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스페인- 다시 시험대에 선 ‘성공적으로 진행된 정치적 민주화 과정’ 1) 디터 콘니에츠키 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 주 스페인 사무소 소장 머리말과 문제 제기 스페인이 독재에서 민주화로 정치적 전환을 하는 과정에는 명확한 출발점 이 있다. 그것은 1975년 11월 20일 프랑코가 사망한 날이다. 이날 시작된 스페인 민주화 과정이 완결된 것은 사회주의자들이 정권을 넘겨받았던 1982 년 말 또는 스페인이 유럽연합과 대서양연합기구에 가입하던 1985/86년이라 고 대부분의 스페인 사람들은 말한다. 세계 여론은 스페인의 민주화 과정을 일반적으로 기대하지 못했던 특이한 성공 스토리의 전형적인 예로 간주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4년 반 동안 스페인에서 역사적 기억을 다시 상기키는 문제로 인해 열띤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게 들릴 수도 있다.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논란 과정에서 소위 말하는“양분 된 스페인”이라는 수사법이 다시 등장하였다. 이와 함께 오랜 좌우의 대립, 즉 1936년에서 1939년 사이의 스페인 내전과 그에 이어 1975년까지 이어 진 프랑코 독재와 같은 투라우마적 경험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다. 1) 2007년 6월 18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이 공동으로 주최한 6월 민주항쟁 20돌 국제 학술 심포지엄“민주화 이후의 정치 발전- 한국,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의 경험과 기억”에서 발표 - 2 놀라운 사실은 스페인이 경제적, 사회적으로 전례 없이 발전하고 있는 시 기에 과거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공공 예산은 2년 전부터 흑자를 기록하고 있고, 실업률도 2007년 말에는 8퍼센트 이하로 떨어질 것으로 예 상하고 있다. 이것은 스페인의 민주화 이후 가장 낮은 수치이다. 또한 다양한 적응 통합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민자의 증가(지난 6년간 약 4백5십만 명 증가)도 지금까지는 아주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이로 인 해 2004년 이후 약 2백3십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었다. 특히 긍정 적으로 평가되는 것은 노동부 통계에서 정규직 노동 계약이 70퍼센트 이상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거사 문제로 사회적 분열의 골이 깊어가는 한편, 일반적으로 경제적인 호황을 누리고 있는 현재 스페인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까? 대단한 수사적 기교를 동원하여 진행 중인 현재의 논의가 혹시 조금은 억지를 써서 강행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런 점에서 이 논의가 독일의 역사학자 간의 논쟁과 유사하지 않는가하는 의문도 든다. 독일의 논쟁은 전 문가들 중에서도 극히 소수의 엘리트들이 참여하여 학술적 개념과 독트린을 두고 벌인 것이었고, 대중의 광범위한 참여 없이 진행되었다. 그 이유는 대 중이 보는 사회적 문제의 우선 순위가 다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스페인에서 다시 쟁점이 된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일반 대중들이 광범위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두 가지 사실 때문이다. 그 하나는 2000년에 사회당 당수로 선출된 1960년 생인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차파테로가 이미 야당 당수 시절부터 요구했던 역사적 기억을 상기할 것을 2004년 총선거의 선거 프로그램에 포함시킨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2001년에 각 지역 에서 대량 학살 현장을 발굴하기 위한 주민 이니시어티브들이 놀라울 정도 로 많이 결성되었다.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내전 이후 1939년부터 1949년 사이에 처형당한 사람들이었다. 또 다른 놀라운 사건은 2002년 11월 20일, 즉 프랑코가 사망한 지 27년 이 되던 날 일어난 일이다. 스페인 의회가 만장일치로 1936년 7월 18일의 군사 쿠테타를 단죄한 것이다. 물론 그것이 프랑코주의에 대해서가 아니고, 단지 군사 쿠테타를 겨냥하여 그것이 정당한 국가의 헌정 질서를 파괴한 것 이라고 규명한 것이다. - 3 마드리드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한 지 3일 후에 치룬 2004년 3월 14일의 총선에서 사회당이 승리하여 새로 구성한 사회당 정부는 선거 공약을 이행 한다는 의미에서 역사적 기억을 상기하는 논의의 필요성을 다시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 제안은 2002년 만장일치로 군사 쿠데타를 단죄했던 때와는 달리 보수 국민당의 결사적인 반대에 부딪혔다. 그리고 가톨릭 주교협의회도 점점 이에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사회당 정부의 부수상인 마리아 테레사 훼 르난데스 데 라 베가가 2006년 7월 28일 국무회의에 과거사 청산에 관한 법안을 상정하였지만 이 법안은 아직까지 처리되지 않은 채 미제로 남겨져 있다. 지난 몇 주 동안 사회당과 좌파연합이 또 다시 만나,“역사적 기억에 관한 법”이라는 이름하에 결성한 이니셔티브가 다시 활발해졌다. 현재 스페 인의 정치 분석가들은 2007년 5월 27일의 지방선거 이후, 그러나 늦어도 2008년 총선 전까지는 법안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스페인에서 는 왜 이렇게 늦게, 소위 아주 성공적이라는 민주화가 이루어진 지 삼십 년 이 넘어서야 이런 논쟁을 시작하였는가? 민주화 과정에서 무엇이 부족했고, 역사적 기억에 대한 새로운 논쟁이 제기되어야 할 만큼 무엇을 비난 받아야 하는가? 스페인의 내부 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 한국의 청중들이 이 문제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페인 최근 역사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역사적 경로 스페인에서 단일 중앙 국가가 등장한 것은 일반적으로 1492년이라고 본 다. 그때까지 이베리아 반도는 8세기에 회교도가 정복한 이래 약 800년에 걸친 재정복 전쟁을 겪었다. 회교도들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모두 포함하는 이베리아 반도 전체에 다마스쿠스로부터 명령을 받는 칼리프를 설치하였다. 800년간의 재정복 전쟁은“가톨릭 왕들”이라고 불리는 훼르디난도 데 아라 곤과 이사벨 데 카스티야가 그라나다의 회교도를 멸망시킴으로써 최후의 승 리를 거두고 스페인의 중앙 집권 국가를 건립하였다. 재정복 전쟁은 분명히 십자군 전쟁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회교도였던 마우리족과 스페인에 살던 - 4 유대인들까지도 1492년 이후에는 점차 이베리아 반도에서 추방되었다. 1492년은 동시에 스페인 왕의 명을 받은 이탈리아 제노바 공국의 크리스 토프 콜롬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해이기도 하다. 스페인은 종교적인 이유로 포르투갈과 연합하여 한 동안 태양이 지지 않는 세계 제국을 구축하 기도 하였다. 1492년 토르데시아 조약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소위 말하 는“신세계”를 분할하기로 합의하였고, 그 후 스페인은 브라질을 제외한 아 메리카 대륙 전체와 필리핀과 동태평양을 소유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은 그 대신 아프리카, 인도(고아), 인도네시아(티모르), 중국(마카오)과 브라질에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식민지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면서 스페인은 유럽 대륙의 발전에서 점차 고 립되었다. 계몽주의, 초기 산업화, 세속화 그리고 신헌법 운동과 같은 유럽의 신조류들은 19세기 초가 되어서야 나폴레옹의 정복 전쟁이라는 (1808-1814) 직접적인 폭력을 통해 스페인에 들이닥쳤다. 신헌법 운동의 영향 하에 아메리카의 해방 운동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의 모든 식민지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 후 19세기 스페인의 역사는 왕조 간의 갈등과 군부 쿠데타의 반복이라 는 스페인 특유의 정치 현상으로 특징지어진다. 결국 19세기 말 스페인은 쿠바,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같은 마지막 식민지마저 상실하였다. 스페인은 국가 전체가 깊은 우울증에 빠진 것과 같은 상태가 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소위 말하는“98 세대”가 등장하였다. 이들은 근대화 과정에서 스페인이 유 럽에 크게 뒤쳐진 것을 만회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려고 했다. 하지만 이때 이미 대규모 노동 운동이 발생하였고 일부 지역, 특히 카탈로니아와 바 스크에서는 민족주의 운동도 등장하였다. 이렇게 내적으로 복잡한 상황 때문에 스페인은 1차 세계 대전에서 중립을 지키기로 하였고, 또 중립을 지켜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왕과 정부 는 분명하게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으로 규정한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 그 리고 좌파 민족주의자들의 운동 세력들이 서로 피를 흘리며 대결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1923년에는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 즉 현 국왕의 할아 버지는 가톨릭과 안달루시아의 부르주아들의 지원을 등에 업고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의 쿠데타를 지원하여 궁극적으로는 군부 정권의 성립을 돕는 한편, 노동법 제정 분야에서는 사회주의적인 노동조합과 정치가들과 협력하 - 5 기도 하였다. 더욱 심화되던 사회적 갈등, 특히 무정부주의 집단들과의 갈등은 산세바스 티안협약을 통해 처음으로 공화주의 운동이 조직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때 스페인 국왕은 새롭게 국정에 간여하고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을 해임했 다. 후임자는 자유주의 온건파라고 알려졌던 일반적인 평가와는 달리 극단적 으로 반동적인 정책을 강화하였다. 1931년 3월 12일 앞당겨진 지방자치단체 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하였고, 다음 날 국왕 알폰소 13세는 망명을 떠났다. 그리고 1931년 3월 14일 제2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이 발표문에서 스페인 제2 공화국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할 수는 없다. 그 렇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과거 청산 논의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제2 공화 국의 몇 가지 특징들은 간단하게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중 가장 결정적인 특징을 먼저 지적하자. 앞에서 스페인의 중앙집권 국 가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국왕, 교회 그리고 종교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언 급했다. 그것은 그저 예사로 설명한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스페인은 포르투갈, 그리스와는 달리 통일된 단 일 언어 국가가 아니다. 국민의 80퍼센트만이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쓰고 있 을 뿐, 육백사십만 명이 넘는 주민들이 다양한 종류의 카탈루냐어를, 약 칠 십만 명은 바스크어 또는 바스크 사투리를, 그리고 이백칠십만 명이 갈리아 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결국 이미 중세 때부터 스페인에는 중앙 집권 국가로 통일되는 과정 자체를 회의적으로 받아들였던 지역이 존재했다 는 것을 뜻한다. 19세기 유럽의 대부분 지역들에서 헤르더 빌헬름 폰 훔볼트 등의 독일 낭 만주의와 같은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났을 때 스페인도 이러한 움직임으로부 터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스페인 공화국의 주체 세력을 형성하던 근대 화주의자들이 각 지역의 독립적 자치권 운동을 감행하였던 것은 놀라운 일 이 아니다. 제2 공화국은 다른 의미에서도 서부 유럽과 미국 그리고 다른 남 미의 이미 민주화된 여러 국가들의 제도적 틀에 상응하는 변화를 실현시키 는 데 성공하였다. 1931년 말 몇 달 안 되는 짧은 기간 지속된 격렬한 갈등 에도 불구하고 다원주의를 허용하는 헌법이 제정되었다. 그 후 보수 우익의 공화파가 1933년 총선거에서 승리하였고 그들은 복고반동적인 정책을 강행 하였다. 특히 아스투리아 지역에서 혁명적 질서를 실천에 옮기려던 노동자들 - 6 의 봉기가 무참한 억압으로 와해된 이후에 이 정책은 더욱 분명히 권위주의 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그러나 사회적 갈등은 지속적으로 깊어졌고, 이러한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 는 정부의 무능력으로 인해 새로운 선거가 불가피한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 었다. 1936년 실시한 총선에서 좌파 정당들이 승리하여 소위 말하는 국민전 선정부를 구성하였다. 국민전선정부 정책의 핵심은 무정부주의자들까지도 지 지했던 혁명적 토지 개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미 1936년 5월부터는 군 부가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1936년 7월 18일 프랑코 장군의 지휘 하에 있던 스페인령 모로코와 카나 리아 섬에 주둔한 군대의 대부분이 봉기하였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도 스페 인 사람들의 의식 속에 항상 남아있는 스페인 내전이라는 대사건이 발생하 게 되었고, 이 사건이 현재의 역사적 기억 상기에 관한 논쟁의 본질적인 부 분을 이루고 있다. 스페인 내전과 그 결과 스페인 내전은 원래 일어나던 순간부터 스페인 내부의 문제였던 것이 국제 적인 갈등으로 변화되었다. 내전은 1936년 히틀러가 자신의 권력 확대의 최 정점으로 해석하였던 베를린 올림픽이 열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이미 먼저 레옹 블륌 하에 국민전선정부가 형성되어 스페인 의 새로운 변화에 호의를 갖고 지켜보고 있었다. 영국과 다른 서구 민주국가 들도 스페인의 공화국 정부를 지지하였다. 반면에 파시스트가 권력을 장악한 이탈리아와 히틀러 제3 제국 하의 독일은 봉기를 일으킨 장군들을 지지하였 다. 현재 역사학자들은 당시 봉기를 일으킨 장군들이 자신들의 봉기에 공화국 이 그렇게 강력한 저항을 할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는 데 의견이 일치 한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사실이었고 그러한 저항은 봉기가 발생한 몇 달 후에 소련이 공화국을 정치적, 군사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발표하고 그 지원을 신속하게 실행에 옮기면서 더욱 강력해졌다. 히틀러의 독일과 이탈리아를 축 - 7 으로 하는 세력이 봉기한 군부를 전적으로 지원한 반면, 서구의 민주 세력은 1936년 11월에 내정 불간섭의 원칙에 합의함으로써 스페인 공화국의 세력 을 결정적으로 약화시켰다. 거의 3년이 걸린 스페인 내전은 돌이켜 보건데 2차 세계 대전의 전주곡으 로 간주되어야 한다. 서구 연합국들이 불간섭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소련이 공화국의 결정적인 연합 세력이 되었고 프랑코 체제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끊임없는 군사적 지원을 받아 승리할 수 있었다. 내전으로 인해 양측에서 나온 희생자 수는 당시 스페인 인구가 이천이백만 명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것이었다. 역사학자들의 조사에 의하면 직접적인 전투로 인한 희생자의 수가 군인과 시민을 합쳐 이십만 명에 달하 였다. 그 외에도 억압으로 인해 십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민족주의 진영 3만 7천, 공화주의자 7만 명) 1936년과 1939년 사이에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약 육십만 명의 스페인 사람들이 대부분 프랑스로 망명을 갔고, 프랑스를 통 해서 약 십만 명이 남미 각국으로, 특히 멕시코로 떠났다. 1939년 4월 1일 프랑코가 내전 종결을 선언했을 때는 나라가 이미 황폐화 되어 있었다. 국민총생산을 비교해 보면, 생활수준은 1914년 이전의 수준으 로 후퇴했다. 그러나 내전의 종결도 스페인에 내적 평화를 가져다주지는 못 했다. 사형 선고와 사형 집행은 1949년까지 이어졌고 어떤 경우에는 1952 년까지 지속되었다. 이렇게 희생된 사람들 수에 대한 통계는 각 진영마다 약 간씩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전 이후 승자들이 자행한 억압으로 희생 된 사람의 수가 약 십만 명에 달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오늘날 대부분 의견 이 일치한다. 스페인 내전의 국제화에 관해 몇 마디 더 첨부해야 할 것이 있다. 서구 민 주 진영이 중립을 선언함으로써 소위 말하는“자원 국제 용병대”가 조직되었 다. 이 부대는 소련과 코민테른 자문관들의 활동으로 인해 점점 더 공산주의 자들이 주도했는데, 이들의 수가 칠만 명에 달했다. 1938년 프랑코의 승리가 분명해지면서 국제 용병대는 퇴각하고 전쟁 포로가 되어 스페인 수용소에 수감되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 8 1939년부터 1975년까지의 프랑코 독재 제2 공화국에 대한 군부의 승리에서 출발한 프랑코 체제는 처음부터 영원 한“반스페인주의”를 굴복시키고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들이 말하 는 반스페인적이라는 것은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국제적 자 유 비밀 결사를 말하는 것이다. 새로운 국가의 가치는 위에서 언급한 가톨릭 왕들의 전통에 놓여 있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내전은 십자군 전쟁이라 고 불리기도 하였다. 새로운 국가 원수는 승리한 카우디요(Caudillo) 지도자였다. 그는 국가원수 이며 정부의 수반인 동시에 군 통수권자였다. 법, 즉 소위 말하는 기본법을 제정할 수 있는 권리와 국가 원수의 후계자를 임명할 권리는 그만이 갖고 있었다. 1947년 제정된 법에 따르면, 국가 원수의 후계자는 왕실의 후계자 중에서 선택해야 하지만 이러한 규정은 1969년에 와서야 마지막 스페인 왕 의 손자인 현 국왕 후안 카를로스가 프랑코에 의해 후계자로 임명되면서 실 행에 옮겨졌다. 동시에 이 법은 재임 중인 국가 원수, 즉 프랑코의 사후에야 효력을 발휘한다는 규정도 도입되었다. 프랑코 체제에서 국가의 제도적, 권력적 구성은 모든 민주적 권력 분립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보통선거권도 의회 제도를 다시 도입하는 문제 만큼이나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코는 협력적인 이해관 계를 대변한다는 의미에서 중세부터 있던 삼부회와 유사한 의회, 즉 코르테 스를 부활시켰다. 이 과정에서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선거도 치루었다. 그러 나 모든 후보는 민족 운동이 제안하고 국가 원수에게 승인받아야만 했다. 1933년 구독재자 프리모 데 리베라의 아들 호세 안토니오가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포르투갈의 독재자 살라자가 건설한 새로운 국가의 일정한 면을 모방하여“활랑헤 에스파뇰라”(스페인의 군중)를 창립하였다. 이 조직은 형 식적으로는 프랑코 체제의 이념적, 제도적 지원 세력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프랑코 체제 초기 어려웠던 시기에만 해당되는 것이다. 1945년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프랑코 체제는 심각한 시련을 겪는다. 안티 히틀러 연합을 구성한 세력들이 창립한 국제연합(UN)이 1946년에 프 랑코 체제를 히틀러와 연합한 세력으로 규정하고 반스페인 보이콧을 주창하 - 9 였다. 그러나 군사적인 제제까지는 가지 않았다. 이 어려운 시기가 냉전의 시작과 함께 변화를 겪는다. 바로 여기에 한국 전쟁의 발발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국제연합 회원국들의 다수가 공산주 의의 확산을 막기 위한 전투에 참여하였고, 스페인은 이러한 새로운 변화의 덕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스페인은 이제 공산주의와의 싸움에서 특별히 경 험이 많고 전략적으로 훌륭한 연합 세력으로 자신을 부각시킬 수 있었기 때 문이다. 1951년 국제연합은 반스페인 보이콧을 철회하고, 1952년에는 교황 청과 새로운 협약도 맺는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 소외되었던 스페인에게 가장 중요했던 조치는 무엇보 다도 1953년 미국과 체결한 공군 기지 사용에 관한 조약이었다. 이 조약의 체결로 스페인은 엄청난 경제 원조를 받을 수 있었다. 국제연합의 보이콧으 로 인해 마샬 플랜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프랑코 체제에게 그것은 너무 도 귀중한 것이었다. 실제 1953년까지 스페인의 국민총생산은 내전 이전 수 준보다 낮았다. 이런 경제적 낙후성은 프랑코 체제의 경제 정책에 책임이 있었다. 프랑코 정권은 원칙적으로 자급자족의 경제 체제를 고수하였고 개방된 세계 무역으 로 인해 자유주의적 이념과 스페인이 필요로 하지 않는 다른 가치들이 유입 될 위험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유럽의 경제적, 정치적 부흥이 스페인을 완전히 비껴가지는 않았다. 프랑코는 1957년부터 가톨릭교회의 자유주의적인 경제인들을 중용하기 시작 하였고, 여기에 가톨릭 평신도들의 모임인 오푸스데이의 테크노크라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59년에는 소위 말하는“안정법”이 제정되었다. 그 후 스페인은 국제 관광객을 받아들이고, 노동력을 대규모로 수출하기 시작하 였다. 이때 수백만 명의 스페인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서유럽의 산업화된 국가들로 진출하였고, 그들이 고국으로 송금하는 돈이 국가의 경제를 일으키 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해외의 스페인 노동자들이 송금하는 전체 금 액의 규모를 보면 그것은 당시 국제 관광업으로 들어오는 수입을 상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도적인 정치 영역에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사회 운동이 점차 정치화되고 비프랑코적 성향을 띠게 되었다. 이미 1964년 - 10 에 단체결사법이 완화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때까지 정당이나 노조를 결성 하는 것이 허용된 것은 아니었지만 야당 성격이 강한 노동자들과 사무직 근 무자들이 위원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현재 스페인에서 가장 강력한 노조 인“노동자위원회”도 1964년 아스투리아에서 결성되었다. 그리고 다른 영역에서도 개방이 진행되면서 스페인에서도 약간의 자유화가 이루어졌다. 그것은 특히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법 제정에서 볼 수 있다. 현재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개방 정책 또한 서구 민주주의자들의 압력, 특히 개신 교회가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데 미국의 압력이 큰 역할을 하였고, 다양한 방법으로 스페인에서도 종교의 자유를 실현하도록 요구하는 미국 민주주의자들의 압력을 받아서 결정된 것이라는 점에 의견이 일치한다. 1966년에는 일종의 기본법이라고 할 수 있는 소위 말하는 레이 오르가니 카가 제정되어 결사권에 대한 진전이 있었고 정당과 유사한 단체를 결성하 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이 법은 형식면에서는 단순히 문화적 성격을 띠 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항적 정치 문화가 광범위하게 형성되는 데 기 여를 하였다. 이런 저항 문화가 1975년 프랑코 사후 정치적 과도기에 일정 한 제도적 틀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군부의 역할, 가톨릭교회의 위계적 질서 그리고 가족법에 관련된 문제들과 같은 것들은 실질적으로 전혀 건드 리지 않은 채 남겨 두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정책 분야의 논쟁에서도 민족주 의적 신디칼리즘(syndicalism) 운동을 하는 그룹들은 이전의 팔랑헤 에스파 뇰라 운동의 민족주의적, 조합주의적 운동에도 참여했던 사람들이다. 이 조 직은 히틀러의 제3 제국에서 만들었던 독일 노동전선과 유사하게 사업가들 도 노동조합과 유사한 단체에 가입할 수 있었다. 70년대 초반이 되면서 처음으로 분명하게 테러 활동을 하는 조직들이 형 성되었다. 바스크의 에타(ETA= Euskadi Ta Askatasuna 바스크족 분리주의 무장 단체, 역자 주)가 프랑코에게서 정부 수반의 자리를 물려받을 것으로 알려진 카레로 블랑코 장군을 암살하면서 국제적인“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또 다른 좌파 지향의 테러 단체들도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공산주의 분파 정 당의 마오이즘적-트로츠키적 아류라고 할 수 있는 그라포(GRAPO)도 이 단 체에 속한다. 1975년 발족한 민주주의 위원회와 민주주의의 플랫폼과 같은 대규모 반정 부 조직들은 당시 금지되었던 공산당과 사회당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다. - 11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루겠지만 이러한 조직들은 반체제 단체에게 강력한 동원효과를 가져다 준 1974년 포르투갈에서 일어난“카네이션 혁명”으로 인 해 더욱 유리한 환경을 갖게 되었다. 그런 결과 프랑코 사망 당시 스페인은 아주 극단적으로 모순되는 상황에 부딪히게 되었다. 프랑코 체제는 반체제 단체의 어떤 혁명적 행위로 인해 막 을 내린 것이 아니었다. 독재자는 그 체제의 여러 제도들에 전혀 손대지 않 은 채 자기 침대에서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러므로 새로운 질서와 체제 전환은 구법의 도움을 받아 내부로부터 개혁을 이루어 독재자의 권력 기구와 체제를 장래의 새로운 법질서에 맞게 전환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발전의 몇 가지 단계를 분석해 보겠 다. 민주적 전환 과정 a) 제도적 전환, 새로운 민주 질서의 전제 조건으로서의 과거 청산 형태 이미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스페인의 민주화 과정은 1975년 11월과 1982 년 10월 사이로 시기가 분명히 규정되었다. 어떤 연구자들은 사회당 정부가 들어서던 1982년 말부터 스페인이 유럽연합과 대서양조약기구에 완전히 통 합된 1985/86년까지의 시기를 민주화 과정의 다음 단계로 포함시키기도 한 다. 이 두 단계 중 첫 번째 과정의 원래 핵심은 정치적 전환 과정이다. 프랑코가 사망했을 때 프랑코 체제의 기본법이 모두 아직 유효한 채로 남 아 있었다고 이미 언급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프랑코를 이어 갈 새로운 국가 수반으로 지명된 국왕 후안 카를로스는 그의 대관식에서 프랑코주의자들의 원로회의 앞에서 소위 말하는 프랑코주의의 기본법에 서약해야만 하였다. 그 런 의식을 통해 국왕은 기존의 정부를 유임시키거나 원로회의의 승인을 받 아 새로운 정부를 구성할 권리를 갖게 되었다. 후안 카를로스는 타협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내무부, 외무부, 법무부 장관 등 개혁 성향을 보이던 몇몇 구성원을 포함한 카를로스 아리아스 나바로가 이끄는 기존의 정부를 유임시 켰다. 그러나 스페인 국왕의 결정 중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프랑코주의자 이면서도 개혁 성향을 띤 것으로 알려진 법률가 토르쿠아토 훼르디난데스 - 12 미란다를 원로회의 의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토르쿠아토 훼르디난데스 미란다는 가톨릭교회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 주교회의 의장인 엔리케 타란콘으로 하여금 대관식에 서 새 국왕은 모든 스페인 사람의 국왕이어야 하며 적대적으로 양분된 스페 인이라는 이념은 이제 과거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대관식 연설을 하도록 하 였다. 이런 대주교의 생각은 당시 대다수 국민들, 특히 잘 조직되었던 반체 제 세력뿐만 아니라 프랑코 체제의 대표들 중에서 개혁자라고 알려지기를 원했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이었다. 또한 토르쿠아토 훼르디난데스 미란다는 민족 운동의 기본법을 폐지하기 위한 과정을 구상하고 그런 과정을 구법의 도움을 받아 실현할 수 있는 길 을 보여준 사람이다. 그러한 과정이 실현되는 것은 프랑코 시절에 형식적으 로 만들어진 의회, 즉 코르테스가 함께 움직여 줄 때에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수반인 아리아스 나바로가 그에 동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 이 곧 분명하게 드러났다. 1976년 초 왕조의 후계문제와도 관련된 유혈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 충돌 로 사망한 희생자도 있었다. 나바로 정부와 경찰은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다 는 비난을 받았다. 국왕은 이 사건을 구실삼아 정부 수반인 아리아스 나바로 의 사임을 요구하였다. 1976년 7월 나바로의 후임으로 전직 장관이자 민족 주의 운동의 언론 책임자였던 아돌포 수아레스가 새로운 정부 수반으로 임 명되었다. 여론은 먼저 이러한 결정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곧 바로 그 결정이 현명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돌포 수아레스는 그의 취임과 함께 시작된 제도 개혁 과정의 집행자이자 그 방법을 고안해 내는 전략가가 되었다. 그가 당시 생각한 것은 두 가지 결 정적인 요구 사항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하나는 정치적 개혁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1977년 6월 30일 이전에 민주적 선거를 실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 개혁에 관한 법률안은 프랑코주의적인 의회 코르테스의 2/3가 찬성을 해야 실질적으로 코르테스의 해산이 가능하였다. 코르테스는 1976년 가을 아주 극적으로 진행된 회의에서 이러한 결정에 찬성하였다. 그로써 국 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는 법적인 조건들이 충족되었다. 12월에 국민투표를 - 13 실시했고 투표자의 94퍼센트가 민주적 개혁을 지지하여 개혁파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977년 6월 30일 이전에 민주적 선거를 실시한다는 두 번째 요구 사항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이 드디어 열렸다. 그러나 아직까지 정당을 허용하기 위한 어떤 법적인 근거도 마련되지 않았다. 이것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합법적 인 방법은 행정 명령이나 행정 처분을 통해서 정당 결성을 허가하는 것이었 다. 내무부는 그때까지 불법적으로 조직된 또는 아직 조직되지 않은 정당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검토해서 정당 설립에 관한 행정 처분 안을 대법원에 제출하도록 지시를 받았다. 물론 다수의 대법원 재판관들은 구체제가 임명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내무부는 이러한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형법을 참조 해야만 했고, 이런 과정을 통해 형법에 의거하여 처벌받아야 하는 행위를 한 정당들은 허가받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싼티아고 카리요가 이끄는 공산당 합법화 문제가 가장 크게 대두되었다. 비록 이 정당이 새로운 강령을 통해 소위 말하는 유럽공산주의 를 채택하고 다원주의적 의회주의를 수용하기는 했지만 공산당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들이 여건이 허용할 경우 노동자의 독재를 실현하는 것을 사회 발전의 대안으로 보는 사항을 아직 당 강령에서 삭제하지 않았다고 주장하 면서 공산당 합법화에 반대하였다. 공산당은 이 강령을 조정할 의사가 있으 며, 국민의 다수가 원하고 헌법에 의해서 인정된다면 군주제도 가능한 하나 의 국가 형태로 분명하게 받아들이겠다고 표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7년 1월 27일 극우파가 친공산주의적 성향의 노동 변호사 8명을 암살하는“아토하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스페인에서 는 공화국 시절 이후 볼 수 없었던 대규모 대중 집회가 열리게 되었다. 정부 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만일 공산당이 합법화되지 않는다면 그들이 전체 반 체제 세력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때 아돌포 수아레스는 또 한 번 뛰어난 협상 술을 보여 주었다. 그는 당시 개혁 성향을 보이던 군 장군들에게 접근하여 공산당을 허용하면 군이 국민 으로부터 더 많은 지지를 받게 될 것이며, 동시에 이로 인해 지금까지 일반 여론에 프랑코주의자들이라고 알려졌던 군의 위상도 훨씬 더 높아질 것이라 고 설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1977년 부활절 토요일에 공산당이 합법화되었을 때 이에 반대하던 해군 - 14 제독 한 사람만 사임하였다. 군이 공산당의 합법화 과정에 침묵을 지켰다는 사실은 2년 동안 조용하였던 에타가 다시 테러를 시작하고, 위에 언급한 그 라포의 테러로 인해 더욱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공산당이 합법화되기 일주일 전 노동조합 설립의 자유를 허용하는 법이 제 정되었다. 이 법안은 노조가 민주적인 구조를 가져야 한다는 조항을 포함하 였다. 이 조항은 궁극적으로 프랑코주의자들의 수직적 노조가 평화적으로 폐 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들은 마지막 단계에서 민주적 구조의 실현이라는 조항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실질적으로 실천에 옮길 수 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프랑코주의자들의 노조 자체는 이미 비중이 거의 없는 단체로 전락한 상태였다. 1977년 6월 15일에 실시된 첫 번째 민주적 보통선거에서 이들과 가까운 정당들은 모두 3 퍼센트 이하의 득표율을 보였 다. 이 선거, 즉 수아레스가 민주적 개혁프로그램의 두 번째 요구로 제시한 민 주적 총선거에서는 그가 이끄는 민주중앙당이 31.1 퍼센트를 득표하여 28.6 퍼센트를 받은 스페인 사회당을 근소한 차로 누르고 제1 당이 되었다. 대부 분의 분석가들이 많은 득표를 할 것이라고 예측했던 공산당은 9.4 퍼센트에 그쳤고, 마누엘 프라가가 이끄는 보수당은 8.4 퍼센트를 얻어 제4 당에 머물 렀다. 카탈루냐와 바스크 지역의 민족주의적 지역 정당들도 그 지역에서는 최대 정당이 되었다. 그러나 장래 민주적 국가 체제의 존립에 결정적 조건인 헌법을 정착시키는 문제와 스페인 왕조를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문제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국왕이 비록 1977년 6월의 총선거 이후 소집된 의회를 개원하 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프랑코주의적 기본법에 따라 그 역할을 하였던 것이 다. 이 문제는 민주적 헌법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었다. 총선거 이 후에 진행된 헌법 제정 작업이 이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였다. 1978년 7 월에 이미 바스크 민족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이 참여하여 다양한 헌법위원 회를 구성하였다. 1978년 12월 8일 새 헌법은 또 한 번의 국민투표를 통해 승인되었고 그에 앞서 의회에서 이미 이에 대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결 정을 내렸다. 이 문제와 관련, 특히 과거 문제와 관련해서 사면 프로젝트를 특별히 언급 해야 한다. 공산당이 허가되기 이전에 아돌포 수아레스 정부는 이미 사면령 - 15 을 내린 경험이 있다. 물론 사면의 목적은 전적으로 정당의 합법화와 관련된 것이었다. 1977년 10월에는 이 사면령이 테러 활동에까지 확대, 적용되었다. 마찬가지로 공화국과 프랑코 체제가 성립된 이후 억압 정책과 사형 선고 판 결을 내린 행위자들에 대해서도 이 사면령을 적용했다. 당시 이런 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억압 받은 공화주의자들이 볼 때 사면령은 순전히 정치권력을 두고 포커를 치는 것일 뿐이며, 단지 눈앞에 보이는 정치적 목표들만을 따르는 것이라고 비난 하였다. 이러한 비난은 분명히 근거가 있고 정당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우리가 고려해야 하는 것은 프랑코 사망 직후 스페인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기존 정치권력 구조를 제거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이 다. 당시 민주 세력은 그들이 아무리 스페인 국민과 국제 사회에서 지원을 받고 있지만 현실 정치에서는 아직 힘이 미약하여, 예를 들어 군의 재공격을 막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하지 못했다. 1981년 테헤로 대령이 의회를 점령했 던 사건을 보면 이러한 우려가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비판을 보면 과연 스페인 민주주의의 제도화 과정이 정말로 과거 청산 작업의 일환이었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형식적인 법적 측면에서 볼 때 이러한 의심을 뒷받침해 주는 논지도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정당들이 새로운 헌법과 정치적 협약에 대해 합의하였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성과였다. 그 외에도 사면령으로 인해 공화주의 군대의 군 인들과 그들의 유족들이 차후 연금을 신청할 수 있고 실제 그것을 받을 수 있도록 해준다거나, 또는 공화주의자였기 때문에 망명하였거나 스페인을 떠 났던 이주자들이 다시 스페인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조건들이 마련되었다. 물론 이러한 조치로 프랑코 체제에 대해 분명한 판결 이 내려진 것은 아니었다. 프랑코 체제의 상징물들이 아직도 스페인 도시의 거리 곳곳에 아직도 많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프랑코주의자들은 아직까 지 프랑코와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가 묻힌“전몰자들의 계곡”이라 불리는 무덤을 기념관으로 받들고 있다. 다음은 스페인의 전환 과정을 성공적으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몇 가지 사실들을 정리해 보았다. 1. 국왕의 입지 - 16 현 국왕 후안 카를로스의 조부인 알폰소 13세가 망명함으로써 스페인 왕 가는 내전 기간에 스페인 국내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군주가 공화파든 프 랑코파든 어떤 쪽에 대한 지지를 표명할 필요가 없었다. 또 하나 특별한 의 미를 갖는 사실은 프랑코가 자신의 후계자를 지명하는 과정에서 왕가의 후 계자, 알폰소 13세의 아들이자 후안 카를로스의 아버지인 돈 후안을 지명하 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프랑코와 그 체제의 다수파는 젊은 왕자 후안 카 를로스가 스페인으로 귀국한 60년대 초부터 이미 시작된 군사 교육과 프랑 코 체제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그 역시 프랑코 체제의 추종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후안 카를로스의 아버지는 이탈리아에 망명하는 동안 프랑코에 저항하던 세력들에게 호의를 가졌으나 그들과 거리를 두게 되었고 포르투갈 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시기에는 반체제의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의 주요 후원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었다. 프랑코는 후안 카를로스 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스페인으로 귀국시켜 군사 교육을 받게 하고 프랑코 체제의 가치를 주입시킨다면 그가 프랑코주의의 훌륭한 후계자가 될 것이라 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프랑코 체제의 대표자들은 대부분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결과적으로 오판하였고 젊은 국왕은 그가 후계자로 임명된 후 양쪽 협상 파트너로부터 신뢰를 받았기 때문에 민주화를 위한 정화 필터의 역할 을 할 수 있었다. 2. 가톨릭교회의 역할 1975년 가톨릭교회는 요한 23세에 이어 바오로 4세가 재임하던 개혁적 성 향을 아직 강하게 보이고 있던 시기였다. 당시 스페인 주교회의 의장인 엔리 케 타란콘 추기경은 입헌군주제와 정교 분리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갖고 있 었다. 그가 있었기 때문에 1975년 이후 스페인에서 기독교를 정치 이념으로 내세우는 정당이 창립되지 않았다. 스페인 전 교구에 배포되는 그의 편지에 서 추기경은 이러한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그가 분명히 입장을 표명함으로 써 아스트리아와 바스크 지역과 같은 곳에서는 노조에도 영감을 주고 전체 적으로 야당 세력을 지원하는 강력한 노동자-사제 운동이 형성되었다. 나중 에 알려진 것처럼 공산당 지도부 중에도 가톨릭 사제가 포함되었다. 그 외에 도 소위 말하는“이웃 운동”에는 가톨릭교도들과 재직 중인 사제도 일부 포 함되었다. 3. 국제적 조건 - 17 스페인의 고립을 해제하는 것에 대해서는 프랑코 체제를 지지하던 사람들 의 대부분이 찬성하였다. 아주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스페인 국민들에게 유럽은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예였다. 그리고 프랑코 체제 말기 에 지속적으로 증가한 유럽의 원조는 모두 민주적 개혁을 위한 지원으로 받 아들였다. 이런 기반 위에 중요한 정치 세력들 간의 전국가적 합의가 이루어 질 수 있었고, 이것이 민주화 과정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견고한 조건이 되었 다. 4. 이웃 국가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 포르투갈에서 1974년 4월 25일 군부가 무혈 봉기를 통해 독재적 통치자 살라자와 카예타노를 제거했을 때 국민의 대다수가 열광적 지지를 보냈다. 이 사실은 스페인의 내적 발전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한편으로 스페 인 전체의 반체제 세력을 빠르고도 대규모로 동원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렇 게 해서 1975년에 대규모 대중 조직인(공산당 주도의) 민주주의 의회와 (사회당 주도의) 민주주의 플랫폼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당시 벙커라고 불리 던 프랑코 체제의 권력 기구들도 이러한 혁명적인 변화를 통해 엄청난 복수 극이 발생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고 이웃 국가의 변화를 주시하였 다. 스페인으로 망명한 포르투갈의 악명 높은 정치 경찰 요원들이 스페인에 서 카네이션 혁명을 비난하기 위해 다양한 악선전을 했지만 이들은 스페인 보수 신문들에서조차도 큰 동조를 받지 못하였다. 5. 내전에 대한 기억 프랑코 사후 그의 추종자들과 주요 반체제 운동 세력들 간에 합의가 이루 어 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조건은, 돌이켜 보건데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내 전에서 승자도 패자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스페인 사회를 50년 후퇴시켰다 는 인식을 양측 모두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정치적 전환기에 민주적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 체결된 협약들은 모두 이러한 기본적인 인 식을 공유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 인식은 프랑코 주의적 의회 코르테스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1977년 6월 선거 이후 헌법 을 제정하는 회의에서 논쟁이 벌어졌을 때 정치적 개혁에 관한 국민투표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헌법 자체가 이런 합의를 보 여주는 좋은 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항상 역사를 돌이켜보라고 언급하는 - 18 헌법의 부언에서 볼 수 있다. 1978년 가을에 이루어진“몬클로아의 협정”은 항상 다시는 내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모든 사회적, 정치적 그룹들이 합의할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정치적 실용주 의의 걸작품이다. b) 1979년부터 1982년 또는 1985/86년 사이의 스페인 민주주의의 공고화 단계 헌법이 수용되고 난 후 새롭게 선거를 실시해야만 하였다. 이 선거를 통해 서 비로소 입헌군주제가 공식적으로 승인될 수 있고, 국민과 그들을 대표하 는 정당들은 의회와 국민투표를 통해서 국민들이 그때까지 보여준 태도를 다시 확인해 주어야만 했다. 1979년 초 총선거를 실시했다. 이번 총선거에서도 아돌포 수아레스가 이 끄는 민주중앙당이 35퍼센트를 얻어 제1당의 위치를 고수하였다. 사회주의 자와 다른 군소 정당이 모여서 창립한 스페인사회당은 중앙당보다 5 퍼센트 적게 받았지만 30 퍼센트를 넘기기는 하였다. 공산당은 이전 선거에서보다 1.5 퍼센트 더 많이 받은 반면, 보수당의 득표율은 1977년 8.4 퍼센트에서 6 퍼센트로 감소하였다. 다른 지역 정당들은 실질적으로 1977년 6월 선거와 거의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였다. 여당인 민주중앙당은 원래 다양한 정치 세력의 연합이었다. 그렇지만 지역 정치, 에타 테러의 증가, 경제발전의 비관적 전망과 20 퍼센트를 넘어서는 인플레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조건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절대적 다수를 차지 하는 정당이 없었기 때문에 정당들이 서로 정치적 입장이 맞지 않는다고 해 도 부분적으로 연합하거나 크게 양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직 어 린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당시 그런 상황이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 다. 사면법과 그에 따른 정치적 협약들로 인해 흔히 말하는 것처럼“침묵의 협약”이 나온 것은 아니었다. 프랑코 시대에 억압받았던 사람들과 공화국의 희생자들은 법적인 도움을 받고 그리고 심지어는 보상까지도 받을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정책들이 마련되었다. 이 시기에는 실제 근대적 민주국가가 필요로 하는 다양한 법적 변화가 있 었다. 이 변화들은 스페인 전통에 비추어 볼 때 아주 커다란 성과였다. 이 시기에 스페인에서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혼법과 스페인 역사 - 19 상 처음으로 중산층과 상류층에게도 세금을 내도록 하는 세제개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타의 테러로 100명이 넘는 희생자가 나온 1980년, 스페인 정부의 위기는 더 이상 막을 길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로 인해 다 양한 정당들이 연합했던 중앙당이 분열하였고 1981년 1월 아돌포 수아레스 가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후임으로 보수적으로 알려진 중앙당 정치인 레오폴도 칼보 소텔로가 지명되었다. 1981년 2월 23일 의회의 회의장에 대 령 안토니오 테헤로가 침입하여 민병대의 무장 그룹으로 하여금 전체 의회 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쿠데타는 국왕의 단호한 태도와 국제적인 반응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고, 이때가 스페인 민주주의가 안정화 국면에 접어든 시 점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드리드와 다른 지역에서 새 로운 헌정 질서를 수호하겠다고 거리로 나선 수백만 명의 시민들이 바로 명 백한 증거였다. 역사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1982년 총선거 이후 스페인의 새로운 민주 주의는 완전히 공고해 지는 시기에 접어들었다. 합법화된 지 5년 밖에 되지 않은 사회당이 1982년 10월의 선거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얻어 승리하고 총 350의석 중 202의석을 획득하여 절대적 과반수를 넘어섰다. 그것은 필립페 곤잘레스가 이끄는 새로운 정부가 스페인을 유럽공동체로 통합시키는 작업 을 신속히 진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 결과 3년 후에 스페인은 유럽 연합과 통합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86년에는 국민투표를 통해 이미 1982년 총선의 결과로 가입하였던 대서양조약기구에 대한 가입 여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였다.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사실은 필립페 곤잘 레스가 수상으로 취임한 1982년 이후 스페인의 정치는 외교 문제가 항상 가 장 중요한 문제로 간주되어 국내의 과거 문제를 두고 고민할 수 있는 공간 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실질적으로 2000년까지 지속되었다. 1996년에 필 립페 곤잘레스 정부가 물러나고 호세 마리아 아즈나가 이끄는 국민정당이 등장하게 된 주원인은 국내 정치에 있었다. 1996년에서 2004년까지 아즈나 정부의 재임 기간에는 내부 정치 사건들이 정치를 주도했다.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고 아즈나 수상이 참전을 결정하면서 스페인 여론의 관심이 다시 국 제 · 외교적인 영역으로 확대되어 과거 청산에 관한 논의는 완벽하게 뒷전으 로 밀려났다. - 20 역사적 기억의 상기에 대한 현재의 논쟁 스페인의 과거 청산 문제는, 시간적으로 볼 때, 분명히 호세 루이스 로드리 게스 차파테로와 직접 연결된다. 1960년에 태어난 그는 스페인 내전의 손자 세대라고 불리는 젊은 세대에 속한다. 그런 그가 2000년 스페인 사회당의 당 사무총장 선거에서 자기 외할아버지가 공화파 군대의 대위였고 내전이 끝난 직후 총살당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은 매우 의외였다. 차파테로가 그때 언급한 것과 현재의 과거사 논쟁을 연관시키는 것이 분명 억지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논쟁은 간단하게 한 사람만의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 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이미 2000년 가을 지역 차원에서 스페인 내전 종결 후에 대량 학살당한 희생자들이 묻힌 지역을 발굴하는 활 동에 초점을 맞춘 다양한 단체들이 이끄는 광범위한 사회 운동이 시작되었 다는 점이다. 이 운동의 규모가 커지면서, 2000년 총선에서 절대 과반수를 얻어 정권을 잡은 국민당마저도 의회 결정에 반대하지 못하고, 2002년 11월 20일 의회에서 1936년의 쿠데타를 만장일치로 비판하는 데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이 논의는 야당과 다른 단체들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고, 스페인 사회당은 2004년 3월에 있을 총선을 위한 당 선거프로그램에 이 문제를 포함시켰다. 2004년 총선에서 로드리게스 차파테로가 승리하면서 과거 청산 논쟁이 질 적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외국 언론에서도 많은 관심을 가졌던 이 논쟁에 일반 여론이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오랜 논의를 거쳐 사회당 정부의 부수상인 마리아 테레사 훼르디난데스 데 라 베가의 주도하에 역사적 기억의 상기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기 위한 작 업을 담당할“부처 간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 시기에 외국에서도 스페인 에서 벌어지는 과거 청산 작업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 스페인 사무소의 경우, 다양한 출판물과 세미나 - 21 등을 통해 오랫동안 스페인 과거 청산 문제를 다루어 왔고, 이 문제에 관심 이 있는 독일의 연구소나 기관들 그리고 다른 유럽 국가의 연구소들과 협력 했다. 독일 측에서는 특히“망각하지 않기 위한- 민주주의 연합”이 이 문제 로 스페인 정부와 교류하였다. 그리고 동독의 비밀경찰의 과거 문제를 다루 는 과거 청산 재단도 이 문제와 관련하여 협력하고자 하였다. 2005년 5월 10일 요아힘 가욱 박사를(현“망각하지 않기 위한- 민주주 의 연합”의 명예회장) 대표로 하는 사절단이 스페인을 방문하여 이 문제에 관해 스페인 정부 당국과도 협의하였다. 그리고 이틀 동안 진행된 인권단체 들과의 회의에서는 독일과 스페인 양측이 서로 상이한 시각으로 과거 문제 를 다루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 결정적인 차이는 독일의 논의에서는 처벌되어야만 하는 적에 대한 의심이 전혀 없는 반면에, 스페인의 경우 항상 공화파에서도 스페인 내전 중에 다양한 억압을 통해 약 삼만 칠천 명의 희 생자를 내었다는 사실이 스스로 자기 비판적으로 언급되어야만 했다. 물론 이 숫자가 프랑코주의자들에 의해 희생된 칠만 명에 비하면 훨씬 작은 것이 기는 하다. 더구나 내전이 끝난 후에는 패전한 공화파에서만 일방적으로 십 만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는 것도 언급되어야 한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면서 스페인 내부에서도 이를 반대하는 운동이 조직되었고 이들은 점차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의회에서는 누 구보다 국민당이 중심이 되었고, 약 1년 전부터 자체 방송국(COPE)을 거느 릴 정도로 다양한 선전 수단을 활용할 수 있는 거대 조직인 가톨릭교회가 이 논쟁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과거 청산 논쟁을 반대하는 진영이 항상 제 시하는 논지는 이러한 논쟁이 민족적 화해 과정을 문제 삼을 뿐이라는 것이 다. 또한 이들은 프랑코주의에 대한 형식적인 판결마저도 이미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2006년 7월 28일 언론에서도 많이 보도한 의회에서의 장시간 논쟁을 거쳐 과거청산에 관한 법안이 국무회의에 상정되었다. 이 법안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의회의 모든 단계를 거쳐 승인을 받아야 한다. 이 법안을 정부 프 로그램의 결정적인 사안으로 만든 로드리게스 차파테로 정부는 당연히 의회 에서 법안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정부가 실패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차파테로의 새로운 구원군으로 유럽이 등장하였다. 2006년 7월, 유럽의회 와 유럽회의는 프랑코 체제를 비판하였고 1936년 7월 18일, 즉 프랑코가 쿠 - 22 데타를 감행한 날을 모든 독재자를 정죄하는 날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결정 이 내려지게 된 데에는 말타 출신의 유럽의회 의원의 이름을 딴“브린카트 보고서”가 기반이 되었다. 이 보고서에서는 스페인의 경우, 특히 내전 이후 1939년부터 1975년 사이에 프랑코 체제가 저지른 인권침해 사항이 특히 많 다고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 유럽의회는 이러한 결정을 내리면서 억압에 관 한 진실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스페인 정부가 인권침해조사위원회를 구 성할 것을 권고하였다. 현 스페인 정부로서는 유럽의회의 이런 결정이 당연히 매우 반가운 것이었 다. 정부는 유럽의회의 결정으로 2차 세계 대전의 전주곡이었으며 실질적으 로 수많은 유럽 국가의 자원병들이 참여했었던 스페인 내전의 국제적 성격 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의견이다. 유럽이 과거 문제에 대한 논의를 공동의 장 래를 구상하는데 장애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현재 스페인 정부가 도입하고자 하는 새로운 과거 청산법을 옹호하는 논지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법이 효력을 발휘하는 문제는 아직까지 결정된 것이 아니다. 현 정부는 이번 의회 임기가 끝나기 전에 이 문제를 처리하고 싶어 하지만 가톨릭교회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약간은 주저하고 있는 상태이다. 요한 바오로 2세 때 이미 360명의 내전 순교자들을 성인으로 시성하였다. 비록 그것이 그의 재임 기간 27년 동안 시간적 격차를 두고 행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 수가 적지 않다. 그런데 2007년 10월 28일, 즉 필립페 곤잘레스 가 이끄는 사회당의 선거 승리 25주년이 되는 바로 그 날에 약 500명에 달 하는 성직자들이 대량으로 시복될 것이라고 한다. 과거 청산법 시행이 극좌파 단체들의 반발로 방해를 받고 있다. 이들 단체 를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들은 프랑코주의자들이 내린 모든 판 결을 무효화하고 그 당시 책임자들을 단죄하려는 정치적 논의만이 가장 좋 은 것이라는 의견에 일조하고 있다. 나아가 역사학자들은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야만 하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그들의 의견에 따르면, 과거청산법 의 적용이 법률적으로 매우 어렵고 복잡한 상황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우려하는 바는- 이 글의 발표자도 이에 동의한다-“재판의 비정 당화”로 인해 다른 요구들이 산사태처럼 밀려오는 효과를 동반하게 될 것이 라는 점이다. 그렇지만 새로운 법은 희생자들에 대한 도덕적 승인이라는 의 미에서, 그리고 민법적인 방법으로 일정한 보상을 해 주는 것이 가능해 진다 는 의미에서 진보를 의미한다. - 23 마지막으로, 이 심포지엄을 준비하면서 던진 몇 가지 질문에 대해서 설명 하고자 한다. 스페인의 민주주의의가 현재 다양한 갈등을 감당할 능력이 얼마만큼 있는 가? 부분적으로는 스페인의 민주주의 발전에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 에타의 테 러리즘도 그 많은 희생자들(850명 사망)에도 불구하고 민주적 전환 과정의 성과를(헌법, 정치적 협약, 사회적 대화의 체계, 그리고 심지어는 문제가 없 다고 할 수 없는 몇몇 지역의 자율권을 인정해 주는 스페인 국가의 지방 분 권화 프로그램까지) 위협하지는 못한다. 에타가 자행한 2004년 3월 11일 마드리드 테러, 그리고 2006년 12월 31 일 마드리드 공항 폭탄 테러 등으로 인해 현재 스페인 국내 분위기는 아주 자극받은 상태이다. 그러나 그것이 스페인 민주주의의 기반을 흔들지는 못한 다. 과거 청산 문제로 인해 민주주의 장래가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인가? 이 문제는 미래 발전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결정적인 대답도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언급해야 하는 것은 현재 스페인에서 진행되 는 모든 여론조사에서 과거사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테러, 이민자, 실업 그리고 주택 문제 등이 오히려 시민들이 가장 걱정하는 문제들이다.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한 스페인 시민들이 하는 논의의 틀은 다른 서유럽 민주주의 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논의와 큰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법자들뿐만 아니라 여론을 주도하는 계층에서도 스페 인의 젊은 세대가 과거에 대해 진실을 알고자 하는 관심을 항상 가지고 있 을 것이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스페인에서는 정치적 전환기에 민주주의에 대 한 위협을 고려해서 수십 년 동안 과거 문제에 대한 논의를 미루어 왔다. 그 리고 이제 독일과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스페인에서도 과거 문제와 전혀 상관이 없는 젊은 세대들이 성장하여 과거의 사실을 알기 원한다. 그런 의미에서 스페인 부수상이 이끄는 정부위원회가 이와 비슷한 역사 교과서의 개혁을 경험한 국가들과 정보를 교환하고 수집하고자 하는 것이다. - 24 특히 교육 분야에서 스페인이 아직까지 배워야 할 것이 아주 많다. 발표자 인 저도 지금까지 주최한 세미나의 경험을 토대로 이러한 교육 과정을 통해 의미 있는 작업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특히 구체적인 사안에 집중하는 것을 통해 지금까지 의회의 의석 분포 때문에 좌파 정당의 프로젝트가 되었던 새로운 법을 제정하는 문제에서도 이념을 달리하는 다른 그룹으로부터 동의를 얻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스페인 정치 문화의 장래는? 이 문제는 과거 문제에 대한 논의 자체를 뒷전으로 밀어 버릴 수 있는 다 양한 외적 요인과도 결부되어 있다. 근본주의에 의한 위협, 스페인 내부의 그리고 수입된 테러 문제는 이에 대한 의견을 극과 극으로 나누고 모든 사 회적 토론의 주제를 독점하게 되어 과거 문제 논의에 대한 관심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스페인의 경우, 2008년 3월의 총선거는 앞으로의 정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 선거를 통해 권력 구조에 변화가 온다면 정치적 전환의 처음 단계에서 거의 민족적 합의가 이루어졌던 것처럼 지금 까지 별로 열정적으로 펼쳐지지 않았던 과거에 대한 논쟁이 훨씬 활발해질 수도 있다. 2007년 5월 14일 마드리드에서 Ⓒ Friedrich-Ebert-Stiftung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