 이것은 연 구 목적으로 외국에서 수입한 배아 줄기세포에 국한되는 것이며, 한시적으로 적용되는 법이어서 특별히 ‘예외’로 보기는 어렵다. 당연히 대리모 문제가 발생할 여지는 없다. FES-Information-Series 2) 규범 구조 독일 헌법의 규범 구조는 생명윤리의 입장에서 유사한 법제도를 가지고 있는 유럽 국가들과 비 교해도 상당히 엄격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 이유는 다양한 관점에서 찾을 수 있다. 가장 많이 설 명되는 것이 독일 헌법 제1조의 규범 구조이다. 헌법 제1조 제1항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 보 호하는 것이 독일의 제1차적인 헌법적 명령임을 선언하고 있으며, 제2항은 모든 인간의 생명권 이 동등하게 보호받아야 할 것을 명하고 있다. 둘째는 헌법 이외의 다른 법률들의 규범 구조이다. 먼저 1990년 발효된 배아보호법(EschG od. Embryonenschutzgesetz)은 인간 생명과 관련된 대 부분의 조작 행위를 철저히 금지하는 방향으로 제정되었다. 또한 그와 관련된 연구 기금 관련 법제나 연구 관련 법률들은 인간 생명을 다루는 모든 경우에 매우 엄격한 기준과 제한을 두도록 하고 있다. 셋째는 독일인들의 생명에 대한 인식이다. 다소 주관적이긴 하나, 이 관점은 독일 법 규범의 실질적인 배경을 이루는 요소이다. 이러한 인식이 자연스럽게 법규범으로 지속되고, 법률 로 승화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3. 개별 문제들 난자와 관련하여 발생할 수 있는 연구나 의료 시술은 대체로 체외 인공 수정, 난자 제공, 잔여 배아의 냉동 보관, 대리모, 클로닝 등이 있다. 먼저, 체외 인공 수정 행위는 자연 임신이 불가능한 경우 남성의 정자를 채취하고, 여성의 난자 를 체외로 추출하여 시험관에서 인위적인 방법으로 수정시키는 행위를 말한다. 미세 조정술을 이 용해서 난포에 직접 정자가 도달할 수 있도록 하거나 아예 정자를 난자 세포 내부로 주입시키는 기술이 포함된다. 둘째로 난자 제공은 불임 원인이 여성 난자에 있는 경우, 다른 여성 난자를 이용하여 체외 수정 을 하는 방법이다. 다른 여성의 난세포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윤리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독 일은 이것을 배아보호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셋째는 잔여 배아의 냉동 보관이다. 일반적으로 인공 수정을 인정하게 되면, 여성 자궁에 과배 란 촉진 호르몬을 주입하여 1회에 정상적으로 배란되는 난자보다 훨씬 많은 난자를 생성시키고, 그것을 체외에서 수정을 시킨 후 2~3개 수정란을 모체에 주입한다. 이 시술에서 주입되지 못한 나머지 수정란(잔여 배아)들은 냉동 보관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대체로 덴마크, 프랑스, 영국, 노 르웨이, 오스트리아, 스웨덴, 스위스, 스페인 등 유럽 국가들은 이를 허용하고 있다. 벨기에의 경 FES-Information-Series 우, 이에 대한 법은 없으나 현실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독일은 냉동 보관을 법으로 허용하고 있 다. 그러나 배아와 관련된 세부 규칙에서는 체외 수정 시술을 위한 한시적인 냉동 보관만을 허용 하고, 과배란 촉진으로 생성할 수 있는 잔여 배아수를 제한하여 현실적으로는 냉동 보관 행위 역 시 제한하고 있다. 배아보호법상 독일에서 체외 수정을 하는 경우 한 번에 3개의 난자만을 생성 할 수 있고, 한 번 생성되어 수정에 기여한 난자는 모두 1회 시술에서 모체에 주입되어야 한다. 넷째는 매우 민감한 윤리적인 문제이다. 대리모는 독일뿐 아니라 일부 국가에서도 법으로 금지 하고 있다. 덴마크,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웨덴, 스위스가 법으로 대리모를 금지하고 있다. 대리 모란, 자궁에 문제가 있는 여성의 난자를 채취하여 체외 수정한 후 정상적인 자궁을 가진 여성에 게 임신시키는 방법과 난자 세포 제공이 허용되는 경우, 타인의 난자 세포를 이용하여 타인의 자 궁에 임신시키는 경우를 포함한다. 대리모에 대한 실질적인 수요는 어느 국가나 은밀히 존재한다. 불임이라는 현상이 점차 사회 문제로 떠오르기 시작한 유럽의 저출산 국가들은 출산 장려 정책의 일환으로 대리모 계약까지 개인의 자율권에 맡기는 경향이 많아졌다. 어떤 면에서 대리모는 표. 주요 유럽 국가들의 생명윤리 관련 입장 비교 체외 수정 난자(배아) 제공 냉동 보관 대리모 클로닝 덴마크 허용 허용 허용 금지 법률 없음 프랑스 허용 허용 허용 금지 금지 영국 허용 허용 허용 허용 금지 네덜란드 실무 해결 실무 해결 실무 해결 실무 해결 금지 노르웨이 허용 금지 허용 법률 없음 법률 없음 오스트리아 허용 금지 허용 금지 법률 없음 스웨덴 허용 허용 허용 금지 금지 스위스 허용 금지 허용 금지 금지 스페인 허용 허용 허용 법률 없음 금지 독일 허용 금지 허용 금지 금지 출처: Max―Plank―Institut f ü r Ausl ä ndisches und Internationales Strafrecht, Freiburg, im Auftrag des Stern. FES-Information-Series 인간 생명에 대한 경시, 즉 부정적인 생명 인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희망하는 절박함으로 나 타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영국과 같은 일부 국가에서는 엄격한 제한을 두어 허용하고 있기도 하 다. 그런 측면에서 대리모를 금지하는 것은 생명 경시 사상 때문만은 아니라고 추측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클로닝도 이와 유사한 경향이 있다. 인간 복제 라는 표제로 더 잘 알려진 클로닝 은 독일법상 중대한 범죄 행위이다. 사실 복제 행위를 대리모와 유사하게 인간의 생식 세포를 조작하여 새로운 생명을 만드는 것으로 설명한다면, 클로닝을 새로운 인간 생명을 생성시키기 위한 과학적 노력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일부 주장에 따르면 복제 행위는 대리모와 마찬가지로 생명을 얻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 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리모와 마찬가지로 인간 복제 행위는 인간 생명에 대한 존중과 생명 보호 차원에서 당연히 금지될 수 있다. 4. 논의되는 관점들 난자 제공이라는 행위 는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 행위 는 인구학적 차원에서 정치 적인 관념과 철학적인 존재론까지 이어질 수 있다. 1) 재생산 여성은 어느 사회에서나 꾸준히 재생산 의 주체이자 도구로 구조화되고 있다. 여성의 생물학적 재생산 활동이 사회를 유지하는 유일한 근거임에는 틀림없지만, 남성들의 재생산 과정 개입과 달리 여성의 재생산 활동은 직접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비호의적 또는 비자발적 이다. 인구학적, 역사적 으로 볼 때, 여성의 재생산 활동에는 다소 억압적이고 강제적인 특징이 있다. 재생산의 강요 란 단 순히 독일 여성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의 몸을 통한 재생산 순환 고리는 1960년대 여성 주의 운동의 관점에 따라 서서히 분화하기 시작하였다. 낙태 자유화 라는 구호로 등장한 이 정치적 인 사건으로 여성의 사회적 가능성이 획기적으로 고양된 것은 분명하지만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나타 냈다. 독일 사회에서 낙태 관련 논의는 특별한 긴장 관계에서 진행되었다. 여성의 사회적 생존권을 주장하여 태아의 생물학적 생존권을 예외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는 낙태 자유화는 독일 사회에 상 당한 문제 의식을 불러왔다. 독일은 처음에 여성의 선택권을 존중하는 입장이었다(소위 Indikation-Modell). 그러나 이 입장은 곧이어 나온 독일연방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재조정 되었다. 위헌 결정의 주요 근거는 독일 헌법 제1조의 인간의 존엄성 존중과 보장 규정에는 태아 는 물론 진행하고 있는 모든 단계의 생명이 그 대상이라는 연방헌법재판소의 해석이었다. 즉, 독 일 헌법은 수정란도 인간 존엄성의 주체로 이해한다는 결정이다. FES-Information-Series 2) 자율성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율성의 범위와 한계다. 근대 이후 독일의 주요한 사회적 관점은 자 기 결정권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엄밀히 말해서 낙태에 대한 여성의 결정권은 자율성의 정점을 이루는 사건이다. 반면, 태아와 배아의 생명권은 자율성을 근거로 개별적으로 결 정될 수 없다는 연방헌법재판소의 판단은 자율성 문제를 객관적으로 제한하는 것을 의미한다. 난 자 제공과 관련한 모든 법제도와 독일인의 인식에는 두 가지 철학적인 중심축이 형성되어 있다. 칸트(I. Kant)의 일반화된 공식인 수단화 금지 공식 은 독일 철학과 그 영향을 받고 있는 모 든 근대 사상의 핵심이다. 일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법학과 법철학에서는 수단화 금지 공식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있다. 근대 사상의 정신적 기반이 된 이 유명한 공식은 당시로서는 전혀 예측할 수도 없었던 새로운 현상인 생명 공학에도 그 위력을 잃지 않는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도구화 또는 수단으로 삼지 말라는 원칙 만큼 생명윤리의 기본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은 없다. 반면에, 칸트의 200여 년 전 사상에는 수단화 금지 공식과 또 다른 축이 있었다. 바로 자율성 에 앞서는 객관적 준칙 에 대한 생각이다. 3)‘객관적 준칙’ 칸트의 사고는 대다수 독일인 의식의 반영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칸트의 또 다른 주장인 객 관적 준칙은 선험적(a priori)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모든 이성적 준칙에 앞서 판단해야 하는 중 요한 원칙이다. 그러므로 칸트에게 자율성은 완전히 백지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칸트 의 자율성은 객관적 준칙을 엄격히 따르는 자율성이다. 이러한 자율성은 인간이 스스로 누릴 수 있는 자율성의 법칙에 내재적인 제한 원리로 작용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독일인의 사회 인식은 칸트가 설명하는 객관적 준칙을 따르는 범위 안에서의 자율 성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즉, 자율성의 원리에 따라 낙태의 권리나 난자 제공 행위를 설명할 수 는 있지만, 독일인들은 객관적 사회 규범의 한계 안에서 결정할 수밖에 없다. 여성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낙태의 권리가 사회 생존권의 일부이나, 태아의 생명을 희생시키면서 인정될 수는 없다. 또한 난자 제공 행위를 개인의 결정으로 선택할 수 있지만, 여성의 생식 세포에 대한 독일인의 객 관적 규범에 반한다면 개인의 선택이 물러서야 한다. 칸트는 개인의 자율적 판단과 사회의 객관 적 규범을 구분하면서 개인의 판단은 사회적 규범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 다는 점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FES-Information-Series 4) 작은 결론 위와 같은 논리로 보면, 낙태나 난자 제공, 대리모와 같은 복잡한 생명윤리 사안들은 개인 간의 합의나 대화로 결정될 수 없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개인의 자율성의 범위를 초월하여 제3자 또는 다른 생명이 침해받을 수 있는 사안인 경우는 더욱 그렇다. 정당한 결정은 구조적이고 가치 있는 타당성이 있어야 한다. 낙태의 선택권 문제로는 연구 목적의 난자 제공과 클로닝이 있다. 왜 냐하면 두 가지 모두 자율성의 원칙으로 설명할 수 있는 논증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소박 한 자율성 원리에서 접근하면, 난자 제공이나 대리모와 관련해서는 완전히 자율적인 상황에서 합 의를 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어떤 강요도 없고,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였으며, 금전적 대가나 보수 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난자 제공이나 대리모 계약이 왜 불법인지 설명하기 힘들 다. 독일이 다른 나라보다 엄격한 생명윤리 규범을 갖고 있는 근거는 독일 헌법과 관련한 법률 규 정의 배경이 될 수 있는 독일인들의 사회 인식 이다. 이것을 구체화한 것이 독일의 규범이다. 5. 규범에 대한 설명 전반적인 난자 제공에 관한 사항은 1990년에 입법된 배아보호법(ESchG)에서 규율하고 있다. 그 외에도 형법과 기타 법률들이 난자 제공에 관한 인간 생식자 보호와 관계가 있다. 1) 과정과 절차 독일은 1962년 형법 초안으로 비배우자 간의 인공 수정(AID)을 형사 처벌하는 규정을 개정안 에 넣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당시 형법의 자유화 운동에 밀려 수포로 돌아갔다. 이미 나치스 시대의 우생보호법(1933-35)에 근거한 불임 수술을 시행하여 국제적으로 비난받 은 바 있는 독일은 이때부터 유전 공학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생식 의학과 유전자 공학의 급속한 발전으로 이를 법적으로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던 1984년 7월, 연방의회는 특별조사위원회를 소집하였다. 그 이듬해인 1985년 9월 연방과학기술부와 연방법무부 가 공동검토위원회(Benda Kommission)를 설치하여 연방의회에 유전자 공학과 불임시술 문제 와 관련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1985년 11월 25일에 발표된 이 보고서는 체외 수정의 경우 불임 시술에 국한하여 허용하고, 고도의 연구 목적을 위한 인간 배아 실험을 권고하고 있다. 또한 원칙적으로는 대리모도 금지하나 유전학상의 모(엄마)가 의학적 소견에 따라 배아를 회태할 수 FES-Information-Series 없는 경우 특례로 근친자를 대리모로 할 수 있다는 권고안도 제시했다. 그러나 1990년 제정된 배아보호법에서는 이러한 권고를 대부분 수용하지 않았으며, 그와 반대 로 매우 엄격한 태도를 견지하였다. 배아보호법(EschG)은 1990년 12월 13일 인간 복제와 배아 이 용을 금지하기 위하여 제안된 법률이다(BGBl.Ⅰ, 2746). 이 법률은 당시 사회적으로 생명 복제가 문제되는 시점에 제정되어 많은 관심을 끌었다. 2) 법률 a) 배아보호법 배아보호법 제1조는 인공 수정 기술의 남용에 대해 규제하고 있다. 이 법에서는 인간 배아에 대한 부당한 처우 금지(제2조), 성별 선택의 금지(제3조), 인간 배아 간 세포에 대한 인위적 조작 의 금지(제5조), 모든 종류의 클로닝 금지(제6조), 키메라와 잡종물 금지(제7조) 등을 규정하고 있 다. 독일은 모든 종류의 클로닝을 금지하며, 이 법률에 따라 인간 복제는 물론 유전자 치료술, 배 아의 유전자 교정 등 일체의 생명 공학적 조작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배아보호법은 배아를 철저하게 보호함으로써 특별한 지위의 배아를 인간 수준으로 보호하고 있 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유전자 치료술로 회복 가능한 환자 개개인의 건강권과 갈등할 수 있다. 특히 유전자 치료술을 금지하고 있는 제5조는 장래에 유전병 환자들에게 유일한 희망이 될 수도 있는 기술을 처음부터 시도조차 못하게 하고 있다. 이 법률에 따라 독일에서는 임신 목적 이 아닌 난자 제공이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배아보호법은 독일에서 난자 제공 등의 행위를 불법으로 취급 하는 근거이다. 전체적으로 독일의 배아보호법은 1990년 보다 앞선 시점에서 과학 기술을 평가하고 있다. 당시 에는 아직 체세포 치환을 이용한 클로닝 기법이 다양하게 발전하지 못했으며, 유전자 치료술의 가 능성도 지금처럼 뚜렷하지 못한 시기였다. 배아보호법은 이와 같은 다양한 생명 공학의 발전과 가능성을 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지속적으로 지적되었다. 특히 독일 사회의 역사적 특성 때문 에 배아에 대한 직접적인 실험을 어떤 선에서든 허용하는 것이 쉽지 않다. 현재 독일 사회 일각에 서도 배아보호법을 시대에 맞게 개정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지고 있지만, 그 실현 가능성은 예견 하기 힘들다. b) 인간줄기세포수입과이용에관한법률 2002년 6월 28일 제정, 공포된 인간줄기세포수입과이용에관한법률(StGZ)은 배아보호법이 심한 FES-Information-Series 규제로 인해 독일의 생명 공학 발전을 지나치게 제한하고 있다는 일련의 비판이 있은 후 제정되 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이 법률의 제정으로 독일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 측이 나돌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법의 기본 목적은 인간의 존엄과 생명권 을 준수하고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제1조). 물론 뒷부분에 연구의 자유를 보장 한다는 문언이 있지만 이는 줄기세포에 관한 연구의 자유를 함께 고려하고 있다는 소극적인 문언으로 이해된다. 제1조 제1항에서는 근본 적으로 줄기세포의 수입과 이용은 금지 된다 라고 밝히고 있다. 이 법률의 적용을 받는 인간 배아줄기세포는 다음의 사항에 대하여 해당 관청의 확인을 받아야 한 다. ⅰ) 2002년 1월 1일 이전에 수입 대상국에서 법적으로 하자 없이 생성되어 냉동 보관 중인 배 아 줄기세포일 것(제4조 제2항 제1호 a), ⅱ) 처음부터 ① 의료적인 방법으로 ② 임신의 목적으로 체외 수정된 것(부수적으로 그 목적의 미달성이 배아 자체의 문제가 아닐 것도 요구)(제4조 제2항 제1호 b), ⅲ) 줄기세포의 획득에 금전적인 댓가가 지불되지 않았을 것 등이 요구된다(제4조 제2항 제2호 c). 이 법률은 인간 배아 줄기세포의 이용과 활용에 대해 독일의 기준을 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2002년 이전에 정상적으로 수입된 인간 배아 줄기세포를 한시적으로 연구할 수 있게 만든 법률이 다. 그러므로 이 법률로 난자 제공 등의 행위가 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다. 난자 제공으로 생성될 수 있는 배아는 오직 독일 외부에서 생성된 것만으로 한정시켜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c) 유전공학법 독일의 배아 관련 법제에서 눈여겨 볼 법률들은 10여 년에 걸친 논쟁의 산물이다. 1978년 최초 로 그 필요성이 역설되어 초안이 제출되었지만 입법에는 실패하였다. 그러던 중 1984년 독일 연 방의회 앙케트위원회(Enquete-Kommission)가 3년의 조사와 연구로 유전공학을 위한 법적인 규 율에 관한 보고서 를 발표하였다. 이를 기초로 1990년 5월에 유전공학규율을위한법률(GenTG) 을 제정하였다. 현행 법률은 1993년에 일부 수정되었다. 이 법률에도 난자 제공에 관한 특별 규정은 없다. 여기서 규정하는 주요 대상은 유전 공학에 FES-Information-Series 대한 일반적인 규제 내용이다. 우리나라의 전공학육성법 과 달리 독일의 유전공학법은 유전 공학 을 장려하고 배려하는 법이 아니라 유전 공학의 가능한 위험성을 감소시키기 위한 법률이라는 점 이다. 이 법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책임 추정 규정이다(제34조). 이 조항은 원인 제공자가 자신 으로 인해 일어난 결과가 아님을 증명하지 못하는 경우 모든 책임을 부담하도록 하고 있다. 논란 이 되었던 부분은 무과실 책임의 인정 여부와 입증 책임의 전환에 관한 사항이다. 1989년 정부의 초안에서는 책임 배재 사유에서 불가항력 을 삽입하였으나 새로 제정된 유전공학법에서는 이 문 구를 삭제하였다. 결국 이 법에 따르면 제조물 하자에 관한 무한 책임을 인정한 것과 다름없다. 문제는 배아와 관련된 유전자 조작(주로 배아 줄기세포 치료술)의 책임을 모두 시술자에게 부담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조항으로 인해 독일이 제한적으로 유전자 조작이나 배아 줄기세포 치 료술을 허용하더라도 이 규정에 따라 다시 이중의 잠금 장치를 갖는 효과가 있다. 6. 마치며 배아보호법과 다른 법률의 구조로 인하여 난자 등의 인간 생식 세포의 취급이 엄격하게 관리되 고 있지만, 독일의 생명윤리에 대한 이와 같은 입장이 오래도록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여러 사례를 통하여 독일의 법적 상황이 지나치게 규제적이라는 사실이 거론되고 있다. 또한 독일에서 금지하고 있는 일정한 시술이나 인간 생식 세포에 관련된 사항을 회피하기 위하여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도 독일의 새로운 골칫거리이다. 다만, 독일이 인간 배아, 난자 제공 등에 대한 개별적인 입장을 바꿀 가능성은 있겠지만, 결론 에 이르는 구조는 역시 같을 것이다. 독일의 저출산과 지속가능한 가족 정책 김 은 영, 한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 2005년 9월 󰠲󰠲󰠲󰠲󰠲󰠲󰠲󰠲󰠲󰠲󰠲󰠲󰠲󰠲󰠲󰠲󰠲󰠲󰠲󰠲󰠲󰠲󰠲󰠲󰠲󰠲󰠲󰠲󰠲󰠲󰠲󰠲󰠲󰠲󰠲󰠲󰠲󰠲󰠲󰠲󰠲󰠲󰠲󰠲󰠲󰠲󰠲󰠲󰠲󰠲󰠲󰠲󰠲󰠲󰠲󰠲󰠲󰠲󰠲󰠲󰠲󰠲󰠲󰠲󰠲󰠲󰠲󰠲󰠲󰠲󰠲󰠲󰠲󰠲󰠲󰠲󰠲󰠲󰠲 독일은 이미 수십 년간 출산율이 평균 1.4명 정도에 머물고 있는 유럽의 대표적 저출산 국가이다. 이 글에서는 독일의 저출산 문제의 현황과 원인을 알아보고, 이에 대한 독일 정부의 대응 방안으로 2002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지속가능한 가족 정책 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독일의 저출산은 전통적 가족 모델에 기초한 가족 정책이 낳은 결과이다. 단독 부양자 모델 이라 불 리는 독일의 가족 정책은 여성에게 어머니의 역할을 강조하며, 자녀가 어린 시기에는 어머니가 자녀 양육에 전념한 후에 직업으로 복귀하도록 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보육 시설에 대한 국가의 투자가 빈약하고, 그 대신 육아휴가 기간이 길며, 이 기간에 대해 국가가 소득 지원을 하고 있다. 독일의 정책은 지금까지 가족의 경제적 지원에 중점을 두어왔으며, 가족에 대한 현금 지원율이 유럽 에서 매우 높은 축에 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출산율은 하위권에 머 물고 있다. 특히 고학력 여성들은 출산으로 인한 직업 경력의 단절과 이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원치 않기 때문에 출산율이 가장 낮은 것으로 보고된다. 2002년 현 사민당이 집권한 이래 독일은 지속가능한 가족 정책 이란 모토 아래 자녀 출산과 직업 생활의 양립이 가능한 사회적 조건을 마련하는 데 중점을 두고 정책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꾀하고 있 다. 지속가능한 가족 정책은 보육 여건의 향상, 부모 수당을 통한 가족 지원, 가족 친화적인 사회 인프 라 구축, 가족과 직업의 균형 등을 목표로 한다. 󰠲󰠲󰠲󰠲󰠲󰠲󰠲󰠲󰠲󰠲󰠲󰠲󰠲󰠲󰠲󰠲󰠲󰠲󰠲󰠲󰠲󰠲󰠲󰠲󰠲󰠲󰠲󰠲󰠲󰠲󰠲󰠲󰠲󰠲󰠲󰠲󰠲󰠲󰠲󰠲󰠲󰠲󰠲󰠲󰠲󰠲󰠲󰠲󰠲󰠲󰠲󰠲󰠲󰠲󰠲󰠲󰠲󰠲󰠲󰠲󰠲󰠲󰠲󰠲󰠲󰠲󰠲󰠲󰠲󰠲󰠲󰠲󰠲󰠲󰠲󰠲󰠲󰠲󰠲 1. 들어가며 FES-Information-Series 현재 지구촌의 많은 나라들이 저출산 신드롬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저출산 사회란, 한 사회가 일정 시점의 인구구조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인구 대체 수준이 2.1명 이하인 상태에 있는 사회를 말한다. 이는 가임 여성(15-49) 100명이 210명의 자녀를 낳아야 인구가 줄지도 늘지도 않는 안정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저출산은 현대 사회의 인구 고령화 현상과 맞물리면서 노동력 감소, 성장률 저하, 고령인구 부양 문제, 사회보장 비용의 증가, 가족 관계 해체 등 심각한 사회 문제를 파생시키는 원인이 된다. 따 라서 이 글에서는 유럽의 대표적 저출산 국가인 독일의 저출산 현황과 원인에 대해 알아보고, 독 일 정부가 저출산에 대한 대응 방안으로 2002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지속가능한 가족 정책 에 대 해 살펴봄으로써 저출산 극복을 위한 정책적 담론을 모색하고자 한다. 2. 저출산 현황 독일은 유럽에서도 특히 출산율이 낮은 나라에 속한다. 이미 1970년대 초부터 출생자수가 사망 자수보다 적었으나 이주민으로 인해 전체 인구수는 줄지 않고 조금씩 늘었다. 앞으로 기존 인구수 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년 35만 명의 이주가 필요한 실정이나 이는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2003년 현재 독일의 가임 여성 100명당 출산 자녀는 134명으로 앞으로 획기적인 전환이 이루어지 지 않으면 출산율이 2050년까지 급격히 감소할 것으로 추정된다. 저출산이 단지 인구 감소의 결과만 낳는 것은 아니다. 독일은 청년층이 점점 줄어들면서 2020년 이 되면 EU 내에서 청년층 비율이 가장 낮은 나라가 될 것으로 예측된다. 이미 1997년에 60세 이상 노인 인구가 20세 미만 인구수를 초과했으며, 2004년 현재 20세 미만 인구는 전체 독일인의 21%에 달하고 있는 상황이다. 낮은 출산율은 결국 경제활동인구 및 전문 인력의 감소, 경제성장률과 삶의 스페인 이탈리아 헝가리 독일 스웨덴 영국 네덜란드 덴마크 프랑스 에이레 미국 1.29 1.29 1.30 1.34 1.71 1.71 1.75 1.76 1.89 1.98 2.07 출처: Bmfsfj(2005), Monitor Familiendemographie, Ausgabe Nr. 1, Deutschland: Kinderlos trotz Kinderwunsch?, 3쪽 재구성. FES-Information-Series 질 저하, 공적 노인 부양 비용의 증가, 사회보장 제도의 재원 문제와 이로 인한 사회보장 체계의 기 능 제한 등 독일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3. 저출산의 원인은 무엇인가? 독일인들은 자녀를 출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① 직업 활동과 자녀 양육의 조화 3세 이하 자녀가 있는 서독 지역 주민의 86%는 출산 후 부모 모두 직업 활동을 지속하기 원하 나 실제로 이를 실현하고 있는 사람은 23%에 불과하다. 따라서 육아기 동안 직업과의 연결성을 잃 는 것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자녀 양육과 직업 활동을 제대로 조화시킬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 은 자녀 출산을 막는 중요한 요인이다. 교육 수준이 높고 고소득 취업 가능성이 높거나 고소득 직종에 종사하는 여성일수록 자녀 출산 에 대해 회의적이다. 특히 서독 지역 고학력 여성의 무자녀 선택 경향이 뚜렷한데, 이들 고학력 여 성들은 특히 자녀 출산과 직업 생활을 병행하는 일에 어려움을 느끼며, 자녀 출산으로 인해 자신의 직업 경력과 경제적인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점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언급해야 할 점은 가족의 경제 수준이 낮을수록 무자녀 비율도 높다는 것이다. 남편의 소득이 높은 경우 자녀를 출산하는 비율도 높으며 남편의 소득이 낮은 경우 출산율도 낮 다. 저소득 가정의 여성은 출산으로 인해 직업 생활이 중단되면 겪게 될 경제적 어려움과 자녀양 육 비용의 부담 때문에 출산을 기피한다면, 고학력 여성은 출산으로 인한 직접적인 경제적 비용 부담의 어려움보다는 직업 경력의 중단으로 인한 지위 상승의 기회 상실과 미래 소득의 감소를 우려하는 부분이 크다. 따라서 두 집단의 저출산의 원인에는 차이가 있으나 결국 독일 사회에서 취업과 자녀 양육을 양 립시키기 어렵다는 사실이 저출산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공통점으로 지적할 수 있다. ② 안정된 파트너십 독일인의 84%는 안정된 파트너십을 자녀 출산의 결정적인 조건으로 내세운다. 따라서 결혼한 부 부가 동거 부부보다 자녀 출산을 더 많이 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인데, 독일사회의 동거 가족 이 늘어나면서 출산율이 낮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FES-Information-Series ③ 자녀의 양육 비용 독일인이 자녀 출산을 결정하는 데는 소득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첫 아이의 출산 결정과 소득 간에 상관관계가 있으며, 둘 이상의 자녀의 출산 시 소득은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남성의 경우, 자녀 출산을 원하는지의 여부와 원하는 자녀의 수는 소득과 밀접 한 관련이 있다. 한 명의 자녀가 있는 가족의 50%는 자녀를 더 출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에 경제적인 요인이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응답했다. ④ 아동 친화적 사회 인프라 자녀가 있는 독일인 중 독일의 사회적 환경이 아동의 욕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를 들어, 도로 계획, 여가 활동의 여건, 주거 조건 등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독일인들은 아동의 욕구에 대한 이해심이 적으며 아동을 방해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⑤ 미래에 대한 확신 일자리나 국가의 충분한 지원에 대한 불안감이 있는 경우에는 출산을 결정하기 어렵다. 불안정 한 사회 변동기에 출산율이 하락하는 것이 이 점을 분명히 해준다. 이 현상은 동독 사회의 붕괴 당시와 통일 직후의 동독 지역, 그리고 동유럽의 사회주의 붕괴 시기에도 볼 수 있었으며, 90년 대 스웨덴의 복지 국가가 구조적 변동을 겪는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4. 저출산과 가족 정책 지금까지 독일의 가족 정책은 주로 가족의 경제적 지원에 초점을 맞추어왔다. 2000년 기준으로 가족 정책에 쏟은 비용만 한 해에 1500-1650억 유로에 달한다. 킬 세계경제연구소(IfW)에 따르면, 독일은 이미 자녀 양육 비용의 1/3 정도를 공적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국제적으로 비교 할 때 상위권에 속하는 수치이지만 독일의 출산율은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그렇다면 독일의 기존 가족 정책이 출산율이 높은 타 유럽 국가와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는지 비교해 보는 일은 독일의 저출산 현상의 원인을 진단하는 데에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유럽의 가족 정책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FES-Information-Series 첫째,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속한 유형으로 보편적 부양자 모델 이 있다. 양육의 책임을 국가 가 공유하면서 공보육 체계를 확립해서 사회가 적극적으로 양육에 참여하며, 육아 휴가를 두되 출산으로 인한 여성의 직업 생활 단절을 막기 위해 기간을 길게 두지 않으며 육아 휴가 기간의 임금 보전율을 높게 유지함으로써 남성의 육아 휴직 참여율이 높다. 소득에 대한 과세의 단위 가 가족이 아니라 개인이며, 특히 기혼 여성의 소득에 대한 과세율을 낮게 책정함으로써 기혼 여성의 경제활동에 대한 인센티브를 강화한다. 이들 나라에서는 여성의 취업률뿐만 아니라 출 산율도 높다. 둘째, 단독 부양자 모델 로 독일, 오스트리아 등이 이에 속한다. 이들 나라에서는 여성의 어머 니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며 자녀가 어린 시기에는 여성이 노동시장을 떠나서 집에 머물고 아버지 가 가족을 부양하도록 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아동 양육은 가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보육 시설에 대한 국가적인 투자는 미흡하고, 그 대신 육아 휴가 기간이 길며 이 기간에 국가의 소득 지원은 높다. 이들 나라는 출산율도, 여성 취업률도 낮다. 셋째, 수정 남성 부양자 모델 로 프랑스와 벨기에가 이에 속한다. 이들 나라는 비교적 공보육 체계가 잘 갖추어져 있으면서도 자녀의 직접 양육에 대해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독특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넷째는 자유주의적 모델 로 아동양육을 사적인 일로 여기며 가족과 자녀 양육에 대한 국가의 지 원은 미흡하다. 영국과 미국이 이에 속하는데 이들 나라에서는 개별 가족이 시장을 통해 양육 문 제를 해결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노동시장의 남녀 차별을 엄격하게 금지하는 제도와 적극적 조치 를 통해 여성을 노동시장에 통합한다. 출산율과 여성 취업률이 비교적 높다. 다섯째는 혼합 모델 로 이태리, 스페인 등의 남유럽 국가가 이에 속하는데, 이들 나라 또한 자녀 양육에 대한 국가의 지원이 거의 없으며 남성이 가족을 전적으로 부양한다. 이들 나라는 출산율과 여성 취업률이 모두 낮다. 이들 유형을 출산율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인 소득 지원과 보육 시설 확충 비율에 따라 분류하면 아래의 표와 같다. 물론 각국의 유형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다. 예를 들어, 동독 지역은 통일 전 C유형 FES-Information-Series 긍정적 요인: 보육 시설의 확충 부정적 요인: 보육 시설의 부족 긍정적 요인: 높은 소득 지원 부정적 요인: 낮은 소득 지원 A: 스웨덴, 덴마크, 프랑스 C: 영국(특히 3세 미만 아동) B: 독일(서독 지역) D: 스페인, 이탈리아(특히 3세 미만 아동) 출처: R ü rrup, Bert& Gruescu, Sandra(2003), Nachhaltige Familienpolitik im Interesse einer aktiven Bev ö lkerungsentwicklung, 8쪽. 에 속했으나 A와 B의 중간 형태로, 네덜란드는 90년대 초 B에서 C로 변화했다. 이러한 분류를 통해 출산율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일 반적으로 가족에 대한 소득 지원이 많고 보육 시설이 잘 확충되어 있는 경우 출산율이 높은 것 을 알 수 있다. 독일은 타 유럽 국가들과 비교할 때 육아 휴가 기간(Elternzeit)은 3년으로 매우 긴 편에 속하며, 이 기간 중 정액으로 육아 수당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있다. 또한 액수나 기간 면에서 볼 때, 모든 아동에게 지급되는 아동 수당 제도도 다른 나라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보육 체계는 매우 취약하여 특히 서독 지역 만 3세 미만 영유아의 보육률은 5.5%로 다른 유럽국에 비해 한참 뒤떨어져 있다. 3세 이상 아동을 위한 유치원도 종일제로 운영하는 곳이 적으며, 초등학생을 위한 방과 후 보육시설(Schulhort)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 또한 커다란 문제이다. 동독 지역도 통 일 후 보육 시설에 대한 국가 지원의 감소와 여성 실업률 증가로 보육률이 감소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독 지역의 보육률은 35%로 서독 지역에 비해 훨씬 앞서 있다. 따라서 연방 가정 ․ 노인 ․ 여성 ․ 청소년부의 레나테 슈미트(Renate Schmidt) 장관은 현재 서독 지역의 보육 실태는 다른 서구 국가에 비해 20년 이상 뒤져있다 고 진단한다. 이상의 유럽 각국 가족 정책과 출산율을 비교해볼 때 결국 독일의 출산율 향상을 위해서는 보육 제도의 확충이 관건임을 보여준다. 5. 지속 가능한 가족 정책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가족에 대한 경제적 지원에 초점을 맞추어 시행된 독일의 기존 가족 정 FES-Information-Series 책은 출산율 향상에 거의 도움이 안 된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학력과 소득이 높은 여성들의 출 산율이 가장 낮은 점을 고려할 때 국가가 자녀양육의 비용을 분담하는 것만으로는 자녀 출산을 증가시키는 데 한계가 있음이 분명해진다. 따라서 지난 몇 년 사이 독일에서는 가족 정책이 인 구 정책적인 지향점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인식과 함께, 가족에게 물질적인 지원을 하는 것만으 로는 충분치 않으며 자녀 양육을 위한 사회적 조건을 향상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지배 적으로 대두되었다. 2002년 현 사민당이 집권한 이래 독일은 지속가능한 가족 정책 이란 모토 아래 자녀출산을 가 능하도록 하는 사회적 조건을 창출하는 데 중점을 둔 정책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 지속가능성 이란 생태학의 기본 원리로서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고 나무를 베기 위해서는 나 무를 지속적으로 심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원리를 가족과 사회에 적용한 지속가능한 가족 정책은 자손을 보존할 수 있는 사회만이 현재의 체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출산 율이 높은 타 국가들의 긍정적인 정책들을 독일에 적용하는 데 힘쓰고 있다. 특히 지속가능한 가족 정책은 직업과 가족에 대한 계획을 비교적 갈등 없이 실현할 수 있다는 전망을 여성들에 게 보여주고 있다. 지속가능한 가족 정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① 보육 여건의 향상 직업과 가족생활의 긴장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보육 여건을 향상시키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높은 보육률과 출산율, 그리고 높은 여성 취업률 간에 뚜렷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스웨덴 이나 덴마크의 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독일은 특히 3세 미만 영유아와 초등학생의 방과 후 보 육을 위한 시설을 확충하고, 현재의 반일제 학교 체계를 종일제 체계로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 독일 정부는 종일제 학교를 위한 지원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으며 보육육성법 을 제정해 정책적 기반을 마련해 나가고 있다. 2005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보육육성법은 부모가 취업 상태 이거나 직업 교육을 받고 있는 경우에 3세 미만 아동의 보육 시설 입소권을 보장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를 위해 연방정부는 2010년까지 15억 유로를 보육정책에 투자하여 3세 미만 아 동을 위한 보육시설 정원을 23만 명 정도 더 늘려 다른 유럽 국가의 수준에 도달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FES-Information-Series ② 부모 수당을 통한 가족 지원 연방 가정 ․ 노인 ․ 여성 ․ 청소년부의 레나테 슈미트 장관은 현재의 육아 수당을 임금 대체 형태 의 부모 수당으로 전환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지금의 육아 수당은 소득 보전이 되지 않아 자녀 출산 후 부모들은 기존의 소득이 줄어들어 경 제적 부담을 느낀다. 따라서 앞으로 출산 전 소득에 연계해 부모 수당을 지급하는 것이 검토되고 있다. 이 경우 소득이 없었거나 적었던 사람에게는 최저 기준의 부모 수당을 주게 된다. 부모 수당 은 소득이 높은 여성들의 출산 유인 효과가 높은 것으로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경험에서 나타났으 며, 남성들의 양육 참여에도 매우 효과적인 것으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서 검증되고 있다. 최대 12개월 동안 소득에 연계된 부모 수당을 지급한다면 조기에 직업으로 복귀할 수 있는 유인 요인이 될 것이다. 일자리를 수년 동안 떠나있는 것은 직업 생활에 공백을 가져오며 직업 능력을 질적으 로 저하시킬 위험이 있고, 이로 인해 경력과 미래 소득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바로 이 러한 점이 젊은 여성들로 하여금 출산을 꺼리게 하는 요인이 되기 때문에 부모 휴가를 오랫동안 주는 것이 출산율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인구학적이나 경제적 측면에서 출산 1년 후 직장으로 돌아오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보고된다. ③ 가족 친화적인 사회 인프라 구축 가족 친화적 사회 인프라에는 안전한 도로 환경, 적정한 주택 가격, 수요자에게 맞는 사회 서비 스, 편리한 대중교통, 도움을 줄 수 있는 이웃 등이 속한다. 독일 정부는 가족을 위한 지역 연합 이 라는 모토 아래 이러한 목표 실현을 위해 각 지역에서 인프라망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④ 가족과 직업의 균형 남녀 모두 자녀 양육과 취업 활동이 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이것이 가능한 국가에 서는 자녀 출산율도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현재 독일에서는 정치계, 경제계, 노동조합 등의 사회단 체로 이루어진 가족연합(Allianz f ü r Familie) 을 결성해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 다. 물론 지금까지는 기업의 참여도와 문제 의식이 낮은 편이지만 기업이 가족 친화적인 조치를 취함으로써 기업의 이익에도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어 고무적이다. ⑤ 가족 형성에 대한 새로운 모델의 창출 현대 사회에서는 교육 기간이 길기 때문에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 후에 가족을 형성하게 되면 이 미 자녀를 출산하기에 늦은 경우가 많다. 따라서 교육 기간에 자녀 출산이 가능하도록 보육 시설 FES-Information-Series 의 확충 등 지원 체계를 확립하는 일과 이와 관련한 인식의 전환을 위한 일에 지속가능한 가족 정 책은 초점을 맞추고 있다. ⑥ 파트너십과 양육 능력의 강화 부부 관계의 질을 높이고 양육 능력을 강화하기 위한 사회적 지원 체계를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 며 가족 관련 단체의 부모 교육 프로그램 등에 대해 정부가 지원하고 있다. ⑦ 목표 지향적인 현금 지원 앞서 언급했듯이 독일은 다른 나라에 비해 가족에 대한 현금 급여가 많다. 앞으로의 가족 대상 현금 지원은 가족 빈곤의 예방에 초점을 두고자 계획하고 있다. 6. 나가며 독일은 전통적 가족 모델에 기초하면서 여성의 변화된 사회적 역할을 기존의 가족 모델에 통합 함으로써 출산율과 여성 취업의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가족 정책을 펴왔으나 효과가 적었다. 독일에서는 1970년대부터 가족과 직업의 조화를 실현하기 위해 3단계 모델 이 강조되었는데, 첫 자녀 출산 이전까지 여성들은 직업에 종사하다가 자녀 출산 이후부터 유아기까지 직업 활동을 중단하고 가사 노동과 자녀 양육에 전념하며, 그 이후에 다시 직업으로 복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정책적 모델에 따라 독일 정부는 3세 미만 영유아를 가정에서 양육하도록 하기위 해 3년간의 비교적 긴 육아 휴직 기간에 대한 정액의 소득 지원(육아 수당) 제도를 시행하였고, 그 결과 3세 미만 영유아를 위한 공적 보육 체계는 자연히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3단계 모델의 이론과는 달리 육아 휴가 동안 집에 머문 독일 여성들은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는데 실패 하거나 직장 생활에 완전히 통합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육아 휴가 후 직장 생활을 계속하는 여성이 서독 지역의 경우 59%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결국 독일 사회에서 직업과 자녀 양육을 조화시키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여성들의 경험은 직업 경 력을 위해 출산을 포기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비록 때늦은 감이 있으나 연방정부는 2002년부터 가 족 정책의 패러다임 변화를 꾀하고 있다. 독일과 타 유럽국가의 비교를 통해 살펴보았듯이 저출산과 여성 취업의 증가는 세계적 추세이기 FES-Information-Series 는 하나 저출산과 여성 취업이 반드시 대체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며 가족 정책의 내 용에 따라 출산율을 향상시키면서 동시에 여성 취업률을 높이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지속가능한 가족 정책은 무엇보다 여성들이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자녀 양육을 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기 위해 보육 시설에 대한 양적 확충과 아울러 질적인 개선이 필요 하며, 보육 비용에 대한 공적 지원을 확대해야 할 것이다. 또한 육아 휴가 제도를 실시하되 지나치 게 긴 것보다는 직장 복귀와 적응을 위해 적절한 시간으로 줄이며, 육아 휴가와 관련해 직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성에 대한 차별을 없애기 위해 남성도 육아 휴가를 의무적으로 갖도록 하는 것 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육아 휴가 기간에 출산 전 소득과 연계한 수당을 지급한다면 고소득 여성 의 출산유인 효과와 남성의 육아 휴가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독일 동물보호법령을 중심으로 본 동물 보호 김 수 진, 한국법제연구원 부연구위원 2005년 7월 󰠲󰠲󰠲󰠲󰠲󰠲󰠲󰠲󰠲󰠲󰠲󰠲󰠲󰠲󰠲󰠲󰠲󰠲󰠲󰠲󰠲󰠲󰠲󰠲󰠲󰠲󰠲󰠲󰠲󰠲󰠲󰠲󰠲󰠲󰠲󰠲󰠲󰠲󰠲󰠲󰠲󰠲󰠲󰠲󰠲󰠲󰠲󰠲󰠲󰠲󰠲󰠲󰠲󰠲󰠲󰠲󰠲󰠲󰠲󰠲󰠲󰠲󰠲󰠲󰠲󰠲󰠲󰠲󰠲󰠲󰠲󰠲󰠲󰠲󰠲󰠲󰠲󰠲󰠲󰠲󰠲󰠲󰠲󰠲󰠲󰠲󰠲󰠲󰠲󰠲󰠲󰠲󰠲󰠲󰠲 동물 보호를 단순히 우리 곁에 있는 동물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그 습성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고기를 먹고, 모피를 입고, 피혁 제품을 사용하고, 동물 실험을 하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동물 보호를 해치는 것이다. 동물 보호의 개념은 동물이 인간의 도구라는 생각하 는 견해부터, 동물에게 인간과 같은 기본권을 인정하자는 견해까지 다양하지만, 현실에서 통용되는 동 물 보호의 개념은 통증을 느낄 수 있는 생명체인 동물이 인간의 도구로 사용되지만, 생명체로서 최대 한 존중하자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동물에게 민법상 물건이 아닌 인간과 같은 생명체로서 제3의 법적 지위를 부여하였고, 유럽연합에서 가장 먼저 동물 보호를 국가 목표의 하나로 정한 것처럼 그 지위가 높다. 동물 보호에 관한 일반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으로 동물보호법이 있으며, 동물의 도살, 개 사육, 이용 동물사육 등에 관한 유럽연합의 지침은 국내법화 되어 각종 법령으로 구체화하였다. 현재 독일의 동물 보호와 관련해서 문제되는 것으로 이용 동물의 사육 방법을 동물의 종에 맞도록 바꾸려는 것과 동물 실험 및 운송, 도살 시 인도적인 처우 등에 관한 것이다. 특히, 동물의 종에 적합 한 사육이라는 윤리적 목표와 경제성이라는 두 가지 목표의 조절을 위해 독일의 동물 보호법은 구체 적인 사항을 법률과 법령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현실적으로 적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독일 정부는 소비자가 동물 보호를 제대로 한 상품을 구입하도록 함으로써 일상생활에서 직접 동물 보호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그 밖에 애완견, 공중도덕의 문제, 동물 실험 등과 관련해 서는 현재 독일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서도 논의되고 있다. 󰠲󰠲󰠲󰠲󰠲󰠲󰠲󰠲󰠲󰠲󰠲󰠲󰠲󰠲󰠲󰠲󰠲󰠲󰠲󰠲󰠲󰠲󰠲󰠲󰠲󰠲󰠲󰠲󰠲󰠲󰠲󰠲󰠲󰠲󰠲󰠲󰠲󰠲󰠲󰠲󰠲󰠲󰠲󰠲󰠲󰠲󰠲󰠲󰠲󰠲󰠲󰠲󰠲󰠲󰠲󰠲󰠲󰠲󰠲󰠲󰠲󰠲󰠲󰠲󰠲󰠲󰠲󰠲󰠲󰠲󰠲󰠲󰠲󰠲󰠲󰠲󰠲󰠲󰠲󰠲󰠲󰠲󰠲󰠲󰠲󰠲󰠲󰠲󰠲󰠲󰠲󰠲󰠲󰠲󰠲 1. 동물 보호를 둘러싼 사회적 배경 FES-Information-Series 동물 보호를 논하기에 앞서, 우선 동물과 인간관계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동물을 인간의 도구로만 인정하는 견해, 동물을 인간과 같이 고통을 느끼는 생물로 인정하나 동물보다는 인간 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견해, 동물을 인간과 동등하게 보는 견해에 따라 동물 보호에 대한 시각 은 매우 달라진다. 독일의 경우, 크고 작은 동물 보호 관련단체에 가입한 사람들의 수가 백만 명에 달하는데, 그들이 말하는 동물 보호의 내용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시골 농장에서 자유롭게 노닐고 있는 닭, 주인과 함께 공원에서 자유롭게 뛰어 놀고 있는 개 를 만나게 될 때 우리는 동물 보호의 필요성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동 물들이 자신의 종과 습성에 맞게 살아가고, 불필요한 고통이나 상해를 받지 않도록 하자는 동 물 보호의 원칙이 잘 지켜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고기를 먹고, 모피 및 피혁 제품 을 사용하고, 동물 실험을 하는 한 동물 보호의 원칙은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관계만은 아니 다. 다만, 인간을 위해 이용되는 동물들의 생존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생명체로서 존중하자는 동물 보호의 일반적 의미는 소비자나 축산업자, 피혁업자 또는 동물 실험자의 입장에서 완벽하 게 지키기 어렵다. 관련 있는 이익 집단과의 이해 조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가족의 일 원으로 여기는 애완동물의 경우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어느 정도 제한이 따르게 된다. 동물 보호의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독일은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유 럽연합의 지침을 국내법화 하여 준수하도록 하였으며, 독일 동물 보호법과 그 관련 법령들이 이를 구체화하고 있다. 또한, 독일 연방정부는 동물보호법을 제정, 개정할 때, 적절한 동물 보 호를 고려하여 다른 법익과 비교할 뿐만 아니라 전 유럽으로 더 나아가 세계적 차원의 연구와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2. 동물의 법적 지위 현재 대부분의 국가는 동물의 법적 지위를 물건으로 보고 있다. 동물이 물건의 일종이라면 누군가 동물을 다치게 하거나 죽인 경우 그 동물과 소유주와의 관계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시장에서 형성되는 해당 동물의 가격만큼 손해 배상하면 되었다. 그러나 동물에 대한 인식 FES-Information-Series 변화에 따라 1990년 개정된 독일 민법은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 라는 조문을 둠으로써 동물 에게 사람과 물건 사이의 제3의 지위를 부여하고, 감정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생물로서 그 들의 고유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동물이 상해를 입은 경우 치료비가 동물자체의 가격보다 높다하더라도 치료비를 물도록 요구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인정되며, 동물의 압류 등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동물에 대한 이러한 인식 변화는 독일 기본법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동물 보호는 과거 에 자연보호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동물을 하나의 개체로 보호하는 것은 기본법상 인정되지 않 았다. 따라서 동물 실험이나 마취 없이 동물을 도살하는 것이 동물 보호에 위반된다는 주장은 학문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라는 법익과의 형량 면에서 우선하지 않았다. 2002년 개정된 기본 법에서는 헌법에 적합한 질서의 범위 내에서 동물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국가에 부과함으로써 동물 보호에 대한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하였고, 이는 동물이 생명체를 가진 동료 로 존중받게 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는 동물에 대한 윤리적인 책임을 의미하는 것이지 법적으로 인 간과 동물의 동등성, 즉 인간에게 기본권이 인정되는 것과 같은 동물의 기본권을 인정하는 것 은 아니다. 3. 독일 동물보호법령의 체계와 내용 동물보호법은 동물 보호의 원칙과 도살, 시술, 동물 실험, 동물 거래 등에 관한 내용과 법률 위반 시 제재 및 경과 규정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법의 목적은 인간이 동물을 동료로서 그 들의 생명과 복지를 보호해야 할 책임을 규정하는 데 있으며, 어느 누구도 합당한 이유 없이 동물에게 고통, 질환, 상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동물의 소유자나 관리자는 동물의 종과 그 요구에 맞게 적절하게 먹이며, 돌보고, 행 동할 수 있도록 거처를 마련해주어야 하고, 고통이나 피할 수 없는 불쾌감을 주거나 상해를 끼 칠 정도로 활동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 이는 모든 동물, 즉 축사 안에 있는 소, 돼지, 닭뿐 아 니라 가정 내의 애완 동물, 동물원의 동물, 야생 동물, 유기된 동물, 도살될 동물, 운송 중에 있 는 동물에게도 적용된다. 동물 보호법을 시행하기 위한 동물보호법 시행 규칙과 유럽연합의 지침을 국내법 화하는 내 FES-Information-Series 용을 담은 유형별 법령들이 있으며, 예를 들어 동물 보호의 관점에 입각한 이용동물사육규정, 개사육규정, 도살규정, 동물운송규정과 실험동물신고규정이 있다. (1) 이용 동물 국가에 따라 농업에 이용되는 동물 및 식량, 양모, 가죽, 모피를 생산하거나 다른 농업적인 목적을 위해 사육하는 기타 온혈 척추동물인 농장 동물은 동물 보호법의 적용대상이 되기도 하 고 제외되기도 하는데, 독일은 이용 동물도 보호 대상에 포함시킨다. 동물 보호의 관점만을 강조하면, 자신의 종과 습성에 맞게 충분히 먹고 마실 수 있는 먹이와 물,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공간들이 모두 확보되어야 하지만, 축산업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모든 것을 충족시키게 되면 가격 경쟁력에서 뒤쳐지게 되기 때문에 양자의 이해 조절이 필요하 다. 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경제성은 높으나 동물의 자연스러운 습성에 반하는 산란 닭의 닭장 사육(배터리 우리 사육) 문제이다. 1984년 가금류 농가단체 대표자들의 요구로 제정 된 산란 닭 규정은 닭 한 마리당 A4 용지의 2/3에 달하는 면적(450㎠)을 배정하고, 알을 낳는 공간이 특별히 만들어지지 못한 공간에서 사육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를 비롯한 여러 주는 이러한 밀집 사육을 동물보호법 위반으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결국 1999년 연방헌법재판소는 닭이 날개를 펼치거나 제대로 움직일 수 없으며, 알을 낳는 장소조차 마련되지 않은 공간과 알을 낳게 하기 위해 강제로 굶기거나 하루 종일 인공 조명을 하는 등 생체 리듬을 잃게 하는 상황을 금지하지 않는 현실로 인해 동물들이 서로가 서로를 쪼는 등의 이상 행동을 초래하였으며, 그 결과 동물 보호 원칙에 위배되므로 위헌을 선언하였다. 그 후 새롭게 제정된 동물 보호-이용동물규정은 2011년 말까지 배터리 사육을 전면금지한 유럽연합의 지침을 받아들여, 기존의 배터리 우리 사육은 2006년 말까지만, 면적이 조금 넓어 진 상태로 허가가 난 배터리 우리 사육은 유럽연합이 정한 것처럼 2011년 말까지만 가능하도 록 규정하였으며, 그 이후로는 평지에서 닭을 키우는 방법 등의 대체 방법을 채택하도록 규정 하고 이에 대해 정부 지원을 하고 있다. 이 규정에 따르면, 산란 닭장의 경우는 현재 바닥 면적 은 200cm x 150cm, 높이는 바닥으로부터 적어도 200cm 떨어져야 하고, 모래 목욕을 할 수 있 어야 하며, 바닥은 철망이 없는 특별히 보호된 공간에서 알을 낳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또한, 동물들이 동시에 활동할 수 있는 운동 공간이 확보되어야 하며, 닭장에 인공적인 조명을 사용할 경우 적어도 밤 중 8시간은 조명을 줄여야 한다. FES-Information-Series 그러나 시설 개조 등의 부담을 이유로 축산 농가의 반발이 잇따르자 2004년 말 닭 한 마리 당 약 800㎠(A4 용지는 634㎠이다) 정도의 공간을 확보할 경우에는 배터리 우리에서 키울 수 있도록 규정을 다시 한 번 개정하여 유럽연합의 권고를 받아들이기를 주저하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돼지사육규정에서 더 심해서 유럽연합의 지침에 따른 돼지 사육의 최저 필요 면적 등을 현재 적용시키지도, 법령의 내용도 정하지 못한 상태이다. 이 때문에 독일은 유럽재판소에 제 소되어 있고, 유럽위원회에 벌금을 물어야 할 처지에 있다. (2) 동물 실험 동물 실험은 동물 실험 이외의 방법으로 대체(Replacement), 실험동물 수의 감축(Reduction), 고통의 경감(Refinement)이라는 3R 원칙을 지켜야 한다. 독일 동물보호법의 경우도 이를 독립 된 장으로 상세히 규정하고 있다. 동물 실험은 원칙적으로 필수적인 경우, 즉 인간의 질병 치 료나 장애 예방을 위한다거나 환경 위험성에 대한 인식을 위해서, 기초 연구를 위해 필요한 경 우에는 인정된다. 실험 대상으로 감각 생리학적으로 통증을 느끼는 감각이 덜 발달된 동물에 대한 실험을 우선적으로 행하며, 그 동물로는 실험의 결과를 알아보기 어려운 경우에만 온혈 동물을 사용하고, 최종적으로 척추 동물에 대한 실험은 마취 상태에서 행해야 한다. 척추 동물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은 관할 행정 기관에 실험 계획서를 제출하여 인가받아야 하는데, 행정 기관은 동물 실험이 필수적인지, 실험 기관의 동물의 복지 상태에 대하여 심사하 게 된다. 동물 실험 후에도 실험의 이유, 사용된 동물의 종류와 수, 실험하는 사람 등을 기록하 여 3년 동안 보관해야 하고, 관할 행정 기관이 열람을 요구하는 경우에는 이를 제출해야 한다. 또한, 실험 기관은 동물 실험의 남용을 막기 위해 수의학이나 생리학을 전공한 사람을 동물 보 호 담당관으로 임명하여 실험 시 동물 보호의 준수 여부를 감시, 조언한다. 다른 대체 수단이 있을 경우, 화장품과 무기 테스트 등을 위한 동물 실험은 금지된다. 그러 나 유럽연합의 지침에 따라 2009년부터는 대체 수단이 없다하더라도 화장품테스트를 위한 동 물 실험은 완전히 금지된다. 또한 2005년에 발효된 폐수분담금법과 폐수처리법에 따라 그 동 안 동물 보호 측면에서 문제가 된 폐수 오염도 측정을 위한 황금 잉어의 사용을 완전히 폐지하 고 물고기 알로 실험을 대체하도록 하였다. FES-Information-Series 과거에는 생물학, 의학 또는 수의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양심상의 이유로 살아있는 개구리 의 배를 갈라 심장 근육의 구성이나 작동 양식을 관찰하는 동물 실험에 참여하기를 꺼려 학업 을 중단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수업 중 동물 학대에 반대하는 학생 그룹(SATIS)이 대체 방법 을 발굴해내고, 법적인 투쟁도 벌였다. 연방행정재판소는 학생들의 양심의 자유와 교수의 강의 방법 선택과 학문의 자유를 다투는 사건에서 교수에게는 수업 방법을 선택할 특권이 있으며, 동물 실험을 대체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제시해야 할 입증 책임은 학생에게 있다고 판시하 였다. 즉, 동물보호법에서는 동물 실험이 생물학, 의학, 수의학을 전공하는 대학 수업에서와 동 물 치료를 보조하는 기관의 교육에서 동물 실험이 가능하지만, 시청각 자료나 컴퓨터 시뮬레이 션을 통해 동물 실험을 대체할 수 없을 경우에 한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2002년 개 정된 기본법에 동물보호규정이 도입되었으므로 앞으로 학생들에게 동물 실험 대체 방법에 대 한 입증 책임을 지우는 판례에 변화가 올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3) 애완견과 위험한 개 독일에서는 현재 개 칫솔이 트렌트 상품으로 인기를 끌고 있고, 애완견 패션 산업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 공원에서는 개가 목줄을 풀고 자유롭게 뛰놀기도 하고, 인도에서는 입마개를 쓴 큰 개나 목줄을 맨 개를 볼 수 있다. 동물 보호법과 동물 보호-개사육 규정은 개가 머물 장소의 필요 면적 및 환경을 명시하고, 사료 및 보살핌, 한 사람이 기를 수 있는 개의 마릿수 제한, 사육자의 지식과 능력에 대한 요구 조건들 및 특별히 공격적인 개의 품종 간 교배 및 사육 금지에 관해 규정하고 있다. 개는 바깥 에서 운동할 기회가 보장되어야 하며, 사회적 접촉이 가능하도록 소유주는 신경을 써야 한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8주 이전의 강아지는 어미에게서 떼어 놓아서는 안 되고, 바깥에서 한 장소에 묶어둘 경우에도 최소한 앞으로 6m, 옆으로 5m 정도는 활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개 끈의 넓이도 적당해야 한다.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기 위해 귀나 꼬리를 자른 개를 전시해서도 안 된다. 애완견을 기르는 경우, 법은 소유주에게 타인과의 관계에서 소유한 개가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다루어야 할 의 무를 부과하고 있다. 애완견을 보유할 수 있는 자의 연령은 18세 이상일 것과 보유할 수 있는 개체수도 제한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의 조례에 따라 위험한 개가 아닐 지라도 개 소유자는 개가 일정한 연령(주에 따라 3-6개월)이 되면 지방자치단체의 세무 당국에 신고하고, 세금을 내야 하는데, 그 액수는 종류에 따라 다르다. 투견의 경우에는 고액의 세금이 부과되고, 맹도 FES-Information-Series 견, 보호견, 양치기 개 등의 실용견은 세금을 면제해 주고 있다. 등록을 한 경우 개에게 허가증 (신분증)이 발급되고, 신분증을 달지 않고 밖에 나갈 수 없다. 고양이나 승마용 말에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으면서 개만 부과하는 것은 반사회적이고 평등 원칙에 맞지 않다는 주장도 있으나 연방행정재판소는 이것이 헌법상의 평등 원칙에 반하지 않는다고 판시하였다. 각 주의 개보유법에서는 일반적으로 모든 개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예방하고자 보 도, 상점, 도심, 군중이 많이 다니는 도로 등에서는 개가 특별히 흥분 상태에 처할 수 있기 때 문에 목줄을 매도록 하며, 울타리가 없는 공원, 식물원, 어린이 놀이터에도 목줄 의무를 부과 하고 있다. 2000년 함부르크의 어느 학교에서 놀던 학생이 개에게 공격을 당하여 사망한 사건이 사회적 문제가 되자 독일 연방정부는 2001년 4월 21일 위험한 개의 퇴치에 관한 법률 을 제정하였다. 이 법은 핏불-테리어, 아메리칸 스태포드쉐어-테리어, 스태포드쉐어-불테리어와 불테리어 4종을 위험한 개로 지정하여 그 보유를 엄격히 제한하였다. 위험한 개를 소유하려면 해당 관청에서 허가를 받아야 하며, 그 조건으로는 소유주가 만 18세 이상이고, 신체적으로 개를 안전하게 줄 에 묶어 데리고 다닐 수 있어야 하며, 필요한 전문지식과 신뢰성을 갖추고 이를 증명하기 위한 자격증을 소지해야 한다. 또한, 형법에서는 이러한 품종의 개를 수입, 수출하는 것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처벌 받도록 되어 있다. 이에 위에 언급한 개를 키우거나 사육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직 업 행사의 자유와 평등 원칙이 위 규정으로 인해 침해되었다는 취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 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위험한 개를 품종으로 정한 것과 이를 제한한 것은 공공복리를 위한 타 당한 규정이나 이 문제가 동물 보호와 관련되기 보다는 위험 방지 목적이 강하다고 보아, 법제 정 권한이 연방이 아니라, 주에 있다고 보고 소송을 무효로 선언하였다. (4) 동물의 인도적 운송과 도살 독일은 동물의 운송과 관련하여 유럽지침 등을 국내법적으로 수용한 운송 과정의 동물 보호 규정 을 두고 있다. 척추동물을 이동시킬 때는 각각의 동물이 방해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공 간을 확보해야 하고, 먹이와 물도 일정한 간격으로 제공해야 한다. 2시간 이상 한 곳에 머물 경우에는 먹이와 물을 제공하여야 한다. 동물을 싣고 내릴 때 바닥이 미끄럽지 않도록 장치를 해야 하며, 포유류 등의 머리, 귀, 뿔, 다리, 꼬리 등을 높이 들어 올려서는 안 된다. 동물을 FES-Information-Series 이동하는 자는 동물 소유자의 주소와 일시, 목적지를 적어 보유해야 하고, 관할 행정청의 허가 를 받은 통지서를 소지해야 한다. 또한 동물을 용기에 담아 보낼 경우 운송에 걸리는 시간이 12시간 이상 될 경우에 동물이 수신자에게 도착되기 전까지 먹이를 먹이고 물을 마실 수 있도 록 조치하여야 하고, 되돌아오게 될 경우를 대비하여 이에 필요한 물과 먹이를 확보해야 한다. 동물 보호법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척추동물의 경우는 마취로 고통을 느낄 수 없도록 한 후에 도살하도록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보완으로 유럽연합이 제정한 도축 시점까지의 동물 보호에 대한 지침이 국내법화 된 동물 보호-도살 규정 이 있다. 이에 따르면,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흥분, 고통, 불쾌감 또는 상해를 일으키는 경우에만 고통 없는 도살의 예외를 인정할 수 있다고 한다. 도살 전에도 동물들이 혹독한 날씨에도 견딜 수 있도록 적당한 크기의 공간과 물을 제공해 야 한다. 도살장에서도 동물의 건강 상태는 하루에 두 번씩 검사하고, 아프거나 상처를 입은 동물은 즉시 도살해야 한다. 또한, 갑각류는 끓는 물로, 돼지는 이산화탄소 가스에 적절한 시간 노출하여 죽이도록 하는 등 도살 방법에 대하여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4. 연방 정부의 지원 활동 연방정부는 이용 동물의 사육을 동물의 종에 적합하도록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생산자들에게 사육 시설 정비를 위한 재정 지원 등의 조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인식하고, 의식 있 는 소비자 행동을 통해 동물 보호를 염두에 둔 이용 동물의 사육이 가능하다는 점에 착안하였 다. 결국 소비자가 동물의 종에 맞게 생산된 생산물을 그에 상응한 가격으로 구입하겠다는 결 단을 해야 실제로 동물 보호에 걸맞은 이용 동물의 사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연방정부는 2002년 자유롭게 자란 것이 더 맛있다 라는 표어 아래 산란 닭의 사육 방법과 계란의 원산지 표시를 정착시키기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 이에 2004년 1월 1일부터 적용된 계란의 표시 규정 에는 모든 A등급의 계란에 사육 방식, 지역과 생산 농가를 표시하게 하고, 포장 계란에 한 표 시는 소비자가 잘 읽을 수 있어야 하며, 문제가 발생했을 때 관할 행정기관이 직접 반환하도록 하고 있다. 새로운 규정은 지금까지 사육 방식과 지역만을 표기하도록 한 것에 비해 확실히 개 선되었고, 소비자들이 계란의 표시를 통해 의식적으로 동물에 적합한 사육 형태의 계란을 사도 록 유도하고 있다. 또한, 육류 위생과 관련한 원산지 표시를 하여 소비자가 동물의 종에 맞는 사육을 한 것을 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FES-Information-Series 2003년 11월에는 학생들에게 학급 단위별로 닭은 어떻게 사나 란 주제로 경시대회를 개최하 였다. 그 결과 2004년 말까지 거의 만여 명의 어린이가 닭의 사육 과정을 관찰하고, 800여 개 의 학급에서 경진대회를 열어 507개의 창의적인 프로젝트 성과물을 제출하였다. 독일의 동물 보호단체는 법조문의 강화보다는 기존 법률의 엄격한 적용을 요구하고 있다. 2004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는 동물보호단체에게 단체소송권을 주는 내용을 도입하고자 연 방상원에 제출하였으나 통과되지 못하였다. 동물보호법에 따라 연방 소비자보호, 식량 및 농림 부는 3년마다 보고서를 내었으나 2004년 법 개정으로 2년마다 동물 보호의 발전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국회에 제출해야 하며, 2005년 현재 제9차 보고서를 발간했다. 5. 독일의 동물 보호에 대한 평가 과거 공개적으로 동물을 학대하는 것이 인간의 감정을 해친다는 이유로 형법에서 처벌하던 규정이 1972년 동물의 생명보호 내지 건재를 위한 목적으로 동물보호법을 만들었고, 1986년 동 물보호법 개정에서는 인간이 동물을 같이 살아가는 동료 로서 그들의 생명과 복지를 보호해 야 할 책임을 지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동물 보호가 형법에서도 부수적으로 다루던 문제에서 이제는 새로운 동물보호법, 더 나아가 문화를 선도하는 법으로까지 발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럽연합의 동물보호지침이라는 우산 아래 독일의 동물 보호는 과연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 가. 독일은 동물 보호를 유럽연합에서 처음으로 국가의 목표로 정한 나라이지만 산란 닭과 돼 지 사육에 관한 유럽 지침을 국내법화하지 못하고 계속 문제가 되고 있는 현실을 볼 때, 동물 보호법의 임무인 윤리적 원칙과 학술적, 경제적인 요구 조건들을 상호 조화롭게 고려해야하는 일은 험난해 보이기만 한다. 그러나 다른 법들과는 달리 동물 보호와 관련해서는 사회적 공감 대를 바탕으로 선진화된 규정을 예시하는 성격보다는 현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현재의 학술적인 자료를 근거로 문제점을 해결하는 규정을 만드는 수순을 밟는다고 볼 때, 독일의 동 물 보호법은 하나의 이상이라기보다는 현실에 바탕을 두고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가장 진보적 인 법률로 세계 각국의 동물보호법에 모범이 되고 있다. 독일의 생명 윤리 논의 신 동 일,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 2003년 1월 󰠲󰠲󰠲󰠲󰠲󰠲󰠲󰠲󰠲󰠲󰠲󰠲󰠲󰠲󰠲󰠲󰠲󰠲󰠲󰠲󰠲󰠲󰠲󰠲󰠲󰠲󰠲󰠲󰠲󰠲󰠲󰠲󰠲󰠲󰠲󰠲󰠲󰠲󰠲󰠲󰠲󰠲󰠲󰠲󰠲󰠲󰠲󰠲󰠲󰠲󰠲󰠲󰠲󰠲󰠲󰠲󰠲󰠲󰠲󰠲󰠲󰠲󰠲󰠲󰠲󰠲󰠲󰠲󰠲󰠲󰠲󰠲󰠲󰠲󰠲󰠲󰠲󰠲󰠲󰠲󰠲󰠲󰠲󰠲󰠲󰠲󰠲󰠲󰠲󰠲󰠲󰠲󰠲󰠲󰠲 독일의 생명 윤리 논의는 분명한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 독일 기본법 제1조에 명시된 바와 같이 인간의 존 엄성은 불가침적 가치이다. 그리고 국가는 존엄성 보호를 위해 최상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인간 생명권에 대한 최대한의 존중과 배려는 독일 사회의 종교적 체험과 정치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배아 실험과 인간 개체 복제, 그리고 유전자 정보 등과 같은 광범위한 문제에 대한 독일 생명 윤리의 입장은 대부분 원칙적인 해결에서 합의점을 찾고 있다. 인간의 생명에 대한 불가침성과 배아나 수정란까지 포함하는 인간성 개념이 그것이다. 인간은 수정 이후부터 법적으로 보호되며, 그에 대한 개입이나 실험은 금지된다. 인간 개체 복제는 인간의 존엄성을 직접 침해하는 사안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는 신념과 가치에 반하는 행위로 평가된다. 물 론, 출생 이후에만 인간으로 인정하는 현실적인 제안을 하는 일부 견해도 있다. 새로이 입법된 배아줄기세포 의 수입과 이용에 관한 법률 (StGZ)은 이전의 배아보호법(EmSchG)과 비교하여 완화된 법 정책을 구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소수의 관점은 전체 독일의 생명 윤리 논의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와 유사한 문제인 유전자 정보 문제 역시 개인의 사생활 보장과 정보 보호의 전통에서 파악하고 있다. 유 전 정보의 특성상 개인적 권리로 보지 않고 사회적 집단 권리로 이해하는 태도 역시 사회주의로 대변되는 독 일 사회의 또 다른 특성으로 보인다. 1990년대 중반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생긴 생명 윤리에 대한 타협점은 독일 관념철학의 유산을 그 대로 물려받고 있으며, 적극적인 대화와 설득으로 이미 완숙된 이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현재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정책적 요소에 대한 합의점을 발견하려고 노력 중이다. 그 노력 역시 기존의 흐름을 크게 벗어나지 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 1. 상 황 FES-Information-Series 독일의 생명 윤리에 관한 논쟁은 최근 들어 급격히 철학, 인문학과 법학에서 가장 격렬한 토론의 대상이 되 고 있다. 여기서 생명 윤리란, 생물과 특히 인간에 관한 연구와 관련된 금지와 허용의 이해 기준을 의미한다. 생명 윤리 논의의 중심에는 생명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와 연구와 실험 허용의 한계에 대한 목적이 포함된 다. 1970년대에 생명체의 기본 단위인 DNA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생물학과 관련된 의학, 생화학, 제약학과 같 은 분야는 급격히 발전하였다. 인간 유전체의 비밀이 풀리기 시작하였고, 그로 인해 매우 놀랄만한 과학적 진 보가 있었다. 생명공학에는 몇 가지 희망적인 가설들이 있다. 예를 들면, 자연적 생식 방법을 통하지 않아도 새로운 개체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인간 복제)과 유전자를 조작하여 새로운 방법으로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가설(유전자 치 료), 그리고 유전자 변형을 시도하여 다음 세대에게 무한한 잠재력을 부여할 수 있다는 생각(우생학)으로 사람들이 생명공학에 많은 투자를 했다. 그러나 이를 실현하기 위한 기술의 윤리적 문제 역시 공존한다. 개별적으로는 인간 복제와 유전자 치료, 그리고 배아 실험 등과 같은 사안들이 주로 윤리적 갈등을 빚는 문제들이다. 윤리적 갈등의 근저에는 새로운 기술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과 그로 인하여 발생될 인간과 생물 정체성의 위기감이 있다. 생명 윤리에 관한 견해 대립은 새로운 생명공학에 대한 사회적 수용 가능성과 밀접하다. 생명 윤리에 관한 독일의 입장은 분명하다.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원칙에 따른 생명 윤리의 제도적 보호 에 충실하다는 생각이다. 현재 생명 윤리에 관한 선도적인 주장들은 독일의 기본적 입장에 따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독일이 생명 윤리와 관련하여 이미 30여 년의 오랜 논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에 대한 철학적 이해가 있기 때문이다. 2. 전 제 생명 윤리에 대한 기본 이념은 각기 다르다. 예를 들면, 실용주의 철학이 기본적인 이념으로 자리 잡고 있는 영미 식의 생명 존중 사상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관념적인 이해를 중심으로 하기보다는 연구의 자유와 실질적인 사회적 이익을 중시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전통적으로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개념적인 분석을 토대로 해석하는 대륙식의 기본 사상은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체의 연대성이라는 기본 이념의 이해에서 시작한다. 생명 윤리에 관한 이해와 분석이 한쪽은 생명공학과 대립적인 개념으로, 다른 한쪽은 생명공학에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파악하는 방식의 차이는 바로 기본적인 이해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독일의 생명 윤리의 기본 전제는 먼저 종교적 토대와 정신적 토대로 구분된다. 여기서 다시 정신적 전제에는 첫 FES-Information-Series 째, 생명공학의 불확실성에서 비롯되는 잠재적 위험성과 둘째, 인간의 수단화 금지 원칙이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 다. 1) 종교적 이념 독일 사회는 기독교적인 전통이 살아있는 사회이다. 비교적 개신교의 경향이 뚜렷하고, 천주교의 전통 역시 남 부 독일을 중심으로 일정한 정신적 연대를 구성하고 있다. 독일 사회의 이러한 전통에 따라 인문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자연과학과 같은 정신에도 기독교 사상은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생명 윤리에 대한 이해 역시 종교적 인 측면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어떤 측면에서는, 종교적인 기본 정신이 순수 과학적 논의를 주도하는 현상도 볼 수 있다. 현재 독일의 압도적 다수는 수정 이후부터 바로 인간으로 인정하는 견해에 찬성하고 있다(소위 수정시설 Kernverschmelzungstheorie ). 매우 제한적으로만 출생과 정상적인 사회생활의 조건이 갖추어져야 인간으로 인정 하는 소수 견해가 있다(의사능력설 Willensf ä higkeitstheorie ). 의사 능력을 기준으로 정하는 견해에 따르면, 정상적 으로 분만이 이루어져도 실제로 환경에 적응하여 생활할 수 있는 일정 시기가 되어야 인간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사능력설은 매우 제한적으로 주장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수정을 인간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는 종교적인 관념에 따른다. 수정을 기준으로 인간을 이해하기 시작하 면 당연히 수정란에 대한 실험이나 폐기 등의 행위는 반종교적일 뿐 아니라 범죄로 추정하며, 대부분의 생명공학 실험은 직접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불법적인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반면에, 의사능력을 기준으로 인간과 잠재적 인간을 구분하는 견해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잠재적 인간에 대한 허용 가능한 실험을 정당화할 수 있다. 그러나 독일의 생명 윤리에 대해 대다수가 수정을 바로 인간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엄격한 그노시 스적인 종교적 이해도 가능해진다.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인 한스 요나스 (Hans Jonas) 는 1994년 자신의 저서 생명 의 원리 에서 종교적으로 이해되는 생명 철학을 논의한 바 있다. 그가 주장하고 있는 존재론적 생명 철학의 구조는 현재 생명 윤리에 대한 독일의 보편적인 이해와 일치한다. 2) 철학적 이념 독일 관념 철학의 중요한 논객인 임마누엘 칸트 (Immanule Kant) 의 사상은 생명 윤리에 매우 구체적인 공준을 제공하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과 존재론적 생명 철학의 굳은 신념은 그의 정신적 영향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 칸트 의 유명한 주장인 타인을 목적으로 대하고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 는 말은 생명 윤리에 대한 논쟁에서 중심을 이루 고 있다. 인간 복제나 배아 실험에서 희생될 수 있는 생명 존재에 대한 존중과 배려 의무는 인간 존재를 궁극적으 FES-Information-Series 로는 도구화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더욱 강조되기 때문이다. 철학적 전제로서의 도구화 금지 원칙 은 이미 호르크 하이머 (Max Horkheimer) 가 구체화한 것처럼 독일의 이념적, 사상적 토대를 이루고 있다. 칸트의 이와 같은 생각은 소위 세속적인 합리주의자 들의 착상에 대한 반론에 이용되었다. 법철학자 노베르트 회르스터 (Nobert Hoerster) 를 중심으로 하는 일부 견해는 인간의 생명에 대해 상대적인 견해를 가진다. 이들은 주 로 영미 분석 철학의 입장을 수용하여 인간의 생명은 생존 그 자체가 아니라 생존하려는 현실적인 욕구 를 가져 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기준에 따르면, 배아나 이미 뇌파가 정지한 인간, 그리고 극단적으로는 자기 의식이 없는 사람은 이미 삶에 대한 배려 권리를 잃은 것으로 파악된다. 생명 윤리에 대하여 존재론적인 착상을 거부하는 견해들은 생명 존재에 대한 사회, 구성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회의론적 전통에 선 이 견해들은 생명의 취급과 대우에 관한 현실적 합의가능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소수의 견해들은 현실적으로 독일 사회에서는 물론이고 독일의 정신에서도 이질적인 것으로 보인다. 철학적인 전제에서 칸트의 목적, 수단 공식과 전통적 독일 철학의 존재론적 설명 방식은 여전히 빛을 발휘한다. 다만 다양한 생명공학의 기술에 대한 설명을 위해서 기존의 철학이 설명할 수 있는 범위는 한계가 있다. 현실적으 로 말하면, 다른 어떤 사상과 마찬가지로 독일의 철학도 현대의 생명공학 기술에 대하여 분명한 대답을 주기 어렵 다. 특히, 생명 창조의 또 다른 방식인 인간 개체 복제와 타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제한적 배아 실험을 판단하는 문제는 지금까지의 독일 철학의 사유 방식으로는 생소한 것이다. 생명 윤리에 관한 적극적인 옹호자인 프라이부르크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 (Peter Sloterdijk) 처럼 인간의 생명 자체의 존재론적인 전제에 동의하지 못한다면 더욱 그럴 수 있다. 3) 법이념 독일에서 생명 윤리 논의를 위한 현실적인 근거는 독일 헌법 제1조 제1항 제1문과 관련한 법이념이다. 1948년 전면 개정된 독일 헌법 제1조 제1항 제1문은 분명하게 인간의 존엄은 침해될 수 없다 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제2 조 제항은 모든 사람은 생명권과 신체적 완전성을 향유한다 라고 규정하고 있다. 현재 독일의 모든 법률 규정과 법해석은 이 두 조문의 관계성에서 생명 윤리의 기본적 근거를 해석하려 하고 있다. 법이론적으로 인간의 존엄에 관한 해석은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노베르트 회르스터를 중심으로 하는 합리주 의적인 법이론은 독일 헌법상 인간의 존엄성을 생물학적인 보호와 사회적 생존권으로 구분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인간이기 위한 사회적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이해한다. 그러므로 완전한 주체로 인정할 수 있는 인간과 보호 대상인 인간이 구분된다. 소위 보호 대상인 태아와 배아는 배려 정책의 대상일 뿐이다. 이러한 주장은 매우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착상에서 주장되고 있다. 세속적인 합리주의라는 평가를 듣는 이러한 견해는 독 일 내에서도 점차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FES-Information-Series 그러나 여전히 독일의 법학은 생명에 대한 원칙적인 해결을 중시하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명시적으로 보호하 고, 그에 따라 모든 인간은 생명과 신체에 대한 보호 주체라는 헌법 규정이 의미하는 것은 공리주의적인 철학이나 세속적 합리주의에 의한 인간의 개념적 제한에도 불구하고 원칙적으로는 수정 이후의 모든(잠재적) 인간에 대한 배려 의무가 국가와 사회에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혀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일부 비판에도 불구하고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가장 분명하게 인간의 시작은 수정이 이루어진 직후 부터 인정된다는 결정(BVerfG 39, 1)을 내렸다. 독일 헌법의 분명한 입장은 모든 인간 의 해석에서 수정란과 배아 역시 그 배려 대상으로 감안한 점과 인간의 존엄성 의 개념을 단지 사회적 실존 조건만이 아니라, 생물학적 생존 조건마저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 라, 독일의 법이념은 실질적인 생명 보호의 최우선적 배려 의무를 국가와 사회에 부여하고 있다. 그에 따라 1990 년 제정된 배아보호법(Embryonenschutzgesetz, ESchG)과 2002년 제정된 배아줄기세포법(Gesetz zur Sicherstellung des Embryonenschutzes im Zusammenhang mit Einfuhr und Verwendung menschlicher embryonaler Stammzellen, StZG)은 위와 같이 해석한 독일 헌법의 다수 견해를 현실화하고 있다. 법이념은 사회의 윤리적, 도덕적 이해를 반영한다. 독일 헌법과 개별 법률에서 추구되는 생명에 관한 이해 방 식은 생명공학에 관한 위험성과 자제를 희망하는 독일 사회의 규범을 담고 있다. 생명 윤리에 관한 객관적인 한 계와 정도에 관한 사회적 합의를 이미 법제도와 관련지어 이해하는 사고방식은 법이 사회 전반에 대한 내재적 의 사소통의 실천적 역할을 담당한다는 근대법 이론의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결국 생명 윤리의 실질적 내용은 법 형식의 내부에서 결정될 수 있는 틀을 형성하고 있다. 3. 이 해 1) 논증 구조 독일 생명 윤리의 전제를 충족하기 위하여 수정된 인간 배아는 출생 이후의 인간과 동일한 존재임을 증명해야 한다. 수정란과 배아가 출생 후의 인간과 동일한 존재 가치를 갖는다는 주장의 근거는 세 가지 논증들에 따른 것 이다. 첫째, 동일성 논증, 둘째, 잠재성 논증, 셋째, 연속성 논증이다. 이미 생물학적으로 확인된 사실은 인간의 개 체 발생과 분화 과정은 자연적 연속성상에 절대적으로 의존된다는 점이다. 인간 생명에 관한 조작은 일시적 단계 개입 이외에는 불가능하다. 인간 복제 라는 기술적 단어의 실질적 의미는 수정 과정에서 단지 핵만을 교체하여 정 상적인 자궁에 주입시키는 단순 작업을 의미한다. 그 이외의 모든 과정은 자연적 절차에 의존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생성과 분화, 발전은 대부분 자연적 과정에 따른다. FES-Information-Series 동일성 논증은 수정 이후의 모든 과정이 자연적으로 진행되어 출생하는 인간과 수정란은 존재적으로 동일하다 는 전제를 인정한다. 이러한 수정란과 출생자의 동일성은 또 다른 논증, 연속성 논증으로 보강한다. 인간은 수정 이후 세포 분할을 통하여 전배아-배아-태아의 단계로 진행되며, 결국 모체와 분리되어 독립한다. 각각의 단계는 각 기 다른 존재가 아닌 연속적인 존재 로서 발전한다. 이와 조금 다르게 잠재성 논증은 배아나 수정란이 갖는 잠재성에 대한 주장이다. 인간의 발생과 발전은 생물학 적인 자연적 연속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인위적인 개입과 조작은 일정 단계에 단순히 순간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고, 다른 모든 절차는 자연적 발생 과정으로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수정란과 배아는 자연적 과정의 첫 단계 가 이루어지면 인간의 잠재성을 완전히 갖추게 된다. 잠재성과 연속성, 그리고 동일성이 인정되는 한 국가는, 수정란과 배아는 출생 후의 인간과 동일한 존재로서 추 론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독일의 이해는 다음과 같은 연방헌법재판소의 간결한 표현에 담겨있다. …배아는 인간으 로 발전하는 어떤 존재가 아니라 이미 성장하는 인간이다. (BVerfG 88, 203) 2) 원칙과 기준 위와 같은 전제에서 확립되는 생명 윤리 원칙들은 다음과 같다. 자율성 원칙, 선행 원칙, 정의 원칙 등이다. 연 구의 자유와 관련하여 존중되는 자율성 원칙은 무제한적인 자율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문제시되는 자율 성(Autonomie)은 일정한 원칙을 준수하여 허용되는 자율성을 의미한다. 또한, 선행 원칙, 또는 악행 금지 원칙은 타인에게 선행을 할 적극성과 악행을 금지할 소극성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 행위 기준이다. 마지막으로, 정의의 원칙은 생명 윤리를 위하여 전제되는 구체적인 정의 원리와 일치할 것을 요구하는 기준이다. 이와 같은 생명 윤리 의 원칙들에서 도출되는 구체적인 권리는 다음의 7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실존을 위해 최소한의 조건을 제공받을 권리, 둘째, 최소한의 자율성을 누릴 권리, 셋째, 극심하고 지속적 인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넷째, 개인의 사생활을 보장받을 권리, 다섯째, 타인의 의식에 대한 장기간의 영 향력을 금지하는 정신적 완전 보장 권리, 여섯째, 법적 주체로서의 권리, 일곱째, 위의 권리에 대하여 극단적인 굴 욕감을 느끼거나 자존을 박탈당하지 않을 권리 등이다. 소위 권리의 앙상블 이론 이라고 하는 법철학의 구체화 작 업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의 존엄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이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권리 내용으로 이해될 수 있 다. 구체적인 인간의 존엄에 반하는 행위는 객관적 윤리에도 반하는 행위로 평가될 수 있으며, 자율적 연구의 범위 를 초과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생명 윤리 판단의 대상이 되는 실질적 내용 역시 구체화된 기준으로 선별할 수 있다. 3) 대상 FES-Information-Series 현실적으로 문제가 있는 생명 윤리의 대상은 인간 개체 복제에서 논의하는 인간의 실질적 존엄성 침해와 배아 실험의 허용 여부와 관련된 인간의 시기와 종기, 유전자 치료와 검사에서 논란이 생길 수 있는 타인에 의한 유전적 조작, 개인의 유전 정보에 관한 남용과 처분 권한과 같은 사항들이다. 간략하게 본다면, 독일 생명 윤리 논쟁의 중 점적인 사항은 PID(착상전 진단술), 배아실험, 치료적 복제이다. 유전정보의 문제는 이미 정보보호에 관한 제도적 보장 안에서 해결된다. 먼저 인간 개체 복제에서 논의되는 인간의 존엄성 보장은 철학적 논증인 도구화 금지의 원칙 에 따라 이루어진 다. 인간 개체 복제란, 체세포 핵이식을 통하여 자연적 생식 작용 없이 체외에서 이루어지는 무성 생식 방법을 말 한다. 1997년 영국의 로슬린 연구소에서 처음 탄생된 복제 양 돌리의 경우가 바로 이 방법으로 태어난 최초의 동 물이다. 이 기술을 인간에게 적용하려는 시도는 인간의 존엄성에 반한다는 지적이 다수의 견해이다. 인간의 존엄 성이 처음부터 끝까지, 또는 사후까지 존중될 수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관념은 인간이 생산되는 존재가 아니라 탄 생되는 존재라는 주장을 지지한다. 배아 실험의 경우는 인간 개체 복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논의된다. 왜냐 하면, 배아 실험의 범위와 인간 개체 복제의 범위는 상당 부분 기술적인 공통분모를 갖기 때문이다. 특히 줄기 세포의 이용과 관련된 치료적 복제의 문 제는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다. 배아 실험은 윤리적으로 심각한 논쟁이 진행되는 장소이다. 배아 실험 자체를 직접 적인 인간의 완전성 침해나 훼손으로 볼 수 있느냐에 따라 이후의 행위에 대한 의미가 확정될 수 있다. 배아 실험 은 생명 윤리의 대부분의 원칙들과 기준에 따라 제한받을 뿐 아니라 위반의 경우 일정한 법적인 책임이 따르는 대 상이다. 독일의 해결 방식은 다소 우회적이다. 배아 실험과 치료적 배아 복제를 엄격히 금지하면서도 외국에서 수 입된 배아에 대한 연구 가능성은 극히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세 번째로 유전자 치료술의 경우는 조금 더 복잡한 윤리적 논쟁이 예견된다. 유전자 치료술은 시술자의 자율적 인 동의를 통하여 후대의 유전적 형질이 변경되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느냐가 문제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전자 치료술은 적극적 우생학 을 허용할 수 있는지의 문제와 동일하다. 유전적 형질 변화를 야기하지 않는 체세포 치료 술 은 허용하는 반면, 유전 형질의 변화를 초래하는 배아줄기 세포 치료술 은 윤리적으로 제한하고 있다. 그 이유 는, 후세대의 유전적 형질에 대하여 전세대는 대리 동의할 수 없다는 것과 그 변형의 위험성 때문이다. 현재 후자 의 범주에 속하는 유전자 치료술의 허용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못하였다. 네 번째의 문제는 유전 정보의 남용과 처분권의 귀속 문제이다. 유전 정보는 다른 신상 정보와 달리 잠재적 가능 성이 매우 정확하고 광범위하다는 특성을 지닌다. 또 하나의 특성은 유전 정보의 처분권이 정보소지자 일개인에게 인정되느냐가 관건이다. 먼저 유전 정보의 남용에 대해서 살펴보면, 유전 정보를 분석하면 개인의 성격이나 질병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독일의 생명 윤리는 사생활 권리 와 알고 싶지 않은 정보에 대한 무지의 권리 를 보호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에 따라 보험회사나 일반 기업이 보험 계약자나 고용인의 유전 정보를 수 FES-Information-Series 집 또는 획득하는 행위 자체를 금지하고 있다. 반면, 유전 정보의 처분권은 새로운 쟁점이다. 왜냐 하면, 한 개인의 유전 정보 공개 결정은 효과가 그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유전 형질을 소지한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율권에 대한 새로운 제한이라고 평가되는 유전 정보의 처분권 귀속 범위는 유전 정보와 관 련하여 새로운 논의를 야기하고 있다. 생명 윤리의 대상은 실제로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훨씬 초과하고 있으며 계속 새롭게 등장한다. 새로운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그리고 빠르게 진보하는 생명공학의 변화된 모습은 기존의 윤리와 사상으로 이해하고 분석하기 매 우 까다로운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의 생명 윤리 논쟁은 구체적인 사안을 해결하는 방식보다는 원칙 을 깊이 있게 성찰하여 개별 사안을 포섭시키는 다소 전통적인 이해 방식을 선호한다. 다만 그 논의를 위한 가능 성은 언제나 열려있다. 4. 대화 구조 독일 생명 윤리의 합의 절차가 갖는 특성은 정보를 제공받는 개방적 대화의 가능성이다. 1) 정보 공개 독일의 경우는 생명 윤리의 실질적 문제 대상과 생명공학의 현실을 파악하기 위하여 국가 주도로 수년에 걸쳐 조사와 검토를 선행하였다. 법학자인 벤다 (Benda) 교수가 주도한 벤다 보고서는 독일 전역의 생명공학 연구소와 기업의 실태와 주요 생명 윤리에 대한 논쟁을 정리하여 의회에 보고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이 보고서를 토대로 수많은 토론회와 공청회가 열렸다. 현재 이 보고서는 독일의 생명 윤리에 관한 중요한 기준이다. 토론회와 청문회는 이제 거의 일상적인 생활의 한부분이다. 언론과 방송은 십여 년간 생명 윤리에 대한 특집을 기획하고 있다. 생명 윤리에 대한 대다수의 논쟁과 토론은 일부 특정한 학자 간의 논쟁이나 제한된 수단을 통해 서가 아니라, 공식적이고 개방된 통로를 통하여 정보와 논쟁을 제공한다. 정보를 독점하지 않고 토론의 수위 역시 제한하지 않는 것이 독일 생명 윤리 논쟁의 특징이다. 의회 역시 법안과 현안 검토를 위하여 앙케트 조사위원회 (Enquetekommission) 내에 생명 윤리위원회를 두고 있으며, 행정부 역시 상시적인 심의와 토론을 위하여 총리의 자문 기관인 생명 윤리 자문단을 두고 있다. 전자는 심의기관이며, 후자는 단순 자문기관이다. 각각의 위원회에는 당파를 초월하여 철학, 종교학, 의학, 법학, 생물공학, 윤리학, 생화학자들이 지속적으로 개별적 사안에 대해 자문 과 심사를 할 수 있게 되어 있으며, 이 검토 자료와 결과 역시 모두 일반에게 공개된다. 생명 윤리에 관한 내용이 많은 논쟁에도 불구하고 큰 틀에서 적절한 합의를 만들어내고 있는 이유는 이와 같은 정보 공개와 참여에서 비롯되는 상호 간의 신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2) 대화 FES-Information-Series 독일 생명 윤리의 논의는 매우 다양하다. 다양한 근거와 주장이 혼재한다. 같은 원칙에 찬성하는 사람도 개별 적인 예외를 정하는 문제에서 결론을 달리한다. 예를 들면, 독일 적녹연맹 정부(Rot-Gr ü n)의 구성원 간의 생명 윤리에 대한 갈등은 더 이상 생소한 일이 아니다. 10명이 토론하면 10가지의 견해가 나온다 라는 말은 가장 적절 한 비유가 될 것이다. 인간 개체 복제에 대한 적극적 금지를 주장하는 사람도 배아 실험에 대한 제한적 허용을 제안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양한 견해들의 혼재가 혼란을 만들어 내거나 토론의 정체현상을 야기하지는 않는다. 구태여 하버마스 (J ü rgen Habermas) 를 거론하지 않아도 공개적 토론과 대화는 독일의 전통이다. 이러한 전통은 생명 윤리 논의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수많은 토론과 대화가 발표되고 방송이나 언론을 통해 일반인에게 알 려진다. 대화를 통해 확립되는 원칙과 허용할 수 있는 한계 설정은 생명 윤리에서 거론되는 위험성의 감소와 윤 리적 공황을 예방하는 안전장치로 이해되고 있다. 5. 그리고 미래 합의를 이룬 생명 윤리에 관한 논점들은 이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국내적으로는 이미 관련 법률을 정비하여 생명공학과 의학적 실험에 대한 객관적인 범위를 제시해주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독일의 생 명 윤리 논의가 국제적 기준으로 확장되고 있다. 1996년 유럽연합에서 체결한 생물학 및 의학에 적용하는 인간의 권리와 존엄 보호를 위한 협약 과 1997년 체결된 부속의정서는 독일과 프랑스가 주도하여 유럽의회에 상정되었다. 이 협약의 근거를 이루는 원칙들에 대하여 독일식 접근과 유럽식 타협이 이루어졌다는 평가를 듣는다. 더 나아가 2002년 유엔이 준비 중인 인간복제금지협약 은, 독일이 적극적으로 주장하여 추진되고 있다. 2002년 12월 27일 태어난 세계 최초의 복제 아기 이브 (Eve) 의 출산은 독일 생명 윤리 논의에 새로운 쟁점으로 등장하고 있다. 독일의 자연 과학자들도 이 성과의 과학적 가치에 대해 의심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독일은 현재 비윤리적인 과학적 현실의 규제와 제한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으며, 국제적인 협력을 요구하고 있 다. 독일 의사협회장인 호페 (J ö rg-Dietrich Hoppe) 는 2002년 12월 31일 FAZ(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짜이퉁)과의 대담에서 인간 복제를 시도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거나 모든 인간의 생명에 대한 무가치성을 주장하려는 간교한 사람이다 라며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이를 기회로 치료 목적의 복제 허용 문제 역시 강한 금지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독일의 생명 윤리는 더 이상 사람들의 관념 속에 머물러 있지 않다. 생명 윤리는 헤겔 (G.W.F. Hegel) 의 말을 빌자면, 이미 추상화 단계를 거쳐 구체적인 기준으로 실현되고 있다. 생명 윤리에 대한 논의는 이제 구체적인 생명 보호법의 문제로 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