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어느 봄날의 동화. 믿기 어려운 민주화의 초상 1) 모니카 디아스 포르투갈 카톨릭 대학교 현대 학문에 많은 영향을 준 카오스 이론은 지구 한쪽 끝에서 나비가 날 갯짓 하면 그것이 지구 다른 한쪽 끝에서 폭풍을 일으킬 수 있다고 설명한 다. 1974년 4월 25일 포르투갈의 혁명이 가져온 결과를 생각하면 이 법칙 은 분명히 정치학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 같다: 24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 간에 몇 명 되지도 않는 젊은 중간급 장교들이- 아주 놀랍게도- 피를 흘 리지도 않고 48년 동안 전체주의적으로 통치해 온 구시대적인 권위주의 독 재를 종결시켰다. 이로써 거의 500년의 역사를 지닌 유럽의 마지막 식민 대 국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혁명은 평화적으로 진행되었고, 혁명군을 지지 하는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군인들에게 카네이션을 선물하였기 때 문에 카네이션 혁명으로 불린다. 4월 25일의 사건은 전 세계에 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사무엘 헌팅턴은 1991년의 저서에서 포르투갈의 혁명을“민주화의 제3의 물결”의 시작으로 보았다.(그에 따르면 제1의 물결은 1820년에, 제2의 물 결은 1945년에 시작되었다.) 그 이유는 1974년의 혁명이 스페인과 그리스 와 같은 다른 유럽의 국가들에서 뿐만 아니라 남미,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 에서 정치적 변화를 가져온 시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아가서 미 국을 비롯한 다른 서방 국가들의 외교 정책에도 강한 영향을 미쳤다. 유감스 럽게도 많은 경우에 포르투갈의 혁명을 계기로 시작된 해방에 이은 민주화 를 향한 노정에서 갈등, 테러 그리고 전쟁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국제적인 민주화의 맥락에서 볼 때 포르투갈은 분명히 특수한 경우이다. 1) 2007년 6월 18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이 공동으로 주최한 6월 민주항쟁 20돌 국제 학술 심포지엄“민주화 이후의 정치 발전- 한국,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의 경험과 기억”에서 발표 1 그 특수성이 아직까지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포르투갈 민주주의의 정치 문화를 결정한다. 만일 포르투갈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안정적이고, 갈등을 담지 해 낼 수 있으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고 또 얼마나 활발한가를 조사 하고 싶다면, 그리고 포르투갈 민주주의의 문제점과 정치에 대한 환멸이나 민주시민교육과 같은 현실 정치적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면, 그리고 포르투갈의 오늘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고 싶다면, 1974년의 카네이션 혁 명을 관찰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포르투갈 민주주의의 근본이 거기에 있 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를 돌이켜 보는 이 과제는 유감스럽게도 너무 소홀히 다루어 지고 있다. 우리는 현재 밀란 쿤데라가 말하는‘웃음과 망각의 사회‘에 살면 서 아직 젊은 민주주의에서 망각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지 못 한다. 지난 30년 동안 많은 것이 변하였다. 국가가 완전히 변동하였고, 근대 화, 자유화되었으며 해방되었다. 케이블과 인터넷이 확산되었고 우리는 소비 하고 서로 의사소통하며 모든 것을 초대형 엑스라지로 즐긴다. 독재 시기에 서 점점 더 멀어지면서 그에 대한 기억도 불분명해지고, 의식도 사라져 간 다. 특히 이것은 민주화 이후에 태어나서 성장한 젊은 세대에서 흔히 관찰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의 발표 제목을“포르투갈. 어느 봄날의 동화”라고 붙였 다. 동화에 대해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유형의 반응을 보인다. 동화 가 아름답고 서정적이어서, 너무 설명력이 없지만 그래도 그것을 미화하여 일종의“신화”를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이야기를 전혀 진지 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뿐더러(동화는 그저 환상일 뿐) 그것을 학술적 으로 분석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면 언젠가는 그것의 마법에서 깨어나 그냥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나는 포르투갈의 혁명이 바로 이런 운명을 겪었다고 본다. 1974년의 사건 은 미화되었고 서정시의 주제가 되었지만, 정치적 사실로써 분석된 적이 없 다. 분석과 조사가 결여된 채 그 사건은 점점 희미하고 과장된 이야기가 되 어 마치 청소년이 되면 더 이상 듣기 싫어하는 어린이 동화처럼 과장된 동 화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그렇게 혁명과 관련된 것들을 망각하기 시작했고, 그에 대한 관심과 정보가 부족해지면서 그 역사마저 잊었다. 그러나 독재 시 2 대의 과거와 혁명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그런 민주주의에 미래가 있을까? 민주주의 의식도 기억의 바탕 위에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기 억을 상기하지 않고 비판적으로 분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민주주의의 유산 을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을 것이고, 그로 인한 결과는 당연히 엄청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면 포르투갈의 정치적 상황과 민주주의가 현재 직면한 다양한 과제들 을 논하기 전에 포르투갈 민주화 역사의 중요한 배경에 관해 간단하게 설명 하겠다. 이러한 설명 없이 오늘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으며 해석 또한 불가 능하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민주주의에 관해 함께 생각하고 의견을 교환하 기 위하여 포르투갈 민주화 역사의 본질적인 것만 요약하여 설명하겠다. 독재 포르투갈에 다른 유럽 여러 국가에서처럼 첫 번째 공화국(1910-1926)이 비극적으로 실패한 것에 대한 반응으로 독재가 등장하였다. 1926년의 군사 봉기로 포르투갈 역사상 처음으로 시도되었던 의회민주주의가 종결되었다. 당시 전통적으로 보수적이며 가톨릭 신도가 많고 교육 수준이 낮은 농촌 주 민이 대부분이었던 포르투갈 국민들은 의회민주주의에 그다지 동조하지도 않았다. 나아가 자주 교체되는 공화국 정부는 그 내부의 의견과 지속되는 분 열로 인해 정치적, 경제적 질서를 보장하지도 못하였다. 봉기를 주도한 새로 운 독재 세력은 곧 안토니오 살라자에게 권력을 주었다. 이 조심스러우며 드 러나지 않으면서도 아집이 아주 센 지방 출신의 교수는 1930년부터 엄격하 게 국가를 지배하였다. 1932년에 그는 무솔리니의 본을 받아서 조합주의적 이고 권위주의적 국가 형태인 에스타도 노보(새로운 국가) 헌법을 제정하였 다. 이 국가는 전통적이고 교회 중심적 구조를 기반으로 반민주적, 반의회적 그리고 반자유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에스타도 노보는 구시대로 회귀하는 독재 체제로 모든 경제적, 사회적 근대화나 변화에 반대하며 생산 수단의 산 업화와 국민의 교육까지도 거부하고, 가족, 질서, 규율, 노동, 겸손, 신중함, 전통과 같은 가치만을 강조하였다. 그는 파시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규모 의 스펙터클한 모든 것을 기피하고 농민들의 서정적인 민속과 행복한 겸손 3 을 이상으로 만들었다. 국가 행정은 학자와 관료들이 주로 담당하였고, 경제 는(농업, 산업과 은행) 몇몇 영향력 있는 집안이(이들은 또한 정부에도 참 여하였다) 담당하였다. 북부 지역에는 소수의 소규모 영농업자와 작은 가내 공업도 존재하였다. 살라사는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모두 거부하고 재정 원조도 부분적으로 는 받지 않았다 . 그의 목표는 전 세계에 식민지를 소유한 포르투갈을 다른 세계와 시간으로부터 완전히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 그의 의도대로라면 포르 투갈은 다른 외부 세계에 종속되거나 다른 나쁜 의도에 휘말리게 되는 위험 을 피할 수만 있다면 가난한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었다 . 그는 포르투갈을 외부 세계로부터 차단하는 대신 대양을 누비던 뱃사람과 영웅들의 과거를 위대한 신화로 설명하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 다민족 문화 ” 의 대제국을 선전하였다 . 이러한 고립은 특히 민주화와 아프리카 독립 정치에 대한 국제적 압력이 증가한 1945 년 이후 정부가 주도한 국가의 슬로 건이 되었다 .“ 우리는 혼자라는 것에 자부심을 갖는다 .” 그렇다고 해서 포르투갈이 완벽하게 잠자는 숲속의 미녀와 같이 깊은 잠 에 빠진 것만은 아니었다 . 억압적인 정권은 예를 들어 , 비밀경찰 , 검열 , 정치 범 검거 , 고문 , 단일 정당 , 강경한 문화 정책 , 출입국 통제 , 노조 금지 그리고 의사의 자유 , 언론의 자유 , 집회의 자유를 제한하는 등 다양한 파쇼적인 국 가 통제 기구를 동원하였다 . 2) 포르투갈의 국민들은 소수의 엘리트를 제외하면 비정치적이며 교육을 받 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 그들은 정치 체제의 조용하지만 아주 효과적 인 폭력으로 인해 점점 더 소극적이 되었다 .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수동적으 로 정부가 정하는 게임 규칙을 받아들였고 자신들이 자유로울 수 있는 사적 공간으로 숨어버렸다 . 파두 (fado) 라고 불리는 비극적인 사랑과 삶을 체념으로 받아들이는 슬픈 노래가 이 시대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해 준다 . 조용한 권위 주의와 폭력을 사용할 의사도 , 갈등을 담당할 의지도 없었던 국민의 소극성 3) 2)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할 사건이 있다 . 1961 년 영국의 변호사 페터 베넨슨이 창립한 엠네스티 인터내셔날은 신 문 보도를 통해 2 명의 포르투갈 대학생이 리사본에서 체포되었는데 그 이유가 단지 이들이 카페에서 당시에 금지된 단어였던 “ 자유 ” 라는 말로 건배하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그 후 베넨슨 변호사는 포르투 갈 정부에 이 두 학생의 석방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보내도록 전 세계 엠네스티에 공지하였다 . 3) 금지된 공산당과 대부분 망명한 소수의 지식인들 외에는 저항운동이 없었다. 4 으로 인해 독재 체제가 장기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 그리고 서구 국가 들 , 특히 미국과 바티칸이 이 체제를 묵인하였다 . 그 이유는 냉전의 맥락에 서 볼 때 우익의 전통적 독재가 좌익 혁명의 도미노 효과를 가져 오는 것보 다는 바람직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 나아가 전략적인 이유에서 아조렌에 나토 군사 기지가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 4) 그러나 독재 체제의 견고함으로도 사회 변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들을 피할 수 없었고 변화하는 시간과 세계 속에서 이런 문제를 막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다 . 포르투갈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더욱 낙후되었 고 , 이러한 상태는 농업에 투자를 잘못하여 더욱 심각해졌다 . 농민들은 아무 런 기반 시설이 마련되지 않은 도시로 밀려들었고 노동자들은 기술을 배우 지 못하였다 . 1960 년에서 1974 년 사이에 약 백만 명의 포르투갈 사람들이 이 민을 떠났고 국가는 해가 갈수록 가난해져 갔다 . 이러한 문제들은 오랫동안 식민지와의 “ 교역 ” 을 통해 숨길 수 있었다 . 이렇게 문제가 많고 , 유지 불가능 한 제국의 종말의 시작을 고한 것은 아프리카 전쟁이었다 . 1961 년 식민지에 서 자유를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 이에 대한 리사본의 반응은 먼저 아집과 고집 그리고 비유동성으로 가득한 것이었다 . 전쟁이 시작되면서 곧 바로 오 랫동안 지속되는 이런 갈등은 군사적 수단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 이것이 지속되면 결국에는 국가가 경제적 , 군사적 그리고 도덕적으로 완전히 파산할 수도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 1968 년 살라자는 의자에서 떨어져 의식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져서 1970 년 사망할 때까지 깨어나지 못하였다 . 그의 후계자 마셀로 카에타노는 ( 그 역시 교수였다 ) 집권 초기에 개방을 약속하였지만 궁극적으로는 독재를 이어갔다 . 68 년 학생 운동 이후의 국제적인 소요로 인해 그의 독재는 더욱 강화되었다 . 대학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엄격해졌고 노동자들이 어떤 경미한 저항의 움 직임을 보여도 초기에 진압되었다 . 그러나 가장 심각한 것은 전쟁 문제였다 . 포르투갈의 모든 어머니들이 수년간 군대에 가서 국민 누구도 찬성하지 않 는 전쟁에 참가해야 하는 아들 때문에 걱정하였다 . 승산 없는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희생은 갈수록 더욱 커졌고 군대의 여건이 부분적으로는 열악하기 4) 이런 이유로 포르투갈은 나토의 창설 멤버가 되었고, 유엔 조약의 민주주의와 인권 관련 조항을 공개적으로 어겼음에도 불구하고 1955년부터는 유엔의 멤버도 되었다. 5 그지없었다 . 시민사회와 교회의 불만과 불평은 억압될 수 있었지만 군대 내 에 쌓이는 불만과 불평은 억압될 수 없었다 . 아프리카의 전투 병력뿐만 아니 라 전군 내에서 군대의 엄격한 위계질서와 전쟁 그리고 독재에 반발하는 저 항이 점점 분명해졌다 . 1974 년 3 월 군인들로부터 신망이 가장 높았던 장군 중에 한 사람이 전쟁과 정부의 권위주의적이고 고립적인 태도를 비판하는 “ 포르투갈과 그 미래 ” 라는 책을 발표하였다 . 많은 젊은 군인들에게는 이 책이 결정적인 신호였다 . 몇 주되지 않는 사이 에 “ 군대의 운동 MFA” 라고 스스로 칭하는 작은 그룹이 봉기 계획을 세웠다 . 이들은 민간인 , 특히 지식인들 사이의 반체제 인사들과 많이 접촉하였고 , 봉 기를 통하여 오랫동안 그들이 느껴왔고 비밀 모임에서 토론해 온 것들을 표 현하였다 . 이들의 주목적은 전쟁의 종결과 군대의 조건 개선 등과 같은 군사 적인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정치적인 것이었다 . 이들의 가장 중요 한 목적은 처음부터 독재를 제거하는 것이었고 , 이를 통해 달성하고자 한 것 은 탈식민지화 , 발전 그리고 민주화 이 세 가지였다 . 5) 이들 젊은 장교들은 처음부터 권력을 잡을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유를 쟁취하고 국민에 게 주권을 주어서 민주적 제도를 갖춘 정치 정당 , 자유선거 그리고 민주적 의회주의적 체제를 건립하도록 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 이러한 구조는 분명히 세계적으로 유일한 것이다 . 이들은 자신들의 의도에 걸맞게 1974 년 4 월 25 일의 봉기라는 놀라운 사건을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 와 함께 시작하였다 . 이 노래가 봉기의 신호탄이었고 ( 세계사에서 우리가 노 래로 혁명을 시작했다는 것을 들어보았는가 ?) 이는 시작될 때부터 국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몇 시간 내에 라디오 , 텔레 비전 , 공항 , 경찰 , 도로 , 교량 그리고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한 군인들이 국민 들에게 집에 조용히 머물러있기를 호소하였지만 그들은 즉흥적으로 리사본 거리로 몰려나왔고 입성하는 군인들을 축제의 분위기로 환영하였다 . MFA 의 선언이 라디오에서 읽혀지고 군부의 다수가 , 특히 사병들과 중간급 장교들이 혁명군에 가담하여 시가전이 발생하는 것을 막았다 . 이미 부패할 대로 부패 한 정부는 거의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 왜냐하면 결단력이 없는 국가수 5) 혁명군들의 정치위원회는 이러한 의도를 갖고 페이퍼를 작성하였다. 거기에는 그들의 목적이 전부 나열되었는 데 그 중에는 정당에게 권력 이양, 자유롭고 의회주의적이고 다원적이며 참여적인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6 반 마셀로 카에타노는 자신이 군대에 대항할 수 있는 어떤 수단도 없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피를 흘리는 것을 원치도 않았다 . 그래서 그는 장교들에게 만일에 고위급 장교에게 권력을 넘겨서 그가 두려 워하는 것 , 즉 “ 정부가 거리에 나앉는 것 “ 을 피할 수 있다면 즉시 퇴진하겠 다고 제안하였다 . MFA 는 스피놀라 장군이 권력을 넘겨받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고 , 그 다음 날 텔레비전에서 구국을 위한 위원회의 프로그램을 발표하 였다 . 위원회는 나아가 즉각적으로 전쟁을 종결하고 1 년 이내에 자유로운 선 거를 통해 제헌의회를 소집한다는 목표를 갖고 스피놀라가 이끄는 임시 정 부를 구성했다 . 6) 그 이후 일어난 일들은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 포르투갈 사회는 마치 50 년 동안 누르고 있던 압력 밥솥의 뚜껑이 갑자기 열린 것과 같이 그동안 눌린 증기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 카네이션 혁명 ” 이후 포르 투갈 사회에는 자유와 연대의 믿기 어려운 분위기가 지배하였다 . 그 순간 모 든 것이 가능해 보였고 ,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손으로 세계를 바꿀 수 있으 며 , 함께 더 좋은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느꼈다 . 정치범들이 석방 되었고 , 전쟁이 종결되어 군인들이 아프리카에서 돌아왔고 , 군대는 해방자로 국민들의 신임을 받았다 . 반체제 인사들이 망명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 매일 축제와 데모가 끊이지 않았다 . 그 때는 정치적 희망이 가득한 봄이었 다 . 이 시기의 경험이 포르투갈 민주주의의 유전 인자에 깊게 각인되었고 의 심할 여지없이 전체 민주화 과정에 영향을 주었다 . 정치화되지 않은 시민사 회의 참여 또한 민주주의 발전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 그리고 여기서 강조 해야 할 것은 이들의 정치적 행동들이 대부분 자발적이고 즉흥적인 이니셔 티브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 7) 그러나 모든 것이 카네이션이 아니었고 봄에서 오는 것도 아니었다 . 바로 무더운 여름이 되었다 . 모든 사람들이 놀란 것처럼 독재의 붕괴는 아주 신속하게 진행되었고 극 히 적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평화적으로 이루어졌다 . 그러나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 단순한 산책길은 아니었다 . 그곳에는 힘든 일도 많았다 . 간단하게 이해 6) 카에타노는 다른 정부 요인들과 함께 망명길에 올랐다. 그 외에도 형사 처벌이 전혀 없었다. 7) 예를 들어, 정치범 석방, 비밀경찰 본부 습격 또는 독재 체제의 담당자들을 숙청, 체포하는 것 등. 7 하기 위해 우리는 민주주의로의 길을 5 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 8) 1 단계는 1974 년 4 월 25 일의 군사 봉기 ( 유아기 ), 2 단계는 혁명 과정인 1974-1976( 유 년기 ), 3 단계는 과도기와 시험기 1976-1982( 사춘기 / 청소년기 ), 4 단계는 정착 기로 1982/1986 이후 ( 장년기 ), 마지막 5 단계는 성숙기인 2004 년 이후 ( 중년 의 위기 ?). 2 단계 1 단계는 이미 위에서 자세히 설명하였으므로 혁명에서 가장 복잡했던 시 기인 2 단계부터 시작하자 . 1974 년 5 월에는 이미 포르투갈의 정치 상황이 일 종의 서커스와 같았다 . 권위주의적인 구조는 사라졌고 , 혁명가들과 68 학생운 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포르투갈로 모여들었다 . 매일 정치 집회 가 열렸고 모든 가정에서 마르크스 , 레닌 , 트로츠키 , 체 게바라 그리고 마오 쩌뚱에 관해 토론하였다 . 벽은 정치 구호들로 도배되었고 그때까지 비정치적 이었던 사회는 정치적 갈증을 한꺼번에 해소하였다 . 그러나 갑작스런 자유는 19 세기에 이미 액튼 경이 관찰한 것처럼 빈속에 술을 마시는 효과를 가져왔 다 . 빈 집은 점령되었고 , 독재 지지자들은 망명을 떠났다 . 비밀경찰 요원들이 체포되어 감옥에 갔다 . 기업은 문을 닫았고 , 은행은 해체되었으며 , 농업 기업 들도 해산되어 아프리카 전쟁에서 돌아온 수많은 군인들과 난민들이 살 집 도 일자리도 없었다 . 모든 고교 졸업생들이 대학에 갈 자격이 있다는 결정은 내려졌지만 그들을 수용할 수 있는 대학의 수가 모자랐고 , 수많은 젊은이들 이 할일 없이 거리에 넘쳐 났다 . 이들은 자연스럽게 혁명과 새로이 창립된 과격한 정당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 9) 그 결과 , 전체적으로 간파하기 아주 어 려운 정치적 혼란이 발생하였다 . 새로운 정치 엘리트 , 정치가와 군인들 사이 에서도 매일 불협화음이 생겨났다 .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포르투갈에서는 혁명으로 정치가 군 사화된 것이 아니라 군대가 정치화되었다는 사실이다 . 이전의 위계 구조가 8) 전문서적들에서는 일반적으로 3단계로 구분한다. 혁명기 1974-1975, 과도기 1976-1982, 공고화기 1982년 이후. 그러나 나는 5단계로 구분하는 것이 포르투갈의 민주화 과정을 이해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다. 9) 혁명 전에 이미 공산당과, 독일에서 창립된 사회당이 있었고, 그 후에는 민주주의 국민당과 중앙국민당 그리 고 몇몇 온건파 정당과 많은 좌파 과격파 정당들이 창립되었다. 8 붕괴되어 스피놀라 장군은 그가 생각하였던 것처럼 혁명을 통제하여 군사 독재로 전환시킬 수가 없었다 . 권위주의적인 스피놀라 장군은 혁명 이후 혼 란스런 정치적 상황과 탈식민지화 과정이 지속되는 것 그리고 자신의 권력 이 지속적으로 약화되는 것에 크게 불만을 품고 두 번에 걸쳐 권력 장악을 시도하였다 .(1974 년 9 월의 시도로 그는 국가수반 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 1975 년 3 월의 시도가 실패한 후 그는 망명을 떠났다 ) 그의 시도는 완벽하게 실패하였고 임시정부가 더욱 좌익 성향을 띠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 군사 위원회는 혁명위원회로 교체되었고 , 알바로 쿤할이 이끄는 공산당과 다른 과 격한 좌파 그룹들이 점차 권력을 장악하고 공산주의자 바스쿠 곤살비스가 새로운 정부수반에 임명되었다 . 곤잘비스는 국유화 농업 개혁 그리고 논란이 많았던 사유 재산의 몰수를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 특히 북쪽 지역의 전 통 의식이 강한 주민들과 교회가 재산 몰수에 강력하게 반발하여 공산당 사 무실을 파괴하고 좌파 과격 세력을 마을에서 몰아냈다 . 이러한 충돌의 규모 가 갈수록 커지고 정치적 담론이 경직되고 경제적 , 사회적 문제가 심각해졌 다 . 군중 시위와 반대 시위가 연일 이어졌다 . 이 위기는 곤살비스와 과격파 가 당시 아주 인기 있던 카톨릭 방송국 점령 사건과 “ 레푸브리카 ” 신문을 장 악한 것에 대해 여론이 이를 거부하고 전체주의적 좌파 운동에 저항하면서 더욱 심각해졌다 . 이러한 상황에서도 군부는 또 한 번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 고 , 대통령이었던 고메스 다 코스타 장군도 폭력적인 간섭을 허용할 의사가 없었다 . 이렇게 긴장되고 불확실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1975 년 4 월 25 일의 선거 는 포르투갈의 혁명 과정을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던 국제 사회가 놀랄 정도 로 평화롭고 질서 정연하며 심지어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행해졌다 . 투표 참 여율도 의외로 아주 높았고 (91.7 퍼센트 ) 이 결과는 전 세계 민주주의자들을 열광시켰다 . 그것은 중도 온건파 정당들이 ( 사회당 37 퍼센트 , 민주국민당 26 퍼센트 )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하였기 때문이었다 . 공산당은 겨우 12 퍼 센트 그리고 다른 많은 과격 좌파 정당들은 너무 분열되어 어느 정당도 제 대로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 그 후 온건한 사회당의 당수이자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마리오 수아레스가 정부를 구성할 임무를 부여받았고 제헌의회는 계획대로 의회에서 그 작업을 9 시작하였다 . 그러나 의회의 과반수를 장악하지도 못한 채 중도파의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수아레스는 많이 타협해야 했으며 여러 정치적 어려움을 극 복할 힘이 부족했다 . 더욱이 과격파들은 그의 온건한 정책을 마땅치 않게 생 각하였기 때문에 이를 방해하려고 노력하였다 . 그 결과 , 정치는 더욱 불안정 해지고 정치적 갈등이 지속되어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우스운 상황이 연 출되기도 하였다 . 10) 이 시기는 흔히 “1975 년의 뜨거운 여름 ” 으로 불린다 . 그 것은 마치 아직 어린 민주주의가 모든 소아병을 다 앓아야 하는 것과 같았 다 . 그러나 중요한 것은 폭력을 사용할 여지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 간에도 국가적 폭력이 동원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1975 년 11 월 오텔로 사라비아 데 카바유 대위가 이끄는 과격 좌파 그룹이 공산주의 체제를 도입하기 위해 군사 봉기를 시도하였다 . 그러나 이 시도는 대령 라마유 에아네스를 중심으로 하는 온건파 군인 그룹에 의해 신속하게 저지되었고 , 이로써 국민의 다수가 원하던 온건주의의 길을 확실하게 갈 수 있게 되었다 . 이것은 1976 년 4 월의 총선거와 (1975 년의 선거 결과와 유사한 결과 ) 같은 달 새로운 헌법의 도입에 대한 일반적인 환영의 분위기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 그 후 민주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에아네스가 당선되었다 . 이로써 혁명의 2 단계는 종결되었다 . 1974 년과 1976 년 사이의 모든 사건들은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엘리트뿐 만 아니라 일부는 배우지 못한 비정치적인 단순한 일반 국민들에게도 민주 주의를 실현하겠다는 의지가 포르투갈 사회에 존재하는가를 분명히 보여주 었다 . 이제 겨우 걸음마를 내딛기 시작한 어린 민주주의는 1976 년부터 1982 년 사이 얼마나 부담을 감당할 수 있는가 하는 실질적인 시험에 부딪힌다 . 3 단계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의 어려운 시절에 국민들은 모두 안정을 원하 였고 수많은 토론에 점차 지쳤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 정책의 확실한 방 향에 대한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다 . 경제적 , 사회적 문제는 너무 컸고 정부 10) 한번은 정책 결정이 불가능해 진 것이 좌파의 봉쇄 정책 때문이라며 이에 대항하여 정부가 파업을 하였다. 또 한 번은 의회와 정부가 공산주의 노조원들에게 포위되어 인질로 잡히기도 하였다. 그때 폭력을 사용할 여 지가 많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직접적으로 폭력을 사용한 경우는 없었다. 10 는 몇 주에 한 번씩 교체되었다 . 독재로 인해 50 년 동안 낙후되었던 것을 극 복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해결될 수 있는 과제가 아니었다 . 게다가 전쟁과 자 원 보급 통로이며 특혜를 준 시장이었던 식민지 상실로 인해 . 발생하는 엄청 난 재정 문제 , 약 백만 명에 이르는 난민 , 실업 , 인플레이션 , 충분하지 못한 학교 체제 그리고 전통적인 가치관 , 권위 , 지도자가 상실되면서 발생하는 일 반적인 불안감이 군대부터 가정까지 사회 전체를 지배하였다 . 체제 변화는 신속하게 성취할 수 있는 것이나 정치적 평화와 민주주의는 시간과 인내 , 타 협의 자세가 필요한 것이었다 .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그의 글 “ 문화의 우위 ” 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제도와 정치 문화를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 그의 말 이 맞을 수도 있지만 포르투갈의 맥락에서 보면 무엇보다도 경제적 낙후성 과 전쟁의 결과가 민주화 과정의 핵심적인 것이었다 . 50 년간의 독재에도 불 구하고 국민들이 갖고 있는 전통적이고 온순하며 종교적이고 일반적으로 폭 력을 두려워하는 ( 비 ) 정치 문화가 민주주의로의 평화로운 이행에서 아주 중 요한 요인이었다 . 독재에 지치고 마음 깊은 곳에서 자유와 평화 그리고 민주 주의를 그리는 국민들의 정서가 비교적 빨리 배울 수 있는 정치 교육 또는 민주적 정치 제도 , 민주적 문화보다 훨씬 중요하였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6 년과 1982 년 사이에 내전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 이 여러 번 있었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 그렇다면 어떻게 무력적인 충돌을 피해 갈 수 있었는가 ? 그 원인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 연령이나 사회 계층을 불문하고 격렬하게 혁명에 참여하였던 시민들에게 있었다 (1). 또 다른 하나는 독재 하에서 반체 제 인사로 국민의 신망을 받았던 온건한 엘리트들에 있었다 (2). 여기에 덧붙 일 것은 포르투갈이 ‘ 거의 모두가 모두를 안다 ’ 고 할 만큼 아주 작은 나라여 서 소수의 엘리트들은 이미 혁명 이전부터 서로 상이한 정치적 견해와 상관 없이 가족 간에 그리고 친구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이다 (3). 마리오 수아 레스와 같은 특출한 인물의 역할도 포르투갈 혁명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하 였다 . 나중에 대통령이 된 수아레스는 의심할 여지없이 포르투갈 민주주의에 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 그의 노력과 전 세계적인 네트워크 덕분에 포르 투갈은 외국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5). 이것이 풍랑이 많았던 11 어려운 시기에도 나라가 살아남을 수 있게 해 주었다 . 그리고 미국이 당시 포르투갈의 내부 갈등에 간섭하지 않은 것도 (6) 부분적으로는 수아레스가 있 었기 때문이었다 .( 당시 국제 정치적인 맥락에서 보면 미국의 간섭을 완전히 배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 그렇다면 그것은 혁명의 진행에 아주 악영 향을 미쳤을 것이다 . 그러나 당시 포르투갈의 공산당은 미국이 공격해 오기 를 바라고 있었다 . 그러면 그들이 소련의 지원을 받아 미국을 공격할 수 있 게 되고 이것으로 민주화 과정에 예측하기 어려운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 았다 . 왜냐하면 자력으로 내전 없이 해방과 안정을 이루었다는 것이 중요한 정치적 유산이었기 때문이다 .) 마지막으로 , 군대의 특별한 역할을 강조해야한 다 (7). 이들의 의지와 목적은 처음부터 정권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과 , 자유롭고 시민적인 민주주의의 정치 제도에 권력을 이양하는 것이었다 . 이러한 것들이 혁명의 혼란기에 사회가 갈등을 담지 할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이며 1980 년대 민주주의의 과도기를 넘어서 정착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 4. 단계 1982 년 혁명위원회를 해체하고 정치에서 군을 완전히 분리시키는 헌법이 도입되면서 포르투갈의 민주주의는 완성되었다 . 이와 동시에 민주주의의 공 고화 4 단계가 시작되었다 . 1986 년 포르투갈이 유럽연합에 가입하면서 비로소 정부가 안정되었다 . 1975 년에서 1987 년 사이에는 11 개의 정부가 구성되었고 이중 많은 정부가 몇 주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 그러나 혁명에 지치고 근대 화와 국제화를 통해 삶의 조건이 개선되기를 바라는 국민들이 지지하는 새 로운 정치적 순환이 시작되었다 . 마리오 수아레스가 대통령에 선출되고 , 사 회민주주의 중도우파 정당을 이끄는 카바코 실바가 10 년 동안 여당으로 수 상직을 연임하였다 . 이런 안정성과 낙관적이며 정치적인 분위기는 나라를 십 년 만에 완전하게 근대화시킨 유럽공동체의 많은 재정 지원과 외국 자본의 직접 투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 도로 , 고속도로 , 사회 주택 , 학교 , 대 학 , 병원 , 공공기관 , 문화 시설과 체육 시설 그리고 거대한 쇼핑센터 등이 세 워졌으며 , 이러한 시설들은 국가를 유동적으로 만들었고 경제를 자유롭게 하 였으며 국민의 사회적 유동성을 증대시켰다 . 12 그러나 경제가 이렇게 빠르게 발전하는 사이 우리는 유감스럽게도 역사적 , 문화적 , 정치적으로 과거를 청산하는 것을 이 시기에 잊어버렸다 . 그 원인은 50 년 동안의 낙후함과 검소함을 겪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정치보다는 신 용카드와 핸드폰을 통한 소비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 어떤 사람들은 과 격하였던 혁명기의 경험을 부끄럽게 여겨 우스꽝스러운 장발에 수염을 기르 고 마르크스주적 , 마오이즘적 사회를 달성하기 위해 데모를 하던 젊은 시절 의 사진을 빨리 잊어버리고 모든 것을 젊은 날의 유토피아적 감상으로 돌리 기도 한다 . 다른 한편 , 포르투갈을 우파 권위주의적 구조로부터 해방시키고 개방적이 고 자유로운 사회민주주의 정치를 도입하는 것과 같은 엄청난 변화에도 불 구하고 엘리트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 경제의 자유화와 함께 독재 하에서 이미 경제권을 갖고 있던 가문들이 다 시 복귀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재 대학과 언론 , 기업의 감독 위원회 , 공공기 관 심지어는 정부에도 독재 체제에 근접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다 . 이들은 이 제 아주 민주적인 태도를 보이며 행동한다 . 여기에서 한 가지 언급할 것은 이런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극도로 “ 정치화 ” 되지 않았던 전문 인력이라는 사실이다 . 게다가 이들은 정치적으로 주요 민주 인사들과 항상 절친하게 교 류하면서 국민들에게 신임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 그런 의미에서 포르투갈은 아직도 ‘ 거의 모두가 모두를 아는 ’ 작은 나라이고 , 국민은 일반적으로 (1975 년의 뜨거운 여름을 제외하면 ) 복수 를 하고자 한다거나 원한 을 품지 않는다 . 포르투갈의 사람들은 자주 일정한 정도를 넘어서는 계몽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 많이 토론하고 자주 큰 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그것이 깊이가 있다거나 오래가지도 않는다 . 될 수 있으면 갈등을 피하고자 한다 . 이것은 결국 온건하고 비정치적인 포르투갈 사회의 존재 그 자체와 관 련 있다고 할 수 있다 . 아마도 우리는 포르투갈의 민주주의가 아직도 많이 젊다는 사실을 고려해 야 할 것이다 . 카네이션 혁명의 주역들이 아직 한창 활동하고 있고 정치 , 사 회 분야에서 중요한 책임을 맡고 있다 . 독재와 혁명에 대한 근본적인 분석과 청산은 그런 이유로 아직까지 지체되고 있다 . 13 그 결과 , 1990 년 중반까지 과거 청산의 과제를 다루는 것이 미루어졌다 . 10 년 전까지만 해도 독재와 혁명에 관한 정치교육이 존재하지 않았다 . 한 예 로 ,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역사 수업에서는 1910 년까지만 다루었고 대학 에서도 최근의 역사를 다루지 않았다 . 오랫동안 이 시기에 대한 진지한 학술 적 연구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 1994 년 혁명 20 주년이 되어서야 ( 사회당으로 정권이 교체되고 나서 ) 겨우 역사를 다시 보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 연구소가 설립되고 자료가 조사 , 수집 , 분석되었다 . 학교에서도 독재와 혁명에 관한 수 업을 하기 시작하였다 . 이와 관련된 여러 단체들이 설립되었다 . 몇몇 단체들 은 혁명을 미화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 그러나 그것은 과거 문제를 다루 기 위한 시작에 불과했을 뿐 진정한 의미의 과거 문제에 대한 진정한 고민 은 아니었다 . 5 단계 과거 청산 작업이 부족한 것이 오늘 날에는 아주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 그래서 나는 민주화 공고기의 5 단계를 성숙기이면서 동시에 중년의 위 기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 성숙되었다는 것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은 절대 아니다 .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지속적이고 역동적으로 스스로를 항상 개선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항상 활력이 있기 위해서는 민주주의 도 유동적이어야 하고 항상 스스로에게 자문해야 한다 . 그렇지 않으면 정체 성과 지향성을 상실하고 “ 삶의 의미 ” 를 찾아 나서게 된다 . 그것이 바로 변동 하는 시기에 풍요로운 민주주의가 겪는 중년의 위기라는 것이다 . 민주주의가 성취된 지 30 년 만에 우리의 젊은 세대는 독재와 혁명에 대한 어떤 기억도 없다 . 역사적 주제에 대한 여론조사의 결과는 그림 1 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아주 놀라운 결과를 보여준다 . 그것은 이들이 민주주의의 특별 한 가치에 대해 어떤 의식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 포르투갈에서는 2001 년부터 중도우파 정당이 다시 여당이 되었다 . 그 후 정치적 , 사회적인 우경화 현상을 감지할 수 있다 . 그 때문에 2004 년 4 월 25 일 혁명 30 주년 행사에서 혁명을 “ 진화 ” 라고 재해석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 같다 . 이들의 해석에서는 국가 체제의 전복과 오랫동안 미화되었던 혁명 14 이 아니라 온건파의 승리와 정치 , 사회의 개방 , 국가의 근대화 , 경제성장 , 경 쟁력 그리고 국제적 역할과 같은 민주주의의 성과들이 전면에 부각된다 . 그 러나 민주주의는 자신감을 “ 정상적으로 ” 축하받아야 할 것이다 . 사실 포르투 갈 국민의 대부분은 4 월 25 일에 정치적 집회에서 그들의 자유를 기념하기 보다는 해변이나 카페 또는 편한 집에서 즐기기를 선호한다 . 그리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갖고 무엇을 할 것인가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것이 바로 자유와 민주주의이다 . 아이러니인 것은 다름 아니라 이런 “ 정상화 ” 경향과 사고가 민주적 과정 을 더 이상 혁명이 아니라 진화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이것은 혁명 의 유산과 민주주의의 의미에 대한 열띤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 이 논쟁을 통해서 과거 문제에 대해 새로운 자극을 받았다 . 민주주의의 정상성은 아마도 민주주의가 공고해지고 정착되었다는 가장 좋은 표식이며 동시에 그것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이다 . 자유와 민주적 질서를 달성하는 순간부터 그것은 너무 쉽게 “ 당연한 것 ” 이 되고 , 마치 우리 가 들이마시는 공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그것이 얼마나 삶에 중요한 것 인지 의식하지 못한다 . 결국 민주주의의 정상성에는 천박성의 위험이 동반되 는 것이다 . 천박성이라면 독재를 너무 위해하지 않은 것처럼 설명한다거나 포르투갈 의 독재시기를 안전하고 안정적이며 민족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대제국을 가 졌던 시기로 신화화하려는 시도이다 . 몇 달 전 텔레비전 여론조사에서 살라자가 “ 포르투갈 역사에 가장 위대한 사람 ” 으로 선출되었다 . 포르투갈에 소련식의 공산 사회를 건설하려던 알바로 쿠날이 2 위를 하였다 . 이 결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화를 냈다 . 그렇다면 그것이 비록 ( 별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11) ) 텔레비전 쇼였다고 하지만 이들은 왜 그 여론조사에 참여하지 않았을까 ? 스페인에서 진행된 이와 비슷 한 여론조사에서는 후안 카를로스 국왕이 , 영국에서는 처칠이 , 독일에서는 콘라드 아데나워가 선출되었다는 것이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것이 많다 . 11)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역사상 가장 나쁜 포르투갈 사람이 누구인가 물었다. 여기에서도 살라자가 1위를 하였 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의 후속으로 진행된 여론조사에서도 살라자는 항상 가장 나쁜 사람의 자리를 차지하였 다. 15 이것은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 오늘날 민주적 소극 성이 가장 큰 문제가 되었는가 ? 우리는 아직도 정보가 부족한가 ? 아니면 민 주주의로의 이행이 너무 성급하게 문제없이 부드럽게 진행된 것인가 ? 아니 면 우리가 근대화와 소비에 취해서 정치를 잊어버렸는가 ? 아니면 우리가 이 제 1974 년의 과도한 정치화시기를 극복하고 다시 이전처럼 비정치적인 본성 으로 회귀한 것인가 ? 위에서 언급한 텔레비전 쇼에 여러 가지 부끄러운 면이 있음을 알면서도 나는 이 프로그램으로 인해 민주주의의 유산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시작되 었다는 점에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 무엇보다도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서 내게 일을 더 보태주는 것이 기쁘다 . 그리고 나는 1974 년 당시 어린 아이였지만 그것을 직접 겪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책임감 을 느낀다 . 새로이 진행되는 민주주의 유산에 관한 논의는 우리 모두의 양심에 관련 된 것이고 사회의 정치의식을 다시 활성화시켜 준다 . 그것은 점점 증가하는 정치 혐오감에 대항하는 아주 중요한 성과이다 . 나는 현대 정치에서 이런 정 치 혐오감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세균이라고 본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포르투갈의 민주주의와 민주적 문화는 견고하다 고 생각한다 . 우리의 민주주의가 얼마만큼 부담을 견디어 낼 수 있는가하는 문제는 과거에 이미 수차례 검증되었다 . 포르투갈은 아주 많이 발전하여 이 제는 정치적으로 안정되었고 , 2006 년부터 다시 사회당이 정권을 잡았다 . 사 회당과 민주국민당 양대 정당은 의심의 여지없이 민주주의와 개방적 유럽 정책을 보장하는 근원이다 . 하지만 우리는 앞으로 많은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 유럽의 다른 국가들과 비교할 때 우리는 더 생산적이고 더 근대화해야 한다 . 다원적 , 참여적 법치 국가와 자유의 원칙이 보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민주주의가 더 강력 한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 그것은 민주적 제도를 더 개선하 고 정치가 더욱 시민에게 가까워지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 그 중에 가장 어려운 과제는 국가 효율성과 권력 집중을 피하는 것 사이 , 정부의 결단력과 투명성 / 통제 메커니즘 간 , 그리고 적극적인 지도력과 적극적이고 책임 있는 16 정치 참여 간에 적절한 균형을 찾는 것이다 . 그리고 오늘날의 정치는 사회 경제적 질서의 변동 속에서 앞으로 우리가 내려야 할 어려운 결정들에 대해 설명해 주고 만족시킬 수 있는 역할을 해야만 한다 . 많은 것이 불확실해 보이는 이 불명확한 시기에 한 가지 분명히 알 수 있 는 것이 있다 . 사회적 , 정치적 평화는 항상 잘 기능하는 강력한 민주적 제도 가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 민주주의의 유산이 우리의 장래를 결정하 는 것이다 . 민주주의를 위한 노력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 중년의 위기를 극복하는 문제는 우리 손에 달려 있다 . 이것은 동화가 아니다 ! 이 회의를 준비해 준 여러분께 특별히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 왜냐하 면 이제 더 이상 한 민족 국가의 현상으로만 이해될 수 없는 민주주의의 활 성화를 위해 이들이 큰 기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함께 민주주의를 위해 더 좋은 미래의 길 을 열어갈 것이다 .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