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이행 소극적인 과거 청산과 근대화에 대한 저항 * 바질리키 게오기아듀 판테온 대학, 그리스 아테네 지리와 문화 그리스는 동남 유럽의 지중해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영토 면적은 130 000km 2 , 인구는 천백만 명이다. 이중 약 백만 명이 발칸반도, 동유럽,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온 이민자들이다. 1990 년대 초까지 그리스는 동질성 문화를 갖고 있었다. 그리스 북쪽에(트라지아) 사는 터키족 후예인 그리스-회교도 소수를 제외하면 그리스인의 거의 대부분이 기독교 교회에 속했다. 이중 97 퍼센트가 그리스 정교에 속하고 그리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동구권 붕괴 이후 이주자들이 지속적으로 밀려오면서 그리스는 점차 다민족, 다문화 사회로 발전하였다. 그리스는 1974 년부터 의회민주주의 정치체제를 갖고 있으며 1981 년부터 유럽공동체의 정회원국이다.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현재 정착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내전이나 독재와 같이 아직까지 충분히 논의하지 않은 어두운 흔적을 아직 품고 있다. 그 때문에 독재가 붕괴되고 민주화를 쟁취한 지 33 년이 되는 오늘까지도 군사 독재의 동반자였던 정치 이념들이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하고 있다. 정치 역사의 단계들 * 2007 년 6 월 18 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이 공동으로 주최한 6 월 민주항쟁 20 주년 국제 학술 심포지엄“민주화 이후의 정치 발전- 한국,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의 경험과 기억”에서 발표 1 지금의 그리스는 1453 년 이후 오스만 제국에 속하다가 1821 년 독립 전쟁을 통해서 독립했다. 이 전쟁은 소위 말하는"보호 세력", 즉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었다. 1830 년 런던협약이 조인되면서 그리스는 작은 독립 왕국으로 선포되었다. 그리스는 그 이후 지속적으로 영토를 확장했고, 1947 년 파리협약을 통해 현재의 국경을 확정지었다. 영토 확장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국경이 옛날 비잔틴 제국의 영토와 동일해야 한다는"거대한 구상"이 수십년 동안 정부의 공식적인 정책이었으며 국민 대다수가 그것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소아시아 환란으로 불리는 1922 년의 그리스와 터어키의 전쟁과 같은„거대한 구상“으로 인해 그리스가 패배했음에도 그리스의 실지 회복 운동(Irredentismus)의 민족주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스의 의회 제도는 이미 근대 국가의 건국과 함께 도입되었다. 그리고 1843 년에 입헌군주제가, 1864 년에는 왕정 민주주의로 발전하였다. 1843 년에 이미 소수를 제외한 남성에게 보통선거권을 부여하였고, 1864 년에는 모든 남성에게 적용했다. 1875 년부터 이미 의원내각제 정부 체제가 존립하였다. 그리스 역사에서 의회주의가 폐지된 경우는 아주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대중들의 투쟁으로 이것을 얻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의회주의는 근대 정치가 시작될 때 존재하였지만 이것이 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지배 엘리트들 간 타협의 산물이었으며 위로부터 강제된 것이었다. 의회주의가 이처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의회주의 왜곡의 역사 또한 길다. 단일 문화 사회인 그리스의 건국 초기에는 사회 계층이 세분화되지 않은 사회였으나 정치적, 이념적으로는 아주 골이 깊게 갈라진 분열된 사회였다. 건국 초기부터 국가와 사회는 왕실, 군대, 교회, 의회, 정부 등 다양한 세력들의 영향을 받았고, 정치적, 이념적 분열이 깊어질수록 이들 세력들이 반의회적으로 간섭하려는 노력 또한 강력해졌다. 1941 년부터 45 년의 독일 점령기에 이어 1946 년에서 49 년에 일어난 내전은 그리스를 두 개의 정치적, 이념적 진영으로 완전히 분열시켰다. 한편에는 민족주의 우파가, 다른 한편에는 공산주의 좌파와 비공산주의 좌파로 분열되어 대립하였다. 우파는 자신들을 내부의 적인 좌파로부터 민족과 조국을 지키는 수호자라고 주장하였다. 오랜 반군주제적 전통을 가진 중도파의 정치 세력은 본래 민족주의 진영에 속하였지만 50 년대 말과 60 년대 초,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극단적인 좌익으로 돌아섰다. 민족주의 우파는 중도파가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좌익 지향성을 보이는 것이 공산주의자의 패배와 함께 내전 이후 정착된"사회적 체제"를 유지하는 데 위험한 요소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1950 년대와 60 년대 초 2 중도 좌파와 비공산 좌파가 강력해짐으로써 기존의 정치 체제나 국가 경제를 주도하던 세력이 위협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위협을 받은 것은"사회적 체제"가 아니라, 국가와 군대에 대한 민족주의 우파의 수직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통제가 위험에 빠지는 것이었다. 항상 왕실에 충성하였고 스스로"사회적 체제"와"우파 국가"의 경비병이라고 자처하던 군대는 언제나 공산주의로부터"조국을 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공산주의는 가상의 적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이미 금지된 공산당은 내전 이후 그리스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제한적으로만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군사 독재의 정치적 배경 내전 이후 그리스 민주주의는"괴로워하는 민주주의"였다. 헌법은"병렬 헌법"을 수반했고, 의회주의 체제는 체계적으로 약화되었다."병렬 헌법"은 헌법의 규정을"반헌법적인" 방법으로 적용하였다. 왕은 행정의 상징성 수반으로 만족하지 않고, 정치적 권력을 갖고자 하였으며 정당 정치에 직접 간여할 수 있기를 원하였다. 그리고 의회가 대표하는 국민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수상과 정부를 임명하고 해임할 수 있기를 원했다. 국왕은 헌법상 정부의 통제를 받는 군대의 상징적인 통수권자였다. 그러나 국왕은 스스로를 군대의 지도자로 만들었고 폐쇄적이고 극우민족주의적이며 반민주주의적 세력으로 발전한 군대 내부의 문제에 지속적으로 간섭하였다. 1960 년대 초 그리스의 정치 상황은 통제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1963 년 국왕은 민족주의 우파의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 정부가 사퇴하라고 강요했다. 카라만리스는 자신이 수상으로 재임 기간에(1956-63) 국왕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고"의회를 강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카라만리스가 강제적으로 사퇴한 이후"우파의 국가"는 정치적으로 지도자가 없는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미 세력이 약화된 국왕의 정치적 간섭은 갈수록 그 추진력을 상실하였다. 그 결과, 국가 권력의 공백을 정치력이 강한 준군사적, 준국가적 집단들이 메워갔다. 1965 년 국왕에 의해 사임하도록 강요받았지만, 대중에게 인기가 높았던 게오기오스 파판드레오가 이끄는 중도연합도, 공산주의자가 주도하던 민주좌파연합(EDA)도 군대의 간섭을 과소평가하였다. 1964 년 총선에서 3 게오기오스 파판드레오가 이끄는 중도연합이 53 퍼센트라는 압도적인 승리를 달성하였다. 그는 이 선거 결과를 통해 국민이 극우파와 군대가 병립된 정치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상태에 종지부를 찍으라는 과제를 준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군대를 정화하고자 하는 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때까지도 국왕 콘스탄티노스는 군대가 자신의 통제 하에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파판드레오가 다시 권력을 잡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하여 군 지도부와 함께"헌법의 예외적 규정"을 작성하였다. 국왕과 군 장성들은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방어하기 위해 비교적 온건한"비상사태 체제"를 찬성하였다. 그러나 대령들은 장성들보다 훨씬 더 많은 준비를 하였고 1967 년 4 월 21 일 쿠데타를 감행하였다. 훗날 게오기오스 파판드레오의 아들이자 중도연합 좌파의 지도자였던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오는 당시 상황에 대해 "그들은 우리가 잠자고 있을 때 공격하였다"라고 설명하였다. 스틸리아노스 파타코스 대령이 탱크로 의사당을 포위하고 정부를 사퇴시켰을 때 그리스의 정치 엘리트들은 실제로 잠자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메타포적인 의미에서 정당 정치의 엘리트들이 수개월 동안 군부 간섭의 위험성을 간과했기 때문에 잠을 잤다고 하는 것이다. 그 후 7 년간 그리스는 군부 독재의 비상 사태하에 놓이게 된다. 군부 독재의 성립과 붕괴 1967 년 4 월 21 일의 군사 쿠데타는,- 대령들의 표현에 따르면„1967 년 4 월 21 일의 혁명“ 인- 그리스 군대의 중∙하급 장교들이 일으킨 것이다. 육군 대령 게오기오스 파파도폴로스를 중심으로 쿠데타를 주도한 사람들은 겨우 15 명에서 20 명 밖에 되지 않았으나 이들이 약 500 명의 장교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 이들 대령들의 조직적, 이념적 기원은 소위 말하는"그리스 장교의 성스러운 연합"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조직은 1950 년대 초 결성된 것으로 민족주의적이고 반공 이념을 내세우는 장교들이 은밀히 만든 단체였다. 이 모임이 강제 해산되자 1958 년 더 극단적으로 민족주의적이고 반공주의적, 반민주적인 젊은 서민 출신의 장교들의 모임인 소위"새로운 장교들의 민족연합"이 형성되었다. 그들의 목표는 내전이 종결된 이후 커져가는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을 막아내고 민족, 고향 그리고 민족주의 우파 진영, 즉 사회적 종전 체제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4 독재 체제는 대규모의 체포령을 내리고 비상 사태를 선포하였다. 국왕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첫 번째 군사 정부를 임명해야 했다. 그는 나중에 자신을 따르는 장성들과 함께 군사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시도를 하지만 실패한다. 군사 정부는 초기에 외국 자본의 유치, 국민총생산의 증가 등 몇 가지 경제적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로부터 이렇다 할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농민의 부채를 탕감해 주는 것처럼 일반 민중에게 유리한 정책 역시 군부가 기대했던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내지는 못하였다. 민족주의 우파를 포함한 국가의 정치 지도층은 처음부터 군사 정권에 단호하게 저항하였다. 국제사회 또한 그리스에 군사 정부가 성립된 것에 경악하고 독재 정치에 대해 비난하였다. 유럽 민주국가의 정부들, 유럽의회 그리고 빌리 브란트, 올라프 팔메와 같이 영향력 있는 유럽 정치가들도 군부 체제에 반대하며 해외에 거주하는 그리스인들이 펼치는 반독재 운동을 체계적으로 지원하였다. 그 결과, 독재 체제는 내외적으로 어떤 지지 세력도 갖지 못한 채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 또한 그리스 군부 내의 왕정파와 독재파 간의 분열도 지속되었다. 쿠데타를 주도한 대령들은 전군을 통제할 능력이 없었다. 그것은 소위"해군의 운동"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증명해 주었다. 1973 년 해군 장교들이 봉기하여 군부 전복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의 봉기로 인해 군부가 전군에 대한 통제력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 사이 군부는 두 번의 국민투표를 통해 왕정을 폐지하고 군부가 얻지 못한 정당성을 국민으로부터 직접 얻어내기 위해 개헌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국민투표는"선거 코메디"로 전락하였고 이로 인해 군부의 권위는 더욱 실추하여 그들이 더 이상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상황에 처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파파도포울로스는 군부 체제가"소진되었음"을 인식하고 제한된 범위에서 개방과 자유화를 허용하는 절차를 도입하였다. 그는 정치인들 중에서 유일하게 군부 체제에 대해 호의적이었지만 별로 비중이 없던 자유주의자 스피로스 마르케치니스를 수상으로 임명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군부 체제의"자체적인 전환"의 틀 내에서 마르케치니스는 서서히 민주주의로 복귀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도록 의회 선거를 공포하는 과제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하였다. 그 이유는 마르케치니스가 스페인 국왕 후안 카를로스와 같이 뛰어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군부 장교들 내"강경파"가 군부 체제가 지속되기를 원하였기 때문이었다. 1967 년 4 월 쿠데타 주도 세력 중 한 명이었던 데메트리오스 이오안니데스는 이러한 분위기를 이용하여 파파도포울로스가 추진하던 자유화 계획을 철회하기 위해 그에 반대하는 군사 봉기를 조직하였다. 5 "마르케치니스의 실험"이 온건한 독재를 가져왔을지, 그리고 통제된 독재 하에 민주적 전환이 가능했었을지 오늘날의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리스 독재 체제의"자체적인 전환"의 실패로 인해 싸이프러스의 비극이 발생하였다는 것은 알고 있다. 지중해에 있는 섬 싸이프러스는 1960 년까지 영국령이었다. 이 섬에는 다수의 그리스계 주민들과 소수의 터어키계 주민들이 살고 있다. 이오안니데스의 극단적인 민족주의적 체제는 군부 내부의 분열을 극복하고 대중의 인기를 얻기위해 싸이프러스를 그리스에 복속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를 위해 이오안니데스는 싸이프러스의 대통령이었던 마카리오스 주교에 반대하여 군사를 동원하고 1974 년 6 월 15 일에 그를 해임하였다. 그에 대항하여 싸이프러스의 소수 터키계 주민의 보호자로 자청하는 터키가 군사적으로 간섭하여 섬의 북부를 점령하였다. 싸이프로스에서 이오안니데스가 시도한 쿠데타는 그리스 군대가 얼마나 약체인지를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군부 체제가 정치적으로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당시 그리스와 터어키는 군사적 충돌 직전까지 갔었다. 아무런 해결책이 안보이던 상황에서 이오안니데스가 정치가들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1974 년 7 월 24 일 파리에 망명해 있던 민족주의 우파의 지도자이며 전수상이었던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가 그리스가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을 이끌기 위해 귀국하였다. "즉각적이고" 지속적인 체제 변동 민주주의로 복귀하는 과정은 즉시 실행되었다. 그것은 장기적인"체제 전환"이 아니라 즉시 실시된"체제 변동"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로 복귀하는 과정이 비록 즉각적인 것이었지만 체제 변동을 통해 겨우 시작된 민주화로 가는 길은 멀고 긴 과정이었다. 카라만리스는 1974 년 7 월 24 일"민족 연합"이라는 과도 정부를 구성하고 자신의 정치적 진영을 넘어 광범위한 정치세력들로부터 그리스를 민주주의로 이끌기 위한 합의를 이끌어 냈다. 유명한 작곡가이자 민주적 좌파 정당(EDA)의 당원이었던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가 쓴"카라만리스 아니면 탱크"라는 슬로건은 당시 그리스의 정치적 분위기와 복잡한 상황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처럼 위험한 상황에서 카라만리스가 자신의 과제를 감당할 수 있는 정치가임을 보여주었다. 1974 년 그가 제안한"왕정 또는 공화국"이라는 문제를 두고 실시한 국민투표에서 유권자들의 절대 다수(69 퍼센트)가 왕정 폐지를 택했다. 좌파 세력뿐만 아니라 카라만리스 자신도 더 이상 분리되지 않은 정치적 권력을 정착시키고자 하였고 이를 통해 내전 이후"괴로워하는 민주주의"가 형성되었던 제도적 원인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카라만리스는 군사 독재가 붕괴된 지 몇 달 후 공산당을 합법화하면서 정치적 발전을 6 이러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초석을 놓았다. 이것은 과거에"괴로워하는 민주주의"가 등장할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이 공산주의의 위협을 아주 위험한 것으로 낙인 찍었기 때문이다. 공산당 합법화는 그들을 도구로 악용할 기반을 제거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산당 자체도 수십년에 걸친 비합법적 활동을 접고 합법적 투쟁을 해야만 하도록 만들었다. 1974 년의 체제 변동으로 인해 독재가 붕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전 이후의 권력 체계도 붕괴되었다. 체제 변동은 결국 국가의 정치적, 사회적 생활에서의 "단절"을 표시하는 것이다. 새로운 대중 정당들이 출현했는데 카라만리스는 우파 보수적인 국민 정당인 신민주당을,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오는 중도 좌파의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인‚ 파속(PASOK)’을 창당하였다. 창당 초기에 파속은"좌파의 좌측"에 서 있다고 자주 평가 받았다. 신민주당과 파속은 현재까지 이념적으로 삼분된 정당 체계에서 번갈아 가며 정부를 구성하고 있다. 이 두 정당이 등장했다는 사실과 정당 체계의 분화, 비중있는 반체제 정당의 부재, 그리고 정당 간 경쟁으로 발생하는 원심적 역동성 등은 그리스 정치에서는 새로운 현상이었다. 정당 체계의 양극화가 지속됨에도 불구하고 정당 간 경쟁은 비교적 원만한 상태를 유지하였으며 정부의 교체 또한 정당 간 합의에 따라 이루어졌다. 내전 이후의"철저한“„우익 국가“는 이제 사라졌고 정당들이 교체해 가면서 정부와 여당을 구성하는 정당민주주의가 자리 잡았다. 독재로 인해 국제적으로 오랫동안 고립되었던 그리스가 다시 국제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1981 년에는 유럽공동체의 정회원이 되었다. 유럽 연합의 열 번째 회원으로써 그리스는 현재 통합된 유럽의 핵심 멤버이다. 그리스가 유럽연합에 가입하는 문제를 두고 내부에서는 정당 정치적인 갈등이 있었다. 1981 년 정부 여당이었던 파속은 원칙적으로 유럽연합 가입에 반대하면서도 가입 조약을 비준하였고 1990 년대에는 그리스가 유럽 통화연합에 가입하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리스는 유럽연합의 일원이면서도 전통적인 사회로 아직 남아있다. 가족과 교회가 사회적 생활의 중심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상황이 정상화된 이후 새로운 생활양식이 등장하였다.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국민들은 소비자 성향을 보인다. 새로운 통신 수단의 도입, 특히 텔레비전과 인터넷의 등장은 전통적인 생활양식을 바꾸어 놓았다. 교육 영역의 확대로 젊은 세대에게 사회적 상승 기회가 많아지고 사회적 유동성이 증가하였으며 궁극적으로 전통적인 사회의 여러 가지 제약이 느슨해졌다. 7 이러한 폭넓은 정치적, 사회적 변동은 언급할 만한 갈등 없이 이루어졌다. 그리스 사회에 과거와 마찬가지로 근대화의 진전을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이 아직까지 존재한다는 것을 볼 때 이러한 변화는 더욱 인상적인 것이다. 그리스에는 현재 전문 서적에서"수비적 문화"라고 일컫는 과거의 문화와 이 문화를 기반으로 형성된"수비적 사회"라고 부르는 문화를 주도하는 전통적 세력들이 여전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체제 변동은 결국 내전 이후의 이념, 제도, 정치 과정 그리고 생활 방식과의 단절을 의미하지만, 일정 분야에서는 이러한 가치들의 연속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1990 년대에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다시 표면으로 부상하였다. 동구권 공산주의 붕괴와 발칸 지역의 새로운 질서 성립은 문화적 불확실성과 민족적 두려움을 강화시켰다. 일부 좌∙우파의 정치 엘리트, 정당과 유권자, 그리고 그리스 정교도 중에는 슬로보단 밀로세비치의 종족적 공산주의와 기독교그리스 정교파 세르비아와 연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 연대는 구유고슬라비아 지역에"마케도니아"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국가를 승인하는 것에 반대하는 대중 집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왜곡된 주장을 내세워, 마케도니아는 전적으로 그리스의 영역이기 때문에 "마케도니아"라는 이름은 그리스와 그리스인들만이 사용할 수 있다고 고집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생활 방식과 태도가 자유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치보수주의와 폐쇄적인 세계관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1990 년 중반부터 종교성과 교회 신도가 증가하였고, 외국인 혐오증이 유럽 어느 국가에서보다 강력하며(유럽바로메터 1997), 절대 다수가"법과 질서"의 가치를 받아들이고 있다(80 퍼센트 이상, 반면에 스페인은 60 퍼센트 네덜란드는 55 퍼센트). 정당보다 교회와 군대가 국민으로부터 더 많은 신뢰를 받고 있으며, 이들은 정당과 의회에 비해 훨씬 영향력이 많은 기관으로 평가받고 있다. 1974 년의 체제 변동으로"철저한""우익 국가"는 사라졌다. 1980 년대 초가 되면 그 자리에 파속과 새로운 민주주의 간의"정당 카르텔"로 이루어진 연줄 국가가 들어서게 된다."철저한""우익 국가"가 수십 년 동안 좌파를 정권에서 제외했기 때문에 이제는 좌파가 공직을 점령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으로 파속 정부는 1980 년대 국가를 접수하였고 그 당시 파속의 당원증은 국가 공직에 진출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간주되었다. 2004 년 정권을 잡은 신민주당도 이와 동일한 요구를 하였다. 20 년 동안 야당이었던 신민주당 당원들이 과거에 공직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이들이 공직을 점령하고자 하였다. 파속과 신민주당은 서로 8 국가를 이용하고 있다고 비난하지만 그 누구도 정치에서 국가와 정당의 연줄주의를 제거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체제 변동: 변동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것. 소극적 과거청산 대령들이 세운 4 월 체제는 적대 세력들이 강력하고 단결했기 때문이 아니라 체제 자체의 약점 때문에 무너졌다. 민주주의로의 전환은 민주주의자들과 대령들 간의 협상이나 양보도 없이 이루어진 것이다. 민주 진영의 정치 세력들은 민주화 프로젝트를 스스로 구상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정치적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것이 민주주의를 공고화하는 데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정치적, 사회적 자기 성찰을 하는데, 그리고 과거청산 작업에 도움을 준 것은 아니다. 독재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정당들이 어떤 실책을 범하였고 어떤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는가, 각 당과 정치적 진영들의 지도부가 무엇을 잘못 했는가 하는 문제들에 대해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채 이에 대한 피상적인 해답만 내려질 뿐이다. 과거의 실책에 관해 자기 성찰을 했더라면 자신의 실책과 소홀했던 점뿐만 아니라 내전 이후와 독재 이후 각 정파들 간에 지속성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보았을 것이다. 실책과 미비한 점에 관해서: 그리스는 내전이 종결되었을 때 정치적, 이념적으로 심각하게 분열된 사회였다. 사회의 분열은 정당 정치적 세력 간의 합의, 정당과 연정 간의 협력, 그리고 하층 국민들을 도와주는 정책이 필요하다. 유럽의 정치사에는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과 같이 사회 정책적으로 분열되었으면서도 협상과 합의를 통해 성공적으로 통치한 사례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리스의 경우 정치적, 이념적 분열은 정당 간의 극단적인 적대감 즉 안타고니즘을 가져왔을 뿐이었다. 그것은 결국"괴로워하는 민주주의"를 탄생시키거나 국가를 통치 불가능의 상태로까지 몰아가는 결과를 가져왔다. "병렬 국가""병렬 헌법" 그리고 다양한 반의회적 세력권 등은 끝없는 정치적 적대주의와 민주주에 대한 괴로움의 일차적 원인이 아니라 그 부산물이었던 것이다. 정부 차원에서 일어나는 극단적 분열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1989 년부터 1993 년 사이에 있었던 것처럼 국가가 일시적으로 통치불능 상태에 빠지거나 교육, 경제 분야에서 현재 개혁이 정체하고 있는 것도 결과적으로 보면 아직까지 지속되는 정치적 분열의 산물이다. 파속과 신민주당이 정치 프로그램에서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없으면서도 마치 정치적, 이념적으로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부풀려서 인위적으로 위기를 만들어내 혼자만이 정권을 잡아야 한다는 요구를 정당화하려 한다. 9 자기 비판의 부재에 관해서: 그리스의 정치적, 사회적 엘리트들은 독재가 등장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져야할 책임에 관해서 제대로 고민을 해 본 적이 없다. 신민주당은 자신이 마치 새로운 정당인 것처럼, 그래서 독재 이전의 보수 우파인 민족주의 과격 연합(ERE)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신민주당 자체는 당연히 새로운 정당이다. 그러나 이 정당은 민족주의 과격 연합의 전통에서 출발하였다. 신민주당은 이러한 유산을 부인함으로써 독재 체제가 등장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주었던 과거의 실책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자 한다. 이렇게 신민주당은 자신을 과거로부터 분리시켰고 이는 아주 의도적인 결단이었다. 이들은 일상의 정부 업무에 집중하였고 거대한 정치적 목표를 세웠다. 민주화, 경제 성장, 유럽공동체로의 통합 등 신민주당의 당수 카라만리스가 추구하는 것들이 목표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과거는 청산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들은 정치적 반대자들, 특히 파속에게 자신들의 과거를 들추고 끊임없이 독재 이전의 ERE, 그리고"우익 국가"와 관련지어 공격할 빌미를 제공했다. 자유주의 중도파에서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는 문제와 관련, 신민주당이 안고 있던 어려움은 바로 이렇게 해결도, 청산도 하지 못한 과거 문제가 원인이 될 수 있다. 신민주당이 그리스 유권자들에게 새로운 정당으로 다가갈 수 있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성찰을 동반하는 앞으로의 도약이다. 파속의 경우에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비록 구 중도연합에서 출발하였고 중도 자유주의 유권자들의 많은 수를 끌어모았지만 파속은 실제로 부담스러운 과거의 짐이 없는 새로운 정당으로 등장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로서 파속은 독재 이전의 중도연합으로부터 거리를 두었고, 자신의 정치적 극단주의를 온전히 펼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파속은 과거 청산 문제에 대해 아주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파속의 언술은 아주 과격한 것이었다. 예를 들자면,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큰 갈등 없이 진행되었다는 것이"나토의 감시에 변화"가 있었던 것일 뿐이고 미국과 우파가 그리스의 독재에 책임이 있다는 등의 비난은 부분적으로는 맞지 않는 주장이며 복잡한 정치 상황을 전혀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극단적인 주장들은 파속의 좌파 과격주의와 반미주의를 강화하고 국민들에게 반우익적인 반미 감정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결국 과거 문제가 정치적, 이념적 그리고 선거 전략적 목표를 설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파속은 절대로 과거를 청산하고자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에필로그: 소극적 과거 청산에도 불구하고 실현된 민주주의의 공고화 10 소극적인 과거 청산 작업은 군부 독재 체제에 대해 이중적인 평가를 낳는 결과를 가져왔다. 80 년대 말 31 퍼센트의 국민이 독재가"그리스에 좋은 결과와 동시에 나쁜 결과도 가져왔다"고 응답하였다. 20 년이 지난 2007 년의 조사에서는 독재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눈에 띠게 증가하여 국민의 61 퍼센트가 독재 시기에 그리스가 잃은 것뿐만 아니라 얻은 것도 있다는 점에 전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동의하였다. 독재를 이중적으로 평가한다거나 또는 권위주의 지배 체제를 미화한다는 것이 민주적 체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비록 국민의 다수가 대통령제 정부 형태와 직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을 순수한 의원내각제 정치 체제보다 선호한다고 하지만, 88 퍼센트의 국민이 민주주의를 다른 어떤 국가 형태보다 옹호하고 있다.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공고화 되는 데에는 유럽 공동체 가입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것은 그리스의 유럽연합 가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결말지은 수상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의 공적이다. 그의 지도적인 인품은 유럽의 정치 지도자들에게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로 인해 그리스는 유럽 공동체에 가입하는 것이 너무 성급한 결정이라고 여기던 브뤼셀의 기술 관료의 반대를 무시할 수 있었다. 그리스가 유럽연합에서 받은 다양한 경제 보조의 규모는 아주 컸다. 유럽연합은 매년 그리스 국민총생산의 약 4 퍼센트가 되는 액수를 지원했다. 국가 발전을 촉진하고 민주주의를 개선하고 공고화한 것은 경제적 원조와 더불어 그리스가 유럽의 제도적 자산을 수용한 덕이었다. 결국 그리스의 경험에서도"제도가 중요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정치적 정당 체계 등의 제도적 개선은 민주주의 안정화와 이념적 극단화를 제한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념적 양극화와 과거의 유산이 더 이상 다원적, 민주적 제도에 반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정치의 제도화와 민주적 요구 사항들은 정치적 행위자들의 권력욕과 극단적인 이념 대립을 완화시켰다. 민주주의 공고화에는 제도만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서 상징성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상징적 정책이 중요하다"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실질적","생산적인 정치"뿐만 아니라"의례적이고""연출적인 정치"도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한다는 것이다. 파속의 창설자이자 11 년(1981-89, 193-96) 동안 그리스의 수상이었던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오와 같은 카리스마 있는 정치가는 상징적 정치의 장인이었다. 그는 의도적으로"특권층"과"특권이 없는 사람"들,"민족적, 독립적이고""외세에 (미국과 서유럽) 종속된 행위자"들로 이루어진 가시적 세계, 즉 환상의 세계를 연출하였다. 그가 연출한 양분된 가시적 세계를 통해 파판드레오는 국민의 감정을 동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권자들를 모을 수 있었다. 또한 반우익 11 유권자들의 극단적이고 공격적인 잠재력을 완화시켰다. 파판드레오의 가시적 세계가 유권자의 대부분에게는 정치적 현실이 되었던 반면에 그는"실질적인"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결정들을 내렸다. 그리스는 안정된 민주 공화국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민주화와 근대화 과정은 앞으로도 계속 되어야만 한다. 국민들은 근대화와 유럽화에 대해 아직도 많이 두려워하고 있고, 극단적인 반근대화론자들과 반유럽주의자들은 이런 두려움을 부추기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화론자들이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피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민주주의를 향해 가는 모든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용감한 사람들이다. 참고 문헌 Edelman, M., Τhe Symbolic Uses of Politics ,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Urbana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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